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10/12)

09

태범석은 느른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집 안을 따듯한 공기가 감싸고 있었다. 엎드린 채로 누운 안호연의 등을 쓸어 주었다. 눈을 감고 자던 안호연이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눈을 끔벅이다가 “조금만 더 잘래.” 칭얼거리며 도로 눈꺼풀을 내렸다.

사랑을 보여 주겠다던 안호연은 근 3년간의 모습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늘 어둡고 습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안호연이 며칠 전부터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다. 흐릿하던 눈이 선명했다. 꼭 과거의 안호연을 보는 듯했다.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병아리처럼 태범석을 따라다니며 술을 배우고 담배를 배우던 그 시절의 안호연으로 말이다. 태범석이 하는 건 모조리 따라 했고, 태범석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녔다. 안호연은 태범석의 거울이었다. 자신을 그대로 투영하는 안호연은 다르게 말하면 또 다른 태범석이다.

태범석은 안호연의 마른 등을 쓸어내리다가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 그렇게 길게 샤워를 하는 편이 아니라 20분도 미치지 않은 시간에 밖으로 나왔다. 침대에 있어야 할 안호연이 없었다. 바깥에서 소리가 났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거실로 가자 잠옷 차림으로 현관 앞에 선 안호연을 찾았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슈트를 받아 들곤 거실로 왔다.

“씻느라 못 들었네. 괜히 나 때문에 자는 데 방해됐겠다.”

안호연은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빙긋 웃었다.

“아니, 별로. 오늘도 또 일 가?”

“그럼 어디 갈래?”

“그래도 좋잖아. 날씨도 별로 덥지 않아서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잖아.”

“데이트는 무슨.”

태범석이 대충 수건으로 머리칼에 묻은 물을 닦아 냈다. 드라이어로 대충 머리를 말리는 동안 안호연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태범석은 머리를 말리면서도 자꾸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근 3년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고 있을 때마다 낯설었다. 늘 냉전 중이었다. 말을 나누는 거라곤 고작 몇 마디가 전부였다. 요즘 안호연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색달랐다. 머리를 말리고 드레스룸으로 가 오늘 배달된 다림질된 옷을 몸에 꿰었다. 머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도 안호연의 고개가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태범석은 문지방을 밟고 구경하다가 안호연의 고개가 옆으로 쓰러질 때 입술을 뗐다.

“호연아.”

안호연은 졸다가 눈을 떴다.

“졸려?”

“아, 좀 졸리네.”

이번에 안호연은 소파에 모로 누웠다.

“방에 들어가서 자.”

“너 나가는 거 보고…….”

나가는 걸 본다던 안호연의 입술에서 하품이 떠나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는 안호연의 눈을 보던 태범석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소리 나지 않게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까만 구두를 신던 그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서성이던 안호연은 갑자기 일어났다.

“왜 소리 없이 나가? 아쉽게.”

“그러니까.”

안호연이 걸어 와 태범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까치발을 들고 자신의 입술에, 피곤에 지쳐 버석한 입술을 댔다. 그러곤 잠이 깨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해, 오늘도 돈 많이 벌어 오고.”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심장이 멈췄다. 을러서 받아 낸 사랑한다는 말이 아닌, 안호연이 한 말에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태범석은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코로 들어오는 안호연의 기분 좋은 페로몬에 아래가 묵직해졌다. 의도적인 건지 모르겠으나 안호연의 몸이 묵직해진 아래를 문댔다. 태범석은 안호연을 밀어냈다.

“갑자기 그 고백은 뭐야?”

“내가 사랑하는 게 뭔지 보여 준다고 했잖아. 난 사랑할 땐 이렇게 해.”

“이상하게 평소와 달라서.”

“이게 싫어?”

싫으냐고 물어보는 안호연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 말까?”

진심으로 그걸 원하냐고 안호연이 되묻자 태범석은 고개를 저었다.

“낯서니까 자꾸 경계하게 되네.”

안호연은 눈을 휘고 웃으며 태범석을 돌려세웠다.

“익숙해질 거야. 얼른 다녀와.”

안호연이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자 태범석은 그제야 웃었다. 돌이켜 보면 나쁘지 않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졸졸 병아리처럼 따라다니던 안호연을 되찾은 것 같아서 숨이 트였다. 태범석은 현관문을 닫고도 한참 밖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주차장 아래까지 내려간 그가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차에 시동을 건 태범석은 갑자기 입술 끝을 올렸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곤 사랑을 속삭이는 안호연은 분명 좋았으나 한편으론 그게 연기라는 걸 깨달으니 입술이 딱딱했다.

‘내가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야, 범석아.’

얼마 전 안호연이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리니 기분이 상했다. 이게 안호연의 사랑이라면 3년 동안 보여 준 안호연의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입술을 비틀던 태범석은 눈을 내리감았다. 역시 아이가 필요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고작 이따위 거짓 사랑과 다솜을 두고 선택하라니 답은 뻔했고, 안호연의 속내가 뻔히 보여 웃음이 나왔다. 다솜을 영영 보내고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태범석은 안호연을 자유롭게 놓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안호연이 영원히 다솜으로 아파하고 고통받고 기억하길 바랐다. 손가락으로 툭툭 핸들을 두드리던 남자는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 차가 막혀 잠시 도로에 서 있는 동안 박연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호연 씨와 그렇게 가더니 통 전화도 없고. 무슨 일 있었어?]

“호연이에게 히트사이클이 왔어.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를 그냥 보낼 순 없잖아.”

[그래서 나흘을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야? 갑자기 히트사이클이라니, 무슨 일이래. 설마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거 아니지? 호연 씨와 같이 있었어?]

“우리 사이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그렇긴 하지.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결혼이 코앞인데 연락이 안 돼서 계약이 깨졌나 싶었거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박연우도 알고 태범석도 익히 아는 일이다. 중국 시장에 진출했으나 자금적으로 무리수를 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을 박연우가 잘 알고 긁어 주었고 회사가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게 3년 안으로 웨딩홀딩스를 상장시키겠다는 것이 이 결혼의 조건이었다. 웨딩홀딩스를 상장시키려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운전 중이에요. 나중에 통화하죠.”

[알았어.]

달갑지 않은 전화를 끊은 태범석은 집에서 멀지 않은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태범석을 제일 먼저 반기는 건 닷새간 챙기지 않은 서류였다. 태범석은 재킷을 벗어 행거에 걸자마자 바로 서류를 챙겨 보았다. 사무 의자에 앉자마자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Rrrrrrrrrr.

갑자기 울린 전화에 태범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전화기 중 하나는 직통 전화로 피할 수 없는 전화였다. 한창 일하다 방해를 받은 태범석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거 태범석 전화 맞아요?]

어색한 목소리는 안호연의 목소리였다. 그가 이런 사소한 일로 전화를 걸던 때가 있었나.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며 기억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생각해 보면 한 번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같이 머물 때는 문자조차 하지 않았다.

“왜?”

[아, 범석이네. 나 휴대 전화가 없잖아.]

“그래서?”

[오늘 같이 사러 갈래? 아니면 나 혼자 갈까?]

“혼자 사러 갔다 와.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 지금 바빠.”

[역시 그래야겠지? 알았어.]

안호연은 짧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린 태범석은 다시 결재 서류를 첫 페이지부터 읽어 내리다가 다시 전화기를 보았다. 전화기 앞에서 시무룩하게 앉아 있을 안호연을 생각하니 글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서류를 보는 둥 마는 둥 결재 서류에 서명하던 태범석은 결국 펜을 내려놓고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곤 방금 걸려 온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안호연.”

[왜?]

“저녁에 나랑 같이 가.”

[어딜?]

“휴대 전화 사러 가자고.”

[진짜지?]

“그래, 인마. 그리고 휴대 전화 사 주면 문자로 해. 전화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을게 얼른 와.]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태범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안호연의 수를 알면서도 그의 거짓 사랑 놀음에 빠져들고 싶었다. 꼭 과거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태범석은 서류를 허투루 보는 법이 없다. 짧게 요약된 상황을 전해 듣는 일이 없어 서류 전체를 통째로 읽었고 보고서 중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작성자를 불러 꼼꼼히 체크할 정도였다. 정확한 걸 좋아하는 만큼 책상에서 머무는 일이 많았다. 그런 태범석이 오늘따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펜을 내려놓고 재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 미룬 일은 내일 일로 누적되겠지만, 태범석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출근하면 별다른 스케줄이 없으면 점심시간까지 일어나지 않던 그가 밖으로 나오자 비서가 의아한 눈을 했다. 태범석이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중앙에 섰다.

“이석진 씨.”

“네, 대표님.”

“데이트 코스 뽑아서 가지고 와요.”

“네.”

태범석은 흡연실에 들러 담배를 한 개비 피웠다. 조급한 마음에 안호연을 을렀다. 안호연에게서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를테면 안호연이 자신 몰래 성기에 이상한 링을 끼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말이다. 링 하나로도 화가 나 미칠 것 같은데, 안호연은 족쇄를 착용하고 자곤 했었다. 그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한 침대에 둘이 누워 있는데도 셋이 누운 느낌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안호연은 부족한 눈길로 자신을 보곤 했다. 그 간절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태범석은 답답했다.

‘묶여 있는 게 좋아.’

안호연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을 들었을 때 태범석의 눈앞이 까매졌다. 누구에게? 태범석은 안호연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분명 자신의 옆에서 자신과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이 다른 남자가 채워 줬던 족쇄와 링을 차면서 ‘묶여 있는 게 좋다’는 말을 하면 제정신일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안호연이, 자신의 첫 오메가가.

안호연의 얼굴을 볼 때마다 태범석을 비웃는 강중영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둘의 지저분한 섹스가 자동 재생되었다. 안호연의 몸을 짓누르고 온갖 지저분한 말과 행위로 자신이 만들어 놓고 가꿔 놓은 안호연을 파괴해 놓은 그가 떠오르자 태범석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처음부터 공사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건 태범석도 인정하는 바다. 안호연이 싫다고 뺐을 때 접었어야 했다. 바이러스 같은 남자가 안호연을 지저분하게 감염시켜 놓았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안호연에게서 강중영의 그림자가 보였는데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봐 왔던 모습이 아님에도 좋으나 자꾸 경계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둘 사이에 얼른 아이가 생기면 더 걱정하지 않을 텐데. 지독하게 안호연의 배에 자신의 아이가 자리 잡지 않았다. 아이의 부재 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진 태범석은 안호연에게 잠자리만 강요했다. 흔한 데이트도 흔한 대화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데이트하자는 안호연의 말이 유난히 태범석의 뇌리에 남아 떠나지 않았고 한편으론 설레었다. 그게 거짓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 웃음이 났다.

태범석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곤 회사 근처로 나갔다. 큰길가를 끼고 있는 회사 맞은편에 위치한 커다란 휴대 전화 대리점으로 갔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 직원이 휴대 전화를 구입하러 왔느냐며 직업성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묻자 붙임성 좋은 그는 이것저것 물었고 태범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사업 차 휴대 전화를 늘리는 거세요?”

