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어쩌고 싶어? (10/18)

9. 어쩌고 싶어?

“정말이지….”

박민후는 침대 헤드를 붙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덕분에 침대 헤드가 조금 부서졌지만 지금 그게 대수인가. 사람 심란하게 만들어 놓고 저 혼자 처자면 다냐고…. 끼익 소리를 내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박민후는 제게 등을 보이고 잠든 이수현을 보면서 진짜 잠든 건가 아니면 자는 척하는 건가 그를 노려보는데 미동도 없이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가 확실히 그가 지금 잠들어 있음을 알려왔다. 어지간히 졸렸는지 눕자마자 잠들었나 보다. 그런 그를 미묘한 표정으로 보던 박민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긴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이수현의 사과는 뜻밖이었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겨우 그런 거로 사과하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일단 제가 알기로 제 주변에는 없었다. 제 주변에 있는 놈들은 남 탓하기 좋아하는 놈들뿐인지라 선뜻 먼저 사과를 하는 인간은 드물었다.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말이다. 자신은 어지간한 일은 다 겪어 봤으니 이제 와 제 과거가 들춰진다 한들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렇다고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은 다른 일이 많이 생겨서 그에 대한 것을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우습게도 박민후는 열여덟 살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박민후의 기억은 그 악몽이 일어난 날부터 시작된다 이 말이다. 기억이 없으니 위화감이 들지 않더냐 하면 아주 안 들진 않는다. 다만 그게 제가 힘을 얻으면서 치러야 했던 대가였으니 수긍했다. 목숨값치고는 썩 괜찮지 않은가?

한편으론 기억이 없으니 궁금하긴 했다. 제 과거가 어땠을지 말이다. 평범한 열여덟 살의 박민후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을 테고, 어쩌면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형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유지하던 그저 그런 어린애였겠지. 그러니 영웅이 되기 위한 대가로써 사용된 것일 테고. 게다가 한 가지 더 박민후가 자신의 과거를 잊음과 동시에 세상 또한 박민후란 사람을 잊었다.

그런, 그런 약속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박민후가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따금 그의 뒤를 캐려는 이들이 헛물만 들이켠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가 세상의 뚝 떨어진 존재 같다고 말해 왔다. 부정하진 않았다. 그것과 비슷하긴 했으니까.

박민후는 그래도 이 상황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운이 없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불행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자기 일이 아니니 우습게 볼 정도로 사소한 것조차 그에겐 불행의 시발점이었다.

그러니 어째서 나여야 했느냐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끝없이 되뇌었던 나날이 있었다. ‘어째서 나여야 했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한편으론 만약 행복했던 순간순간을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다면 자신은 더 빠르게 무너져 내렸으리라 생각했다. 박민후는 그렇기에 신이 가져간 저의 행복했던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살았다. 그래야 편했으니까.

그건 다시 생각해도 아주 적절한 대처였다. 봐라.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박민후가 맛본 조그마한 행복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달콤했고, 그 달콤함은 저를 속절없이 녹여 무너뜨리려 했다. 생전 처음 맛보는 달콤함은 제 입 안을 헐어 버리게 만들고, 제 위장을 뒤틀고, 제 심장을 쥐어뜯었다. 하나 그 강렬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꾸만 제 손에 넣고 싶어졌다.

아, 애달파라. 그 갈망은 한번 깨닫고 나니 점점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멀쩡한 사고를 흐리게 만들고 후에는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따위를 되새기게 만들고 만약을 생각하게 한다. 만약 아주 만약에…. 현실이 되지 못할 만약을 꿈꾸며 후회하고 절망하고 그렇게, 그렇게…. 박민후는 이제 이 순간이 없던 순간을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며 매 순간, 이 달콤함을 갈구하다 천천히 녹아 무너지겠지.

끼익….

그러니 지금 이건 조금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계산된 행동이기도 했다. 싱글베드는 성인 남성 둘이 눕기에는 너무 좁아 그가 움직일 때마다 침대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박민후는 개의치 않았다. 똑바로 누울 수도 없어 아주 조금 남은 침대 끝에 옆으로 누워 이수현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이수현은 딱히 잠버릇이랄 게 없었다. 한 번 누운 상태로 아침이 될 때까지 쭉 잠들었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오늘만, 오늘만 봐줘. 나 오늘 많이 힘들었잖아. 그렇지? 이수현도 이해해 줄 거다. 아니더라도 들키기 전에 일어나면 되니까….

어차피 오래 잠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잠드는 게 무섭고 괴로워 도진 불면증과 저를 저주하는 악몽은 언제나 박민후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은 피곤함은 이제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힘드니까, 그저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아주 잠깐만 그의 곁에 누워서 자고 싶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박민후는 눈을 감았다. 어쩐지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

…달그락, 달그락. 탁.

이수현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꺼풀이 작게 움찔거리더니 스르륵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수현은 꿈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꿈을 꿨다는 자각만이 뒤늦게 남았을 뿐. 그는 차근히 생각을 정리했다.

따뜻한 이불 안은 벗어나기 싫을 정도로 포근해 다시 잠들까 고민이 들었으나 자꾸만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왔기에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방향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다. 제집에서 들릴 리 없는 생활 소음이다 보니 정체가 궁금했다.

소음의 근원지는 멀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떡하니 보였으니까. 뭐 당연한 거겠지만 소음의 정체는 박민후였다. 이 집에서 저랑 박민후 말고 또 누가 있겠냐 하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뭘 하는데 저리 주방에서 기웃거리나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수현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뻑뻑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그걸로도 해결이 되지 않아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았을 텐데.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일시에 멈추었다. 이수현을 등지고 서 있던 박민후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밥해.”

“…예?”

이수현은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박민후가 밥을 한다고? 아직 내가 꿈을 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그를 쳐다보자 젖은 손을 탈탈 털며 박민후가 성큼 다가왔다. 뭐지 싶어 멀뚱히 보는데 서늘한 기운을 품은 손가락이 이수현의 얼굴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가 찡 하고 울렸다. 그 아픔에 잠이 번쩍 깼다. 손을 올려 아려오는 이마를 문질렀다. 눈앞에서 유유히 멀어지는 큼지막한 손가락을 불퉁하게 노려보았다.

