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속절없이.
토닥토닥.
이수현의 어깨에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박민후는 이제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악몽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제게 다가오는 타인의 온도에 속절없이 파고든 것까지는 좋았다. 열여덟 살 이후 처음으로 이렇게 운 것까지도 그럴 수 있었다. 덕분에 악몽에서 벗어난 것까지도 좋았다…. 다 좋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저와 이수현은 이렇게 울면서 안기고, 우는 걸 다독여 주는 그런 친근한 관계가 아니었다. 물론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렇기에 솔직히 이수현의 반응이 제일 이해 안 됐다. 우는 사람을 달래 주는 이수현이라니, 이수현의 탈을 쓴 몬스터가 아닐까? 미친 생각이었다.
저도 안다. 이수현은 정말 아주, 아주 가끔. 조금 다정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다정함을 맛볼 때마다 박민후는 심란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의 다정함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후를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설프게 자신의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참을 수 없이 의식되고, 제 가슴팍에서 전해져 오는 이수현의 심장 박동 소리는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두근두근 일정한 속도를 내던 이수현의 심장 박동 소리와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동시에 느껴졌다. 이수현도 그렇겠지.
…시발, 쪽팔려.
부끄러워 당장에라도 그에게서 떨어져야 했건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몰려오는 쪽팔림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떨어져서 정면으로 이수현과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제가 이리 겁쟁이였나 싶었지만, 솔직히 쪽팔림이 앞섰다.
그의 품에 파고들어 애처럼 운 것이 솔직히 매우 부끄러웠고, 자신답지 않게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한 것이 미치도록 창피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것인지 과거의 저를 때리고 싶을 정도로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게 후회됐다. 이수현의 말이 맞다. 인간은 늘 후회할 짓만 하는 거 같다, 젠장. 쪽팔렸다. 이 나이 먹고 질질 짜다니. 잘하는 짓이다. 그것도 남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이수현이 절 어찌 생각할지 감도 안 왔다. 한심하게 보려나. 그렇겠지? 이 꼴이 저조차 우습고 한심한데 타인이라고 안 그럴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등과 허리에 감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몸이 작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얇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저를 도닥이는 손이 조금 빨라졌다.
아, 미치겠다. 부끄러움에 얼굴에 열이 몰린 건지 얼굴이 홧홧했다. 울고불고 이상한 질문까지 한 데다 얼굴까지 붉히다니, 제 꼴이 얼마나 한심한가. 이대로 이수현을 기절시키고 도망칠까? 그런 멍청한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진정하자. 그래 진정하고 이수현을 기절시키기보단 그냥 내가 도망치면…. 시발!!
진정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이수현 특유의 희미한 냄새가 속절없이 제게 파고들었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아, 젠장. 자세히 맡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는 그의 냄새는 저에게서 나는 향과 닮아 있었다. 당연하지, 그의 집에서 같이 살며 그와 같은 샴푸를 쓰고, 그와 같은 바디 로션을 바르고, 그와 같은 섬유 유연제를 사용하니까!
제 몸에서 나는 냄새는 이수현의 몸에서도 났다. 당연한데도 그것을 깨닫자 심장이 더욱더 빠르게 뛰었다. 미치도록 신경이 쓰였다. 괜히 식은땀이 났다. 얼굴에 열이 더 몰리는 것도 같았다. 심장은 이제 폭주 기관차처럼 날뛰었다. 젠장! 진정하고 싶었는데 그게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박민후는 제가 그래도 지금은 제정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쓸데없는 자잘한 것에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고 심란해지는 걸 보면. 절로 욕이 나오는 걸 입 안으로 삼키며 이수현을 붙들었다.
미친 생각이지만.
정말로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제 등을 어색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좋았다.
그의 체온이 좋았다.
쪽팔린 건 쪽팔린 건데 사실 좀 더 이러고 있고 싶었다.
박민후는 사실 애정이 고팠다. 타인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빠르게 깨달은 후로는 일부러 피했다.
박민후가 사는 세상은 그를 불행하게만 한다. 세상은 뭐만 하면 온통 자신을 탓하기만 하고 제가 모든 걸 감내하고 해내야 한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타인의 온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박민후는 계속 혼자였다. 친구가 있긴 했으나 이럴 사이는 아니었고, 그러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상황은 계속해서 자신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이유를 만들었고, 그런 상황이 자꾸만 생겨났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고 외면했던 것이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니 박민후를 미치게 했다. 저보다 살짝 낮은 체온이 좋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이 좋았다. 희미하게 나는 그의 향이 좋았다. 안 어울리게 제 등을 토닥이는 손이 저를 속절없이 무너지게 했다.
아.
그 순간 박민후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 남자를.
이제 겨우 며칠 본 이 남자를.
겨우 이름과 나이, 좋아하는 음식밖에 알지 못하는 이 남자를….
자신이 절대 먼저 놓지 못할 거란 사실을.
그렇기에 슬퍼졌다.
이 사실을 절대 그에게 말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가슴이 미칠 듯이 아파졌다. 누군가 칼로 난도질하는 것도 같았고, 심장을 쥐어뜯는 것도 같았다. 갈비뼈가 뻐근했고, 배 속이 뒤틀렸다. 너무 아파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자 지금이라면 다시 울어도 그가 다독여 주겠지 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 너무 혹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을 벌렸다간 무슨 말이라도 그에게 할 것 같아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박민후는 이수현에게 이상하게 끌렸었다. 제 발아래서 잠든 남자를 보았을 때도 눈이 갔다. 그다음 길을 묻는 남자를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게 5년 전 사라진 그 이상한 느낌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답지 않게 그에게 길을 알려 주고, 신경이 쓰인답시고 뒤를 따라가고, 은행 강도의 손에서 구해 주면서 그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마 이 남자가 저는 모르는 무언갈 알고 있을 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기에 아는 사람이 한 손에 꼽히는 자신의 집에 데려가 그에게 묻고, 결과적으로 그의 곁에 있기를 택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그것에 대해 뭘 안다 해도 난 아무것도 못 할 거야. 그래도 네 곁에 있으면 뭔가 바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집에서 잠이 들었을 때 그 생각에 좀 더 힘이 실렸다.
‘봐, 네 옆에서는 잠도 잘 와. 난 8년 동안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날 처음 제대로 잠들었어, 꿈을 꿨지만, 악몽은 아니었지.’
그와 같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간 것은 귀찮았지만 재밌었다. 볶음밥을 일주일 동안 먹은 건 처음이었다. 그가 원해 블랙마켓에 가서 번거로운 입장 방법을 사용하고, 이제는 그를 위해 요리 스킬까지 배웠다. 그가 관심 있어 하던 반지도 샀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는 이수현에게 물렀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그를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상했다. 이상했지. 참으로 이상한 행동들의 연속이었다.
박민후는 이수현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박민후는 5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불쑥 들었다. 생각해 보니 있었다. 강유람과의 일이었다.
쓸데없이 그와 자주 마주치고 이상하게 자꾸만 그와 엮이면서 강유람과 박민후는 친해졌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저를 멋대로 움직이게 하는 느낌의 소행이란 걸 알았을 때 느꼈던 허탈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다.
물론 그때도 연인이 될 정도로 애틋한 것은 아니었다. 호감 정도의 감정이었겠지. 친구로 지낼 정도의 호감 말이다.
그러나 만약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 또한 그때와 같은 그런 것이라면 어쩌면 좋지? 물론 그때와 좀 비슷할 뿐이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번 있었던 일이 두 번 있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초조해졌다. 정말 그런 거면? 박민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박민후 헌터.”
