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거즈를 제거했다. 백영은 살갗 위로 도드라지게 올라온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붉게 올라온 살점 위로 실밥 자국과 바늘이 꿰뚫고 지나간 점들이 자잘하게 남아있었다. 흉악한 흉터였다. 남들 눈에는 주먹깨나 휘두르는 사람으로 보일.
의사는 시간을 두고 두어 번 수술을 하면 흐릿해질 흉터라 그랬다. 사장이 제 얼굴에 흉터가 생긴 것처럼 난리를 치며 바로 수술 날짜를 잡겠다는 걸 내 몸이지 네 몸이냐고, 한번 생각해보겠다며 발을 뒤로 뺐다. 치료를 돕던 간호사가 배우인데 어쩌냐며 걱정하는 말을 던졌을 때는 씁쓸하고 아련한 척 입꼬리를 밀어 올렸지만, 글쎄.
실상은 즐거웠다.
백영은 이 흉터가 퍽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제 얼굴은 어떻게 생겨 먹었든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눈코입만 달리고 제 기능만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얼굴은 그걸로 모든 본분을 다한 셈이었다.
이 얼굴로 득 본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굳이 외모가 아니더라도 백영은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떤 수를 써서든 가졌을 것이었다. 타고난 성질이 그랬다. 탐욕스럽고 어떨 때는 게걸스러웠다. 원하는 걸 손에 쥐지 못한 적이 없었다. 머리를 굴려서든 폭력을 쓰든 결국엔 쟁취했다. 외모는 그저 일을 한 단계 빠르게 이룩해낼 수단 중 하나였다.
백영은 흉터를 덧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참으로 적절한 시기였다. 이 흉터는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해냈다.
사람들은 이 얼굴을 좋아했다. 사장이 그 얼굴 썩히지 말고 배우나 해보라고 권했을 때는, 용돈이나 벌어보자 하는 기분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수틀리면 다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퍽 괜찮은 직업이었다. 그럴싸한 포장지로 썩은 알맹이를 감추고 멋들어진 향수를 입히는 일과 비슷했다.
가면 쓰는 거야 습관에 가까워 카메라 앞에서도 어려울 것 없었다. 적당히 웃어주고 적당히 수줍은 척해주면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찬양했다. 하고 싶은 캐릭터를 제 맘대로 골라 제 색깔을 입히는 과정도 나름 즐거웠다.
하나 그 일도 박광준을 알기 전까지였다. 배역을 걸고 저를 만족시켜줄 희생양을 고르는 감독을 보고 처음으로 배우라는 직함이 역겨워졌다. 그 위에 올라타보려고 저 역시 허우적거렸다는 현실이 백영의 자존심에 실금을 냈다.
그깟 배역이 뭐라고. 악마성이 돋보이는 캐릭터가 탐이 났다 한들 감독의 비위를 맞춰가며 따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는데.
박광준 덕에 이홍화를 만나긴 했어도 불쾌감이 상쇄되지는 않았다. 박광준은 죽여 없애야 할 적이었다. 실로 아예 매장해버릴까 계획을 세웠으나 손대기 더러워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한 이가 여럿인지, 박광준은 그 영화 이후로 낸 차기작이 죄다 망하고는 슬럼프를 이겨낸답시고 난잡하게 놀다가 에이즈에 걸려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각설, 그 이후 백영은 눈을 돌려 저가 직접 영화를 찍어봤다. 실험용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광대 놀음하는 것보다 흥미로웠다. 본디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저에게 딱 맞는 직업일는지도 몰랐다. 스태프들이 하도 말귀를 못 알아먹어 답답한 점 외에는 제법 괜찮은 경험이었다.
두 번째는.
“뭐 해?”
이홍화가 열린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당당하게 방 안에 들어와도 될 것을 소심하기 짝이 없게 머리만 집어넣고 말았다. 그 모습이 흡사 제 굴에 몸을 숨긴 채 머리만 빼서 바깥을 살피는 솔부엉이였다. 둥그런 두 눈에 갸웃거리는 고개, 작은 부리를 닮은 앙증맞은 입술이 쏙 빼닮았다.
“거기서 뭐 해. 들어와.”
홍화가 쭈뼛거리더니 고개를 뒤로 슬슬 뺐다. 시선 끝이 백영의 흉터 위에 머물렀다가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아니야. 안 들어갈래. 그냥 뭐 하나 궁금해서. 뭐 하는지 봤으니 됐어.”