“앞으로 밥은 내가 할 거야.”

“…예?”

“일단 씻고 와. 아직 덜 됐으니까.”

제 어깨를 잡고 욕실 쪽으로 미는 힘에 이수현은 하는 수 없이 욕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여전히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한가득하였다. 박민후가 밥을 한다고? 왜? 아니 그전에 그가 요리를 할 줄 알던가? 요리 못하지 않아? 이수현 기억 속의 박민후는 요리와 거리가 멀었는데….

이수현은 언제나와 같은 순서대로 씻고 욕실을 나왔다. 세수를 하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요리를 한다니, 이수현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왜 요리를 한단 말인가.

“박민후 헌터.”

“앉아.”

이수현은 일단 식탁에 앉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등짝을 응시하며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저기요.”

“뭐?”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이제 보니 말뿐만 아니라 얼굴도 퉁명스러웠다. 제 앞에 그릇을 착착 내려놓고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흰 쌀밥과 계란찜과 김치찌개, 그리고 기타 반찬들까지…. 이수현의 집에 없는 것들이었다. 보기에는 그럴싸했다. 시중에 파는 음식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박민후의 어째 너머로 전쟁터가 돼 버린 주방을 힐끗 쳐다보고 그를 쳐다보았다. 묵묵히 젓가락을 들던 박민후는 이수현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밥을 보던 시선을 들어 이수현을 쳐다보았다.

“…그쪽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뭔 소리야. 널 위한 게 아니라 날 위한 거야. 저번에 말했잖아 볶음밥 먹기 싫다고, 어떻게 사람이 볶음밥만 먹고 살 수 있겠어?”

투덜거리며 밥을 한 숟가락 퍼 입에 집어넣는 모습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그런 문제라면 다른 걸 사다 먹으면 되잖아요.”

“냉동식품도 질렸어.”

“외식은….”

“가뜩이나 얼굴 팔려서 나갈 때마다 시선이 모이는데 퍽이나. 뭐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면서 밥 먹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고.”

“…만드는 거 귀찮잖아요.”

“내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뭐라 하냐? 내 밥 하는데 재료가 남으니까 그래서 네 것까지 해 주는 거라고.”

“그치만….”

“아, 좀! 잔말 말고 밥이나 먹어…! 왜 해 줘도 난리야?! 그렇게 볶음밥이 좋아?! 안됐네! 네 볶음밥은 다 쓰레기통으로 꺼졌어!”

“…뭐?”

이 자식이? 순간 이수현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걸 버렸다고…? 그가 이수현을 비웃으며 팔짱을 꼈다.

“뭐, 확인해 볼래? 냉동실 텅 비었어! 텅! 아주 깨끗이~!”

“누구 마음대로 함부로 버려?”

“야, 말은 바로 하자? 그거 내가 산 거거든?”

“그쪽이 산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

“그놈의 볶음밥 아주 치가 떨린다. 그만 좀 먹어! 아니면 뭐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정하든가, 너 그러다 영양실조 걸려. 알아? 야, 무슨 요즘 시대에 영양실조가 말이 된다 생각하냐?”

“그렇게까진…. 하아, 됐어요. 뭐 버렸다는데 어쩌겠어….”

말을 말지 싶어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 이수현의 모습에 그제야 만족한 듯 씩 웃더니 박민후가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이수현도 따라서 밥을 먹었다. 뭐 먹을 만은 하네.

“그래, 그러니까 눈앞에 밥이나 먹어. 내가 해 주는 밥은 어디 가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그쪽이 요리라니…. 너무 안 어울려.”

“이게?”

“뭐 일단은 잘 먹을게요.”

정말 별일이 다 있네. 박민후가 해 주는 밥을 먹다니…. 던전에서 몬스터 고기로 요리해서 먹는 장면은 소설로 읽었는데. 몬스터 고기는 맛있을까? 갑자기 궁금하네. 박민후는 별로 맛있다, 맛없다 표현을 안 해서 괜히 궁금해.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입에 넣었다. 그렇게 한동안 식기가 부닥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밥해 줬으니까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음, 그래도 앞으론 요리 안 해도 돼요.”

“끝까지 그런다! 그냥 좀 내가 한다니까?”

“…싱크대 꼴을 보고도 그 말이 나와요?”

“…앞으론, 그 뭐냐. 정리하면서 할 거야. 오늘은 처음 한 거라서 그런 거라고…!”

안 믿기는데. 미심쩍게 박민후를 보다 주머니에 넣어 둔 게 생각났다. 아, 어제 줬어야 했는데 깜빡했네. 이제라도 생각나서 다행이지….

“맞다, 박민후 헌터. 어제 당신 친구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뭐? 내 친구?”

제 말에 박민후가 밥 먹던 것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역시 박민후가 알려 준 게 아니구나.

“이걸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당신이 보면 알 거라고 했어요.”

박민후는 이수현이 내민 빈 종이를 받아 들고 앞뒤로 훑어보더니 이네 그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궁금해라. 뭐라고 적힌 걸까. 이수현이 볼 땐 그냥 빈 종이였다. 아무것도 안 적혀 있고 약간 특이한 냄새가 나던.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아니, 그냥 던전 부산물이야. 딱 봐도 아무것도 안 적힌 빈 종이 쪼가리잖아? 단지 분석 스킬을 사용하면 말이 좀 달라져. 어디서 나온 부산물인지 알 수 있거든. 누가 전해 달라고 했지?”

“음, 곱슬곱슬한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어요.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좀 이상한 사람이던데….”

“이게 진짜 여기가 어디라고….”

박민후의 손안에서 종이가 거칠게 구겨졌다. 그걸로는 성에 안 차는지 종이를 쥔 그의 손에 검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자 이내 종이가 검은 불꽃에 휩싸여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 사람이 나한테 경고했어요.”

“…뭐라고?”

“그쪽이랑 같이 있으면 내가 노려질 거라던데요. 이미 내 얼굴이 여기저기 팔렸대요. 그래서….”

“그래서 뭐. 나랑 떨어지라고? 막 제가 도와준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게? 웃기지 말라고 해!! 제가 뭔데?!”