타이밍 좋게 무심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단정한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걸 마주하니 울고 싶었다. 애써 마른입을 침으로 축이며 대답했다.
“…어.”
“이제 좀 아픈데…. 진정됐으면 떨어질 마음이 들었나요?”
“아…. 어, 그래. 미안했다.”
저도 모르게 점점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나 보다. 코앞에서 자신을 보는 연갈색 눈동자가 저만을 보는 게 좋았다. 주춤거리며 그의 등과 허리에 두른 팔을 풀며 물러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끄러움과 쪽팔림에 먼저 풀 엄두를 못 냈었는데…. 막상 떨어지니 다른 쪽에 신경이 쏠려서 그런 걸까, 생각보다 괜찮았다. 정말로. 툭툭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이수현이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게 다행스러운 한편 아쉬웠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긴장되었다. 저에게 화를 내려나? 한심하게 보려나? 잠깐의 정적과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박민후 헌터, 이제 집에 가요.”
“…그래, 가야지.”
그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저와 돌아갈 집을 이야기해서. 박민후는 괜히 기쁘고 또 그런 거에 기뻐하는 자신이 바보 같아 슬퍼졌다. 차마 이수현의 손을 잡을 용기는 없어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온통 어둠뿐인 세계가 파삭파삭 소리를 내며 깨져 가기 시작했다.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라….
박민후는 제 자신이 원해서, 그래서 그런 거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순간 새하얀 새가 두 사람 머리 위를 빙빙 돌며 날갯짓을 했다.
그제야 박민후는 새의 존재를 인식했다. 바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이수현은 저를 붙잡은 손에 힘이라도 들어갔다가 똑 부러질까 봐 힐끔 박민후를 쳐다보았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란다.]
“마지막? 저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나? 5년 전에도 나한테 똑같은 소리를 했던 거 같은데…. 신이란 놈이 기억력은 새대가리만 못한가 봐? 아니지 새대가리라서 그런가.”
박민후가 그에 삐뚜름하게 웃으며 새를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수현은 순간 확 힘을 주는 박민후 때문에 황급히 박민후의 팔뚝을 찰싹 하고 때렸다. 물론 이수현 본인의 손바닥이 더 아팠지만 그 행동에 박민후가 흠칫 놀라, 새를 보던 시선을 내려 자신을 보았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손.”
“…….”
이수현이 잡힌 손을 살살 흔들자 그제야 슬그머니 힘을 풀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놔줬으면 싶었는데…. 하는 수 없이 직접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려는데 꿈쩍도 안 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 너도 너다. 어쩌자고 그런 선택을….]
“내가 뭐? 아주 툭하면 내 탓이지?”
[그럼 내 탓이니? 난 아무것도 안 했단다. 결국 모든 걸 움직이는 건 너란 말이다. 난 할 만큼 했단다. 내 역할은 다했어.]
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는 길은 내가 열어 주도록 하지.]
“당연한 거 가지고 뻐기지 마.”
박민후가 으르렁거렸다. 하긴 결국 이 상황을 유지한 건 저 새니, 박민후가 새를 싫어할 만도 했다. 알 만하다는 듯 새는 박민후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을 했다.
[…바깥에 나가면 세상 돌아가는 걸 좀 확인할 필요가 있겠더구나.]
“나도 알아. 별 같잖은 놈들이 또 뭔 일을 벌이려고 그 지랄을 해 놨는지 나도 참 궁금해?”
짐작이 간다는 듯 박민후가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이수현은 생각했다. 아,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인가…? 딱 그게 사건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 같긴 했었지.
[너희가 떠나면 우리도 이제 정말 사라질 준비를 하겠지. 어떤 선택을 하든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들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도….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더는 없다는 소리란다.]
“…시발!”
[세상을 구한 영웅이여.]
[하지만 너는 다르겠지, 이제 선택은 오로지 네 몫이란다. 구할지 말지는 네 손에 달렸지. 네 멋대로 하렴. 우리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그 말을 끝으로 새를 중심으로 새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부서지는 세상을 물들였다. 눈이 멀 거 같은 눈부심에 이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존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머리 위에서 박민후의 한탄이 작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너무 가까워 이수현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이 또다시 박민후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박민후가 그를 보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수현은 제 뒤통수를 감싸 내리누르는 손과 더불어 어깨를 감싸 안은 팔뚝이 느껴졌다. 샛노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현은 그 소리를 들은 순간에야 그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가을의 찬바람이 한차례 두 사람을 훑고 사라졌다. 던전 속의 공기와 확연히 다른 탁한 서울 공기가 느껴졌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깨닫자 바깥으로 나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드디어 나왔구나. 체감은 한 과장해서 1년은 그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이 탁한 서울 공기가 그리워질 줄이야.
온몸이 여기저기 결렸다. 이수현은 박민후에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을 올렸다가 절로 앓는 소리가 날 뻔했다. 소리가 나기 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도 그럴 게 박민후가 붙들고 있던 팔목이 기어이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아픔을 참고 다른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밀며,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가 손쉽게 자신을 놓아주어 이수현은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왜 그래?”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박민후의 물음이 들려왔다. 이수현의 시선을 따라 그의 시선도 이수현의 팔목으로 향했다. 하얀 팔뚝이 보기 좋게 부어올라 있었다. 시퍼렇게 죽어 가는 피부는 덤이었다.
박민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수현의 종잇장 같은 몸은 박민후에게 오래전 사라진 죄책감을 소심하게 자극했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변명의 말부터 먼저 나왔다. 좀 전에 갑작스러운 빛에 혹여나 그에게 문제가 생길까 싶어 얼른 제 품으로 살짝 잡아당긴 것뿐이었는데 이수현은 팔이 부러졌다.
물론 속으로 종잇장이라느니 물몸이라느니 ‘톡 치면 툭 부러질 거 같다.’ 같은 생각은 했으나, 막상 눈앞에서 현실로 받아들이자니 속이 답답했다. 안 그래도 그를 향한 마음을 방금 자각했다. 그런데 자각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제 손으로 이수현을 다치게 하다니….
박민후의 눈썹이 절로 축 처져 약간 불쌍해 보이는 표정이 되었다. 물론 이수현에겐 통하지 않았다. 이수현은 ‘저게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구길 뿐이었다.
박민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부러진 팔목을 어루만졌다.
“아.”
“아?”
박민후는 그게 다냐고 묻고 싶었다.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것까지 바라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친 부위를 만질 때 보통의 사람들이 으레 보이는 반응이 이수현에겐 없었다. 이수현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살짝 미간에 주름이 잡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도저히 지금 팔이 부러진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물론 헌터들이야 이런 축의 부상은 일상다반사니 아무래도 좋다지만, 이수현은 일반인이 아니던가.
시퍼렇게 물들어가는 팔목을 보며 박민후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회복 포션을 꺼내 들었다. 유리병에 새빨간 액체가 출렁거렸다. 코르크 마개를 이빨로 뽑아 버리면서 이수현에게 병을 쥐여 줬다.
“일단 이거 마셔.”
그렇게 말하고는 힐러의 기본 스킬 중 하나인 [성스러운 빛]을 사용했다. 이수현의 팔목을 붙잡은 손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세간에 알려진 힐러의 스킬이라면 밝은 빛을 띠는 게 당연했지만 박민후의 스킬은 시커멨다. 검은빛은 따스함보다는 차가움으로 가득했다.
“원래 검은빛이 나요?”
