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박민후의 악몽.
터벅터벅.
힘없는 발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한 황무지에 울려 퍼졌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황무지를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남자는 때때로 아무것도 없는 곳을 걸으며 휘청거렸고, 또 넘어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 남자는 계속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언뜻 보면 목적 없는 행동 같았고, 바보 같은 모습처럼 보일지도 몰랐으나 그래도 남자는 계속 걸었다.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렇기에 아주 작은 소리조차 몇 배는 크게 들렸다. 제 발에 차인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는 마치 바위가 굴러가는 소리 같았고, 작게 바람이 부는 소리는 강풍이 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발소리는 또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자신이 옅게 내뱉는 숨소리는 어느새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다름이 없게 들렸다. 이곳의 소리라고는 겨우 그것이 다였다.
‘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갑작스러운 강풍은 이제는 익숙할 지경이었다. 바람에 로브에 달린 모자가 벗겨져 숨겨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바람의 헝클어진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넘기며 정리하는 와중에도 남자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짜증 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분명히 짜증을 담고 있었으나, 그 단어를 내뱉는 당사자의 목소리에는 영혼이 없었다.
남자는 아니, 이수현은 짜증이 났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모래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미세한 입자는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차근히 부피를 키웠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그 잠깐 입을 벌린 것뿐인데도 입에서 모래가 씹혀, 이수현은 “에퉤퉤.” 하고 모래를 뱉고는 다시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온통 모래뿐인 세계였다. 까끌까끌한 모래에 얼굴이 쓸리고, 자신의 몸 위로도 모래가 수북이 쌓일 즈음 겨우 눈을 떴었다. 모래를 털어 내며 이수현은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상황을 파악하다 그만 한숨을 쉬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고, 싸움 구경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 와 저를 밀친 놈을 원망해 봤자 이미 일어난 일이 없는 일이 되진 않았다. 후회는 짧았다. 그럴 수도 있지. 자신이 또 언제 던전에 들어와 보겠는가.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던전 안이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처음에는 나쁘지 않은 마음으로 던전 안을 걸었다.
그게 몇 날 며칠이 될지도 모르고….
***
이곳은 시간이 뒤틀린 공간이었다.
던전 안의 시간은 바깥과 다르게 흘러간다. 바깥에서의 1분이 던전에서는 1년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던전 안에서 1분이 바깥에서는 1년이 되기도 한다. 옛날에는 그로 인해 사건·사고가 참 잦았다지만, 요즘에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 외부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덕분에 별다른 문제 없이 던전에 드나들 수 있고, 그만큼 체계적으로 발전했기에 더더욱 이곳의 사람들이 던전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바깥의 기계는 던전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 휴대폰은 이곳에서 고철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시계를 보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으나 화면은 엉망이었다. 배경에 뭐가 떠 있는지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결국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물론 별 소용은 없었다.
나는 던전에 들어와서 벌써 일곱 번의 밤과 낮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게 하루 24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의 일주일은 아니란 소리다. 그랬으면 나는 벌써 굶어 죽었겠지. 이곳의 시간은 엉망진창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해가 뜨기도 하며, 또 몇 날 며칠 동안 밤이 지속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세 번의 밤이 찾아왔을 때 나는 기어코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유일한 위안은 아직까진 배고픔도 갈증도 버틸 만하다는 것 정도일까. 거기다 그간의 상황으로 보아 내 몸의 시간은 바깥세상의 시간으로 흐른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아….”
아무리 여행을 가 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지만, 그게 이런 황무지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이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모래랑 돌멩이, 황무지에서 자라난 잡초들…. 아무리 걸어도 살아 있는 생명을 보지 못했다. 그랬다. 이곳에는 던전이라면 있을 법한 그 흔한 몬스터조차 없었다. 그것은 굉장히 기이한 기분을 들게 했다.
정말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을까?
의심하며 걷기를 며칠. 피곤하면 그 자리에 앉아서 쉬고, 졸리면 잤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면 다시 걸었다. 점점 힘에 부치고 있었다. 물 한 모금 못 먹은 입은 바싹 말라 단내가 났고, 제대로 쉬지 못한 몸은 삐거덕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거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길 몇 번. 억지로 몸을 이끌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길 몇 번.
나는 내가 죽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인간이 물을 못 마시면 며칠까지 버틸 수 있을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 알고 있던 내용조차 생각하기 힘들었다. 허기도 허기지만 목마름이 더 심했다. 한 번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목이 말랐다. 그렇기에 애써 생각 없이 멍하니 앞으로 앞으로 걸을 뿐.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나오겠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나은 선택일 것이라 생각했다.
박민후가 나를 찾을까? 제 발아래의 그림자를 보았다. 박민후의 그림자 일부가 이 안에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박민후를 믿고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눈앞에 없는 남자를 기다려서 뭐 하겠는가. 게다가 그가 나를 구하려고 했다면 벌써 오고도 남았을 터였다. 괜히 내 그림자를 발로 찼다. 덕분에 사방으로 모래가 튀었다. 피식하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왔다.
또다시 정처 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모래와 잡초, 그리고 돌뿐인 세상에서 자동차를 발견했다. 자동차가 있다니? 너무 놀랍고 또 반가워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의 흔적이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차에 다가갔다.
차는 조금 찌그러지고 차창 유리는 모두 깨져 있었다. 그리고 차 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덕분에 차 안에는 모래가 가득했다. 좀 더 자세히 차 내부를 살폈다. 차 시트에는 오래되어 검게 눌어붙은 얼룩이 보였다. 핏자국인가?
차 열쇠는 그대로 꽂혀 있었다. 모든 차 문이 열려 있고 급히 몸을 움직였는지 차 밖으로 차 안의 물건이 쏟아진 듯한 모양새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차에 탄 사람들은 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곳에 사람이 있을까? 차는 언뜻 보기에 오래된 것도 같고, 바로 어제도 움직인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이 하나의 단서가 되길 바랐다.
걸을수록 차들은 하나둘 계속 나타났다. 차들의 종류는 가지각색이었다. 자가용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트럭도 있었으며, 관광버스도 있었다. 하나같이 사람의 흔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 대체 왜 이런 곳에 현대 문물이 있단 말인가?
처음 차를 발견했을 때 그 주변은 황무지였다. 그다음 차들을 발견했을 때는 점점 초록빛이 많아졌다. 망가진 차들을 뒤덮은 식물들은 앞으로 걸을수록 더욱더 많아졌다. 바닥에 자라난 잎들은 어느새 제 무릎까지 자라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이곳은 고요했고, 살아 움직이는 것은 저 혼자였다.
파스스 풀잎들이 바람에 부딪쳐 저들끼리 소리를 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황무지에 서 있지 않았다. 나는 숲의 초입에 서 있었다.
내 발아래는 푸르른 초록 잎이 무성했다. 어여쁜 꽃들도 피어 있었다. 높다란 나무들도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숲은 한번 사라졌다 다시 자라난 것 같았다. 여기저기 거대한 나무들이 무언가에 부서지고 불타고 사라진 흔적들이 보였고, 그곳에서부터 생명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앞으로 걸어 나가던 나는 무언가에 발이 차여 바닥에 엎어졌다. 이미 몇 번이나 겪었기에 곧바로 다시 일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엎어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시야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엎어진 상태로 주변을 보았다. 높았던 시야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밟은 것은 누군가 신었던 신발의 한 쪽이었다. 무성한 풀잎 아래에 사람의 옷가지가 보였다. 간간이 보이는 것은 새하얀 뼛조각.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 숲 전체가 그러했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과 풀잎 아래에는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이곳은 거대한 묘지였다.
내가 지나쳐 온 차들의 주인이 이곳에 있었다. 사람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 숲. 몸을 일으켜 이곳을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도 잠시, 땅을 짚었던 손이 기어코 꺾여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눈앞이 핑글 돌았다. 어지러웠다. 한계였다.
이게 다 박민후 때문이다.
“개새끼, 구해 주기는 개뿔이…. 집에 돌아가기만 해 봐. 계약 파기야, 계약 파기.”
물론 박민후에게는 죄가 없다는 걸 안다. 박민후가 의도해서 날 던전에 밀어 넣은 것도 아니었고 이것은 단순한 사고였다. 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싶다가도 이 모든 게 내가 박민후를 만나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건 주인공의 지인이 되는 순간 생기는 숙명이었다. 주변인이 제물이 되어 주인공이 강해지는 패턴… 혹은 주인공이 악당에게 원한을 갖게 하기 위한 용도. 내가 겨우 그런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이곳에서 죽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 주인공이 엑스트라에게 하는 구해 준다든가 지켜 준다고 하는 말은 믿을 게 못 됐다.