다른 때였다면 도망가려는 이홍화를 잡아 품에 욱여넣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놔뒀다. 당분간 이홍화의 몸에는 손대지 않을 작정이었다. 인내심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몰라도 인생에 한 번쯤은 이벤트성으로 발휘해줄 만했다.
이홍화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였다. 그 아래 뿌리를 깊게 내리고 점점 커가던 그런 가시. 그래서 결국 빼지도 건들지도 못하고 피부 아래 점이 되어 한 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물질.
동시에 이홍화는 수수께끼였다. 맞추기 힘든 퍼즐이었고 답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모든 것이 맞춰진 채 제 손에 떨어지던 그간의 경험 속에서 이홍화는 홀로 알 수 없는 궤도를 그리는 별이었다.
이 정도로 무언가를 갖고 싶어 몸부림친 적이 있던가. 손에 쥐었음에도 확신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적이 있던가. 소유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잠을 못 이룬 적이 있던가.
아직도 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확실치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함이나, 이홍화는 통제 가능한 영역 바깥에 놓여있었다. 그렇다면 차근차근히, 이홍화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발목을 묶어 제 영역에 가둬놓을 수밖에.
“…….”
흉터는 훌륭한 덫이었다. 이홍화의 발목을 파고들어 놓지 않을. 죄책감 어린 시선이 흉터에 닿으면 가끔은 짜릿했다. 책임감을 느끼고 제 탓이라며 움츠러드는 이홍화가 가련하고 사랑스러웠다.
손끝에 닿는 흉터의 촉감이 마음에 든다. 백영은 씩 웃었다. 흉터가 위로 끌려 올라가며 피부를 당기는 느낌이 선명했다. 이제는 이 흉터를 이홍화 앞에서 마음껏 드러낼 것이다. 그 눈에 어린 오만가지 감정을 구경하며 의사가 선고를 내리던 그때처럼 즐거워할 것이다.
유백영은 이홍화를 제 옆에 묶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게 설령 살인이라도 불사할 수 있었다. 이딴 작은 흉터가 덫이 된다면 기쁘게 수백 개는 더 새겨줄 수도 있었다. 목숨보다야 헐값이었으니.
냄새를 풍긴다면 피처럼 비릿한 쇠 냄새를 풍길 마음이었다. 냄새를 맡고 진위를 알 사람은 사장뿐이었다. 사장이야, 정해놓은 선만 넘지 않으면 그 바깥에서 백영이 칼춤을 춰도 눈감아줄 사람이니 사실을 알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든 말든 백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개새끼.」
제 진심을 아는 소수의 욕설. 그보다 정확하게 절 설명할 말이 있으랴.
“알아, 나도.”
실은 누구보다 잘 알지.
백영은 손깍지를 끼고서 팔을 앞으로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이홍화가 보고 싶었다. 문 하나만 나서면 바로 볼 수 있음에도 멀리 떨어진 것처럼 그리웠다.
문득 이홍화의 새집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던 악몽이 떠올랐다. 그날은 지났고 앞으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홍화를 저 없는 다른 곳에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백영이 문고리를 잡고 당겼다. 거실 소파에 쪼그려 앉아있던 이홍화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괴일 것처럼 일렁이는 두 눈을 기쁘게 바라보며 백영이 문가에 옆머리를 기댔다.
이홍화는 이 볼썽사나운 흉터를 기꺼워하는 제 마음을 알까. 더러운 진심을 알더라도 도망칠 기회는 없다. 피하게 놔두지도 않을 것이다. 제 몸에 어떤 흉터를 새겨서든 이홍화를 묶어두고 싶은 음험한 마음은 본인만 알고 있으면 된다.
“이홍화, 배 안 고파?”
백영이 속내를 감추고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홍화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홍화는 제 것이었다.
흉터를 핑계 삼아 계약을 해지하고 한국에서 쫓아내는 게 나았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뻔뻔한 조카의 행태를 보고 있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유백영과 관련된 일은 항상 후회가 팔 할이었다. 사장은 열이 오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서랍을 열었다. 니코틴 패치, 니코틴 껌 등 효과 없는 대체물만 굴러다녔다. 꿩 대신 병아리라고, 사장이 하나 남은 껌을 꺼내 질근질근 씹었다. 이게 유백영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서.
“그래서 거기에 투자하라고? 뭘 믿고. 널 믿고?”
백영이 다리를 꼬고 발을 까닥였다. 한쪽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고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세로 사장을 쳐다봤다. 흉터가 생겼으면 못생겨 보이기라도 할 것이지, 분위기만 깊어지고 말았다. 저 특유의 분위기에 홀려 걸려온 러브콜이 손가락으로 다 셀 수가 없었다.