“아니, 나만 그래. 원래는 하얀빛이지. 알잖아? 힐러 하면 성직자나 뭐…. 속성 자체가 빛이니까. 그래도 능력은 똑같아. 왜 신경 쓰여? 하지 말까?”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그럼 포션이나 마셔. 왜 안 마시고 들고만 있어? 구경하라고 준 거 아니거든?”
“그걸로 치료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마시기나 해.”
솔직히 이수현은 포션까지 마실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박민후가 계속 마시라 하니 하는 수없이 마셨다. 무슨 맛일까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고. 포션은 별맛은 안 났다. 약간 1% 부족한 느낌의 이온 음료 맛이었다.
포션을 마시자마자 스킬에 의해 낫고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완치되어 멀쩡해졌다. 그걸 보니 그의 스킬만으로도 충분했던 거 같은데 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뭐 제 포션도 아니니 상관없나?
치료가 끝난 뒤에도 박민후는 여전히 이수현의 손목을 보며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언뜻 다 나은 건가 확인해 보는 것도 같았지만….
“다시 부러뜨릴 거 아니면 손 놓죠?”
팔을 부러뜨린 게 내심 신경이 쓰인 건가? 그는 군말 없이 손을 놓았다. 이수현은 한차례 사람이 없는 골목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길목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아니, 없어서 다행이지. 박민후도 저도 꼬락서니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박민후는 꽤 멀쩡했지만, 이수현 자신은 몸에 두르고 있던 로브는 어느 순간 사라진 지 오래였고, 여기저기 모래와 물에 젖은 옷은 기분이 나빴다. 이건 전에 은행에서 피칠갑을 한 거와 동급이지 않을까? 걸을 때마다 신발에 물이 찬 건지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밖으로 나가 보면 어딘지 알겠지. 먼저 앞서 걸어가다가 어깨가 잡혀 반대 방향으로 돌려졌다.
“택시 타고 가자. 피곤해서 안 되겠어.”
“…그래요.”
이제 보니 그는 정말 피곤해 보였다. 눈가를 꾹꾹 누르는 꼴과 반쯤 감긴 눈이 그가 얼마나 피곤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박민후를 따라 걷자 금방 사람들이 가득 나타났다. 이수현은 저희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가 승차 거부를 하려는 걸 박민후의 얼굴을 보고 통과되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박민후는 정말 지쳤는지 슬쩍 이수현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아니, 잠든 척을 했다. 그가 이런 데서 잠을 잘 일도 없었고, 이런 식으로 조용히 자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시끄러운 택시 기사를 조용히 하게 하기 위해 자는 척을 하는 거겠지.
아니면 …울었던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그가 원하지 않는 한 저도 모른 척해 줄 생각이었다. 우는 걸 타인에게 보이는 건 좀 그렇지…. 그것도 박민후 같은 인간이 그런 거니까 알 만해.
툭. 그의 머리에 이수현은 제 머리를 기댔다. 차창 유리는 너무 차가워서 그랬다. 원래는 그를 바로 밀어 버리려고 했는데 어차피 좁은 차에서 그를 밀어 버리든 그냥 두든 그게 그거였다. 그렇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를 들으니 저도 졸음이 올 것 같았다. 몸은 박민후가 준 포션 덕택인지 아니면 그의 스킬 덕분인지 더할 나위 없이 멀쩡하고 상쾌했지만, 정신은 피곤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거 같다. 덕분에 의문도 많이 생기고, 알고 싶지 않은 걸 알게 되기도 했다.
아, 맞아. 그에게 사과해야지. 본의 아니긴 해도 그의 과거를 멋대로 봤다. 그도 알 거 같지만 그래도 사과를 하는 게 더 좋겠지. 그러니 집에 돌아가면 사과를 하자. 그리고 씻고 밥을 먹고, 푹 자야지.
이수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먼저 씻을게요.”
현관문을 열면서 이수현은 그 말만을 툭 던지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박민후가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었다. 닫힌 욕실 문 쪽에서 젖은 옷이 잘 안 벗겨지는지 끙끙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곧이어 물 트는 소리까지 들은 후에야 박민후는 멀뚱히 현관에 서 있다 운동화를 벗고 욕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한 원룸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방을 둘러봤다. 성인 남성 둘이 살기엔 조금 작은 듯한 집이었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벽 한쪽에는 작은 주방과 바로 앞에는 2인용 식탁. 그리고 벽 한쪽에 있는 싱글베드와 맞은편에 설치된 벽걸이 TV. 현관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 겸 욕실까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오래 집을 비운 것도 아니건만 굉장히 오랜만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로 알게 된 결과, 던전 안에서 흐른 시간은 3일이었다. 물론 실제 체감상으론 한 달은 있었던 것 같았지만. 우리가 던전에 들어간 지 겨우 3일이 지나 있었다. 겨우 3일이라…. 확실히 예전보다 바깥과 던전 안의 시간 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던전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젠장.”
자꾸만 물소리가 들려오는 등 뒤로 신경이 쏠려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라. 저쪽에 귀 기울여서 뭐 하려고? 네가 무슨 열여덟 살 먹은 남 고딩이냐. 추하다, 박민후. 거칠게 손을 들어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신경을 억지로라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박민후는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마침 딱 좋은 게 있었지.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터치하며 몇 없는 연락처 목록을 뒤졌다. 떡 하니 ‘메로나’라고 적힌 번호를 찾아다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오기 직전 신이란 놈이 한 말도 있었고, 어차피 이놈이랑은 애초에 할 말도 있었다. 그의 감이 말하길 아무래도 신이 말한 것과 플로나가 블랙마켓에 온 것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신경을 돌리기에 딱 좋은 주제기도 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어쭈, 이게 뒤지려고.”
그새 번호를 바꿔? 내가 나중에 두고 보자 했더니…. 이렇게 도망친다? 휴대폰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끈 올라왔다. 평범한 휴대폰이었더라면 벌써 찌그러져 생을 마감했겠지만, 다행히도 박민후가 사용하는 휴대폰은 던전 부산물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니만큼 웬만해서는 부서지지 않았다. 그래, 웬만해서는.
헌터들은 종종 이렇게 감정적인 이유로 힘 조절을 못 하는 상황이 오기 때문에 던전 부산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인 물건들이 헌터 전용으로 따로 나와있었다. 물론 그렇다 보니 일반 구매는 시중에서 잘 이루어지진 않는다. 던전 부산물이니만큼 각성자가 관리 판매하는 게 당연했기에 기본적으로는 헌터 협회를 거치거나 각성자 전용 매장으로 가야 했다.
물론 잘 부서지지 않는다 뿐이지 이것도 강한 힘에는 충분히 부서졌다. 그렇기에 지금도 박민후의 손안에서 휴대폰이 작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박민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곤 손에서 힘을 뺐다. 지금 이걸 또 부숴 먹으면 새걸 구하러 가기가 매우 귀찮았기 때문이다.
박민후 정도의 헌터가 쓸 만한 물건을 구하려면 일단 협회로 가야 했는데 한번 협회에 갈 때마다 귀찮은 일이 무슨 고구마 줄기에 엮이듯 주렁주렁 딸려 나왔다. 그러니 가서 또 무슨 귀찮은 일에 휘말리려고…. 아니, 가긴 해야 했지만 지금 당장 가고 싶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부수는 것 대신 박민후는 플로나의 연락처를 알 법한 인물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명색에 레라인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인지라 그의 연락처는 비슷한 급이 아닌 이상 얻기도 힘들었다. 물론 그와는 관계없는 사항이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
“얜 또 왜 전화를 안 받아….”
