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17 (17/24)

작업을 하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자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쉼 없이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눈도 뻑뻑하고 어깨와 허리도 결리는 느낌이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옆에 둔 텀블러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넣어 두었던 온수를 언제 다 먹었는지 이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살짝 혀를 차면서 시우는 몸을 일으켰다. 뻣뻣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좀 하다가 문득 바깥이 조용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겸이가 신이 나서 노는 소리가 제법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는데 그새 잠이 든 모양이다.

텀블러를 집어 들고, 혹시 겸이가 잠이 들었을 경우를 생각해서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탁 트인 거실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겸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기는 했지만 겸이도 집주인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나지막한 TV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어 시우는 소리를 따라 TV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무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품에 얼굴을 반쯤 묻고 잠들어 있는 겸이의 모습도 보였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안겨 있는 모습이 코알라 같다.

무경이 MK에서 겸이를 데려 온 후부터 겸이는 제법 무경을 따랐다.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여전히 시우가 무경과 붙어 있으면 시우에게 안겨 들면서 경계하는 눈초리로 무경을 보긴 했지만, 아예 둘만 있으면 무경에게 자진해서 안기기도 하고 함께 노는 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시우는 사진을 찍어 두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무경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TV에 시선을 고정시켜 두고 있는 걸 보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무경이 보는 건 일종의 연예 정보 프로그램으로 찌라시일 가능성이 다분한 소식들을 전하며 리포터 겸 패널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케이블 프로그램이었다.

무경이 평소에 연예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자주 보던 프로그램도 아니라서 시우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하지만 이제는 출판사를 하고 있으니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루두루 가지는 건가 생각하며 저도 잠깐 벽에 기대어 TV를 들여다보았다.

한창 활발한 활동으로 인기의 정점을 찍고 있던 베타 여배우가 돌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잠적했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해외로 출국한 상태인데 자신의 SNS에 조만간 제 신상과 관련한 비밀을 털어 놓겠다고 공언한 상태여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했다.

패널들은 그녀가 사실 연인 관계에 있는 소속사 대표와 불화를 겪고 홧김에 잠적했다는 설과, 스폰서인 재벌의 아이를 가져 비밀리에 출산을 하기 위해 잠적했다는 설, 혹은 중병을 앓고 있어 치료를 위해 출국했다는 설 등을 떠벌리며 그녀가 털어 놓겠다는 신상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놓고 갖가지 추측을 늘어놓았다.

저건 뭐 노이즈 마케팅도 아니고… 저런 식으로 폭탄 발언을 하고 잠적해 버리면 별별 희한한 루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텐데, 연예인 일, 이 년 한 사람도 아니고 왜 저런 짓을 하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제대로 판단이 안 서는 건가… 멍하니 화면을 보면서 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위 관료들과 인기 연예인들이 비밀리에 모여 초호화 파티를 벌였다는 소식도 있었다. 꽤나 난잡하게 놀아난 것은 물론이고 마약까지 돌았다는 제보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함께 제보된 증거 영상의 화질이 나빠 도통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고 장소나 시기 등 다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도 없어 추가 제보가 없는 이상 수사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얘기들이 오고 갔다.

해외 소식이라며 나온 뉴스도 그다지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해외에서 탈세 스캔들이 터졌는데 명단이 입수된 이들이 조세 회피 수단으로 잘 알려진 버진 아일랜드, 케이만 제도 외에도 제 3의 루트를 뚫었다는 다소 무거운 소식이었다. 얼핏 듣기엔 이 프로그램과 어울리지 않는 뉴스였지만 정재계 인물 외에도 유명 배우들과 스포츠 스타가 연루되었으며 이 프로그램이 중점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과연 그 유명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연말연시에 알맞는 훈훈한 미담도 있었다. 연예인들이 모여 만든 봉사 활동 단체가 한 어린 아이를 도와주었다는 내용이었다. 해외로 입양됐다가 난치병에 걸리면서 파양되어 돌아온 아이가 이들의 도움으로 전문적인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는 고작 일곱 살에 불과해서 시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어린 나이에 두 번이나 버림받은 것도 부족해서 난치병까지 걸리다니. 치료는 그렇다 치고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일단 방송을 탔으니 저 아이는 그래도 지속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걸까.

그 외에도 열애설이라든가 새 드라마나 영화 홍보 인터뷰 등등 여러 소식이 이어졌지만 무경은 더 이상은 흥미가 없는 듯, 리모콘을 들어 TV를 껐다. 그리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 했는데 그 얼굴이 흥미 위주의 연예 프로그램을 본 직후라기엔 지나치게 싸늘했다.