“박민후 개새끼.”
역시 타인을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직 통장의 17억도 못 써봤는데….
천천히 눈이 감겼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운도 없지 하필이면 그런 대형 사고에 휘말릴 게 뭐란 말인가. 등 뒤에 그림자가 졌을 때 돌아보는 게 아니라 옆으로 피했어야 했다. 싸움 구경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 혼자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구경하기에 방심했다.
블랙마켓에 있던 모두가 그러하듯, 그 사람들도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특징적인 건 한 명은 곰처럼 덩치가 커다랬다는 것과 다른 한 명은 새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거?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 많은 광장에서 두 명은 치고받고 싸웠다. 능력을 사용하고, 비약적인 신체 능력으로 볼 때 둘 다 각성자가 분명했다.
사실 싸움은 압도적으로 곰 같은 자에게 유리했다. 새 가면을 쓴 자는 피하고 막기에 급급했으니까. 하지만 이변은 언제나 갑자기 벌어지는 법.
새 가면을 쓴 자를 붙잡으려던 그 순간, 세계가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구경꾼들도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 땅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 그 덕분에 곰은 새를 놓쳤고, 도망친 새 가면은 분수대로 뛰어왔다. 그랬다, 내 앞으로 곧장 뛰어온 거다. 그에 놀라 나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은행 강도 때처럼 나를 인질로 삼을까 싶어서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다행히 새 가면이 노린 건 내가 아니었다. 나를 지나쳐 그는 분수대 가장자리에 내가 올려 둔 주머니를 챙겨 들었다. 그제야 저 뒤통수가 낯이 익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까 그.
새 가면은 주머니를 든 채 의기양양하게 곰 같은 남자와 마주했다. 멀뚱히 옆에서 구경꾼들과 그 대치 상황을 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곳이 아직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면,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은 하나의 사건 도입부가 아니었을까? 저 새 가면이 악당이고, 저 곰 같은 남자가 헌터인 그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길함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박민후의 집에 갔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미 새 가면은 착실하게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손의 들린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마석을 꺼내 들었다. 생긴 것만으로도 불길한 검은색을 띠는 마석. 그건 언뜻 보기에는 마석과 다름없는 모양새였지만, 마석 중에는 검은색이 없었기에 저게 마석이라고 섣부르게 결론 내릴 수는 없었다. 저게 뭘까. 나만 궁금한 게 아닌지 지진 때문에 도망치던 구경꾼들도 멈춰 서서 새 가면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새 가면의 진중한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더욱 나은 미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다!”
“…사이비였네.”
내 옆에서 구경꾼이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속으로 동감했다. 정말 내뱉는 대사가 영락없는 사이비의 그것이었다. 세상의 숭고한 희생이란 게 존재하나? 그건 그저 허울 좋은 말일 뿐이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새 가면은 진지했다. 그는 제 팔뚝을 물어뜯어 피를 내더니 그걸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마석에 뿌렸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곰 같은 자가 새 가면을 막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무슨 짓을 한 건지 뛰어들던 곰은 강한 충격을 받고, 저 멀리 날아갔다. 피 묻은 검은 마석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소리에 맞춰 대지가 진동했다.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가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세상이 일그러지는 와중에도 새 가면은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의 몸마저 같이 일그러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모습이 던전 게이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란 걸 나는 몰랐기에 대처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진작 도망갔을 텐데…. 게이트가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 게이트의 휩쓸리지 않기 위해 도망쳤다. 문제는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움직이자 종잇장보다 못한 내 몸은 아주 쉽게 사람들에게 치였고, 뒤로 넘어지는 곳에 하필 게이트가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황무지에 내동댕이쳐졌다.
인생 참 기구해. 운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던데 딱 그 꼴이었다. 내 꼴이 새삼 우스웠다. 그때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그 느낌에 어렵사리 눈을 떴다. 해를 등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상황이 익숙했다. 저를 보며 웃는 사람의 모습이 익숙했다. 그에 제가 꿈을 꾸나 싶었다. 죽을 때가 되니 헛것이 보이나?
“살아 있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어린 박민후는 짓궂게 웃을 뿐이었다.
눈앞에 아이는 박민후와 똑 닮아 있었다.
물론 내가 아는 박민후와는 체격이 달랐고, 키도 작았다. 목소리도 아직 앳되었고….게다가 그의 눈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내게 익숙한 샛노란 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딱 보면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이 애는 박민후다.
박민후가 고등학생이라면 딱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눈앞에 어린 박민후는 내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내 볼을 콕콕 찌르던 손으로 내 콧등을 살짝 치면서 말이다. 아이의 웃음이 장난스러웠다.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와 함께 아이가 물었다.
“왜 그렇게 빙빙 돌아다닌 거야? 정말이지 찾는 데 한참 애먹었잖아.”
나를 찾으러 왔다고?
바짝 마른입은 기어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을 못 마셔 그런가 보다. 짧게 마른기침을 했다. 속이 메스꺼웠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야? 못 일어나겠어? 내가 들고 갈까?”
네 눈은 장식이냐, 못 일어나. 목소리 안 나오는 걸 보면 몰라?
딱히 대답이 필요한 건 아니었는지 어린 박민후는 가만히 누워 있는 내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목에 걸더니 그대로 날 등에 업었다. “읏차.” 하고 내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받쳐 들었다. 허벅지에 닿는 그의 손이 무척 차가웠다.
“‘새’한테 당신을 데려오라는 부탁받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때까진 죽으면 안 돼.”
새?
“그래, 나는 그걸 새라고 불러. 내 눈에는 새로 보이거든…. 당신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가 나를 부른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겨우겨우 뜨고 있던 눈이 기어코 닫히자, 속눈썹이 절로 파르르 떨렸다. 어딜 가도 상관없으니 일단 물이나 주고 말을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는 그 뒤로도 혼자 재잘거렸다. 그 모습이 퍽 내 기억 속 박민후와 겹쳐 보였다. 의외로 말이 많은 박민후.
“앞으로 안아 들걸…. 생각을 잘못했어. 계속 흘러내리네.”
자꾸만 목에 두른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여간 거슬리는지, 걸으면서 아이는 잘 좀 잡으라고 투덜거렸다. 뭐라 한마디 해 주고 싶었으나,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은 내 의지를 피력하지 못했다. 역시 이 애는 박민후인 걸까. 그렇지만 내가 아는 그 박민후는 아닐 것이다. 이곳은 시간이 엉망인 곳이니 어쩌면 과거의 박민후가 나타난 건 아닐까? 그게 말이 되나. 이 가설이 맞다고 하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머리가 생각하길 포기하니 더는 깊게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졌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몸은 마치 요람이라도 타는 느낌이라 절로 눈이 감겼다. 아이가 걸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파스스파스스 하고 숲이 노래했다. 이 애가 사실은 사람이 아니고 나를 잡아먹기 위해 온 괴물이라 해도. 여기서 식물의 영양분으로 죽든, 이 애를 따라가서 죽든. 그게 그거니 솔직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나 싶었다. 더는 버티고 있기 지쳐, 아이의 차가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잘래.
***
이수현의 한숨에 허벅지를 받쳐 든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간 듯했지만, 기절하듯 잠이 든 이수현은 알지 못했다.
“자…? 재미없게.”
등 뒤의 남자를 불러 보자 대답 대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제 목에 둘린 팔이 힘없이 또 떨어지기에 다시금 남자를 추슬러 업었다.
“당신한테 궁금한 게 참 많아. 뭐, 지금은 물어도 대답 못 해 주려나?”
그렇게 말하며 아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아이는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 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 사람이 ‘바깥’에 있는 저를 아는 사람이니 더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새’는 버려진 세계에 침입자가 들어온 순간 제게 가 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새의 말을 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흔쾌히 침입자를 찾으러 나갔다. 남자가 너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통에 찾는 데 꽤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죽기 전에 발견했다. 분명 새도 잘했다고 칭찬해 줄 게 분명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이는 궁금한 게 참 많았다. 당장에라도 이것저것 묻고 싶었다. 남자가 멀쩡했다면 그를 붙들고 신이 나서 이것저것 질문했었겠지만. 아쉬워도 하는 수 없지. 새에게 데려가면 남자도 곧 괜찮아질 거고 그러면 제 궁금증도 풀리겠지.
