러그는 그 위에 이리저리 발자국을 남겨 보아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먼지 나서 기관지에 좋지 않으니 치우라는 잔소리를 수백 번 들었지만, 차가운 바닥에 발바닥이 닿는 느낌이 싫다고 떼를 쓴 보람이 있었다.
보들보들한 러그에 발바닥을 비비며 손톱을 물어뜯던 나는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거실 위 먼지 가득할 조명등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그래, 이렇게 내 인생을 보낼 수는 없어. 길게 사는 것까진 욕심나지 않지만, 짧더라도 이렇게 먼지만도 못하게 사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돼.
“안 되겠어.”
수백 번을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니다. 다짐했다. 여기를 떠나야겠다. 더 이상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녀석과 함께 살 수는 없다. 물론, 여기는 우리 부모님이 주신 내 집이니까 내가 나가는 게 아니라 녀석을 내쫓는 쪽이 맞겠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는 일이 없어 집에서 놀고먹는 것에만 열중하다 보니까 사고회로가 늘 그딴 식이지.’
그렇게 날 힐난했던 녀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때. 어차피 내 인생은 그렇게 생겨 먹었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그랬으니까,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럴 것이다. 그걸 잘 알면서 왜, 너는.
“이번에야말로. 그만할 거야.”
다급히 휴대폰을 찾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게임을 하느라 쥐고 있던 게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를 않아,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위에서 똥 싸고 오줌 쌌던 걸 받아 주었던 소파는 이제 낡아서 방석을 들출 때마다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래. 엄마 말대로 버릴 때도 됐다. 이렇게 털어서 청소하기 귀찮기도 하고, 안 그래도 러그도 있는 판에 기관지에도 하등 좋을 리 없고.
다만 음…. 정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집 거실 한가운데엔 늘 이게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진다는 게 어색했다. 상상만으로도 묘하게 싱숭생숭해서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여태껏 버리지 못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걸터앉은 소파의 껍질을 쥔 나는 새삼 느꼈다. 이 모든 게 다 미련이었다는 걸.
영원한 게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이 소파는 버릴 거고, 나도 그 길로 도망칠 거야. 여기서 벗어날 거야. 이 소파의 수명이 다한 것처럼, 이 지긋지긋한 인연도 진작 끝냈어야 했던 거니까.
안 그래?
“…재희야.”
연결은 늘 그렇듯 쉽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재다이얼을 누르고 또 눌렀다. 세 번째 재다이얼을 누르기 직전, 연결된 수화기 건너편에서 날 반긴 건 녀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당직실이 아닌 모양이었다. 밥 먹으러 나왔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타인의 목소리에 난 마치 녀석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소외감이 들었다. 목구멍 안이 묘하게 뻑뻑해졌다.
“여보세요?”
- 어 현아. 말해. 듣고 있어.
…현이 같은 소리 하네.
***
수화기 너머의 녀석을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지적인 미남’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모습 그대로, 안경을 꼈음에도 높은 콧대에 날카로운 눈매. 연이은 밤샘과 야식에도 군살이라곤 없는 몸에 복근까지. 덧붙여 너른 어깨는 가운을 입는 의사란 직업에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가운이 잘 어울린다며 호들갑을 떠는 엄마한테 뭔 소리냐며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속으론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염색이나 파마 한 번 한 적 없는 녀석의 다갈빛 머리는 늘 왁스로 스타일링한 것처럼 적당히 웨이브가 져 있었고 녀석은 그걸 다행으로 여겼다. 집에 못 들어가는 것을 넘어서 씻지도 못하고 응급실 근무를 설 때나, 열 시간이 넘는 수술을 마치고 나와서도 눌리거나 기름진 티 없이 늘 멀끔해 보였으니까.
지금의 너도 여전하겠지. 백의의 미남. 안경을 추어올릴 때 특히 이지적인, 그 잘생긴 의사 선생님. 모두에게 다정하고 매너까지 좋은. 그래. 이렇게 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까지 전부, 녀석의 본모습이 아니다. 녀석은 지금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있다. 멋진 한재희 의사 선생님을 말이다.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녀석의 실체를 모른다. 억울하게도 나만이 녀석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그 가증스러운 연기가 혐오스럽다 못해 절로 뛰는 심장에 나는 버릇처럼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건 왜 또 뛰고 지랄이야. 눈치도 없냐. 응?
어쩔 수 없다. 내 심장은 원래 내 말 안 듣기로 유명했으니까. 무려 태어났을 때부터 말이다. 난 호흡을 가다듬었다. 통화가 오래 이어져 봤자 내 쪽이 손해다. 어서 빨리 본론을 꺼내야 했다. 나는 손까지 덜덜 떨어 가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자. 나…. 나, 정말 힘들어. 이제, 너랑….”
하지만.
- 응, 나 오늘은 들어가. 그런데 늦으니까 밥 먼저 챙겨 먹고. 현아.
…이 새끼, 내가 하는 말 또 전부 무시하고 있어. 머리가 핑, 하고 돈다. 약간 몸에 오한도 도는 것 같다. 너무 빡쳐서 혈압이라도 오른 걸까.
“…야.”
- 오빠가 들어갈 때 치킨 사 갈게. 알겠지?
“야, 이 씨발 새끼야!”
녀석의 낮은 웃음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탈력감에 나는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가죽이 조각나 툭툭 갈라지는 소파 위에서 나는 깜빡거리는 그 이름 석 자를 쳐다보았다.
뭐, 본명으로 저장할 정도로 우리가 낯선 사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다. 차라리 좀 낯설어진다면 좋으련만. 나쁜 새끼, 진짜… 진짜 씨발 새끼.
한재희. 스물아홉. Y대학 병원 심혈관 센터 레지던트 이제 3년 차.
그리고 나의 동거남이자, 나의… 첫사랑.
***
한재희는 나와 같은 한 씨지만 절대로 형제가 아니다. 물론 사촌도 아니고, 먼 친척마저 아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다.
뭐, 이렇게 말하면 서운해할지도 모르니까 정정하자면, 우리는 가족이라면 가족이고 식구라면 식구다. 등본 떼면 동거인으로 나오겠지만. 그 동거인의 사흘 만의 귀가에 나는 쉴 새 없이 종알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대화할 상대를 만나 입이 풀린 것도 있지만, 아까 먼저 끊은 전화를 복수하겠다는 의도가 더 컸다.
“안 되겠어. 나 내려가서 살래.”
“너까지 지랄하지 마라. 오늘 기분 최악이야.”
“네가 언제 최악 아닌 적 있었냐? 그래그래. 너 힘드니까 난 내려가서 엄마 아빠한테 지랄할게.”
“저녁은 먹었냐? 약은. 너 찾아보고 안 먹었으면 뒈진다.”
남자 둘이 살기엔 퍽 넓은 집. 물론 내 돈으로 마련한 것은 아니다. 시골에 내려간 엄마 아빠가 둘이 살라며 쿨하게 넘겨주고 간,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옮긴 적 없는 내 거처, 내 ‘집’. 그곳에서 한재희와 나 둘이 살고 있다. 이틀에 한 번 집안일을 봐주시는 이모님이 오시지만 그 외에는 늘 둘이다. 아니, 거의 하나라고 봐야 할까. 왜냐하면, 난 한가한 집돌이 백수였고 한재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쁠 만하다. 녀석은 의사니까. 그것도 모두가 기피한다는 흉부외과의. 이제 3년 차가 되어 그나마 숨을 돌리는 모양이었지만.
한재희가 인턴을 시작한 이후, 지난 3년은 정말 헬 게이트가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주일 내내 병원에서 먹고 살다 못해 심지어 집돌이인 내가 녀석의 옷을 챙겨 병원에 가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병원 가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내가 제 발로 말이다.
그냥 편한 과 좀 가지. 잘난 한재희는 본과에서도 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어느 과로 간다 한들 교수의 사랑을 받아 앞길이 창창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돈 잘 벌리고 유명한 과를 다 제치고서 굳이 힘들고 돈 안 되기로 유명한 흉부외과로 갔으니, 거기 교수들은 녀석이 얼마나 예뻐 보일까.
게다가 녀석은 운도 좋았다. 개인 병원을 차리기 어려운 전공 특성상 교수 아니면 말라 죽는다던데, 말이 쉽지 교수 임용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서 소위 말하는 줄타기가 엄청 치열하단다. 하지만 그 위로도 아래로도 한재희만 한 인재가 없다는 재수 없는 자랑은 애석하게도 모두 사실로, 교수까지 탄탄대로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그러면 좀 시기 질투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드라마에선 그러던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환자도 동료도 교수도 모두 다 녀석을 사랑한단다. 녀석이 없으면 다들 죽겠다고 난리란다. 실제로 오프인 날에도 하도 불러 대고 놓아주질 않아서 아침에 일어나 보면 녀석은 없고 늘 문자만 남아 있었다. 물론 내용은 욕만 한가득. 대체 왜 나한테만 지랄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한재희는 심혈관 센터의 촉망받는 인턴이었고 레지던트이자 전문의, 그리고 훗날 교수로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환자들에게도 다정하고 유능한, 최고의 의사 선생님.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 젠틀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고, 게다가… 생긴 것도 사실 나쁘지 않다.
나는 샤워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는 한재희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 내가 아는 한재희로 돌아왔다. 목 늘어난 티에 편한 바지. 안경도 벗고 머리도 덥수룩한 그런 한재희. 익숙한 녀석의 차림새에 기분이 좀 누그러졌다.
사실 난 녀석의 하얀 가운이 싫다. 소독약 냄새도 싫다. 그 퍼런 수술복도 싫다. 오히려 다 닳고 해져서 이제는 걸레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녀석의 편한 옷차림이 좋다. 다들 모른다. 한재희의 너른 어깨는 이런 후줄근한 티를 입을 때 더욱 부각된다는 것을.
안경을 벗은 얼굴도 마찬가지다. 특히 눈. 안경을 쓰면 이지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좀 날카롭고 재수 없어 보이는데, 벗으면 이미지가 확 달라진다. 미용실에 자주 못 가는 탓에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을 가리곤 하는데, 그 머리칼 사이로 언뜻 보이는 갈색 눈동자와 가로로 긴 눈매가 무척 또렷하다.
혼자 길을 걷다 보면 ‘도를 아십니까’에게 몇 번이나 붙들릴 정도로 크기만 하고 흐리멍덩한 내 눈과 달리, 한재희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게 딱 공부 잘하는 티가 났다. 나는 그게 참 부러웠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에 돌아온 한재희의 모든 게 마음에 들고 부럽다는 건 아니다.
“라인 하나 못 딴다고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난리야.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이.”
…보란 듯이 이렇다. 내 앞에서는.
들어와서 씻자마자 거실 탁자에 떡하니 통닭을 펼쳐 놓은 한재희는 스포츠 뉴스를 보며 그것을 척척 뜯어 먹고 있다. 그것도 내 앞에서.
참고로 난 기름진 건 거의 먹질 못한다. 튀김옷 뗀 속살이라도 달라고 하고 싶지만 지난번 피검사 수치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턱도 없었다. 게다가 그 검사를 수행하는 게 바로 이 녀석이기에 달라고 해 봤자 벽에다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죽고 싶어 환장했냐는 욕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요사이 집 밥은 병원 밥과 메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녀석이 이모님한테 일러바친 결과다. 한재희는 내가 무척이나 걱정이라며, 식단에 신경을 써 달라고 간곡한 말투로 연기했겠지. 그럼 이모님은 완전히 녀석의 편이 되어 버린다. 내가 항변해 봤자 ‘재희 학생이 정현 학생을 얼마나 생각하던지 몰라’하시는 이모님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씨발…. 결론은 못 먹는다는 소리다. 한재희는 그런 내 처지를 알면서도 내 앞에서 이렇게 입에 기름을 묻혀 가며, 야무지게 포식을 하고 있었다. 더러운 사람이 피해야지 싶어 시선을 돌려도 냄새는 피할 도리가 없다. 이거야말로 생고문 아닌가. 내가 치킨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러니까 내가 시비를 안 걸고 배기겠냐고.
“그러니까 그냥 성형외과 가지 그랬냐. 빨리 가서 바꿔 버려. 바꿔 달라 해.”
아무리 백수지만 나도 알고 있다. 도중에 다른 과로 수련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또 욕을 저렇게 해서 그렇지 한재희가 절대로 과를 바꾸지 않을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랄하고 싶은 내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녀석의 속을 긁었다.
“…너는 오늘따라 왜 자꾸 지랄인데. 어?”
저거 봐. 욕질하는 꼬라지. 아까는 뭐랬더라, ‘현아’? 현아 좋아하고 자빠졌네. 이게 녀석의 본 모습이었다. 다들 속고 있다니까.