TV를 보면서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집중해서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시우가 무경에게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며 잠깐 서 있는 사이 무경이 먼저 문가에 서 있는 시우를 눈치 챘다.

“어? 나와 있었어요?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시우를 눈에 담자마자 봄 햇살에 때늦은 얼음이 녹듯이 무경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조금 머뭇거리며 가까이 다가가는 시우의 뒤통수를 무경이 살짝 감아 당겼다. 원하는 대로 순순히 얼굴을 내려 주자 무경이 부드럽게 입술을 눌러 키스하고 다정하게 웃었다. 시우가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연예 프로그램을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어요? 누구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도 나왔어요?”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니… 나는 연시우 열혈 팬이라고 일찌감치 고백했는데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흐음….”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찬찬히 무경의 얼굴을 훑었지만 무경은 진심이라는 듯 한껏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진짜로. 나는 연시우보다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고 멋있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왜 연예인씩이나 하면서 다들 일반인인 연시우보다 안 예쁘지. 저 사람들은 반성을 좀 해야 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맑은 표정으로 주워섬기는 말이 너무 과해서 시우는 헛웃음을 뱉었다.

“뭐, 그래요. 그렇다고 쳐요.”

시우는 무경의 손을 떼어 내며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원래 목적지였던 주방으로 가려고 방을 나서는데 뒤에서 무경이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진짠데. 왜 안 믿지. 거울 보면 모르나? 자기 얼굴이라서 객관적인 판단을 못 하나?”

뒤에서 중얼거리는 무경의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 시우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

무경이 보았던 케이블 프로그램은 황색 저널리즘의 대표 격으로 저급한 프로그램이라는 인상이 강한 방송이었다. 찌라시 루머로 치부되는 사건들까지 죄다 가져다가 뻔히 알 만한 대상을 놓고 직접적인 실명 언급만 피하면서 노골적으로 파헤쳤다. 일단 뱉어 놓고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이라 비난 여론도 많았지만 파파라치를 방불케 하는 취재로 단독 특종도 많이 터지다 보니 프로그램 평가와는 별개로 시청률도 높고 주목도도 높았다.

무경이 거기부터 정보를 흘린 까닭은 언론에서 MK와 연관되었다는 냄새를 맡고 미리부터 몸을 사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MK의 이름은 철저하게 숨기고 그저 가벼운 연예계 가십 수준 정보로 접근해서 제작자들도 사건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방송을 내보내도록 한 거였다.

그 프로그램을 내보낸 제작진은 물론, 방송을 시청한 시청자들도 당장은 그 일련의 보도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 연결고리의 핵심 축인 MK에서조차 보도된 내용의 고의성을 의심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건 당연한 거였다.

연루된 각각의 당사자들과 내막을 알고 있는 개인 비서들만이 해당 사건에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무슨 일이 터진 것도 아닌데 그 일을 굳이 상부에 보고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못 할 것이기에 회장 직속 비서실에도 당장은 정보가 취합되지 못했다. 회장 비서실 역시 조세 피난처가 언급된 것에 움찔하긴 했지만 그룹 이름이 언급된 것도 아닌데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애매해서 누구도 그것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지나갔다.

MK 회장실에서 가장 큰 반응을 보인 문제는 갑자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사라진 베타 여배우 문제였다. 사실 일반인들의 관심이 가장 많이 쏠린 사건도 그것이었다. 그녀가 밝히겠다고 선언한 비밀이 무엇일까 이런저런 추측이 떠도는 가운데 가장 사실인 것처럼 떠도는 얘기는 단연 그녀가 정재계 고위급 인물의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였다.

차 회장은 관후를 불렀다. 극우성 형질을 잃어버린 무경을 대신해서 후계자로 내세운 우성 알파인 그가 최근 그 베타 여배우, 이세령과 만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미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와 관련이 있는 문제냐?”

늘 유유자적하던 관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관련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솔직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관후는 흔히 말하는 그녀의 스폰서였다. 그러니까 분명히 관련자이기는 했지만 잠적까지 저와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가 관후에게 불만을 말한 적도 다툰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적하기 며칠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서 이상한 기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후로서도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이런 보도가 터진 것이 더없이 황당한 상황이었다.

“네 아이라도 가졌더냐?”