“흥.”
아이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툭.
툭, 일정한 속도로 살짝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달았다. 바짝 마른 입 안에 툭툭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은 갈증을 해소하긴커녕 더 부추겼다. 목이 말랐다. 시원한 물을 통째로 들이붓고 싶었다. 이거론 안 돼. 더 줘. 무의식적으로 물을 더 마시기 위해 입을 벌렸다. 거참 감질나게 하네. 줄 거면 한 번에 줘. 좀 더 제대로 줘.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고개가 움직였다.
머리맡에서 웃음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오, 안 돼, 안 돼. 참아.”
나를 달래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스르륵 감겨 있던 눈을 떴다. 눈부신 태양을 등지고 선 남자가 있었다. 덕분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 손에 들린 물병을 보고 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예전에 선생님이 탈수 증상일 때 갑자기 물 마시면 죽는다 그랬단 말이야.”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남자의 손에 들린 물병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남자는 내 손이 닿기 전 손에 들린 물병을 등 뒤로 휙 던져 버렸다. 황당했다. 나는 나를 방해하는 남자의 행태에 짜증이나 몸을 일으켰다.
찰박.
찰박? 바로 귓가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뭔가 이상했다. 남자는 분명 저 뒤로 물병을 던졌는데 왜 내 주변에서 물소리가 나지? 시선을 내려 바닥을 짚은 손을 쳐다보았다. 물이었다.
그제야 내가 물속에 누워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손이 잠길까 말까 싶을 정도로 얕은 물속이었다.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 상태로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폐허 속에 있었다. 다 무너진 건물은 해외에서 볼 법한 옛 신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다 무너지고 해진 건물은 천장마저 뻥 뚫려 있었는데, 그 뚫린 천장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한가운데에는 얕은 물웅덩이 사이로 건물만큼 낡은 조각상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져 있는 데다, 조각상의 절반을 넝쿨이 여기저기 자라나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세한 생김새는 알아볼 수 있었다.
기다란 천을 뒤집어쓴 성자와도 같은 모양새는 눈부신 햇살과 더불어 ‘성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 조각상을 중심으로 둥글게 물이 고여 있었다. 인위적인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있던 곳이기도 했다.
물은 맑고 투명했다. 게다가 청량감 또한 느껴졌다. 평범한 물이 아닌 것 같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져 수면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물에 젖은 옷이 몸에 들러붙는 감각이 기분 나빴다.
불쑥 내 앞으로 손이 하나 내밀어졌다. 손을 따라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아, 착각했다.
당연히 ‘그’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지, 아니지. 이 얘는 내가 아는 박민후가 아니지. 왜 그런 착각을 했지.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를 붙잡은 손이 지나치게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박민후는 열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런 점이 또 달랐다.
“이제 좀 괜찮아?”
“…그래.”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자 아이가 어디서 난 건지 다시 물병을 건네주었다. 집어 던진 걸 다시 들고 온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원한 물로 마른입을 축이는데 한 가지 의문이 들어 멈칫했다. 아니 잠깐. 설마 이거 이 발아래 있는 물은 아니겠지? 설마 싶어 미심쩍게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게 답을 대신했다. 물병을 입에서 떼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물이 아니면 어디서 물이 나왔겠는가. 내가 지금 다른 물을 찾을 형편도 아니었으니…. 찜찜하긴 해도 하는 수 없었다. 내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재잘재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 물은 몸에 좋거든. 던전에는 가끔 이런 ‘신전’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나온 물은 ‘생명의 샘물’이라고 불리는 만병통치약이야. 포션보다 성능이 배는 좋거든. 한 모금만 마셔도 모든 상처를 치유하지!”
“그래? 잘 아네.”
“…라고 교과서에 쓰여 있었어.”
“…….”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이는 퍽 앳되었다. 내 나이 정도 되면 스무 살도 채 못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은 모두 한참이나 어리게만 보였다. 내가 이 얘를 아이라 칭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는 어른이었고, 상대는 미성년자처럼 보였으니까. 아까 선생님도 그렇고, 교과서도 그렇고….
멀쩡한 정신으로 아이를 차근히 눈에 담았다.
인제 보니 이 얘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춘추복일까? 내가 기억하는 박민후보다 머리 하나 작아, 나와 키가 비슷하거나 조금 컸다. 덩치도 내가 아는 그보다는 왜소했다. 아이의 목소리는 막 변성기를 지난 듯, 10대의 풋풋함이 있었다. 쾌활하게 웃는 얼굴은 아이를 더욱 얘같이 보이게 했다. 이곳이 만약 학교였다면 그는 당장에라도 급식을 빨리 먹기 위해 종이 치자마자 급식실로 달려갈 것 같았고, 젊은 날의 객기를 주체 못 해 사고를 치고, 식후 운동으로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뒤엉켜 축구를 하며 뛰어놀 것 같았다.
이 얘는 박민후였으나, 내가 아는 박민후는 아니었다.
가슴팍에 달린 ‘박민후’라는 명찰이 참 이질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얘의 정체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얘, 뭐 좀 물어봐도 되니?”
“응? 뭔데?”
“몇 살이야?”
“보면 몰라? 한창 풋풋한 열여덟 살이지!”
“…이름이 뭐야?”
“박민후!”
그렇게 말하며 제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가리켰다.
아이의 말에 나는 작게 동요했다.
박민후에게 열여덟 살이라는 시점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박민후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읽은 내용에는 그의 과거가 자세히 나오지 않았으니까. 다만 박민후의 이야기가 그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가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안다.
눈앞의 아이의 나이는 열여덟 살.
그가 지옥에 떨어지고, 살아 돌아온 나이와 같은 나이였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주제는 그의 역린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과거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의 과거는 악몽, 그 자체였으니까. 내가 이곳을 여전히 소설책 속의 세상으로 알고 있다면 모를까. 눈앞에 버젓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숨겨진 과거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주제넘은 짓이었다. 그가 말해 주지 않는 과거를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없었다. 그렇기에 묻지 않았다.
그가 새벽마다 악몽을 꾼다 해도.
그는 열여덟 살 이후부터 매일같이 악몽을 꾸었다. 그건 소설에서는 단순한 언급 정도밖에는 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이 살면서 새벽마다 고통에 찬 그의 앓는 소리에 깬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앓는 소리에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면, 언제나 어둠 속에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박민후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
표면상으로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이 들면 그는 필연적으로 악몽을 꿨다. 그는 늘 괴로워했고, 괴롭게 일그러지는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었다. 비명도 울음도 아닌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물어뜯은 입술이 기어코 터져 피가 맺혔다. 새벽의 추운 날씨임에도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렇게 혼자 버텨내던 박민후 때문에 나는 툭하면 자다 깼다. 일어난 김에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심히 쓸어 주고, 그가 몸부림칠 때 밀려난 이불과 베개를 정리해 주기도 했다.
…별 소용은 없었던 거 같지만.
처음에는 그를 깨워 보려고도 했었다. 그의 다부진 어깨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볼을 꼬집고 뺨을 치기도 하며 그를 깨워 봤지만. 그는 한번 악몽에 빠지면 자기 의지로 깨어나는 게 아닌 이상 일어나질 못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라고 이불과 베개에만 신경 써 줄 뿐이었다. 그가 자꾸 끙끙거리면 나도 잠을 못 자니까.
그가 새벽에 우는 걸 세 번째 봤을까, 어느 날부터 박민후는 새벽에도 깨어 있고는 했다.
그는 잠드는 것을 싫어했다. 지독한 악몽을 꾸기 때문이겠지. 무슨 꿈인지 자세히는 몰랐다. 그가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어렴풋이 과거의 기억이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거 말고는 그가 악몽을 꿀 이유가 없으니까.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잘만 잤던 거 같아 그가 그렇게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때때로 새벽에 눈을 뜨면 그는 잠들지 않고 멀뚱히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건 꽤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졸음이 오다가도 졸음이 가실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다시 잠들었다. 그래도 새벽에 눈을 뜨면 그러고 있으니…. 어느 날에는 가물가물 잘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뜨며, 저를 등지고 있던 박민후를 잠에 취해 불렀었다.
‘안 자요?’
살짝 움찔한 듯, 박자 느리게 박민후가 나를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잠이 안 와서.’
‘어제도…. 그랬던 거 같은데….’
‘…자는 데 방해했나? 나갔다 올까?’
‘됐어요.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잠이 안 오면 TV라도 봐요.’
‘시끄럽잖아.’