하지만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이놈도 저놈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되는 일이 없네. 대충 강유람에게 톡을 보면 연락 달라고 해 둔 뒤 아까부터 계속 눈에 밟히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집어 들고 보니 이수현이 잠옷 대용으로 입던 면 티셔츠 중 하나였는데 박민후의 기억이 맞는다면 외출 직전까지 이수현이 입고 있던 거였다. 그때 벗어 둔 게 여태 바닥을 뒹굴고 있었나 보다.
…잠깐. 쟤가 옷을 들고 들어갔던가?
달칵.
“박민후 헌터, 들어가서 씻어요.”
“야, 너 옷….”
생각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이수현의 부름에 절로 돌아갔던 몸을 어찌하지도 못한 상태로 박민후는 놀라 굳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게 제 시야를 가득 채우는 살색 향연에 박민후는 기겁했고.
“어우, 시발!”
“웁!”
깜짝 놀라 욕이 나온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민후는 순간 정말 너무 놀랐다. 진짜로. ‘이렇게까지 놀랄 생각은 없었는데.’ 싶을 정도로 놀라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옷을 이수현의 면상에 집어 던졌다. ‘찰싹!’ 하고 피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반동으로 이수현이 작게 휘청거렸다.
이수현의 얼굴을 타고 옷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주르륵 떨어졌다. 옷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박민후는 차마 이수현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손으로 눈가를 주무르는 척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생각해도 이상 행동이었다는 자각이 있었다. 피 말리는 정적을 깨며 먼저 움직인 건 이수현이었다.
앞에서 짧게 한숨 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미쳤어요? 갑자기 왜 이래?”
그 목소리에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이수현을 쳐다보았다. 쓱 올라간 한쪽 눈썹과 더불어 저를 보는 눈빛이 참으로 불손했다. ‘너, 돌았냐?’라는 뜻의 눈빛이었다. 억울했다. 저라고 뭐 이러고 싶었겠는가? ‘누가 그러게 벗고 나오래? 시발, 내 심장이랑 안부 인사 할 뻔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줄 알았다고!’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깜짝, 놀랐잖아! 그러게 왜 홀딱 벗고 나와?!”
“아니, 뭘 새삼스럽게…. 그보다 내가 더 놀랐거든요? 다짜고짜 사람 면상에 옷을 집어 던지는 게 어디 있어?”
투덜거리며 그가 던져 준 옷을 입는 이수현을 보며 박민후는 침을 삼켰다. 잠옷 대용으로 품이 넉넉한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참….
귀여웠다. 그래, 귀여웠다!
다 큰 성인 남성 보고 귀엽다고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상상해 봤지만 이런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뭐 하러 그런 걸 상상하겠는가? 그런 걸 상상할 바에는 좀 더 실용적인 상상을 하겠다. 그래, 드래곤 대가리를 몇 초 만에 잘라 버릴 수 있을까 같은 거. 진짜 별게 다 귀엽네!
게다가 티셔츠만 입은 상태였기에 하반신이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박민후는 최대한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애먼 허공을 노려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제 심정도 모른 채 여전히 눈앞에서 투덜거리는 이수현 때문에 박민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죽을 맛이었다. 원래 이렇게 별게 다 신경 쓰이고 별게 다 귀여워 보이고 별게 다 눈이 가나…? 미치겠군.
거의 일주일 동안 매일 봐 오던 몸이었다. 이수현은 툭하면 허물 벗듯 옷을 벗으면서 욕실로 가고 그 상태로 대충 하반신만 슬쩍 가리고 나와서 옷을 꺼내 입으니까…. 솔직히 정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수현이 그를 이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박민후는 오늘부로 저 꼴을 제정신으로 볼 수 없을 거란 걸 확신했다.
그간 하루에 한 번 꼴로 보던 몰골이 새삼스러울 리도 없건만. 자신과 같은 게 달려 있고, 특출나게 좋은 몸매라거나 아니면 여자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진짜 뭐 하나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후로는 그냥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그렇게 한번 의식하니 이상하게 더 의식돼서 미칠 것 같았다.
쿵.
이수현이 눈앞에서 분명 뭐라 뭐라 떠들고 있는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쿵.
쿵쾅거리는 제 심장 박동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크게 들리지? 이러다 이수현의 귀에까지 들리는 거 아냐? 소리도 소리지만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니 이러다 진짜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이 들 정도였다.
아니, 솔직히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면 어디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원래 이래? 다 이래? 진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 이후로 처음인데…. 솔직히 너무 뛰니까 이제는 심장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제 귀를 어지럽히는 심장 박동 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딱 죽을 맛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이런 제 상태를 이수현에게 들킨다? 당장 이 집을 뛰쳐나가 한강 밑바닥에 처박혀야지, 시바알….
어느새 성큼 다가온 이수현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젓는 모양새가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박민후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나가서 던전이라도 부숴야 하지 않을까?
“박민후 헌….”
타이밍 좋게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 소리에 ‘헉.’ 하고 숨을 쉬었다. 그제야 박민후는 제가 숨도 안 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이지 멍청한 꼴의 연속이었다.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한심한 표정이 나올 거 같아서였다.
손안에서 연이은 진동 소리가 들려오며 이것이 단순 문자가 아니라 전화라는 걸 알려 주었다. 박민후는 내심 속으로 살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화가 끊길세라 박민후는 도망치듯 이수현을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도 같았다. 젠장. 박민후는 욕실 문을 ‘쾅’ 소리가 울릴 정도로 세게 닫아 잠그며 그대로 문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진짜 미치겠네.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전화는 한번 끊겼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터치하며 박민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 시발.”
-이 새끼는 왜 전화 받자마자 욕이야?
황당하다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뭐. 뭔데.”
-너님이 전화 달라고 했거든요?
“아, 그랬지.”
좋아, 지금 당장 나가서 던전이나 돌고 오자.
***
쾅 소리 나게 닫힌 욕실 문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박민후가 이상하다.
뭐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하여튼 좀 이상했다. 뭐, 언제는 박민후가 안 이상했냐만은…. 오늘은 특히 평소랑 너무 달라 이상했다. 다짜고짜 얼굴에 날아온 옷만 생각해도 그렇지 않나? 얼마나 황당하던지. 아니,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과민 반응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다고 아예 맨몸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아래만 가리면 된 거 아닌가? 이상한 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던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신경이 날카로운가? 아니면 역시 운 것 때문에? 그것도 아님 제 품에 파고든 것 때문에 그러나? 그때도 뭐 좀 이상했지. 타인의 심장 박동을 그렇게 가까이서 들은 적도 없거니와 심장이 그리 빨리 뛰는 경우도 처음이라 내심 놀랐었다.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그런 걸까 싶었지만. 짚이는 게 여러 개 있긴 한데 그래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침대 위에 널브러진 트레이닝 바지를 입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동실에서 볶음밥 봉투를 꺼내 뜯고 그릇에 부었다. 랩을 싸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지이잉.
원룸 안은 소란스럽던 박민후가 사라지자마자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와 더불어 전화를 받는답시고 욕실로 들어간 박민후의 목소리가 작게 웅얼거리며 들려올 정도였다. 물론 웅얼거리는 소리가 문장으로 들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듣고 있기도 뭐해 TV를 켰다.
처음 자취를 할 때는 딱히 TV의 중요성도 없었고, 없어도 될 거 같아 사지 않았던 건데 막상 사고 나니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마침 예능 프로를 하고 있던 건지 켜자마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순식간에 원룸 안을 가득 메우며 다른 소리들을 차단했다.
