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유정을 만났다. 그동안 계속 원고 마감 때문에 바빴던 터라, 아니 꼭 원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꽤나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얼굴 까먹겠다. 이제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사는데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만나자마자 유정이 타박부터 한다. 시우는 말없이 웃고 말았다.
“하기야 애 키우면서 원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대답 않는 시우 대신 유정이 알아서 변명 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시우는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고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원고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겸이를 돌보기도 빠듯하기야 했지만 사실 혜린이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자면 못 낼 것도 없었다. 실상은 무경이 일상에 들어오면서 시간을 왕창 앗아갔기에 유정을 만날 시간을 만들지 못한 것뿐이었다.
물론 가장 친한 친구인 유정에게 무경의 얘기를 언제까지나 함구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경이 결혼 얘기까지 꺼낸 마당이니 가까운 시일 내에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할 터였다. 물론 그전에 유정이 무경에게 가진 분노에 가까운 불호의 감정을 어떻게든 희석시켜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결혼이라니.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좋다거나 설레는 감정에 앞서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점심으로 뭘 먹을 거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말이라 더 현실감이 없었다. 시우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우가 말없이 빤히 쳐다만 보자 무경은 입에 넣었던 시우의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면서 조금 흐릿하게 웃었다.
‘음… 물론 내 쪽에서 조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일단 어필은 해 두는 거예요. 내가 배우자나 겸이 아빠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될 때, 가족으로 받아들일 만한 인간이라고 판단이 될 때 받아 주길 바라고 그때까지 기다릴 자세가 되어 있으니까.’
그 말을 하는 무경의 웃음은 어딘가 쓸쓸한 구석조차 있어서 시우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생각하는 동시에 마음이 아파졌다. 무경의 그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자신이 아직은 그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거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지금 잠깐 내 귀를 의심하느라 멍해 있었던 것뿐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아니 생각지도 못한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왜 그런지 아직은 꿈같은 얘기라고 생각해서 멍했던 거라고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겸이가 졸린 상태로 들어오다 문을 쿵 박고 넘어지며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무경이 바로 일어나서 겸이를 안아 들고 부딪힌 이마를 호호 불어주며 달랬다.
그 뒤로 무경은 다시 그 얘기를 꺼낼 생각이 없는 듯 했고, 시우가 다시 말을 꺼내 볼까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쩐지 머쓱했다.
무엇보다… 정말로 현실감이 없었다. 차무경과 결혼이라니. 무경이 다른 오메가와 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연시우와 차무경 사이에 결혼이란 말은 평생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다.
다시 만나고, 서로 마음을 터놓고 확인을 하고서도 그랬다. 그가 집안에서 내쳐지고 자유로운 몸이라고 했어도 여전히 무의식 속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감정과 결혼은 별개인 것처럼, 결혼이란 개념은 시우에게는 여전히 먼 단어였다.
그래서 처음 듣는 순간 멍했고, 먼저 다시 말을 꺼내기도 어색했다. 그래서 그런 상태로 또 며칠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무경은 그런 식으로 자신이 결혼을 조를 입장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대체 어쩌라는 걸까. 그 말은… 나더러 청혼을 하라는 건가.
…….
뭐… 못할 것도 없지.
시우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그냥 박력 있게 내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면 되나? 무경 씨가 해 주는 아침을 매일 먹고 싶다고 하나? 아니면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깨어나고 싶다고 하나?
…….
근데 그건 지금도 거의 그렇게 하고 있잖아. 정확히 매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3~4일은 그러고 있으니….
당신 아이를 낳고 싶다고 해?
아니, 이미 낳았는걸. 겸이 있잖아.
으음… 그럼 뭐라고 하지. 이거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인데….
일단 반지부터 사야 되는 건가? 무경 씨 반지 사이즈가 어떻게 되더라? 액세서리 반지를 착용하는 것도 아니니 반지를 잠깐 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리 사이즈를 물어보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
잘 때 살짝 손가락 치수를 실 같은 걸로 재야 하나….
“야, 연시우!”
갑자기 유정이 시우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어, 어?”
따끔한 어깨를 문지르며 생각에서 깨어나니 유정이 어이없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길래 혼자 심각했다가 실실거렸다가 오만가지 쇼를 하고 있는 건데? 재미있는 일 있으면 같이 좀 알자. 그런 거 공유하려고 우리가 만난 거 아니냐?”
“어… 음… 아니야. 잠깐 어제 겸이 하던 짓이 생각나서….”
시우는 볼을 쓸면서 슬쩍 말을 돌렸다. 말 꺼내기 껄끄러운 주제였는데 다행히 유정이 겸이를 친조카처럼 귀여워해서 화제는 금방 겸이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런데 여기에도 지뢰가 있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다.
시우가 핸드폰으로 겸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자주 찍는 걸 아는 유정은 겸이 얘기를 할 때면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 달라고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 사진에는 무경이 함께 찍힌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깜박한 것이다.
겸이와 함께 있는 것뿐일까.
침대에 잠든 얼굴을 몰래 찍어 놓은 것도 있는데.
