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
수능을 보겠다.
그렇게 안호연이 선언했을 때 강중영의 얼굴은 일그러졌었다. 그의 수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수능을 본 안호연은 올해 새내기가 되었고 무사히 한 학기를 마쳤다. 새로운 학기가 또 시작되자 안호연은 대학 행사를 따라다니느라 분주했다. 대학 축제가 있었고 체육대회가 있었으며 한참 대학 행사를 따라다니다 보니 기말고사가 돌아왔다. 이렇게 바쁜 적은 처음이라 숨이 가빴으나 이제야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돈이 많은데 대학에 왜 가요?”
급하게 머리를 말리는 안호연을 향해 강중영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아침마다 이런 표정을 지었다. 등교할 때마다 싫다는 티를 내는데 안호연은 모른 척하곤 했다.
“내가 돈이 많은데 대학에 왜 다녀요? 그냥 장가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건 네 돈이잖아.”
“내 돈이 당신 돈이지.”
“아니지, 네 돈은 네 돈이지.”
“결혼하면 호연 씨 돈이죠. 호연 씨, 저하고 결혼할 생각 없어요? 왜 결혼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요?”
강중영과 또 아침에 시비가 붙었다. 두 사람이 결혼 약속을 하긴 했으나 안호연은 연애를 더 길게 하고 싶어 보류 중이었다.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있어 결혼을 하나 하지 않나 똑같다는 게 안호연의 결론이었다.
“어차피 동거 중이잖아.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지. 더구나 아이도 원하지 않잖아. 결혼은 졸업하면 하자.”
솔직히 맘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결혼하게 된다면 그의 가족을 만나야 했는데 그게 조금 두려웠다.
“다르죠. 결혼하면 법적으로 당신을 보호해 줄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애를 원하지 않아서 결혼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결혼하고도 아이를 원하지 않은 부부는 많아요. 아직까진 아이한테 우리 사이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성적인 강요를 받으며 살아온 안호연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돌연 딩크족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강중영을 이해하면서도 안호연은 한편으론 서운했다.
“결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여유가 되면 하고 싶다는 거잖아.”
그가 골반에 손을 올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반지는 왜 안 끼고 다니는데요?”
“실습 때마다 반지를 빼야 해. 뺐다 꼈다 반복하다가 잃어버릴지도 모르잖아.”
“집엔 왜 늦게 오는데요? 11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잖아요.”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서.”
아르바이트란 대목에서 안호연은 그의 눈치를 봤다. 대학생이 되면서 그가 제일 불만으로 여기던 게 아르바이트였다.
“이게 다 대학을 다니면서 벌어진 일인 거 알아요?
“그건 아니지.”
“너 정말 안 되겠다. 그거 갖고 와.”
결국 강중영의 입에서 그걸 갖고 오라는 말이 떨어졌다. 안호연은 눈이 아래로 처졌다. 강중영은 자신이 불리할 때마다 그걸 걸고 넘어졌다. 안호연은 방으로 가 링을 들고 나왔다. 안호연의 대학 입학이 그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는지 얼마 전에 링을 구입해 안호연에게 채워 줬다.
“이제 외출할 때마다 껴. 소변 볼 때마다 허락 맡는 거 잊지 않았지?”
“알았어.”
“반지도 끼고.”
곧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에서 오래 머무는 안호연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링을 차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링을 낄 때 기분은 좋았으나 강중영의 간섭이 더 심해져 도서관에서 집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신 문자 조금만 해.”
안호연은 반지를 끼우며 말했다.
“호연 씨가 이렇게 링까지 끼고 밖을 활보하는데 어떻게 문자를 조금만 해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듯이 강중영이 물었다.
“나 시험 망치면 가만 안 둬.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안 좋아서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잖아.”
“집에서 해요. 집에 도서관 만들어 줄게요.”
“공부할 수 없잖아.”
“왜 못해요?”
안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려는 할게요.”
고려는 하겠다는 강중영을 보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다는 티를 낼 바엔 자신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해 버리면 정말 회사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 위인이기에 안호연은 그 말을 고이고이 마음에 담아 두었다.
“호연 씨.”
“왜?”
“근데 내가 사 준 차는 왜 안 타요?”
첫 운전면허를 취득하면서 강중영이 입학 선물 겸 사 준 차가 있었다. 휘가로. 가격 면에서 절대 부담스럽지 않았으나 외형이 문제였다. 하늘색 차는 누가 봐도 귀엽고 작아 신체 건강한 안호연이 타기에 부담스러웠다. 강중영 눈엔 안호연이 앙증맞고 귀여울지 모르겠으나 타인의 시선에는 과했다.
“그걸 어떻게 타고 다녀.”