지난 3년이 괴로웠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이 싫은 건 둘째 치고, 병원에 속옷 셔틀을 갈 때마다 가식적인 한재희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 왔어, 우리 정현이.’
날 보자마자 주변의 동료들이 하는 소리라곤.
‘저는 여자 친구 전화 받는 줄 알았잖아요.’
‘한 선생님, 워낙 다정하시니까.’
정말 역겨울 정도였다, 집 바깥의 한재희는. 그것에 비하면 지금이 낫긴 낫지만….
좀, 나랑 있을 때라도.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런 ‘척’이라도 해주면 덧나냐? 씨발 새끼….
절로 나오는 한숨에 고개를 젓는데, 순간 날 올려다보던 녀석의 눈동자의 빛이 바뀐다. 불길하다.
왜, 또 왜 저래. 뭐야.
“너 열 있지.”
“…없는데.”
“이리 와 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한재희는 기름이 번들거리던 손을 닦고는 한 손은 내 이마 위에, 다른 손으로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하지 말라고 발로 차 보려 했지만 내 반항은 통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170cm 언저리인 나와 다르게 한재희는 키가 180cm가 넘었다. 키를 비롯해 손도 발도 다 나보다 길고 컸다. 억울해. 분명히 어렸을 때는 체구도 비슷했는데. 언제 저렇게 큰 거야. 비겁한 새끼, 저 혼자 다 크고….
여튼, 표정이 변한 녀석은 갑자기 자리를 떴다. 씨발…. 이건 주사란 뜻이다.
자포자기한 내가 소파에 몸을 눕힐 동안 주사제니 뭐니 도구를 가져온 한재희는 치킨을 뜯던 종전의 모습과 눈빛부터가 달랐다. 근무 모드가 켜졌다는 소리다. 여긴 병원 아니고 집인데.
이 눈빛을 한 한재희에겐 내가 무슨 지랄을 하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한재희는 늘 쓰는 노란 고무줄로 내 팔뚝을 죄었다. 그 주변 살들은 이미 얼룩덜룩해진 지 오래였다.
내 몸은 흉이 잘 진다. 멍도 잘 든다. 그래서 팔뚝엔 피멍투성이다. 뭐,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인데, 내가 침대에서 자다가 잘 굴러떨어지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잘 자빠지기 때문이었다. 멍이 지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게 더 문제다. 살성이 애초에 좀 고무 같다고 해야 하나. 탄탄하기보단 물렁하다. 말라서 다행이지 아니면 쭉쭉 떡처럼 늘어나는 살이라고 한재희가 그랬다.
녀석은 그런 내 팔뚝이 싫은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익숙해질 때도 됐지 않았나 싶지만. 내가 보기에도 좋은 꼬락서니는 아니니까 뭐 이해는 한다. 살성이 그런 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주사를 달고 살았으니 어쩔 수 없잖아.
그것을 빌미로 주사라도 좀 피해 보려 하지만 소용없다. 사실 녀석의 주삿바늘 때문에 남은 멍은 몇 개 안 된다. 인정하기 싫지만, 녀석은 주사 하나는 잘 놓으니까. 그건 내가 녀석을 합리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게다가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이렇게 오버까지 하니까.
“따끔, 한다….”
병신, 간호사 같은 소리 하네.
드레싱을 하고 익숙하게 주삿바늘을 꽂는 한재희의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건 녀석이 무척 집중했다는 증거다. 난 그 얼굴을 아주 많이 봐 왔다. 어렸을 때 로봇을 조립할 때도. 시험공부를 할 때도 물론, 부엌에서 서툴게 칼질을 할 때도 그랬다. 메스로 먹고 산다는 놈이 과도로 사과도 못 깎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내 팔에 주사를 놓는 한재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살짝 눈을 감았다. 기분 탓인지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진짜 열이라도 있나…? 아까 오한이 들긴 했는데.
“올라가서 자라. 내가 너 아까 깝칠 때부터 알아봤어.”
“여기서 잘래…. 귀찮아.”
“야, 너 무겁다고. 야, 한정현!”
네가 나 아프다고 해서 그래 새끼야… 라고 쏴 주고 싶었지만, 드레싱한 솜을 누르는 한재희의 손짓에 따라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대강 누워 있으면 알아서 침대에 옮겨 주겠지. 내 방은 2층이니까 고생은 좀 하겠지만, 솔직히 나 정도는 무겁지도 않잖아, 뭐.
여하튼 이게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다. 녀석이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늘 그랬다. 내가 이렇게 수다를 떨다 소파에서 잠들면 한재희는 잠든 날 업어다 온수 매트로 적당히 데워진 이불 속에 눕혀 줄 테니까. 이 정도 고생은 해야지. 일주일에 두세 번 돌아오는 주제에, 이 정도 노고는 해야 너도 동거인으로서 역할 수행 아니겠냐고….
“진짜 뭐하냐. 잘 거면 특진비는 주고 주무시지?”
…특진비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레지던트 주제에, 라는 뜻을 담아 눈을 힘껏 떴지만, 기대어 누운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한재희는 애초에 내 의사를 물을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소름 끼치도록,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입술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든다.
눈을 감기 전 보인, 한재희의 만면에 물든 저 만족스러운 미소.
그래, 씨발. 내가 저 미소 때문에….
“으음….”
닿는 입술의 표피가 까칠했다. 마치, 녀석의 성격처럼. 하지만 그 속으로 치밀어 오는 혀는 부드러웠다. 음, 하고 자연스럽게 신음하는 내 목 뒤를 쓰다듬으며 녀석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마치 메스로 살을 잘라 내어 내 심장을 꺼내 이리저리 훑어보듯. 입술 사이를 가르고 내 안쪽 살들을, 점막을 훑어 내리고 입 안 구석구석을 쥐고 살폈다. 그리고 긴장해 바짝 굳은 내 혀를 말아 오는 감촉까지. 전부 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이건 네… 어느 부분을 닮아 있을까.
모르겠다. 졸려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 들려오는 녀석의 나지막하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다, 모르겠다.
“자라, 한정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고.
***
…그래, 우린 키스하는 친구 사이다.
언제 처음 서로를 알았냐고? 인지 능력의 문제라면 뭐 이견이 있겠지만, 서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친구로 묶인 건 세포가 생성되었을 그즈음부터였다. 즉, 태어나서 한순간도 친구가 아닌 적이 없던 셈이다.
엄마의 뱃속에 자리 잡은 세포에 지나지 않았던 그때부터 우리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갈 정도로 친했던 두 부부는 비슷한 시기에 한 임신에 기뻐하며, 한편으론 아쉬워했다고 한다. 둘 다 아들이라는 사실에.
만약 한쪽이 딸이고 한쪽이 아들이었다면 자연스럽게 혼담도 오갔을 거라는, 진실로 소름 돋는 이야기를 나는 귀에 박힐 정도로 들어 왔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 친분은 우리가 폐호흡을 시작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두 달 먼저 태어난 내가 인큐베이터와 신생아 중환자실을 오가던 그 즈음에 한재희가 태어났다. 겨울과 봄. 내가 2월생이고 녀석이 4월생이었으니 내가 별일 없이 멀쩡했다면 우린 학년부터 달랐을 것이다. 그럼 한재희가 날 형이라고 불렀겠지. 그럼 좀 뭔가 달랐을까… 싶지만.
억울하게도 나는 녀석과 같은 학년으로 초등학교를 입학해야 했다.
그래, 생각해 보면 거기서부터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 배 속에서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나는 태어나자마자 심장에 이상이 있단 소견을 받아 줄곧 중환자실 신세를 졌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머리와 달리 내 몸은 당시 맞았던 링거 자국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런 비실비실한 나와 달리 한재희는 매우 건강했고, 별 탈 없이 나와 잘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수시로 문병을 오곤 했다던데…. 녀석은 기억이 날까? 내 생각엔 분명 녀석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들이야 다 엄마 아빠한테 들었던 이야기들이고….
***
한재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네 살 때다.
이건 나이도 확실하다. 그날의 날씨도, 또 스산한 한기도. 집 안을 가득 메우던 그 참담한 분위기마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내 방 건너편 방은 당시까지는 손님방으로 쓰고 있었다. 그곳에서 녀석은 내내 울고 있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엄마 아빠도 1층에서 울고 있었다. 별수 없었다. 나는 까치발로 서서 옷장 손잡이를 겨우 잡아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반 나와 체구가 다르지 않던 한재희는 코트와 이불로 둘러싸인 채 옷장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재히야.’
아마도 나는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녀석을. ‘희’ 발음은 아무래도 어려우니까. 녀석은 부르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도 계속 울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 시끄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 불쌍하기도 해서 나는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 녀석이 우는 걸 지켜봤던 것 같다. 그래 봤자 바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전부였던지라 얼굴이 다 보이진 않았다. 지금의 한재희를 생각하면, 꺼지라고 욕먹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왜 우러.’
‘엄마 아빠가 없져.’
…지금 생각하면 영민한 녀석은 어린 나이에도 정확하게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나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곧 죽을 애라고 불렸음에도 죽음이란 개념을 잘 몰랐던 나는 아마 재희의 부모님이 여행 가신 정도로만 사태를 파악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새삼 겪는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우는 녀석이 평소답지 않아서 고민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실 난 누군가가 우는 게 싫다. 아픈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울 때마다 난 늘 몸의 아픔보다 더 큰 죄책감에 짓눌렸다. 엄마 아빠만으로도 버거운데 유일한 친구인 재희마저 우는 게 정말 싫었다. 그래서 어린 나의 목적은 막연히, 한재희가 우는 것을 그치게 만들기… 였겠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당시 한정현은 네 살 나름의 가장 탁월한 해결책을 골랐을 것이다. 스물아홉의 내가 네 살배기의 의식의 흐름을 추론하기론 그렇다.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 그 기준은 분명 우리 엄마였다. 내가 아파서건, 어째서건 우는 엄마에게 뽀뽀를 해 주면 엄마는 눈물을 그치고 웃곤 했으니까. 분명 재희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겠지.
그래서… 저지르고야 말았다.
쪼옥.
조막만 한 얼굴에 가득했던 눈물이, 재희의 입술에까지 얼룩져 있어, 기억하는 뽀뽀의 감촉은 분명 차가웠다.
‘울지 마아. 응?’
감촉보다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 게 이때 재희의 얼굴이다.
지금의 한재희도 그러하듯이, 같은 네 살짜리라고는 보기 힘든 또렷한 이목구비. 그중에서도 꽤 날카로운 눈매가 새삼 동그랗게 뜨인 게 기억이 난다.
바깥으로부터 스며들어 온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 오뚝한 콧날과 그곳에서 갈라진 빛이 맺힌 눈동자. 펑펑 울던 눈물이 그렁그렁해선 쳐다보는 그 앞에서 나는 뭣도 모르고 헤헤거리며 웃었다.
‘안 울 거지?’
묻는 말에 끄덕이며 배시시 웃던 네 살배기. 그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한재희의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고, 녀석은 이전처럼 날 문병하러 왔다. 하지만 재희랑 닮았던, 유독 웃는 얼굴이 똑같던 재희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대신 우리 엄마가 녀석의 뒤를 지켜 주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엄마를 뺏겼다는 생각보다 재희가 울고 있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먼저 했다. 퇴원하고 돌아온 집 2층, 아빠의 부축으로 힘겹게 계단을 올라 선 내 방 맞은편의 손님방이 어느새 재희의 방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늘 비어 있던 그 서늘한 방 가득 채워진 로봇 장난감과 공들은 내게도 낯설지 않은 것들이었다. …재희가 늘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
***
그렇게 재희는 우리 가족이 되어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재희는 우리 엄마 아빠 앞에선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투정을 부리다 울음을 터뜨리는 내 앞에서도, 피망이니 콩이니 전부 다 야무지게 먹고 밥그릇을 비우는 녀석이 얄미울 정도였다. 사실 너도 당근 싫어하면서. 가끔 내가 먹어 주기도 했는데….
하지만 밤이 되면 사정은 달라졌다. 재희는 몇 번이고 울었다.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아서, 아래층의 엄마 아빠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같은 층이어서인지 나에게는 유독 또렷이 들려왔다. 엄마를 찾으며 우는 녀석을 아무래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녀석의 방으로 건너갔고, 옷장에 틀어박혀 울고 있는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되어 덩치가 커진 뒤로는 재희는 옷장이 아닌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면 나는 엉금엉금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그럼 코랑 눈을 새빨갛게 한 한재희가 나를 쳐다보았다.
쪼옥.
‘이제는 울지 마.’ 라는 말조차 없이.