그 사실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눈이 화등잔처럼 커진 유정이 제 손에 있는 핸드폰을 급하게 회수하려는 시우의 손길을 잽싸게 피했다. 그리고 몸을 완전히 뒤로 젖혀 시우의 손이 닿지 않게끔 거리를 둔 채 사진을 휙휙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문제의 그 잠든 얼굴이 화면 전체에 떠올랐을 때, 유정의 황당한 시선이 시우에게 향했다.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결국 포기하고 아예 테이블 위로 엎어진 시우의 귓불이 붉었다.
“이거 차무경이잖아.”
“…….”
기가 막혀 하는 목소리에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시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유정이 사진 속의 인물을 몰라서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이 인간 돌아왔어?”
“…….”
“다시 만나고 있는 거야?”
“…….”
“야, 연시우. 너 미쳤냐?”
“…….”
“묵비권 행사하지 말고 일어나. 얼굴 들고 설명을 좀 해 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시우는 난감한 얼굴을 부스스 들어올렸다.
“음… 그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부딪히니 죽을 맛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만날 때 유정이 겸이도 볼 겸 집으로 오겠다고 했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밖에서 만난 참이었다. 집에서 만나면 겸이가 유정을 끌고 아빠 놀이방으로 가자고 하든가 아빠가 사 준 장난감이라고 자랑하면서 무경을 입에 올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얘기니… 시우는 힐끔 유정의 눈치를 살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들킨 게 다행인가. 일부러 말 꺼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 말이다.
“너네 차무경 집에서 반대해서 겸이까지 낳고도 헤어진 거잖아. 뭐야. 그 집안에서 다시 받아주기라도 한대? 그래서 다시 만나기로 한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아니라고?”
유정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어서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무경 씨가 집안하고 절연을 하고 나왔어.”
“절연이라니….”
유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는 기색이 선연하다.
“혹시 차무경이 알거지가 돼서 너한테 빌붙으려고… 아니 너한테 돈 몇 푼 쥐여 준 거 그거 다시 뺏어가려고….”
“아니야, 그런 거.”
시우는 쓰게 웃었다.
“아닌지 긴지 어떻게 알아. 연시우 넌 똑똑한 거 같으면서도 가끔 바보짓을 해서 믿을 수가 없어. 아니, 사실, 사람이 사랑 앞에서는 바보가 되는 법이긴 하지. 눈에 콩깍지가 씐다는 얘기가 왜 있겠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는… 제 자식까지 버리고 2년 반이나 지나서 돌아온 알파 따위를 믿어? 너 혹시… 겸이 때문에 그래? 아이가 있으니 다 참고 아이 아빠랑 합치는 게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야?”
“아니라니까.”
“너 혹시…”
유정은 시우의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훑으며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거 차무경 때문이야? 그 인간까지 먹여 살려야 돼서?”
큰일이다. 이제 유정의 머릿속에서는 차무경이 무책임한 한량에서 집에서 쫓겨나 시우에게 빈대 붙어 살려고 하는 기둥서방의 이미지로 발전한 모양이었으니.
“그거 아니야. 내 책 내 주기로 한 출판사가 무경 씨 회사인 걸.”
“…뭐?”
“…….”
“M&S 미디어가 차무경 꺼라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유정의 의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눈매가 더욱 좁아진다.
“바지사장이라거나…?”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도리도리.
“회사 차린다고 빚만 잔뜩 있다거나…?”
어이가 없어서 유정을 조금 노려봤다.
“…….”
그제야 유정이 결국 한걸음 물러선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뭐, M&S 미디어는 신생이라도 자본도 탄탄하고 마케팅 능력이 좋아서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하긴 해. 실제로 한창 잘나가고 있기도 하고…. 진짜라면 최소한 빈대 붙을 생각으로 널 찾은 건 아니겠네.”
시우는 또 한 번 그저 고개를 끄덕 하고 말았다.
“그래서 넌 어쩔 생각인데. 결혼할 거야?”
“음….”
시우는 뺨을 긁적였다. 방금 반지 치수를 어떻게 잴까 생각하긴 했지만….
“얘기가 잠깐 나오기는 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
유정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중하게 생각해서 해. 그런 건 그렇게 급하게 덥석 결정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평생이 달린 문제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또 인상을 팍 쓴다.
“근데 절연은 왜 했대? 자기가 끊고 나온 거야, 사고 치고 쫓겨 나온 거야? 혹시 진실은 따로 있는데 마치 너 때문에 끊고 나온 것처럼 말한 건 아니겠지? 아니, 진짜 너 되찾으려고 나왔다고 한들 왜 2년 반이나 걸렸대?”
“그때… 헤어질 무렵에 사고가 있어서. 무경 씨가 꽤 심하게 다쳤었거든. 치료받고 재활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나 봐.”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유정에게 할 얘기는 아니었다.
“심하게 다치다니, 혹시….”
유정이 몸을 바싹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혹시 아래쪽에 문제가 있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새 오메가 만나기는 무리고 옛정에 기대서 어떻게 해 보려고….”
유정이 말하는 아래쪽이 다리를 말하는 게 아님은 명백했다.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야, 아니야.”
“너 그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절대 아니야. 당장은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것 같지. 근데 섹스는 사랑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읍.”
“어유, 좀….”
시우는 당장 팔을 뻗어 유정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위를 살폈다. 둘은 카페 안에 있었고 바로 옆 테이블이 비어 있긴 했지만 음악 소리가 잔잔한 편이라 아예 소리가 퍼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때와 장소를 좀 가려라, 응?”