“안호연 씨가 타고 다니면 귀여울 거 같은데 역시 안전 면에서 별로인 거 같아요. 나중에 더 어울리는 차로 사다 줄게요.”
“이미 세 대나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차를 주차할 곳이 없었다. 그가 하나씩 선물해 준 차는 유료주차장에 고스란히 모셔 놨다. 매달 나가는 주차정기권 때문에 안호연은 등골이 휘었다.
“아뇨. 하나 더 있어야겠어요.”
미친놈. 안호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중영의 속이 뻔히 보였다.
“주차할 곳이 없다고.”
“우리 집에 주차할 곳 많아요. 우리 집으로 가죠.”
이게 강중영 속셈이다. 강중영은 이 좁은 집에서 이사해 먼 자신의 집까지 같이 가길 바랐다. 그 이유는 하나다. 강중영은 안호연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싶어 했다.
“그럼 학교까지 데려다줄게요.”
“싫어.”
그는 학교에 데려다주고 싶다고 떼를 쓰는 중이다. 데려다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라면 강중영이 강의실 안까지 따라온다는 점이다. 강의가 시작될 때까지 강의실에서 안호연과 이야기를 하다가 수업이 시작하면 칼같이 가곤 했다. 저 멀끔한 슈트 차림으로 말이다. 그래서 안호연은 그가 학교에 오지 않길 바랐다.
“봐, 반지도 꼈잖아. 뭘 못 믿어서 학교까지 오려고 해?”
“안호연 씨를 못 믿는 게 아니고 주위 사람들을 못 믿는 거죠.”
“하?”
“내가 호연 씨 애인이라는 것도 알려 주고 싶고요.”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콧등을 눌렀다.
“네 눈에 내가 예쁠지 알겠는데 걔들 눈엔 노땅이거든.”
계속 진행되는 설전에 시간이 흘러 강의 시간에 맞춰 가기 글렀다. 한숨을 푹 내쉰 안호연은 시계를 훑어보았다. 적어도 집에서 8시에 나가야 첫 강의에 맞춰 갈 수 있는데, 벌써 시간이 10분이 훌쩍 넘었다.
“나 또 늦었잖아.”
“늦으면 어때요? 지각 하나가 늘어나는 거지. 늦은 김에 하고 갈래요?”
“뭘?”
“섹스요.”
“무슨 섹스를 밥 먹으라는 듯이 권해.”
안호연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끌렸다. 요즘 기말고사를 준비하느라 강중영과 관계를 가지지 않은 지 꽤 됐다. 삼 일 됐나. 남이 들으면 코웃음 치겠지만, 매일 관계를 하던 둘이 삼 일을 참은 건 기적이었다.
“오늘 딱 한 번 있는 기회예요.”
“그렇지 오늘 딱 한 번 있겠지. 내일도 딱 한 번 있는 기회고.”
처량하게 눈꼬리를 내리고 중얼거리는 그가 유난히 섹시했다. 침을 꿀꺽 삼킨 안호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게 웃겼다.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강중영을 밀었다.
“싫어.”
“진짜 너무하네요.”
“갈 거야.”
“데려다준다니까요.”
기어코 현관 앞으로 간 안호연은 주저앉아 단화를 신었다. 그러자 좁은 현관으로 비집고 나온 강중영이 신발을 신으려 애썼다. 구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를 보며 안호연은 혀를 찼다. 뛰듯이 계단을 내려가자 그도 뛰듯이 따라왔다. 안호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고 집에 돌아갔나 싶어 안도할 때 안호연 옆을 스쳐 지나간 차가 빵빵거렸다.
차는 강중영의 차였다. 역시 동반 등교를 포기할 강중영이 아니었다. 본체만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버스정류장으로 가자 강중영이 차를 느리게 운전하며 안호연 뒤를 따라왔다. 창문을 내린 강중영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뺐다.
“이거 타면 지각 안 해요.”
“그걸 어떻게 믿어. 저번에도 타니까 그대로 바다로 갔잖아.”
“그날은 정말 내려 주기 싫었거든요. 그러니까 왜 멋대로 예쁜 옷을 입어요. 내 탓이 아니라 호연 씨 탓이죠.”
정말 기적의 논리였다.
“청바지에 티였어.”
“어차피 수업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때 튀었던 수업이 오늘 수업이거든. 그리고 그 교수님이 제일 깐깐하단 말이야.”
안호연은 옆에 따라붙어 느리게 차를 모는 강중영에게 대꾸하다가 눈앞에서 지나가는 버스에 빠르게 버스정류장까지 뛰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까지 가려면 환승을 해야 하는데 눈앞에서 그 버스가 지나갔다. 휴, 한숨이 났다. 이제 남은 버스는 한참 돌아가는 버스였다. 막 지나간 버스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10분은 기다려야 했다. 강의까지 시간이 촉박해 발을 동동거렸다. 택시를 탈까 잠시 고민하는 안호연에게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중영의 차가 유난히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빠앙.