‘괜찮아요…. 나 노래방에서도 잘 자요.’
‘큽.’
제 말에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죽여 웃는 박민후를 보며 느릿하게 다시 눈을 감았다. 할 말도 했으니 다시 잘 생각이었다.
‘진짠데….’
‘알겠어. 넌 진짜 그럴 거 같긴 해. 노래방이 안 어울리기도 하고…. TV라도 보고 있을게. 잘 자.’
새벽에 그는 좀 이상했다. 어딘지 넋이 나가 있었고, 언제든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것도 같았다. 물론 새벽 감성 같은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랬던 그였다. 악몽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기어코 잠드는 걸 포기했던 그였다.
저 순진해 보이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그러나 대화는 마저 이어지지 못했다.
어린 박민후 갑자기 허공을 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왔어? 봐 봐. 네 말대로 제대로 데려왔지?”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박민후에게는 무언가 보이나 보다. 뭔가 있긴 한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박민후가 보고 있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무언가 일렁거리고 있긴 했다. 그것은 아지랑이 같았다. 일렁거리기는 했으나 거기에 형체는 없었다. 그런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가 웃으며 허공을 가리켰다.
“소개해 줄게. 여기는 내가 아까 말한 새야. 당신을 데려오라고 한 그 새!”
어린 박민후가 그것을 ‘새’라고 부른 순간.
그제야 나는 그것이 ‘새’임을 알았다.
그것은 내가 새라고 인식한 순간 형상을 이뤘다.
순백의 빛을 내는 작은 새가 그곳에 있었다.
“새라고…?”
어디로 보나 새이긴 했다. 박민후가 왜 이걸 새라 부르는지도 알겠다.
그러나 기묘한 기분이 드는 새였다.
새는 아이의 머리 위에 날아가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새의 입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듯한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르는 아이구나.]
그 목소리는 위압적이기도 했고, 또 성스럽기도 했으며, 봄바람처럼 따스하기도 했다.
[역시 내 아이가 아니야.]
새는 푸드덕 날아 올라 내 주변을 빙글 돌았다. 그리고 내 앞에 멈춰 섰다. 새는 날갯짓을 멈추었는데도 하늘에 떠 있었다.
[혹시나 했단다. 착각이었으면 했단다. 그런데 아니구나.]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이여.]
“…….”
솔직히 작고 하얀 새가 위엄 있게 말해 봤자…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는 걸 보니 저 새는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걸 아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역시 평범한 새는 아니겠지? 말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평범하지 않지만…. 대체 뭐지?
[내가 궁금한가 보구나, 내 소개를 하지.]
그런 내 생각이 뻔히 보이는지 새는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 턱을 치켜들었다.
[누군가는 나를 ‘신’이라 부른단다. 나에 대한 것은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된단다.]
여전히 귀여울 따름이었다. 참새 정도 될까…? 그만큼 작은 크기의 새에게서 나는 위엄 넘치는 목소리는 좀 안 어울렸다. 왜 하필 새 모습이지.
“이쪽에서는 신이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가요…?”
[형상이란 보는 사람이 그것을 무엇이라 인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단다. 너는 내가 뭐로 보이지?]
“작은 새요.”
[너는 분명 처음엔 내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야. 원래라면 그게 당연하다. 하나 이 아이가 나를 ‘새’라 불렀기에 너는 나를 새라 인지했지. 그렇기에 나를 새로 보는 거란다.]
“…일단 그건 넘어가고, 이 애가 당신이 날 불렀다고 하던데요. 그 이야기를 좀 하죠.”
[그 전에. 아이야, 다른 곳에 가서 놀렴.]
“뭐야, 나 몰래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려고? 심부름도 했는데 너무한 거 아냐?”
[네가 들으면 안 되는 어른들의 이야기란다.]
“무슨, 어른들 이야기야, 이야기는! 야한 이야기라도 하려고? 어이없어 진짜. 이럴 때만 애 취급이지!”
그렇게 말하며 토라진 듯 아이는 바닥을 발로 찼다. 덕분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야.]
“아.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난 얘랑 놀고 있을게. 그건 되지?”
“응?”
그렇게 말하며 박민후는 바닥에 쭈그려 앉더니, 내 그림자에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아이의 손은 바닥을 통과했다. 아니,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게 좋을까? 아이가 양손을 들어 올렸을 때 아이의 손에는 작은 강아지가 들려 있었다. 박민후가 내 그림자 속에 넣어 둔 그 개였다.
샛노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는 개는 여전히 귀여웠다. 아이가 개를 바닥에 내려놓자 개는 아이를 알아본 듯 저러다 꼬리가 떨어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맹렬하게 흔들었다. 그 자리에서 둘이 장난을 치며 놀기에 또다시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자리를 옮기라는 말은 그새 까먹은 모양이라 나는 새에게 손짓했다. 새는 앞서 날아가고 나는 그 뒤를 따랐는데 어째 새가 한숨을 쉰 것도 같았다.
아이가 눈에 보이는, 그러나 자신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새는 멈춰 섰다. 파드득 날아 부서진 기둥 위에 올라서서 저와 시선을 맞췄다.
“저 애와 떨어뜨려 놓으면서까지 제게 해야 할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무슨 이야길 하려고 이러는 건지 궁금했다. 그것은 짐짓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이곳’. 그러니까 네가 살던 세계가 아닌,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아주 지독한 우연이었단다. 여러 우연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지. 그렇기에 나도 관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다만 거기까지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
새의 고개가 저 멀리서 개와 뛰어노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새는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세계가 ‘그’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니?]
나 또한 힐끗 새의 시선을 따라 물장구를 치며 개와 노는 아이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음, ‘그 아이’라는 게 박민후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단다.]
“그렇다면 알고 있습니다.”
그가 주인공이니 그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건 당연했다.
[세계의 중심이 움직이면. 세계는 흘러간단다.]
[이미 흘러간 이야기는 제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지. 물로 예를 들어 볼까? 흘러가는 물을 어찌 손으로 잡을 수 있겠니?]
잔잔한 목소리는 흘러가는 물과 같았다. 딱히 새의 말을 끊을 생각이 없었기에 새의 말이 멈출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고요한 세상 속에서 가끔 아이의 웃음소리와 강아지의 울음소리. 첨벙거리는 물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곳은 이미 5년 전 세계의 흐름이 멈춘 세계다, 저마다 맡은 역할은 이미 5년 전 끝이 났지. 그렇기에 이 세계의 흐름은 더는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계의 흐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왜인지 아니?]
새가 고개를 퍼뜩 돌려 저를 쳐다보았다. 새의 눈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샛노란 금색이었다.
[이 모든 게.]
[너.]
[너 때문이란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얌전히 있는 나는 왜 걸고넘어지는 거지? 순간 치미는 짜증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새는 계속 재잘거렸다.
[갈림길에서 그 아이는 선택을 해 버렸지. 너를 택해 버렸어.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거란다. 바깥의 ‘새’들은 알아서 추락했을 테고, 세상은 여전히 거짓된 평화를 누렸을 거란다. 단지 너라는 존재 때문에, 너와 만났기 때문에 그 아이는 다시 불행해질 거란다.]
“듣자 듣자 하니까 내가 참 마음에 안 드는 거 같은데. 나도 마음에 안 들거든요? 뭘 다 내 탓이래? 나 때문에 박민후가 불행해진다고? 웃기고 있네. 난 이미 박민후 때문에 불행한데.”
[그게 아니란다. 그런 불행이 아니야.]
새가 고개를 살살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영웅의 조건을 아니?]
“몰라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영웅의 조건은 바로 영웅 ‘본인의 불행’이란다.]
[이 세계는 그가 불행하기를 바란다. 이곳에 평화는 영웅의 불행을 전제로 만들어졌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웅은 힘을 키우기 위해 반드시 불행해야 한다. 불행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고 성장시키지. 그렇기에 세계의 흐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 그 아인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
“그건 안됐는데…. 그게 내 탓은 아니지. 내가 여기 온 게 우연이라고 말한 건 당신이죠. 내가 박민후를 만난 것도 우연이고, 그 빌어먹을 선택을 한 것도 박민후 본인인데. 근데 뭘 내 탓을 해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냥 다 내 탓이야?”
[…그렇지. 내가 미안하구나. 내가 말을 잘못했다. 마음이 앞서 실수를 했다. 나는 이제 아무런 힘도 없기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기에 마음이 급했구나. 우리는 세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단다. 이미 흘러가기 시작한 흐름을 멈출 수도 없지. 그건 그 아이도, 신인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너는 다르지. 너는 이 세계 바깥에서 온 존재.]