“아뇨, 제 오메가에게 주려고요.”

정말 안호연은 자신의 오메가가 맞을까. 태범석은 궁금했다. 안호연이 옆에 있는데도 먼 느낌이다.

“아, 정말 좋으시겠어요. 행운이에요.”

알파의 숫자도 적지만 오메가의 숫자는 그에 비해 더 적었으므로 결혼할 오메가가 있다는 건 성공한 알파인 걸 알려 주기도 했다. 부러워하는 점원의 시선에 태범석의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났어요. 절 얼마나 좋아하는지 계속 따라다녔어요. 싫다는 데도 결혼해 달라고 우기더라고요.”

“외모가 출중하시니까 그러겠죠. 같은 남자인 제가 봐도 정말 잘생기셨어요.”

“외모 때문이 아니에요.”

태범석은 불안함에 계속 부연 설명을 늘어놓았다. 왜 안호연이 자신의 오메가인지 그에게 설명하려는 듯이 과거를 늘어놓았다. 불안할 이유가 없다. 안호연은 태범석의 오메가였다. 그건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처연한 눈으로 보는 점원의 시선을 느낀 태범석은 입을 다물었다. 개통된 휴대 전화를 건네줄 때까지도 침묵하던 태범석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회사로 돌아갔다. 휴대 전화가 든 종이 가방을 들고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이석진이 뒤따라 들어왔다.

“말씀하신 데이트 코스입니다. 대표님께서 어느 시간대의 데이트 계획을 원하는지 몰라서 두 개 준비해 봤습니다. 오전 데이트, 오후 데이트 코스이고 각 코스마다 총 세 개의 플랜이 있습니다.”

“책상에 올려 두고 나가 봐요.”

“네.”

이석진이 나가자 태범석은 휴대 전화가 든 종이 가방을 책상에 놓았다. 태범석은 선 채로 그가 작성해 온 데이트 코스를 훑어보았다. 데이트 코스는 비슷했다. 영화를 본다거나 특별한 장소에 가서 구경하고 밥을 먹고 가벼운 드라이브나 술을 한잔 마시는 걸로 끝이 났다. 연인들이 한다는 데이트라고 해도 별거 없네. 태범석은 중얼거리며 그중에서도 제일 무난한 데이트 코스를 선택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오래 가도록 안호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태범석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안호연은 전화를 받았다.

“왜 늦게 받아.”

[잤어. 자꾸 잠이 와.]

“병원에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응, 그렇지 않아도 가려고 했어. 근데 왜 전화했어?]

“지금 준비하고 있으라고.”

[무슨 준비?]

“데이트 가게.”

[시간 없다면서.]

시무룩한 말투였지만, 그 말투가 들떠 있었다. 안호연이 기뻐한다는 게 전해졌다.

“갑자기 생겼어.”

태범석은 지갑과 차 키를 챙겼다. 집과 회사가 멀지 않아 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10분 이내로 도착할 거 같아.”

[너무 촉박한데, 나 방금 일어났어.]

“그럼 천천히 준비하고 있어. 하던 일 끝내고 갈게.”

[응.]

안호연의 말에 태범석의 눈가가 사르르 녹았다. 바로 집으로 나가려던 태범석은 소파에 앉았다. 태범석은 갑자기 바뀐 안호연이 좋은지 나쁜지 머릿속에서 쉼 없이 쟀다. 어떤 방향으로 지켜봐도 지금 안호연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왜 다솜을 걸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정말 자신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도망가려는 건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눈을 감고 안호연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던 태범석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 짧은 생각을 하는 동안 30분이 흘렀다. 태범석은 휴대 전화가 든 종이 가방을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고 운전할 때마저도 안호연에 대한 고민을 하던 태범석은 미리 집 밖에 나와 있는 안호연을 보곤 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안호연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스물아홉의 청년인 안호연은 옛날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생기가 넘치지 않고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그늘이 있었으나 아직 어린 태가 남아 있었다. 태범석은 다가가지 못하고 조금 떨어져 안호연을 보았다. 한참 그를 보던 태범석이 클랙슨을 눌렀다. 빵 소리에 안호연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더니 태범석의 차를 발견하곤 뛰어왔다. 금세 그의 얼굴에 미소가 생겼다.

“왜 안 오고 여기에 있었어.”

“차 빼기 어렵잖아.”

“아, 그러네. 여긴 다 좋은데 길이 좁아.”

안전벨트를 꼼꼼히 매는 안호연에게 태범석이 불쑥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뭐야?”

“휴대 전화 사 왔어. 괜히 둘이 같이 사러 가서 시간 소비하는 것보다 내가 오는 길에 사는 게 낫잖아. 데이트 시간도 길어지고.”

안호연이 태범석을 보았다.

“태범석, 너도 되는구나.”

“뭐가?”

“로맨틱한 거. 나 조금 감동했어.”

“이게 뭐라고.”

“날 보면 하는 거라곤 침대로 끌고 가는 게 전부잖아.”

“연인끼리 욕구를 풀어 주는 건 당연하잖아. 더구나 욕구가 아니라 다솜이랑 너를 지켜 내려고 했던 일이야.”

“나를 지켜 낸다는 게 무슨 말이야?”

각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호연을 보고 있으면 불안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면 안호연은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이 가족을 지켜 내고 싶었다. 태범석, 안호연, 태다솜이라는 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태범석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안호연은 죽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태범석은 조용히 창문을 보았다.

“우린 조금씩 틀려. 넌 날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너를 보고 있으면 백만 가지가 넘는 변덕이 생겨나는데 딱 하나는 변하지 않아. 안호연 넌 내 거야.”

죽어도 넌 나 이해 못 해.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태범석의 허벅지에 손바닥을 놓았다.

“범석아, 내가 왜 다솜이를 놓아주자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 이야긴 꺼내지 마.”

“널 정말 사랑하고 싶어서야. 이젠 제대로 널 사랑하고 싶어.”

“이 상태로 사랑해도 되잖아.”

“아니, 넌 계속 다솜이를 두고 날 벼랑에 세울 거잖아.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해? 밉지.”

“입 다물어. 좋은 시간 망치지 마. 입 다물고 앞만 봐.”

밉다는 말이 안호연의 입술에서 나오자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안호연은 기분이 좋을 때 잡치는 버릇이 있다. 짜증스레 입술을 구길 때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안호연이 머뭇거리다 입술을 뗐다.

“너 아빠 돼.”

“뭐?”

“나 임신했어.”

태범석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소리를 낸 타이어가 아스팔트 위에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섰다. 태범석이 멍한 얼굴로 안호연을 보자, 그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태범석을 보고 웃었다. 심장으로 뜨거운 피가 차올랐다. 이제야 안호연을 잡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했다. 언제 도망갈까 가슴을 졸였는데 이제 마음이 놓였다. 가슴이 뻐근해서 임신했다고 속삭이는 안호연이 예뻐서 뒤에서 클랙슨을 누르며 비키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태범석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안호연만이 눈에 들어왔다. 태범석은 그제야 앞에 놓인 안호연을 보고 환희했다. 안호연은 이제 태범석만의 오메가였다. 그래서 떠날 수 없었다.

딱딱하게 얼어 있던 태범석이 욕을 내지르는 운전자에게 고개를 빼고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자 성난 운전자들이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태범석은 차를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의 감각이 둔해졌다. 이대로 운전했다간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꽉 잡은 태범석이 안호연에게 바보같이 되물었다.

“정말?”

“그래.”

“정말이냐고.”

“임테기로 확인했어. 두 줄이야.”

“언제 확인했는데?”

“얼마 안 돼.”

숨을 고른 태범석은 그제야 차를 옆으로 비켰다. 좁은 길을 막고 있던 차가 비켜서자, 뒤차들이 차 옆을 지나가면서 경적을 눌렀다. 그런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안호연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임신이다. 임신이 맞는데도 태범석은 여전히 꿈인지 현실이 분간되지 않아 안호연을 계속 바라보았다.

바보처럼 안호연을 보자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느리게 태범석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영화를 보고 근사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볍게 전망대에 가서 야경을 볼 생각이었는데, 태범석은 버퍼링에 걸린 사람처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태범석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사랑 없이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너랑 잘 기르고 싶어. 난 이렇게 노력하는데 넌 왜 제자리야?”

그제야 태범석은 안호연이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던 이유를 깨달았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호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던 거였다.

“몰랐었어.”

“이제 알았잖아.”

“언제, 언제 생긴 거야?”

“그땐가 봐. 네가 다솜이에게 데려다준다던 날. 그날 빌었거든. 빨리 아이가 생기게 해 달라고. 근데 정말 그날 아이가 스며들었어. 기뻐?”

기쁘냐고 묻는 안호연의 입술에 핏기가 없었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기뻐.”

기뻐서 죽을 것 같았다. 태범석은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너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

중얼거리는 안호연의 입술이 예뻐서 태범석은 자신도 모르게 안호연의 입술로 돌진했다. 치아가 부딪칠 정도로 격렬하게 돌진했다가 혹시라도 아이와 안호연이 숨이 부족할까 조심스러웠다. 태범석의 머릿속에 온갖 걱정이 늘어났다. 키스할 것처럼 입술을 살짝 벌리고 기다리던 안호연이 눈을 깜박이자 태범석은 그대로 입술을 뗐다. 요즘 잠이 늘어난 안호연이 걱정됐고 무엇보다 마른 몸이 눈에 들어왔다.

“더 안 해?”

“안 해.”

“왜?”

“그러다 잘못될까 걱정돼. 너도 무리하지 마. 요즘 통 잠만 잤잖아. 다시 집에 갈까?

“그럴까? 가는 길에 맥주 사서 가자. 집에서 치맥 데이트 하자.”

“데이트?”

“데이트가 거창한 게 아니래. 집에서 이야기만 해도 거창한 거라더라.”

마치 자신은 데이트라는 걸 잘 모른다는 듯 안호연이 말을 꺼냈다.

“치킨 말고 알탕 먹을까?”

“그건 왜?”

“먹고 싶어서. 아니다, 그냥 치맥 하자. 넌 맥주, 난 과일 주스. 어때?”

태범석은 눈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보이는 맥주를 몇 캔 골라 쥐곤 안호연이 먹을 건강 주스까지 계산했다. 자꾸만 가슴이 벌렁거렸다. 하나, 둘 숨을 고르곤 차로 뛰어갔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던 안호연이 태범석을 보자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뭐 하고 있었어?”

“네가 사 준 휴대 전화로 막 치킨 시키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우선 타.”

“원래는 영화를 볼 생각이었어.”

“그리고?”

태범석은 차에 올라탔다.

“맛있는 밥도 먹고 전망대로 드라이브 가서 야경을 볼 예정이었어.”

“드라이브하고 있잖아.”

고작 동네를 한 바퀴 돌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안호연은 웃었다. 늘 시무룩하게 죽어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태범석은 자신도 모르게 안호연의 볼을 잡았다.