한 번으로 힘들면 두 번, 아니면 세 번까지도. 뽀뽀를 거듭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잠이 드는 재희의 곁에서 나도 함께 잠이 들어 아침이 되어서야 일어나곤 했다. 어이없는 건 이미 녀석은 사라져 있고, 나만 덩그러니 한재희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
‘어제도 또 정현이가 재희 방 가서 잤니? 어린애같이.’
아침 밥상 앞에서 엄마가 못 말린다는 말투로 물어보면, 녀석은 고개만 끄덕일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로선 억울했지만 굳이 엄마의 착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냥 녀석이 안 울면 그걸로 됐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나이에도 막연히 알았던 것 같다. 만약 내가 다 고자질해 버린다면, 녀석은 또 펑펑 울어 버릴 거라고.
확실한 건, 나는 한재희가 우는 게 정말 싫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도.
***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에 갈 때까지도 우린 그렇게 지냈다. 녀석이 울 때면 입을 맞췄고, 늘 함께 손을 붙잡고 다녔다. 외출이 잦았던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도 툭하면 결석하기 일쑤였던 난 중학교 때 결국 수술을 한 번 더 하게 됐다. 그게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애기 때의 수술 흉터는 그나마 작았는데, 두 번째는 좀 심각했으니까.
내 가슴 정중앙에는 세로로 된 수술 흉터가 크게 남았고,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펑펑 울었다. 애기 때의 상처가 언제쯤 사라질까 기대했는데, 더 큰 흉터가 생기고 나니 그저 절망스럽기만 했다.
날 달래던 엄마 아빠도 결국 포기하고 자러 간 그날 밤. 내 방에 들어온 한재희는 내가 녀석에게 했듯이 똑같이 나에게 뽀뽀를 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눈물이 났고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당혹스러웠는지 녀석은 밤새도록 우는 날 지켜보았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한재희는 나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맨날 일곱 시만 되면 칼같이 일어나는 녀석이 내가 일어나기까지 침대에서 버티고 있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한재희의 눈과 달리 내 눈은 퉁퉁 부어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피식 웃었다. 내 꼬라지가 웃겼나 보다. 그런데 나도 뭐가 재밌다고 웃었다. 기껏해야 열 몇 살의 어린 손으로 녀석은 내 흉 진 가슴 부위를 꾹꾹 눌렀다. 먼저 변성기를 거친 녀석은 그때부터 목소리가 낮았다. 늦게까지 누워 있던 터에 잠겼는지, 어쨌는지, 유독 더 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해 주었던 그 말들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괜찮아, 안 미워.
안 미워, 안 미워.
***
그날 이후로 우린 조금 공평해졌다. 서로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녀석이 간혹 엄마를 부르며 운다는 사실을, 그리고 녀석은 내가 엄마의 화장품을 훔쳐 가슴 언저리에 퍽퍽 바른다는 것을 함구했다. 클렌징의 개념이 없던 꼬마로서는 비누로도 잘 지워지지 않는 화장품을 수건에 묻히기 일쑤였고,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우물쭈물하는 날 대신해 재희는 변명도 그럴싸하게 잘했다.
우린 그렇게 함께였다. 난 사실 좋았다. 성도 같아서 녀석과 형제 취급을 당하는 게 솔직히 싫지 않았다. 당연히 한재희가 형인 것처럼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내 익숙해졌다. 재희는 내게 동생이자 형이었고 친구였다. 언제든 나는 내키는 대로, 베개를 안고서 녀석의 방을 노크도 없이 열 수 있었다.
열두 시면 숙면하는 녀석의 침대의 이불에 파고들면 날 익숙하게 안아 주는 녀석의 체온은 늘 따스했다.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또 아프냐고 묻는 목소리가 나와 달리 낮고 편안해서, 나는 늘 좋았다. 그래서 거부할 수 없었다.
‘뽀뽀.’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뽀뽀의 쓰임이 달라졌다.
커 버린 재희는 어느 순간부터 울지 않게 되었고 나는 딱히 녀석을 위로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하지 않아야 정상일 텐데, 그 대신 아주 사소한 쓰임이 생겨났다. 하나하나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아침에 학교까지 자전거를 태워 줄 때, 잠들었던 수업의 노트 필기를 빌려 줄 때, 심지어 제 방 침대에서 나를 재워 주는 값까지도. 당연히 나는 재희에게 뽀뽀를 치르곤 했다.
그것은 내 작은 세계 속 하나의 당연한 보상이었고, 게임으로 치면 일일 퀘스트와 같은 존재였다. 세상을 살기 턱없이 나약했던 난 늘 녀석에게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녀석에게 미안해할 틈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빚을 질 때마다 녀석은 익숙하게 입술을 겹쳐 왔고, 거기에 응하고 나면 난 떳떳해졌다. 사실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입술만 닿던 그때에도 말랑말랑하던 촉감이 좋아서, 나는 그게 나쁘다는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에야 그 순수했던 뽀뽀와는 다른 딥 키스… 가 되어 버렸지만.
예전에도 지금도,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인다. 네 살 때는 울음을 그쳤고, 열다섯 살 때는 씨익 웃었다. 그래. 분명 그때까진 나도 그랬다. 어느 정도 선까진. 씨익 웃고 잠들면 됐다. 정신승리 할 수 있었다.
그래. 뽀뽀가 뭐 어때서. 키스가 뭐 어때서. 우리끼린데, 뭐 어때.
문제는, 그래. 가장 문제는.
…이제는 내가 이 키스에, 달아올라 버린다는 점이다. 그것도 나만.
***
「오늘 꼼짝도 하지 마라.」
알람 대신 녀석의 상큼한 메시지가 나를 깨웠다. 핸드폰을 쥐지 않은 다른 쪽 팔에는 익숙하게도 링거가 꽂혀 있었다. 타이밍도 참 잘 맞추지. 얼마 남지 않은 링거액을 잠그고 나는 자연스럽게 바늘을 뽑았다.
한재희가 꽂는 링거는 아프지도 않아서, 나는 누가 뭘 내 팔에 꽂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처자다가 일어나곤 했다. 아프지 않은 거야 좋지만 뭔가 당한 느낌이란 말이지. 저린 손끝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며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여름이든 한겨울이든 늘 나는 뜨거운 물로만 샤워를 했다. 지금은 겨울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집과 함께 나이 들어 버린 보일러는 온수가 나오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려, 나는 한참을 발끝만 적시고 있었다. 진짜 이것도 바꿔야겠다, 싶으면서도 새 보일러로 바꾸고 나면 그 빌미로라도 여기에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굳이 바꾸자는 소리를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또 오늘, 쓸데없이 5분을 버렸다.
희뿌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여느 때와 같았다. 살이라곤 없이 빼빼 마른 몸은 혈색이 없는 얼굴과 똑같이 허여멀개서 유독 흉터 자국이 눈에 띄었다. 마치 하얀 스케치북에 유성 매직으로 세로줄을 그어 둔 것처럼.
두 번째 개흉 수술을 했던 게 열다섯 살, 처음 흉터가 생겼을 때보다는 조금 작아지고 연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영원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 덕분에 내겐 습관이 생겼다.
무슨 옷을 입든 밖에 나갈 때는 늘 몇 겹씩 챙겨 입게 되었다. 그나마 더위를 안 타서 다행인가. 한여름이라고 해도 늘 민소매나 흰 티셔츠를 덧입었고, 남방도 꼭 목까지 단추를 채워야 했다. 티 한 장만으로는 흉터가 비치니까 답답해도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내 옷장 속은 흰색 반팔과 민소매 티가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들이 다니는 목욕탕도 수영장도 당연히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뭐, 병원에서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는 집돌이가 되었다. 한재희가 히키코모리라고 놀리는 것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난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공기 청정기와 적절한 온도가 맞춰진 집 안에서 노는 게 여러모로 편리했다.
이런 내가 백수인 것은 아주 당연한 결과다. 대학교도 중퇴. 군대도 당연히 6급, 대한의 건아라면 다들 두려움에 떠는 신체검사에서도 난 간단히 가슴팍의 단추만 풀어헤쳐서 면제를 받았다.
하지만 아무도 날 구박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여태껏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했고, 다행히 집에는 내가 놀고먹어도 무탈할 만큼 돈이 많았다. 엄마를 데리고 시골에 내려가서도 진료를 보며 일하는 아빠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내 딴에 뭘 한답시고 설치다가 더 골병이 드는 것보다는 백수로 사는 지금이 나았다.
길고 가늘게. 무조건 평탄하게. 그래서 심장 박동 수는 늘 평온하게.
모두가 내게 바라는 삶은 그랬다. 변화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살길 바랐고,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사도 없이, 생활에 변화도 없이. 서른이 다 되어 가도록 이 좁디좁은 세계에 갇혀 사는 것도 다 그러한 이유에서였지만.
“응 엄마.”
- 그래 아들. 잘 있었어? 재희는?
정작, 가장 큰 위험 요소가 한재희라는 걸, 왜 아무도 몰라줄까.
“…뭐 그냥.”
그리고 그중 가장 큰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게 우리 엄마다.
불쌍한 우리 엄마는 딱 하나 낳은 아들이 멀쩡하지 못한 것에 늘 자책하며 사셨고, 연약한 당신의 몸도 건사하기 어려웠기에 결론적으로는 이렇게 나와 따로 떨어져 사는 게 서로에게 득이 되었다. 나처럼 병원을 끼고 살 정도는 아니고, 내과 의사인 아빠 곁에만 있으면 무리 없이 살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엄마와 서로의 무고함을 묻는 통화는 여느 모자간의 대화와는 조금 달랐다. 기필코, 잘 살아남자는 약속을 확인하는 절차였으니까.
- 재희 말은 잘 듣고 있어?
“내가 무슨 애야? 걔 말을 듣게.”
- 정신 차려. 감사한 줄 알아야지, 너는 정말.
거봐, 다 이렇다니까.
한재희가 흉부외과를 선택하자 엄마는 마치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울었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었다. 의대를 지망할 때부터 녀석은 흉부외과를 선택하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본과에 들어가고 실습하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에 틀어지겠거니 모두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녀석은 주저 없이 심혈관 센터에 인턴을 지원했고, 정말 합격해버렸다. 그 이후로 한재희는 우리 엄마에게 구세주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주기도문을 재희기도문으로 바꿔 버리기라도 할 만큼, 엄마는 당신이 못다 한 정성을 대신하는 녀석에게 죄책감과 그 곱절의 무한한 신뢰를 표출했다.
그래서 늘 억울한 건 나였다. 엄마, 엄마 아들 이대로 가다간 진짜 오래 못 살 거 같다니까. 안 그래도 오래 못 살 거 같구만.
- 오늘 택배 갈 거야. 문자 받았지?
“몰라….”
- 재희 갖다 줘. 곰탕 그거 냄비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돼. 요새도 집에 못 들어오니?
“어제 왔다 갔어어. 걔가 무슨 어린애야?”
이해는 한다. 엄마도 아빠도 나이가 들면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질 텐데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에 반해 멀쩡하다 못해 특출한 한재희가 얼마나 든든할까.
실제로 재희를 입양할까 고민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차라리 데려오자마자 입적시킬까 싶었지만, 어른들의 뜻으로만 둘 게 아니란 생각에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고.
그래서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어 제법 머리도 컸다 싶었을 즈음에 재희와 아빠는 입양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등본을 조회해 봐도 여전히 우리가 동거인으로 나오는 걸 보면, 입양은 성사되지 않은 것 같지만.
나는 한참이나 뒤에 그 사실을 알았다. 이미 지난 이야기라던 엄마의 말에도 나는 묘한 상상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만약 한재희가 내 동생이 되었다면. 첫사랑이 동생이 되는 막장 스토리라도 되는 건가. 세상에. 뭐, 그렇게 되면 깔끔하게 단념이 될지도 모르겠네. 지금이라고 해서 뭐가 더 나을 건 없지만, 가족으로 묶여 버리면 고민할 여지도 없는 일이 되지 않는가.
한편으론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다.
내일모레 서른인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분의 신세를 지는 아들로서, 두 분을 모실 수 있는 아들의 역할을 내심 한재희가 나를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물론, 호적엔 올리지 않았다곤 해도 한재희는 줄곧 그래 왔고 그럴 것이다. 또 그러고 있었다. 며칠째 집에 못 들어오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시골로 선물을 보내며, 엽서에 내 이름까지 같이 써서 보내곤 했으니까. 신뢰가 쌓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녀석과 비교하면 할수록 엉망인 내 인생에 자괴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내 나이도 잊고 어리광을 부렸다.
“엄마, 나 아파. 어제 열났어.”
- 아픈 김에 병원 가. 너 귀찮다고 맨날 집에서 재희 괴롭히지?
“괴롭히긴 뭘 괴롭혀. 걔가 날 괴롭히는 건데.”
- 잔소리 말고, 엄마 말 들어. 반찬 말고 너 진짜 가져다줄 거 있어.