[너만이 흐름을 바꿀 수 있기에 너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단다.]
[너도 이 세계가 멸망하면 곤란할 거 아니니? 게다가 너는 그 아이를 잘 알지. 그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니?]
“딱히,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죠. 세계 평화에 관심은 없는지라.”
[…….]
마치 내 말의 진심을 판가름하려는 것처럼 새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물론 내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쳐다본들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윽고 새는 고개를 떨구며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이곳의 운명도 이렇게 끝이구나. 나도 할 만큼 했다.”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됐다. 되었느니. 이것도 이 세계의 운명이겠지]
솔직히 세계 멸망 따위 아무래도 좋았지만, 신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빠르게 포기할 줄은 몰랐다. 저쪽도 그다지 이 세계에 애정이 없나 본데? 아니면 뭐 다른 생각이라도 있나….
[이 이야기는 그만 되었다. 너를 찾으러 그 아이가 이곳에 와 있단다. 오면 안 되는데 약속을 어기고 와 버렸지. 그러니 나랑 가자꾸나.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 지금까지 내 탓만 하는 작자를 내가 뭘 믿고 따라갑니까?”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잖니. 여기 계속 있으면 너는 죽을 거란다.]
“쯧.”
“뭐어?! 벌써 데려간다고? 약속이랑 다르잖아!”
어느새 개를 안고 다가온 아이가 새를 향해 화를 냈다. 개를 바닥에 내려 주자, 개는 빨빨거리며 다시 제가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데려오라고만 했지 약속을 들어준다곤 안 했단다.]
“그게 뭐야! 완전 사기꾼!!! 나 물어볼 거 있었단 말이야!”
[고민해 보고 하나만 물어보렴.]
그 말에 아이는 입을 합 다물고 물어볼 게 많은데 어떻게 하나만 고르냐며 짜증을 부렸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려는지 끙끙거리며 고민을 했다.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새를 따라갔다. 새가 인도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다 무너져 내린 폐허 뒤에 있는 묘지 같은 곳이었다. 비석이 세워진 곳 아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아래는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여기 들어가도 괜찮은 거 맞나…? 찜찜함이 가득했으나 한숨을 내쉬며 새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려다 도중에 멈추었다.
여태 투덜거리며 저를 졸졸 따라오던 아이가 우뚝 멈춰 서서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아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를 대신해 새가 말을 이었다.
[저 아이는 여기까지란다. 더 오고 싶어도 갈 수 없지.]
새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같이 안 가?”
“응, 나는 거기 가면 안 돼.”
“어째서?”
“거기에 있는 게 ‘나’라서. 그래서 안 돼.”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음, 도플갱어랑 만나면 한 명이 죽는다? 뭐 그런 거랑 비슷해.”
[비슷한 이치란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이는 손바닥에 땀이 차는지 손바닥을 바지에 벅벅 닦고는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있잖아. 마지막이니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거라면야.”
여태 잘 웃던 아이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몇 번이고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며 말을 골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며 아이가 물었다.
“나는 세상을 구했어?”
아이의 얼굴은 다급했고 간절했다. 나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해 주었다.
“…그래. 너는 세상을 구했어.”
아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어, 그 뒤에 나는 어때? 응? 잘 지내나?”
“친구는 다시 사귀었어? 연애도 했을까?”
“그것까진 나도 몰라.”
“그럼….”
“사람들이 나를 괴물이라고 부르나?”
“…….”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걸로 답이 돼 버린 듯 아이는 쓰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
“얘.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할 순 없어. 세상을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거든. 신경 쓰지 마.”
“…나도 안다, 뭐. 이제 됐어. 잘 가.”
“잘 있어.”
아이는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의 몸이 발끝부터 파스스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게 이 아이와 만나는 마지막 순간이란 걸 알았다. 그런데도 아이는 나를 붙잡지도 끝까지 울지도 않았다. 이게 사라지는 것과 뭐가 다른 걸까. 이럴 거라면 그냥 같이 내려가면 안 되는 거였나?
[가자꾸나.]
***
터벅터벅.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주위는 삽시간에 어둠에 잠식되었다. 이곳의 유일한 빛은 제 앞을 앞서 날아가는 새뿐이었다.
[그 아이는 매일같이 악몽을 꾸지. 무슨 꿈인지 아느냐?]
“대충은?”
[그럼 다행이구나.]
“뭐?”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
새의 그 말과 함께 어둠 속의 풍경이 서서히 변했다. 색색의 색채가 물들더니 그것은 하나의 영상이 되었다.
가방을 메고, 친구들과 뛰어가는 어린 박민후가 내 옆을 지나갔다. 그에 멈칫하자 새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발을 착실하게 움직여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뭘 멋대로 보여 주는 거야.”
[내가 한 짓이 아니란다. 이 아래에 있는 그 아이가 보여 주는 것이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의 과거를 이렇게 영화 보듯 관람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제 마음도 모르고 풍경은 계속 변해 갔다.
아이들은 신나게 재잘거리며 저마다 관광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신이 나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벌써부터 과자를 까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즐겁게 재잘거리는 아이들 속에는 박민후도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천진한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흘러가는 풍경을 차곡차곡 눈 안에 담았다.
한차례 풍경이 바뀌더니 어둠 속에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던전 게이트가 출현했다. 그 모습은 절대 평범치 않았다. 마치 피에 물든 듯 검붉은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고, 망자의 비명과도 같은 암울한 비명이 게이트 너머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차례 본 적 있는 게이트였다. 내가 들어온 그 던전 게이트와 같은 모양새였다.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터널을 향해 달려가는 차들이 보였다. 게이트는 터널 안에 있었다. 달리는 차들이 터널 한가운데 생긴 던전 게이트를 발견했을 때는 너무나 늦은 뒤였다. 차들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달리고 있던 차들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마치 비명처럼 바퀴의 마찰음이 터널 안에 울려 퍼졌다.
[이것이 그 아이가 기억하는 맨 처음 발견된 멸망의 징조.]
내 앞을 날아가는 새는 검붉은 게이트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멸망의 징조? 무슨 멸망? 이 세계의 멸망을 알리는 징조가 저때 나타났었다고? 원작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었는데. 아니지, 내가 모르는 후반부에 언급됐을지도 모르지.
[이 게이트는 ‘멸망’을 상징한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홀연히 나타나 그 주변에서 가장 ‘세계의 중심이 될 법한 자’를 집어삼키지.]
새는 자꾸만 이해 안 가는 이야기를 했다. 세계의 중심이 될 법한 자는 또 뭐란 말인가. 박민후를 가리키는 건가? 그가 주인공이니 이 세상의 중심은 그가 맞았다. 그리고 한 가지 나는 이 질문을 꼭 해야 했다.
“저 게이트는 이곳인가…?”
[그렇지, 이곳이지.]
여기라고? 저 게이트가 멸망의 징조라면…. 이미 게이트는 출현했다. 정말 세상이 다시 멸망한다고? 박민후가 세상을 구한 지 겨우 5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멸망을 향해 달려갈 거라고…?
“저게 다시 나타났다는 말은 이 세상이 다시 멸망하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그거 아니? 이곳에는 다른 이름도 있단다. 우리는 이곳을 ‘시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시작이요?”
[이해가 잘 안 되느냐? 이곳이 ‘멸망의 징조’라 불리는 이유는 이곳이 생기는 순간을 기점으로 세상의 흐름이 멸망으로 향하기 때문이란다. 이곳이 ‘시작’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곳에서 ‘멸망을 막기 위해 영웅’이 탄생하기 때문이지.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한 ‘영웅’이 결정되는 자리다. 시작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지 않니?]
“…….”
나는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더는 막지 않았다. 새는 나는 것을 멈추고는 내 어깨 위로 올라와 앉았다. 새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풍경은 계속해서 변해갔다.
어느새 박민후가 타고 있던 관광버스도 터널에 진입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재잘거리는 말소리와 노랫소리도. 그것이 비명이 되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수학여행에 들떠 신이 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비명이 되었다. 터널 안쪽에 생긴 던전 게이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터널을 향해 달려오던 차들을 마구잡이로 집어삼켰다.