띵.
따끈하다 못해 뜨겁게 데워진 그릇을 조심히 꺼내고 랩을 벗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수저 하나와 찬물이 담긴 물컵만 들고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오른손으로는 밥을 퍼서 입에 넣고 왼손으로는 리모컨을 쥔 채 채널을 이리저리 바꿨다. 딱히 뭔가 보고 싶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한 채널에 멈추었다. 3일 전 일어난 던전 게이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채널이었다.
때마침 박민후가 욕실에서 나왔다. 정말 전화만 받고 나왔나 보다.
***
-야야, 왜 그러는데?
“현타 와서 그런다. 현타가 와서….”
-와우! 너도 현타가 와?
“이 새끼는 왜 또 갑자기 시비실까….”
휴대폰 너머로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재밌지? 아주 어? 재밌어 죽으려고 한다? 난 한숨만 나오는데…. 젠장. 괜히 얼굴이 뜨끈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크큭, 그래서 왜 전화한 건데? 안 그래도 너한테 연락하려고 하긴 했는데…!
“메로나 번호 좀 내놔 봐.”
-메스윈 헌터? 그 사람은 왜? 뭐 번호야 있긴 하지.
“자세한 건 알 거 없고…. 그래서?”
-음, 말본새가 정말 짜증 나서 주기 싫은데. 일단 끊어봐. 찾아보고 다시 연락함!
“그래.”
전화를 끊자마자 박민후는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씻을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짜 요 앞 던전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다만 욕실 문을 여는 과정이 꽤 힘들었다. 그림자에 숨어들어 조용히 집을 빠져나갈까 수십 번 고민했다. 손잡이를 부러뜨릴 것처럼 잡은 상태로 문 앞에 서서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으로 TV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오자 식탁 의자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 이수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리에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 손은 느리게 입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또 볶음밥이었다. 또! 그놈의 볶음밥! 정말이지, 새벽에 다 불 싸질러 버릴 테다…! 그런 각오를 속으로 다짐하며 박민후는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러다 시선이 절로 아래로 내려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가, 이제 나도 모르겠다. 다행히 바지는 입었군. TV 속에서는 3일 전 나타난 던전 게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3일 전 갑작스러운 대규모 지진이 있었습니다. 서울을 뒤흔드는 규모의 강진이었죠. 그런데 그 장소에서 지금의 세상에 반하는 사상을 품은 불온 분자의 테러가 있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새롭게 던전 게이트가 서울 지하 한복판에서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요? 협회 측의 공식 입장은 테러와 던전은 서로 관련이 없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의심이 드는군요. 5년 전의 역사를 반복하게 되는 건 아닐지…. 다행히도 현장에서 큰 피해가 발생하기 전 신속한 대피로 큰 사상자는 없다고…. 」
불온 분자.
박민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단어에 시선을 줬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호출이 와서 나가 봐야 할 거 같아.”
“지금요? 휴가라면서요.”
먹던 것을 멈추고 저를 돌아보는 이수현을 보자니 박민후는 나가기 싫어졌다. 아니지, 지금은 오히려 옆에 있을수록 진정이 안 될 거다. 지금도 잠잠했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지, 이러다 바보 같은 꼴을 보여 이수현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해.
“급하다네…. TV 보고 있으면 알 거 아냐. 저것 때문에 일단 가 봐야 할 거 같아. 아마 협회도 내가 저기 엮였다는 걸 이미 알고 있겠지. 블랙마켓에 인간이 워낙 많았어야지, 귀찮게 됐다니까?”
말하고 보니 좀 이상했다. 강유람은 왜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박민후가 던전에 들어간 건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놈들 중 알 놈은 다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플로나가 알고 있었고, 그곳에 있던 헌터들이 알겠지. 당연하게도 협회와 4대 길드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고, 협회에서 연락이 없는 건 아직 박민후 자신이 던전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화 건 강유람은 던전과 관련된 이야긴 꺼내지도 않았다. 마치 그가 던전에 들어갔던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강유람의 성격상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인사보다 먼저 그 주제가 치고 나왔어야 했다. 미스토어 부길드 마스터인 강유람이 이런 정보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피곤하다더니.”
“이래 봬도 헌터라고. 괜찮아, 괜찮아.”
“딱히 그쪽 걱정한 건 아닌데….”
“꼭 한마디가 많다?”
미간을 팍 찡그리며 박민후가 성큼 이수현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수건을 잡고 머리를 탈탈 털며 헤집었다. 섬세함이라고 없는 그 손길에 이수현이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손을 팍 쳐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
“쫌! 이러지 말라니까…!”
이수현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상태로 그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니,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지 박민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고 곧장 현관으로 향하는 박민후를 보던 이수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박민후 헌터.”
“왜?”
이수현을 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운동화를 신으며 묻는 그에게 이수현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박민후의 휴대폰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아니에요. 잘 다녀오라고요.”
“그래.”
박민후를 보던 몸을 틀어 다시 TV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현관문이 열렸다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수현은 얼마 남지 않은 볶음밥을 마저 입에 욱여넣었다.
***
「한편 협회 측의 발표에 의하면 이번에 나타난 새로운 던전은 최대 S급 희귀 던전으로 확인, 이름은 ‘알프하의 둥지’라고 하는군요. 둥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출몰하는 것은 희귀한 드래곤 종입니다. 어쩌면 드래곤의 알을 얻을 수 있을 거란…. 」
드래곤이라. 우리가 들어간 던전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던 건가? 물론 박민후의 기억에서 드래곤이 나오긴 했지만 저기서 말하는 던전과는 종류부터가 다른걸. 게다가 서울 지하라고 했지 블랙마켓이라곤 안 했으니까…. 다른 던전인가. 박민후가 왔을 때 물어보면 알려 주려나….
…모르겠다. 사실 지금 정말 중요한 건 저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 먹은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틀고 수세미를 집었다. 졸졸 흐르는 물을 쳐다보고 있자니 정신이 멍했다.
졸졸졸….
“후….”
새가 그랬지. 흘러가는 물을 잡을 수 없다고. 그래, 이미 흘러가 버린 물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어. 막아섰다가 고여서 썩어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새는 이 모든 게 박민후가 선택한 결과라고 했다.
주인공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때로는 흐름이 주인공을 멋대로 움직이게도 하지,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하지만 이미 다 끝나지 않았나.
…이미 완결이 난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미 끝을 봤으니 그럼 느긋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공과 엮이긴 했지만, 이미 세상도 구하고 난 뒤니 적당히 무난하게 자잘한 사건 사고에만 엮이리라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멸망할 거라고? 박민후가 힘들게 구한 세계가 아니었나? 그걸 위한 불행이 아니었나? 어째서 세계는 차근차근 다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무슨 목적으로? 세상도 너무하지. 아니, 무슨 세계 평화가 유통 기한 5년이야. 게다가.
“박민후가 정말 또 세상을 구하는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나라면 두 번은 안 해.
세계 멸망? 하든지.
힘들게 구해냈더니 똑같은 꼴을 반복하려고 하는 머저리들이 사는 세상을 또 구한들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박민후가 세계를 구한다고 해도 이곳에 사는 인간들은 변함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 세계는 몇 번을 구해도 똑같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겠지.
거짓된 평화라도 평화였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한 욕심은 참사를 부르지. 게다가 포기도 모른 채 그러면서도 모든 건 박민후에게 맡기겠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가 주인공이란 이유로.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영웅이니까.