“왜?”

“이상해.”

“뭐가?”

자꾸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눈앞에서 사라질 것처럼 안호연이 아련했다. 기뻐야 하는데도 이 변화를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안호연이 저만치 뛰어가더니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자신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건 안호연이라 이렇게 뒤를 따라가는 게 어색했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안호연은 신발을 대충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태범석은 뒤집어진 신발을 똑바로 세우곤 안호연의 신발 옆에 구두를 벗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펫 위에 먼저 앉은 안호연은 제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태범석은 정확히 안호연이 두드린 곳에 앉았다.

“범석아.”

“왜 자꾸 부르는데?”

“우리 다솜이 뿌려 주자.”

아까부터 안호연은 그 말을 꺼내려고 했었다.

“안 돼.”

“아직 기한이 남았으니까 내가 더 열심히 네 생각을 바꾸면 되지. 여전히 내가 떠날까 무서워? 뭐 때문에?”

“오늘은 그 이야기 꺼내지 마. 좋은 날이잖아. 괜히 기분 상하고 싶지 않아.”

태범석이 안호연의 배를 만졌다. 안호연에게서 나는 은근한 향에 예민한 코가 반응했다. 살이 뜨거웠다. 뜨거워진 태범석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던 안호연은 입술을 천천히 뗐다.

“하고 싶어?”

“조금.”

“조금이 아닌 거 같은데?”

아래가 묵직해져도 태범석은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안호연은 그걸 보고 웃더니 비닐봉지에서 야채 주스를 꺼내 빨대를 꽂았다.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 마시곤 제 코앞까지 걸어와 무릎을 꿇고 앉더니 태범석의 목에 두 팔을 걸고 매달렸다.

“범석아, 내가 너 사랑하게 해 줘.”

사랑하게 해 달라는 말은 다솜을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해 줄 거지?”

“다솜이는 안 돼.”

“그 말이 아니라 너 먹고 싶다고, 마음이 안 되면 몸으로만 사랑해 주려고.”

“그러다 아기가 잘못되면?”

“그럴 일 없어. 조심히, 조심히 하면 되잖아.”

안호연의 다섯 손가락이 셔츠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부드럽게 살 위를 지나가는 손가락들이 자극적이었다.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피부가 스칠 때마다 피가 어딘가에 집중되었다. 태범석은 작게 욕을 내뱉곤 바지를 내렸다. 급하게 자위라도 하려고 페니스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이미 발기되어 손바닥으로 감싸고도 귀두가 튀어나왔다. 겁도 없이 안호연은 그걸 핥았다. 따듯하고 축축한, 안호연의 내벽과는 다른 뜨거운 것이 귀두를 덮자 페니스가 꿈틀댔다. 혀로 샅샅이 핥은 안호연의 눈이 반짝였다.

“범석아, 널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다고 자꾸 중얼거리는 안호연이 이상하리만치 예뻤다. 저런 말을 하는 건 오랜만이라 그랬을까. 눈이 뒤집혀 안호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바지를 벗기고 쉽게 벌어지는 다리 사이를 마구 핥았다. 그가 사랑스러웠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정말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사랑하고 싶어. 내 말 안 들으면 지금 보는 안호연은 없어질 거야. 일주일 전 우리로 돌아갈까? 아래가 추워.”

안호연은 춥다며 다리를 꼬았다. 자꾸 유혹하는 안호연의 다리가 어른거려 태범석은 결국 백기를 흔들었다. 그의 두 다리를 벌리고 페니스를 묻었다. 성기가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태범석은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한계치까지 뛰어서 이대로 눈을 감으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한 번쯤은 이런 말을 내뱉어도 되지 않을까. 태범석은 숨을 헐떡이는 안호연을 내려다보더니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안호연이 눈을 반쯤 접고 웃는데, 그 미소가 사랑스럽고 예뻐서…… 섬뜩했다.

* * *

날이 추워졌다. 간밤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더니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 두꺼운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추위가 살을 파고들었다. 그동안 눈에 보일 정도로 태범석이 달라졌다. 그는 안호연을 과잉보호했다. 마치 안호연을 유리 인형처럼 대했다. 그리고 예전이었으면 바로 출근했을 남자는 볼 키스를 받아 보겠다고 현관 앞을 서성거렸다. 안호연은 졸음이 섞인 눈으로 현관까지 쫓아갔다. 퇴근길에 자신에게 먹고 싶은 걸 물어 먹을 것을 사 오곤 했다.

결혼식이 코앞까지 다가온 태범석은 바빴다. 박연우가 시도 때도 없이 태범석은 불러내 안호연 혼자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자 밖으로 나갈 때면 태범석은 어쩔 수 없는 얼굴을 하며 미안해했으나 안호연은 그의 감정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가 집을 비울수록 움직이는 게 수월해졌다. 우선 빌라를 처분하기 위해 내놓았다.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강중영이다. 강중영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안호연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바람이 창문을 뒤흔들었다. 굳이 문을 열지 않아도 밖이 얼마나 추울지 짐작이 갔다.

[네 집 나갔어. 돈은 네 통장에 입금될 거야.]

제임스에게서 도착한 문자를 본 안호연은 비릿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던 돈이 다시 통장으로 고스란히 입금되었다. 안호연은 조용히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안호연은 바깥으로 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내려온 그는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냉기가 폴폴 흐르는 낡은 빌라에 멍하니 멈춰 섰다. 안호연은 텅 빈 건너편 빌라를 보곤 집으로 들어갔다.

Rrrrr.

휴대 전화가 시끄럽게 울었다.

[손님, 오늘이 입금일이라는 거 잊지 않았죠?]

“잊지 않았죠. 그래서 다솜이는 찾았어요?”

[지금 추적 중인데 양양 쪽이더라고요.]

“이번엔 양양이라…….”

안호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됐어요.”

안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접으려고요.”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좀 더 찾아보는 게.]

“이제 알아낼 필요 없어요. 그 사람이 임신하면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준다고 했거든요. 이미 임신해서 아홉 달 안에 알 수 있어요. 그쪽을 믿는 것보다 태범석을 믿는 게 빠르죠.”

[별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이걸 축하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축하해도 돼요. 기쁜 일이잖아요.”

[그렇죠. 네, 다음에도 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전화가 뚝 끊겼다. 안호연은 휴대 전화를 보다가 빈집으로 들어갔다. 오래 집을 비우면 티가 날 텐데 집은 따듯했다. 집을 구경하러 올 사람들을 위해 안호연은 소파에 앉았다. 집에 돌아오니 그제야 긴장이 녹아내렸다. 몸을 아이처럼 웅크리곤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눈을 가만히 감은 안호연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우리 계약 끝이야. 나 아이 가졌어.]

계약은 종료다.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문자를 작성한 안호연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뒤이어…….

[각인을 지울 수 있다면 지워. 미안해.]

마지막 문자를 작성했다.

그건 덜 비참해지는 과정 중 하나였고 마지막까지 남길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 전부였다. 이 문자를 보고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안호연은 전송했다. 강중영이 어떤 심정으로 삼 년간 지내 왔는지 안호연은 정확히 모른다.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몰라도 하나 정확한 건 강중영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인 건 확실해 안호연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휴대 전화가 시끄럽게 울었다. 누구 전화인지 뻔히 알기에 움직이지 않았다. 귀신 같은 하얀 얼굴로 휴대 전화를 뻔히 보다가 소파 쿠션으로 휴대 전화를 가렸다. 벨소리가 줄어들었다가 이내 멈췄다.

안호연은 그제야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을 싸 놓으면 이삿짐센터에서 제공하는 짐 보관 서비스를 이용할 생각이었고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직원이 전부 포장할 예정이었으나 아끼는 물건을 맡길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일 차 포장할 생각이었고 오후 중으로 직원이 올 예정이라 빠르게 정리해 놓고 빠져야 했다.

허리를 굽혀 깨지기 쉬운 물건을 수건에 돌돌 싸 바구니에 담았다. 오래도록 물건을 정리하던 안호연은 서랍장을 열었다가 손이 멈췄다. 반지 케이스였다. 오래전에 넣어 두고 손대지 않아 케이스 위에 수북하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닦은 안호연은 케이스를 열었다. 예전에 크리스마스 날 선물로 받은 반지였다. 짧은 한숨과 함께 케이스를 닫은 안호연은 이삿짐 속에 그걸 밀어 넣었다. 자신에게 과분한 물건이었다. 대충 물건을 챙긴 안호연은 겨울옷을 꺼내 가방에 따로 담았다. 안호연은 소리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허전해 보이는 집을 물끄러미 보던 안호연은 현관으로 갔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쾅쾅. 누군가가 주먹으로 쇠문을 찍었다.

“누구세요?”

이삿짐센터라 여긴 안호연은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가 멈춰 섰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강중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다시 문을 닫으려고 문을 잡아당겼으나 강중영이 더 빨랐다. 그가 어깨를 문 사이에 밀어 넣어 문이 닫히지 못하도록 했다. 초췌해진 얼굴을 한 그가 안호연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아챘다. 잡힌 어깨가 부서질 정도로 아팠다.

“누구 마음대로?”

그가 중얼거렸다.

“누구 마음대로 끝이라고 해? 기다리라고 했잖아.”

“계약서가 그렇잖아. 계약 종료라고.”

“그럼 누구 마음대로 각인을 지우라고 해요? 내 마음에 대해서 호연 씨 멋대로 결정 내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는 너야말로…….”

안호연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돌아섰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와 안호연을 안으려고 했으나 그 손을 매몰차게 밀어냈다.

“그만하자.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저는요?”

“걸리적거려.”

“호연 씨.”

“그러니까! 박연우 씨 이용해서 태범석 압박하려는 거 그만해.”

“박연우 씨를 이용하다뇨?”

“몰라서 물어? 박연우 씨를 이용하려고 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박연우 씨가 다 말했어요?”

“연우 씨는 죄 없어. 내가 먼저 눈치챈 거니까.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잖아. 연우 씨는 너밖에 모르는 날 잘 알아. 박연우 씨가 너를 통해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 너와 내 관계가 어떤지 안다는 건데 태범석 앞에서 네 이야기를 전혀 안 해. 모르는 게 이상하잖아.”

박연우는 정말 죄가 없었다. 이건 자신의 문제였고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강중영이 끼어드는 건 사양이었다. 그가 빠져 주길 바랐다.

“이런데도 연우 씨와 관계없어?”

“있어요. 우린 우리대로 즐기다가 천천히 저한테 오면 돼요. 태범석은 연우 씨와 호연 씨 둘 중에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올 거고, 태범석은 분명 연우 씨를 선택할 거예요.”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인했다. 안호연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강중영은 도리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가 나빠서요? 그러면 안 돼요? 박연우와 전 필요에 따라서 거래한 거예요. 이용이 아니니까 문제없잖아요.”