운도 없지. 아니 주인공의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당연하게도 박민후가 타고 있던 관광버스 또한 게이트에 집어삼켜졌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갑작스러운 게이트를 보며 운전기사는 어떻게 해서든 버스를 멈춰 세우려고 했다. 멈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피해 보려고 운전기사가 다급하게 핸들을 꺾었으나 피할 수 없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버스가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미끄러지듯이 던전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급하게 꺾은 핸들 때문에 버스가 뒤집혔다. 버스가 나뒹굴고 차창이 깨지며 아이들의 비명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버스는 지면을 몇 바퀴나 구른 뒤에야 간신히 멈추었다.
버스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차창의 유리는 깨져 버리고 충격으로 기절하거나 다친 아이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와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민후는 의외로 멀쩡했다. 작게 깨진 유리 파편에 몸이 여기저기 베인 것을 제외한다면 아주 멀쩡했다. 박민후는 놀라고 겁먹은 얼굴로 차 안을 둘러보다 옆에서 기절한 친구를 흔들어 깨우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먼 과거에도 이곳은 홀연히 나타났지. 하나 그들은 시험에 떨어졌다. 어느 누구도 영웅이 되지 못한 채 세상은 멸망을 향해 달려갔단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정된 흐름을 따라야 했다. 그때는 이 세계가 아직 멸망할 때가 아니었어. 그렇기에 인간이 강해질 수 있도록 힘을 내려 주었지.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개입. 두 번째는 그래, 5년 전이겠군. 우리는 총 두 번의 개입만을 허락받았다.]
“그걸 대체 누가 허락하는 거죠? 당신은 신이라면서요. 신에게 그런 허락을 내릴 존재가 있나요?”
풍경이 다시 한차례 바뀌며 엉망인 버스 안을 비추었다. 먼저 정신 차린 것은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으로 보이는 어른이었다. 머리를 짚으며 휘청거리던 선생은 아이들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아이들보고 다친 아이를 부축해서 버스 밖으로 나가자고 지시했다.
[세계의 흐름이 그걸 결정한단다. 아무리 신이라 해도 세계의 흐름을 벗어날 순 없는 법이야. 우리는 전능하지 못해. 전능한 존재는 세계의 흐름마저 개입한다. 아니지 흐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단다.]
풍경은 천천히 흘러갔다. 우리는 여전히 끝도 없이 펼쳐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첫 번째 개입 이후 계속 기다렸단다. 정해진 흐름이 제대로 흘러가는 날을.]
[마침내 ‘그날’이 되었지.]
풍경 속에서는 박민후가 친구를 부축하며 망가진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이 세계의 인간은 쉽게 다치지 않도록 진화했다지만 그렇다고 사상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운이 나빠 치명상을 입은 사람들이 그랬다.
‘괜찮아, 얘들아. 헌터들이 우릴 구해 주러 올 거란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일단 안전한 곳으로….’
‘서, 선생님 지혜가 눈을, 눈을 안 떠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흐윽, 어떻게…. 차, 창혁이도 안 움직여요. 피를, 피를 너무 흘렸어요. 어떻게요? 어떻게….’
‘정신 차려봐! 야! 야! 눈감으면 안 돼…!!’
그렇게 그때 박민후는 난생처음 타인의 죽음을 코앞에서 보았다.
‘우윽…!’
박민후는 구역질이 났다. 식은땀을 흘리고, 손이 벌벌 떨렸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추웠다. 무서웠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가 역겨워 위를 비웠다.
사방에서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기척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오는 그것들은 흔히 알고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S급 헌터들도 혼자서 상대하기 힘들다는 드래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드래곤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등급이 높다고 알려진 모든 몬스터가 이곳에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곳은 괴물의 터전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이제 없었다. 저것들은 인간을 먹이로 삼는다. 압도적인 괴물을 마주한 인간들은 두려움에 몸이 굳었다. 그러나 살고 싶었다. 몬스터의 괴성을 들으며 공포에 질려 가던 사람들은 몸을 낮추고 살기 위해 숲에 숨어들었다. 게이트에 휘말린 사람들은 수십 명도 넘었다. 그들은 저마다 모여 구조대가 올 때까지 어떻게 버텨야 하나 의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먼저 던전 게이트 출현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 세상은 많은 시행착오 끝에 던전과 몬스터와 더불어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것이 바로 던전 게이트 출현을 감지하는 시스템이었다.
게이트가 나타나기 전 위치를 예상하고 그 인근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재난 문자가 발송되고, 대피 방송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 게이트는 그런 것이 일체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피해가 막심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게이트에 대한 발견이 늦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필이면 게이트가 발생한 곳이 사람들의 시선이 가려지는 터널 안이라는 것이 문제였고, 던전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는 게 사람들을 더더욱 두렵게 했다.
먹을 것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박민후 일행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이었다. 아이들의 짐 가방 안에는 과자며 간식이며 식량이 더러 존재했다. 갈아입을 옷도 생필품도 존재했다. 여러모로 그들은 다행이었다. 죽은 아이들의 유품을 챙기고 아이들은 땅에 묻어 주었다. 슬픔에 잠기기에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조기 교육을 잘 받았다. 아무래도 던전과 몬스터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보니 학교에서 만약에 벌어질지도 모를 게이트 사고를 대비해 훈련을 받았던 게 빛을 발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아이들은 숨죽여 도망치던 와중 몬스터를 사냥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헌터들이었다. 다행히도 일반인뿐만 아니라 헌터들도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헌터는 되지 못했지만 각성한 자들도 여럿 존재했다.
그들의 존재는 불안한 사람들에게 그나마 희망적이었다. 소수의 각성자들은 믿음직했다. 여럿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눈길이 끌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은 인원을 나눠서 행동했다. 최대한 식량은 아껴 두고 몬스터를 잡고, 헌터들에게 물어, 물어 먹을 수 있는 몬스터를 먼저 식용으로 사용했다. 박민후는 그때 몬스터 고기를 처음 먹어 보았다. 맛은 끔찍했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적이었다. 희망적이었다. 구조대가 올 것이라고 믿으니까 아직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먹을 것도 충분했으니까.
어느 순간 풍경이 빠르게 휙휙 바뀌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의 나날이었다. 식량은 턱없이 모자랐고, 평범한 일반인들이 아무리 길고 날뛰어 봐야 괴물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박민후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보고 말을 걸던 친구의 시체를 밟고 뛰었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저희들을 구해 주소서.’
누군가 신을 찾았다. 신은 답해 주지 않았다.
살고 싶어서 저희를 돌봐 주던 선생님을 괴물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살아남고 싶어서 친구였던 이를 미끼로 사용했다.
괴물을 피해 일행의 시체 더미 안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둘. 그의 곁에서 친구들이 사라졌다.
아이는 더는 시체를 보며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구역질이 나지도 않았다. 박민후의 얼굴에서 웃음은 점차 사라졌고, 그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 살고자 하는 갈망뿐이었다. 아이는 살기 위해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살고 싶었다.
박민후는 그 지옥에서 수년을 살았다.
어쩌면 수백 년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몬스터의 고기를 뜯어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죽은 몬스터의 뼈로 무기를 만들고 약한 놈들부터 차근차근 처리해 나갔다. 초기에 만난 헌터들은 박민후에게 싸우는 법을 알려 주었다. 여러 가지로 살아남기 위한 지식들을 배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면 죽고 없었다. 무덤을 만들어 줄 여유는 없었다. 저를 보며 살려 달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친구의 목소리도 전부 외면했다. 도망치는 저를 보며 저주하는 눈동자가 생생했다.
‘살려 줘요.’
‘죽고 싶지 않아.’
‘너무 아파.’
‘집에 갈래.’
‘살려 줘, 살려 줘.’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원한이 살아남은 박민후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발밑을 타고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
어느 순간, 정신차리고 보니 그곳에 인간이라고는 박민후 혼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이미 옛적에 다 죽고, 그나마 오래 버티던 헌터들조차 이제는 없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괴물들을 보며 박민후는 이곳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박민후는 죽어 가고 있었다.
더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상처투성이가 된 팔다리도 등에 난 상처도, 가슴에 난 상처도, 모두 치명상이었다. 입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핏덩이가 쏟아졌다. 피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박민후는 피투성이였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세상의 소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들이미는 괴물들이 저주스러웠다. 이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영웅은 무슨.
아무리 기다려도 어느 누구도 오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이 죽어 갈 때도, 주변에 사람이 죽어 갈 때도, 이렇게 자신이 죽어갈 때도 기다리는 영웅은 오지 않았다. 뭐가 영웅이란 말인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 나타나지 않는 존재는 영웅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 영웅 따위 필요 없었다.
