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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1 (11/12)

외전 01

고요한 새벽. 안호연은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뜨끈한 공기와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보이지 않은 강중영의 페로몬 때문에 잠을 깊게 잘 수 없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곧 히트사이클 주기이다.

막 일어난 안호연은 꺼진 휴대폰과 충전기의 잭을 연결했다. 전원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휴대폰 전원이 나가 있는 동안 수많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였다.

[만나. 만나서 이야기해.]

[아직 우리 할 이야기가 많잖아. 이렇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우리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

수신인은 태범석이다. 아무리 수신 차단을 해도 태범석은 새로운 번호로 문자를 보내 막을 수가 없었다. 안호연은 느릿하게 숨을 내쉬곤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댔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안호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미 연민마저도 사라져 버린 안호연은 그가 달갑지 않아 문자를 모조리 삭제했다. 삭제할 때마다 손끝이 아렸다. 여전히 다솜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태범석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젠 속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서 다솜을 숨기며 능한 거짓말을 하며 희망 고문을 할 테다. 그는 능한 사기꾼이었고 사기꾼에게 속지 않으려면 귀와 눈을 닫고 사기꾼을 멀리해야 했다. 그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막 새벽이 끝나가는 시각이나 겨울이라 빛이 흐릿했다. 그 속을 헤치고 안호연은 정돈된 부엌과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사랑문이 붙은 냉장고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곤 물기 하나 없는 욕실, 옷들이 빼곡하게 들어간 드레스룸을 둘러보았다. 손으로 하나하나 훑은 안호연의 종착역은 늘 강중영이었지만, 오늘은 어째선지 이끌리듯 창가로 향했다.

어두운 안과 달리 창밖은 파랬다. 어둠과 파란, 두 가지 색이 섞인 가시광선으로 밝힌 밖은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창 사이를 두고 확연하게 다른 온도 차로 인해 창에 습기가 어렸다. 안호연의 시선이 닿는 나뭇가지와 빗자루에 하얀 눈꽃이 피었다. 만지지 않았는데도 바깥 온도가 그대로 전해 와 안호연의 어깨가 오싹했다.

오싹함을 떨치기 위해 어깨를 튕긴 안호연은 따듯한 차를 우려 와 바깥을 내다보았다. 목에서 시작한 따듯함이 입 안에서 가슴으로 퍼져 나갔다. 그 따뜻함을 느끼며 안호연은 눈으로 눈꽃이 핀 나무를 훑었다. 강중영의 집은 무서우리만큼 변함이 없었다. 정원에 놓여 있던 물건들의 위치까지 전부 똑같은데도, 한적하고 위기 없는 조용한 아침인데도 안호연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쫓겼다. 그 불안함이 시작된 곳은 강중영이다.

“뭐 해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안호연은 고개를 돌렸다. 강중영이다. 강중영이 큰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아직 졸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이 안호연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졸음 속에서도 그의 시선이 단호했다. 안호연의 안녕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속속히 알아내겠다는 듯,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안호연에게 따라붙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을수록 위기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가 갑자기 사라질까 봐 애가 탔다. 아마 이 마음은 그와 함께한 순간부터 줄곧 따라다닐 테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더더욱.

물음에도 안호연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강중영은 멍하니 서 있는 안호연에게 다가왔다. 안호연과 강중영이 새로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으나 자신이 마치 이 집의 이물질처럼 느껴졌다. 그는 안호연에게 족쇄를 채우지 않았다. 이 변함없는 집에, 족쇄가 없는 안호연을 홀로 돌아다니게 했다. 그건 무참히도 그의 원칙을 깨는 일이었다. 왜 족쇄를 채우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안호연은 차마 묻지 못했다, 침을 꼴깍 삼키고 그를 눈으로 훑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안호연의 손끝을 강중영이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뭘 보고 있었어요?”

강중영의 눈은 안호연이 보고 있던 것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슥 창밖을 훑던 눈이 안호연의 정수리에 꽂히는 동안에도 안호연의 시선은 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숨을 가다듬고 손가락으로 정리하지 못한 얼굴을 문댔다.

“밖. 예전에도 느꼈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서 봤어.”

“바뀌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 자리에 그게 있어야 해요. 어떤 형태로든요.”

“그래서 나도 못 바꿨어?”

“그건 다르죠. 바꾸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안 바꿨어요. 이렇게 좋은데 왜 바꿔요?”

따듯한 팔이 안호연의 뒷목을 감싸자, 놀라 어깨가 위로 튀었다. 안호연은 그제야 강중영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서늘했던 남자의 눈이 휘어졌다.

“이제야 보네. 밖을 구경하는 게 더 좋은 줄 알았는데요.”

서운한 목소리에 안호연은 시선을 곧바로 돌렸다.

“아냐.”

안호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중영은 고개를 숙여 안호연이 마시던 머그 컵에 입술을 대자 안호연은 얼른 컵을 기울였다. 차로 목을 축인 그는 안호연의 뒷목에 이마를 묻었다. 뺨으로 뒷목의 여린 살을 살살 비비더니 그가 코로 냄새를 흡입했다. 숨결이 지나가는 뒷목이 간지러워 안호연은 목을 움츠렸다.