“문제없다고? 내가 문제야. 내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잖아. 바보같이 난 네가 닦아 놓은 길로만 가야 하는 거잖아. 네 옆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 네게 고마워해야 해? 넌 내가 스스로 돌아갈 기회조차 없앤 거야.”

안호연 스스로 돌아가려고 했다. 조금 당당하게 그에게 돌아가고 싶었는데 강중영이 그 길조차 막아섰다.

“나도 생각이란 게 있어.”

“생각이 있어서 잠자리에 응했어요? 당신이야말로 미쳤어? 그럼 나보고 네 꼴을 보고 있으라고? 말 같지도 않은 핑계로 널 강간하는 새끼하고 사는 꼴을 보라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안호연.”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버려 둬.”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렸다. 머리에 두통이 일었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도 너 사랑해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못나서. 참 못나서, 널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 이 상황에서 널 사랑하면 나만 참 못된 사람이잖아. 더 좋은 사람 만나고 더 좋은 사람과 연애하고 더 좋은 사람하고 사랑해. 일방 각인 때문에 이러는 거야. 각인을 풀면 생각이 달라질걸.”

“내 사랑이 우스워?”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상처받은 얼굴로 자신의 사랑이 우습냐고 묻는 그를 지나쳐 도망치듯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강중영도 맹렬하게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질긴 추격전은 금방 끝났고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강중영이 안호연의 팔목을 낚아챘다. 앞으로 튀어 나갔던 몸이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내 앞에서 다시 말해 봐. 내 사랑이 우스워?”

“우습지 않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호연아?”

강중영은 혼을 내듯 안호연을 불렀다. 왜 그런 말을 했냐면 처음부터 열까지 이유를 대도 하나밖에 없었다. 강중영이 아까웠다. 아까워서 안호연이란 사람에게 줄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새끼는 널 사랑할 자격이 없어.”

“안호연!”

비명 같은 강중영의 외침이 안호연의 귀를 강타해 먹먹했다.

“뭐 하는 겁니까?”

등에서 쏟아지는 말에 안호연의 어깨가 굳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과 마주했다. 태범석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강중영을 노려보았다.

“누가 대낮에 소리를 지르나 했더니 강중영 씨네요. 우리 호연이를 만나러 온 건가요?”

태범석의 입꼬리가 흔들렸다. 당장 강중영을 때려눕혀도 시원찮을 눈으로 강중영을 응시하는데도 강중영은 안호연만 보았다. 마치 잡아 달라는 듯이 애타게 보는 그 시선을 안호연은 외면하곤 태범석 쪽으로 돌아섰다. 태범석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집엔 없고 연락도 되지 않으니까 이삿짐센터 때문에 여기 온 줄 알았지.”

말은 느긋했으나 그는 재킷도 입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이마에 묻은 땀방울로 볼 때 여기까지 정신없이 뛰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안호연의 팔목을 잡아 자신의 뒤에 세웠다.

“안호연, 네가 말해 봐.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어?”

강중영의 페로몬 향을 맡았다면 태범석은 안호연에게서 났던 그 향과 동일하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동안 누굴 만나 왔는지, 그동안 누구를 만나 변화했는지 눈치채고도 그는 안호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안호연은 침을 삼키고 강중영을 보았다. 동요하지 않는 눈동자로 강중영은 계속 안호연을 보았다. 차분한 눈과 마주할 때면 속이 아팠다. 꼭 속을 뒤집어서 밖에 내놓은 것처럼 쓰라렸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있냐고.”

“우연히 만났어.”

“그래? 매번 우연히 만났나 봐. 전에도 이 냄새를 묻히고 왔었잖아.”

“…….”

안호연은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강렬했다. 안호연이 입을 열면 열수록 강중영이 초라해졌다. 강중영의 시선이 안호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 태범석이 강중영의 시선을 막아섰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나 하죠, 강중영 씨.”

태범석이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강중영은 그 손을 보더니 입술을 비틀었다.

“개하고는 악수 안 해요. 아,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태범석은 내민 팔이 민망해 접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말이 심하네요. 화를 내야 하는 건 전데 말이죠. 호연이가 요즘 그쪽과 좀 놀아서 큰 오해를 했나 봐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결국 내 옆에 돌아왔느냐가 중요한 거지.”

태범석이 조용히 안호연의 어깨에 팔을 걸치자 강중영은 초라해졌다.

“그만 가죠. 이런 일로 얼굴 붉히는 거 우습잖아요.”

안호연은 강중영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태범석이 이끄는 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가 뜨거워졌으나 돌아볼 수가 없었다. 멋대로 주차한 차에 안호연을 밀어 넣고 안전벨트를 매어 주는 그의 손에 힘줄이 섰다. 태범석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매섭게 안호연을 응시했다.

“그동안 저 새끼 만나고 다녔던 거야?”

태연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고 더는 거짓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안호연은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만났어.”

“어쩌다가? 옛정이 그리워서 일부러 찾아갔어?”

“믿을지 모르겠는데 정말 우연히 만났어.”

“네 배에 있는 거 내 새낀 맞고?”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고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잤어.”

“그럼 뭐 했는데.”

“그런 거까지 말해야 해?”

“좋아, 그거면 돼. 화가 머리끝까지 날 거 같은데 참을게. 마지막엔 날 선택했으니까.”

그래. 안호연은 몸을 웅크렸다. 그의 질문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잘 벼려진 질문 때문에 태연한 척해도 태범석이 화가 났다는 걸 여실히 알려 주었다.

“새끼 만나 보니까 어땠어? 좋았어?”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면 또 그 꿈을 꿀 수 없을까 아까워 눈을 뜨기 싫은 꿈. 강중영은 이상이었고 자신은 현실이었다.

“별로.”

만나 보니까 자꾸 꿈에 살고 싶어져서 별로였다.

“왜?”

태범석의 눈이 안호연 쪽으로 움직였다.

“만나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 네가 좋아. 강중영과 난 다른 세계의 사람이야.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려야지.”

핸들을 만지작거리던 태범석이 갑자기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화로 무장하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무장 해제 되었다.

“뭐야, 안호연. 화도 못 내게.”

잔뜩 상기되어 있던 태범석의 표정이 풀어졌다.

“기분이 안 좋았다가 좋아졌잖아.”

“앞날만 보자.”

“간만에 마음에 드는 말 하네. 앞날만 생각하는 거, 좋아. 곧 네 생일이네. 그날 뭐 할래?”

“아무거나. 생일이 특별한 날은 아니잖아.”

“싱겁네.”

안호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기분이 좋은지 태범석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사이드 미러에 비친 멀어져 가는 강중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이드 미러에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를 틀었다.

“기분이다. 호연아, 네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 안호연을 그가 갑자기 불렀다. 부드럽고 낮은, 위화감 없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그렇게 하자.”

“뭘 그렇게 해?”

손가락으로 차창에 낀 얼룩을 문댔다. 질문에 뜸을 들이던 태범석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다솜이 보내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안호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게 놀라웠다.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귀를 비비곤 고개를 틀어 태범석을 봤다. 혹시라도 태범석의 마음이 바뀔까 숨을 죽이곤 그를 올려다봤다.

“너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나도 노력해야 할 거 같아서. 네 말대로 다솜이 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더는 다솜이로 괴롭히지 않을게.”

“정말이지?”

“정말. 옛날보단 지금이 사람 사는 느낌이야. 정말 연인 같아서 좋아.”

“아니, 연인이지.”

“맞네, 연인.”

안호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너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너도 같은 마음이었던 거지?”

“그래.”

“박연우 정리되면 우리 결혼하자.”

그가 아침 인사를 건네듯 자연스럽게 청혼했다. 안호연과 태범석에게 결혼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했다. 안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범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뜻대로 됐는데 가슴엔 강중영이 떠올라 마음껏 웃을 수가 없었다.

* * *

언제 태범석의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있었다. 강중영과 태범석을 사이에 두고 태범석을 선택해 그가 충동적으로 내린 결론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안호연은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자꾸 눈앞에 강중영의 힘없는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런 불안을 태범석이 잠식시켰다. 아침 일찍 태범석은 멀끔한 슈트를 입었고, 안호연에게도 제일 좋은 옷을 입으라고 권했다. 안호연은 결혼식 때 입으려고 사 놓은 옷을 미리 꺼내 입었다. 눈으로 안호연을 훑은 태범석이 옷을 정리했다. 덜 잠긴 단추를 마저 채우곤 그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근교에 자리 잡은 납골당에 갈 때까지 둘은 침묵했다. 이렇다 할 말도 없이 태범석은 운전만 했고 안호연은 창밖만 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서 다솜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다녔던 아이를 만난 순간 안호연은 눈물이 나기보단 웃음이 나왔다. 정말 기뻐서 웃자, 태범석이 눈가를 찡그렸다.

“왜 웃어?”

“다솜이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고생을 많이 했잖아. 이제 편안하겠다 싶어서.”

“꼭 내가 나쁜 놈인 것처럼 들리잖아.”

안호연은 대답하지 않음으로 긍정했다. 태범석은 짧게 웃음을 터트리곤 주차장 구석에서 담배를 물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서 유골함을 든 안호연을 보았다.

“그러고 있으니까 네가 도망갈 거 같아 좀 무섭네.”

“날 믿어.”

“난 너 안 믿어. 그 배 속에 든 애를 믿는 거지.”

그가 담배를 마저 피우곤 비벼 껐다. 차에 올라탄 그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안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긴 왜?”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잖아.”

둘이 지냈던 보육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교회에 가는 길에 바다가 있었는데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맛있는 간식을 줘 보육원 아이들은 주말마다 교회에 가곤 했다. 보육원에서 교회에 가지 않는 아이가 딱 둘이었는데, 하나는 태범석이었고 하나가 안호연이다.

“거기가 적당한 거 같아서. 너도 나도 추억이 있는 곳이잖아.”

“그 교회 생각나?”

“생각나지. 너도 교회 가고 싶다고 매일 울었다가 나한테 맞았잖아.”

“왜 교회에 못 가게 한 거야?”

“내가 가기 싫으니까. 내가 안 가면 너도 안 가는 게 당연하잖아.”

“그때부터 성격이 고약했네.”

핸들을 쥐었던 태범석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보육원 애들을 불쌍하게 여기잖아. 그냥 사람들이 나나 너나 우습게 여기는 게 싫었거든.”

“…….”

“다른 애들이 가서 무시당해도 네가 무시당하는 건 싫었어.”

“왜?”

“네가 오메가라서 그랬나 보지.”

태범석은 어렸을 때도 굉장히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 보육원 선생님이 두 손 두 발을 들었을 정도로 고집이 셌고 성격도 좋지 않았다. 옷도 좋은 것만 챙겼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생기면 시비를 걸어서 차지하곤 했다. 그렇게 까다로웠던 태범석이 안호연은 꼭 챙겨서 다녔었다.

“내가 따라다녔는데도 왜 안 밀어냈어?”