어서 타라고 유혹하는 클랙슨 소리에 안호연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학교로 가자. 학교로 가는 거지? 제발 학교로 가자?”
안호연이 주문을 걸듯 속삭이자 강중영은 안호연의 상체에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그의 입꼬리에 묻은 미소가 불순해 안호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강중영의 차가 출발했다.
“학교로 가.”
“오늘 무슨 날인지 정말 몰라요?”
“무슨 날?”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날이 있나. 머릿속으로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는 중요한 날은 없었다.
“곧 러트인 거 알죠?”
그의 러트는 안호연에게 달갑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다른 곳에서 생활했다. 길면 4일 빠르면 3일 동안 안호연은 혼자 지냈고, 그도 고통스러워했다.
그가 약한 말로 안호연을 살살 꾀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했다. 안호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자 강중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갔다 오면 많이 예뻐해 줄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아르바이트 끝나면 11시잖아요. 가끔 더 늦을 때도 있고요. 전 일 끝나면 7시인데.”
“생활비는 벌어야지.”
“월급 두 배로 내가 줄게요.”
안호연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냥 난 내 돈이 필요해서 그래. 네가 번 돈이 아니라 내가 번 돈.”
“어디에다가 쓰려고요?”
“어디긴…….”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신이 번 돈으로 무언가를 사 줄 때 행복했고 사회생활을 하는 재미도 있는 데다 100% 강중영에게 의지를 하지 않아도 됐다. 이제야 사람이 사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돈 많이 모아서 결혼해야지.”
“제가 돈이 많은데, 또 돈을 모아서 뭐 하려고요?”
“쓸 곳이 있어.”
“안 알려 줄 거예요?”
“응. 그건 안 알려 줄래.”
“또 비밀 만든다.”
그가 작게 으르렁거렸다.
“이번 한 번만 봐주라.”
안호연은 손가락 하나를 쫙 펴며 속삭였다.
“딱 한 번 눈감아 줄게요. 다 왔어요.”
의심이 미안할 정도로 강중영의 차는 정직하게 대학 앞에 섰다. 시간을 확인한 안호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버스로 30분 넘게 걸리는 거리가 차로 15분 만에 도착했다.
빵빵.
귀가 째지는 클랙슨이 울렸다. 안호연이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 차창이 내려갔다.
“죽을래요?”
“나 빨리 가야 해.”
“인사도 안 하고 가려고요?”
“아.”
강중영은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렸다. 차를 태워 준 대가로 뽀뽀를 원했다. 안호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이라 한적했으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애정 행각을 하는 건 아무리 안호연이라도 부담스러웠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고민하던 안호연이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곤 가만히 운전석에 앉아 뽀뽀를 기다리는 강중영의 두 뺨을 꽉 부여잡고 가볍게 뽀뽀했다.
“공부하고 올게.”
“책 들어 줄까요?”
그가 턱으로 무거워 보이는 전공 책을 가리켰다. 그러자 안호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책만 들어 줄게요.”
“아냐.”
강중영이 대학에 들어설 때면 궁금증이 묻은 눈들이 그에게 실리곤 했다. 그때마다 안호연은 속에서 질투가 났다. 황급히 고개를 젓자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댄 강중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안호연도 손을 흔들어 주고 강의실로 달려갔다. 안호연이 강의실로 들어설 때쯤 과대표가 출석표를 읊고 있었고 교수는 강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석을 마친 안호연은 빈 의자에 앉았다. 딱히 친한 동기는 없었다. 나이가 많은 안호연을 어렵게 여기는지 동기들이 잘 말을 붙이지 않았다.
막 책을 펼치자 교수가 수업을 시작했다. 안호연은 형광펜을 꺼내 중요한 부분을 밑줄을 그어 가며 집중했다. 집중하다 보면 길어 보이는 시간이 짧아진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방금 시작한 것만 같던 2시간에 달하는 수업이 끝나자 안호연은 기지개를 켰다. 책을 정리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안호연의 책상 앞에 섰다. 이름을 모르는 여자였으나 자주 봤던 얼굴이었다. 무슨 용무로 자신에게 왔는지 궁금해 안호연은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 안호연이죠?”
“그런데요?”
“아, 누구지. 누군지 모르겠는데 키가 큰 남자분이 1층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대요.”
“키 큰 남자요?”
“네.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 누군지 잘 모르겠고. 아무튼 수업 마치면 내려오래요.”
“고마워요.”