어디서 핀트가 나간 건지 갑자기 짜증을 내는 박민후는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이수현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게 화낼 일인가? 아, 그가 자신과 같이 살기로 한 그 이유 때문이라면 짜증 낼 만했다. 그렇지만 왜 초조해하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뭐 딱 붙어 있으라는데. 껌딱지처럼.”

“…그거 좋네.”

“예?”

“아냐, 아무것도.”

고개를 휙휙 젓고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로 바닥을 한 번 두드리자 예의 그 귀여운 퐁퐁 소리를 내며 검은 개들이 튀어나왔다. 한 열댓 마리가 나왔을까 그것들은 얌전히 앉아 박민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를 쓰다듬으며 박민후가 말했다.

“이것들이랑 놀고 있어.”

“예? 갑자기 왜….”

“가 봐야 해. 아까 그 쪽지. 분석할 수 있는 놈들이 연락책으로 쓰는 거거든. 그 부산물이 나온 던전에서 만나자, 뭐 그런 뜻이지. 어제 왔다고 했었지? 마음 같아선 좆 까라 하고 싶은데.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

“그럼 나도 같이 가는 건 안 되나요? 집에만 있기는 지루하기도 하고 또 그쪽 친구란 사람이….”

“친구 아냐.”

“하여튼, 그 사람이 그랬다고요. 날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쪽이 내 옆을 떠난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내 안전을 책임지기로 했잖아.”

박민후는 순간 고민했다. 그의 말대로 이수현을 혼자 두고 가기에는 안심이 되질 않았다. 이런 상황이 온 건 모두 자신의 잘못이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까지 이수현을 생각할 거라고 짐작조차 못 했다. 언제든 볼일이 끝나면 그의 곁을 유유히 떠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태 그의 신변 보호에 둔감하게 대응했다. …이미 알 놈들은 다 알겠지.

그래도 던전 안은 아무리 조심해도 예측하지 못할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다. 어쩌면 같이 입장해도 따로 떨어질 수도 있었고, 공기 중에 미세한 독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 헌터도 아니고 하물며 그냥 일반인보다도 현저히 약한 이수현을 데리고 들어갈 순 없었다. 어떠한 위험도 없다고… 보장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던전 밖에 있는 게 더 보호하기 쉬웠다.

“…그래도 널 데려갈 순 없어. 뭔 일이 생길 줄 알고 널 데려가? 네가 헌터도 아니고 하물며 보통의 일반인 정도만 됐어도 다르게 생각했을 거다. 마나라도 있으면 아이템이라도 쥐여 주고 데려갔겠지. 그런데 넌 아무런 힘도 없고 무슨 나뭇가지처럼 툭 치면 부러질 정도로 허약하고 옆에 있으면 솔직히 방해만 된다고…!”

“…….”

아차 했다. 서둘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흘러넘친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서 그냥 집에 있는 게 좋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그걸 보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렇네요.”

“이수현.”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하긴 제가 생각해도 방해만 되겠죠. 눈 깜짝할 사이에 인질이라도 되려나, 아니면 몬스터의 먹이가 될 수도 있겠네요. 됐어요. 집에서 TV나 보고 있죠. 가 봐요.”

“…얘네가 있으면 상위 A급 헌터 정도는 무난하게 처리 가능해. S급은 힘들겠지만…. 웬만해선 S급이 나타날 일도 없을 거고 나도 금방 올 거야.”

“예.”

다 먹은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하는 이수현을 보며 결국 박민후는 입을 다물었다. 젠장. 이놈의 입이 문제다. 이놈의 입이…! 왜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 해? 좀 더 잘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어째 이리 퉁명스러운 말만 나오는지….

사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여태 그런 식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고운 말이 입에서 나오겠는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렇다. 실수로 말을 그렇게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데 결국 입이 안 떨어져 입을 다문 것을 보면 말 다 했지. 한편으론 좀 의아하긴 했다. 이수현이 겨우 이런 말에 신경 쓸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아는데 이렇게 반응한다는 게 좀 신기했다. 박민후는 제게 등을 보이고 선 이수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제 바짓단을 물고 늘어지는 개들을 보며 명령했다.

“너희 집 잘 보고 있어. 나 말고 다른 놈이 오면 물어 찢고…. 그래, 너희들이 좋아하는 거 해.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 잘하잖아?”

왈!

“옳지, 착하다.”

두어 번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는 불필요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박민후는 주변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텔레포트처럼 지정된 장소로 바로 갈 수 있는 그런 스킬은 아니었지만, 그림자와 그림자를 뛰어넘어 이동하는 능력이 그에겐 있었으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빠르게 해결하고 그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지.

***

달그락달그락.

이상하네. 그의 말투가 원래 그런 건 잘 알고 있었고, 솔직히 그런 식의 말을 들어도 아무래도 좋았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짜증이 났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난 그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엉망이 된 싱크대 주변을 청소하며 산처럼 쌓인 설거짓거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뭘 한다고 이리 엉망으로 만들어 놨나 몰라. 밥 한번 하는 게 아주 전쟁이 따로 없었다.

아침이라서 그런 걸까, 하긴 아침엔 언제나 좀 예민한 편이었으니까…. 그거 말고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어? 나라고 뭐, 박민후 옆에 있고 싶은 줄 아나. 어제 들은 말이 있으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지. 게다가 집에만 있기도 심심했으니까. 하루 푹 자고 나니 몸도 편했다. 집에만 있기에 아까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게 오늘이었다. 젖은 손을 주방 수건으로 닦으며 몸을 돌렸다.

“아.”

발아래 시커멓고 작은 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샛노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음, 너무 많지 않나…? 딱 봐도 열 마리가 훌쩍 넘는다. 지금은 얌전한 척하고 있지만, 저번에 마트에서 봤을 때 이놈들은 절대 얌전한 놈들이 아니었다. 내 말을 잘 들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박민후 같은 놈이 열댓 마리가 된다고 생각해 봐라. 재앙 아닌가….

“일단 좀 비켜 볼래? 좀 지나가자.”