“응?”
- 저번에 엄마가 말했지? 우리 재희가 워낙 잘나서 난리 났다고.
우리 재희라니. 누가 들으면 정말 친아들일 줄 알 것 같다.
뭐, 이해는 한다. 내가 엄마라도 한재희가 아들이라면 자랑하고 싶겠지. 공부도 잘해, 몸도 튼튼해. 얼굴도 반반해. 직업도 의사야. 엄청 잘 나가.
그래… 그게 문제였다.
“내가 뭘 어떻게 얘기해.”
- 얘기할 게 뭐 있어. 그냥 재희 주면 돼.
“엄청 싫어할 텐데….”
- 싫으면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하고. 주기만 하면 된다니까.
요새 엄마는 재희를 결혼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의사들은 바쁘다. 매우 바쁘다. 게다가 군대도 이상하게 3년을 다녀온단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도 아빠가 레지던트 3년 차일 때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나마 여유로울 시기라고.
딱 그 3년 차가 된 한재희는 당연하게도 좋은 표적이 되었다.
주변에서 신랑으로 탐을 내는 모양이었다. 굳이 복잡한 가정환경을 알리기보다 한재희는 거의 우리 아빠 자식으로 통했는데, 그 댁 아들이 잘났다는 소문이 돌고 돌아 의사 집안의 앞날 창창하고 유능한 의사를 사윗감으로 점찍은 주변인들이 엄마와 아빠를 보채고 있었다.
뭐, 비인기과인 흉부외과를 선택한 탓에 조금 그 지원율이 낮아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엄마가 나서는 걸 보면 여전히 난리인가 보다. 바쁜 재희에게 직접 말하기 그렇다며 나를 통하려는 엄마를 몇 번이고 못 들은 체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젠장, 왜 또 나야.
- 우리 아들은 몰라도, 재희는 보내야지.
“…….”
- 내가… 승연이를 봐서라도 꼭 좋은 아가씨 잡아 줘야지.
“…엄마.”
‘승연이’는 재희 어머니를 말하는 거다.
두 ‘엄마’는 고교 시절 동창이었고, 연락이 끊겼다가 만나고 보니 각자 결혼해 있더란다. 하필이면 아빠들끼리도 대학교 동기 동창. 두 의사 와이프는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졌고 낳기까지 했다. 기막힌 인연이었다. 게다가 나를 낳은 기쁨보다 슬픔으로 힘겨워했던 엄마를 다독이고 북돋워 주었었는데. 그런 친구들이 사고로 죽어 버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물론 가장 힘든 건 나이 어린 재희였겠지만, 내가 두 분 몰래 재희의 슬픔을 감당했던 것처럼 엄마와 아빠는 각자의 상실감을 감당했을 것이다. 원래도 몸이 약했던 우리 엄마가 결국 시골에 내려갈 만큼 경황이 나빠진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성치 않은 아들.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친구의 아들. 그 미안하고 각박한 현실이 엄마에겐 새삼 지독했겠지. 아끼는 마음에서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걸 이해한다. 종종 서운함이 울컥 올라와도 난 늘 엄마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난 엄마와 함께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 큰일이네, 우리 아들. 재희 장가가면 혼자 남아서.
“나도 내려가서 엄마랑 살래.”
- 무슨 소리야, 얘는. 넌 서울에서 살아야지.
…사실 나도 엄마를 따라가려고 했었다. 스무 살, 나는 이미 한재희에 대한 내 감정을 깨닫고 난 뒤였고, 그 와중에 둘이 살기를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떼를 써 봐도 이 심장이 또 내 발목을 잡았다.
흉부외과는 장비가 필요한 과 특성상 무조건 큰 병원이 우선시되었다. 그것도 서울에 있는 병원이어야 했다. 다른 질환과 달리 심장병은 자칫하면 1분 1초에 명을 달리하기 때문에 나는 어느 지하 단칸방이라도 서울에, 병원 가까이에 살아야만 했다. 지금 집의 위치도 그랬다. 병원까지는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데려갈 수 없다. 두고 가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의 입장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두고 시골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야 이모님을 부른다지만, 스무 살짜리 남자애 둘을, 게다가 아픈 애를 두고 내려가 버린 엄마의 결단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힘에 겨웠었다.
하지만 그 망설임에 쐐기를 박아 버린 건 바로 한재희였다.
- 그래도 재희가 늘 돌봐 줄 거야. 엄만 그게 너무 다행이다.
‘정현이는 제가 죽을 때까지 돌볼 테니, 걱정 마세요. 의사로서든, …친구로서든, 식구로서든.’
…나의 의지와는 일절 상관없이.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깜박이다 사라진 ‘엄마’라는 글씨를 눈으로 좇던 나는 초인종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택배였다. 아이스박스는 나와 재희가 잘 먹는 반찬들과 얼린 곰국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음식들 위에 곱게 밀봉된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사진일까? 편지인가? 서류 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이내 그것을 휙 던져 버렸다. 괜히 씩씩거리며 올라오던 분마저 가라앉히고 나니 마치 유리 표면에 수분이 맺히듯 눈에 물기가 찼다. 러그를 깔아도 유난히 스산한 바닥이 견디기 어려워 나는 찬장을 열어 도시락 통을 찾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자. 한재희의 결혼이, 나에게는 해방과 다름없을 테니까.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 탓일 것이다.
***
꼼짝도 하지 말란 말을 보란 듯이 어긴 나는 병원에 도착해 녀석을 마주했다. 보무도 당당… 은 아니게 손에 바리바리 뭘 싸 들고.
“어, 현아.”
…만약 이곳이 병원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오늘 처박혀 있으라고 했지’부터 시작해서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는 둥 난리를 쳤겠지만, 이곳은 병원, 주변의 시선과 목에 걸려 있는 ID 카드가 녀석의 겉모습을 보다 견고하게 만들었다.
흉부외과 전공의 한재희.
하얀 가운을 나풀나풀. 병원 신발 특유의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며 녀석은 다가왔다. 내게 오는 그 짧은 여정 중에도 주변에서 건네는 말에 꾸벅꾸벅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
의사들의 보급 용품과 다름없는 슬리퍼의 구멍에는 소아병동 환자 애들이 하나둘씩 꽂아 준 만화 캐릭터 배지들로 가득했다. 물론 나는 안다. 싹 다 한재희의 취향과는 일백 광년 멀다는 사실을.
일례로, 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녀석의 방은 좋게 말해 깔끔했고 나쁘게 말해 우중충할 정도였다. 무채색 및 저채도로 가득해서 벽지부터 커튼, 이불보까지 죄다 검정색 아니면 남색. 기껏해야 하늘색이었다. 지금 마주한 녀석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그 방의 흔적이라곤 가운 안에 입은 수술복 색깔뿐이었다.
“인상 펴. 여기 집 아니잖아.”
약간 어금니를 깨물고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한 걸음 떼면 달라붙는 노년층과 환아들의 환대에 한재희의 입꼬리는 경련이 일 만큼 한껏 올라가 있었다. 영특하게도, 명패도 달려 있지 않은 환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 수술 경과나 일정도 꿰느라 한재희의 뇌가 팽팽 돌아가는 게 눈에 보였다.
“왜? 하던 대로 해. 난 상관없는데.”
“…우리 현이. 도시락도 싸고. 수고 많았네.”
안경 렌즈 뒤로 빛나던 날카로운 살기를 완벽히 감춰 버리는 한재희의 눈웃음에 나 역시 생긋 미소를 흘리며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익숙하게 받아드는 손길은 물론 어깨를 도닥이며 웃는 얼굴은 역시나 내 말에 귀를 먹은 것처럼 딴소리를 해 댔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 병원에 온 이상 빨리 미션을 완수하는 게 나았다.
가방을 추스르며 걸어 나가자 그것도 달라고 내미는 녀석의 손을 나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허공에서 민망해진 녀석의 손은 내 어깨 위로 가 앉았다.
“왜 이렇게 춥게 입었어. 목도리도 안 하고. 바람 엄청 찬데.”
“마스크 했잖아.”
“택시라도 타고 오던가. 너 정말 이러면 나… 속상한 거 몰라?”
음, 집 같았으면 저 속상하다는 표현을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뒤지고 싶어서 니가 진짜 환장했구나? 이 추운 날 난데 없이 송장 치우는 사람은 무슨 죄야?’
물론 그게 이유 없는 힐난은 아니다. 추운 날씨는 나에게 쥐약이긴 하다. 하지만 그 날씨를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도시락까지 싸 들고 온 내가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은 분명 아니었다. 게다가 저렇게 온갖 다정한 척을 하며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한재희를 곁에서 지켜보자면, 없는 병이라도 더 생길 것 같았으니까. 나는 걸음을 바삐 옮겼다. 최대한 한재희에게서 멀어질 수 있게.
그런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키가 큰 한재희는 금방 내 곁에 왔다. 아무리 걸음을 빠르게 내딛어도 마치 황새가 뱁새 따라잡듯 휘적휘적 따라잡곤 했다. 급기야 한재희는 뭔가에 쫓기듯 걸음을 옮기던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입술을 깨물고 쏘아보는 내 눈앞에서 빙글 웃고는 손으로 도시락을 들어 보였다.
저 무거운 코끼리 보온 도시락 안엔 내가 낑낑거리며 담아 온 곰탕과 반찬, 그리고 밥이 담겨 있었다.
“교수님 뵙고 나와서 같이 먹자.”
“밥 같은 소리 하네. 너나 시간 날 때 빨리 챙겨 먹어.”
“우리 현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순 없지. 내가 시간 맞춰서 여기 다시 올게.”
‘30분 뒤면 되겠지?’라는 말에 나는 중얼거렸다. 퍽이나.
저렇게 해서 날 바람맞힌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지랄하지 않는 건 그 모두가 한재희의 과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곳 심혈관 센터는 사실상 대학병원이고 늘 환자들로 붐볐다. 시시때때로 응급환자가 예고 없이(예고하면 더 이상하겠지만) 쳐들어와 제때 밥 먹을 시간이 없는 건 물론이고 불어터진 라면을 입에 넣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무거운 보온 도시락으로 싸 온 건데. 뚱한 내 앞에서 굳이 욕심을 부리는 녀석에게 쏘아 댈까 하다가 관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지랄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름 아닌 내 상태가. 병원에 오면 늘 그랬다. 태어나서부터 늘 오갔던 병원이지만 친숙해질 수 없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기억만 있어서겠지.
“잘 다녀와. 조금 있다 봐.”
기어코 도착한 그 문 앞.
어깨를 도닥여 주는 녀석의 손끝에서 확, 소독약 냄새가 나서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나 대신 녀석이 노크한 방문 건너편에서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한 내 등을 두드린 녀석은 설핏 웃었다. 웃는 낯에 침은 못 뱉어도 욕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나는 녀석이 열어 주기 전까지 문 앞에 고대로 서 있었다.
기어코 녀석의 손이 문을 열어 버리는 그 순간. 안경 너머로 생긋 웃어 보이는 미소는 나에게 키스를 마친 뒤 짓던 것과는 영 딴판이지만, 같은 의미로 잘생기긴 했다. 그게 억울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난 그렇게 교수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
아무리 재희가 의사라고 해도 집에서 가능한 건 규칙적인 피 검사와 혈압 체크뿐이었다. 심전도와 심초음파 검사 등은 정기적으로 직접 내원해서 진찰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 가슴 속에 움직이고 있는 고체 덩어리를 위해서는 한 달에 한 번은 필수… 였지만 나는 그것을 꿋꿋이 어겼다. 그래 봤자 두 달을 넘지 못하고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죽을상을 하고 진료실을 방문해야 했지만. 오늘처럼.
“그래. …어디 보자. 뭐 안색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데.”
“…네.”
내 앞에 앉아 계시는 임 교수님은 재희가 수련하고 있는 이 심혈관 센터의 책임 교수이시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선천적 심기형이었던 내 가슴을 처음 열고 수술을 해 주셨던 분이다.
복합적인 기형이었단다. 가장 큰 건 뭐 심방과 심실을 지지하는 중격이 결손되었다나. 그뿐만 아니라 판막 이상에 혈관 전위까지 난리 나 있어서, 정말 마구잡이였다고 한다. 그런 내 심장을 성형해 주시고, 그걸로도 부족해 14년 전 내 가슴 속에 인공 판막을 직접 넣어 주시기까지 하셨다.
다시 말해, 내 생살여탈권을 쥐고 계신, 나로서는 창조주에 버금가는 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친구들이 부모님께 성적표 내밀 때 조마조마한다던 그 기분을 난 교수님을 만날 때마다 느끼고 있었다. 내일 모레 서른인 지금까지도.