거기다 이곳에 신이란 놈이 하던 말이나 행동을 봐라. 존중? 정말이지, 존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디까지나 책임 회피다. 박민후한테 다 떠넘기고 지는 편하게 하자고 튄 거잖아.
졸졸 흘러가는 물을 잠갔다.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를 씻는 데 참 오래도 걸렸다. 젖은 손을 대충 탈탈 털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피곤해.”
나는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박민후와 제대로 한 번쯤 이야기를 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엮이지 않았다면 신경도 쓰지 않을 일이지만, 나와 관련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그냥 모른 척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사실 이대로도 상관이 없으니까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도 않고….
세상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데 뭐 그리 느긋한 생각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쩌겠는가? 성격이 원래 이래 먹은걸. ‘다음 날 지구가 멸망한다!’라고 백날 천날 말해 봤자 현실로 닥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것에 더욱 무관심했고.
좋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런 이야기는 생각났을 때 해야지. 뒤로 미루면 또 어물쩍 넘어가게 된다. 박민후가 금방 올까. 의자 위로 두 다리를 올려 끌어안고 무릎에 턱을 올려놓은 채 멍하니 흘러가는 화면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화면은 예능 프로로 넘어가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고 떠드는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으나 내 귀에는 그게 자장가 같았다.
“언제 오지…. 졸린데.”
딩동.
깜빡 잠이 들 뻔했다가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퍼뜩 놀라 눈이 번쩍 떠졌다. 반쯤 감긴 눈으로 박민후가 온 건가 싶어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아차 했다.
박민후가 초인종을 누를 리가 없는데.
그러나 이미 손은 문을 열고 있었다. 오늘따라 문이 열리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역시나 박민후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칙칙한 색을 띠는 금발이 보였다.
“Hi. 안녕, 자기?”
문틈으로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나를 보며 사르륵 웃었다.
“이런, 문은 함부로 열어 주면 안 되는데.”
살살 눈웃음치는 꼴이 퍽 눈이 가는 모양새였으나 나에겐 별 효과가 없었다. 조금 열린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문을 잠갔다. 제자리로 돌아가 식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을 들고서 112에 전화를 해야 할까 아니면 헌터 협회에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역시 헌터 협회 쪽이겠지? 이 오밤중에 외국인? 아무리 봐도 헌터 아닌가. 그때 쾅쾅하고 거세게 문이 두들겨졌다. 다급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잠깐잠깐!! 신고하지 마!! 나, 박민후 친구야!!”
친구? 박민후한테 친구가…. 있나? 없을 거 같은데. 아니지, 있을 수도 있겠지. 문제는 그 인간 친구란 놈이 왜 오밤중에 내 집에 찾아왔냐는 건데…. 어쩔까. 여태 문을 두들겨 대서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냥 두면 밖에서 계속 시끄럽게 굴 거 같고, 그럼 민원이 들어올 거 같기도 한데…. 역시 그냥 신고해 두는 편이 좋겠지?
“진짜 신고하지 마! 할 말만 하고 금방 갈 거란 말이야! 난 일반인은 안 건드려! 절대로 안 건드려! 내 얼굴을 걸고 약속해!”
…뭐 괜찮겠지. 여차하면 얘도 있고. 힐끗 내 발아래 그림자를 보다가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시끄러우니까 일단 들어오세요.”
문을 열어 주자 성큼 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나를 보며 능글맞게 눈웃음쳤다. 빛 아래서 보니 남자의 화려한 백금발이 반짝였다. 접힌 눈 사이로 푸른 눈이 보였다.
“자기, 너무 겁이 없다. 하긴 이 얼굴 보면 막 없던 애정도 생기긴 하지? 이해해!”
“…참 자기애가 충만하시네.”
“잉? 자기, 나 몰라?”
“몰라요.”
내 말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에게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와, 어디 산에 살다 오기라도 한 거야? 날 모른다고? 그럴 수가 있나! 이 플로나 메스윈을? 이달의 사귀고 싶은 헌터 1위를 차지한 이 나를?”
“…….”
‘지랄.’
내 표정이 구겨질수록 플로나도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진짜 모르는구나. 정말 충격이야, 이런 취급!! 박민후 때 이후로 처음이야!”
양손으로 볼을 감싸며 호들갑을 떠는 장신의 남자는 덩치도 커서 그런가? 존재만으로 현관이 꽉 차 보였다. 형광등 불빛에 따라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더불어 푸른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봤다면 홀리듯 봤을 그런 외모긴 했다. 그러나 그뿐. 내겐 그저, 코앞에서 외국인을 볼 때의 신기함 정도만 느껴졌다.
나는 딱히 타인의 외모에 관심이 없었다. 누가 이쁘고 누가 잘생겼다 하는 이야기도 남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게 눈이었는데, 어린 날 친구에게 이 소리를 했다가 눈깔 페티시가 있는 거냐며 놀림을 받았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볼 때 눈부터 볼 뿐인 거고…. 눈동자 색을 보는 게 나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푸른색보단 노란색이 좋았다.
“당신이 찾는 박민후 헌터는 지금 없어요. 그러니 소란 그만 떨고 돌아가 주시겠어요?”
“하지만 여기 살잖아.”
돌연 씩 웃으며 저를 보는 남자의 눈빛이 기분 나빴다.
“자기, 그런데 나 계속 여기 서 있는 거야? 막 예의상으로다가 차라도 드릴까요? 같은 말은 안 해?”
“할 말만 하고 가신다기에.”
“차가워!”
우는 소리를 내며 나를 보는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럴 때는 반응 안 해 주는 게 제일 좋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남자는 입을 삐죽였다.
“별거 아니고 민후한테 연락 좀 해 줄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얘가 너무 늦어서 직접 찾아왔지 뭐야?”
뭐, 그 정도쯤이야…. 아,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찾으려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박민후 번호를 몰랐다.
***
“…저 박민후 헌터 번호 모르는데요.”
“응?”
자신을 플로나 메스윈이라 소개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예.”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제가 왜요.”
“왜긴 박민후 헌터를 위해 낯선 사람에게 거짓말을….”
플로나는 저를 올곧게 쳐다보는 무표정한 남자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왜요.”
“…아니구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무심한 저 얼굴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플로나는 느낌이 왔다. 눈앞의 남자는 장난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제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거니와 제 장난스러운 언행에 토 달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무심했고, 저에게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전화번호도 모를 수가 있어?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친해서 같이 사는 줄 알았는데…?”
“맨날 옆에 붙어 있어서 전화할 필요성을 못 느꼈거든요. 떨어진 적이 있어야 전화 걸 일이 생기지, 그쪽이 말할 때까지 전화번호 자체를 생각도 못 했어요.”
눈앞에 남자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박민후를 잘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놀랄 이야기였다.
“…그래?”
“예.”
“걔가 막 껌딱지처럼 자기한테 붙어 있었다고?”
“예, 그 껌딱지 데려가려고 온 건가요?”
“…아니. 그건 내 관할이 아니라서.”
“그런가요.”
그놈이 미친 건가.
“그런데 굳이 여기 와서 전화를 걸 이유가 없을 텐데요.”
“뭐 그렇긴 하지. 일단 내가 직접적으로 전화를 걸 수는 없는 상황이라서…. 마침 눈앞에 있는 자기한테 도움을 좀 받을까 한 거지.”
플로나가 허공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이수현에게 내밀었다. 작디작은 메모지 정도의 크기의 빈 종이였다.
“봐도 모를걸. 이건 박민후랑 나만 알 수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플로나가 윙크를 날렸다. 거참. 이제 볼일도 끝났으니 이수현은 플로나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플로나가 이마를 살짝 긁적이며 난감한 얼굴을 하며 웃었다.