“진짜 아니야?”
시우의 손을 떼어내며 유정이 눈매를 좁힌다.
“아니야.”
시우가 이번에는 눈에 힘을 주며 강하게 대답했다.
“흠.”
유정은 팔짱을 끼며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한참을 그 상태로 시우의 얼굴 표정을 샅샅이 살피더니 결국 졌다는 듯 한숨을 뱉어낸다.
“한번 보자. 그 차무경 씨.”
“…그래.”
“조만간 경환이 결혼식이잖아. 확실하게 마음이 섰으면 그날 같이 오든지. 다들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어… 글쎄, 그건 좀….”
“왜.”
“바쁘지 않을까.”
유정이 코웃음을 쳤다.
“토요일이잖아.”
“…물어는 볼게.”
시우의 어정쩡한 대답을 불만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유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생각하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무경 씨 다시 나타났다고 하니 이윤성이 알면 뭐라고 할지 기대가 되긴 하네…. 절연했다는 둥 하는 얘기는 절대 하지 마. 그 인간이 옳다구나 하고 또 무슨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지 모르니까. 에이 씨, 그 인간 볼 생각을 하니까 아예 너 차무경 씨랑 당장 결혼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물론, 이렇게 순간적인 기분으로 결혼을 결정하면 안 되긴 하지. 지금 하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야. 알지? 그래도… 뭐, 반지 같은 거 없어? 커플링 비스무리한 거나. 그럴싸한 걸로 하나 장만해서 그날 끼고 오는 건 어때?”
유정은 갑자기 혼자서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하며 황당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결국 시우는 웃고 말았다.
***
돌아오면서 전화를 했더니 무경이 겸이를 데리고 있다고 해서 곧장 무경의 집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아, 시우 씨 왔어요?”
침실 쪽에서 무경이 나오며 반갑게 웃었다.
“겸이는요?”
“방금 잠들었어요. 침대에 눕혀 놨어.”
침실로 들어가니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잠든 겸이가 보였다. 통통한 볼에 밀려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와 있다. 뽀뽀라도 해 주고 싶지만 씻기 전이라 이불만 살짝 토닥거려 주고는 금방 방을 나섰다.
“그나저나 무경 씨 오늘 웬일로 일찍 왔네요? 요새 계속 바쁘더니.”
재빨리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무경이 소파가 있는 방에 따듯한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가니 손목을 잡아 당겨 옆자리에 바싹 붙여 앉힌다.
“오늘은 어쩌다 시간이 비었어요. 내일부터 다시 바쁠 것 같고… 아마 한동안은 주말 평일 구분도 없을 것 같아.”
역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시우는 경환의 결혼식에 같이 오라는 유정의 말을 씁쓸하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보다 시우 씨,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물어보세요, 하듯이 시우는 찻잔에 입술을 대며 물끄러미 무경을 바라보았다. 시우를 마주 바라보는 무경의 얼굴은 어딘가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MK 일을 다시 하겠다고 하면… 시우 씨는 싫겠죠?”
***
“어… 지금… 뭐라고….”
시우는 되물으며 조금 말을 더듬었다. 못 들은 건 아니다. 지금, 무경이 분명 MK라고 한 거 같은데.
MK라니. 되돌아간다는 뜻일까? 그럼 나는? 겸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금 전까지 프로포즈는 어떻게 할까, 반지는 어떤 걸로 할까, 오늘 밤에 몰래 손가락 사이즈를 재야지, 하면서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이게 뭐야… 바로 며칠 전만 해도 결혼하고 싶다는 듯이 말해 놓구선.
“시우 씨? 연시우? 자, 잠깐만. 시우야, 왜 울어?”
무경의 당황한 목소리가 귓전에 부딪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눈물방울이 뚝 떨어지면서 다시 시야가 맑아졌다. 잔뜩 당황한 표정의 무경이 시야에 들어찼다가 다시 흐려졌다.
“어… 왜 갑자기 눈물이….”
시우는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스스로 조금 놀랐다. 눈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 앞에서 울어 본 일은 지금까지 살면서도 몇 번 없었다. 좀 놀랐을 뿐인데 왜 이렇게 애처럼 눈물이 쏟아지지.
시우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런데도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르고, 마치 지난 3년간 참은 걸 이번 기회에 다 쏟아내 주겠다고 하듯이 끊임없이 흘러 넘쳤다.
급기야 끅끅거리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 되어 시우는 되레 당황했다.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시우야, 이렇게 울 정도로 싫으면 안 해. 네가 싫어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연시우, 나 좀 봐.”
놀란 무경이 두 손을 뻗어 시우의 뺨을 감쌌다. 티슈를 뽑아 눈가를 닦고 이마며 젖은 눈가며 입술에 연신 입을 맞춘다.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 난처함과 곤혹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화를 내거나 차갑게 외면하는 시우는 본 적이 있어도 이렇게 눈물을 후드득 떨구며 우는 건 또 처음이라 무경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처음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처음 청담동 빌라에서 만났을 때도 시우는 불쑥 눈물을 보였었다. 물론 눈물이 비치자마자 곧장 욕실로 숨어 버렸으니 무경 앞에서 울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시우는 그때 저 때문에 운 거였었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줘서 시우를 울린 거였으니.