“아침마다 왜 집을 배회하고 다니는 거예요?”

“알고 있었어?”

자는 줄 알았던 그가 깨어 있었단 말을 듣고 안호연은 눈은 동그랗게 떴다. 늘 침대로 돌아갈 때마다 그는 숨소리를 죽이며 자고 있었다. 어째서 그가 기척조차 없었는지 궁금했다.

“모를 리가요. 눈을 감고 침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죠.”

“자는 줄 알았는데.”

“소리 없이 호연 씨가 누울 때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질러요. 아, 내 사람이 돌아왔구나. 떠나지 않구나. 매일 이별이고 만나길, 그걸 무수히 반복하고 이 과정이 익숙해지길 기다리고 있죠. 매일 침대 속에서 제 인내심을 시험해요.”

강중영은 매일 아침 자신을 시험했고 안호연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기이했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 시험을 하는데?”

그건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라는 듯 그의 말끝이 길어졌다. 강중영의 눈동자가 미동 없이 멈췄다가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뗐다.

“호연 씨를 믿으니까요.”

안호연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자신의 불안이 시작된 곳은 강중영이 아닌 자신이었다. 그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불안한 자신을 강중영은 믿음으로 기다려 주고 있었다.

“내게 돌아올 거라고 믿어서요. 믿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어요.”

“안 도망가. 난 오히려 네가 도망갈까 봐 걱정이야.”

“쓸데없는 걱정.”

“내가 널 많이 좋아하나 봐.”

“호연 씨가 절 좋아하는 것보다 내 사랑이 더 클걸요.”

그가 단단한 팔을 안호연의 허리에 둘렀다.

“그럼 당신이 도망가게 된다면 내 마음대로 해도 돼요?”

“어떻게?”

“다리를 부러트린다거나 아니면 이 집에 가둔다거나.”

“마음대로 해. 그럴 일 없어.”

“좋아요. 이렇게 기다리는 건 마지막이에요.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상냥했던 강중영은 없어요.”

그의 입매가 서늘했다. 냉랭한 입술에서 나온 경고는 오히려 안호연의 가슴에 달라붙어 불안감이 해소되었다. 강중영이 자신에게 집착할수록 안호연은 안도감을 느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

“오늘 데이트할래요?”

안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밖에 나간 지 꽤 됐잖아요.”

안호연과 강중영은 그날 이후로 집에만 있었다. 하루는 같은 침대에 잠만 잤고 이튿날은 같이 요리를 했으며 셋째 날은 볕이 잘 드는 소파에 앉아 같이 영화를 보았다. 세상에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둘이서 지냈다. 친구처럼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가 연인이 되어 달콤한 말을 속삭이기도 했다.

“데이트한 지 꽤 오래됐네요. 그때 포장마차 이후로 어딜 가 본 적 없잖아요.”

“그러네.”

“그때 알탕 기억해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호연은 번쩍 드는 생각에 그의 몸을 돌려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쥐었다. 실내 포장마차에서 돌아온 날 그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화상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 손바닥에 이제는 아물어 버린 짙은 색의 흉이 남아 있었다. 안호연은 이맛살을 구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강중영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흉 남았네.”

“괜찮아요. 이젠 아프지 않아요.”

“병원엔 갔었고?”

“오래된 일이라 기억 안 나요. 갔던 것도 같고 가지 않았던 것도 같아요.”

“그렇게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기억이 안 나.”

“그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보다 알탕 만드는 법 배웠으니까 먹고 싶으면 말해요. 해 줄게요.”

그가 갑작스럽게 말을 우회했다.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흉으로 아물었다고 할지라도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안호연은 느슨하게 웃는 그를 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웃는 걸 보자 마음이 허물어졌다. 안호연은 그의 손바닥에 코를 박고 비볐다. 다른 피부보다 단단한 살갗이 코에 닿았다.

“기억나요?”

“뭐가?”

“그때 내기에 이겨서 빌고 싶었던 소원이 뭐였어요?”

코를 비비던 안호연은 갑자기 멈췄다. 그때 생각해 두었던 소원이 있었다. 소원이 또렷하게 기억나자 안호연의 뺨이 붉어졌다.

“말하기 싫어.”

그때 안호연은 딱 한 번 그와 자고 싶었다. 아련하게 기억나는 그의 체취를 맡고자 했다. 관계를 맺을 때면 더 짙어지는 그의 페로몬을 맡고 싶었다. 또 자신에게 줄을 긋는 강중영의 선을 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근질거리고 뜨거워 그와 자 보고 싶은 욕구가 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몸과 마음은 온전히 강중영을 향해 있었다. 안호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소원이 뭐였는데요?”

은근한 목소리로 강중영이 물었다.

“별거 아니었어.”

“그래요?”

“응.”

뭉툭한 손가락이 안호연의 뺨을 찔렀다. 강중영의 손가락이었다. 그는 손가락에 힘주어 안호연의 뺨에 깊은 보조개를 만들었다. 콕콕 손가락으로 여러 번 누르던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얄미운 미소를 짓자 안호연은 그의 손가락을 밀어냈다.