“자기, 겁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뭐 가끔.”
“매 순간?” 하고 덧붙이며 눈앞에 플로나가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눈이 차가웠기에 이수현은 그 미소를 서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척 허리에 손을 얹고는 짐짓 아이를 대하듯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플로나가 이야기했다.
“지금 되게 위험한 상황인 거 알아? 내가 혹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여기 온 거라면 어쩌려고 그랬어?”
“뭐, 죽는 거죠. 별거 있나….”
그 말에 플로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럼에도 입은 습관처럼 웃고 있었다.
“이야, 세상 쉽게 사네. 근데 자기, 과연 자기 바람대로 쉽게 죽여 줄 거 같아? 그건 정말 잘못 생각한 거야. 힐러가 왜 있다고 생각해.”
“고문이라도 하겠단 말로 들리네요.”
“뭐, 그렇지. 물론 나는 아니지만. 필요한 정보를 가진 인간을 손쉽게 죽게 내버려 둘 정도로 이쪽 업계 인간들은 녹록지 않아서 말이야. 명심해 둬. 자기, 소원대로 단숨에 죽을 수 있는 건 운이 따라 줘야 해. 운도 없이 한번 붙잡히면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자기가 발밑에서 죽여 달라 애원해도 정신이 망가져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된다고 해도 필요가 끝날 때까지 숨을 억지로라도 붙여 놓을 거란 말이야.”
“참 고마운 충고네요.”
“너무 나쁘게 듣진 마. 단순히 경고하는 거야. 앞으로 조심하라고. 오늘처럼 함부로 문 여는 짓도 하지 말고, 이왕 붙어 있을 거면 박민후한테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으라는 뭐 그런 경고지. 살고 싶으면. 솔직히 이사를 추천해. 아예 박민후 집으로 가는 건 어때? 거긴 보안이 좋거든. 박민후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도 찾지도 못하지.”
언제 다정했냐는 듯 플로나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일반인이 헌터와 엮여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어. 헌터라고 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을 구할 수 있지는 건 아냐.”
“겪어 봤나 보죠?”
“그래.”
그렇게 대답하며 플로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수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도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닐 텐데요. 주제넘어요.”
“친구가 나쁜 길에 빠지면 조언을 하는 게 친구지?”
“그런 건 그쪽 친구한테 하시고요.”
“내 친구는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거든. 자기는 좀 다른 거 같아서?”
“저는 뭐 잘 들어줄 거 같나요? 아닐 텐데.”
이수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슬슬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할 말이 끝났으면 바로 나갈 것이지. 뭐 이리 참견이란 말인가.
“솔직히 자기도 박민후에 대해 알 텐데…?”
“글쎄요. 제가 대답할 이유는 없을 거 같군요.”
“박민후는 여기저기 원한이 많은 놈이야. 그런데 그 옆에 일반인이 붙어 있어 봐. 어떻게 되겠어. 이용당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잖아. 안 그래?”
“그렇네요.”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눈앞에 남자는 여전히 무심했기에 플로나는 맥이 빠졌다. 제가 아무리 진지하면 뭐 하겠는가 듣는 당사자가 저리 무관심으로 일관하는데 기운이나 빠지지. 제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한 건지 모르겠지만 더는 제가 해 줄 말도 없었다.
“…나도 참 오지랖이 심했네. 그래 내가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지. 진짜 가 볼게, 그거 잘 전해 주고.”
고불거리며 흘러내린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면서 플로나가 장난스럽게 손 키스를 남기고 떠났다.
***
닫힌 문을 가만히 노려보다 몸을 돌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툭 하고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적당히 따뜻한 공기와 대비되게 찬기가 맞닿은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적당히 시원한 그 감각이 좋아 눈을 감았다. 보는 사람 하나 없는 TV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TV를 끄면 될 문제였으나 지금 자세가 딱 좋았기에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 재잘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남자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나도 안다. 박민후의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남자는 만약을 이야기했지만, 그건 ‘앗’ 하는 순간 내 현실이 될 일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잘 알기에 그렇기에 박민후와 엮이고 싶지 않았지.
하지만 막상 타인에게 그런 소릴 들으니 왜 그렇게 신경이 거슬리는지. 내 일에 남이 참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안 들어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어찌 되었든 박민후와 내 일이었다. 남이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이 불편했지 이제는 박민후가 내 옆에 있는 건 꽤 익숙한 일이 되었다. 내 집에는 이제 내 물건뿐 아니라 박민후의 것도 꽤 많았다. 그게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그와 거리를 둘 이유는 분명 몇 가지나 있었다. 일단 내 안전이 위험했고, 또 난 혼자가 좋았다. 또….
어라, 이것뿐이었던가?
좀 더 여러 이유가 있었던 거 같은데. 정작 지금 떠오르는 건 저것뿐이었다. 내 안전은 박민후가 계속 옆에 있으면 해결될 문제였고 혼자 있는 건…. 뭐 됐나.
시원한 식탁에 볼을 붙이고 있자니 다시 졸음이 솔솔 왔다.
***
어느덧 온전한 어둠에 물든 복도를 박민후는 느긋하게 걸었다. 집집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활감이 느껴지는 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전부터 저와는 관계없는 그런 장소였었으니까. 그가 사는 집 또한 박민후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다.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고, 그가 허락한 몇 안 되는 사람만이 그 위치를 알았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박민후뿐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모든 상황이 박민후는 참 낯설었고, 새삼스러웠고,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이따금 들었다. 이런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의 하루라니….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며 다시 한 번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늦어! 좀 빨리 받아! 내가 꼭 두 번씩 걸어야 해?
“미안하다. 됐지?”
-이 마음 넓은 강유람 님이 친히 넘어가 주지! 일단 원래 있는 번호로 연락해 봤는데 안 받더라. 없는 번호라는 거야! 아, 하긴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물어봤겠네. 그래서 일단 레라인 측에 물어봤는데 글쎄 얘네 대답이 영 시원찮은 거 있지? 뭔가 되게 수상쩍어. 그거 알아? 요즘 협회고 길드고 분위기가 영 이상해. 결국 번호는 못 알아냈어. 알아내려면 좀 더 걸릴 거 같은데 당장 필요한 거야? 그런 거면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좋을걸?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군. 그래도 조심하자 싶어 인벤토리에서 캡모자를 꺼내 썼다. 그때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흐음, 그런데 이것 봐라? 잘 쓰던 번호를 바꾼 메스윈 헌터와 그런 메스윈 헌터의 번호를 달라는 박민후 씨를 보아하니…. 네가 범인이구나!
“머리 잘 돌아가네, 강유람. 정답이다. 그 잠깐 사이에 꼬리 말고 도망갈 줄 몰랐지,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안타까운 별이 또 가는구나. 얼굴은 보기 좋았는데 아쉽….
“안 죽일 거거든? 뭐만 하면 내가 죽인다고 생각한다, 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우리의 박민후 헌터가?!
“또, 또 기어오르지.”
-나 아님. 누가 너한테 이리 기어오르겠니.
“글쎄…. 너 아니어도 있던데.”
-…….
있지, 이수현이라고. 겁은 없고 세상만사에 무심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그런 놈이. 박민후의 말에 휴대폰 너머로 잠깐에 침묵이 흘렀다. 어째 느낌이 싸한데. 슬쩍 휴대폰을 귀에서 멀찍이 떨어뜨리자마자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어엉마알?!! 누구누구!? 와!! 대박 사건! 아, 아! 나 알아! 알 거 같아 딱 감이 왔어. 너랑 장 보던 남자 맞지?
