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19 (19/24)

“응, 나 지금 막 도착해서 로비 들어왔는데… 어디 있어?”

시우는 결혼식장 로비에 들어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겨울이라지만 주말인 탓에 예식장은 초만원이었고 넓은 로비도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아, 시우야, 여기!”

전화기 속에서 들리는 말이 생 목소리로 공기를 타고 동시에 전해졌다. 소리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더니 창가 쪽에서 유정이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옷, 연시우. 간만에 신경 좀 썼구나. 엄청 있는 집 도련님 같다, 야.”

유정이 다가오는 시우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더니 휘파람을 불듯 감탄하며 말했다.

“오버하기는….”

“오버가 아니라 진짜… 야, 머릿결도 예술이고… 피부도 반질반질하잖아. 너 무슨 짓 했냐? 옷도 처음 보는 건데?”

유정이 시우의 팔을 잡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창피하게 왜 이래. 사람들이 보잖아.”

시우는 얼굴이 조금 붉어져서 유난을 떠는 유정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시우의 머리며 피부며 옷차림이 평소보다 공을 들인 상태기는 했다. 물론 경환의 결혼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녁에 있을 무경과의 데이트를 위해서다.

청혼한 다음 날, 정말로 아침부터 구청에 가서 혼인 신고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무경이 시간이 없어서, 당일 느긋하게 식사를 데이트를 한다거나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 밤에 단 둘이 집에서 축하주를 마시기는 했다 - 대신 주말에 제대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오늘도 무경은 출근을 했지만, 회사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저녁에는 돌아오겠노라 약속을 했다.

그래서 시우는 어제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간만에 에스테틱에 발을 들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케어를 받고, 무경이 틈틈이 시우 생각이 날 때마다 사 두었다는 물건들 중에서 특히 그가 좋아할 만한 옷과 액세서리를 골라 차려 입은 참이었다.

제 입을 틀어막은 시우의 손을 떼어 내면서 유정은 시우의 뒤를 기웃거렸다.

“차무경 씨는?”

“못 왔어. 바쁘다고 했잖아.”

“에이….”

유정은 실망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흘깃 시우를 보며 뭐라 말할 듯 입을 벙긋거리더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시우는 그 표정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서 그냥 쓰게 웃었다.

유정은 아직 무경이 못 미더운 것이다. 괜히 시우의 친구들을 보는 게 싫어서 핑계를 대고 안 오는 건 아닌가,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아직 부족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다.

하지만 시우는 무경이 정말로 바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언론에서는 연일 MK 문제가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MK 그룹 친족 경영진의 퇴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면서 일대 파란이 일었다. <내부로부터의 개혁인가, 외부로부터의 혁명인가>, , <친족 경영 시대의 몰락?>, <새로운 시대를 연 MK> 등등 헤드라인들도 화려했다.

총수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무경의 아버지인 차은호 회장이었지만 이름뿐인 명예 회장이며 실권은 이미 베일에 가려진 차기 주자에게 넘어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차기 주자로 차관후와 차무경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아직 누구도 누가 진짜 차기 총수인지는 알지 못했다.

차무경의 이름이 이렇듯 전국을 뒤흔들긴 했지만 아직 얼굴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유정을 비롯한 시우 주변 사람들은 차무경이 MK의 그 차무경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시우의 친구들이 그를 만난 건 한 번뿐이고, 당시 무경이 말했던 대로 잘 나가는 중소기업 사장 아들이나 강남 부자 수준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유정을 제외하면 그 무경조차 지금은 시우와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자기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농담처럼 MK 차무경이 혹시 시우 애인이었던 사람 아니냐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일 뿐이었다. 아시아 경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MK의 차기 총수가 지인의 옛 애인이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MK는 일반인들에게 있어 별세계의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 시우 선배, 유정 선배. 오셨네요.”

유정이 무경의 일을 좀 더 물고 늘어지려고 하는 찰나 윤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등을 향한 상태였던 유정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시우에게 눈을 떼구르르 굴려 보였다.

“왜 안 나타나나 했다. 쟤 아마 어디 숨어서 보고 있다가 등장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걸. 너한테 집착하는 게 아주 스토커 수준이다. 진짜 웃기는 애야.”

유정은 시우에게 빠르게 속삭이고는 시우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야, 반지, 반지 안 끼고 왔어?”

시우는 아직 장갑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보란 듯이 장갑을 벗고 반지를 내보이는 것도 너무 웃기고 유치한 것 같아서 시우는 그냥 손을 뒤로 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뭐….”

“에이,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차무경 같으니라고….”

유정은 입속말로 투덜거리며 눈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몸을 돌려 다가오는 윤성을 마주 보았다.

“우와, 오늘 시우 선배 엄청 힘줬네요. 하긴 경환이 동문들이 많이 올 테니까.”