“그땐 네가 조금 특별했거든. 보육원에 오메가는 너 하나뿐이라서 선생님들이 너만 따로 재웠고 신경도 많이 썼잖아. 네가 값지다는 걸 깨달았던 거지. 그래서 데리고 다니다가 네가 익숙해졌고 머리가 크고 나선 좋은 잠자리 상대라서 데리고 다녔고.”

“고작 그 이유였어?”

“내가 널 데리고 다녔던 게 거창한 이유라고 생각했어?”

“아니.”

조금 허탈한 웃음이 안호연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까칠한 남자아이가 자신을 데리고 다니던 이유가 좀 특별하게 여기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유를 듣고 보니 허탈해졌다. 태범석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게 안호연은 잡힌 고기였다. 그리고 언제나 먹이를 주지 않을 것이다. 안호연은 다시 창가에 이마를 댔다.

차는 얼마 가지 않아서 멈춰 섰다.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림 같은 교회가 서 있고 그 아래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안호연은 함을 안고 그 아래로 내려가 아이를 뿌려 주었다. 볕이 잘 들어 바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곳이었다. 바람도 살랑여 파도가 잔잔한 곳에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스며들자 안호연은 그제야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정말 많이 고생했어.

안호연은 잠시 속삭이며 짧은 이별을 청하곤 차로 향했다. 29번째 생일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올라타 노랗게 물든 노을을 구경했고, 태범석은 핸들에 턱을 대고 안호연을 응시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안호연이 짧게 중얼거리자 태범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거로 고마워하지 마.”

안호연은 빙긋 웃었다. 태범석에게 여러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한편으론 그가 불쌍했고 한편으론 그가 안타까웠으며 또 한편으론 그를 연민했다.

“난 그 약속 받으려고 한 거니까. 평생 사랑해 줄 거라는 말 지켜.”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속이란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약속을 내건 사람이 본인이었기에 잊을 수 없었다. 그가 부탁을 들어주면 안호연은 그를 온전히 사랑해 주려고 했다. 정말 완벽하게, 아무도 상처받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가에 차를 세운 태범석은 베이커리에 들러 케이크를 사 안호연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안호연은 물끄러미 케이크를 보았다. 사소한 기념일을 챙겨 준 게 처음이었다. 태범석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그 미세한 변화는 옆에 있는 안호연이 빠르게 알아차렸다.

“내일 결혼인데 이러고 있어도 돼?”

“응.”

“연우 씨가 서운해하지 않으려나?”

“조금 있다가 그쪽 가족과 식사만 하고 올 거야.”

“네가 결혼한다는 게 이상해.”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금방 네 곁으로 돌아올 건데.”

“만약 연우 씨와 날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오면?”

“표면적으론 박연우를 선택해야겠지. 당연하잖아. 그동안 쌓아 올린 돈을 전부 잃을 수 없으니까.”

태범석은 늘 이성적이었고 최고의 시나리오만 세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다솜을 놓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다솜이는 왜 뿌려 준 거야?”

“너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어제 깨달았어. 넌 평생 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단 생각. 우린 닮았어. 주제를 잘 아는데 외로움을 잘 타서 타인 없인 살 수 없어.”

태범석은 차로 안호연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묵직한 차가 서자 안호연은 바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나 태범석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 있어.”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가면 내일 결혼식에서 봐야 해?”

“뭐, 그렇겠지. 근데 올 거야? 거길 왜 와.”

태범석이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연우 씨가 초대해 주기도 했고, 네 결혼식이잖아. 내가 가야지. 그래도 내가 유일한 가족인데.”

“사람들 눈에 띄지 마. 박연우 쪽 집안에선 너에 대해 몰라. 말 나오면 곤란해.”

“신부 측 하객으로 갈게.”

“마음대로 해.”

태범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손을 뻗었다. 남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박연우와 나눠 낀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손으로 안호연의 뺨을 쓰다듬으며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태범석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안호연은 그가 사라지는 걸 보고선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사 준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으로 향했다.

생각 없이 걷던 안호연은 집 앞에 수북하게 놓인 하얀 안개꽃이 꽂힌 작은 바구니를 보곤 눈을 깜박였다. 꽃바구니와 함께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정지한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매년 이맘때쯤 누군가가 꽃을 보내오곤 했었다. 처음 꽃이 배달되었을 때 생일에 맞춰 태범석이 보낸 선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태범석은 그 꽃의 출처를 몰라 안호연은 매년 배달 사고로 도착한 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꽃이 문 앞에 있었다. 안호연은 고개로 좌우로 틀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꽃바구니를 자세히 살펴보던 안호연은 무언가를 발견하곤 무릎을 굽혔다. 옛날에는 없었던, 무늬가 없는 작은 카드가 꽂혀 있었다.

[기다릴게.]

꾹 눌러쓴 글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읽은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굳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매년 꽃바구니를 보낸 강중영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했다. 정말 강중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호연은 멍한 얼굴로 꽃을 보았다. 매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꽃을 보내왔을지 알면서도 강중영에게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너한테 못 간다니까.”

안호연은 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한테 가면 내가 정말 못된 새끼잖아.”

그런데 어떻게 가. 안호연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가 긴 한숨을 쉬었다가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자꾸 자신을 흔드는 그가 밉기도 했고 아팠으며, 또 한편으론 서러웠다. 지금까지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 같아서, 자신이 불순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누른 안호연은 꽃을 품에 안고 휴대 전화를 꺼냈다.

1211.

오메가 권익 센터로 연결해 주는 번호였다. 권익 센터는 주로 학대당하는 오메가를 보호하는 기관이었다. 안호연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제가 오래도록 학대당했어요. 그게 학대인지 몰랐는데 학대였어요.”

예전엔 학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스무 살엔 사랑해서 무조건 주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아마 강중영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쩌면 안호연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학대인 줄 모르면서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태범석에게 모든 걸 내주고 매번 용서했을 테다. 그리고 이번에도 강중영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안호연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태범석이 원하는 대로 그의 가족을 만들어 주고 점차 까맣게 죽어 갔을 텐데 강중영으로 인해 인생이 전환됐다.

[누구에게요?]

“각인한 알파에게요.”

자신의 상황을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남에게 자신이란 사람이 평범해 보이기를 희망했었으니까. 학대당하는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안호연은 점점 죽어 가고 있었고 그걸 스스로 벗어나야 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벗어나야 했다.

[각인이요? 동의한 각인이었고요?]

“각인을 권한 건 그쪽이었고, 각인이 싫다고 하면 떠날까 봐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동의하지 않아요.”

[이건 얼굴을 맞대고 신고를 받아야 할 거 같은데요. 근처 권익 센터에 방문할 수 있을까요?]

“네, 지금 바로 갈 수 있어요.”

안호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얀 안개꽃을 품에 안은 안호연은 돌아섰다. 어렸을 때 시작된 질긴 인연이 오늘에서야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근처 권익 센터에 도착한 안호연은 조사관을 배당받고 오랫동안 과거를 털어놓았다. 조사관은 구질구질한 과거를 경청했다. 안타까워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들어 주었을 뿐이다. 다만 그 감정의 몫은 안호연에게 고스란히 넘어왔다. 부끄러웠고 화가 났고 짜증이 났다. 온통 좋지 않은 감정들만이 남은 과거 속에서 마지막엔 그 감정들이 소강상태였다. 사건을 작성하던 조사관이 중간중간 질문을 던졌다.

“각인 중 쌍방 각인은 불법이고 둘 중 하나가 원하지 않으면 즉시 제거합니다. 물론 결혼을 했다거나 두 사람이 원하지 않은 경우엔 벌금을 내고 유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담당관이 배정되어 관리하는데 안호연 씨 같은 경우는 제거를 원하는 쪽이죠?”

“네.”

“지금 센터 내에 있는 시술실로 가시면 돼요. 한번 이런 식으로 각인을 지운 오메가는 이제 각인할 수 없고 태범석 씨에겐 강제 명령이 떨어질 거예요.”

“저…….”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한 사람이 더 있어요.”

“한 사람이 더 있다뇨?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절 각인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요.”

“그럼 일방 각인인가요?”

거의 표정이 없던 조사관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어렸다. 각인 자체가 생소한 일이라 일방 각인을 했다는 알파가 있다는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각인에 가두는 알파에 대한 황당함이었다.

“일방 각인한 알파라, 애매하네요. 그래도 각인 자체는 불법이라서 접수를 하고 우선 이에 대해선 신고 절차를 밟을게요. 상대방을 조회할 수 있을 만한 게 있나요?”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알아요.”

“그거면 충분히 가능해요. 거기 종이에다 적어 주세요.”

안호연은 종이에 강중영이란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다 적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조사관은 이제 가 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이 시간이 끝나기까지 고작 한 시간이 걸렸다. 늘 자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각인이 한 시간이 지나서 끝이 나 버렸다.

조금은 허무해 웃음이 나왔다. 유난히 시린 목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던 안호연은 추위에 시든 안개꽃을 보곤 코끝이 찡해졌다. 술이 고파 근처 술집으로 갔다. 이상하게 알탕이 먹고 싶었고 알탕에 소주를 한 병 마셨다. 취기가 올라 몸이 조금 뜨거워 길가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짐이 빠져 텅텅 비어 버린 집에 들러 휴대 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이 지나지 않았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

“축하한다, 안호연.”

안호연은 이제야 태범석에게서 벗어난 자신을 축하했다. 정말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생일 축하해.”

진짜 하루가 길어서, 너무 길어서 조금은 꿈같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꿈인 것 같아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었다. 자신을 따라다니던 악몽과 이별한 밤은 달콤했다.

* * *

안호연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아침이라 사람이 없는 숍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근처 옷 가게에서 근사한 옷을 사 입고 결혼식장에 갔다.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멋을 부린 안호연은 수많은 사람을 보곤 깊은숨을 내쉬었다. 화려한 옷차림과 좋은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을 보다가 태범석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태범석은 이곳에서 주인공이라 그가 어디 있는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가 쉬러 파우더룸에 갔다는 말을 들은 안호연은 망설임 없이 파우더룸의 문을 열었다.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태범석의 입가에 미세하게 미소가 생겼다. 안호연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한숨을 들이켠 안호연은 태범석을 앞에 앉았다.

“사람들 많으니까 나 아는 척하지 말라 했잖아.”

“앞으로 평생 안 해.”

안호연은 똑바로 태범석을 응시하며 말했다.

“뭘 그만해? 뒤늦게 질투라도 나? 나 네 거라고 했잖아.”

“이제 끝이야.”

와이셔츠를 입던 태범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 헛소리야. 애도 있는데. 다른 말 말고 집에 가 있어.”

“무슨 애?”

안호연은 방긋 웃었다.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누가 임신했대? 아아, 그거 거짓말이었어. 사기의 원칙 중 하나가 그거잖아. 상대방이 제일 원하는 걸 미끼로 쓰는 거. 제일 행복한 걸 집은 순간 덫에 빠지는 거지.”