“그냥 얌전히 연기나 할 것이지 그쪽으로 진로는 왜 틀어? 내가 보낸 제안 번번이 거절하고 고작 하는 말이 투자하라고, 이 미친놈아.”
드라마, 영화, 심지어는 광고도 꾸준히 들어왔다. 전보다야 줄어들었지만 얼굴에 흉 지고 연예인 더는 못 할 거라던 예상은 빗나갔다. 사장이야, 한 번이라도 더 뛰어 돈 벌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라며 유백영을 설득했으나 당사자는 완고했다.
“정지원이 십 년 전부터 기획한 거래. 이따가 시나리오 보내줄 테니까 한번 봐. 그리고 삼촌. 내가 삼촌 생각해서 제일 먼저 보여주는 거야. 핏줄 좋다는 게 뭐겠어. 좋은 건 나눠 먹어야지.”
백영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며 상체를 굽혔다. 얼굴이 퍽 진지했다. 사장은 코웃음 치며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저 얼굴에 넘어가 뜯긴 돈이 얼마인데. 유백영 나이 열 살 이전에야 귀여운 조카라며 다 퍼줬지만 이제는 속지 않는다. 그래도 못 이기는 척 떠봤다.
“정지원? 너 예전에 독립 영화 찍을 때 극본 쓴 사람 아니냐.”
“기억하네?”
골방에서 골골거리던 작가 지망생이었다. 백영이 발굴해낸 뒤로 승승장구를 거듭하다가 최근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의 작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보은이라도 한대?”
“그런 셈이지.”
반지하에서 굶어가며 글만 잡고 있는 거 백영이 꺼내줬다고, 쥐 사체 물어오는 고양이처럼 시나리오를 물고 돌아왔다. 백영이 아무리 독립 영화로 여러 군데 노미네이트 됐다 한들 수상 경력도, 제대로 된 필모그래피도 없는데 파격적인 인사 감행이었다.
“반발 없대냐.”
“영화가 아니니까. 드라마거든. 6부작.”
공중파도, 케이블도 아니다. 인터넷 기반 서비스에 웹 드라마처럼 올라갈 것이었다. 오리지널 시리즈도 많이 찍는 곳인 데다 이용객도 전 세계적인 수준이라 큰 문제는 안 됐다.
“내가 통보하지 말라 그랬지. 이게 오냐오냐해주니까.”
“통보하는 김에 하나만 더 하자. 주연은 소속사 애로 쓸 거야.”
사장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한쪽 입꼬리만 비틀었다. 생색내듯 말해도 누굴 쓸지 눈에 빤히 보였다.
“이홍화?”
유백영이 옆구리에 끼고 싸고돌다 못해 놔주지를 않는. 매니저도 아니면서 이홍화 스케줄을 먼저 체크해 이건 되고, 이건 안 된다며 훈수질이었다. 여자와 얽히는 건 시나리오를 보기도 전에 죄다 잘라냈다. 로맨스의 로, 자만 보여도 시나리오는 휴지통행이었다.
사장이 이홍화를 언급하자 백영의 눈썹이 위로 꿈틀 움직였다. 곧 평정을 되찾았지만 표정에는 이미 불만이 가득하다. 사장이 이홍화를 언급하는 것조차 싫어하면서 용케도 회사에 놔둔다 싶었다. 아예 집에 들여앉혀서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 그러지.
이러다가 다 때려치우고 이홍화 매니저가 되겠다고 우기거나 일인 기획사 차려서 이홍화만 쏙 빼 간다고 난리 치면 어째. 아직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그딴 곳에 버릴 생각이 없는 사장이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정식으로 요청해. 이렇게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지 말고.”
“삼촌과 나 사이에 정식이 어디 있어.”
이럴 때만 살살 눈웃음치지. 이미 마음의 추가 허락 쪽으로 기운 사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유백영이 작품 고르는 안목은 뛰어났다.
“언제 들어가는데.”
“곧. 이번 광고 이후로 이홍화 스케줄 싹 비워줘. 아, 광고 촬영은 윤태용한테 맡겨. 거기 사장하고 윤태용이 친하거든. 저번처럼 별 거지 같은 새끼 붙이지 말고.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광고주가 정하는 거지.”