박민후는 세상을 저주했다. 원망했고 또 절망했다. 힘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이곳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일 힘을.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의 눈만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너지는 몸으로 이가 빠진 무기를 들고 울부짖는 박민후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이곳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을 텐데 아이가 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피투성이였다. 상처는 심했고, 옷은 너덜거렸다. 핏발선 눈은 흉흉했다. 수학여행을 기대하며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박민후의 입이 열렸다.
‘…….’
그것을 끝으로 세상이 온통 어둠에 잠식되었다. 마치 상영 중이던 영화가 끝이 난 것처럼. 이수현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날 세계는 그 아이를 세계의 중심으로 정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새가 다시금 날아올랐다.
[박민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금의 그를 구성하는 ‘힘의 근원’이다. 그 힘은 영웅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 같은 것이었지.]
새하얀 새는 제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발을 떼고 다시 걸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감상이 어떠니?]
“내가 그의 과거를 알게 됐다는 걸 그가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네요.”
나는 그의 기억을 보면서도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해는 하되, 마음으로 공감하진 못했다. 그가 힘들게 살아남았다는 걸 안다. 그의 악몽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알겠고, 그의 성격이 왜 그 모양이 됐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하나 그뿐.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새가 말했다.
[너는 메말랐구나.]
내 무미건조한 시선이 새에게 향했다.
“그런 말을 종종 듣죠.”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나는 살면서 이런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메말랐다, 차갑다, 정이 없다. 지겹도록 그런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눈앞에 새가 저를 보며 뭐라 지껄이던 내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다. 너는 말해라 나는 무시할 테니.
나는 솔직히 본인의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타인의 사연 따위 조금도 궁금하지도 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건 가족이어도 마찬가지였고, 친구여도 그랬다. 나에겐 본인 외에는 전부 타인이었다. 그게 피가 이어진 혈육이어도, 1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친구여도 그랬다. 그들은 남들보다 내게 좀 더 다가올 수 있었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선을 그었다.
‘정이 없구나.’라는 말은 부모에게 처음 들었다.
‘차갑다.’는 말은 늘 함께 다니던 친구에게서 들었다.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중학교 때였던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나.
…아니지. 지금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너는 감정을 잘 숨기는구나.]
[어떨 때는 감정조차 없는 것처럼 굴고.]
[저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니?]
나는 설핏 웃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무심하게 떠진 눈이 살짝 접혔다. 썩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아니겠지. 정말이지 나는 이 신이라는 작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세계는 그야말로 성악설이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세계였다. 봐라. 이 세계의 신이란 놈도 이 모양이지 않나?
“이상한 말을 하네요. 마치 내가 당연히 그를 동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려요. 그를 동정하거나 가엽게 여기기라도 하라는 건가요? 겪어 봐서 아는데, 괜한 동정은 사람을 화나게 하죠. 멋모른 행동은 상처를 주고요. 그가 원한다면 몰라도…. 글쎄요. 그는 그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단정하니? 그 아이의 마음이 마모되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단다. 인간은 한없이 강하지만 작은 계기만으로도 무너질 정도로 연약하지. 불행만이 함께하는 그 아이가 무너져 내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단다.]
“내가 아는 박민후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설령 무너져 내린다 해도 그가 동정을 바라진 않을 거예요. 그게 그를 동정할 이유가 되지도 않고.”
새는 박민후를 동정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의 감정을 파고들어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그를 동정해서 나와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엮였으면 하는 것이 분명했다. 웃기지도 않아.
어느새 계단은 끝이 나 있었다. 찰박하고 물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영상이 꺼진 공간은 여전히 어둠만이 존재했다. 계단 끝의 공간은 나름 익숙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두 번이나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으니까.
“안 그래요, 박민후 헌터?”
그렇다. 이곳은 박민후의 심연이었다.
***
어둠 속에서 검은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 모습은 굉장히 기괴했다. 그것은 형상을 이루지 못한 채 무너지고 뭉쳐지기를 반복했다. 툭, 투둑. 녹아내리듯 지면에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꿍얼거리며 다시 뭉쳐지는 소리도 들려왔고, 기이한 울음소리는 덤이었다. 새는 나를 박민후에게 데려간다고 했기에, 이 계단 끝에 있는 것이 박민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저게 박민후겠지.
새가 말했었다. 내가 신을 새라고 자각했을 때 신은 새의 모습을 했다고. 그렇다면 저것도 그럴까? 무너지는 형상을 보며 검은 짐승을 떠올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샛노란 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한 번에 형상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그것을 보며 언젠가 밤에 나를 내리누르던 짐승과 닮았다 생각했을 때 모습을 바꾸었지. 그 생각은 맞아 들었다. 형상을 이루지 못하던 그것이 점점 형상을 이뤘다. 천천히 덩치를 불려가고 이윽고 내가 아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잔뜩 경계하듯 몸을 낮추고, 상처 받은 짐승이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렸다. 사나운 이빨이 저를 향해 번뜩였고, 샛노란 눈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것을 거부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나운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난감했다. 저건 정말 짐승이지 않나. 어째 말을 한다고 통할 거 같지가 않았다. 미간을 찡그리며 유유히 날고 있는 새를 쳐다보았다.
[…옛이야기를 하나 더 할까. 이 땅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재앙’이 잠들어 있었단다. 신의 권능을 탐하다 하늘에서 추락한 ‘재앙’이 바로 그것이었지. 제아무리 신이라 한들 그런 ‘재앙’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재앙은 너무나 탐욕스러웠기 때문이란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제 덩치를 불려 나가던 어느 날. 기어이 제힘을 감당 못해 땅으로 추락했다.]
갑자기 저건 또 무슨 소린가?
[우리는 그 틈을 노려 재앙을 봉인하기로 했단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 이미 신을 몇이나 삼킨 존재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재앙을 봉인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단다. 하나 그 봉인 또한 완전하진 못했지. 그렇게 재앙은 심연 속에 몸을 웅크리고서 때를 기다렸다. 자신이 다시 모든 것을 집어삼킬 그날을 줄곧 이 어두운 심연 속에서 기다렸단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때가 도래했다.]
새의 말을 듣고 있자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 절망과 원망에 휩싸여 죽어 가던 박민후는 재앙과 퍽 닮아 있었단다. 그렇기에 재앙은 기꺼이 여태껏 고이 모아 둔 힘을 그에게 넘겨주었지.]
“설마 그 보상이라는 게….”
[물론 거저 준 것은 아니었단다. 탐욕스러운 재앙은 확실히 대가를 받아 갔지. 아까 보았던 ‘그 아이’가 바로 그 ‘대가’란다. 재앙의 힘을 잘만 사용한다면 세상을 멸망에서 구할 수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압도적인 힘이 필요한 영웅에겐 딱 어울리는 힘이었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새는 분명 박민후가 손에 넣은 힘이 보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정말 보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재앙이라니…. 그의 강함을 보고 재앙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정말 단어 그대로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과거’는 분리되고 ‘현재’만이 남아 ‘미래’로 나아갔단다.]
“하, 머리 아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가 아팠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이놈의 신이란 작자는 왜 자꾸만 내게 이런 이야길 시시콜콜 하는 것인가? 내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레스라도 주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성공했다. 정말이지 나는 이렇게 타인의 개인사를 본인이 아니라 타인에게 건너 듣는 게 싫었다. 그의 이야길 다른 사람의 입으로 알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나 내가 골치 아프든 말든 새는 할 말은 이게 끝이라는 듯 지저귀듯이 말했다.
[자, 그만 데리고 가렴.]
“…저걸?”
그제야 나는 눈앞의 상황을 다시금 마주했다. 샛노란 눈이 여전히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만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나를 찢어발길 거 같은 모양새로 우는 짐승을 보고 어떻게 쉽사리 접근할 수 있겠는가. 본인 일 아니라고 정말 쉽게 말하네. 장난하냐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오히려 새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뭐가 문제니? 어서 깨워서 데려가지 않고.]
“아니, 저런 상태인데 내가 어떻게 다가가요. 제정신도 아닌 거 같은데….”
[그렇구나… 콧잔등이라도 쓸어 주련?]
“예…?”
[아니면 손을 잡아 주어도 좋지.]
“아니, 무슨 개소리예요.”
[개소리라니, 저 아인 지금 악몽을 꾸는 중이야. 잠에서 깨어나야 너도 저 아이도 이 세계에서 나갈 수 있단다. 다정하게 대해 주면 꿈에서 깰지도 모르지 않니? 그는 널 데리러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이곳에 왔단다. 설마 그런 너를 잠결에 죽이기야 하겠니?]