윤성이 시우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뜯어먹을 듯이 샅샅이 보더니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시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윤성은 입술을 비틀며 공범자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굳이 내숭 떨 거 있어요? 선배도 이제 20대 후반인데, 더 늙기 전에 괜찮은 알파 하나 잡아야지. 이해해요. 그런 거, 같은 오메가가 이해하지 누가 이해하겠어요.”

하….

헛웃음이 터졌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의사들, 의대생들이 많이 올 테니 시우가 잘 보여서 하나 잡으려고 외모에 신경을 쓰고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참… 뭐,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을 테고 그거야 개인의 가치관 차이니까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문제는 윤성이 저에게 호의로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 도통 곱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사람이 다 너 같은 줄 아냐?”

아니나 다를까 유정이 대뜸 열을 내며 끼어들었다.

“아니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죠. 그리고 그게 뭐 나빠요? 낚싯대도 이왕이면 어장 좋은데 드리우면 좋잖아요?”

그래, 뭐. 적당히 속물적이고 현실적이면서 현명한 거라고 나도 생각해. 하지만 네가 왜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냐고. 내가 정말로 괜찮은 알파를 만나 잘 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이따가 결혼식 끝나고 친척들 빼고 친구들만 모여서 따로 피로연 한다는데 선배도 올 거죠? 경환이는 어차피 정신없어서 신경을 못 쓸 테니 내가 소개 시켜 줄게요. 어차피 다 나랑 우진 형 동문이고.”

“아니, 나는 됐….”

“시우가 아직도 혼자인 줄 아냐. 벌써 차무… 읍….”

약속 있어서 됐다고 거절하려는데 유정이 끼어들어 무경의 얘기를 하려 해서 시우는 급하게 입을 막았다.

“네? 선배 또 누구 생겼어요?”

그러면서 윤성이 다시 시우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설마 또 어디서 거한 물주를 물었나 하는 표정이다.

“아니, 난 나중에 약속 있어서 피로연은 못 갈 것 같아. 너나 재미있게 놀다 가. 우린 아직 경환이한테 인사를 못 해서 이만 가 볼게. 이따 볼 수 있으면 보자.”

가능하면 보지 말고.

속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이며 시우는 읍읍거리는 유정을 끌고 돌아섰다. 뒤에서 윤성이 ‘이따 우진 형이랑 우리 아기랑 같이 봐요,’ 하면서 소리를 높이는 걸 못 들은 척 하고 유정을 질질 끌듯이 구석으로 데려갔다.

“야, 연시우. 왜 말을 못해? 차무경이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한참을 걸어와 윤성이 완전히 안 보이게 됐을 때 손을 떼 주자 유정이 폭발하듯 버럭 한다.

“게다가 너도 겸이 있잖아. 그 귀엽고 깜찍하고 예쁜 알파 베이비가! 차무경 아니면 겸이라도 데려오지.”

유정이 씩씩거리며 말을 뱉는데 시우는 그저 픽 웃을 뿐이다.

“이윤성이 뭐라고 이 추운 날 걔 기죽이자고 겸이를 데려 와. 그리고 데려온들 걔가 믿겠어? 내가 지기 싫어서 어디서 애 하나 얻어 와서 내 아이인 척 한다고 하겠지. 게다가 나와 관련된 얘기를 좋게 할 리도 없는데, 굳이 무경 씨랑 겸이까지 그 입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건 그런데… 아이 씨, 그 인간 별 웃기지도 않는 걸로 기고만장하는 게 열 받으니까 그렇지.”

“내버려 둬.”

시우는 웃었다.

“솔직히 사실이면 속도 쓰리고 열도 받을 테고, 가시 돋친 독설도 좀 쏟아주고 싶겠지만 사실이 아니잖아. 그래서 그런지 난 별 생각도 안 든다. 아무렇지도 않아. 좀 웃길 뿐.”

유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 가졌다 이거냐? 알파도, 아기도?”

“다 가졌다기보다… 그냥 마음의 문제 아닐까 싶다. 내가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걸로 충분한 건데… 난 그렇지 못했었던 것 같아. 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다 가진 게 맞는 건가. 내 속의 결핍이 채워진 것 같으니까.”

대답하며 시우는 웃었다.

“근데 그보다 난 오히려 이윤성이 철들었나 싶었는걸. 걔가 어찌됐든 내가 저랑 동급이 되거나 나아지는 꼴은 절대 못 봐주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의사를 소개시켜 줄 생각을 했지.”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 사이 벼락이라도 맞았나.”

유정도 고개를 갸웃했다.

“원하던 사람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 키우고 하다 보니 유해진 건가…. 허 참. 인간이 그렇게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어째 뭔가 찜찜한데….”

***

경환을 찾아 축하 인사를 하고 식장에 들어가 다른 일행들에 합류해 예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무경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잠시 통화를 하기 위해 식장 밖으로 나왔다. 외진 곳을 찾아 언제쯤 끝날 것 같다든가, 어디에서 만나자든가 하는 애기를 잠시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의 통화에도 목소리를 듣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 시우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식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실내 화단이 꾸며진 나무 너머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와 시우의 발을 잡아챘다.