“삼촌, 영향력이 그 정도도 안 돼? 천하의 서해운이 뒷방 늙은이 다 됐다는 소문 돌더니 사실이었네. 이참에 아예 회사 경영에서도 손 떼지 그래.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제 말 들어달라고 할 때는 속없는 놈처럼 배시시 웃더니, 넘어간 것처럼 보이니 바로 본성 드러내며 건들거렸다. 미친놈, 하고 사장이 욕을 했다. 욕을 처먹어도 백영은 귓구멍만 후비며 딴청이었다. 말하는 꼬락서니가 얄미워 이홍화 앞으로 들어온 첫 번째 광고를 잘라내려다가, 그것도 유백영만 좋아라 할 일이라 관뒀다.
유백영이 열심히 가지를 쳐댄 덕에 이홍화는 물 들어오는 이때 힘차게 노 젓지 못하고 한가하게 떠다니고만 있었다. 공과 사는 구분하라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유백영은 이홍화는 공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라며 제멋대로 선을 그었다.
“어디 할 거면 제대로 해봐. 하는 김에 이홍화도 잘 좀 띄워주고.”
목적을 이룬 유백영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가라앉았다.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더니 백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선약이 잡혀 있단다.
백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저 면상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기쁨과 동시에 묘한 아쉬움이 솟았다. 이제는 귀여운 맛이 하나도 안 남은 널찍한 등짝을 보다가, 사장이 입을 열었다.
“유백영.”
백영이 돌아봤다. 똑같은 표정인데도 이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천방지축인 조카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강보에 둘둘 싸여있을 적부터 보아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얼굴이건만.
흉터 때문에 그럴까. 하나 사장은 그 외의 다른 요소가 백영에게 꽃 같은 변화를 선사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좋냐?”
뭐가 좋으냐고 목적어를 붙이지는 않았다. 알아서 해석하게 놔뒀다. 백영이 어떤 해석을 했는지 입가를 완두콩 줄기처럼 말아 올렸다. 흉터 따윈 눈에 안 보일 정도로 해사했다.
“어, 형.”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호칭. 떠올리기만 해도 그리 좋은가. 사장은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아침에 보고 왔는데도 또 보고 싶다. 사장의 입가에도 미소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백영과 같은 미소였다.
∞ ∞ ∞
<크라프트>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순덕과 김강수와 홍화도 촬영장에 얼굴을 비쳤다. 순덕과 김강수야 예의차 등판했으나 홍화는 마지막 촬영인 오늘도 분량이 있었다. 원래 대본대로라면 정부 요원에게 파일을 전달하고서 지연우의 몫은 끝이 나지만, 무슨 변덕인지 감독이 쪽 대본을 넣어서 지연우의 분량을 늘렸다. 지금껏 우는 장면 실컷 찍었으니 웃는 얼굴도 한번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돈은 넘쳐나도 동생이 죽어 슬픔의 구렁텅이에 빠진 지연우가 웃을 일이 어디 있다고. 그래도 감독은 지연우가 행복하게 잘 사는 걸 암시해야 한다며 호텔 수영장에 홍화를 데려다 놨다. 아직 날이 추움에도 수영복만 덜렁 입고 선배드에 누워 칵테일을 홀짝이며 미미하게 웃는 장면을 굳이, 꼭,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감독이 우겼다.
“이 장면이 정말 필요할까요?”
“감독이 하겠다는데 무슨 수로 말려.”
김강수와 순덕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홍화가 맨 팔뚝을 박박 문질렀다. 순덕이 혀를 차며 어디서 널찍한 비치타월을 가져왔고, 회사에서 붙여준 매니저는 핫팩을 주섬주섬 챙겨 와 홍화의 손에 쥐여줬다.
“오늘은 날도 찬데 왜 저러는지, 참. 그래도 수영장에 뛰어드는 장면은 없어서 다행이네.”
“작가님한테 들었는데 원래 그거 넣으려고 했대요. 감독님이 요청했는데 작가님이 말리셨다고. 지연우 캐릭터하고 너무 안 맞는다고 사정사정해서 뺐대요.”
“작가님한테 밥 한 끼 사야겠네요.”
옆에서 조용히 듣던 홍화가 거들었다. 푸에취, 거하게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훌쩍이는 게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홍화가 뜨끈뜨끈한 핫팩을 양 뺨에 대고 발을 동동 구르며 찬기를 물리쳤다.
“그래도 벌써 마지막 촬영이네요. 엊그제 시작한 거 같은데.”
“그러게. 그간 일이 많았다.”