“별거 아니라면서 뺨은 왜 붉은데요?”

“진짜 별거 아니야.”

“나도 알려 줘요. 안호연 씨 소원이 뭔지 궁금하니까.”

강중영은 이번엔 안호연의 입술 근처에 귀를 가져다 댔다. 모양 좋은 귀를 물끄러미 보던 안호연은 고개를 틀었다.

“뭔데 안 알려 주는 거예요? 말 못 할 소원이 뭔데요?”

집요한 물음에 안호연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강중영의 얼굴에 대고 그 소원이 ‘너와 자고 싶다’는 거였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태 안호연과 강중영은 거기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짙은 애무는 해도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후 섹스를 한 적 없다. 틈만 나면 키스하고 만지고 살을 매만지지만 딱 거기까지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에게 괜한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또 그에게 쉬운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았다.

“뭔데 그래요? 궁금하게.”

“그걸 꼭 알고 싶어?”

“내가 몰라야 하는 것도 있어요?”

“…….”

“이러니까 더 궁금하네. 뭔데 숨겨요?”

강중영의 입술이 근처에서 대답을 강요했다.

“좀 화나는데요?”

“…….”

“호연아, 너 정말 말 안 할 거야?”

자꾸 재촉해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안호연.”

그가 단호하게 묻자 눈을 꼭 감은 안호연은 가까이에서 강요하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볍게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그가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강렬한 시선이 닿는 이마가 뜨거워 안호연은 괜스레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댔다.

“나중에 알려 줄게.”

“이번은 참을게요. 언젠가 알려 준다고 했으니까. 은근슬쩍 다른 소원으로 바꾸지 마요. 처음 빌려고 했던 소원으로 말해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른 소원을 말해도 안호연이 속으로 생각한 소원을 강중영이 알 방도가 없다. 어물쩍 넘어가면 그만이다. 강중영이 팔을 풀어 주자 안호연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저한테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바꾸기 없어요.”

안호연은 어색한 미소를 띠며 손바닥으로 턱을 문댔다. 돌려 말하지 못한다면 죽을 때까지 그 소원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 갈 곳 있어요.”

“어디?”

“호연 씨가 가고 싶었던 곳이요.”

“내가 가고 싶었던 곳?”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던가. 안호연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후에 드라이브 가요. 그보다 안 졸려요?”

안호연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덮었다. 졸리느냐고 묻자 눈가가 무거워졌다. 몇 시간 잤는지 속으로 셈을 해 보았다. 여섯 시간. 사람의 기준에 따라 적당하다면 적당한 시간이었으나 잠이 많은 안호연에겐 부족했다. 잠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자 갑작스럽게 졸음이 쏟아졌다. 안호연이 눈을 비비는 도중 한쪽 팔이 끌렸다. 끌려가는 도중에도 안호연은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침실로 간 강중영은 이불을 집어 올렸다. 아늑해 보이는 이불 속으로 안호연은 몸을 밀어 넣었다. 가벼운 이불이 몸을 감싸고 사랑하는 연인도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아, 행복하다.

안호연은 작게 속삭였다. 수많은 불안과 걱정이 공존하는데도 그 모든 걸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이 순간이 행복했다.

“행복해.”

“얼마나요?”

“네가 날 사랑하는 만큼. 네가 날 사랑해 주면 해 줄수록 더 행복해. 그게 가늠이 돼?”

“어느 정돈지 알겠어요.”

강중영은 손바닥으로 눈을 감겼다.

“자요.”

잠이 쏟아졌다.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누군가가 안호연의 몸을 흔들었다. 만약 강중영이 깨우지 않았다면 안호연은 정오가 한참 지나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침대 속이 아늑했다. 수면을 방해받은 안호연은 망설임 없이 눈을 떴다. 꿈속보다는 현실이 좋았다.

“이제 일어나야죠. 오늘 드라이브 가기로 했잖아요. 더 잤다가는 못 가요.”

“어딜 가는데?”

“좀 먼 곳이에요.”

자는 동안 늘어진 몸을 기지개로 풀어 주었다. 그는 안호연을 물끄러미 보더니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강아지처럼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던 안호연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오늘도 강중영은 출근하지 않았다. 같이 있어 좋으나 근 일주일간 그가 집에 있는 동안 안호연은 살짝 걱정됐다. 박연우에게 모든 걸 주고 관망 중인 거 아닌지 걱정돼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돈이 없어 벌금을 내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가 유지하는 집과 차를 보자 살짝 겁이 났다.

“진짜 백수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옷을 고르던 강중영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걱정됐어요? 이제야?”

“오래도록 출근을 안 하니까. 너 좀 바빴잖아. 나 때문에 돈을 탕진했나 걱정돼서.”

“보기 좋게 거지가 됐죠. 그래서 좋잖아요. 매일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하루 이틀이지.”

그제야 현실적인 문제들이 안호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장 들어갈 생활비라든가 기타 경비들이 떠오르자 한가하게 드라이브를 하기보단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더구나 강중영이 소비하는 돈도 무시무시했다.