그건 태범석이 안호연에게 가르쳐 준 방법이었고 그걸 고스란히 태범석에게 행했다. 태범석은 어금니를 갈았다. 최대한 침착하려고 했으나 그게 잘되지 않는지 단추를 채우다 말고 안호연 쪽으로 다가왔다.

“그 말을 믿으라고? 아니, 내가 널 믿은 게 바보지. 그럴 줄 알았어. 다솜이 뿌려 주니까 바로 본색 드러내는 거 안호연답네. 나한테 아이가 무슨 뜻인지 알면서 장난해?”

“나한테 다솜이로 먼저 장난한 건 너잖아.”

“장난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지. 더 열 받게 하지 말고 입 다물어.”

그가 안호연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화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망가져 흉측했다.

“안호연, 기회 줄 테니까 장난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셋 셀 동안 꺼져. 어제 거래한 거 잊은 거 아니지? 다솜이를 상대로 사기 칠 거야? 안호연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인간 이하가 하는 짓이야. 기회 줄 때 그만해.”

“인간 이하는 너고 무수히 기회를 주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도 너지. 내가 네 옆에 있는 거 내 의지라고 했는데도 나한테 상처만 줬어.”

얼굴이 붉어진 태범석이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안호연은 그의 팔을 잡았다.

“손찌검하지 마. 너 갖고 싶은 거 다 가지려고 사람 마음 이용하지 마. 진절머리 나.”

“왜 변했나 했더니 믿는 새끼가 나타나서 그렇구나. 호연아, 생각해 봐. 그 대단한 남자가 널 얼마나 보겠어. 순간뿐이야. 왜 그걸 몰라?”

안호연은 웃음이 났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결정한 거야. 넌 정말 쓰레기 같은 새끼거든. 아무 감정도 없으면서, 그저 호기심 때문에 각인하고 소유욕 때문에 손에 쥐고 있던 거잖아. 지금까지 함께해 온 정이 있어서 충고하는데 그런 식으로 살지 마.”

“안호연!”

그가 고함을 칠 때 안호연은 그의 팔을 떨쳐 버리고 파우더룸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사람들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목소리를 낮추더니,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갑자기 안호연의 휴대 전화가 울었다. 겁쟁이처럼 휴대 전화로 전화를 건 그의 비겁함에 속으로 비웃었다.

[너 뭐 하는 거야.]

“그럼 선택해 봐. 나야, 연우 씨야?”

[장난해? 이 결혼에 뭐가 걸렸는지 알아? 걸린 돈이 얼만데 선택하라는 거야.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넌 그래서 안 돼. 나한테 한 번도 진심인 적이 없었잖아. 너한테 내가 사람이긴 했어? 네가 소유하는 물건 중 하나였겠지.”

[안호연.]

“안호연이란 사람이 특별한 게 아니라 오메가라 특별했던 거겠지.”

[이리 와.]

“경고하는데, 다시 내 눈앞에 띄면 죽여 버릴 거야. 여기서 깔끔하게 끝 하자. 그게 서로한테 좋아.”

[미친 소리 그만해. 어제 뿌려 준 게 다솜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 좋으라고 뿌린 척한 거야. 다솜이 다른 데 있어.]

“마지막까지 다솜이를 물고 늘어지는 널 보니까 더 진절머리 난다. 나 보고 싶으면 다솜이 거기에 뿌려.”

[사랑해 주겠다며 네가 어떻게 날 떠나? 곧 돌아오게 될걸. 장난하지 말고 돌아와.]

안호연이 코웃음을 치며 파우더룸에서 멀어지자 태범석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너 어디 가?]

“너 없는 곳으로. 그곳이 어디든 좋을 거 같다.”

깔끔했고 속이 후련했다. 조금 후회되는 건 태범석의 낯짝을 때려 주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태범석에게 안호연은 딱 그 정도였다. 돈보다 못한 존재, 그러면서 남에게 주기 아까운 존재, 꼭 자신의 것이어야 했던 존재. 그 정도였다.

자신을 딱 그만큼 여기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호연의 가치도 딱 그만큼이다. 그래서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의 선택으로 만든 결과였으니까. 다만 이후로 태범석이 자신의 가치를 낮춘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안호연은 빙긋 웃으며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이제 모든 볼일을 끝마쳤다. 이곳에 더 있을 생각이 없어 안호연은 그대로 돌아서려고 했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강중영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였을까. 저 멀리서 강중영이 안호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호연이 시선을 피하자 강중영이 이쪽으로 걸어와 안호연의 팔을 낚아챘다.

“호연아.”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자.”

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이야기할 곳을 찾지 못해 빙빙 도는 안호연의 팔을 강준영이 낚아채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비품실인지 그곳에 의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안호연을 안에 세워 두고 문을 막고 선 강중영은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까요?”

보자마자 그런 말을 하면 안호연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면서, 사랑한다면서 왜 나는 안 되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잡힐 듯 말 듯 미쳐 버릴 거 같다고요.”

“너에 비해서 내가 너무 더러워. 나 같은 게 어떻게 널 만나.”

“안호연 씨.”

“더러워서, 끔찍해서 네 옆에 있으면 너한테 미안해서 안 되겠어.”

“미안해도 내 옆에 있어 달라고 애원해도 돼요?”

“아니, 하지 마. 나 진짜 자신 없어.”

“나도 호연 씨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약한 소리 하지 마.”

“약한 소리가 아니라 진짜니까 하는 말이야. 왜 나타나서 내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책임지지 않는 건데, 네가 뭔데, 안호연 네가 뭔데.”

“…….”

“네가 이럴 때마다 정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코끝이 시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안호연의 두 손을 잡고 울 것처럼 두 눈이 붉어졌다.

“진짜 못됐어. 너처럼 못된 놈은 세상에 없을 거야.”

“지금은 나 치료하는 것도 벅차서 너까지 돌아볼 수 없어.”

“나는?”

강중영이 물었다.

“너 아픈 거 중요하고 나 아픈 건 안 중요해?”

안호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안다.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왜 자꾸 강해진 마음을 잡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태범석에게 단호했던 마음이 강중영의 앞에만 가면 물렁해진다.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알 거야. 지금 그거 각인 때문에 그래. 각인 때문에 아파서 그런 거야. 예쁜 사람 만나서 연애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때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절할지도 몰라.”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또다.

“기다릴게.”

“구질구질하게 왜 그래?”

“구질구질해도 기다릴게. 내가 안 될 거 같아서 그래.”

“진짜 너 왜 그래?”

“그게 안 되니까. 놓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안 되니까.”

“진짜 왜 그래? 너 안 못났잖아. 가서 좋은 사람 만나.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니까!”

“내가 안 된다는데 왜 네가 이래라저래라 그래? 너나 그만해.”

“너 정말 왜 그러냐?”

안호연은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사랑해.”

안호연은 손을 올려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마디 흔들림 없는 그 말이 귀로 스며들자 촘촘히 벽을 세웠던 마음이 그대로 허물어져 내릴 것 같았다. 마음이 허물어지기 전에 안호연은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을 막고 선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문에서 밀리지 않았다. 그의 옷을 잡고 잡아당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왜 비키지 않느냐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내리찍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또 도망가려고요? 사실 나 좋아하잖아요.”

“그래, 네가 정말 좋아! 좋아서 안아 주고 싶어. 근데 지금은 내 품이 작아서 온전히 널 안을 수 없잖아. 그러면 넌 또 상처 입잖아. 난 그게 싫어. 계속 너한테 상처만 줘야 하는데 그건 정말 싫어.”

안호연은 속에 있는 말을 온전히 다 쏟아 냈다. 숨도 쉬지 않고 모든 걸 다 쏟아 냈다.

“호연아.”

안호연도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빨간 토끼 눈이 된 눈을 손가락으로 쓸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조금 더 기다릴게. 이번만 놓아줄 거야. 우리 계약 아직 끝난 거 아니잖아.”

“…….”

“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와서 안아 줘. 그럴 수 있지?”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와.”

안호연이 숨도 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갑자기 손을 벌렸다.

“한 번만 안겨 줘. 안아 주고 싶어.”

머뭇대던 안호연은 강중영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 품이 유난히도 따듯해서 빠져나오기 싫었지만 안호연은 억지로 몸을 떼어 냈다. 이번에도 자신이 강중영에게 안기지만, 다음에는 강중영을 안아 주고 싶었다. 옆으로 비켜선 강중영 대신 문을 열고 비품실을 빠져나왔다. 문 앞에 서 있는 강중영에게 손을 흔들곤 다시 돌아섰다. 만남이 기약된 좋은 이별이라 슬프지 않았다. 안호연은 강중영에게 돌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고 행여 그 시간 동안 강중영의 마음이 변한다 할지라도 안호연은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떠나간다면 기분 좋게 보내 줄 것이고, 만약 그가 기다린다면 행복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안호연은 식장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켰다. 겨울치고 햇빛이 따듯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좋은 날이라 안호연은 얼굴로 쏟아지는 태양이 눈부셔 손바닥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었다. 손바닥 때문에 넓었던 시야가 줄어들자 오히려 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 또렷해졌다. 안호연은 4차선으로 가 택시를 타고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과거와 멀어져 갔다.

* * *

이보다 더한 지옥은 없다.

비어 버린 집,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침대, 식어 버린 소파, 더는 소리가 나지 않는 부엌. 안호연이 떠난 후 강중영의 시공간이 모두 멈춰 버렸다. 강중영은 아침마다 자신의 체온을 데워 주는 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들어야 했고 그를 위해 옷을 골라야 했다. 그게 강중영의 삶이었고 그의 하루는 온종일 안호연을 위해 돌아가야 했으나 안호연이 없으므로 그의 모든 시간이 전부 멈췄다.

누군가가 미련하다고 강중영에게 말했을 때, 강중영은 비웃는 사람의 입을 꿰매 주었다. 그러자 아무도 강중영을 비웃지 않았다. 자신조차 가엾게 여기지 않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건 사양이었다.

한 번씩 그런 충동이 들었다. 안호연을 납치해 이 집에 가둬 둘까. 안호연을 가두고 자신까지 이 집에 가두면 완벽하지 않을까. 그러나 충동은 생각으로 그치고 만다. 그것은 완벽한 소유가 아닌 사육이었다. 강중영은 사육은 원하지 않았으나 고려 중이었다. 안호연이 엇나간다면 그렇게라도 할 생각이었다. 충동적인 욕구를 억누르는 강중영을 안호연은 매일 시험했다.

[금일 오메가 권익 센터에 늦지 않게 오시기 바랍니다. 담당 조사관 박서진.]

그때마다 강중영은 안호연을 비웃었다.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러는지. 강중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안호연은 강중영의 불법 각인을 센터에 고발했다. 센터에선 고발자를 알려 주지 않았으나 당연히 안호연이라고 생각했다. 강중영이 안호연에게 각인한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안호연밖에 없었으니까. 돌아오겠다던 사람이 자신을 고발한 걸 알았을 때, 배신감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안호연이 시험할수록 강중영은 기뻤다. 자신이 상처 입을수록 안호연은 더 죄책감을 느끼고 떠날 수 없을 테니까. 자신이 고통에 허덕일 때마다 안호연도 그 상처를 보고 같이 고통에 허덕일 것이다. 안타까워하고 아파할 걸 알기에 자신이 고통을 입을 때마다 즐거웠다.