안호연이 고맙다고 말하자 용무를 마친 그녀가 돌아섰다. 안호연은 책을 정리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예상이 갔다. 강중영이다. 시간표를 전부 외우고 있는 강중영은 오늘 강의가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기말고사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아침 내내 따라다니며 놀아 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강중영이 생각나 마음을 접었다.
안호연은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에 자리 잡은 휴게 공간으로 내려갔다. 강중영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안호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이제는 마주치기 싫은 얼굴이 보였다. 태범석이었다. 그는 굉장히 수척한 얼굴로 안호연 앞에 나타났다. 입고 있는 옷도 약간 지저분했다.
“호연아.”
애달픈 목소리에 안호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번호 바꿨어? 그동안 어디 있었어.”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만난 사람처럼 태범석이 다가와 마치 그의 소유에 있는 사람처럼 안호연을 대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묻는 말에 대답 먼저 해!”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태범석 때문에 이목이 쏠렸다.
“뭐 하는 거야?”
안호연은 잡힌 어깨를 빼내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너 자꾸 이럴 거야? 나한테 다솜이 있는 거 몰라? 네가 그렇게 아꼈던 다솜이 지금 내 손 잡으면 있는 곳 알려 줄게. 정말 그때 뿌려 준 게 다솜이라고 믿는 거 아니지?”
입술 사이로 조금 웃음이 나왔다. 1년 만에 나타나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말이었다. 마치 자신이 태범석 것처럼 대했다.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는데도 그는 무례하게 굴었다. 안호연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필요 없어.”
“뭐?”
“네가 데리고 있는 다솜이 필요 없다고.”
안호연이 그렇게 말하자 그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가 어떤 의미로 이해했는지 알지만 안호연은 정정하지 않았다. 정말 그가 데리고 있다는 다솜은 필요 없었다. 그건 가짜 다솜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진짜 다솜이가 있는 곳을 그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고통받았던 세월에 대한 복수였다. 그게 다솜이라고 여기며 평생 살기를 바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안호연은 무작정 자신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는 태범석의 손을 떨쳐 냈다. 몸을 돌리자 그가 번개처럼 달려와 안호연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 정도 화내고 기다렸으면 되잖아.”
“그때도 말했잖아. 끝났다니까. 구질구질하게 왜 그래? 끝이라고 끝. 아직도 상황 판단 안 돼?”
“호연아, 내가 늦게 와서 화났지? 일이 있었어. 찾아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어.”
태범석이 안호연에게 다가왔다. 온 얼굴을 찌푸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널 어떻게 놔. 그게 말이 돼? 나한테 네가 어떤 존잰데. 우리가 함께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박연우 때문에 그래? 내가 결혼해서 그래?”
안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태범석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그래서 사랑했었고 유일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니 그가 추했다.
“그만해.”
“나 연우 씨와 이혼했어.”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호연아.”
안호연은 다시 그의 손을 밀어냈다.
“나 너 사랑해.”
지랄. 안호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에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래도 넌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네가 안 오니까 조바심이 났어.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니까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거야. 휴대폰 번호도 다 바꿔 버리기까지 하니까 정말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난 이렇게 아픈데 네가, 나밖에 모르던 안호연은 멀쩡하게 살 수가 있는데.”
그가 사랑을 절절하게 고백해도 모든 게 귀찮기만 했다. 참 이상하다. 옛날이었다면 그가 가여워 한 번이라도 뒤돌아보았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사랑했던 감정이 한 톨도 남지 않은 게 신기했다. 안호연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이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기말고사를 대비해 공부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호연아, 나는.”
“그만해. 정말 그만하자. 나 사랑하는 사람 있어.”
태범석은 입술을 뭉갰다.
“강중영?”
“그래.”
“그 새끼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 새끼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박연우, 그년도 그 새끼가 심어 뒀던 거야. 얼마나 무서운 새끼인지 알아? 너도 그 새끼한테 속고 있는 거야.”
“그만하자.”
“그 새끼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태범석은 빨개진 눈으로 안호연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절규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거뭇해진 눈으로 주변을 보며, 안호연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 새끼가 돈을 뺏어 간 것도 모자라서 날 죽이려고 해. 호연아, 같이 해외로 나가자.”
“그럴 사람 아냐.”
안호연이 알고 있는 강중영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단단하고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계속 강중영을 비방하는 그를 보자 머리에 열이 올랐다.
“내 말 믿으라니까.”
“그만 가.”
갖은 피해망상에 찌든 그를 보며 안호연은 자리를 피했다.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태범석이 쫓아오자 안호연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안호연은 달리듯 언덕길을 내려갔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들러 공부하다가 아르바이트를 가려 했지만, 태범석을 피하는 게 먼저였다.
언덕이라 점점 속도를 받아 다리가 빨라졌다. 빨라진 다리를 버티지 못해 넘어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강하게 안호연의 허리를 낚아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자 안호연은 미친 듯이 반항했다.