“그러니까 나 소개시켜 달라니까? 그 시우라는 오메가, 그렇게 꽃뱀 같지 않던데? 깨끗하게 생겼어. 분위기도 차분해서 내 스타일이야.”

낯선 남자의 목소리다. 시우라니, 동명이인일까? 하지만 예감이 썩 좋지 않아서 시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황민준 너는 그러니까 내가 소개시켜 주지 않으려는 거야. 그 얼굴에 넘어간 순진한 알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너도 괜히 순수한 척 하는데 혹했다가는 거하게 털릴걸. 사치는 또 얼마나 심한데. 어지간한 명품은 하지도 않아요. 진짜 성민 형은, 그런데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소개시켜 달라는 말에 응한 거지만 정말 진심으로 대하면 안 돼요. 딱 적당한 선에서만 가지고 놀다 버려야지.”

들리는 목소리는 윤성이었다. 그러니까, 낯선 남자의 입에서 나온 시우는 자신을 가리키는 게 맞았다. 시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걱정 마. 극열성에 고아라니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없고 데리고 놀기에 딱 좋네. 얼굴도 취향이고….”

“형 데리고 놀다가 싫증나면 나한테 넘겨요. 나도 얼굴은 마음에 들더라.”

또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 김준우 이 새끼, 결혼 날짜까지 잡아 놓고 하는 소리 봐.”

키득거리며 웃는 목소리들이 역한 여운을 남기며 멀어져 갔다. 굳은 듯 그 자리에 못 박힌 시우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

결혼식이 시작됐지만 시우는 불쾌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구석에서 시우 쪽을 힐끔거리는 무리들이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시야에 들어와서 시우는 인상을 썼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결혼식이 마침내 끝나고 사진까지 찍은 후에야 시우는 유정과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고 식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전히 기분은 무거웠지만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냥 잊어버려야지. 마음을 다잡고 번잡한 통로를 지나 바쁘게 로비 입구를 향해 가는데 그런 시우의 팔을 누군가 뒤에서 잡아챘다.

“선배. 얼굴 좀 보고 가라니까 그냥 가네.”

윤성이었다. 그리고 그 몇 걸음 뒤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들이 셋 정도 더 있었다. 아까 뒷담화 하던 무리일 터다. 시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나 지금 좀 바빠서. 약속 있다고 말했지? 이거 좀 놔 줄래?”

“아니, 잠깐 인사하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지금 당장 데이트를 하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잠깐 이리 와 봐요.”

윤성이 시우의 팔을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키는 시우보다 조금 더 작은 편인데 의외로 힘이 세서 뿌리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로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불편했다. 그저 인사하라는 사람 상대로 거칠게 몸싸움을 할 수도 없어 멈칫거리며 버티는 사이 남자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내가 아까 말한 연시우 선배.”

결국 몸에 힘을 빼고 바로 섰다. 그러자 윤성이 빙긋 웃으면서, 중간에 서 있는 키 큰 알파를 먼저 소개 했다.

“강성민입니다.”

슬그머니 알파 페로몬을 풀어 놓으며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은 호남형이었지만 성민이라면 시우가 극열성에 고아라 데리고 놀기 좋겠다고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런 인간의 피부에 닿고 싶을 리가 없다. 시우는 성민이 내민 손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시우가 악수에 응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자 성민이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시우 씬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네.”

사람 좋은 듯 웃으며 말했지만 눈빛이 거세지며 입꼬리가 살짝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새다. 소개하는 꼴이 우습게 된 것이 못마땅한 듯 윤성의 눈이 사납게 치켜졌다. 윤성은 시우에게 바싹 다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듯이 옆으로 잡아당기며 잇새로 작게 쏘아붙였다.

“뭐 하는 짓이야, 선배. 이 형 우리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고 우성 알파야. 솔직히 시우 선배 처지를 생각하면 차고 넘친다고. 사람이 기껏 호의로 소개를 시켜 주는데 지금 하는 행동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야, 이제 극우성 아니면 눈에도 안 차?”

시우는 빤히 윤성을 쳐다보며 쌀쌀맞게 입을 열었다.

“뭐 하는 짓인지는 내가 묻고 싶다. 진짜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호의? 무례해? 너야말로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알고나 있어?”

“뭐?”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는 듯 윤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제정신이야?”

“충분히 제정신이야. 너무 맑아서 아주 짜증날 정도로. 이윤성, 나 도무지 네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이해 좀 시켜 줄래? 너랑 내가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 나 아주 싫어하잖아.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싫은 거까진 이해가 돼. 근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걸고넘어지는 건 통 이해가 안 된다. 너랑 나 사이에 얽힌 건 우진 선배밖에 없잖아? 그런데 나랑 선배는 옛날 옛적에 끝난 사이고 너는 결혼해서 애까지 가졌는데 뭐가 부족해서 계속 나를 걸고 넘어져?”