차 회장이 재차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관후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솔직히 대답했다. 사실 그녀를 계약 정부로도 두지 않고 애매한 관계를 이어 온 것은 그녀가 베타였기 때문이다. 베타 여성과 우성 알파 사이에 아이가 생길 확률은 열성 오메가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문제는 베타 여성과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는 무조건 베타거나 열성 혹은 극열성이라는 거였다. 우성이나 극우성이 태어날 확률은 제로,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불임이 아닌 다음에야 아이가 태어나면 문제가 복잡해질 상황을 MK에서 묵과할 리 없는 것이었다. 계약조차 인정되지 않는 상대였다.

관후의 애매한 대답에 차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피임을 안 했더냐?”

관후는 우성이고 여자는 베타이니 둘 다 사이클에 취해서 정신을 잃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순전히 관후의 부주의였다. 그걸 스스로도 알기에 관후는 할 말이 없었다. 제정신일 때는 물론 콘돔을 쓰지만 가끔씩 술에 과하게 취했을 때는 어땠는지 기억에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피임에 실패해서 세령이 임신을 했다면, 그녀가 아기를 지키기 위해, 혹은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잠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와 계약 정부와 같은 종류의 계약서를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아기를 낳을 경우, MK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건 세령도 알고 있었다.

절대로 아기를 가지면 안 되겠군요, 하던 세령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날도 아마 술에 취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관후는 멍하니 생각했다. 세령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내가 술김에 얘기했었던가?

그녀를 만난 건 1년쯤 전이었다. 극비의 회원제 사교 모임에 그녀가 있었다. 재벌가의 2, 3세 우성 알파들이 열성이나 극열성 오메가들만을 불러 놓고 놀던 자리였다. 빼어난 미모로 인기 몰이 중인 그녀였지만, 베타인 그녀가 어떻게 그날 그들 속에 섞여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관후는 그전부터 그녀를 마음에 두었다.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빠짐없이 챙겨 보고 화보를 찍은 잡지도 모두 사들였다. 심지어 새 작품에 그녀가 주연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한 다리 건너 투자도 했으며 자신이 맡고 있는 계열사의 광고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타라는 이유로 만나자며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술과 약으로 정신이 흐려진 상황에서 그녀가 내민 손을 내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렇게 시작된 관계였다.

***

궁금증만 증폭시킨 상태에서 이세령의 잠적은 계속되었다. 이세령이 발표하겠다는 일신상의 비밀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소문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리고 단발성 뉴스로 치부되었던 소식들 중 일부도 2, 3일 간격으로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해외 탈세 스캔들이 연예계 소식이 아니라 저녁 정규 뉴스 타임에 정식으로 방송되었다. 새로운 조세 피난처로 떠오른 카디마 제도의 한 로펌에서 기밀문서가 유출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이미 1차로 발표된 개인 리스트만으로도 해외에서는 정부 고위 관료가 실각을 하는 등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국인 및 한국 기업명은 1차 리스트에 오르지 않아 국내에서는 아직 외국만큼의 큰 반향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2차 리스트가 발표되면서 대상이 된 유럽 기업들을 중심으로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조만간 아시아 쪽도 언급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또 하나는 연예인들이 참여한 호화 파티 스캔들이었다. 증거 영상이 거의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라 방송 직후에는 가짜 영상으로 낚시질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 이어지면서 그냥 묻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익명 사이트에서 실제로 파티에 참여한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의 이니셜이 하나 둘 언급되기 시작하고, 이 파티가 단순한 1회성 유희가 아니라 재벌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지속적인 로비 활동 중 하나이며 정경유착의 일환이라는 의혹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카더라 통신으로 명확한 근거 없이 웹상을 떠돌며 확산되는 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명 연예인들이 언급되고 마약에 섹스, 로비 같은 자극적인 단어들이 얽혀들면서 루머는 식지 않고 확산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조만간 검찰 조사가 들어갈 것이라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난치병에 걸린 어린아이와 관련한 뉴스에서도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이어졌다. 방송을 보고 아이의 친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 이 소식을 단순한 미담으로 간략하게 내보냈던 연예 프로그램에서는 이 친모와의 인터뷰에 파격적인 시간을 할애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방송을 탄 아이에게 온정의 손길이 쏟아지자 후원금을 노린 게 아니냐는 의심과 우려의 시선도 물론 있었다. 이에 리포터는 인터뷰에 앞서 유전자 검사부터 마쳤으며 결과는 친자 관계임이 확실하다는 소식을 먼저 전했다.

[어떻게 방송만 보시고 본인의 아이란 걸 아셨습니까? 아이 얼굴도 모자이크 처리되었고, 혹시 얼굴이 공개됐더라도 세월이 많이 흘러서 알아보실 수 없었을 텐데요.]