“호연 씨, 왜 미친 경주마처럼 뛰고 있어요?”
강중영이었다. 그의 얼굴을 봤을 뿐인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누가 쫓아와요?”
안호연이 뒤를 돌아보자 강중영의 시선도 따라갔다. 그곳에 태범석이 언 채로 서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지, 멍청한 건지. 구질구질하게.”
강중영의 중얼거림에 안호연은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강중영의 시선은 안호연이 아닌 태범석에게 닿아 있었다.
“제가 해결하고 올게요. 차에 타고 있어요.”
“그냥 가자.”
“아뇨, 이럴 때일수록 확실하게 해야죠.”
그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으며 안호연을 밀었으나 그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 안호연은 강중영의 팔을 끌어당겼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강중영과 달리 태범석은 거칠게 자라 왔다. 잘못하다 강중영이 다칠까 봐 걱정됐다.
“괜찮아요. 신사적으로 할 거예요.”
강중영은 걱정이 담긴 안호연의 손을 밀어냈다.
“사람들도 많은 곳에서 싸우겠어요? 나 믿고 기다리고 있어요. 믿어요.”
믿으라는 말에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등을 떠미는 강중영의 손에 밀려 아래에 주차된 강중영의 차로 갔다. 차에 올라타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몸을 돌렸다. 등을 돌린 강중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사색이 된 태범석의 얼굴이 보였다. 둘이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 알 수 없으나 강중영은 곧 안호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싱긋 웃더니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도 안호연은 강중영이 오기를 기다렸다.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에요. 다시는 안 올 거예요.”
“왜?”
“또 나타나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았거든요.”
장난스러운 말에 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안호연은 그 말을 반 농담으로 치부했다.
“내가 무시하면 돼.”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다시 호연 씨 앞에 나타나면 정말 가만 안 둬요. 저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리 그가 으스대도 강중영이 말하는 강중영과 안호연이 알고 있는 강중영은 정반대의 사람이다. 강중영은 강중영이었다. 사랑스럽고 따스한 사람.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인 안호연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응.”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거리곤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닿아도 안호연은 태범석에게 시선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만 보기에도 벅찼으니까.
* * *
남자와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안호연은 근처 시립도서관에 들러 공부를 하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안호연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집과 멀지 않은 아이스크림 가게였고 거기서 11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하는 동안 안호연은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집에 빨리 오라던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금요일 저녁이라 손님이 많아 마감까지 늦어졌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했어.”
11시 20분, 그와 약속한 통금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빠르게 뛰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쉰 안호연은 현관에서 머리를 골랐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은 걸 알면서도 안호연은 불안한 마음에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아직 통금 시간이 지나가지 않은 걸 확인하니 이제는 강중영 걱정이 밀려왔다.
바쁘게 사는 건 좋지만, 이렇게 바쁠 때면 한편으로 혼자 남겨진 그가 걱정되곤 했다. 안호연이 나른한 하품을 하며 집으로 들어가자 오늘따라 유난히 집이 어두웠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건 처음이었다.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강중영?”
그의 이름을 불러도 반응조차 없었다.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빠르게 강중영에게 연락을 하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소파 위에 강중영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주인을 잃은 휴대폰이 소파 위에서 굴러다니자 불안함이 가중되었다. 그는 휴대폰을 놓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강중영, 어디 있어?”
비명을 지르듯 말해도 집은 조용했다. 안호연은 혼자라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몸을 떨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집에 들어섰을 때 혼자였던 적이 없어 강중영의 부재는 안호연에게 부자연스러웠다. 그 부자연스러움은 불안으로 작용했다. 그가 오래 머무는 서재와 부엌을 헤맸으나 그 어디에도 강중영은 보이지 않았다.
안호연은 마지막으로 침실 앞에 섰다. 이 문을 열었을 때 그가 없다면, 정말 이 집에 그가 없는 것이었다. 문고리를 잡고 선 안호연은 심호흡을 했다. 힘주어 문고리를 돌리자 귀를 스치는 폭죽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안호연 눈앞을 지나갔다. 고깔모자를 쓴 강중영은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그를 보자 안호연은 다리에 힘이 빠졌다.
“몰랐죠?”
“몰랐어.”
생일인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맘때가 생일이라는 걸 알았어도 안호연은 바빠 생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겁이 났어. 네가 없는 줄 알고.”
“설마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놀라게 하지 마. 진짜 네가 없어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어.”
“고작 하루 겪었으면서 왜 놀라요. 난 매일 집에 오면 거의 혼잔데. 내 기분이 어떨지 이해했어요? 어떨 때는 호연 씨가 집에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제가 정말 나쁘잖아요. 집에서 나만 기다리게 하는 건요.”