“우진… 선배?”

조금 높아진 목소리에 남자들 중에 누군가가 우진의 이름을 알아듣고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렸다. 윤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냥 선배가 계속 알파들한테 차이는 거 같으니까 호의로….”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무슨 호의가 있다고 자꾸 호의, 호의하는 거냐고. 호의를 가졌으면 좋게 얘기해 주는 게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일 텐데, 극열성에 고아에… 아니 그건 사실이니까 그렇다 쳐. 근데 꽃뱀이라는 소리까지는 보통 안 하지 않아?”

“누, 누가 그런 말을 했다고….”

이번에는 윤성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시우는 시선을 윤성의 어깨너머, 알파들에게로 옮겼다. 그들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시우는 성민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악수를 거절했다고 해서 불쾌해하실 입장은 아니실 거예요. 모르면 몰라도, 자기를 데리고 놀다 버리겠다는 인간쓰레기한테 닿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페로몬도 제발 좀 갈무리해 주시겠어요? 많이 역합니다. 그리고.”

시우는 얼굴이 시뻘게진 성민 뒤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서 있는 나머지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두 분 중에 김준우 씨가 누구예요?”

“네?”

갑자가 튀어나온 이름에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엉겁결에 대답을 내놓았다.

“결혼하신다면서, 입조심 좀 하고 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아니, 제가 뭘… 별 얘기도 아니었는데….”

버벅거리며 변명하는 모습에 시우의 눈에 날이 섰다.

“놀다 싫증나면 넘기라는 말이 별 얘기가 아니라고요? 그럼 배우자 되실 분 만나서 제가 직접 한번 물어봐도 될까요, 별 얘기인지 아닌지?”

남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뒷담화 좀 했다고 그렇게 펄펄 날뛸 건 뭐야? 선배는 뭐가 그렇게 고고해서? 게다가 남의 얘기를 뒤에서 몰래 훔쳐 듣기나 하고서 뭐가 그렇게 떳떳하다고….”

윤성이 얼굴이 벌게져서 다시 끼어들었지만 시우는 그 말을 차갑게 끊었다.

“떳떳해. 훔쳐 들은 것도 아니고 로비 통로 지나가는데 내 이름이 아주 들으라는 듯이 또렷이 들렸거든. 물론 나도 뒷담화라는 건 해.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거지. 사람을 꽃뱀이라느니 갖고 놀다 버리라느니 하는 건 누가 들어도 선을 넘은 거 아니야? 게다가 그런 소리를 한 주제에 웃으면서 다가와 대놓고 가지고 놀겠다는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고 하는 게 상식적인 사람이 할 짓이냐고. 명예 훼손이니 모욕죄니 하는 말들이 요즘 왜 많이 들린다고 생각해?“

“명예 훼손이라니, 몇 명이서 뒷담화 좀 한 거 가지고 무슨….”

잠깐 당황한 것 같던 윤성은 금세 기세를 회복하고 되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을 하려 들었다.

“야, 이윤성. 너 여기서 뭐 해? 애 이렇게 내팽개치고 다닐 거면 뭐 하러 데리고 왔어? 그러니까 내가 애는 놓고 오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때 갑자기 알파들의 뒤쪽에서 잔뜩 짜증이 돋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에 놀란 듯 어디선가 아기가 울음을 터트렸다.

시우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윤성과 알파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보자, 그 사이로 아기를 안은 우진이 열 받은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얘넨 뭐야. 얘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너 대체 뭘 하고 있는….”

연이어 화를 쏟아 내던 우진이 시우를 발견하고 눈이 커다래진다.

“어, 시, 시우야….”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며 당황하는 모습에 시우의 눈이 조금 찌푸려졌다. 우진은 시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신에게 다가와 울고 있는 아기를 들여다보는 윤성에게 거칠게 아이를 떠넘겼다.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윤성이 아직도 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절대 행동까지 이해가 된다는 건 아니지만.

“오랜만이에요, 우진 선배. 미안하지만 우리 하던 얘기 먼저 끝을 낼게요.”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유치하기도 하고 민망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솔직히 윤성이 너랑은 별로 친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친하지 않을 예정이라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우는 왼손이 잘 보이도록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겼다. 앞에 서 있는 알파 중 누군가가 반지다, 하고 중얼거렸다.

“나 결혼했고 아이도 있어. 호의든 악의든 이런 소개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 나한텐 신경 좀 끊어 줬으면 고맙겠다.”

윤성을 보며 얘기했지만 그보다 우진이 들으라고 한 얘기였다. 우진이 저에게 완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방향이 잘못된 윤성의 원망이 계속 저를 향할 것 같았으므로.

울고 있는 아기를 제외하고, 어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가 막혀서….”