“원래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인데….”
[무엇보다 서두르는 게 좋을 게야,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이 세계는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단다. 말하지 않았니? 이곳은 이미 할 일을 끝마친 세계라고. 원래도 이곳은 조용히 사라져야 했었단다. 그런데 갑자기 입구가 열리니 문제가 생겨 버렸지. 여기서 죽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냐.]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새의 재촉을 못 이겨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나를 노려보는 샛노란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조심히 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쓰다듬어 본 적 있었지. 살짝 쓰다듬는 손길에 그의 울음소리가 좀 작아졌다. 나를 보는 노란 눈이 슬쩍 감기고 ‘툭’ 하고 제 가슴팍을 치는 주둥이를 보며 머뭇거리다 양손을 들어 품 안 가득 들어오는 주둥이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것의 덩치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윽고, 내가 아는 박민후가 되었다.
“……!”
무거워.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어느새 내 온몸을 바스러지게 껴안고선 체중을 싣는 박민후 때문에 나는 기어코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발아래의 물이 출렁거리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박민후는 떨어질 생각은 않고 더 나에게 들러붙었다.
“박민후 헌터…?”
“조금만….”
“음.”
난처했다. 뭐가 조금만, 이란 말인가. 당장 떨어져 줬으면 했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어깨를 양손으로 힘껏 밀어도 그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깨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 내 품을 파고드는 온기는 낯설기 그지없어 당장에라도 몸을 빼고 멀리 물러나고 싶었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온몸의 소름이 와다다 돋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상대방의 심장 박동 소리를 가깝게 듣는 것도 그렇고, 내 몸을 데우는 타인의 체온도 싫었다. 이런 기분은 너무 낯선 것이었다. 배 속이 울렁거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건 몸 안에 장기를 다 끄집어내서 어떻게든 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게 했다.
나보다 조금 높았던 체온은 평소보다 낮아 차가웠으나, 내 목덜미에 닿는 숨결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어깨 위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내 몸을 바스러질 것처럼 껴안는 그가, 내 옷이 동아줄이라도 된 양 붙드는 손길이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타인이 볼 때 흡사 바보 같겠지.
이곳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한편 우리를 내려다보는 새가 거슬렸다. 어째 새가 히죽 웃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것이 새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된 거 같아 기분이 나빴다. 씨근거리는 목소리로 박민후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상태였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바로 옆에서 들려오니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 좀, 물어보자.”
“…뭔데요?”
이것은 난처한 일이다. 난처하기 짝이 없다. 정말이지 내게 면역이 없는 행동이었다. 얼굴이 구겨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손을 들어 흐트러진 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내가, 불쌍해?”
“글쎄요.”
이성은 어서 그를 멀리 떼어 놔야 한다고 말하고, 감정은 그래도 울음을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이러고 있어 주자고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등을 마주 안아줘야 할지 그저 주먹을 쥐고 가만히 있어 줘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날, 동정하지 마.”
“안 해요.”
그의 앓는 소리는 그와 함께했던 일주일간을 떠올리게 했다. 새벽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박민후를, 그날 새벽 잠결에 본 바스러질 거 같은 박민후가 떠올랐다.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난, 괜찮아.”
이수현은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성적이었다. 커다란 문제가 눈앞에 드리워졌을 때 이수현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일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감정은 배제하고 이성적인 결단만 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감정을 배제하는 일은 쉬웠다. 어릴 적부터 해 왔던 것이니까.
“정, 말로, 아직…. 참을 만해.”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감정보다는 이성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화를 내는 순간이 없었고 무언가를 보고 슬퍼하거나 동정한 적도 없었다. 그는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었고, 재미를 느낀 적도 별로 없었다. 살면서 먹는 것에 맛있다고 느껴본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는 무감각했다.
무심했고 냉정했다.
그랬는데.
이수현은 제 옷을 잡아 뜯을 정도로 꽉 쥐며, 숨죽여 우는 박민후를 보며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눈물 같은 건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저에게 매달리는 건 정말 너무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타인의 온도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싫어했다. 어느 순간부터였더라, 타인과의 접촉이 불쾌감을 준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누군가를 안거나, 손을 잡는 상상을 하기만 하면 토기가 치밀었다. 친구와의 접촉도, 가족과의 접촉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수현은 연애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백은 이따금 받았으나 한 번의 연애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후로는 모두 거절했다. 원체 성격이 무심하기도 했거니와 타인의 감정에 쉽게 공감을 못 했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과의 스킨십이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 접촉을 하는 자신이 상상만으로도 불쾌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저를 안고 있는 박민후를 떨쳐내야 옳았건만. 어째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냥 안 떨어지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체온이 높아 그의 품이 따뜻했기 때문일까. 애처럼 우는 박민후가 설마 제게 가엽게라도 보이는 걸까? 설마 그럴 리가.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 이유를 명확히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나쁘지 않네.’ 하고 생각했을 뿐.
갈 곳 잃은 손을 어찌하면 좋을까 계속 고민하다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이수현은 머뭇거리는 손을 들어 박민후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분명 제 품에 안겨 우는 것일 텐데 덩치 차이 때문일까, 오히려 제가 박민후의 품에 파고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박민후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아까보다는 좀 더 진정되고 뚜렷한 발음이었다.
“그래도, 난 내 선택을 늘 후회했어.”
박민후는 살아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는 여러 감정을 포기했고, 18년간 쌓아 온 가치관을 포기했다. 그는 행복을 포기하고 스스로 불행으로 향했다. 그것이 그가 힘을 얻은 대가였으며 목숨값이었다.
그는 철저히 불행해졌다.
세계는 그가 불행했으면 했다. 그런데도 그가 죽지 않기를 원했다. 그는 맡은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니까. 그의 앞날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끝이 드디어 다가왔음을 알았을 때 박민후는 안도했다.
아, 이 모든 것도 이제 끝이구나.
그게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서 눈을 뜨고, 창밖으로 보이던 변함없는 세상을 마주했을 때. 어느 순간 박민후는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마주했음에도 그랬다. 그렇게 원했던 삶이었는데 그것이 저를 좀먹어 간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거야.”
박민후는 죽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살고 싶었다.
지독한 모순이었다.
억울해서라도 살고 싶었고, 다 포기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었기에 죽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겠지. 또다시 살고 싶을 테니까.”
“이런 내가 잘못된 건가?”
“…음, 글쎄요. 뭐라 답해 주기 애매하네요.”
때때로 인간은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그것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렇기에 박민후의 선택을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어땠을까.
이수현은 생각해 보았다. 아마 자신은 박민후와는 다른 선택을 했겠지. 아마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겠지. 이수현은 삶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았다. 죽음은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남느니 그냥 죽는다는 선택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는 혼자라서 외롭지도, 타인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았지만,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생 덜하고 손쉽게 죽는 쪽이 좋다는 쪽이었다.
물론 이수현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뭐 완벽하게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했지만, 일단은 그러했다. 살고자 하는 갈망은 조금 낮은 편이었다. 막상 죽음의 문턱이 다가오면 또 모르겠지만, 여태껏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요. 사람은 때때로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하죠. 언제나 올바른 선택만을 할 순 없어요.”
“너도 후회라는 걸 하나?”
“물론이죠. 저도 꽤 많은 걸 후회해요.”
“네가 후회하는 건 상상이 잘 안 가.”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가요. 그래도 후회는 잠깐이죠. 후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과거의 일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아무래도 좋아지죠.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뭐 후회해 봤자 변하는 것도 없기도 하고….”
박민후는 이수현의 대답에 침묵했다. 그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이수현의 손짓에 맞춰 그의 숨소리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렇지만 이수현의 등을 꾹 누르며 저를 끌어안은 손은 여전했다. 이제 놔줬으면 싶어 조심조심 몸을 뒤로 뺏으나, 몸을 떼려 할수록 더욱 품에 파고들었다.
“에휴.”
이 무슨 그답지 않은 어리광인가. 박민후의 힘을 어찌할 수도 없기에 그저 그가 자신을 놔주길 기다릴 수밖에. 이수현은 멍하니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어색하게 두드린 건 이성의 짓일까 감정의 짓일까. 이 정도는 ‘우는 사람을 달래는데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거지.’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나온 결과일지, 아니면 이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생각인지 이수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이수현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저답지 않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눈앞의 사내가 애처럼 울든 말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가.
그럼에도 그의 손은 느리게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