“걱정돼요?”

“아무래도.”

“걱정 마요, 휴가 중이에요. 앞으로 사흘 정도 남았어요.”

“왜?”

“그러잖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곧 러트 기간이거든요. 기간에 맞춰 휴가 냈어요.”

러트라는 단어에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유난히 요 며칠간 그의 체취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건 자신의 히트사이클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러트 기간에는 따로 지내야 할 거 같아요. 호연 씨, 집에 잠시 가 있어요. 끝나면 연락할게요.”

“왜?”

강중영은 각인한 알파였다. 각인한 오메가를 두고 혼자서 러트 기간을 보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걸 그가 자처한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호연 씨와 있다간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르잖아요. 러트 때 호연 씨를 옆에 두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 같으니까 절 가둬야죠.”

“왜.”

“아직까진 딩크족으로 머물고 싶어요. 아이는 갖지 않을 생각이에요.”

“뭐?”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그것도 오래. 누구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안호연은 코를 찡긋거렸다. 아이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은 영역인데 그는 그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동의해요?”

침을 삼켰다. 욕심 같아서는 그를 닮은 예쁜 아이가 탐이 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 두려웠다. 또 그런 일이 반복될까 봐. 안호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강중영은 안호연의 머리를 흩트리곤 일어섰다.

“일어나서 나갈 준비 해요.”

그가 드레스룸으로 사라진 사이 안호연은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가볍게 씻고 나온 안호연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들고 있던 옷을 이리저리 대 보았다. 족쇄를 채우지 않을 뿐이지 강중영의 패턴은 똑같았다. 옷을 고르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였다.

“왜 족쇄를 채우지 않는데?”

바지를 고르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더 좋은 거로 채우고 싶어서요.”

“더 좋은 게 뭔데.”

그는 대답 대신 골라 놓은 옷을 내밀었다.

“이거 입어요.”

그는 얄밉게 대답을 피하곤 밖으로 나갔다. 방에 옷과 안호연이 남았다. 고른 옷은 유난히 깔끔했다. 새 옷 냄새가 날 정도로 깨끗했고 각이 잡혀 있었다. 옷 앞뒤로 살펴보던 안호연은 코를 박았다.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직 물기가 남은 몸에 옷을 걸쳤다. 옷을 언제 준비해 놓은 건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안호연의 몸에 꼭 맞았다.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자 강중영은 외투를 들고 있다가 안호연의 몸에 둘러 주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이렇게 재촉하는지 궁금했다.

“어디 가는데?”

“가 보면 알아요.”

안호연은 눈을 깜박이며 구두를 신는 그를 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발을 구두에 밀어 넣은 그가 안호연의 신발을 신기 좋게 돌렸다. 안호연은 얼른 신발에 발을 넣었다. 

볼을 때리는 바람이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워 몸을 움츠렸다. 어깨를 구기며 고개를 숙인 안호연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세차게 몸을 때리던 바람이 멈췄다. 고개를 들자 단단한 등이 보였다.

“춥네요.”

“겨울이니까 춥지.”

당연한 말을 하는 강중영에게 타박을 했다. 그는 대꾸 없이 차를 탔고 안호연도 그 뒤를 따라 탔다. 큰 몸을 구부린 강중영이 무언가를 누르자 차가웠던 내부로 히터 바람이 가득 찼다. 건조한 바람에 뺨이 버석거렸다.

“어디 가는지 안 알려 줄 거지?”

“이제 운전하니까 쉿.”

끝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를 알려 주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강중영이 침묵하자 안호연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굳이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닦달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지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새벽마다 문자가 오던데요. 누구예요?”

안호연은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조금 서늘한 눈과 마주치자 괜스레 입술이 바싹 말랐다.

“태범석.”

“그래요.”

그는 연락을 왜 했는지 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단답형의 대답을 했다. 싸한 분위기가 차 내부에 흘렀다.

“번호를 안 바꿨더니 계속 연락이 와. 차단해도 다른 번호로 연락해서 이번에 번호를 바꾸려고.”

강중영이 오해하지 않기 바라며 안호연은 변명하듯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변명이어도 안호연이 꺼낸 말은 진실이었다. 잠깐 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단하게 다물어진 강중영의 입술에 긴장해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그의 눈동자가 안호연 쪽으로 움직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그의 웃음으로 느슨해졌다. 그다음에 드는 감정은 당황이었다.

“화났을까 봐 겁났어, 호연아?”

그는 핸들에 두 팔을 올리고 물었다.

“이런 일로 오해 사는 건 싫어.”

“오해 안 해요. 거짓말한 것도 아니잖아요. 숨기면 그때부터가 문제지.”

“만약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

“했다면 족쇄를 채웠을 텐데 안 했으니까 상 줄게요.”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으로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쫓아내진 못할망정 족쇄를 채우겠다니, 안호연으로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족쇄는 소유를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 안호연에게 족쇄를 채운다니, 그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해야 했던 거야?”

“왜 말이 그렇게 돼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야.”

“족쇄 채워 주는 게 좋으니까. 왜 족쇄를 안 채워 주는데?”