꾸민 듯한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입을 연 건 윤성이었다.

“선배, 별것도 아닌 거로 예민하게 굴더니 허언증까지 걸렸어요? 결혼이요? 아이요?”

기가 차다는 듯이 윤성이 헛웃음을 치더니 안고 있던 아이를 다시 우진에게 밀어 넣고는 성큼성큼 시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선배 극열성인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아이는 무슨 아이. 게다가 결혼요? 결혼은 혼자 해요? 대체 어떤 사람이랑 했길래 아무도 그걸 몰라요? 그렇게 비밀리에 결혼할 만큼 이상한 사람이에요? 반지는 또 어디서 짝퉁 같은 걸 하나 구해 와서….”

코웃음 치며 말하다 말고 윤성의 눈썹이 문득 꿈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시우의 손을 홱 잡아채서 제 눈앞으로 잡아 당겼다. 그러더니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진짜 맞아요?”

갑작스런 행동에 황당해서 시우는 윤성의 손을 뿌리쳤다.

“어디서 나기는. 결혼했다고 했잖아. 결혼반지야.”

정확하게는 프로포즈 링이고, 엄격하게 따지면 그냥 커플링이지만. 시우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물론 윤성에게 설명해 줄 이유는 없었다.

윤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도 안 돼. 이거 테르타에서 나온 블루 다이아 커플링이잖아….”

윤성은 혼자 중얼거리다 말고 휙 눈을 치뜨며 시우를 노려보았다.

“선배 어디 재벌 늙은이한테 첩으로라도 들어갔어요?”

“야, 이윤성!”

우진이 버럭 소리 질렀지만 윤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잖아. 시우 선배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한다고 들었는데, 뭐 그렇다고 세계적인 유명 작가도 아니고 저런 반지를 어떻게 사?”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패턴인데….

시우는 볼을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도 같은 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얘는 진짜 성격 안 바뀌는 구나. 말버릇도 원패턴이고….

그때는 무경이 채워 준 시계를 보고 윤성이 누구 정부로 들어앉은 거 아니냐고 했었지. 그때는 너무나 정곡을 아프게 찔려서 정신이 아득했었다. 사실이 그러했던 만큼 되받아 칠 수도 없었고 아마 무경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디까지 몰렸을지도 알 수가 없다. 반박도 못한 채 진짜로 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고 유정도 누구의 얼굴도 다시는 볼 수가 없어서 어디론가 숨어 버렸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황당하고 열은 받아도 상처는 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니까.

시우는 피식 웃으며 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이거 백화점에서 산 평범한 커플링인 줄 알았더니 또 엄청 비싼 거였나 보다. 결혼반지는 따로 하지 말고 그냥 이걸로 넘어가자고 해야겠다. 첫 커플링을 평생 끼고 사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 같고.

시우는 반지를 한번 손가락으로 쓸어 본 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빤히 보이게끔 녹음 기능을 켜서 윤성의 턱 밑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이윤성, 너는 지금 내가 꽃뱀인데다 결혼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사실은 재벌 첩살이를 하고 있다고 말한 거야?”

윤성이 당황해서 주춤주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냐니. 방금 네가 한 말 확인하는 거잖아. 내가 허언증이라며. 그래서 애가 있다는 것도 결혼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라며. 방금 그렇게 말했지?”

“무, 무슨…. 그건 그냥….”

“그냥이라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결혼식장 로비에서 내 이름까지 들먹이며 얘기해 놓고.”

윤성이 주변을 흘깃거렸다. 주변 시선을 다 끌어 모으도록 소란을 피운 건 아니지만 흥미 있어 하는 시선들이 꽤 있었다. 다른 알파들도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애기는 굳이 녹음 안 했어도 들은 사람들이 꽤 있는 거 같네. 그래도 앞으로 너와 얘기할 때는 무조건 녹음기부터 켜고 시작해야겠어. 길 가다 네 목소리가 들려도 마찬가지. 불편하고 어이없긴 하지만 네가 스스로 뱉은 말에도 책임을 안 지려고 드니 할 수가 없잖아. 안 그래?”

시우는 알파들을 쳐다보았다.

“그쪽 분들도요. 강성민 씨랑 김준우 씨. 저를 데리고 놀다 버리겠다고 하신 두 분.”

시우가 핸드폰을 자신들 쪽으로 돌리자 마치 무슨 흉기나 총을 들이대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허겁지겁 몸을 뒤로 뺀다.

쯧. 주제에 망신당하기는 싫은 모양이지. 그럴 거면 입으로는 왜 그렇게 쓰레기를 뱉어 내고 다니는 거야.

“뒷담화도 선이라는 게 있는데,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 판단 가능한 나이 아니신가요? 나름 사회적 지위도 있는 분들이?”

“죄, 죄송합니다.”