그리고 지금도, 시우는 저 때문에 울고 있다. MK라는 단어 하나로 이렇게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울 줄이야. 대체 그 이름 하나에 속에 맺힌 게 얼마나 많길래.
우는 얼굴을 품에 바싹 끌어안자 금세 옷이 뜨뜻하게 젖어 들었다. 달아오른 얼굴은 어린 아이보다도 체온이 높은 느낌이다. 무어라 말을 건넬 상황도 아니라 무경은 그저 아이를 달래듯 등을 쓸어 주고 입을 맞추며 스스로 진정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을 무경의 품에서 끅끅거리며 울다가 티슈 한 통을 거의 바닥내고서야 시우의 눈물이 멎었다.
***
“…미안해요.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시우는 차가운 물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쑥스러운 듯 눈을 피한다.
세수를 하고 오겠다는 걸 그냥 붙잡아 앉혀 놓고 무경이 수건을 찬물에 적셔 가져다준 참이었다. 욕실에 들어갔다가 또 예전처럼 문을 잠그고 틀어박혀서 혼자 울 것 같아서였다. 제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렇게 울게 내버려 두는 일은 이제 싫었다. 제가 울렸으니 울더라도 보이는 곳에서 울게 하고 달래는 것도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다.
“미안하긴 내가 미안하지. 밑도 끝도 없이 말을 꺼내서 놀라게 했나 봐.”
무경은 시우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내려놓고 부엌에서 가져온 물을 조금 먹였다. 눈을 내리깔고 앉은 시우 옆에 무경도 자리를 잡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음….”
시우가 먼저 목을 흠흠 다듬었다. 눈앞이 캄캄한 건 캄캄한 거고 일단 얘기는 들어 봐야 했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감정이 앞섰지만, 무경은 아직 MK의 일을 할 거라는 말밖에 한 것이 없었다. 조금 감정이 가라앉고 나자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미리부터 이렇게 소란을 피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화끈 열이 올랐다.
“제대로 말도 못하게 눈물 바람부터 해서 죄송해요. 그러니까… 어… MK로 돌아간다고요?”
시우가 말을 하는데 목소리 끝이 또 조금 갈라져서 무경은 속으로 저의 무신경함에 혀를 찼다. 조금 더 말을 다듬어서 내놓았어야 했는데. 무경이 내놓은 말에서 시우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치달았을지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니,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냥 이 자리에 있을 거고 아무데도 안 가요. 겸이를 빼앗길 일도 없고 우리 관계에 그 사람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일도 절대 없을 거야. 나는 그냥 일을 하는 것뿐이고, 단지 직장을 어디로 하느냐의 문제 같은 거예요. 하지만 시우 씨가 싫다고 하면 나는 그쪽과 관련된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니까.”
시우는 빠르게 말을 내어 놓는 무경을 입을 꾹 다문 채 빤히 쳐다보았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무경의 얼굴은 진지해 보였고 허투로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믿을 수는 없었다.
무경을 믿을 수 없다기보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거였다. 그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핏줄조차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끊어 내는 인간들이었다. 무경을 다시 데려간다는 것은 집안의 일원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얘기일 텐데, 그들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처럼 저와 겸이까지 받아들이고 인간답게 대접해 주리라는 기대는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걸 무경이 모를 리가 없는데, 어째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시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무경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 사람들이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어서 극우성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갖추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에요. 아마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지금까지처럼 살겠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한평생 그렇게 믿고 살아온 신념 같은 것들을 그리 쉽게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한 건 그런 근본적인 것과는 좀 다른 얘기예요.”
다르다니, 뭐가 어떻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시우의 손을 당겨 잡으며 무경은 시우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MK 내부적으로 좀… 곪아 있던 문제들이 대대적으로 터졌거든. 외부에 드러나지 않아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조만간 MK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거예요. 경영진이 대폭 물갈이될 거고, 일가 사람들은 이제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될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일손이 많이 부족해질 거라서 내가 필요하게 된 거지. 하지만 나를 청한 건 MK 일가가 아니라 친족들을 제외한 이사들과 주주들이고, 나는 MK의 차무경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친족들과는 업무 정리 차원이 아니라면 다시 볼 일은 없을 거고, 당연히 시우 씨나 겸이가 그 사람들을 볼 일도 없으니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돼요.”
무경이 다소 긴 얘기를 빠르게 이어 가는 동안 시우의 눈에서 조금씩 이해불명과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얘기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뭐라 말할 수 없는 흐릿한 불안감만은 고집스레 자국을 남기며 떠돌고 있었다.
무경은 두 손으로 시우의 볼을 감싸 제게로 당기고 똑바로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우 씨, 내가 전에 나 믿으라고 했죠? 내가 아무려면, 여기까지 와서 다시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겠어? 걱정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마요. 나는 시우 씨가 원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안 해. 당신이 싫다고 하면 그 제안도 다 거절할 거야. 진짜야.”
눈을 도르륵 굴리며 무경을 훑어본 시우는 일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 무경은 불현듯 심장이 조이는 듯한 초조함을 느꼈다.
날 못 믿는 건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과거에 시우를 속여 왔던 것 때문에 내가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무경은 다급하게 시우를 끌어당겨 안았다. 어깨와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믿지 못하겠으니 이제는 정말로 헤어져야겠다고 할까 봐 숨이 턱 막혔다.