안호연은 정이 많았고 자신을 많이 사랑하니까. 그걸 잘 알았고 그걸 잘 이용했다. 바보처럼 마냥 기다리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풀어 주어야 할 때와 풀어 주지 않아야 할 때를 적절히 이용했다. 강중영 앞에 앉아 있던 박연우가 담배를 비벼 끄며 미소를 지었다. 금연 구역인 호텔 내부에서도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담배를 피웠으나 강중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호연 씨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그 바에서 널 만났던 것까지 모두 네가 설계했다는 걸.”

“호연 씨가 제 세계를 부쉈으니까 저도 호연 씨 세계를 부수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널 선택했을까?”

“아뇨. 호연 씨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강중영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왜?”

“호연 씨는 날 사랑하니까. 상처 입은 절 외면하지 못하죠. 호연 씨를 무력으로 쥐었으면 그 사람은 또 도망갔을 거예요.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게 해야죠. 일종의 덫입니다.”

박연우가 입술을 벌렸다. 그녀는 늘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안호연을 도와주지 않는지 궁금했다. 안호연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안호연이 왜 태범석에게 얽혀 있는지 모든 걸 알면서도 강중영은 나서지 않았다.

“너같이 음습한 자식을 호연 씨는 계속 불쌍히 여기겠네. 그래도 그건 너무하지 않아?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잖아.”

강중영은 입술 끝을 올렸다.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하자 박연우의 얼굴이 굳었다.

“박연우 씨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죠.”

“와, 무서운 새끼. 너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알아 온 사이이긴 한데 매일 낯설어.”

강중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 근처의 권익 센터로 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박연우의 얼굴을 잠깐 볼 생각에 들렀다.

“태범석, 잘 부탁드려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옥으로 가는 특별 코스로 모시고 있어.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강중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박연우를 보았다. 유난히 정이 많아 안호연에게 걸린 그녀가 탐탁지 않았다.

“그리고 입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호연 씨가 이 일을 알면 거래는 끝이에요. 그쪽이 욕심냈던 주식이 어떻게 토막 나는지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하든가.”

“무섭다, 너.”

“그러니까 입조심해요.”

“알았어, 알았어.”

“아예 호연 씨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더 좋고요.”

“호연 씨는 네가 이런 놈인지 평생 모를 거 아냐.”

“왜 알려 줘야 하는데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숭 정도는 떨 수 있는 건데.”

강중영은 안호연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가 그러면 그런 거겠지. 이제 일어나자. 곧 2시네. 너도 조사받으러 가야 하잖아. 굳이 조사까지 받으러 가는 이유는 뭐야? 변호사도 선임했잖아.”

“거기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태범석? 거기서 꽤 버티고 있던 것 같은데.”

“금방 포기하게 될 겁니다.”

“왜?”

“그런 놈이니까. 그럼 이만 나가 보죠.”

정색한 박연우가 손을 흔들었다. 박연우가 빨리 나가라고 등 떠밀지 않아도 강중영은 나갈 생각이었다. 조사를 빨리 끝마칠 생각이었다. 그는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오메가 권익 센터로 갔다. 센터 B동이 그가 가야 할 목적지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꽤 젊은 조사관이 앉아 있었다. 조사관이 몇 없는지 조사실 안에 조사관 둘과 한쪽에 작은 구치장이 있었다. 구치장 안에 누군가가 모포를 둘러싼 상태로 누워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사관이 인사를 하자 강중영이 고개를 까닥였다.

“강중영 씨 맞죠?”

“네.”

“혹시 모르니 신분증을 보여 주세요.”

강중영이 신분증을 내밀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강중영에게 내밀었다.

“대화한 내용은 모두 녹화돼요. 동의하시죠?”

“네.”

“그러면 조사 시작할게요. 정확하고 빠른 답변을 해 주시면 빨리 댁으로 귀가하실 수 있어요. 강중영 씨, 안호연 씨를 각인한 게 맞죠?”

“네.”

“언제 각인한 거죠?”

딱딱한 얼굴로 묻는 조사관 앞에서 강중영은 팔짱을 끼었다.

“안호연한테도 말하지 않은 걸 왜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사생활입니다.”

“이봐요. 법을 어겨 놓고 이러면 안 되죠. 법을 어기면 전 조사를 해서 상부에 보고해야 해요. 이건 나라님이 와도 똑같은 거니까 순순히 말해요.”

“3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요.”

안호연이 자고 있던 날. 그만의 산타가 되어 양말에 반지를 집어넣은 날, 강중영은 안호연을 물어 각인했다.

“왜요? 무슨 이유로 한 건데요?”

“조사관님은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까?”

“질문에 대답이나 하시죠.”

“소유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에게 이미 각인한 사람이 있다면요. 그래서 불안하면요. 전 어떤 이유로든 그 사람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이 자신을 잡아 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 방식대로 잡은 겁니다. 절대 안호연을 포기할 수 없도록요.”

“왜요? 이미 각인한 알파가 있다면 포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조사관님은 이해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그 사람은 제 삶을 망가뜨려 놨어요. 제가 세운 규칙을 모두 짓밟고 그 위에 올라섰죠. 그 사람은 나의 주인인데 어떻게 포기하죠?”

“강중영 씨, 이상한 말 그만하고요. 보니까 지배자형 알파로 판정이 나왔던데요. 혹시 물어서 오메가를 소유하고 싶었던 건 아닙니까? 주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사실 안호연 씨가 각인했다는 걸 모르고 물었던 거죠. 그러다 재수 없게 각인이 된 거고요.”

강중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랬다면 제 손으로 각인된 이를 뽑았겠죠.”

“강중영 씨, 그럼 안호연 씨가 각인된 걸 알고도 물었다는 겁니까?”

“네.”

수사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래서는 이 수사가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제가 각인을 해서 안호연 씨가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잖아요.”

“잠재적인 이유가 있죠. 각인했다는 건 집착을 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고요. 무엇보다 러트 기간에 정신이 없을 때 안호연 씨를 찾아갈 수 있죠. 그땐 사람도 본능이 커지는 시기잖아요.”

강중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벌어지지 않은 일로 예비 범죄자로 만드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러트가 와도 그걸 억제할 수 있는 약이 있는데요. 이봐요, 제 앞에 앉아서 수사하는 당신보다 안호연 씨를 위해요. 오메가라서 안호연 씨를 보호한답시고 각인을 지우려고 이런저런 죄목을 만들려는 거 굉장히 불쾌합니다. 전 안호연을 해코지하려고 각인한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안호연 씨가 굉장히 불쾌하게 여길 수 있죠.”

“당신이 안호연 씨도 아닌데 어떻게 압니까? 그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물어보지 않아도 알죠. 당연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제게 답변해 주세요. 아, 안호연 씨가 불쾌하다고 해도 각인을 지울 생각은 없습니다.”

수사관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이 나라 법이 그렇다. 쌍방 각인이 아닌 일방 각인에 대해서 어떤 무력도 행사할 수가 없었다. 그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강중영은 고자세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면 강중영 씨는 안호연 씨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아뇨.”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거. 이게 저희가 우려하는 사항이에요.”

“곧 결혼할 겁니다.”

“네?”

그가 어이없단 얼굴을 했다.

“결혼할 사람이 왜 결혼할 사람을 신고하는데요?”

“저를 많이 사랑해서요.”

“강중영 씨, 여기가 장난하는 곳인 줄 압니까?”

“안호연 씨에게 물어보시든가요.”

그가 아픈 머리를 쥐어뜯었다. 강중영은 팔짱을 낀 상태로 앉았다. 그러자 조사관이 머리를 쥐어뜯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죠. 안호연 씨에게 물어볼 것도 몇 개 생겼고요.”

박서진은 일어나 사무실 끝에 있는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강중영은 팔짱을 낀 상태로 쇠창살 안을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발로 쇠창살을 발로 차자 모포를 덮고 자고 있던 태범석이 놀라 눈을 떴다. 그러곤 눈앞에 있는 강중영을 보곤 이를 갈았다.

“왜 버팁니까? 시원하게 뽑지.”

“네가 안호연 숨겨 뒀지? 어디다 숨겨 놨어?”

“숨긴 적 없는데요.”

“그럼 왜 여기에 있는데?”

“그걸 말할 이유는 없죠.”

강중영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네가 숨겨 놓은 거 다 알아. 그 새끼는 알파가 없으면 못 사는 새끼야. 네가 데리고 있어서 우쭐하겠지. 근데 그거 알아? 안호연은 다시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어. 안호연이 날 어떻게 떠나.”

“왜요, 다솜이 때문에요?”

순간 태범석의 동공이 확장됐다.

“안호연이 그새 나불나불 다 불었나 본데, 그때 뿌린 거 다솜이 아니야. 나만 알고 있어.”

강중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좋겠네요.”

“강중영!”

“제가 사람한텐 존댓말을 쓰는데요. 당신처럼 짐승 이하인 사람에겐 존댓말도 아깝네요.”

“뭐가?”

“네 새끼한테 존댓말도 아깝다고 말하는 건데 대충 예의는 차리죠.”

“이 새끼가!”

태범석이 고함을 지르며 강중영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쇠창살이 있어 강중영이 살짝 뒤로 몸을 빼자 태범석의 주먹이 닿지 않았다. 강중영은 그의 앞에서 웃었다. 얼마 전 안호연을 데리고 가며 승자처럼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저는 그쪽이 꼭 죽었으면 해요. 그쪽만 사라지면 되거든. 건드려도 될 게 있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게 있는데 태범석 씨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네요.”

그쪽만 사라지면 안호연을 소유했던 사람이 모두 없어진다. 안호연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도, 안호연의 배에 처음으로 아이를 심었던 사람도 말이다. 강중영이 눈을 휘고 웃자 태범석이 뒷걸음쳤다.

“몸조심해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달려들었던 태범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중영 씨.”

조사관이었던 남자가 강중영을 부르자 강중영은 느리게 굽히고 있던 무릎을 폈다.

“왜 그쪽에 가 있어요? 우선 앉아요.”

“네.”

“안호연 씨께 강중영 씨가 연인이냐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신고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각인한 사실을 확인했으니 가볍게 벌금형으로 마무리할 것 같네요.”

“네.”

“그럼 이만 나가 보세요.”

강중영은 고개를 숙이고 나가면서 태범석을 흘끔 보았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조사관님, 저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저렇게 버티다 보면 강제 명령이 떨어지겠죠.”

“그렇군요.”

잘 들었냐는 듯 태범석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던 강중영이 입꼬리를 말았다.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태범석의 눈이 좌우로 미세하게 떨렸다.