순덕이 첫날을 회상하듯 아련하게 허공을 올려다봤다. 홍화도 같이 감상이 빠지려는 순간, 저쪽에서 스태프가 촬영 대기하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홍화가 후다닥 비치타월을 순덕에게, 핫팩을 매니저에게 돌려주고 달려갔다.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통 넓은 수영복이 홍화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팔랑팔랑 흔들렸다.
“원래는 삼각 수영복이었다면서요.”
“그것도 감독이 부탁한 거래. 의상팀이 자기들 선정적이라고 지적받기 싫다고 긴 걸로 바꾼 거라더라.”
남자 주인공의 샤워 장면은 잘만 내보냈으면서 이홍화 수영복 장면이 뭐가 선정적인가 싶냐마는. 홍화의 하얗고 길게 뻗은 다리나 잡으면 손자국이 그대로 남을 듯한 야들야들한 살결은 이상하게도 감춰진 속살을 훔쳐본 양 야한 느낌이 들게 했다.
“이런 추측 싫지만, 진짜, 설마 감독님……?”
김강수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허공에서 순덕과 시선이 부딪쳤다. 순덕이 에이 설마, 하고 손을 젓다가 덩달아 김강수와 표정이 똑같아졌다.
“에이. 아니야. 나의 감이 감독은 그냥 변태일 뿐 게이는 아니라고 말한단 말이야. 게다가 그 유백영이 지키고 서 있는데 홍화가 잘도…….”
사고 당일, 홍화가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지 숨김없이 봤으니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굳이 눈앞에서 손을 잡고 입을 맞추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억측이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순덕은 알았다. 둘 중 누구도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밝힌 적 없어도 순덕의 눈에는 이어진 끈이 뚜렷하게 보였다.
아이고.
순덕이 급히 혀끝을 깨물었다. 둔한 김강수는 모를 수도 있건만 경박하게 혀를 놀렸다. 되물어보면 저가 무슨 말을 했냐며 모른 척하려는데, 예상과 달리 김강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돌렸다.
“촬영 시작하네요. 형님, 이따가 쫑파티 갈 거예요?”
“……어. 너도 가냐?”
“운전은 대리운전시켜요. 오늘은 술 마실 거니까.”
“……그래.”
순덕이 김강수를 빤히 올려다봐도 김강수는 촬영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겉으로만 아둔해 보이지 속은 누구보다도 기민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순덕은 들키지 않게 한숨만 슬쩍 내쉬었다. 그놈의 감, 원할 때는 발휘되지 않는 게 슬펐다.
홍화는 회식에 강제 참석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감독이 잡고 놔주질 않았다.
“이홍화 씨 빠지면 나도 빠질 거야!”
“아이고, 감독님이 빠지시면 어떡해요!”
홍화가 너스레를 떨며 말려도 감독은 애처럼 굴며 홍화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이래도 징징, 저래도 징징거리며 홍화에게 같이 가자고 돌림노래를 불러댔다. 지켜보던 순덕과 김강수도 잠깐 얼굴이라도 비치고 가라고 설득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다리를 질질 끌며 회식 자리로 연행되었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의 쓴맛인가 보았다.
“여기 앉아. 여기, 여기.”
손수 방석까지 마련해주며 감독이 홍화를 제 옆자리에 앉혔다. 주연 배우들만 모인 자리에 홍화가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았다. 멀리 떨어진 순덕과 김강수가 도와줄 듯이 슬금슬금 움직였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번번이 제자리걸음이었다.
위치가 좋지 않다. 매우 좋지 않다. 예전이었다면 감독 옆자리라니 무릎 꿇고 감읍하는 마음으로 내내 술시중을 들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주연들도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왜 단역 같은 조연이 주연들의 자리에 앉았는지 모를 눈빛으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시끄러운 인사말과 그놈의 ‘위하여’가 몇 번 오가고 나서야 불판에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갔다. 홍화는 빠져나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며 순덕 쪽을 살폈다. 처음에는 구해줄 것처럼 자리를 옮기던 둘이 고기가 익어가자 홍화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친구가 말이야. 액션도 본인이 다 소화하고 연기도 엄청 잘한단 말이지. 이 친구 우는 거 봤어? 내가 여배우들 우는 거 많이 봤는데 남배우 중에 이렇게 가슴 저미게 우는 친구는 본 적이 없어. 보통 울면 사실은 흉한데 이 친구는 눈물만 뚝뚝 흘려대면서……. 울 때마다 내 가슴이 찡했어.”
감독이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술을 들이켰다. 우는 모습이 가슴을 울린다고 그렇게나 저를 울려댔나. 지연우는 등장부터 끝나기 전까지 구르고 뒹굴고 감독 말대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홍화 씨 많이 먹어. 그동안 수고 많았어. 쌈 싸줄까?”