“오해할까 봐.”

“무슨 오해?”

“호연 씨가 예전에 그랬잖아요. 내가 족쇄를 찬 사람만 좋아한다고. 호연 씨는 제외라는 거 알려 주고 싶었어요.”

“족쇄 안 채우면 불안하지 않아? 난 불안해.”

“조금만 기다려요. 더 좋은 족쇄를 줄 테니까.”

“언제까지?”

“앞으로 5시간 후에 줄게요. 마음껏 기대하고 있어요.”

그가 슬쩍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시간을 보고는 속삭이더니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게 뭔데? 선물도 비밀, 가는 곳도 비밀. 누가 보면 이벤트 하는 줄 알겠…….”

안호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마구잡이로 떠들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선물을 준다고 그랬고 알려 주지 않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이벤트?”

“눈치 없게.”

강중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도 모르는 척. 오늘 고백하러 가니까 조용히 기다려요.”

“무드 없게 그걸 알려 주냐. 아니라고 잡아떼야지.”

“그럼 내일 해요?”

“아니.”

진짜 무드 없게, 고백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조금 웃음이 났다. 강중영이 귀여워 보이고 가슴이 간지러웠다. 웃음이 나올 거 같아 안호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차가 움직였다. 안호연은 차 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새벽엔 유난히 차가웠던 풍경이 지금은 햇빛에 따듯해 보였다. 그리고 햇빛에 녹은 도시가 비추는 창으로 강중영의 옆모습이 스며들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서른 중반인 그가 오늘따라 유난히 젊어 보였다. 평소엔 그는 평범한 강중영이었는데 오늘따라 색다르게 느껴졌다. 긴 가드레일이 이러지는 고속도로로 진입했을 때가 돼서야 안호연은 창문에 비친 남자를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살점이 거의 없는 반듯한 턱 선과 적당히 두툼한 입술이 탐스러웠다. 특히 반듯한 코를 보니 새삼 강중영도 잘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러트라 그런지 평소의 그와 달리 묘했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에 자리 잡은 강중영의 눈이 안호연 쪽으로 움직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갑자기 심장이 멈췄다.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묻는 얼굴을 보자 갑자기 볼에 열이 올라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왜 피해요?”

시선이 마주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두근거려서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까 기대하라던 강중영의 말 때문인지, 페로몬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의 사소한 말, 행동, 숨소리까지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모르겠어.”

“본인 마음을 본인이 모르는 건 이상하네요.”

“갑자기.”

“갑자기?”

“네가 크게 다가왔어.”

“크다뇨? 전 평소와 똑같은데.”

“굉장히 자극적이고 두근거려.”

손바닥으로 심장 부근을 찍어 눌렀다.

“러트 기간이라 그런가.”

그가 웅얼거렸다. 러트 중인 알파에게 오메가가 약한 건 맞으나 그 이유는 아니다. 러트인 알파에게서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어쩌냐.”

“뭐가요?”

“반했나 봐.”

말로 뱉고 나니 창피함이 밀려와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강중영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는 안 반했고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모르겠다는 말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런 뭔데요?”

“모르겠으니까 묻지 마.”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듯이 안호연은 몸을 틀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차가 한적한 어딘가에 멈춰 설 때까지도 열이 나는 마음이 식지 않았다.

똑똑.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강중영이 차창을 두드렸다. 안호연이 고개를 들자 얼른 나오라고 손짓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열고 내렸다. 조금은 한적한 곳이었다.

“고백하기 5분 전인데 어때요?”

“그런 말 하지 마.”

일반적인 상식으로 사귀는 사람에게 하는 고백은 청혼이었다. 청혼을 위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모르겠으나 안호연은 굉장히 떨렸다.

“하나만 약속해요.”

“뭐?”

“모두 용서해 주겠다고.”

“뭘 잘못했는데?”

“가면 알아요.”

안호연은 그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작은 비탈길을 올랐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길이 잘 닦여 있었다. 강중영은 그 길을 익숙하게 올라가더니 허리까지 오는 작은 나무 앞에 섰다. 가녀리고 작은 나무는 추워 보였으나 노란 지푸라기 옷을 둘러쓰고 있었다.

“딸기예요.”

안호연은 그를 보았다.

“딸기라고요.”

“무슨 말이야?”

“제가 데리고 왔었어요.”

안호연은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태범석이 딸기를 화장한 날 데려왔어요. 딸기마저 뺏기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거든요. 어쩌면 호연 씨에게 복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순간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바람이 닿았다. 믿을 수 없는 시선으로 안호연은 나무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화장한 딸기를 묻고 다음 해 봄엔 외롭지 말라고 나무를 심어 줬어요.”

“어떻게.”

“근데 이젠 호연 씨가 내 곁으로 돌아왔으니까 알려 주는 거예요. 태범석에겐 딸기가 없어요.”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안호연의 입술에서 조금은 날이 선 말이 튀어나갔다.

“호연 씨는요. 호연 씨는 내게 자세히 무언가 말해 준 적 있어요? 날 떠난 진짜 이유가 뭔지, 날 사랑하는지, 전부 거짓말만 하고 떠났잖아요.”