조심조심 밟지 않도록 움직였다. 내 움직임에 따라 개들도 같이 움직이는 꼴이 좀 웃기고 귀여웠다. 할 일도 없고 TV나 볼까 하고 리모컨을 찾아 켰다. 볼 것도 없어서 생각 없이 채널만 휙휙 넘기다 영화 채널에 멈춰두었다. 머그잔에 커피 믹스를 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개들도 따라 몇 마리가 침대 위에 폴짝 뛰어 올라와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내 무릎을 차지하고 드러누운 녀석도 있었다.

“차가워라.”

박민후가 내게 치료 스킬을 썼을 때 느꼈던 차가움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스킬들은 전체적으로 다 어둡고 차가웠다. 아마 그의 특성 탓일 것이다. 머그잔을 드느라 남은 내 한 손을 가지고 노는 작은 개를 멍하니 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장난을 쳤다.

작은 입이 손가락을 물기 위해 연신 벌려졌다 닫히고, 작은 발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아르르 하며 작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개 같네. 느껴지는 체온이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그래도 의외로 얌전하네.

손을 잘근잘근 씹는 것을 내버려 두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는 이미 시작한 지 오래였다. 난생처음 보는 제목에 난생처음 보는 배우들이 나와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액션물인가 싶었으나, 아마 이게 일반적인 거겠지 싶었다. 헌터가 존재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 내가 흔히 아는 ‘액션 영화’라는 단어는 다른 단어로 사용되지 않을까?

내가 보고 있는 이 영화는 분류한다면 아마 로맨스 영화겠지. 헌터와 일반인의 사랑 이야기. 뭐, 그런 거. 이곳에선 그게 판타지적인 건가 보다. 일반인과 헌터는 서로 살아가는 방향이 다르다. 서로 같은 선상에서 시작되지도 않는다. 여러모로 차이가 극심했기에 기본적으로 일반인과 헌터 간의 연애는 드라마나 소설 같은 판타지로 취급되었다고 영화는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가? 잘 모르겠던데. 애초에 헌터들도 한때는 일반인이었지 않은가, 각성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지 그 외의 것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도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 내용이 딱히 와 닿지는 않았다.

게다가 더 와 닿지 않는 것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서로를 마주했을 때 운명처럼 사랑을 느꼈다는 부분이었다.

「아, 이것은 사랑이었다. 그게 아니면 이걸 대체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 따윈 이 세상에 없었다.」

그야말로 흔해 빠진 로맨스 영화였을 뿐이었다. 그들은 불처럼 뜨거운 사랑을 했고, 애달픈 사랑을 했다. 온갖 방해물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놓지 못했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보았다. 눈앞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모를지도 모르는 감정. 그렇기에 나는 가끔 궁금하긴 했다.

이 세상은 쓸데없이 사랑이 넘쳐났기에 어디를 가도 어느 곳에 있어도 끊임없이 주변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마치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영화도, 드라마도, 노래도, 소설도, 만화도, 혹은 음식조차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랑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저와 같이 메마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취급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체온이 달콤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다고 말한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지겹도록 들어 온 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어떻게 확신을 하지? 나는 누군가와의 접촉만으로도 기분이 상하고, 내가 누군가를 만지는 상상을 하면 토기가 치밀었다. 사랑? 나에겐 그것이야말로 판타지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내 모습 같은 건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어느새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면에 커다랗게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주인공의 눈 안에서는 사랑하는 이가 거울처럼 비쳤다.

머그잔의 커피가 차갑게 식는 줄도 모른 채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보았다.

***

박민후가 도착한 곳은 지하철 역사 안이었다. 은신 스킬을 사용해 입구를 경계하며 가드 라인을 치고 서 있는 협회 헌터들의 눈을 피한 박민후가 가볍게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서울 지하에 위치한 거대한 지하 도시는 늘 그 안을 꽉 채우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뒤인지라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간간이 순찰하듯 돌아다니는 헌터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잘도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을 생각을 하다니. 플로나답다면 플로나다웠다. 새롭게 나타난 S급 던전. 알프하의 둥지라고 했던가? 3일 동안 뭔가 찾긴 했나 보다. 플로나가 남기고 간 종이는 알프하의 둥지를 탐험하던 탐험가의 탐험 일지였다. 탐험 일지란 게 나온 것을 보면 이 던전을 먼저 들어와 탐험한 고지능체가 한때 존재했다는 이야기였다.

“뭐,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지.”

약속 장소로 하기에는 썩 좋지 않은 S급 던전이었다. 이수현을 두고 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박민후는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푸른빛을 머금은 거대한 게이트를 보며 같은 장소에 두 개의 게이트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나는 저와 이수현이 들어간 게이트였고 다른 하나가 이것이었다.

청명하게 푸른빛을 내며 웅얼거리는 게이트는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왔다. 드래곤이라고 했나…. 제 안의 본능이 눈앞의 몬스터를 잡아 찢어 죽이라 말하고 있었다. 어서 제 사명을 다하라고 비명처럼 소리를 치고 있었다. 박민후는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안 해, 안 할 거야. 난 대화만 하려고 온 거라고. 뒤치다꺼리는 남은 놈들이 할 거야. 나는 안 해. 안 해도 돼.”

그래, 이제 안 해도 된다.

이미 던전 내부는 청소가 1차적으로 끝난 뒤였는지 간간이 몬스터의 시체만이 이따금 보였다. 박민후는 발치에 치이는 몬스터의 조각을 발로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넓은 곳에서 약속 장소라고 한다면 보스 룸이었다. 분명 보스 룸인 드래곤 레어가 어딘가에 존재할 테니 그것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박민후는 드래곤에 이골이 나 있었다. 어디에 둥지가 숨어 있는지 눈감고도 찾을 수 있단 소리였다.