얼굴을 숙이며 주위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초라해서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속으로 혀를 한 번 차고 마지막으로 다시 윤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윤성, 난 너한테 눈곱만큼도 관심 없거든? 제발 부탁인데, 너도 나한테 신경 좀 꺼 주라. 우리 다신 보지 말고, 가급적 봐도 아는 척 하지 말고, 어?”

입술을 꽉 깨물고 시선을 내리고 있는 윤성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우진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시우는 한숨을 쉬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볼 일 다 봤어, 시우야?”

몇 걸음 뒤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선 무경이 싱글거리며 웃고 서 있었다.

***

“아… 무경 씨….”

시우의 얼굴이 당장 난감한 빛을 띠었다. 혹시 지금 얘기를 다 들었나? 그다지 들려주고 싶은 얘기도 보여주고 싶은 모습도 아닌데.

“어, 언제 왔어요?”

“금방. 아까 전화했을 때 사실은 오고 있던 중이었어요. 놀래키려고 일부러 얘길 안 했지.”

기분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다가와 무경이 시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아… 음… 혹시 지금 얘기 다 들었어요?”

“응? 얘기? 무슨 얘기?”

무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조금 동그랗게 해서 쳐다보는 얼굴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뭔가 미심쩍었지만, 더 캐묻지 않고 시우는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무경이 시우를 잡은 팔에 힘을 주어 멈춰 세웠다.

“응. 근데, 여기 시우 씨 친구들 아니야? 나도 마주친 김에 인사는 하고 가야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무경이 시우의 몸을 빙글 돌렸다. 다시는 보지 말자며 일갈하고 방금 돌아선 윤성의 얼굴을 얼결에 다시 마주보게 되었다.

무경에게 시선이 꽂힌 윤성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시우가 결혼했다는 말을 믿지도 않았지만, 믿었다 하더라도 그 상대가 차무경일 거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아니, 두 사람 헤어졌다고….”

“오랜만이에요. 윤성…씨던가, 그쪽 이름이.”

무경이 말문이 막힌 윤성과 눈을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

“전에는 애인이었는데 이제는 서로 부부로 만나네요. 참 세월도 빠르지. 안 그래요, 우진 씨.”

무경은 '부부'라는 말에 창백하게 질린 우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가 성질이 급해서 혼인 신고를 먼저 해 버리긴 했는데, 오는 봄에 제대로 식도 올릴 거예요. 그때 꼭 와서 축하해 주시면 좋겠네요.”

아니, 지금 누구를 오라고… 시우가 힐끔 곁눈으로 무경을 노려봤지만 무경은 시우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건지, 못한 척 하는 건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저 몸을 비틀어 돌아가려는 시우의 허리를 재차 꼭 잡아 제 옆에 붙여 놓을 뿐이다.

“결혼… 아… 네….”

윤성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우진은 아예 핏기가 가신 얼굴을 하고 입술을 꽉 깨문다. 그 모든 표정 변화를 무경은 느긋한 표정으로 훑었다. 얼굴엔 웃음이 서려 있었지만 얼핏 스치는 눈빛은 차갑게 날이 섰다.

“아, 그런데… 이윤성씨 병원이 서원 종합 병원이었던가… 그렇죠?”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성이 뜬금없는 병원 언급에 힐끔 다시 시선을 들었다.

“네? 네, 그런데 갑자기 왜….”

“아니… 생각해 보니 그때쯤이면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결혼식 참석은 무리려나….”

“네?”

맥락 없는 이야기에 윤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우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슬쩍 웃어 보일 뿐이다.

“아니, 별 얘긴 아니고, 큰 병원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문제도 많고 이래저래 의료 사고도 많고… 운영하기가 아주 많이 힘들죠. 자금줄이 갑자기 막히기도 하고….”

“지금 대체 무슨 얘기를….”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경은 상큼하게 웃었다.

그리고 우진을 포함하여, 곁으로 늘어선 알파들을 웃는 낯으로 훑어보았다.

“다들 서원 병원 의사 선생님들이시죠?”

성민과 준우는 흠칫했다. 만만하다고 생각한 오메가를 농락하려다 창피를 당한 마당에 이제 그 배우자까지 나타났으니 큰일났다 싶은 것이다. 웃고 있는 얼굴로 봐서 방금의 대화를 온전히 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일순 살기 어린 시선이 박히듯이 날아들어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대놓고 쏟아 붓지는 않았지만 압박하듯 밀려오는 형질은 분명 극우성의 것이었다. 설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슨 사달이 나는 건 아니겠지, 주위 분위기를 살피며 알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뵙죠. 아니 참, 직접 볼 일은 없으려나.”

무경은 살기 어린 표정 따위는 지은 적도 없었다는 듯이 싱긋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

뭔가 별 말이 아닌 듯하면서도 공연히 찜찜한 소리였다. 알파들은 서로 눈짓을 해 가며 움찔거렸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 수도 없는데 달리 대답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이걸로 넘어가면 좋겠다, 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윤성과 우진은 이미 과거에 무경에게 말로 크게 당한 일이 한 번 있었다. 정말로 결혼까지 했다면 이 정도로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윤성은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모욕을 당할 각오를 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의외로, 무경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우와 함께 몸을 돌렸다. 사람이 유하게 변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듣지 못해서 그런 걸까.