안호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고 도망간 호연 씨한테 내가 뭘 말해야 하는데요. 그럼 나는 뭐로 위안 삼아야 하는데요? 나도 위안 삼을 곳이 하나쯤 필요했어요. 호연 씨만 부모였어요? 나도 그 아이 부모였어요. 숨죽여서 내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렸고 돌아오길 기다렸어요. 그러면 다 해줄 수 있어요. 전부 다.”

그의 목에 힘줄이 섰다. 힘이 들어간 턱이 움직여 만들어 낸 말은 유난히 빨랐다. 그 말 속에 담긴 분노, 서러움 그 감정들이 섞여 안호연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해?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화를 내야 할까. 아무 갈피도 못 잡겠어. 복잡해.”

“몰라요. 그렇지만 용서받고 싶었어요. 줄곧.”

강중영은 안호연의 손등을 꽉 잡았다. 이제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꼭.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처음에는 배신감에 화가 났다가 조금 차분하게 동전을 뒤집듯 상황을 뒤집어 보면 다행이었다.

“다솜이가 너와 있어서 다행이야.”

강중영이 자신에게 이 사실을 지금껏 숨겨 왔다고 해도 결과적으론 다솜은 자신을 이용하는 태범석보다는 강중영과 함께여서 행복했을 테다.

“용서를 빌 필요 없어. 데리고 있어 줘서 고마워.”

이제야 안호연은 가슴속에 묻어 놨던 시름을 하나 덜었다. 태범석에게 놓고 왔던 다솜이 늘 걱정되었다. 그런데도 참았던 건 더는 이렇게 사는 걸 다솜도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착한 아이는 자신 때문에 안호연이 불행해지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고마워.”

안호연은 늠름한 나무처럼 서 있는 강중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언제나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그라서 다행이라고 안호연은 계속 중얼거렸다. 안호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참 있었다. 한참 고개를 숙인 안호연의 등을 강중영이 두드렸다. 그 두드림이 이제는 괜찮을 거라는, 모두 지나갔다는 위로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가 등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조금씩 뜨겁게 달아올랐던 눈시울이 식었다.

“이게 고백이었어?”

“그럼 뭐라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청혼인 줄 알았다고 말할 수가 없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설마 제가 청혼하려는 줄 알았어요?”

“아니거든.”

안호연이 눈시울을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흔들자, 거의 반사적인 반응에 그가 웃었다. 가자고 몸을 돌리는 강중영과 달리 안호연은 작은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만히 그것을 보다가 손을 흔들었다. 안호연이 손을 흔들자 나무도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다. 자주 올게. 안호연은 조용히 입술을 떼곤 나무를 한번 끌어안아 주고 먼저 돌아선 강중영에게 달려갔다. 저만치 기다리고 있던 그가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안호연은 그에게로 달려갔다.

“인사하고 왔어요?”

“응.”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그는 차에 올라탔다. 그의 차에 올라탄 둘은 느긋하게 차창 밖으로 비치는 노을을 구경했다. 말없이 하늘에 번지는 노을을 보다가 어두워졌을 때쯤 그의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호연은 창에 이마를 박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길을 바라보았다. 한적한 길이 사라지고 도시로 갈 때까지.

“술 마실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뭘 생각해요?”

“아무것도.”

안호연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설지 않은 거리였다. 언젠가 보았던 골목이었다. 사람들이 드문 실내 포장마차가 늘어진 골목이었다. 부실해 보이는 공용주차장 표지판까지.

“그때 거기네.”

“기억나요?”

“응.”

예전에 내기했던 실내포장마차였다.

“소원을 들어 보려면 여기가 좋을 것 같아서요.”

소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오늘 말한다는 말은 안 했어.”

“알아요. 우선 내려요.”

그가 차에서 내려 외관으로 봤을 때 지저분한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손님이 없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자가 흘긋 안호연과 강중영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청년들이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매일 똑같지요.”

건성으로 말하던 남자는 흘긋 안호연을 보았다.

“알탕으로 줘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방인처럼 멀뚱히 서 있는 안호연을 강중영이 끌어당겼다. 몸이 끌려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게 된 안호연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어디 가는데?”

“편의점이요.”

유난히 그의 뺨에 붉은 기가 있었다. 체온이 높은지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안호연은 코를 벌렁거렸다. 은은한 그의 페로몬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괜찮아?”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각인한 상대가 있어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네요. 억제제를 사러 다녀올게요. 여기 앉아 있어요.”

조금 급한 걸음으로 그가 밖으로 나간 사이 안호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공기 중에 미묘하게 남긴 향이 떠다녔다. 그 냄새를 코로 맡자 배가 단단히 뭉쳐, 안호연은 손으로 배를 문댔다.

“몸 좀 치워 봐요.”

버너를 들고 온 남자가 안호연의 몸을 밀었다. 테이블 중앙에 버너를 놓던 남자는 넌지시 안호연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때 화상 입은 건 다 나았대요?”

“누구요?”

“키 큰 청년이요. 여기서 둘이 술 마시다가 손 뎄잖아요.”