“연시우. 내가 너한테 얼마나 목매고 있는지 잘 알면서 어떻게 그런 눈으로 날 봐. 내가 어떻게 해야 안심을 하겠어? 나한테 제일 소중한 건 넌데, 너를 걸고 날 믿으라고 할 수도 없잖아. 어떡할까. 아까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해. 없던 일로 하자. 그냥 지금까지처럼, 나는 출판사 하고 너는 그림 그리고 그렇게 살 거니까. 어?”
“…ㄴ 해요.”
귓가에서 시우가 뭔가 우물거렸다.
“…뭐?”
“결혼… 하자고요.”
무경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바싹 시우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도 힘이 쑥 빠졌다.
그런 무경의 어깨를 슬쩍 밀어내며 시우가 몸을 빼고 무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경은 일전에 결혼을 먼저 언급했던 주제에, 마치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다.
“반지도 준비하고, 뭔가 그럴 듯하게 상황도 만들어서 청혼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미리 침도 발라 놓고 내 거라는 도장도 찍어 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무슨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벌어지고 하는지 도대체 따라갈 수가 없으니.”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상태로 시우가 일부러 부루퉁한 척을 하며 말을 뱉는다.
“어… 반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무경이 불쑥 반지 얘기를 한다.
역시 반지 없이 청혼하는 건 안 되는 건가. 그래도 괜찮다고, 다 좋다고 덤벼들 줄 알았더니.
시우는 조금 실망하면서도 어린아이 달래듯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무경 씨 반지 사이즈를 몰라서 반지는 못 샀어요. 내일 당장 사서 줄 테니까 일단은 구두로 먼저 약속을….”
“아니, 반지 있다고, 나한테.”
“…네?”
시우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무경이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서재로 쓰는 방에 들어가서 뭔가를 뒤지는 것 같더니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얼른 다시 돌아온다.
시우의 앞에 서서, 얼핏 봐도 반지가 들었을 것 같은 벨벳 케이스를 들고 무경은 또 잠깐 망설였다.
“음… 이건 프로포즈 링이라기보다는… 그냥 나도 예전부터 시우 씨랑 이런 거 하고 싶어서 사 뒀던 건데… 뭐 상관없나.”
그러면서 무경이 시우에게 반지 케이스를 내밀었다.
“시우 씨 지금 나한테 청혼하는 거 맞죠? 여기 반지.”
시우는 갑자기 등장한 반지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반지는 무경 씨가 준비하고 청혼은 내가 한다고요?”
“어차피 우리 둘이 결혼하는 건데 반지야 누가 준비했건 무슨 상관이야. 청혼하는 게 중요한 거지. 시우 씨 말마따나 하루 앞일도 알기 힘든데 뭘 또 기다려요. 빨리빨리. 나는 들을 준비가 됐으니까.”
무경은 소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올라앉아 무릎에 손을 올리고 시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무경과 반지 케이스를 번갈아 몇 번 쳐다보다가 시우는 결국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루라도 빨리 청혼하고 약속을 받아 두자고 생각했다.
“차무경 씨.”
시우도 무경과 마주보고 앉아 엄숙한 표정으로 이름을 불렀다.
“네.”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대답하는 걸 보니 어쩐지 뿌듯하면서도 쑥스럽게 느껴졌다.
“어… 음….”
시우가 조금 우물거렸더니 무경이 얼른, 하고 재촉을 한다. 가만있으라고 힐끔 째려보고 난 뒤 심호흡을 했다. 청혼을 할 때 무슨 말을 할지 이것저것 생각하고도 좋은 말이 안 떠올라서 인터넷 검색까지 해 봤는데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하고 싶은 말은 그저 하나뿐이다. 눈을 맞추고 픽 웃었다.
“나랑 결혼할 거죠?”
“당연하죠!”
무경이 대답하면서 손을 척 내민다. 시우는 웃음을 흘렸다. 이 나이 먹고 이건 뭐 소꿉장난도 아니고… 하지만 소꿉장난이라면 이렇게 미칠 듯이 심장이 두근거리지는 않겠지.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 자리한 건 심플한 플래티나를 바탕으로 가운데 작고 푸른 보석이 박힌 커플링이었다. 커플링. 예전부터 이런 게 하고 싶었다던 말이 다시 떠올라 시우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둘 중에서 조금 더 큰 반지를 꺼내서 무경의 손을 당겼다. 긴 손가락에 끼워 넣고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그 손을 잡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무경이 슬쩍 손을 빼서 테이블에 놓아둔 반지 케이스를 가져갔다. 그리고 남은 반지 하나를 빼 들었다.
“자, 이제 시우 씨 손.”
무경이 내놓은 손 위로 제 손을 올리는데 어쩐지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이거 봐요.”
무경이 시우의 눈앞에 반지를 들이밀었다.
“내 거에도 똑같은 게 새겨져 있지만.”
반지 안쪽에 음각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문구는 ‘시우 & 무경’이었다.
으… 유치찬란.
시우는 저도 모르게 풋, 웃음을 토하고 말았다. 이건 절대로 빼서 남한테는 보여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평소의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로 이걸 새겨 달라고 부탁하는 무경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 남자가 다시없을 만큼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닭살.”