이미 수없이 받아 본 심전도 검사는 물론 하다못해 청진기의 감촉에도 절로 가래가 끓을 만큼 긴장이 되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내 긴장을 알아채고 느긋이 웃는 교수님의 얼굴은 콜라 CF에 나오는 산타클로스처럼 인자했다.
“재희한테 이야기는 들었다.”
아, 씨발.
굳어 버린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와 같은 교수님의 눈빛에 난 절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런 말을 하면 교수님은 서운해하시겠지만, 지금의 난 한재희한테 검사받는 쪽이 편했다. 녀석하고야 무슨 결과가 나오든 욕을 먹어도 한 귀로 흘리거나 하면 되지만 교수님 앞에선… 음,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옥황상제건 부처님이건 하느님을 만난다고 치자.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이제껏 지은 죄를 낱낱이 고하고 난 뒤에 ‘너 이딴 식으로 살라고 내가 만든 건 줄 아니?’ 따지는 신 앞에서 벌벌 기어야 하는 중생, 혹은 미생물이 된 것 같았다. 지금의 내 심정이 딱 그랬다.
‘내가 너 이렇게 막 살라고 심혈을 기울여 수술해 준 줄 아니?’ …라고 물어보진 않으시지만, 그래도 뭐랄까.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내 가슴 속에서 째깍거리며 열심히 움직이는 판막 소리가 이 두근거림을 제발 묻어 줬으면.
“네가 벌써 수술 몇 년차지?”
“…15년이요.”
“그래.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지, 정현아. 슬슬 더 주의해야지. 이번에 일 나면….”
“네에, 알아요.”
수술한 내 심장 속에는 선천적으로 글러 먹었던 원조 판막 대신에 기계가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나는 평생 항응고제1)를 복용해야 했다. 쉽게 말해 몸 안에 금속을 박았으니 그 주변에 피 찌꺼기가 뭉치지 않게 도와주는 거다. 만약 이걸 제대로 안 먹으면 혈전이 생겨서 난 저세상행 급행 티켓을 끊게 된다. 그래서 매번 무슨 프로트… 뭐더라. 아, 프로트롬빈인가 하는 수치를 보고 항응고제 농도를 조절하는데, 재희가 수시로 그 검사를 해 주고 있다. 그 새끼는 과민해서 거의 주마다 다른 검사까지 하지만…. 그런 것은 보통 응고제 때문이 아니라 인공 판막을 이식한 뒤에 생기는 합병증에 대한 케어였다.
10년마다 재수술을 해야 하는 조직 판막에 비해, 인공 판막은 반영구적이라고는 하나 예후를 그만큼 중요하게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만약. 만약에 이 기계로도 케어가 끝나 버리면 나 같은 경우 딱 한 가지 방법만 남게 되니까.
바로 심장 이식.
당연히 심장 이식은 쉬운 일이 아니다. 뇌사자로부터 심장 이식을 받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식을 받는다 쳐도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나에게야 고마운 ‘새 엔진’이겠지만 내 몸은 그렇게 쉽게 ‘낯선 엔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침입자로 인식한 나머지 면역 체계와 항체들이 반응해서 엉망이 되어 버리기도 한단다.
물론 나는 거기까지 가기 싫었다. 무엇보다 다시 수술대에 오르기 싫었다. 차라리 그럴 거면 죽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에게는 물론이고 날 살려 주신 교수님께도 실례되는 말일 테니까. 하지만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신다는 것처럼 교수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내일 모레 서른인데, 여전히 교수님께는 신생아 때 판막 성형술을 받던 그 두 살배기 한정현으로 보이시나 보다.
“부모님은 잘 계시고?”
“네, 뭐. 내려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요.”
“요새 그림은 좀 그리니?”
“아뇨….”
“집에서 심심할 텐데 취미라도 가져야지. 나한테 선물 주기로 한 건 다 어쩌고.”
“그걸 왜 아직도 기억하고 계세요.”
진득이 쓰다듬는 교수님의 손길이 따스해서 난 말로만 툴툴거리지 조금은 안도했다. 그래도 별문제는 없다는 거니까.
오면 늘 별거 아닌데, 오기 전까지는 왜 그렇게 무섭고 힘이 들까. 이러고 또 집에 돌아가선 하루짜리 의지가 부활할 거다. 정말 건강하게 살아야지. 집 안에서라도 맨손 체조라도 해야지. …반나절이라도 가면 좋겠지만.
“그래, 가 봐라. 재희가 기다리겠네.”
“…한재희는 요새 어때요?”
“왜, 재희는 궁금하니?”
“…엄마가 궁금해하셔서요.”
공공연한 비밀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교수님은 재희와 우리 집의 사정을 알고 계셨다. 물론 재희가 왜 흉부외과를 선택했는지도. 그래서 교수님은 내게 더욱 고마워하셨다. 좋은 인재가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물론 나는 찝찌름했다. 그래 봤자 친구고 그래 봤자 식구다. 한재희의 인생은 한재희 건데, 녀석의 진로 선택에 가장 중요한 근거를 내가 제공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난 녀석이 이 이상 내 삶에 관여되는 게 싫었다.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누굴 좋아해 봤자 농담으로나마 영원을 약속할 수 없는 내게 녀석의 존재는 너무나 가혹했다. 하지만 문제가 뭐냐면, 이렇듯 엄마도 교수님도 모두, 재희의 선택을 칭찬하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견해하고, 자랑스러워하며 녀석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왜 아무도, 한재희와 한정현을 떼어서 보려고 하지 않는 걸까. 왜, 아무도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다들 알잖아요. 그렇게 늘 함께할 순 없다는 거. 내가… 녀석만큼 오래 못 살 거라는 거.
왜 재희만을, 재희의 인생은 생각하려 들지 않냐구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주 열심이지. 널 자기 손으로 살리겠다고.”
…아주 기쁘지 않단 말이에요, 그런 말들.
***
거봐, 이럴 줄 알았지.
「응급」
「당직실」
보란 듯이 메시지가 와 있었다. 묘하게 완고한 성격 덕에 메시지로 욕할 때마저 문장에 띄어쓰기까지 지키는 녀석이 이렇게 단어 딸랑 두 개를 보냈다는 건, 분명 흉부외과 관련 응급 환자가 들어왔다는 소리다.
예상치 못한 결과도 아니었기에 나는 시큰둥하게 액정 화면을 껐다.
일터에서의 한재희는 늘 그래 왔었다. 교수님도 당직을 설 만큼 바쁜 전공이라 맘 놓고 쉬는 휴일이라고는 없었다. 오프를 겨우 얻어 죽은 듯이 자다가도 호출 받아 뛰쳐나가는 일이 수십 번. 덩달아 의사라도 된 것처럼 지켜봤던 녀석의 일상을 떠올리자면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메시지 보낼 여유는 있었나 보지.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병원 복도 의자에 잠시 주저앉았다. 급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도시락도 줬는데 그냥 집으로 가 버릴까 싶었지만 가방 대신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더 큰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 탓이었다. 바로 엄마의 두 번째 부탁. 소개팅을 가장한 맞선 문서(?) 전달.
한재희는 둘째 치고 내가 만사 귀찮은데 그냥 당직실에 던져두고 갈까 싶다가도,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 함께 봤다가 곤란해질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모른 체하자니 낮에 통화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짜증나.”
결국 난 착하게도 녀석의 말을 따를 수밖에.
의사고 인턴이고 모두 다 출동했는지 당직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난 익숙하게 녀석의 침대로 찾아가 걸터앉았다. 피곤했다. 고작해야 이런 체력으로 무슨 운동이며 체조가 가능한 걸까. 피식 웃다가 기어이 누웠다. 침대에 밴 향취가 느껴졌다. 한재희 냄새. 집에 온 것처럼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 문득 생각했다.
…또 누군가가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걸까.
언젠가 TV에서 흉부외과의 3일을 취재한 내용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3D 업종과 다름없이 고달픈 외과의의 일상을 그린 다큐였는데 그 안에서도 나처럼 선천적 심기형으로 고통받는 환아가 나왔었다. 아이가 너무 안됐다며 속상해하는 내 옆에서 한재희는 혀를 찼었다. 겨 묻은 개 걱정하는 똥 묻은 개가 여기 있다고.
변명하자면, 늘 죽음과 사이좋게 산책 중인 인생에 익숙해지다 보니 난 가끔 내 처지를 까먹고 만다. 이렇게 교수님이나 만나 뵙고 병원에서 진찰을 받지 않으면, 가슴 속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시계 소리도 아예 듣지 못한 채 살아갈 정도로.
여하튼. 그 아이는 다큐가 끝나기 전에 천사가 되었다.
아이의 부모는 물론 병원 사람 모두 직분을 내려 두고 울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울었다. 내 옆에 앉아 과자를 까먹던 한재희만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녀석은 집에서마저 잔업을 하는 기분이라며 떨떠름해했다. 하지만 난 눈물을 좀처럼 감출 수 없었다. 동병상련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내가 말하기도 우습지만, 나에겐 TV 속 오열하는 의사가 한재희로 보였다. 수술실에서 피 칠갑을 한 채 주저앉는 의사도. 회식을 나갔다가 뛰쳐 들어오는 의사도 다 한재희의 얼굴이었다. 꿈에서마저 한재희는 흰색 가운을 입은 채 엉엉 울고 있었다. 꿈속이니까 뽀뽀를 해 줄 수도 없고….
그래서 한동안 한재희 말을 잘 들었다. 짧지만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물론 얼마 못 갔지만.
아마 한재희는 지금도 그 다큐 속 의사들처럼 다급하게 일하고 있겠지. 엄마가 보내 준 곰탕이라면 환장을 하는 녀석이 도시락도 내팽개치고 그러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 노동을 하고 돌아올 녀석에게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내 처지도 거지 같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안 봐도 뻔했다. 컨디션이 최악일 녀석 앞에다가 폭탄을 안겨 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난 결국 가방 속에서 문제의 물건을 꺼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아야 지금 줄지 나중에 줄지 판단이라도 가능할 텐데. 투시력이 없는 난 지그시 봉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뜯어볼까?
뭐, 뜯어본다고 해서 나한테 화낼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이니셜마저도 같아서, 가끔 영어로 쓰인 서류에 수신인이 Han. J. H. 라고 쓰여 있어 내 걸로 오해 받기도 했다. (물론 난 그런 우편물을 받을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녀석 대신 서명하는 경우도 많았다. 집에 들를 시간도 없는 녀석이 병원으로 팩스 부쳐 달래서 뜯어본 적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기분 나빠하려나. 아니. 사실 별생각 없어 할 것 같다. 오히려 그 봉투를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할 내 기분이 곤두박질칠 걸 알기에 관뒀다. 다른 것도 아니라 한재희의 결혼 이야기 아닌가.
결혼이라. 결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알기로 한재희는 솔로다. 알게 모르게 병원에선 오피스 와이프라든가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밥 세 끼 먹고 푹 잠자기도 여의치 않은 레지던트 생활에 데이트는 가당치도 않아 보였다. 가끔 게임 때문에 녀석의 휴대폰을 만져 봤어도 별다른 통화나 문자 내역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걸려 오는 전화도 기껏해야 병원이나 우리 엄마 아빠가 전부다.
그렇다고 녀석이 인기 없는 모쏠남이라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한재희의 여자 친구를 여럿 봤다. 전형적인 엘리트에 엄친아 스타일인 녀석은 여자들의 인기를 몰고 다녔다. 같이 다녔던 고등학교 땐 선물도 보는 내가 다 짜증 날 만큼 받아왔었다. 초콜릿은 금물이었던 내 앞에서 포장지를 산처럼 쌓아 놓고 까먹던 또라이 성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하지만.
여하튼 요 몇 년 사이 녀석의 연애 사정은 동거하는 나로서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몇 년은 꼽아야 할 오래전 이야기들뿐이다. 뭐, 오래전 일이라고 해서 내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했다.
녀석이 처음 연애를 하는 걸 알았던 날, 때마침 후유증으로 입원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교수님은 물론 의료진 모두 왜 갑자기 내 상태가 안 좋아졌는지 짐작도 못 하고 허둥지둥하기 바빴다. 물론 한재희도 그 이유는 몰랐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뭐, 한두 번 지나니 익숙해졌었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다. 진정하자. 혼자 또 망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괜찮아. 익숙해졌잖아. 또 익숙해질 거다.
음… 뭐, 여친과 결혼은 조금… 조금 다른 스케일이겠지만.
빛바랜 고통에 슬슬 몸과 머리가 한계를 호소했다. 피곤했던 오늘의 자잘한 일상이 한꺼번에 내게 덤벼드는 느낌이었다. ‘승연이의 아들’만은 번듯하게 장가를 보낼 거라던 엄마의 말. 날 위해 ‘아주 열심인 녀석’. 그리고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고 피 칠갑을 하고 뛰쳐 다닐 ‘흉부외과의’ 레지던트 3년 차.