“다 나았어요. 어떻게 다쳤는지 보셨어요?”

“취해서 그쪽이 버너 쪽으로 쓰러지려는 거 잡으려다가 그랬지. 청년 아니었으면 그쪽이 크게 다칠 뻔했어.”

순간 안호연은 숨을 멈췄다.

“오늘은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셔요.”

“제가 취했어요?”

“많이 취해서 그 청년이 업고 갔지.”

안호연의 머릿속은 흐릿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가슴이 먹먹했다. 안호연이 내기에서 이겼다며 소원을 쥐여 준 것도, 자신 때문에 손을 다치고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가슴 어딘가를 부쉈다. 한참 멍하니 앉아 있는 안호연에게로 강중영이 걸어왔다. 멀리 있던 그가 점점 다가오자 그가 유난히 커 보였다. 그의 숨에서 달짝지근한 억제제 향이 났다. 강중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물수건을 쥐었다. 그러곤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소원이 있다고 했잖아.”

“그랬죠.”

“오늘 말해도 돼?”

“그게 뭔데요?”

“너랑 자고 싶어.”

“호연 씨.”

“그때부터 쭉 너랑 자고 싶었어.”

“곧 러트예요.”

“싫어?”

“저는 아직 아이도 원하지 않아요. 러트 기간을 같이 보내다 보면 그런 것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 몰라요.”

“그래서 싫으냐고 묻잖아.”

“…….”

“싫어?”

“싫을 수가 있겠어요?”

그가 이로 입술을 뭉개고 바지에서 지갑을 꺼내 주문한 음식을 계산했다. 그는 안호연이 앉아 있는 곳까지 와 안호연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당신이 자초한 일이에요.”

손이 부러질 듯 세게 움켜잡은 그가 차로 달려가 차에 안호연을 밀어 넣었다. 급하게 안전벨트를 맨 그가 핸들을 잡았다가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왜 그래?”

“급해서요. 당장 안고 싶은데, 이젠 안호연도 옆에 있는데 또 참아야 한다는 게 짜증이 나고 열 받아요. 흥분돼서 앞도 잘 안 보여요.”

안호연은 주변을 살폈다. 그런 안호연의 눈에 깔끔한 외관의 모텔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갈래?”

“저런 곳에서 하고 싶지 않아요.”

“찬물 더운물 가릴 정신은 있나 보네.”

강중영은 안호연과 모텔을 번갈아 보더니 ‘젠장’을 외쳤다. 안호연이 차에서 내려 운전석으로 가 주먹으로 차창을 두드렸다.

“그때 생각도 나고 좋잖아. 그땐 취해서 기억 못 했는데 오늘은 기억할게.”

그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안호연의 팔을 잡고 모텔 쪽으로 달렸다. 쫓기는 사람처럼 모텔 입구에 들어선 사람을 무인 자판기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상하게 보았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룸을 선택했다.

2층 룸까지 한달음에 올라간 둘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서로의 옷을 벗겼다. 겨울이라 껴입은 옷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금세 나체가 되었다. 흘깃 강중영의 앞섶을 훑어본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남자의 배에 붉은 상처가 있었다. 오래되지 않은 화상 자국이었다. 안호연은 그곳에 손바닥을 댔다. 다른 곳보다 여린 살에 타인의 손이 닿자 강중영의 피부가 긴장했다.

“여긴 왜 그래?”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가 쏟았어요.”

그의 시선이 안호연의 눈을 피해 비껴갔다. 거짓말. 안호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중영은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아마 그는 영원히 안호연에게 감동할 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안호연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검은 거웃 사이로 많이 참아 붉어진 성기가 하늘로 솟았다. 성기를 손으로 잡자 강중영의 근육이 긴장했다. 그의 숨에서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많이 참았어?”

“엄청.”

“그때 왜 나랑 안 잔다고 했던 거야?”

“먼저 넘어 주기를 바랐어요. 내가 아니라 그쪽이.”

그는 현관 앞에 서 있는 안호연을 둘러메고 침대로 갔다. 부드러운 침대 위에 맨 등이 닿았다. 작은 한숨을 쉰 그가 안호연의 다리를 벌려 다리를 끼워 넣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치겠다.”

“미치겠으면 얼른 들어와.”

안호연이 다리를 더 벌려 주는데도 강중영은 주춤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테이블에 놓인 콘돔을 꺼냈다. 이로 콘돔 껍질을 찢으며 급하게 씌웠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언젠가부터 강중영과 지금의 이 상황을 꿈꿔 왔다. 그가 자신의 몸에 페로몬을 묻히길 바랐다. 능숙하게 성기에 콘돔을 씌운 그가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뭐가 미안하냐고 묻기도 전에 아래 중심에 묵직한 무언가가 닿더니 그의 성기가 닫힌 곳을 뚫고 들어왔다. 짧은 아픔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체취도, 그가 주는 잠깐의 아픔도 모든 게 환희가 되어 다가왔다. 그래서 안호연은 움츠러들지 않고 다리를 더 벌려 그가 깊게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강중영의 성기가 깊숙이 들어왔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그 순간에 도달하자 안호연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원하는 지점에서 성기가 멈추자 안호연은 아래에 힘을 주어 꽉 잡았다.