시우는 짧게 뱉었지만, 이미 얼굴이고 귓불이고 발갛게 달아올라서 누가 봐도 싫어한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경은 작게 웃고 시우의 약지를 제 손가락으로 살짝 훑은 다음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 넣었다. 반지가 끼워진 손을 말없이 한참 쳐다보더니 두 손으로 시우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그리고 드디어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춰 왔다.
“결혼하자고 해 줘서 고마워, 시우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이 따뜻하다. 그지없는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그 눈이 너무나 애틋해서 시우는 또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이 남자가 좋구나, 생각하면서 시우는 잡힌 손을 당겼다. 그가 순순히 딸려 오자 몸을 조금 일으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붙잡고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
부드럽고 달달하게 시작한 입맞춤이었는데, 어느새 시우는 소파에 눕혀져 있었다. 잔뜩 빨고 부빈 입술은 빨갛게 달아오른 지 오래고 부은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우는 제 파자마 웃옷 단추를 다 열어젖히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무경의 뒤통수를 바싹 끌어안았다. 질척하게 유두를 핥아 올리는 혀의 감촉을 느낄 때마다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아….
무경이 가슴에서 얼굴을 떼자 시우는 감고 있던 눈을 흐릿하게 떴다. 뜨끈하게까지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지면서 한기가 들어 몸이 떨렸다. 뒤통수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면서 시우는 아쉬움을 느꼈다. 열에 녹은 눈동자에 그 아쉬움이 비쳤던지, 내려다보던 무경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번진다.
한 손으로 다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무경은 시우의 손을 들어 살짝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제 셔츠 앞섶의 단추 위에 그 손가락을 걸어 놓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순진한 나이는 아니어서 시우는 입술을 핥으며 조금 떨리는 손으로 무경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깊고 넓게 파인 쇄골과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가슴팍이 셔츠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꼿꼿하게 솟아오른 작은 돌기와 그 아래 근육이 꽉 짜인 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시우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눈가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리자 무경이 시우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녹을 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냥 그렇게 보기만 할 거예요? 손대지 말라는 전시물도 아닌데.”
머리 전체로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어차피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귀며 목덜미까지 빨개진 기분이 들었다.
한두 번 잔 것도 아니고, 정신없이 뒹굴 때는 저도 열심히 만져 댔는데 이제 와서 뭘 부끄러워하는 거야.
시우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 거 내가 만지는데 뭐가 문제라고.
빨간 얼굴을 한 채 셔츠 앞자락 사이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목선도 쓰다듬고 파인 쇄골 안으로 손가락도 굴려보고 손바닥을 펴서 가슴도 훑었다. 무경이 제게 하듯이 꼿꼿하게 선 유두를 손가락으로 집어 비틀고 엄지로 눌러 보기도 했다.
음….
무경이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조금 숙였다.
읏….
무경의 반응에 입을 벌리고 얼굴로 시선을 향했던 시우의 입에서도 불현듯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경이 가볍게 제 위에 얹은 몸을 살짝 들어 올린다 싶더니 아래를 은근하게 비벼 왔기 때문이다. 반쯤 일어선 둘의 중심이 따뜻한 체온을 공유하면서 뭉클하게 눌렸다.
“조금 더 욕심 좀 부려 봐요. 너무 약하잖아.”
허리를 살짝 놀리면서 무경은 제 옆구리와 배에서만 맴돌며 더 내려가지 못하는 시우의 손을 붙잡아 제 바지 지퍼 위로 올려놓았다.
“내 옷 벗겨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허리를 숙여 시우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귓불을 깨문다.
앗, 하고 숨죽인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린 시우가 항의하듯 무경을 밀어내고 웃음이 번진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빤히 구경하듯이 쳐다보니까 민망해서 그렇잖아요.”
“그거야 평소에 잘 안 해 주니까 어떤 표정으로 하나 보고 싶어서 그러지.”
“안 해 주는 게 아니라… 할 틈이 없어서 그런 거죠. 언제나 무경 씨가 먼저 벗어 버리니까.”
내 탓이 아니라며 지지 않고 대꾸하자 무경이 힐끔 눈썹을 치키더니 씨익 웃는다.
“아, 진짜? 그럼 앞으로 가만있으면 시우 씨가 다 해 주는 거예요?”
“…그렇게 구경하듯이 쳐다보고 있지만 않으면….”
뭔가 낚이는 기분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딱히 잘못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시우는 떨떠름한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안 볼게. 안 볼게요. 이러면 되죠?”
무경이 허리를 굽혀 얼굴을 아예 목덜미에 묻었다. 여린 살이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가 시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무경의 어깨를 짚었다.
“아니, 손은 아래로 가야지.”
무경이 어깨로 올라온 시우의 손을 잡아 다시 바지 앞섶으로 보냈다. 그 언저리를 손대기에는 아직 정신이 너무 맑다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손을 더듬어 단추를 끄르고 지퍼를 내렸다. 그 상태에서 잠시 망설였더니 무경의 손이 다시 시우의 손을 잡아 바지 안으로 끌어들였다.
얇은 속옷 너머 뚜렷하게 부풀어 오른 무경의 중심이 만져졌다. 가슴을 빨아들이고 있는 무경의 입속 감촉과 손에 느껴지는 뜨끈한 열기에 시우는 뇌가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재차 가팔라진 호흡을 참아 가며 시우는 손을 움직여 무경의 중심을 자극했다. 기둥을 쓰다듬고 귀두 끝 부분을 문질렀다. 얇은 천 위로 축축하게 체액이 스며 나오는 게 느껴졌다.