그리고 누군가와 결혼하게 될, ‘나와는 분리될 삶을 살게 될’ 누군가. 그, 한재희.
난 버릇처럼 몸은 움츠렸다. 마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혼자인 건 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온통 깜깜한 세상이 차라리 나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는 편이 좋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도 괜찮다. 콧속으로 은은히 파고드는 한재희의 냄새만으로도 충분했다.
혹시 이런 게 죽음이라면, 조금 편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겠지, 훨씬 더 아프고 괴롭겠지? 미천한 상상력에 나는 웃었다. 진짜, 정말….
“나 또라인가 봐….”
모르겠다, 정말, 가장 이기적인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아니, 안다. 내가 분명하다. 내가 제일, 나쁜 사람이다.
자기 위로를 대신하는 죄책감이 눈꺼풀에 내려앉아 무거웠다. 난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꿈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이대로 다 멈춰 버렸으면….
***
춥다.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눈을 뜬 것도 아니고, 몸을 일으킨 것도 아니지만 코끝을 스치는 느낌부터 내가 잠든 이곳이 집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내 침대면 상시 일하는 온수 매트 덕분에 따뜻했을 테니까.
기억을 더듬었다. …아, 맞아. 오랜만에 병원에 왔었지. 엄마 전화 받고, 부랴부랴 도시락을 싸서….
“…추워?”
한재희. 한재희 목소리다.
맞아, 당직실의 한재희 침대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나는 꿈까지 꿨다. 잠들기 전에 그 다큐를 떠올린 탓일까. 오랜만에 내가 죽는, 아니 이미 죽은 꿈을 꿨다. ‘내 장례식’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에서 지켜보는 내용인데, 조금 피곤하거나 오늘처럼 병원에 와서 겁을 먹으면 어김없이 꾸는 꿈이었다.
장례식 모습은 늘 같았다. 펑펑 우는 엄마. 그 엄마를 부축하는 아빠. 안경에 김이 서리도록 우는 교수님, 눈에 익은 병원의 의사 간호사들. 백수에 히키코모리에 학창 시절에도 학교와 병원 반반 할애했던 내 좁은 인간관계는 그 정도가 전부다. 다큐 속 환아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에 멋쩍어하는 와중, 나는 재희를 발견한다.
눈치 없다 싶을 만큼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영정 사진을 안고 있는 한재희.
가장 우스운 건 뭐냐면, 오늘 꿈속의 나는 평소와 달리 누군가를 찾기 바빴다는 것이다. 바로 ‘내가 모르는 얼굴’을. 낯선 여자가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한재희의 와이프는 아닐까 싶어서. 내가 무슨 무당도 아니고… 예지몽도 아니고. 그리고 알아봤자 뭘 하겠어.
결국 눈 빠져라 살펴본 장례식 속에, 그 한재희 곁에 아무도 없어서 나는 안도했다.
…사실 뺏기기 싫다.
오래 못 살 테니까 그때까지만은. 내가 사는 동안은 끝까지 나랑만 지냈으면 좋겠다. 내 앞에서만 욕을 하고 내 앞에서만 편하게 있어 줘도 되니까, 도시락도 싸다 줄 테니까 늘 이렇게 지내다 시간이 멈췄으면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내게 남겨진 시간과 재희에게 남겨진 시간의 무게는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하루에도 열두 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나는 그래야 하는 삶과 어쩔 수 없는 삶을 저울질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어버렸던 재희가 든든한 가정을 이뤄 행복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 녀석이 나만 그리워했으면 싶기도 했다.
뭐, 녀석이 우는 게 싫어서 뽀뽀까지 했던 내가, 녀석이 날 위해 울어 주길 바란다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비켜….”
“여긴 온수 매트 없어, 현아.”
“그렇게 부르는 것도 좀…!”
꿈에 허우적대던 날 현실로 이끄는 녀석 때문에 난 소름이 훅 끼쳤다. 등 뒤 바짝 닿은 체온과 목덜미로 느껴지는 녀석의 숨결. 여긴 집도 아니고, 내 방 침대도 아니고 병원 당직실인데!! 이 새끼가 돌았나 싶어 움직여 봐도 녀석의 팔은 좀처럼 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녀석도 조금 잔 건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쿡쿡 웃기만 했다. 진짜 변태라니깐. 나를 긁으면 기분이 좋은지 늘 이런 식이다.
하지만 변태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분명 몸은 병신이어도 마음만은 정상이 맞는데 이렇게 등 뒤에서 꽉 끌어안고 있는 녀석의 온기가 나를 자꾸만 이상해지게 만든다.
다 한재희 탓이다. 모든 게 망가져 버렸다.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에 담담히 체념했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불쑥 흔들려 버리는 건, 다 이 새끼를 오냐오냐 키운 내 잘못이다. 남자 새끼가 울건 말건 내버려 두고 모른 체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약해져서….
“교수님이 뭐라셔.”
“너 병신 같다고.”
“자주 병원 나오라고 한 소리 하셨지?”
“…야.”
“난 죄 없어. 검사 결과 보여 드린 게 다야.”
마치 잠을 재우듯 가슴을 도닥이는 녀석의 손 아래,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기계를 나는 떠올렸다.
조금 소름 돋지 않을까? 기분 좋은 두근두근 고동 소리가 아니라 째깍거리는 소리가 한재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한 번 자각하고 나면 잠이 못 들 정도로 내 귓가를 울리는 소음을 다독이듯, 녀석의 따스한 손바닥이 내 가슴을 덮었다. 그 온기에 몸이 초콜릿 녹듯 녹아내리며 기운이 다 빠졌다.
그래도 평소엔 반나절은 가는데, 벌써 의욕이랄 게 소멸되어 버렸다. 운동이고 뭐고, 다….
“그러니까 말 잘 들어, 한정현.”
“…싫어.”
“나 진짜 피곤하다….”
내 가슴 위와 내 허리춤에 감긴 녀석의 큰 손을 차례로 내려다본다. 늘 씻고 또 씻어서 건조하다 못해 갈라지고 피가 배어 있었다. 삽관을 하다가 찢긴 흉터도 군데군데 보였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중지의 굳은살을 제외하고는 매끈했었는데. 새삼 볼품없어졌다. 나는 꼭 내가 그 상처를 만든 것처럼 속이 상해 눈을 감았다. 물론 잠은 완전히 깨어 버린 지 오래지만.
“집에 갈래.”
“…갈까? 가고 싶어?”
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는 돌아누워 녀석을 마주 보고는, 그 품속에 더욱 파고들었다. 달래듯 내 어깨를 안고 도닥이는 녀석의 손에선 여전히 진저리 날 정도로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상처에서 난 소독 냄새일까, 환자를 처치하다가 밴 냄새일까.
난 그 냄새를 피해 아예 녀석의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또 내쉬었다.
오래 누워 있었더니 또 가래가 차려는 듯 숨 쉬기가 버거워졌다. 미리 알아채고 내 몸을 비스듬히 일으켜 주는 녀석의 큰 손이 뜨거웠다. 내가 뱉어 낸 가래를, 더러운 줄도 모르고 맨손으로 받아 내는 그 큰 손이.
…따뜻해.
“응. …갈래.”
너와 단둘이 지내는 집도 괴롭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보단 낫다.
싫어, 여기만은. 병원은. 여기는. …제발.
***
“진짜 괜찮은 거야?”
“나도 좀 인간답게 살아야지.”
결국, 둘이서 돌아와 버렸다.
나야 혼자 가겠다며 정색했지만 한재희가 내 말 무시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굳이 내 핑계를 대고 같이 퇴근해 버렸다. 누가 실려와도 절대로 자기 부르지 말라며 단단히 엄포를 두던 녀석이 몇 번이고 주머니 속 호출기를 확인하는 모습에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내내 소독약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집에 돌아오자 익숙한 집 냄새와 온기에 괜히 입맛도 돌아 허기가 졌다. 가래까지 들끓던 몸이 귀신같이 회복되었다. 아, 역시 나는 병원은 딱 질색이라니까.
나와 재희는 결국 식탁 앞에 앉았다. 나는 몇 시간 전 싸 갔던 도시락을 고스란히 다시 열었다. 보온 도시락의 따끈한 밥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쳐다보며, 나는 대체 오늘 내가 무슨 삽질을 한 건지 생각하다 잠깐 넋이 나갔다.
“다시 데울까?”
“아니 됐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부터 싹 하고 난 녀석에게선 더는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무향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집에서 같은 목욕용품을 쓰고 있는데도 묘하게 한재희에게는 나와는 다른 향기가 났다.
언젠가 궁금해서 물어봤을 때는 별다른 걸 쓰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면도 크림 탓일지도 모른다. 난 땀도 잘 안 나고 털도 거의 없어서 면도도 일주일에 한 번이 전부였다. 그래서 체향도 적은 편이라고 했다.
그런 나와 달리 한재희는 체온도 뜨겁고 털도 많이 나고 머리숱도 많았다. 막 땀을 흘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땐 등 뒤가 흠뻑 젖는다. 그릇을 싹 비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쟤는 왜 땀 냄새가 안 나지? 자주 씻어서 그런가. 신기한 녀석이다.
낡은 소파에 앉아 사과를 깎던 나는 설거지를 하는 한재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차림새는 이미 병원에서 보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헐렁한 추리닝 바지에 목이 늘어난 티. 수술용 라텍스 장갑이 아닌 빨간 고무장갑을 야무지게 끼고 설거지를 하는 녀석의 모습을 알면 병원 간호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른다. 가정적이라고. 가정 좋아하시네….
“너 요새는 데이트 안 하냐?”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사과를 아삭거리며 대답하는 녀석의 홀쭉한 뺨이 이리저리 불룩해졌다. 소파에 올라가 무릎을 껴안고 있는 나와 달리 녀석은 바닥과 소파 사이에 몸을 널브러뜨리고 있었다.
가만 보면 한재희도 꽤나 말랐다. 요새 운동도 못 해서 근육이 빠졌는지 홀쭉한 게, 정말 치킨이라도 먹이는 게 나을까 싶을 정도였다. 저 녀석 입장에선 누가 누굴 걱정하냐 싶을까.
하지만 한재희는 그냥 빼빼 마른 나와는 모양새가 달랐다. 약간 뭐랄까. 일부러 체중을 조절하는 마른 연예인 같은 느낌. 뼈대가 달라서 그런가. 나처럼 볼품없이 마른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더 키도 더 커 보였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나도 녀석도 코트를 입은 건 마찬가지인데 난 더 왜소해 보이는 반면, 녀석은 무릎 근처까지 오는 롱코트를 입어도 더 훤칠해 보이고 어른 냄새를 풍겼다.
이쪽도 저쪽도 스물아홉이구만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지.
“왜 갑자기 그딴 건 묻고 지랄이야?”
남들이 보는 한재희는 대강 그럴 것이다. 얼굴도 반반하고 키도 훤칠하고 어깨도 넓고. 말라도 이렇게 멋들어지게 말랐고. 나한테 하는 것처럼 쌍욕까진 안 할 테니 다정하기도 할 것이고.
문득 나는, 소개팅을 나간 한재희가 아까 전 나에게 했듯이 얼굴 모를 여자한테 머플러를 둘러 줄 장면을 상상해 버렸다. 갑자기 속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들 결혼한다고 하더라고. 레지 3년차가 되면.”
“…….”
“…엄마가 그러던데.”
한재희가 몸을 홱 돌렸다. 나는 TV에 열중하는 척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손바닥에선 진땀이 다 났다. 잠옷 바지에 슥슥 손바닥을 문지르다 딱, 이리저리 굴리던 눈을 결국 마주치고 말았다. 하마터면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내놔.”
“…….”
“뭔지 몰라도 빨리 내놔. 뭐길래 하루 종일 죽상이냐.”
…귀신같은 새끼.
이래서 똑똑한 놈들은 짜증난다.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라니까. 한 번 더 발뺌하려다가 아예 가방을 뒤지려고 드는 녀석 탓에 나는 항복했다. 하도 만지작거려서 조금은 우그러진 서류 봉투를 건넸다. 보내는 이조차 적혀 있지 않은 봉투를 둘러보던 녀석이 그다음 내뱉은 내 말에 조금 멈칫했다.
“너 결혼하래.”
물론 한재희는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녀석은 이내 그 서류들이 엄마에게서 온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녀석은 내가 한참을 머뭇거렸던 봉투를 시원하게 찢어 버렸다. 문서들과 편지, 사진들이 바닥에 후두둑하고 떨어졌다.
요새 누가 이런 식으로 선을 보냐며 구시렁거리는 녀석의 곁에서 나는 관심 없는 척 거리를 두고서도 사진 속 여자들의 얼굴을 살피려 애를 썼다. 얼마나 예쁜가. 얼마나….