박민후의 발아래서 그림자가 치솟아 박민후를 집어삼켰다. 동시의 거대한 검은 짐승이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편이 찾기 손쉬웠기 때문이다. 박민후는 공기를 가득 들이켰다. 그리곤 공기 중의 희미하게 남은 플로나의 마나를 감지해냈다. 짐승의 네발이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거리가 꽤 멀었다. 던전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지 못했기에 박민후는 조금 조바심이 났다. 물론 생각이 있다면 약속 장소로 시차가 많이 나는 곳을 고르진 않았을 테지만. 얼른 가야지. 얼른 끝내야지. 간간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드래곤들이 몇 있었으나 그때마다 짐승은 그것을 한입에 씹어 삼켰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박민후는 동굴을 하나 찾아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동굴이었다. 동굴 속에서는 몬스터의 악에 받친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찾았다. 빠르게 동굴 안쪽을 가로지르자 거대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를 죽이지 않고 결박 중이던 플로나는 예상대로 혼자서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인물이 후드를 벗으며 한발 앞으로 나왔다.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만, 오랜만인 거 같은 기분이군요.”

“김세현 헌터, 당신이 왜 플로나 메스윈과 같이 있는 겁니까.”

“제가 부탁했습니다.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요.”

“내게? 난 당신과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플로나 헌터와 할 이야기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것과 관련이 있다고 해 두지요.”

플로나의 마나 말고도 다른 이의 마나가 느껴졌기에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김세현일 줄은 몰랐다.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만큼 뜻밖이었다. 옆에 멀뚱히 서 있는 플로나를 한 차례 노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딴청을 부렸다.

“…강유람은 당신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압니까?”

“아뇨, 모릅니다. 병원에서 쉬고 있는 차주영 헌터는 알겠죠.”

“왜 강유람에게 정보를 차단한 겁니까.”

“그 애가 걱정이 돼서요.”

김세현은 여상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가 걱정됐다면 더더욱 사실을 말해야 하지 않나? 그는 스스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인했다. 이런 식의 배려 아닌 배려는 오히려 그를 얕잡아 보는 처사였다. 강유람은 자존심이 강했다. 그 위치까지 오르기 위해 그가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가 아는 내용이었다. 그는 도움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부길드 마스터 자리에 앉았다.

“박민후 헌터는 강유람과 연인 사이란 소문이 돌 정도로 서로 가까웠잖아요. 그래서 그랬답니다. 내 식구를 지키기 위해서였죠.”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정보를 차단하는 상황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모를 사람이 아니실 텐데….”

“후에는 제대로 이야기해야겠지요. 시기적으로 좋지 않았다 변명을 좀 할까요? 그 아이와 이야기하기 전에 눈앞의 박민후 헌터와의 대화가 먼저라서요. 오늘 이후 그 아이도 알게 되겠죠.”

결국 자신 때문이란 건가.

“어디 무슨 이야긴지 들어나 봅시다.”

“제 이야긴 플로나 헌터 다음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했다간 괜한 변명이 될 거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김세현은 플로나를 가리키며 턱짓을 했다. 보스 몬스터인 드래곤 알프하의 고함이 공터 안을 가득 메운 채였다. 플로나는 곱슬곱슬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박민후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두 발로 선 박민후는 그런 플로나의 낯짝을 보자마자 주먹을 휘갈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플로나를 감싼 실드가 단숨에 부서져 내렸다. 플로나는 꼴사납게 바닥을 몇 바퀴 구르다 벽에 처박혔다.

그 꼴을 보며 알프하가 꼴좋다는 듯 비웃었다. 박민후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실드를 사용한 게 아니꼬워서 그랬다.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플로나가 휘청휘청 걸어 나왔다. 손에는 붉은 약병을 든 채였다. 앓는 소리를 내며 플로나가 포션을 벌컥벌컥 마셨다.

“대화로 하자. 어? 대화 몰라?!”

“소개할게. 이거 이름이 대화야. 인사해.”

박민후가 제 주먹을 가리키며 말했다. 플로나가 사정없이 인상을 구기며 손에 쥔 스탬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보여? 이거 이름은 화해야… 악!?”

그 꼴을 가만 지켜보다 김세현은 염력 스킬을 사용해 주변에 있던 돌을 들어 올렸다. 강화 인챈트도 풀로 두른 아주 단단한 돌덩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박민후보다 만만한 플로나의 뒤통수에 후려갈겼다. 끼리끼리 논다고는 하지만 상황을 봐 가며 놀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래서 젊은것들은…. 이라고 겨우 서른 중반의 그는 생각했다. 결박을 풀기 위해 버둥거리는 알프하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화해건 나발이건 나중에 따로 하시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 던전은 바깥과의 시간 차이가 크게 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의 한 시간이 바깥에서는 열 시간 정도군요. 저희와 박민후 헌터가 던전 안에 들어온 지 거의 세 시간은 흘렀지요. 어디보다 그럼. 좀 있으면 이틀이 지나가겠네요.”

“이 시발…! 야, 빨리 이야기해! 장소를 아주 거지같이 잡아 놨어. 뭐 열 시간? 장난해?!”

“여기만큼 보안 좋고 안전한 곳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러게, 어제 집에 갔을 때 있었으면 좋잖아?!”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아주 아무 말을 한다? 말 잘했다. 이 또라이 새끼야, 거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너야말로 일반인이랑 엮이다니 뭐 하자는 거야? 제정신이야?!”

박민후가 이를 빠득 갈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정말?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 새끼가…!”

“그래, 너는 괜찮겠지! 너는! 세상 누구도 못 건드리는 ‘괴물’이니까!”

플로나가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일순 박민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걸 본 플로나는 인상을 쓰며 머리를 헝클였다. 아, 이게 아닌데!

“…젠장. 미안. 실언했다.”

플로나는 제 과거가 생각나 박민후를 이대로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도 많이 겪어 봤잖아. 인간 놈들이 얼마나 치졸한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놈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별 이상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저 좋을 대로 이용하기 위해 약점을 찾으려고 혈안을 내잖아. 게다가 지금 시중이 썩 좋지 않아! 저번에 봤잖아! 강제로 열린 던전 게이트? 그건 시작에 불과해. 그런데 이 와중에 네 곁에 일반인이 있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머리 좋잖아.”