시우조차 미심쩍은 눈을 하고 무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경이 힐끔 시우와 눈을 마주치더니 눈을 접으며 살짝 웃는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순진한 척 웃는 얼굴이 능청맞았다. 그 모습이 되레 의심스러워서 시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경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엄마아!”

무경에게 뭐라 한마디 할까 하는 찰나, 조그만 물체가 덥석 시우의 다리에 매달렸다. 놀라서 내려다 본 시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겸아… 아니, 얘가 여기 왜….”

“엄마, 겨미 추어. 아나죠!”

겸이가 시우의 다리를 붙잡고 퐁퐁 뛰었다. 무경이 허리를 굽혀 시우에게로 팔을 뻗는 겸이를 달랑 안아 올렸다.

“엄마 지금 피곤하니까 아빠랑 안고 가자.”

무경은 한쪽 팔로 겸이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치고 다른 손으로 시우의 손을 잡았다. 겸이는 무경의 높은 어깨 위에 엎어진 채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제 눈앞에 있는 남자 어른들이 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저도 말똥말똥 마주 보았다. 그러다 어느 어른 알파의 품에 저보다 작은 아이가 안겨 있는 걸 보고는 눈이 커다래졌다가 잔뜩 휘어지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아가야, 아녕!”

시우는 겸이가 윤성의 아기를 보며 좋아라 손을 휘젓는 걸 힐끔 보고는 무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겸이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잠깐 붙잡고 있으랬더니….”

무경이 혀를 차며 시우가 아닌 정면을 보았다.

“형 발견하자마자 몸부림을 치면서 빠져나가는 걸 어떡하라고. 난 최선을 다했어. 역부족일 뿐이었지.”

로비 입구 쪽에서 한숨을 쉬며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는 건 지우였다. 설레설레 머리를 흔드는 얼굴에는 애들이란, 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다.

시우는 갈수록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얘는 또 왜 여기 있어. 집에 있어야 될 애들이.

“오늘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집에 잠깐 들렀더니 혜린 씨가 많이 피곤해 보이더라고. 쉬라고 하고 애들 데리고 나왔지. 데이트가 아니라 가족 외식이 되어 버렸지만, 괜찮죠?”

제 동생이고 제 아이인데 안 괜찮을 건 없지만.

“그건 좋은데, 누나는 괜찮아요? 혼자 있어도 되나? 많이 아픈 거 아니에요?”

“아니, 아픈 건 아니고 어제 잠을 좀 설쳤다고 하던데. 옆에서 누가 북적거리는 것보다는 푹 자고 싶어 하는 거 같았어. 나중에 들어갈 때 맛있는 거나 사가지고 들어가요.”

“응….”

대답하며 지우에게로 다가가다가 문득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에 시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 윤성과 우진이 보였다.

음… 뭔가… 속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좀 민망한 것 같기도 하고…?

시우는 볼을 긁적였다. 어찌됐든, 이제는 정말로 이윤성과 맞닥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서로 관심을 끊고 저는 저대로, 그는 그대로 제 사람들한테만 신경을 쓰며 살았으면. 시우는 고개를 돌리고 저를 바라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온전히 두 눈에 담았다.

***

그날이나 다음 날 중으로, 시우는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해들은 유정이 득달같이 전화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핸드폰은 잠잠했다. 생각해 보니, 윤성이 시우의 나쁜 소식이라면 몰라도 좋은 소식을 일부러 주변에 알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 있었던 일도 알려져 봐야 본인한테 좋을 것 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래서 시우는 저에게 먼저 알리지 않았다고 유정으로부터 목 짤짤이를 당하기 전에 이번에야 말로 자진 신고를 하자 마음먹고 먼저 전화를 했다. 그리고 혼인 신고를 한 얘기부터 전했다.

- 우와… 결국 했구나.

유정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응.”

- 하아….

유정이 전화기 너머로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얘가 오늘 나랑 통화하면서 한숨을 몇 번이나 쉬는 건지 모르겠다.

- 축하…하는 게 맞는 거지? 너 행복한 거 맞냐? 진짜로 원해서 선택한 거 맞지?

“응. 진짜로 원해서 한 거 맞고, 나… 지금 정말 좋아.”

- 그래… 그럼 된 거지, 뭐.

“응.”

- …잘됐다. 다행이야. 축하해.

뭔가 좀 꺼림칙해하는 유정에게 시우는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 망설였다.

“저기… 또 하나 얘기할 게 있는데….”

- 응. 뭐?

“저어… 요새 TV에서 MK 후계자 얘기로 말이 많잖아?”