“네 선에서 적당히 잘라.”
“…왜, 그냥 나가 보지.”
녀석이 대강 편지를 훑어보다 덮어 버리자 난 나도 모르게 툭, 말을 던졌다.
말하자마자 아차 했다. 진짜 이건 실수였다. 내 무료한 삶의 낙 중 하나가 한재희 심기 불편하게 하기가 맞긴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귀찮다고,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지지고 볶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쏘아붙여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떠 보는 듯한 말투가 되어 버려 나 또한 당황하고 말았다.
“넌 내가 선 봤으면 좋겠어?”
“아, 그거 소개팅이래. 선까지는 아니….”
“넌 이게 소개팅으로 보이냐?”
다 집어넣었던 서류를 거꾸로 뒤집자 종이와 사진들이 다시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마치 입사 지원서처럼 각 여자들의 신상과 집안, 게다가 그것에 대해 간곡한 말투로 설명해 뒀을 엄마의 메시지가 눈에 선해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이거 봐. 이럴 거라고 했잖아. 당장 엄마에게 전화해 따지고 싶어졌다.
타이밍이 안 좋기도 했다. 퇴근하는 녀석 곁에서 흘려듣기로, 응급으로 들어왔던 환자는 결국 살리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신도 아니고, 의사가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죽음이 익숙해지는 사람이 있을까.
그냥 내일 말하거나, 당직실에 두고 올 걸 그랬다. 하지만 후회해 봐도 이미 늦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녀석을 달래려 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보통 2~3년차에 결혼 많이 한다며. 우리 아빠도 엄마랑….”
“너네 아빠랑 내가 무슨 상관이야.”
“…왜 그렇게까지 날을 세워, 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엊그제도 서로 욕을 인사 삼아 긁고는 했지만 그때처럼 그저 성질을 내는 거랑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거랑은 좀 다르다.
20년 넘게 같이 살면서 둘 사이에 싸우는 일이 뭐 한두 번일까. 하지만 진짜 치고 박고 싸운 적은 없었다. 어차피 신체적으로도 애초에 싸움이 안 됐고, 약간 토라져도 뽀뽀로 미적지근하게 풀리는 이상한 관계였으니까. 나 역시도 녀석이 국시에 합격하고 나서는 전적으로 치료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대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파생된 싸움은 잔챙이처럼 우리끼리의 소소한 일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알잖아 너도. 우리 엄마 아빠가 널 얼마나….”
“네가 뭘 안다고.”
“…내가 뭘 모르는데.”
차라리 욕을 하면 몰라. 이렇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려는 한재희를 난 이길 수가 없다. 이긴 적도 없다. 이런 적은 한 손에 꼽으니까. 난 당황해서 약간 코가 막혔다. 이리저리 날뛰는 심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 입술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것처럼 차가운 표정의 한재희는 그 불길한 침묵 속에서도 가만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무엇을 잘못 건드렸는지를 알 수 없어 그저 억울한 얼굴로 녀석의 눈을 마주 볼 뿐이다.
그렇게 보지 마,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닥쳐,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해.”
“…지금 네가 알아서 하는 수준이야?”
“뭐?”
그래도 약간은 누그러지려 했던 재희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입술을 힘주어 깨물다, 이윽고 말을 이었다.
“흉부외과 때려치워. 나 케어하는 것도 관둬.”
“…….”
“그래, 이미 갔으니 어쩔 수 없다면 내가 여기서 나갈게. 내가 진작 내려간다고 했잖아.”
소파를 박차고 나가려는 날 재희는 간단하게 휘어잡았다. 손목이 붙들린 나는 휘청거리면서 다시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 거지 같아. 치밀어 오르는 눈물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코와 귀 끝이 새빨개져 화끈거리는 느낌이 났다. 그보다 더 크게 화끈거리는 손목이 날 괴롭게 했다. 멍이 들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쥔 한재희의 악력에 괴로웠다.
진짜 힘들다. …아, 정말 못 살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너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네가 결혼했으면 좋겠어.”
“…….”
“남들처럼.”
재희가 등지고 선 TV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양가 없이 떠드는 예능 프로그램 속 게스트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효과음이 터지고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연이어 이어졌다. 난 고개를 떨궜다. 지들이 보기에도 이 상황이 웃긴가 보지.
나도 웃고 싶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을까.
고개를 숙인 내 머리 위로 푹 몰아쉬는 한숨이 엷게 느껴졌다.
손목을 쥐던 악력은 차차 누그러져 거의 걸친 수준이 되었지만, 나는 굳이 그것을 뿌리치지 않았고 재희 또한 그대로 날 잡고 있었다. 주인을 닮아 부정맥으로 날뛰는 내 맥박은 서툴게 큰 박 작은 박으로 이랬다저랬다 재희의 손끝을 건드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 보고 차분히 가슴을 다스려 보려 해도, 내 몸은 이미 내 자율과 통제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니, 사실 단 한 번도 내 뜻대로 되어 준 적이 없는 불통이라, 의식적인 째깍 소리에 맞춰 들숨 날숨을 쉴 뿐이었다.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가슴에 내려앉는 재희의 목소리가, 차가운 듯하면서도 가벼웠다.
“연애 한 번 안 해 보신 모태 솔로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사귄다고 다 결혼하는 거 아냐.”
빈정거리는 녀석의 말에 나는 또 울컥 눈물이 났다.
“…알아.”
“소개팅이든 맞선이든 나간다고 해서 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알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내 말에 한재희는 질렸다는 듯 말이 없었다. 알고 있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걸.
“…그래. 알겠어.”
“…….”
“넌 내가 소개팅하길 바란다 이거지.”
난 부정할 수도 없고 긍정할 수도 없어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침묵을 곧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재희가 손을 놓았다. 욱신거리는 손목이 화끈거렸다. 워낙 뜨겁던 손바닥이 사라진 탓에 한기까지 느껴졌다.
빈틈없이 어깨 위로 재희의 손길이 놓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 알겠어.”
“…….”
“‘네 뜻’대로 할게.”
네 뜻. 그러니까… 나의 뜻대로.
재희의 그 말에 뭔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안에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는 표현이 이런 느낌일까. 한 번도 탈 수 없었지만, 자이로드롭 같은 기구를 타면 이럴 것 같았다. 뒷골부터 등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가슴 속의 두근거림과 기계 소리가 서로 다투듯 겹쳐 들기 시작했다.
울리는 이명에 머리가 아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내심 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으면 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내 두근거림까지 엿듣지 못하도록. 영리한 녀석이 거짓말투성이인 내 말에 눈치챌까 봐 나는 몸을 뒤로 빼 보지만, 안락하고 낡은 소파는 나를 가두는 데 보탬이 되고 말았다.
진작, 정말 진작 버릴 걸 그랬지, 이 소파.
“대신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 알지, 한정현.”
안경을 벗은 한재희의 얼굴은 묘하게 다르다. 피곤한지 눈자위 근처가 어두웠지만 오히려 눈빛은 더욱 선연해졌다. 꾹 다물린 아랫입술은 약간은 부르터 있지만 핏기 없는 내 입술보다야 붉고 도톰했다. 그 입술의 붉은 기가 눈자위에 가득한 피로한 눈동자 앞에서, 마치 송곳니를 드러낸 짐승 앞에서 벌벌 떠는 초식동물처럼 나는 처연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다. 날 망가뜨리는, 정말 유일한 주문과도 같은,
“각오하는 게 좋을걸.”
너의 눈.
안경을 썼을 땐 렌즈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둘만이 가득한 공간에서는 늘 날것 그대로 나를 투영하고 마는 한재희의 눈. 네 살 그 저물던 밤부터 스물아홉의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강요하게 만들었고 마치 그에겐 나밖에 없다고, 세상 속에 오직 나만이 한재희를 감쌀 수 있다는 책임감 혹은 과도한 자신감을 비롯해주는, 저버릴 수 없게 하는 그 상처받은 눈.
세상에 혼자 남겨져 처절하게 울던, 네 살 때의 너. 그 흠뻑 젖었던 눈으로 날 보았던 어린 재희로 돌아가 버리는 매 순간.
“…이번 건, 평소의 보상으론 택도 없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나만을 봐 줬으면 하는, 내게 입을 맞추는 너의 두, 눈….
그래. 뽀뽀가 뭐 어때서.
닳는 것도 아니고. …키스가 뭐 어때서.
문제는, 그래. 가장 문제는.
내가 이 키스에, 달아올라 버린다는 점이다.
…그것도 나만.
***
아픈 건 싫었지만 아플 때마다 날 안아 주는 엄마의 품은 좋았다.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쓸 만큼, 나에게 누군가의 체온은 절대적인 위로가 되었다. 입맞춤도 마찬가지였다.
쓴 약을 삼키는 것도 좋았다. 날 칭찬한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해 주었던 뽀뽀는 감촉만으로도 절대적인 보상이 되었다. 네 살의 나 역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펑펑 울고 있던 녀석 앞에서 나는 녀석을 끌어안아 주려 팔을 내뻗었다가, 그걸로도 모자라겠다 싶어서 뽀뽀를 했었다. 보상을 받은 한재희는 울음을 멈추었다. 네 살에도, 열네 살에도, 스물네 살에도. 그리고….
그리고 뽀뽀가 키스로 바뀌어 버린 역사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내게 키스는 한재희와의 경험이 전부다. 엄마 아빠하고 키스를 할 리가 없었으니까. 연애 경험 따위도 없었다. 그래서 평범한 키스가 어떤지 잘 모른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키스신을 감흥 없는 척 보면서도, 난 속으로 난 녀석과 내가 혀를 섞는 장면을 대입하곤 했다.
내 뺨을 감싸는 큰 두 손. 입술에 닿는 따뜻한 체온. 차갑기만 한 내 몸에 가장 뜨거운 부분일지도 모를 입 속을 헤집는 부드러운 감촉까지. 그게 혹자들이 말하는 사랑의 표현 이런 건 아니더라도, 나는 내가 녀석에게 줄 수 있는 따스함이 그것이 전부인 걸 알았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입을 맞추기 전, 그리고 맞춘 뒤 싱긋 웃는 녀석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네 살 때 그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난 무엇이든 주고 싶어졌다.
“으읍….”
하지만 계속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늘 느끼는 거지만, 눈을 감으면 묘하게 평소보다 다른 감각이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 늘 내가 신기해하는 녀석의 향취도, 나보다 높은 체온도 유달리 더 강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그 선연한 감각에 긴장한 나를 달래듯 마주하는 입술이 부드럽다.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이와 입천장을 매끄럽게 쓰다듬던 혀 놀림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나는 입을 열어 주고 혀를 얽었다. 그래 왔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으응, 읏, 읍….”
녀석이 경고한 말 그대로, 오늘의 키스는 달랐다. 아예 각도를 틀어 입 안 깊숙이 들어와서 내 혀를 낚아채는 재희의 움직임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소파에 거의 드러누워 버린 내 위로 자세를 잡은 재희는 아예 내 뒤통수를 손으로 받친 채 더욱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녀석은 모난 곳 하나 없는 점막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잡아채듯 혀를 놀리고 입안의 타액도 숨결도 모두 제 속으로 빨아들일 것처럼 굴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재희의 가슴을 밀어내 보려고 해도, 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의사 놈이 뭐 이렇게 힘이 좋아. 아니… 내가 힘이 없는 건가.
“하아… 하아….”
“피하지 마. 시작도 안 했어.”
녀석답지 않게 헐떡이는 목소리가 또 낯설었다. 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기껏해야 몇 센티. 재희는 코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날 잡아먹을 듯이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재희의 옷깃을 조심스레 잡았다. 하지만 그게 나의 저항이라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거칠게 내 손목을 쥐었다. 아까 겨우 해방되었던 손목이 안정감 있게 녀석의 손아귀 안에 잡혀 들어갔다. 나는 오히려 조금 진정되었다.
“…네가 원했어.”
아니,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냐.
…아니야.
가쁘게 쉬는 숨을 다 토하기도 전에 키스는 이어졌다. 이런 건 낯설었다. 조금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도망칠 힘도 없고, 또… 의지도 없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격정적인 키스가 모두 다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나는 정신이 없었다. 완전히 소파에 몸을 눕힌 채, 내 몸 위에 드리워진 녀석의 단단한 몸이 겹쳐들었다.
그 와중에도 제 몸을 고정시켜 상체만은 누르지 않으려 드는 녀석의 단단한 두 팔에 매달려, 나는 조금 울었다.