“…네가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박민후가 거칠게 플로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럼에도 플로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큭, 딱 봐도 힘 하나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일반인이야. 그런데 너랑 엮여서 이미 알 만한 놈들한테는 얼굴이 팔렸지. 네가 생각해도 그 일반인이 무사할 거 같아? 여기저기서 너랑 연관 있다면서 찔러 볼걸? 납치? 겨우 일반인 한 명 납치하는 건 쉽지. 납치만 하면 몰라. 너와 관련 있는 사소한 거라도 쥐어짜내려고 고문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게다가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는 세상인 거 너도 알잖아. 정신 차려. 네가 그 일반인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당장 연을 끊어야 해. 옆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알겠어?”

“날 먼저 배신한 놈이 그딴 말 하는 거 웃기지 않아? 정작 필요할 땐 나 몰라라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좀 미안한가? 그것도 모자라 네놈 과거가 겹쳐 보이니까 나한테 감히 훈계를 해? 꼴같잖은 짓 그만해, 플로나 메스윈! 웃기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주제를 알아야지. 너랑 내가 아직도 동료라도 되는 줄 알아?”

짝!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보다 못한 김세현이 손뼉을 쳐서 고양된 분위기를 흩트렸다.

“자자, 몬스터 리젠 시간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럼 시간이 더 걸리겠군요. 그걸 바라진 않겠죠?”

박민후는 자신을 보며 그렇게 말하는 김세현 때문에 짜증스레 플로나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털어냈다. 그래, 얼른 가야지. 얼른. 화를 삭이기 위해 팔짱을 끼며 이수현을 생각했다.

“…블랙마켓에서 있었던 테러에 관해 설명해. 뉴스에서 떠들던 불온 분잔지 뭔지에 대한 것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다. 그 생각에 플로나는 조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 다시 이 주제가 거론될 일은 아마 없겠지. 결박되어 있는 알프하에게 마법으로 번개를 내리치며 플로나가 입을 열었다.

“하아,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일단 시작은 5년 전이었어, 그래 네가 세상을 구한 다음에 말이야. 모두가 그 결정에 찬성한 건 아니었거든.”

“그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개중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속된 길드를 탈퇴하거나 협회를 나온 헌터들도 더러 있었어. 물론 거기까지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

그랬다. 거기까지라면 괜찮았다. 그놈들이 서로 뭉쳐서 수상한 단체를 만든 게 문제였지.

“우리는 일단 그들을 편의상 ‘새’라고 불러, 새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모습을 감추고 움직이거든. 처음에는 단순 사이비 종교쯤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지. 그런데 그런 놈들이 점점 수를 불려가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거야.”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된 건 3년 전쯤이었다. 헌터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이상한 말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은 5년 전의 선택에 불만을 가진 자들에게 접근했다. 교묘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스킬의 일종이 아니냔 말도 나왔다.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던 그때 신의 사자가 나타났다는 다소 사이비적인 헛소문이 하급 헌터들 사이에 빠르게 돌던 것이 시발점이었다.

소문은 점차 불어났고 5년 전의 선택을 다시금 끄집어 올리는 사람들이 다수 나타났다. 새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마 그때쯤이었다. 하지만 그 뒤 얼마 안 가 그들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모두가 그들을 잊어가고 있었다. 간간이 ‘아, 그런 놈들도 있었지’하고 생각하는 정도가 됐을 때. 그렇게 3년이 흐른 지금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뚜렷한 목적을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그들의 대표로 있는 놈은 까치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지. 그놈들이 자기들 입으로 선지자라 말하는 것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냔 추측이야.”

“신, 이라고.”

신의 사자라는 말에 박민후가 미간을 구겼다. 자꾸만 언급되는 새, 제가 아는 신도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그때 들었던 새대가리의 말이 떠올랐다. 그놈은 분명 이 상황을 아는 눈치였다.

“그들의 목적은 간단해. 다시 한 번 지금의 세상을 멸망시킨다. 그것뿐이야. 어디서 손에 넣은 건지. 던전을 강제로 터트릴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어. 말도 안 되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지 않을 텐데…. 완전 미친놈들이야. 물론 아직까지 그 기술을 마음대로 쓰진 못하는 것 같아. 그게 됐으면 진작에 이 한국을 터트리고도 남았겠지. 아직 그러질 않는 걸 보면 아직 막을 시간은 있단 소리야.”

플로나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박민후를 쳐다보았다. 플로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민후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다. 저희는 그의 선택이 아닌 다른 것을 택했다. 그렇게 이어 온 평화였다. 그리고 그것을 탐탁지 않게 보던 박민후였다. 하물며 직접적으로 신과 대화를 나눠 신의 권능을 휘두르던 그야말로 신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인간이지 않았나. 그가 움직인다면 그때처럼 신이 다시 선택권을 줄지도 모른다고 플로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면 그때와 같이 선택을 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신이 다시 한 번 저희에게 기회를 줄 거라고 떠들고 있지. 솔직히 그런 기회가 또 올 거라는 생각을 한다니 멍청해서 말도 안 나오지만…. 그 이야기에 감화된 자들이 벌써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어.”

플로나는 박민후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선지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후야.”

징그럽게 갑자기 다정하게 불러 젖히는 플로나 때문에 박민후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저도 모르게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팍 들었다.

“그들은 너를 상정해 두고 그런 막무가내인 계획을 세운 거야. 자기들이 무슨 사고를 치든 세상이 다시 멸망을 향해 가도 네가 존재하는 한 네가….”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세상을 구할 테니까.”

박민후는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침착한 머릿속과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다른 이에게 그 말을 확인당하니 미친 듯이 속이 뒤틀렸다. 토할 것 같았다. 멋대로 저를 재단하고 이용하려 드는 인간들의 행동이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도 저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지독히도 끔찍했다.

아, 그렇겠지. 자신은 살고 싶을 테니까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그들의 의도대로 또다시 세상을 구하고 말겠지. 그렇게까지 하며 살고 싶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모르겠다고 하겠다. 살아온 이유가, 살아오며 한 행동이 그저 살고자 하는 갈망에서 시작되었기에 그저 본능에 충실한 것뿐이라는 변명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죽고 싶고 그냥 모두 다 포기하고 사라지고 싶은데, 막상 죽음을 목 앞에 두면 살고 싶더라. 인간은 그렇더라. 끔찍하게도 그렇게 변심하고 후회를 하더라.