“미안해.”
안호연은 케이크를 들고 있는 강중영에게로 달려갔다.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안호연 때문에 놀란 강중영은 하늘 위로 케이크를 들었다. 안호연은 무방비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다음부터는 혼자 두지 않을게.”
“아르바이트 그만두게요? 그만두면 나는 좋지만 돈 필요하다면서요.”
“……응.”
“바보처럼 뭐 해요. 촛불 끄고 케이크 자르러 가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놓아주자 케이크를 머리 위로 들고 벌 받고 있던 강중영이 움직였다. 케이크에 꽂힌 촛불이 다 녹아 생크림 위로 흘러내렸다.
케이크를 식탁에 올려놓은 강중영이 촛불을 얼른 끄라고 손짓했다. 촛불을 꺼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어색해 안호연은 머뭇거렸다.
“어서요. 곧 12시가 지나 버린단 말이에요.”
자꾸 재촉하는 강중영의 성화에 못 이겨 안호연은 고개를 숙여 숨을 훅 들이마셨다. 꺼질 기미 없는 불에 숨을 불어 넣자 붉게 타올랐던 불이 연기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짝짝짝짝.
고요한 이 순간 강중영은 박수를 쳤다.
“생일 축하해요.”
처음으로 그와 맞는 생일이었다. 이렇게 촛불을 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생일은 늘 거추장스러운 날이라고 생각했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날인데도 특별한 날. 그런데도 아무도 챙겨 주지 않는 날.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그날은 안호연에게 유난히 쓸쓸함을 안겨 주고는 했었다.
“처음이야.”
“뭐가요?”
“이렇게 촛불 꺼 본 거.”
칼로 촛불이 묻은 생크림을 걷어 내곤 미리 준비해 둔 접시에 케이크를 잘라 올리던 강중영의 손이 멈췄다.
“어렸을 때도 안 해 봤고 성인이 돼서는 부끄러워서 못 해 봤거든. 챙겨 주는 사람도 많이 없었고.”
“나 정말 나빠요.”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안호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호연 씨가 이런 거 처음이라고 하니까 안타까운 마음보다 기쁜 마음이 커요. 나와 처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생일마다 촛불을 볼 때면 내가 떠오를 거 아니에요. 그래서 기쁘고 또 기뻐요. 정말 나쁘잖아요. 호연 씨의 불행을 내 행복으로 삼으니까.”
“내가 불행했던 게 아니고 기다렸던 거 아닐까. 너랑 다 해 보려고 기다린 거야.”
안호연은 하얀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혀를 아리는 그 달콤한 맛에 눈을 가만히 감았다.
“곧 있으면 생일이 끝나 가네.”
10분이 지나가면 12시가 된다. 생일이 지나가는 게 아쉬운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생일의 마지막 순간을 강중영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쉬워요?”
“응.”
“그럼 시간을 늘리면 되죠.”
“어떻게.”
“시간을 뒤로 움직이면 되잖아요.”
“그게 가능해? 마술사도 아니잖아.”
황당한 소리라는 듯 안호연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술사가 아닌 이상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그가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뚝딱 타임머신을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불가능한걸.
“일어나요.”
“왜?”
“시간을 되돌리러 가게요. 이거 쓰고 있어요.”
케이크를 먹던 안호연 앞에 그가 까만 안대를 내밀었다. 안호연은 케이크를 먹다 말고 포크를 접시 위에 놓았다. 까만 안대를 쓰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가 안대를 가져가 안호연의 양 귀에 고무줄을 걸어 주었다. 그가 안호연의 어깨를 잡아 위로 올렸다. 엉덩이가 들리자 안호연은 엉겁결에 일어났다.
“저 따라오는 거예요.”
“어디 가는데?”
“가면 알아요. 곧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거예요.”
안호연은 그가 가는 대로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현관을 지나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익숙한 그의 차까지 도달했다. 강중영이 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까지 들으며 안호연은 숨을 내쉬었다. 가끔 그를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호연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졸리면 자도 좋아요.”
오늘 많은 일이 생겨서 그런지 아니면 따듯한 히터 바람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안호연의 눈 위로 잠이 쏟아졌다. 눈꺼풀에 층층이 쌓여 가는 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안호연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자면 안 되는데, 잠이 쏟아졌다. 잠은 평소의 여느 때보다 길고 길었다.
* * *
“호연 씨, 일어나 봐요.”
안호연은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꽤 오랜 시간을 잤다는 걸 인지했다. 늘 토요일이면 피로에 지쳐 오래 자곤 했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낯선 방에 자신과 강중영이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눈을 비비는 안호연의 볼에 강중영은 짧게 키스해 주었다.
“여긴 어디야?”