키스에 지쳐서 잠든다고 하면 믿어질까. 내가 그랬다. 나중엔 그만하라며 애원하기도 했지만 녀석은 늘 그랬듯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하다가 나도 모르게 발기가 됐던 것도 같은데. 녀석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날 깔아뭉갠 채 키스를 했다. 바지 사이로 녀석의 것 역시 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기분 탓일까.
물론 녀석이 건강하다 보니 낮잠을 자거나 할 때 의도치 않게 발기가 된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게다가 녀석이 선 것을 ‘느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감각에 비하면 방금까지도 뜨겁다고 느껴졌던 혀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타구니 사이로 닿는 녀석의 뜨거움에 화들짝 놀랐지만, 나는 피할 새도 없이 내 허리를 추어올리는 팔에 더욱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재희야….”
“하아….”
“그, 만….”
애원하는 날 내려다보는 눈은 그저 무표정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아니 그 이전에, 이렇게 키스를 하면 화가 풀리기는 하는 건지 나는 묻고 싶었다. 그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데. 그래 좋다. 뭐가 이토록 널 꼬이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건 입을 맞추면 화가 풀렸잖아. 울지 않았잖아. 다 괜찮았던 것 아니었어?
…너는 화가 풀릴지 몰라도 나는 진짜 돌 것 같은데.
“하아….”
길고 긴 키스의 끝에, 목을 젖히고 헉헉대는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재희가 열기 어린 입술과 혀를 그대로 가져갔다. 어딜 도망가지도 못하는 내 나약한 몸뚱이를 욱여 쥔 손과, 마치 흉터를 낼 것처럼 쇄골 언저리를 씹는 녀석을 밀어내다가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조차 한재희는 인간미 없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내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예후를 진찰하듯, 그렇게….
***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기억하는 시간 동안 난, 늘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나 한재희가 내 옆에 있었고, 우린 형제처럼, 또 친구처럼 지냈다. 가족도 아니면서, 형 동생도 아니면서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때로는 싫었지만 사실 좋았다. 내심 계속 그러기를 바랐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태가 지속될 줄은 몰랐다.
몸이 아파서 마음도 유약해진 탓일까. 난 제법 제멋대로가 됐다. 재희가 내게 영원히 그럴 것처럼 구는 게 한편으로는 좋았고 한편으로는 싫었다. 영원이란 건 가지고 싶어도 없으니까. 영생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게는 내일이 영원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날도 많아서, 그럴 때면 모든 것에 환멸이 일다가도 또 태연자약해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진심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지 못할 거잖아.
네 살, 그 작은 어린애 때 공유했던 세상이 하나둘씩 분리되면서 나는 차츰 그것에 익숙해지려 애썼다. 병약한 나와 건강한 재희. 잔머리 조금이 전부인 나와 똑똑하다 못해 뭐든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늘 전교 1등을 도맡던 재희. 의사가 되고 싶어 했던 너와, 내일을 사는 게 매일의 꿈이었던 나.
그 꿈을 이루어 의사가 된 너와, 내일의 끄트머리에 환자로나마 머물게 된 나.
익숙하게 내 팔에 주사를 놓고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혈압을 재며 진찰하는 재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떼를 쓰고 싶었다.
이미 이토록, 우리의 세계는 갈라졌고 다신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영원히 그럴 것처럼 굴지 말라고. 너만 의사인 줄 아느냐고, 다른 의사도 많다며 밀어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그래서 매번 발작하듯이 녀석에게 쏟아 내곤 했다. 나 더 이상 너랑 같이 살지 않겠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해야 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게 응석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영리한 한재희는 늘 그렇듯 내 말을 흘려듣고 들어 넘기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점차 고립돼 갔다. 녀석이 곁에 있는데도 곁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을 수백 번 맞추는 와중에 가끔은 생각했었다. 그래도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좋으니까 보상 삼아 하려는 거겠지. 바쁜 의대생의 일상에, 수험생의 고단함에, 청소년의 호기심에, 메마른 온정에…. 거슬러 올라간 우리의 쉴 새 없는 밤들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다가도 나는 수없이 포기했고 수없이 좌절했다.
그래.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어쩔 것인가.
만에 하나 녀석이 나를 받아준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뭐든 두려워졌다.
사랑하지 않기에 나를 버러지처럼 볼 한재희도, 혹여 날 사랑해서 괴로워할 한재희도 그만큼 두려웠다. 나의 그릇이 그만큼 연약하고 좁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모든 것을 모른 척했다.
***
어떻게 날짜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거의 방 밖을 나가지 않고 지냈다. 밥은 꼬박꼬박 먹었지만 그것도 아침마다 밥상을 들고 올라오는 녀석 덕분이었다. 당직도 없나.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해가 미처 뜨지 않은 새벽녘에도 녀석은 내 방에 들렀다. 나는 물론 자는 체를 했다.
나는 잠든 척 뒤척이며 엎드리려 했다. 하지만 늘 그것은 재희에게 제지되고는 했다. 심장이 약한 나는 엎드려서 자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재희는 심장이 눌리지 않도록 돌아누운 내 어깨를 자연스레 돌려 눕히고, 조금이라도 상체가 경사가 지게끔 자세를 만든다. 그러고 나서 팔에 번갈아 바늘을 꽂는다. 여전히 링거 꽂는 솜씨는 최고인 녀석이 처치하고 나간 뒤에야 나는 눈을 뜬다.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 소리가 지겨워질 때 즈음 일어나면 적당히 죽이 식는다. 수저를 든 나는 마치 돌을 삼키듯 죽지 않기 위해 음식물들을 씹어 삼킨다. 별거 없지만 그래도 그릇을 비운다. 그릇을 치워 주실 아주머니가 녀석에게 전할 말들이 나는 두려웠다.
꼬박 링거를 다 맞고 난 뒤 나는 여느 때처럼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대면한다. 눈이 퉁퉁 부어서 잘 떠지지 않을 정도였다. 참 못생겼다. 봐줄 곳이 큰 눈밖에 없는데 그게 작아지니 볼품이 없다. 분명 퉁퉁 부어 버렸던 것 같던 입술과 목덜미, 쇄골 근처에 찍혔던 멍 같은 입술 자국도 서서히 옅어져 가고 있었다.
난 그게 아쉬워 몇 번 손끝으로 자국 위를 문질렀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래서였다. 오늘은 이모님도 오시지 않는 날이고 혼자 지루했다. 요 며칠 하루에 스무 시간은 잔 것 같아서 더 이상은 잠이 오지 않았다. 책도 TV도 보기 싫었다. 남들의 사랑 놀음 따위 지겨워져서 나는 궁리하다가 문득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버렸다.
갑작스러운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옮겨 꽤 오랜 시간 열지 않았던 방문을 열었다.
***
미술은… 내 꿈이었다.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미술에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졸라 볼 구석도 없이 혼자 포기했다. 늘 그랬듯 내 꿈은 오래 사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건… 뭐. 버킷 리스트 정도로 해 둘까.
엄마 아빠가 시골로 내려가신 뒤에 남은 공간으로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작업실을 꾸렸다. 한재희는 공부방과 같은 서재. 나는… 사실 게임 방을 만들까 했지만 거실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그냥 이 골동품들을 모아 두기로 했다. 나름대로 작업실이 된 셈이다. 부옇게 먼지가 어린 암막 커튼을 열어젖히면 너른 창으로 빛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실내에 들어선 나는 어색하게 이젤 앞에 섰다.
개흉 수술 때문에 무거운 것을 들거나 양팔 모두를 놀리기 어려웠던 내가 그나마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취미는 미술이 유일했고, 특히 두 번째 수술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부모님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떼를 썼다. 뒤늦게 온 사춘기답게 뭔가 꿈을 갖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물감은 나와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물감에 든 유독 성분은 폐마저 덩달아 좋지 않은 내게는 치명적이었고, 오랜 시간 집중하는 것도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 자신의 퇴직을 종용하신 미술 선생님은, 아쉬워하는 날 위해 그 뒤에도 몇 년은 취미로나마 가르쳐주러 들르시곤 했었다. 지루하게 소묘만. 하지만 그걸로도 꽤나 재미를 붙였었다. 끈기라고는 없는 내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일이 되었다.
붓도 연필도, 놓은 지 한참이었다. 커다란 이젤은 그 위에 먼지만을 마치 캔버스인 양 올려 두고 있었다. 이모님이 가끔 들어와 청소하시기는 하지만, 애초에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니 먼지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환이 두려워진 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낑낑거리며 공기 청정기를 가져와 틀었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아 둔 미완작들을 마치 옛날 일기장 보듯 들추며 낄낄대다가 문득 그림 하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언제적이야….”
소묘만이 전부였던 내게.
그림의 모델은 엄마 아빠가 되기도 했고, TV에서 본 귀여운 강아지가 되기도 했으며, 창밖으로 트여 있는 풀밭이나 나무가 되기도 했다. 공상을 소재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모작해서 그린 적도 있었다.
고작해야 20호짜리 캔버스가 나에게는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가 보지 못한 곳도, 경험도, 바다 속의 수영도 그림 안에서는 모두 가능했다. 아주 가끔은, 엄마 아빠 몰래 잔뜩 물감으로 낙서칠을 하고 나면 조금 개운해지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조차도 외면하게 되었다.
바로 이 그림 때문에.
물론 선생님은 별생각 없이 과제를 내주신 것 같았다. 늘 집에서 함께 지내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자화상은 그리기 싫다는 내게 그렇다면 재희를 그려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당황해서 거절 못 한 사이에 재희가 끌려들어 왔고, 모델처럼 이 창가에 날 보고 섰었다. 그리고 난 이젤 뒤에 숨어 녀석을 그리게 됐었지….
완성되지 못한, 이 화폭 위에서도 녀석의 또렷한 이목구비와 그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읏….”
이젤용 의자에 앉은 난 자연스레 다리 사이로 내 손을 가져갔다. 몸을 압박하지 않는 헐렁한 바지 사이로 손을 넣었다. 얼마 전 '그때'처럼은 아니지만 조금은 커진 성기를 쥐고, 나는 조심스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또래의 신체 건강한 남자들도 30대 가까이 되면 아무래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던데. 나는 한창이라는 20대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엔진이 건강하지 않은 자동차가 속력을 낼 수 있을 리 없지. 게다가 최근 혈압 강하제를 복용한 탓에 발기를 시키려 해도 되지 않는 몸이 고마운 적은 또 처음이었다.
만약 내가 건강했다면 그때, 녀석처럼 발기해 버렸었다면….
“응…. 윽…. 하아.”
정말, 주체할 수 없었을 거다. 뭐가 됐든지 간에.
하지만 나는 상상했다. 내가 그린 녀석의 그림을 두고. 날 바라보며 웃고 있는, 따스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어릴 적의 재희를. 그 앞에서 천박하게 다리를 벌린 채 서지도 않는 성기를 마구 비비고 문질렀다. 겨우 나온 쿠퍼액이 질척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급히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에 가슴을 죄자, 저도 모르게 오뚝 섰던 유두가 손바닥에 닿아 흠칫 놀랐다.
키스하지 않았는데도, 입술이 뜨겁다. 입안이 뜨겁다. 그래서 토해 냈다.
“재… 희야, 읏…!”
내게 사정이랄 건 잘 없다. 몽정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니까, 고작해야 이런 페팅이 전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력에 빠져서 나는, 반투명한 쿠퍼액으로 얼룩진 내 손바닥을 보았다. 그 아래, 녀석이 강하게 쥔 탓에 여전히 멍이 남아 있는 손목 언저리를 발견했다. 나는 아무런 자각 없이 질척한 손을 옮겨 여전히 키스 마크가 남겨져 있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더럽다. 병신 같다. 또라이는, 진짜 나다.
“정말… 싫다.”
여전히 그림 속에서 웃고 있는 재희가 미워서, 나는 뚝뚝 흘리던 눈물과 쿠퍼액으로 뒤섞인 손을 가져다가 캔버스에 문댔다. 고작해야 소묘가 전부였던 마른 캔버스 위에 이리저리 손자국이 남았다. 그것도 미처 얼굴에는 가지 못하고 배경에만 조금 질척거린 게 전부였다. 나는 날 바라보고 있는 재희의 그림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정말….”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네게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해야 돌이킬 수 있는 걸까. 나는 울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니, 되돌릴 수 있다면 아예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살기 싫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어지러워진 나는 다시금 커튼을 쳤다. 실내는 깜깜해졌다. 캔버스들 중 가장 안쪽에 재희의 그림을 숨긴 나는 작업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잠이 급하게 몰려왔다.
왠지 오늘 또 꿈을 꿀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병신 같은 자위의 탈력감 때문이었을까.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어찌할 수 없어 나는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따스한 이불 속에서 몸이 녹아내리는 듯 의식이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깜빡인 시야 속에, 문득 흩날리는 낙엽을 본 것 같았다.
열일곱, 그때의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