“어휴,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감독님 술잔 비었네요. 한 잔 올리겠습니다.”
홍화가 두 손으로 술병을 잡고 공손히 감독의 잔을 채웠다. 내친김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잔도 채웠다. 마지막으로 홍화가 자작하려는 걸 감독이 말리며 손수 채워줬다.
“거기다 이 친구가 말이야, 백영 씨하고도 친분이 있더라고.”
입으로 술잔을 가져가던 홍화가 흠칫했다. 그 탓에 술잔이 흔들리고 술이 출렁여 투명한 유리 위로 동그랗게 맺혔다가 흘러내렸다. 홍화가 황급히 술잔에 입술을 댔다가 아예 한 잔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유백영 씨하고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유백영과 알고 지낸다고 하면 백이면 구십은 저런 시선을 줬다. 익숙하면서도 부담스러워 홍화가 번쩍거리는 눈빛들을 외면했다.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죠, 뭘.”
“그냥 알고 지내긴!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에 백영 씨가 몸을 날려서 구해주겠어? 아주 친한 사이니까 그렇겠지!”
차마 아니라고 부정은 못 했다. 감독은 아예 홍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백영이 직접 카메오로 출현시켜달라며 찾아온 일을 무용담처럼 떠들었다.
유백영이 감독 앞에서 살랑대며 카메오 출연을 부탁했다니, 홍화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저를 보러 내려왔다고 은연중에 착각하고 있었다. 저 감독이 그리 좋았나. 술맛이 괜히 써서 입에 고기만 욱여넣었다.
“―그래서 백영 씨도 불렀어.”
고기를 주워 먹느라 앞에 부분은 다 놓치고 끝말만 들었다. 홍화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며 깜박였다. 감독이 마치 나 잘했지, 하며 칭찬을 바라듯 홍화를 쳐다봤다.
유백영에게 회식 있어서 늦게 들어간다고 전화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 반응 없었는데.
감독은 홍화의 놀란 마음도 모르고 혼자 싱글벙글거렸다. 밑져야 본전이라며 유백영에게 전화를 걸었건만 뜻밖의 월척이었다. 「감독님이 부르시는데, 당연히 가야죠.」라니. 그 마음의 넓이가 하해와도 같았다. 아무리 본인이 자처한 사고라도 일차적인 책임은 감독에게 있건만 화 한번 내지 않았다. 두 손에 선물을 주렁주렁 들고 병문안 갔을 때도 백영은 오셨어요, 라며 따뜻하게 감독을 맞이해주었다.
조각 같은 외모에 난 작은 흠집이 슬프기는 하나, 그딴 흉터로 가려질 외모가 아니었다. 오히려 흉터는 백영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약간의 우울함과 짙은 향을 남겼다. 이국의 해변처럼 은은하고 산뜻하던 향이 한겨울 자작나무 숲처럼 고요하고 묵직해진, 흔히 그렇게들 표현하는 향수로 바뀐 듯했다. 적어도 감독이 보기엔 그러했다.
게다가 정 거슬리면 특수 분장으로 가리든 CG 처리를 하든 하면 될 것 아닌가. 감독은 차기작에 유백영을 꼭 넣고야 말 거라고 야무지게 다짐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왔네.”
마치 서커스 단장이 서커스의 하이라이트를 알리듯 감독이 가게 입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문이 열리고 백영이 들어왔다. 검은 야구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쓱 쓸어 올리며 감독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모두의 시선이 백영에게 쏠렸다. 갓난아이도 안다는 유명인이라 가게에 있는 모두가 주목할 만했다. 다만 예전에는 그 미모에 감탄하느라 바빴다면, 이번엔 벌겋게 올라온 흉터에 시선이 화살처럼 박혔다.
백영은 흉터를 딱히 가리지 않았다. 남들이 뚫어지라 쳐다보든 말든 무심히 좌중을 훑더니 감독과 감독의 옆구리에 끼어서 놀란 토끼 눈만 껌벅이는 홍화를 바라봤다. 백영의 입꼬리가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슬쩍 올라갔다.
감독이 엉덩이를 꾸물꾸물 움직이며 백영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줬다. 홍화와 감독 사이였다. 백영이 좁은 틈을 비집고 기어이 그 자리에 앉았다.
“카메오도 출연이라고 뻔뻔하게 찾아왔습니다. 실례 좀 할게요.”