“씨발.”

강중영이 짧게 욕을 했다.

“고무 때문에 호연 씨를 느낄 수 없어. 깊고 축축한 곳에 닿고 싶어 미치겠는데. 얼마나 뜨거운지 느끼고 싶은데.”

“안 끼면 되잖아.”

“말했잖아요. 아이는 원하지 않는다고. 둘이서 길게 지내고 싶어요.”

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가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뺨을 문댔다.

“조금 더 참아 보고요.”

그 말이 안호연의 서운함을 자극했다. 왜 그런지 알면서도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은 어쩔 수가 없다. 안호연은 무언의 반항으로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곤 자신의 허리를 뒤로 뺐다. 깊숙이 박혀 있던 성기가 뒤로 빠지자, 빠진 만큼 돌진했다. 기어이 성기 전체를 안호연으로 감싼 강중영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왜요?”

“아니야.”

“기분 상한 거 같은데요.”

“아니라고.”

“뭐가 기분 나쁜데요?”

안호연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설마 콘돔 때문에?”

안호연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호연아.”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잖아. 피임의 중요성을 여기서 설명해야 해?”

“그냥 느끼고 싶었어. 안 되는 건 나도 알아. 근데 서운한 마음 정도는 가져도 되잖아. 내가 다른 거로 투정 부린 것도 아니고 그냥 너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서운하다는 건데.”

“아, 진짜 왜 사랑스럽고 그래.”

그가 갑자기 안호연의 몸을 밀었다.

“딱 한 번이에요. 이번이 마지막이야.”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안호연의 몸에 머물러 있던 성기가 튀어나왔다. 허전함에 안호연은 다리를 오므렸다. 답답한 고무 안에 갇힌 성기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축축한 타액이 묻은 콘돔을 벗겼다.

“다리 벌리고 있어요.”

안호연은 무릎을 잡아 벌렸다. 숨이 멈췄다. 그의 냄새가 더 짙어져 기대감이 커졌다. 아까도 좋았지만, 지금은 더 좋을 거니까.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뺨에 열까지 올랐다. 강중영이 다가왔다. 다리를 옆으로 밀고 다물어지지 않은 입구로 성기를 밀어 넣는 순간 환희에 찬 신음이 흘러나갔다. 고무가 아닌 매끈한 성기가 파고드는 감각은 상상 이상이다. 매끈한 성기에 자신의 체액이 묻어 정점을 찌르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안호연은 가슴을 파르르 떨며 강중영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정말 순간적으로 안호연의 성기에서 하얀 액체가 튀어나갔다.

“그렇게 좋아요? 넣어 준 것만으로 싸고.”

그가 손가락으로 배에 묻은 정액을 닦아 냈다.

“좋아.”

“그럼 내가 더 분발해야겠네요.”

강중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동시에 멈춰 있던 허리를 빠르게 튕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안호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풀려 있던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나갔다. 안호연은 입술을 꼭 다물고 상체를 들어 강중영의 목을 팔로 감쌌다. 가슴을 붙이자 붙은 가슴이 서로 비벼져 열이 나고 성기와 받아들이는 곳도 비벼져 열이 나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열이 정점이 된 순간 안호연의 안에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강중영은 사정하며 안호연의 몸을 꽉 안았다. 몸이 찌그러질 정도로 힘주어 안아 빈틈없이 몸이 맞물린 순간 그가 안호연의 손바닥을 쫙 펴 주먹을 올렸다. 그게 뭔지 몰라서 눈을 깜박였다.

“뭐야?”

“아까 선물 주기로 했잖아요.”

안호연은 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착각했던 고백으로 선물을 잊어버렸다.

“결혼해요. 이런 족쇄를 채워 주고 싶은데 동의해요?”

그의 손이 스쳐 지나간 제 손바닥에 동그란 반지가 놓여 있었다.

“이제 마지막 청혼이에요. 진짜 몇 번째 청혼인지 기억도 안 나.”

그가 조금 협박처럼 이를 드러내며 속삭였다. 그런데 그의 협박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섹스하는 도중에 청혼하는 건 뭐야?”

“다시 할까요? 그럼 내년에 하죠.”

“싫어.”

안호연은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고 손바닥에 놓인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며 말했다. 반지가 단단하게 네 번째 손가락을 조여 왔다. 그제야 늘 이물질 같던 자신이 이물질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 사랑해요?”

“당연하니까 묻지 마.”

“무드 없게.”

“그럴 땐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그가 사랑하는 만큼 안호연은 행복했고, 늘 그의 사랑은 놀라울 만큼 커서 안호연은 기뻤다.

“사랑해요.”

“나도.”

오늘에서야 안호연은 진심으로 그를 믿을 수가 있었다. 늘 따라다녔던 불안감이 오늘에서야 줄어들었다. 빛바랜 형광등이 비추는 누추한 방이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다워서, 빛바랜 형광등 아래 있는 사람이 강중영이라 처음으로 안호연은 신께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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