[누군가 제보를 해 줬습니다. 제 아이니까 찾아가 보라는 거예요.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악의적인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구요. 하지만 무시했다가 만에 하나 사실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버릴 수가 없잖아요. 속는 셈치고 일단 찾아가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혹시나 제 아이가 아니더라도, 이런 것도 인연이니 제 아이라 생각하고 데려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얼굴도 목소리도 변조되었지만 친모의 목소리가 떨리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 제 아이라니.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친모는 울음을 터트렸고 리포터는 티슈 상자를 건네며 위로했다. 그녀가 한참 만에 감정을 수습하자 인터뷰가 다시 진행되었다.

[어떻게 아이와 헤어지게 되셨어요?]

[아빠 쪽에서… 아이를 뺏어 갔어요. 저한테는 법적인 권리가 없었거든요. 힘도 없었고… 돈도 없었죠. 저는 그래도 아이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쪽 집안은 그래도 부자여서… 그랬는데… 이렇게 아이가 이런 모습으로….]

친모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흐느꼈다. 그 모습이 정지되면서 인터뷰 영상은 끝이 났고, TV 화면이 실내 스튜디오로 전환되자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패널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이런 건 범죄 아니냐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성토의 장을 벌였다. 인터뷰를 담당했던 리포터는 친모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전했다.

[사실 이분은 아이를 포기한다는 계약 외에 비밀 엄수 계약까지 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진 돈을 전부 위약금으로 날린다 해도 감수할 것이며, 아이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본 이상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일부 네티즌들이 혹시 친모가 아이에게 모이는 후원금을 노리고 이제야 나타난 것이 아니냐며 향후에도 이 모자 관계를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이분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아이가 사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 주기를 오히려 바란다고 했습니다.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으면 아이 아버지 집안에서도 더는 해코지를 못할 것이라고요.]

***

차 회장을 비롯한 주요 집안사람들과 측근들은 모두 회장의 개인 집무실에 모여 이 방송을 보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른 소식이 이어지자 윤정훈 실장이 TV를 껐다. 이 인터뷰에 앞서 이미 전날의 연예 방송과 뒤이은 해외 스캔들 뉴스, 그리고 파티 스캔들과 관련한 웹 반응에 대해서도 이미 브리핑을 마친 상태였다.

분위기는 침통하고 무거웠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특히 마지막의 인터뷰는 이전 방송을 보고서도 누구 하나 이런 반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무경이를….”

차 회장이 목소리를 쥐어짜듯 뱉어냈다.

“무경이를 불러 와.”

***

“네 짓이냐?”

앉으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차 회장이 물었다. 목소리는 거칠고 눈동자는 형형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고 무경은 심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추어 올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저는 이제 이 집 사람도 아닌데 왜 자꾸 오라 가라 하시는 건지….”

“시침 뗄 거 없다. 네 놈 외엔 저런 황당한 짓을 할 놈이 없어. 저 정도의 내부 정보를 빼돌릴 놈도 없고….”

“설마 저밖에 없을까요. 오랜 세월 나쁜 짓도 많이 하셨으니 앙심 품은 인간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너한테 그런 소릴 들을 정도로 나쁜 짓한 건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데에 우리 힘이 컸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부를 축적하는 게 무슨 문제냐. 개인의 부를 쌓으면서 나라 경제에도 이바지 했으니 하등 부끄러울 일 없다.”

무경은 조금 웃었다.

“거창한 얘길 하시네요. 그렇게 떳떳하고 당당하시면 뭐가 문제일까요. 대체 뭐가 무서워서 한밤중에 사람을 불러 놓고 이렇게 추궁을 하시는….”

“큰일을 하는데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가 없어. 사람이 하는 일이고, 또 이 나라는 아직까지 시스템이 바로 잡혀 있지 않아. 정도만을 고집하다간 될 일도 안 된단 말이다.”

무경은 차 회장의 고집스런 말에 한숨을 쉬었다.

“지금 회장님과 저는 이야기의 핀트가 빗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여기서 도덕 교과서를 읊을 생각은 없어요. 필드에서 일을 해 봤으니 현실에서 정석만으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인 건 저도 잘 압니다. 제가 얘기하는 건 그것과 다른 문제예요.”

무경은 제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업하는 것과 자식을 버리는 게 무슨 관련이 있죠? 오너가 탈세로 회사 이익을 착복하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까? 등기 이사로 이름만 올려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거액의 연봉을 타 가는 건요?”