“하와이.”
안호연은 눈을 비볐다.
“어디라고?”
“하와이라고요. 그리고 시간은 정확히 오후 세 시예요. 열 시간가량 잤어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안호연은 눈을 비볐다.
“다시.”
“하와이라고요.”
안호연은 놀라 그제야 창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한국과는 달리 따듯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드넓은 바다가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보니 안호연은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한국 바다와 다른 푸른 바다였다.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바다의 색깔이 예뻐 현혹돼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떻게.”
“시간을 되돌려 준다고 했잖아요. 여기 시간으로는 호연 씨 생일이에요.”
“말도 안 돼.”
손을 입술에 올려놓았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안호연은 말도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뭐가 말이 안 돼요. 눈으로 봐 놓고서.”
“난 자고 일어났는데.”
“전세기를 빌렸어요.”
“뭐?”
“그건 좀 아쉬워요. 그 좋은 비행기에 승객은 우리 둘밖에 없었는데. 그 전세기에 침대도 있었어요. 알아요?”
“비행기에 침대가 있는 게 왜.”
“괜찮아요. 갈 때 하면 되죠.”
“뭘 하려고?”
머릿속에 절대 떠올라서는 안 되는 행위가 떠올랐다. 안호연이 붉어진 볼을 애써 식히려 부채질을 하자 그가 활짝 웃었다. 그 미소가 위험해 보였다.
“호연 씨가 생각하는 그것이요.”
콜록, 기침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걸 어떻게 해? 네 공간이 아닌 곳에서 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긴 해도 색다른 데서 해 보고 싶어요.”
안호연의 볼이 붉게 변했다.
“농담이에요. 좀 쉬다가 여행 좀 해요. 가이드 붙여 줄 테니까.”
“너는?”
“곧 러트라 방을 나눠야 해요. 미안해요. 참으려고 했는데 한계예요.”
그날 처음 러트를 보낸 이후에 강중영은 러트 기간은 철저히 안호연과 분리해서 지냈다. 그게 속상했다. 같이 지내면서 그와 총 3번의 러트가 있었다. 그동안 안호연은 둘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으나 오늘에서야 조금 모자랐다.
“같이 러트 보낼까?”
“아뇨. 괜히 휩쓸려 호연 씨까지 히트사이클이 오면 어떡해요.”
“왜?”
“호연 씨, 제가 말했잖아요. 전 이 시간을 길게 가지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러트 때는 안 돼요. 저도 이 시간이 고통스러워요. 그 시간만큼은 안호연 씨만 생각나거든요. 그래서 혼란스럽고 이상한 꿈을 꾸기도 해요. 러트 기간 동안 호연 씨가 왔다 가는 환상이요.”
안호연은 눈을 감았다.
“3일만 기다리고 있어요.”
생일은 다시 찾았지만, 다시 찾은 생일에 강중영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무작정 떼를 쓸 수가 없었다.
“알았죠?”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중영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그의 무게만큼 꺼졌던 침대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디로 가는데?”
“멀리 안 가요. 마침 이 층 끝에 밖에서 잠글 수 있는 문이 있더라고요. 제가 들어가면 문을 두드릴 때까지 열어 주지 마요.”
그가 옷을 챙기고 있었다.
“러트가 올 때까지, 네가 정신이 나갈 때까지 같이 있으면 안 될까?”
“내가 뭐라고 말할 거 같아요?”
“안 된다고.”
“알면 조금만 참아 줘요.”
또 이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시무룩하게 누워 있는 안호연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강중영이 나가자 안호연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긴 복도 끝에 방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들어간 강중영은 손을 흔들었다.
“3일 뒤에 봐요.”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있으면 뭐 해. 나 바다 안 좋아해.”
안호연은 그를 마중하며 혼자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는 안호연의 뺨에 짧게 키스를 한 강중영은 담담하게 문을 닫았다. 안호연은 그가 문 뒤로 사라지자 잠금쇠를 채우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거기 좋아?”
“좋아요.”
“난 너 없어서 별로 안 좋아.”
“금방 나가요.”
“정말 아이가 싫어?”
“싫은 건 아니에요. 있다면 예쁘겠죠. 그런데 아직은 호연 씨와 둘만 있고 싶어요. 우리 연애 기간이 길지 않아요. 난 우리 시간이 중요한데, 더 깊게 나아가서는 아이가 호연 씨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말이야…….”
가끔은 강중영을 닮은 아이를 떠올리기도 한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둘과 함께 있는 시간도 좋지만, 가끔은 셋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가 딩크족이 될 거라며 벽을 친 이후에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말이야, 반반이야.”
“확신이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해요.”
“그런데 널 닮은 아이를 갖고 싶어.”