박민후는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겠지. 변하고 싶은데 그게 참 안 되더라.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인간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도 아직은 인간이구나 안심이 되더라, 우습기 그지없게도.

아,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이제 제가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플로나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김세현이 입을 열었다. 박민후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란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다른 길드들은 당신에게 이야기하기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게 제가 플로나 헌터와 함께 이 자리에 있는 이유랍니다.”

“맞아. 미스토어는 너한테 알리자고 예전부터 말해 왔어.”

플로나가 김세현의 말을 거들며 알프하에게 다가섰다. 슬슬 끝을 낼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보스를 잡으면 던전은 일시적으로 무너진다. 안에 얼마나 몬스터가 남아 있든 말든 보스만 잡으면 던전은 클리어 되기 때문이다.

“박민후 헌터. 당신이 계속 우리와의 대화를 거부했기에 이제야 제대로 이야기하는군요.”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놈들 변명 따위….”

“우리가 마음에 안 들겠죠. 이해합니다. 하나 저희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우리라고 어찌 고민하지 않았겠나요. 그렇게 하고 싶다고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나요. 그렇잖아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요. 몬스터도 각성자도 없는 세계라는 건….”

말을 멈춘 김세현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체념이 섞인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꿈같은 이야기죠.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낙원 같은 이야기예요.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봐야 했죠. 미지의 낙원보단 현상 유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박민후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저는 5년 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이 세계는 이미 몬스터와 각성자 없이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세상이었으니까요. 한순간에 그 모든 게 사라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음식이며, 생활용품이며, 우리가 쓰는 그 모든 것들이 마나의 도움을 받죠.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이용했고요. 그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해 봐도 알 수 있지요.”

안다. 박민후도 잘 알고 있었다. 5년 전 어느 정도 세상을 보았기에 그도 잘 알았다.

“복구의 힘이 없이는 무너진 건물들을 복구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힐러가 없다면 다친 사람은 치료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을 테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되어 빠르게 사상자가 계속 나왔겠죠. 한순간에 힘을 잃은 각성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김세현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당연하다는 듯 다루던 힘이 사라진 인간은 허탈함과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제 힘에 취해 살던 인간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이야기죠. 아시잖아요. 마나 저주를 받은 인간의 결말을. 아마 대부분의, 특히 높은 등급의 헌터들은 그 공허함에 허덕이다 자멸할 겁니다. 아니면 그렇네요. 그런 인간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이 되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자포자기를 할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평화에 물든 일반인들은? 이번에는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상은 결국 멸망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박민후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우리의 선조를 기억해. 그들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싸웠고 살아남았고 개척했어.”

“아니죠. 그들은 싸움 끝에 모든 걸 손에 넣었으니 우리와는 상황이 다르지요. 우리는 싸움 끝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신도 그걸 잘 알기에 우리의 선택이 못마땅하면서도 넘어가 준 것이 아니었습니까?”

“…….”

그랬다. 박민후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 못 하진 않았다.

“그거 아시나요? 우리의 선택을 가장 먼저 지지한 것이 일반인들이었다는 것을. 오히려 헌터들이 반대를 표명했지요. 그들은 언제나 생사를 넘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일반인들은 아니었죠. 그들도 분명 몬스터가 무섭고 없어지면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을 거예요.”

…다만 그 순간에는 모든 것에 지쳐서 다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당장의 현실만이 중요했다.

“다만 보호받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아왔어요. 헌터들이 던전을 돌면서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얻은 보상을 당연하게 자기들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너무 오래전부터 그런 식으로 생활 기반이 굴러갔으니까요. 기업은 부산물들을 사들이고 시공을 들여 튼튼한 건물을 지었죠. 동력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원망했다. 이해는 그다음이었다. 이해했으나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도 마나를 사용해요. 휴대폰을 충전할 때조차 당연히 마나 에너지를 쓰지요. 마나를, 마석을 동력원으로 삼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굴러가고 있어요. 하니 그것이 없다는 불편함을 그들은 견디지 못한 겁니다. 그 편한 걸 다 빼앗기는 현실을 상상조차 못 하겠죠.”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결국 이렇게 될 거면 저는 뭘 위해….

“우리는 대비를 잘못했어요. 멸망을 대비할 게 아니라 몬스터도 각성자도 없이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다졌어야 했지요.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한순간에 그것들이 사라질 것이란 생각을 어느 순간부터 안 한 겁니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면서 연구를 멈추었지요. 대비가 되어 있었다면 저도 이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많은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겠지요. 몬스터? 없어져도 상관없겠죠. 각성자. 그래요, 이 절대적인 힘이 아쉽긴 하겠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겁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이, 그 터전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존재할 테니까요.”

쉬지 않고 긴말을 내뱉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상대가 박민후였기에 김세현은 꽤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김세현이 말을 끝마치자 그것을 신호라 정해 두었는지 플로나는 알프하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갔다.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이었다. 그 직후 던전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프하의 시체가 재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그 자리에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끝이 났다. 이야기의 마무리만 지으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김세현은 박민후에게 확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 저희도 미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어쩌고 싶죠?”

“어쩌고 싶냐고?”

박민후는 그 말에 반발심이 들었다. 어쩌고 싶냐고?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어쩌고 싶은지 알면 너희가 내버려 두긴 할 거고?

“난.”

무언가 울컥하고 치솟았다. 목 안이 뜨거워졌다. 목소리가 떨렸다.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 뭘 얼마나 더 하라고, 나보고 뭘 얼마나 더 하라는 건데? 난 할 만큼 했어. 너희끼리… 세계를 구하든 망하게 하든 마음대로 해.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그건 악에 받친 비명이었다. 애원 같기도 했다. 세상의 정점에 선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 좀 내버려 두라고. 나는 할 만큼 했다고. 난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선택을 강요받고 의지를 배반당하고 그렇게 또 그렇게 또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내가 왜? 내가 왜…!!”

대체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 건데…?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끝을 준비해야겠군요.”