- 어, 차무경 말이지. 내가 요새 뉴스 보면서 자꾸 그 이름이 나와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너나 무경 씨는 진짜 더 웃기겠다. 자꾸 자기 이름이 TV에서 나오니까.

유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그 반응을 보니 시우는 더욱 말 꺼내기가 껄끄러워졌다. 하지만 무경이 조만간 얼굴 사진이 언론에 공개될 것이라고, 말할 사람 있으면 미리 언질을 주라고 했기 때문에 말을 해 둬야 했다.

“저기… 동일 인물이야.”

- 응? 동일 인물이라니 뭐가.

“그 MK 차무경이 네가 아는 차무경이랑 같은 사람이라고.”

- …너 만우절도 아닌데 왜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하고 그래.

“내가 이런 걸로 농담하는 거 봤냐. 조만간 언론에 사진이 공개될 거래. 그래서 미리 말해 두는 거야. 너 놀랄까 봐.”

- …….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못 믿어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입장 바꿔서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 그, 그런데, 차무경 씨 출판사 대표 아니었어?

한참 만에야 유정이 정신을 수습했는지 더듬더듬 다시 입을 열었다.

“어, 맞아. 그런데 그 회사는 조만간 대표가 바뀔 거래. 전문 경영인으로.”

- 그럼… 그… 절연했다던 집안이 MK 였어?

“어….”

- …와… 헤어질 만 했구나…. 하기야 그 대단한 집안에서 가만히 있었겠니… 너 고생했겠다, 진짜.

유정은 아마도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물 뿌리고 뺨 맞으며 돈 봉투를 받는 모습 따위를 떠올리고 있을 터다. 사실은 정부로 있다가 유럽으로 도망가고 헬기로 추적당하는 난장을 겪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지. 떠올리자니 다른 의미로 정말 고생을 하긴 했다고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진작 말을 못해서.”

- 아니야. 나 같아도 말하기 좀 벅찼을 것 같긴 하다. 아마 말만으로는 믿지도 못했을 걸. 차무경이 MK 후계자라고 했으면 나는 너 사기 당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 같아. 어차피 MK 쪽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이상 사실 확인도 못하잖아.

그건 그랬다. 시우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 근데 절연했다면서 MK 후계자라고 떠들어 대는 건 또 뭐야?

“가족들하고는 안 만나나 봐…. 다른 친족들은 경영에서 손을 뗀다니까 아마 회사 일만 하는 걸로… 저기 근데 유정아, 이 얘기는 다른 데 하면 안 된다?”

- 당연하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야, 난 솔직히 겁난다. 차무경 나쁜 새끼라고 그렇게 욕을 했는데 MK 후계자였다니…. 나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가서 사라지는 거 아니냐? 이거 도청 당하는 거 아니지?

유정이 갑자기 소리를 잔뜩 죽여 속삭인다. 시우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 사람 그냥 기업 경영자야, 마피아 두목 같은 거 아니거든?”

예전에는 마피아 두목 같은 짓을 좀 하긴 했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유정은 한숨을 쉬었다.

- 순진한 녀석. 너 진짜 뭘 모르는구나. 기업이든 정부든 힘 있는 집단은 뭔가 그런 어둠의 족속들과 연결 고리가 있는 법이라고. 인간이란 게 권력이 생기면 제멋대로 하고 싶고 거슬리는 건 다 치워 버리고 싶고 뭐 그런 마음을 품게 되는 존재니까 말이야.

“…….”

뭔가 영 틀린 말은 아니라서 잠깐 할 말이 없어졌다.

“어… 근데 유정이 너 왜 이렇게 인간관이 암울해졌어?”

-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다. 주위에서 황당한 일들도 자꾸 생기고.

유정이 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깐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갑자기 번뜩 소리를 높였다.

- 야, 잠깐만.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혼인 신고는 했다고? 그건 잘 했는데, 왜 결혼식은 안 해? 그런 건 만인 앞에 땅 하고….

“하긴 할 거야. 지금은 무경 씨가 회사 문제로 너무 바쁘기도 하고, 좀 더 따뜻할 때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해서 봄에나 할 생각이야. 그런데 크게는 안 하고, 그 사람이나 나나 친척들도 없으니까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조촐하게 하려고.”

- 흠… 가까운 사람이라… 윤성이랑 우진 커플 불러도 재미있을 텐데.

유정이 심술궂은 목소리를 냈다.

“걔네를 왜 불러? 진짜로 축하해 줄 마음도 없을 텐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전화기를 넘어왔다.

- 그러니까 부르자는 거지. 윤성이 고게 기가 팍 죽어봐야 다시는 너한테 깔짝거리지 않지. 그리고 강우진도 그래. 네가 극우성 알파 재벌이랑 결혼식 딱 올리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봐야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하여튼 걔들은 와서 너 잘 사는 걸 꼭 좀 봐야 해.

***

계약 종료 2년 11개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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