“너 목소리 좀 줄여!! 귀청 떨어지겠다! 그리고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흥분에 차 목소리가 평소보다 배는 커진 강유람의 목소리는 휴대폰은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지도 않았는데도 쩌렁쩌렁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놀란 개들이 여기저기서 짖기 시작했다. 아, 진짜. 귀가 아파 휴대폰을 최대한 멀찍이 떨어뜨려 놓던 박민후는 이수현을 언급하는 강유람 때문에 황급히 휴대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런 박민후를 모르는 강유람은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흑흑, 유명인은 괴로워 사생활이 없다니까? 너 마트 장 보러 간 날 이미 SNS에 쫙 떴어. 진짜 웃겼는데. 뭐였지? ‘세계 1위 헌터 가정적인 모습?!’ 하고 올라온 거 보고 배 터지는 줄 알았다니까?
***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지나쳐 텅 빈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던 강유람은 휴대폰을 꽉 쥔 채 길드 내부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좀 전까지 즐겁게 웃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그의 얼굴은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았다.
-좆같네. 뭘 멋대로 올리고 처자빠졌어.
“물론 뒤늦게 협회 측에서 일반인 신변 보호 때문에 지우긴 했는데 그래도 알 사람은 다 알아.”
휴대폰 너머에서 사나워진 박민후의 말투에 강유람은 걷는 것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도 최대한 낮추고 주변을 둘러보다 회의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회의실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감시 카메라도 도청기도 없는 회의실이었기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강유람은 휴대폰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손이 분노로 벌벌 떨려 주먹을 꽉 쥐었다.
“야야,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너희 집 버리고 지금 사는 곳이 설마 그 남자네 집이야…?”
-…어.
“와 오, 와 씨, 대박 사건! 야, 사귀냐?!”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텐션이 높은데.
“흑흑, 스트레스 받아서 회까닥했다! 말도 마! 갑자기 해외로 출장 보내더니 또 갑자기 불러들여서 좀 전에 한국 도착했어! 피곤한 유람이는 타인의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군요! 박민후 헌터 그래서요? 사귑니까? 저는 이해심 넘치는 사람이라 사랑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는 주의라서요.”
-그런 거 아니야.
평소처럼 말하고 있겠지. 어딘가 이상하진 않겠지.
“에이…. 아쉽다. 헌터와 일반인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를 원했는데….”
-까불지.
박민후가 작게 웃었다. 강유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람. 장난은 그쯤하고.
“…….”
-이상한 거 말해.
“하여간 눈치만 빨라.”
그 말에 강유람은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눈치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힐끗 잠긴 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지. 요즘 협회도 길드도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폭풍 전야의 고요한 느낌? 막 뭔가 터질 거 같은 느낌? 그런 게 있어. 그런데 나는 네 최측근이라고 소문이 나 있잖아.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나한테 전체적으로 정보를 차단하는 느낌이야. 시발, 내가 미스토어 부길드 마스턴데. 어떻게 이래? 마스터도 그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
-차주영 씨가 입원한 것도 바로 좀 전에 들었어. 그게 말이 돼? 그 인간이 입원했다고! 그것도 벌써 3일째야.
차주영이 입원을 해? 미스토어 길드면서 복구보단 신체 강화 계통 능력으로 유명한 그 인간이?
-좀 전에 길드에 왔는데 분위기가 싸한 거야. 뭐 내 직속 부하 놈들이 아직 해외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그 많은 놈들 중에 나한테 이야기한 놈이 어떻게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어? 어떻게 이 사실을 3일이나 지나서 알려 주지? 3일 동안 부길드 마스터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난 그걸 이제야 알게 된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이게 너와 관련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신가, 박민후 씨?
“나도 그렇게 생각되는데. 어째 요새 묘하게 조용하다 했지.”
-…메스윈 헌터도 그래서 그런 걸까? 그래서 연락처도 바꾸고 레라인에서도 쉬쉬하는 건가? 너희 두 사람 친하잖아.
“친하긴. 언제 적 이야길 하는 거야.”
그 인간이랑 친할 리가. 머리가 복잡했다. 가뜩이나 피곤했는데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협회도 4대 길드도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갈수록 도를 넘는군. …젠장 피곤해. 이수현 보고 싶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서 넌 괜찮겠어?”
-뭐, 마스터에 대한 배신감이 좀 크네…. 일단 마스터랑 이야길 좀 해 봐야지. 마스터가 지금 자리를 비워서 차주영 씨한테 가 보려고. 그 인간이 입원이라니 가서 비웃어 주지. 크큭! 감히 입 닫고 나를 3일이나 방치해?
사악하게 웃는 그의 목소리에 내심 안심하며 차주영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 남자가 입원이라니…. 힐러가 치유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나 보군.
-그래서 그 사람은 일반인 맞지?
“…그렇지. 이 이야기 끝난 거 아니었어?”
-아닌데?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내가 쉽게 끝내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이 유람이를 너무 얕보시는 거 아닙니까~
***
그 상태로 잠이 들었나 보다. 이수현은 미약하게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새벽녘 TV에서는 백색의 화면과 함께 삐,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나. 졸린 눈을 억지로 두어 번 끔벅이며 이수현은 자신을 깨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왔어요?”
“…왜 그러고 있어.”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유독 낮은 거 같아 듣고 있자니 더 졸려지는 것 같았다.
“앉아 봐요.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요.”
“내일 해. 졸리잖아.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대화는 무슨 대화야.”
그렇게 말하며 박민후가 이수현을 의자에서 끌어 내리더니 침대로 이끌었다. 침대를 보자 반쯤 감긴 눈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 지나면 이야기하기 어려울 거 같다고요.”
그럴 때가 있다. 오늘 말하지 못하면 어쩐지 다음을 잡기가 어려운 말이. 이수현도 머리로는 안다. 굳이 지금 그 이야길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주제는 너무 많은 것이 엮여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꺼내기 힘든 주제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졸음엔 장사 없구나. 누가 그랬더라. 고문 중에 제일 심한 게 잠을 못 자게 하는 거라고.
“…그래도 내일 해. 어차피 지금 대화해도 네가 도중에 잘 거 같다.”
“그쪽이 너무 늦게 와서…. 하암, 그래서 그렇잖아요….”
“…….”
자신을 조심히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착실히 덮어 주는 박민후의 행동이 뭔가 낯간지러워 이수현은 괜히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됐어요. 그럼. 나중에 해요, 나중에….”
그렇게 수마에 몸을 맡기려고 하다가 그래도 이건 말해야지 싶어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자마자 이수현은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박민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참 어둠이 잘 어울렸다. 어둠 속에서 저를 보는 박민후의 눈을 보며 이수현은 역시 저 샛노란 눈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예쁘지 않은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샛노란 눈은 태양 아래서는 금빛으로 번쩍였다. 그게 참 보기 좋았지. 그의 눈은 그와 참 잘 어울렸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한번 비비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건 지금 말해 둘게요.”
“뭘?”
“미안해요.”
그 말에 박민후가 움찔했다. 침대를 짚던 손이 시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본의 아니긴 한데 당신의 과거를 봤잖아요. 그렇다고 나보고 뭐라고 하진 말아요. 불가항력이었으니까…. 뭐 그렇다고요. 잘 자요.”
할 말도 했겠다 다시 벽을 보고 누웠다. 오늘의 박민후도 이상했지만. 오늘의 자신도 참 이상했다고 잠결에 이수현은 생각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