그 순간 박민후는 저 말이 저 목소리가 저를 힐난하는 거 같다고 느꼈다. 왜 네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외면하냐고, 너의 본분을 왜 무시하려 드냐고, 그런 착각이 들었다. 세상이 저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뒷걸음질 쳤다. 이윽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제 등 뒤에서 김세현의 말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당신이 우리를 저버려도 우리는 마지막까진 힘을 내 보겠지요. 아쉽네요. 그 고생을 했으나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다니. 우습고 부끄럽습니다. 뭘 위한 선택이었나….”

***

던전을 빠져나오자 온 세상이 울고 있었다. 추적추적 빗물이 그의 뺨을 때렸다. 습한 기운이 세상에 가득 내리깔렸다. 해가 떠 있는 것 같았지만 먹구름 때문에 세상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박민후는 도망치듯 뛰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온 세상이 자신을 비난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저를 비난하지 않는데 대체 누가. 누가 저를 비난하고 있냔 말이다.

너는 세상을 구해야 해.

무언가, 박민후 안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이를 악물고 박민후는 빗속을 뛰었다. 빗줄기가 점점 강해졌다. 지금 당장 이수현이 보고 싶었다.

이수현.

언젠가 황혼 속에서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가 웃으며 제게 알려 준 마법의 주문을 생각한다. 그것은 박민후에게 각인처럼 새겨졌다. 이따금 생각했다. 그처럼 생각해 보기 위해, 나도 너처럼 생각하고 싶었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고….

‘그럴 수도 있지.’

그 얼마나 달콤하고 잔인한 말인가.

겨우 그 한마디에 자신의 삶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나의 노력을, 나의 고통을, 나의 원한을, 나의 증오를…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말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도 조금은 더 살만할 텐데…. 모든 것을 태연하게 여기며 현실을 마주할 텐데. 그런데 난 그러질 못하겠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되질 않아. 그렇기에 미치도록 이수현 네가 보고 싶었다.

빗물이 뚝뚝 흘러 박민후가 서 있는 자리에 고여 웅덩이를 만들었다. 익숙하게 손에 익어 버린 비밀번호를 누르고 그가 있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수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칠게 신발을 벗어 던지며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박민후가 가는 길목마다 빗물이 흔적을 남겼다.

“이수현, 어디 있어?”

아무리 불러 보아도 집 안은 고요했다. 베란다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소리만이 갈수록 심해질 뿐이었다. 벌컥 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텅 빈 집 안을 보자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박민후는 뒷걸음질 쳤다. 현관으로 빠르게 발을 돌려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신발을 제대로 신을 겨를도 없어 그는 맨발로 뛰었다.

차디찬 가을비가 그의 체온을 빠르게 빼앗았다. 감기에 걸릴 일은 없겠지만 한기가 들어차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박민후는 장대비 속을 그렇게 또다시 정처 없이 뛰었다. 거센 빗줄기는 이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센 빗줄기가 물안개를 만들며 시야를 가렸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았다. 박민후는 기어코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발이 가는 곳으로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무작정 뛰었다.

풍랑 속에 떠 있는 배처럼 박민후는 빗속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시간 감각은 어느새 무뎌지고 사라졌다.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줄기가 머리를 흠뻑 적시고 옷에 스며들어 살에 들러붙었다. 맨발을 옭아매는 물은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찰박 하고 밟히는 물웅덩이가 진득하게 발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그대로 침몰하고 싶었다. 심연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 목소리는 저를 뒤흔들고 옭아매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고 바다 깊은 곳으로 스스로 기어들어 가는 뱃사람처럼. 박민후도 심연의 아래로 아래로 처박혀서 그저 어둠에 휩싸여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럼 다 끝나겠지. 빛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독한 어둠에 빠져 눈을 감고 싶었다.

“박민후 헌터?”

그러지 못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은 그를 불안하게 했고, 또 기쁘게 했다. 쏴아아 하고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그렇게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시야 속에 붉은 우산이 들어왔다. 장대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수현을 보자 박민후는 제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한 손에는 비닐 봉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잠시 편의점이라도 들른 모양새였다. 그가 한 발 더 박민후에게 다가왔다. 간지럽게 자신을 때리던 빗줄기를 막아 주기 위해 이수현이 우산을 조금 더 높이 들며 성큼 다가왔다. 빗물이 눈물인 양 고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망막 가득 이수현이 들어찼다.

“왜 비 맞고 있어요.”

걱정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하게 들려, 박민후는 때로는 다정함이란 게 저를 질식시켜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디 갔었어.”

“도시락 사러 편의점에.”

그렇게 말하며 봉투를 든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 태평한 모습에 박민후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눈은 울 것처럼 일그러졌는데 입은 웃음이 나왔다.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그럴 리가요. 박민후 헌터가 남겨 둔 애들이 있잖아요. 지금도 데리고 있는걸요.”

봐요. 그렇게 말하며 이수현이 목 끝까지 잠가둔 겉옷 지퍼를 내렸다. 그러자 검고 작은 개 두 마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박민후는 결국 소리 내서 웃었다. 어깨까지 들썩였다. 이수현과 있을 때 느껴지는 이 평화로움이, 그 태평함이 너무나 좋았다. 때때로 짜증 나기도 했지만, 그것이 이수현의 본질이기에 그것이 너무나 좋았다.

장대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 그가 쓰고 있던 우산은 성인 두 명이 쓰기엔 작아 비를 전부 막아 주지 못했다. 이수현은 이상한 데서 다정해서, 이미 박민후가 다 젖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박민후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덕분의 본인의 어깨와 등은 이미 흠뻑 젖어 버린 뒤였다. 그걸 인지한 박민후는 우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바스락거리는 봉투 소리와 함께 제 뺨에 닿는 체온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손을 들어 박민후의 뺨을 문질렀다. 빗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던 뺨이었다.

너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겠지만, 너는 그저 내게로 떨어지는 빗물 때문에 닦아 준 걸 테지만…. 난 그 작은 행동에 주책맞게도 설렜어, 가슴이 지끈거렸지.

그래서 박민후는 저도 모르게 그 손에 뺨을 비볐다. 이수현이 움찔거리며 금방 손을 떼 버렸지만.

“…집에 갈까요?”

“응.”

이 순간 박민후는 이수현이 이 빌어먹을 세상에 살아 숨 쉰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기에 자신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못할 거란 것 또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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