아무리 사고가 일어났다 한들 그 유명한 유백영의 분량을 날려버릴쏘냐. 감독은 말라비틀어진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편집부를 쥐어짜서 백영의 분량을 확보했다.
백영이 술병을 들고 환하게도 웃었다. 다들 멍하니 넋을 놓고 백영의 미소를 쳐다보다가 홀린 듯 잔들을 비웠다. 실물로는 처음 본다며, 어린 배우는 벌써 만취한 듯 얼굴이 벌게져서 두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잔을 쥔 손이 성은이라도 입는 양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홍화는 난데없는 백영의 등장에 입맛을 잃고 술잔에 술이 찰랑찰랑하도록 그냥 놔뒀다. 백영이 술병을 놓지 않고 홍화의 술잔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순진한 척 고개까지 갸웃하며 눈을 깜박이자 다들 홍화에게 어서 술잔을 비우지 않고 뭐하냐고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반갑다. 무척 반갑기는 한데.
“홍화 씨, 뭐 해? 백영 씨 팔 떨어지겠어.”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분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기시감을 느끼며 홍화가 손목을 꺾었다. 쓴 소주를 삼키고 백영에게 잔을 내밀자 백영이 홍화의 손에서 부드럽게 잔을 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더는 마시지 말란 이야긴가. 그러기엔 백영이 술병을 들고 홍화가 잔을 비우기만을 기다린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홍화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백영이 미소 띤 얼굴로 커다란 맥주잔을 제 앞으로 끌고 왔다. 거기에 맥주와 소주를 콸콸 부어 은은한 금색의 폭탄주를 만들고서 홍화 앞에 놓았다.
“와, 백영 씨 차별해요? 홍화씨는 맛있는 거 주고 우리는 그냥 소주만 주고!”
“홍화 씨가 폭탄주를 좋아해서요.”
홍화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랜만에 미친놈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홍화는 안중에도 없는 백영이 운전을 핑계 대며 술잔 대신 음료수 잔을 들었다.
“차를 끌고 와서 어쩔 수가 없네요.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백영이 먼저 잔을 비웠다. 광고 촬영이라도 하듯이 꿀꺽꿀꺽 시원하게 삼켰다. 백영이 주도한 분위기에 휩쓸려 다들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홍화만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들기에도 무거운 유리잔을 내려다봤다.
“안 마셔요?”
“어, 홍화 씨 아직 술 안 마셨어? 안 마실 거면 나 줘. 내가 마실래.”
감독이 잔을 채 갈 것처럼 손을 뻗었다. 홍화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백영을 바라봤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어서 빨리 닥치고 마시라는 재촉을 읽었다.
안 마시면 모르긴 몰라도 응징이라며 저를 괴롭힐 게 빤했다. 홍화가 눈 딱 감고 두 손으로 잔을 잡았다. 노리끼리한 보리차라고 스스로 세뇌시키며 목구멍을 열고 콸콸 부어 넣었다.
홍화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고 푸하, 숨을 내쉬며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인지 고거 마셨다고 벌써부터 머리가 어찔했다.
“그렇게 잘 마실 거 왜 안 마시고 시간 버렸대.”
감독이 아쉬운 듯 쩝 소릴 내고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홍화에 예의상 헤헤거리며 어질어질한 시야를 바로잡으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적당한 때 순덕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가고 싶건만. 백영이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다른 곳으로 오도 가도 못 했다. 어차피 모든 시선이 백영에게 쏠려있어 홍화가 자리를 피한다 한들 신경 쓸 이 없겠지만, 정작 다른 이들의 이목을 한꺼번에 집어삼킨 백영이 홍화의 발목을 잡고 놓지 않는 장본인이었다.
백영은 홍화가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빼기라도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홍화의 발목을 콱 움켜쥐었다. 홍화가 움찔하며 눈짓을 보내도 예의 그 사무적인 미소만 돌려주며 가는 발목에 톡 튀어나온 복사뼈를 못 박인 엄지로 슬슬 쓸었다. 입가의 은은한 미소와 손가락이 따로 놀았다.
백영이 쓸고 지나가는 살갗이 간지럽고 야릇했다. 더 하다가는 아랫도리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 봐 그만하라고 백영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백영이 순순히 발목을 놓고 대신 홍화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손깍지를 끼웠다. 복사뼈를 간질이던 엄지로 이번에는 홍화의 손바닥 가운데를 문질렀다.