흑, 하며 무경이 시우의 가슴에 젖은 호흡을 뱉어 낸다. 명백하게 흥분하는 무경의 반응에 시우의 기분도 점점 고조되었다. 민망하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는지, 시우는 슬쩍 손에 잡히는 속옷을 끌어내리고 맨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슬한 음모 사이로 단단하게 일어서 꿈틀거리는 무경의 중심이 손에 잡혔다. 탄력이 생긴 고환과 숲에 잠긴 뿌리와 열을 내는 기둥을 손가락으로 감아쥐고 힘을 조절해 가며 주물렀다. 아래위로 몇 번 쓸어 대다 귀두 끝의 잔뜩 젖어 있는 부위를 엄지로 끈적하게 문질렀다.
“흐앗….”
갑자기 신음을 질러 댄 건 무경이 아니라 시우였다. 무경이 콱 하고, 제법 세게 시우의 가슴을 물어 버린 것이다.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중심을 놓아 버리자 무경이 시우에게서 몸을 떼고 일어났다. 시우의 파자마 바지 허리께에 무경의 손이 닿는다 싶더니 속옷째 바지가 끌려 내려갔다.
“아…?”
무경은 거친 호흡 외엔 말도 없었다. 급하게 벗긴 옷을 던져 버리고 시우의 한쪽 다리를 소파 등받이에 걸쳐 올리더니 곧장 다른 쪽 허벅지를 잡아 옆으로 잔뜩 벌렸다. 벗겨진 아랫도리가 무경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자, 잠깐만.”
시우는 당황했다.
“이, 이건 너무….”
조명도 너무 밝았고 침대가 아니라서 가릴 만한 이불조차 없는 상황이다. 당혹감에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손을 내려 앞을 가리고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허벅지를 틀어쥔 무경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무어라 항의를 할 새도 없이 무경은 시우의 것을 입에 넣어 삼켰다. 그리고는 핥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곧장 거세게 빨아 당겼다.
“아!”
순간적으로 눈에 별이 번쩍하며 등줄기로 전기가 내달았다. 허벅지를 쥐었던 손으로 고환을 주무르며 무경은 시우의 것을 목 깊숙이 집어넣어 조였다. 무경이 고개를 움직여 흔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사정감이 치솟으며 시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불이 환하다든가 자세가 민망하다는 생각 따위는 먼지 한 톨 남김없이 날아갔다. 시우는 무경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목구멍과 입술로 조였다가 손으로 뿌리를 쥐어짜며 빨아대는 흡입력에 허리가 미친 듯이 떨려 왔다.
“아아… 흐앗….”
절정은 금방이었다. 눈앞이 아찔해진 한 순간에 시우는 무경의 입 안에 잔뜩 정액을 토해 놓았다. 그 사출액을 무경은 눈 한번 찡그리지 않고 전부 받아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하다는 듯이, 이제는 힘이 빠져 말랑해진 시우의 것을 끝까지 빨아 대었다. 단 한 방울이라도 남겨놓지 않겠다는 듯이.
첫 번째 사정만으로도 혼이 나가 버린 시우는 그런 무경을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널브러졌다. 다시 한 번 뿌리부터 끝까지 빨고서야 시우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들어 올린 무경은 미끄러져 내린 시우의 한쪽 다리를 다시 소파 등받이에 올리고 다른 다리는 제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하아… 시우야, 들어가도 되지?”
안아 올린 다리에 진득하게 입을 맞추며 무경이 물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잠긴 듯이 거칠었다. 물어보는 와중에 이미 잔뜩 성이 난 중심은 젖어 있는 입구를 누르며 재촉하듯 쿡쿡 찔러 대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고르던 시우는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오금을 핥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무경의 얼굴이 들어왔다. 녹을 듯이 흐트러진 눈동자와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는 시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하다. 그 욕심이 벅차게 가슴을 채워서 시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휘며 속삭였다.
“응. 빨리.”
그 순간 무경이 얼어 버린 듯 그때까지 하던 동작을 뚝 멈추고 멀거니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리를 내려놓고 잡아먹을 듯 시우의 입술로 덤벼들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 입술을 삼키고 혀를 밀어 넣었다. 기교고 테크닉이고 없었다. 입에 담기는 대로 혀에 감기는 대로, 닥치는 대로 빨고 핥고 삼켰다. 시우가 숨이 차서 얼굴을 돌리자 입술을 벗어나 눈이며 턱이며 귓불이며 할 것 없이 마구 빨아 대었다.
그 와중에 무경은 벗은 채 벌어진 시우의 다리 사이로 앞섶이 닿아 눌려지자 본능적으로 허리를 몇 번 돌리더니 다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벌어진 시우의 다리 아래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움켜쥐어 벌리고는 제 것을 조금 거칠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앗… 하앗….”
시우의 신음과 무경의 거친 호흡이 또다시 엉겨들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붙어 있고 싶어서 무경은 시우의 다리를 한껏 벌리고 제 것을 최대한 깊이 박아 넣었다. 쫀득하게 기둥을 감아오는 내벽이 아찔하도록 뜨거웠다. 시우가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 때마다 내벽의 살도 바르르 떨며 연신 무경을 조였다 풀었다 자극을 해 댔다.