안호연은 조심스레 속에 있는 걸 꺼내 놓았다.
“그럼 더 행복할 거 같아.”
“더 신중하게 생각해요.”
“이렇게 서로가 고통스럽지 않아도 되잖아. 러트나 히트사이클 때 서로 격리한다는 건 정말 이상하잖아. 이렇게 좋은데.”
“정관 수술을 할까요?”
“그건 싫어. 그럼 네 체취를 맡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지내야죠. 일 년에 당신 히트사이클까지 포함하면 많아야 6번이에요. 딱 6번만 참으면 되잖아요.”
문에서 그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각인한 오메가를 부르는 그의 냄새가 자극적이었다. 눈을 내리감았다.
“왜 이런 날 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해?”
“호연 씨.”
“나 들어가도 돼?”
“호연 씨.”
“나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잖아.”
“후회하지 않아요?”
“응.”
“정말요?”
“정말.”
안호연은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들어와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호연은 번개처럼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강중영을 볼 수 있었다. 발을 들이려는 순간 그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기 전에 물을게요. 정말 내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이가 생기면 호연 씨 일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와요. 그 순간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는 거예요. 난 그렇게 후회할 거면 이렇게 단순하게 결정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괜찮아요? 호연 씨가 허락하면 지금 이 순간부터 매 러트마다 함께 지낼 거예요. 피임도 하지 않을 거고요.”
“……응. 난 좋아.”
안호연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자 강중영은 안호연에게로 달려들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그는 안호연의 목을 마구 물어뜯으며 코를 박았다. 각인이 이어진 목에 코를 박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기다렸어요.”
“기다렸다고?”
“내 아이를 낳아 주고 싶다는데 어떻게 싫다고 해요. 나에게 다 주고 싶다는 말이잖아요 그 말을 해 주길 기다렸어요. 기다린 만큼 가만 안 둘 거예요, 진짜.”
“그래서 가짜 딩크족 행세를 한 거야?”
“가짜 딩크족은 아니죠. 저도 반반이었으니까. 둘이 지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고 셋이었으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뭐야, 속았잖아. 난 그것도 모르고 말도 못 했잖아.”
그가 안호연을 하늘 높이 올리고 가슴에 코를 박고 웃었다. 안호연은 자연스럽게 단단한 강중영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호연 씨가 결혼을 피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더 조급했죠.”
“내가 언제 결혼을 피해?”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살살 피했으니까.”
“그건…….”
강중영과 헤어지는 대가로 그의 어머니에게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돈을 결혼 전에 갚고 싶었다.
“너와 결혼하려면 돈을 갚아야 할 거 같아서. 그래야 조금은 당당해지지.”
“누구한테요?”
안호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어머니요?”
그의 무심한 말에 안호연은 눈은 동그랗게 떴다.
“그거라면 걱정 말아요. 내가 해결했으니까.”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긴요. 우리 둘이 연애하는 거 집에서 모를 리 있겠어요? 다 알고 있더라고요. 이 일을 아시고 난 후 어머님께서 화가 나셔서 찾아와 호연 씨가 나보다 돈을 선택했다고 말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솔직히 부모님이나 형제는 호연 씨를 반기지 않아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내가 좋다는데, 내가 각인한 오메가라는데, 그리고 결혼까지 할 건데,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할 수가 있겠어요. 싫으면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이죠.”
“그러지 마.”
“그러면 그분들도 호연 씨에게 그러지 않아야죠. 내 영역에 들어온 사람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호연 씨 하나뿐이에요. 호연 씨만이 내 거라고요.”
강중영의 말에 안호연은 조금 웃음이 났다.
“오늘 네 거 하나 더 만들까?”
“그것도 좋지만, 조금 더 둘이 있고 싶은데…….”
강중영은 흘긋 안호연을 보았다.
“만약 오늘 생긴다면 그건 신의 뜻이겠죠.”
“그러네. 널 만난 것도. 널 사랑하게 된 것도. 너도 그래?”
“아뇨, 그건 신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죠. 내 마음은 신이라도 조종할 수 없어요.”
시선이 마주치자 둘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어릿광대 같은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닌데 입술 사이로 웃음이 나왔다. 한때 안호연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 불행이 지속돼 외로웠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 한 명만.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늘 불행만 찾아오는 건 아니다. 불행이 길어질수록 행복을 발견하기 쉽고 어느 날 기적처럼 누군가 찾아와 그 사람이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안호연에게 강중영이 그런 사람인 것처럼, 강중영에게 안호연이 그런 사람이다.
“진짜 널 만나서 다행이다.”
강중영은 대답 대신 안호연을 테이블 위에 놓고 기나긴 키스를 했다. 정말 기나긴.
한때는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 안호연은 이 순간이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음이 기대됐으니까.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