“미친 새끼들. 사람의 생니를 뽑는다고? 누구 허락을 맡고? 누가 그걸 허락한대?”

“거참, 조용히 안 해요? 그럼 그쪽은 안호연 씨 허락 맡고 각인했어요? 법이 그런 걸 어떡해요.”

“그럼 저 자식은?”

태범석의 손가락이 강중영에게 향했다.

“일방 각인이잖아요. 그리고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데, 더 조사할 가치도 없고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은 조사관이 말하자 태범석이 강중영에게 고함을 질렀다.

“걘 내 거야! 내 건데 누구 연인이라는 거야!”

강중영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정리하곤 태범석 쪽을 흘끔 보았다. 그러곤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어요. 안호연이 어떻게 네 거야, 내 눈에 띈 순간부터 내 거지. 그러니까 뺏기지 않게 잘했어야지. 적당히 내숭도 부리고 적당히 눈물도 흘려 주고 말이야. 그렇게 바보처럼 악역만 자처하다가 정말 바보가 됐잖아.”

“헛소리 마.”

“평생 그렇게 착각 속에서 살든가요.”

강중영이 빙긋 웃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강중영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조사관에게 인사하곤 조사실에서 빠져나갔다.

* * *

크리스마스이브다. 캐롤이 거리에서 사라져 버렸으나 사람들은 줄지 않았다. 평소보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안호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게에 들어갔다.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입구에 멍청하게 선 안호연을 보고도 가게 주인은 익숙한지 따분한 하품을 했다. 안호연은 눈만을 돌려 진열장을 구경하다가 빠르게 무언가를 집어 계산대로 갔다.

“이브 땐 연인하고 색다른 놀이를 해 보는 것도 좋죠. 나중에 또 오시면 서비스 챙겨 드릴게요.”

안호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포장해 주세요.”

“예에.”

강중영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를 만나면 꼭 주고 싶은 선물이 있었다. 그가 다시 자신에게 다시 족쇄를 채워 주기 바랐다. 안호연은 포장을 마친 상자를 들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평소라면 사람이 별로 없어야 했지만, 거리엔 사람들이 둘씩 걸어 다녔다. 집에 들어오다가 우편함에 무수히 꽂힌 우편물을 뽑았다. 전 세입자의 우편물과 안호연의 우편물이 뒤섞여 있었다. 안호연의 이름으로 온 우편을 찾던 손이 멈췄다. 그 사이에 벌금 고지서가 있었다. 고지서에 찍힌 금액을 본 안호연은 주머니에 우편물을 넣고 집으로 갔다.

얼마 전 작은 집을 구한 안호연은 며칠이 지나도 집이 어색해 오늘에서야 짐을 풀었다. 그동안 센터에 맡겨 놓은 짐이 집으로 들어오자 더 작아졌다. 그래서 안호연은 물건을 처분해야 했다. 유난히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안호연은 뭘 버릴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쓸 물건과 버릴 물건을 나누는 건 고통스러웠다.

한참 물건을 정리하던 안호연은 배가 고파졌다. 배를 문대던 안호연은 휴대 전화로 근처 중국집을 검색해 최소 주문 금액 때문에 짜장면을 두 개 주문하고 뒤로 벌러덩 누웠다. 잘 포장된 네모난 상자가 있었고 옆엔 강중영이 크리스마스 때 줬던 반지가 테이블 유리를 통해 보였다.

안호연은 긴 한숨을 내쉬다가 벌금이 나온 고지서를 눈으로 훑었다. 각인은 불법이었고 안호연도 법을 비껴갈 수 없었다. 얼마 전 두 사람의 처분을 통보받은 안호연은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태범석은 의외로 쉽게 안호연을 포기했다. 하긴, 쉽게 포기하는 게 오히려 더 그다운지 모른다. 태범석의 치아를 전부 뽑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기적인 태범석은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문제라면 강중영이다. 그는 안호연이 내민 마지막 기회를 발로 찼다.

화가 났을까?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아마 강중영은 화가 났겠지. 그는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으로 느꼈을 테지만, 시험이 아니었다.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 지배자형 알파는 자신만의 오메가를 가짐으로써 만족을 느끼는데 각인을 한 번 지운 오메가는 재각인이 불가했다. 그런데도 강중영은 또 그 기회를 거절하고 안호연을 기다렸다. 이젠 안호연도 백기를 흔들어야 했지만 늘 강중영의 전화번호를 누를 때면 망설여졌다. 자신이 그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강중영에게 안호연을 가져다 대면 한없이 작아졌다.

한없이 작아지는데도 강중영이 보고 싶은 건 곧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안호연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강중영이 처음으로 청혼한 날이었다. 한숨을 쉬며 선물을 물끄러미 보았다. 안호연은 휴대 전화를 들어 강중영의 번호를 내리눌렀다. 오늘따라 유난히 통화 연결음이 길었다. 길고 또 긴 통화 연결음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했어요? 이제 안 기다려도 돼요?]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혼날래요?]

수화기 속 그가 화를 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안호연은 침만 삼켰다.

[내 사랑이 정말 우습지? 이젠 신고까지 해요? 내가 그렇게 싫어서? 벌금이 이백이에요.]

“내가 낼게.”

[그래요, 그건 호연 씨가 내요.]

“미안해.”

[그럼 빨리 와요. 일주일간 못 봤더니 미치겠네. 다 안호연 씨로 보여요. 설마 드라마처럼 일 년간 시간 낭비하다가 나타날 건 아니죠? 진짜 낭비예요, 그거.]

“아니. 그건 아닌데. 기다린다고 했잖아.”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순 없죠. 호연 씨가 자꾸 밀어내는데, 바람이나 피워야 할까 봐요.]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다면 말릴 수가 없었다.

“그게…….”

[이럴 땐 안 된다고 해야지. 왜 을처럼 멍하니 있어요. 계약서에도 호연 씨가 갑이라고 써 놨잖아요. 그리고 걱정 마요. 예전에 안호연이 미워서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했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다 호연 씨하고 비교해서 이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느니 안호연 씨랑 살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었거든요.]

“뭐야, 그게.”

[사랑한다는 말이죠.]

강중영의 속삭임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벌금 납기일이 1월 20일인데 은행에서 만날래요?]

“그게 뭐야.”

[보고 싶다는 말이에요. 안호연 씨는 저 안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저 사랑은 하고요?]

“많이.”

[그럼 만나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요. 아직도 내게 당당하지 못해요? 진짜 어색하게 1~2년 후에나 나타나서 그동안 피 말릴 거예요?]

“아니.”

[그럼 그때 만나요.]

“기다린다고 해 놓고. 순 거짓말쟁이.”

수화기 안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강중영이 웃고 있었다.

[거짓말 아니에요. ○○은행에서 봐요. 안 나오기만 해 봐.]

“응. 그때 보자.”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날 그에게 찾아가려고 했다.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을 만들어 줬던 것처럼 자신도 강중영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봐, 기다린다고 한 말 거짓말 아니잖아요.]

“그러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나 달콤하다. 그리고 그 말에 긍정적인 대답을 죄책감 없이 해 줄 수 없을 땐 더. 전화를 끊은 안호연은 여운에 취해 눈을 감았다. 빨리 그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기다려지죠?]

“응.”

안호연은 눈을 반쯤 감았다. 그날이 기다려지긴 했으나 그것보다 더 빨리 강중영을 보고 싶었다.

[지금 만날래요?]

“어떻게 만나.”

[보고 싶으면 나와요.]

안호연은 숨을 멈췄다.

“여기 있어?”

[네.]

“어떻게?”

[보고 싶을 때마다 여기 와서 기다렸거든요.]

“나 있는 데를 어떻게 알고?”

[모를 수가 없죠.]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 이사한 것도 알고 있었어?”

[내가 모르면 안 되잖아요. 온통 당신 생각만 한다고요. 호연 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잠이 안 와요. 안 내려올 거예요? 그냥 갈까요?]

“응.”

[아직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을 강중영이 눈에 선해 안호연은 눈을 내리감았다.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을 원했으니까.

“내가 갈게. 조금만 기다려.”

[호연 씨, 내일이 크리스마스예요.]

“알아.”

[그래서 더 보고 싶어요.]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보자.”

[그러죠.]

안호연은 뜨거워진 휴대 전화를 어깨로 받치곤 아까 벗어 두었던 외투를 입었다. 그러곤 상자 꾸러미를 쥐었다.

“지금 어디야?”

[이제 집에 가야죠.]

“그래.”

[좋은 꿈 꿔요.]

살금살금 창문을 연 안호연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익숙한 차가 저 멀리 서 있는 걸 확인하곤 불도 끄지 않은 상태로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 뒷문으로 나간 안호연은 곧장 큰길가로 나갔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아탔다. 행선지를 묻는 기사에게 안호연은 조용한 목소리로 어딘가로 가자고 했다. 여기서 대략 1시간 거리인 그곳은 강중영의 집이었다. 안호연은 침을 삼키곤 휴대 전화를 계속 쳐다보았다. 빠르게 달리는 택시 안에서 안호연은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이 짧아져서야 강중영의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주차장에 차가 없었고 집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강중영이 도착하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킨 안호연은 그의 집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초조하고 불안한 것.

안호연은 추위에 손을 비비며 자꾸 주차장 쪽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낯익은 검은 차가 멀리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언제나처럼 차를 깔끔하게 주차한 남자가 어두운 얼굴을 하곤 차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의 늘어진 어깨를 보자 두근거리던 가슴이 아파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댔다.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대문 앞에 서 있는 안호연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날,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난 탓일까. 그의 얼굴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가 웃지 않자 안호연도 덩달아 긴장됐다. 침을 삼키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크리스마스 날 줄 선물이 있어서 왔어.”

안호연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크리스마스라 참을 수가 없었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우는 사람처럼 사정없이 구겨지더니 멀리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뛰어와 안호연을 빈틈없이 안곤 안호연의 얼굴에 무자비한 키스비를 마구 뿌렸다.

“왜 놀라게 해요. 왜 그래요. 얼마나 날 놀라게 할 건데요?”

“내가 잘못했어?”

“아뇨,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그가 안호연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원래 크리스마스 날 널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안호연은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내밀었다.

“가져. 이젠 네 거야.”

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안호연이 내민 상자를 그 자리에서 열어 보았다. 작은 상자 안에 족쇄가 들어 있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기뻐하고 있었다. 강중영의 눈에 빛이 스며드는 건 처음이라 안호연도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보았다.

“날 묶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네가 내 유일한 주인님이자 사랑이야.”

강중영은 입술을 깨물더니 바로 몸을 숙여 안호연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 주곤 고개를 들었다.

“잘 돌아왔어요. 이젠 내 곁에서 떠나지 마요. 또 떠나면 그땐 당신 발목을 자를 거예요.”

부드럽게 발목을 죄어 오는 감촉, 부드럽게 자신을 안아 오는 사랑스러운 사람. 그제야 안호연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단단한 철옹성 같은 집으로.

그가 이끄는 곳으로.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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