허리를 돌리고 거세게 박고 짓누르며 온갖 동작을 할 때마다 시우는 그에 맞춰 무경을 빨아들였다 뱉고, 물었다가는 또 씹었다.
뾰족하게 돌기를 세운 가슴을 잔뜩 내밀고 목을 뒤로 젖히며 앓는 소리를 내는 시우를 보며 무경은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골반을 움켜쥐고 거세게 박아 넣은 후 시우의 포인트를 내리찍듯이 짓이겼다. 시우가 헉,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꿈틀거리는 무경의 성기를 쥐어짜듯이 조여 온다.
“아… 시우야… 연시우… 크흑….”
무경은 몸을 떨며 시우의 내벽이 조이는 대로 정액을 쏟아내었다. 몸 안 가득 퍼지는 무경의 체액을 느끼면서 시우도 두 번째 사정을 맞았다. 제 배와 무경의 배에 하얗게 체액이 튀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두세 번에 걸쳐 경련을 일으키듯 시우의 몸 안에 정액을 토해 내고는 마침내 힘이 다한 무경도 시우의 벗은 몸 위로 고꾸라졌다.
“하아, 하아….”
“헉헉….”
한동안 숨소리와 짙은 정사의 향기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무경은 시우가 무거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떼고 싶지 않았다.
무경은 상체만을 일으킨 다음 시우의 늘어진 몸에 반쯤 걸쳐 있는 파자마 상의를 벗겨 내었다. 그리고 소파 위에 걸쳐진 다리를 내린 다음 시우를 뒤에서 껴안고 다시 누웠다.
무경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게, 제 것을 계속 시우의 안에 파묻은 채 맨살을 맞대고 누운 자세를 유지한 거였다.
“안 빼요…?”
잠시 기운도 없고 정신도 없어서 무경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던 시우가 시간이 좀 지나자 계속 그 상태로 있는 게 불편해져서 물었다.
“응. 잠시만.”
무경이 시우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
잠시만이라니. 이러고 있으면 또 금세 기운을 차리고 한 번 더 하자고 할 게 뻔한데.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하긴 했지만 역시 소파라 불편하고… 또….
“추운데….”
시우는 중얼거렸다. 난방이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겨울이었다. 열이 식으면서 슬슬 맨 살에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게다가 씻고 싶다. 배도 다리 사이도 뒤도 온통 끈적끈적했다.
춥다는 말에 무경이 몸을 조금 일으켰다. 이제 떨어지려나 했더니 방금 벗겼던 시우의 파자마 상의를 다시 찾아다 몸 위에 덮어 준다. 그리고 제 셔츠를 벗더니 다리에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의 자세대로 돌아가 슬금슬금 몸을 만져 댔다.
조금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조금 봐줘야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그래도 명색이 청혼한 날이니까.
“돌아오는 봄에,”
무경이 팔을 뻗어 시우의 손에 깍지를 끼고 속삭였다.
“결혼식 올리자. 작게 하든, 크게 하든, 시우 씨 하고 싶은 대로.”
“응….”
“그리고 내일은….”
무경이 시우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구청 문 여는 대로 가서 혼인 신고부터 하고.”
시우는 잠깐 멈칫하더니 힐끔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매달려 있는 무경을 쳐다보았다.
무경이 시우와 시선을 마주하며 무구한 표정을 짓는다.
“왜? 침 바르고 도장 찍어야지. 공식적으로.”
“…….”
입 다물고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시우를 보는 무경의 눈에 얼핏 불안감이 떠올랐다.
“대답 안 하네. 싫어요?”
“아니, 좋아요. 근데 차무경 씨.”
갑자기 시우가 풀네임으로 이름을 불렀다.
“응?”
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좋으면 좋은 거지 이름은 왜 불러, 사람 불안하게.
“내가 차무경 씨 잘생겼다고 말했던가요?”
뜬금없는 말에 무경의 눈썹이 의아함을 담아 휘어 올라갔다.
“…아니.”
“섹시하다는 말은?”
긴장했던 무경의 눈꼬리가 살짝 허물어졌다.
“…못 들어 봤는데.”
“귀엽다는 말도 안 했어요?”
무경의 눈도 입도 완연히 휘었다.
“오늘 처음 들어.”
시우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했네. 잘 생기고 섹시하고 귀여운 차무경 씨.”
“응.”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은 했죠?”
“…….”
울렁이는 표정으로 입을 다문 무경의 뺨을 시우가 깍지 낀 손을 풀고 쓰다듬었다.
“대답 안 하네. 분명히 했는데. 기억 안 나요?”
제 말을 흉내 내서 하는 질문에 무경은 결국 또 눈을 휘었다.
“기억력이 나빠서. 자꾸 까먹으니까 자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시우에게 무경은 상체를 좀 더 일으켜 웃으면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시우야.”
“응, 나도요.”
깊게 포개지는 입술을 받으면서 시우는 눈을 감았다.
제 몸 속에 들어 있는 무경의 것이 부풀어 오르고, 허리께에 있던 손이 슬쩍 아래로 내려오는 게 느껴졌지만 어쩌겠나 싶었다. 반쯤은 제가 부추긴 거나 마찬가지고, 나중에야 어찌 됐든 지금은 저도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