차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보낸 아이들은… 충분한 돈을 주어서 키우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 왔어. 이번의 그 아이는 제대로 관리가 안 된 특수 케이스일 뿐이다.”

무경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충분한 돈은 중간책이 다 가로챘어요. 그룹에서는 관련되는 것 자체를 피하려고 아예 신경을 끊고 관리도 하지 않았으니 버려진 아이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전혀 아시질 못한 거죠. 회장님도 실제로는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특수 케이스가 아니라는 걸.”

“너는….”

차 회장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형형한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그룹에서 쫓겨난 게 불만이야? 이미 나는 네 아들을 데려오면 네가 형질을 회복했든 안 했든 돌아와도 좋다고 했다. 그 시우라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고 싶어? 예전처럼 데리고 살아. 너에게 다른 아이와 정략결혼을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겠다. 다 받아주겠단 말이다. 단지 그 아이와도 법적인 관계는 허락할 수 없어. 극열성에 정부 출신 따위가 우리 일가에 정식 구성원으로 들어오는 꼴은 내가 못 본다. 그냥 살아. 내 눈에만 띄지 말고.”

무경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참 대단하시네요.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로 저와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여전히 회장님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착각하시면서?”

무경은 가지고 왔던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파일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 보였다.

“윤 실장님이 요즘 회장님 혈압 걱정을 하시던데, 혹시나 충격으로 쓰러지실까 봐 미리 패를 보여 드릴게요. 이게, 조만간 언론에 뿌려질 카디마의 3차 리스트입니다. 한국인들과 한국 기업이 포함돼 있어요. 물론, MK 대표 계열사들도 있죠. 당연히 알고 계셨겠지만. 국내 언론에 입막음하실 생각은 마세요. MK 뒤통수 노리고 있는 데가 의외로 많더라고요. 해외 주요 언론에도 다 뿌릴 거고, 국제 보도인 연합에도 뿌릴 겁니다.”

무경은 친절한 얼굴로 또 하나의 두툼한 봉투를 꺼내 차 회장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차후에 검찰에도 보낼 자료입니다. 페이퍼 컴퍼니를 여러 차례 거쳐 탈세한 정황도 다 있으니 발뺌은 어려우실 거예요. 이세령 씨도, 뭐 예상하셨겠지만 차관후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곧 공식 발표할 겁니다. 아이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눈물의 기자 회견을 할 거예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는 연기가 탁월한 배우예요. 심금을 울릴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동시에 방송을 탄 그 친모도 친권 포기를 강요당한 계약서를 공개할 거고요. 거기에 맞춰 그동안 MK에서 내다버린 아이들에 관한 자료를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아 해외 언론과 국제 인권 위원회, 아동 보호 단체, 세계 오메가 인권 협회에 보낼 준비도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파티 동영상 말인데….”

무경은 재미있는 거라도 떠올린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아시다시피 언론에 제보한 건 일종의 낚시죠. 그것만 가지고는 물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원본은 훨씬 길고 아주 화질이 좋아요. 영상도 뚜렷하고 대화도 잘 들립니다. 로비 정황도 확실하게 포착돼 있고… 고모님과 경제 부총리 얼굴이 아주 잘 찍혀 있더군요. 애당초 정치인들이 말을 바꿀까 봐 찍어둔 거라고 하던데, 왜 이런 바보짓을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차 회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꾹 다문 입술 언저리가 살짝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 이러고도 너나 네 주변 사람들이 무사할 줄 아느냐?”

“협박하지 마세요. 저 이제 극우성 몸뚱이 말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어린애 아닙니다.”

무경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누가 됐든 주위 사람 건드릴 생각 마세요.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시면,”

무경은 똑바로 차 회장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싸늘한 눈에 얼핏 광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냥 다 같이 죽고 끝나는 거예요. 더 이상 협박당하고 조종당하면서 사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이걸로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이 무경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를 어떻게 묶어 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무른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 모든 자료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국내에서만 보관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직접 작동을 멈추지 않는 한,때가 되면 서버에서 자동 송신되도록 설정해 놓은 곳도 여럿이에요. 아, 참 그리고 또 하나.”

문 앞까지 걸어가 손잡이에 손을 댄 무경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차 회장을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까 회장님이 단어 선택을 잘못하셨더군요. MK가 저와 시우를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저와 시우가 MK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가 MK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MK를 가져가는 겁니다. 물론 우리에게 그럴 마음이 들었을 경우의 얘기지만요.”

***

계약 종료 2년 9개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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