마른 손바닥에 비단 자락이 스치는 듯 근질근질하고 보드랍다. 손길이 닿지 않는 발가락도, 홍화의 손가락도 고사리처럼 안으로 굽어들었다. 그 탓에 백영의 손 마디마디를 제 손끝이 눌렀다.
“…….”
술이 적시고 간 입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바짝 말랐다. 취기가 오른 듯이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숨도 거푸 한숨처럼 깊게 터져 나왔다.
상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에게 들킬세라 홍화가 얼른 손을 잡아 뺐다. 마침 감독이 백영에게 말을 걸고, 홍화도 옆에 앉은 사람에게 질문을 받아 자세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회식 자리는 시종일관 왁자지껄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감독의 목소리가 커지고, 저쪽 테이블에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 이쪽 테이블에 있던 사람이 저쪽으로 움직였다. 자리를 보전하고 앉은 사람은 홍화와 백영 단둘뿐이었다. 순덕과 김강수는 백영이 홍화 옆에 자리 잡은 걸 보고 아예 이쪽으로 올 엄두도 내지 않았다.
잔을 얼마나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 홍화는 자꾸만 가물거리는 눈을 부릅떴다. 백영은 여전히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홍화가 고개를 푹 떨구며 백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나 술기운이 무겁게 짓눌러 머리를 든 즉시 졸음에 겨운 듯이 뒤로 넘어갔다.
흐릿한 시야로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술병을 세어봤다. 초록색 병들과 갈색 병들 중 반 이상은 백영이 홍화의 잔에 섞어 부었다.
누굴 저 같은 술고래로 아나. 취해서 자빠지게 하려는 간사한 계획을 모를 줄 알고. 홍화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백영의 발끝을 제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백영이 돌아봤다. 동시에 홍화의 몸이 갸우뚱하더니 바닥으로 푹 쓰러졌다.
“홍화 씨 완전 취했네. 어쩐지 쉬지 않고 마시더라. 백영 씨가 좀 말리지 그랬어. 2차도 가야 하는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
다른 테이블을 한 바퀴 돌고 온 감독이 흐물흐물 늘어진 홍화를 보고 타박했다. 홍화가 어떻게든 허리를 똑바로 펴고 갈 수 있다고 외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만취한 사람처럼 바닥에 눌어붙어 흐어어, 흐어 하면서 주정만 부렸다. 그 와중에도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백영의 반대쪽으로 엎어졌다.
“이 상태면 2차는 도저히 못 데려가겠는데. 혹시 홍화 씨 집 주소 아는 사람?”
매니저야 홍화를 회식 장소에 데려다 놓고 저는 뒤로 빠져서 홍화를 데려다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감독의 말에 저 멀리 떨어진 순덕이 번쩍 손을 들려다가, 백영을 보고 딴청을 피우며 제 뒤통수를 쓱쓱 문질렀다.
“제가 홍화 씨 데려다드릴게요.”
“아니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고 백영 씨는 우리랑 한잔 더 해. 여기 홍화 씨 집 주소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매니저 번호 아는 사람은?”
순덕과 김강수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순덕이 용기를 내 손을 들려고 하자 김강수가 순덕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어쩔 수 없네. 이 친구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왜 이렇게 퍼부었대. 그럼 백영 씨, 홍화 씨 좀 잘 부탁해요.”
홍화를 술독에 빠트린 범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홍화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바닥에 문어처럼 납작 붙어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감독이 어깨를 흔들어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백영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홍화의 양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었다.
백영이 팔뚝에 힘줄을 곤두세우며 홍화를 아이처럼 허공으로 달랑 들었다. 아무리 체격 차이가 난다 해도 축 늘어진 성인이 가벼울 리 없건만, 백영은 홍화가 무슨 깃털이라도 되는 양 몸짓이 가뿐했다. 술기운이 머리꼭지까지 올랐는지 홍화의 고개가 힘없이 뒤로 훌렁 넘어갔다.
홍화의 팔을 제 어깨에, 제 팔을 홍화의 허리에 감으며 백영이 감독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둘을 영 보내기 싫은지 감독이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독뿐만 아니라 순덕과 김강수를 제외한 모두가 백영이 간다는 소리에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다른 이들의 이목이 백영과 홍화에게 쏠려있을 무렵, 순덕도 키 차이 때문에 백영의 품에 거의 안겨 가다시피 하는 홍화를 보다가 김강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거 그냥 보내도 되겠지. 별 탈 없겠지. 막 잡아다가 어디 장기 매매에 팔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사고가 일어났던 새벽에 꾼 꿈이 불현듯 떠올랐다. 안개가 가려 그 얼굴 보지 못했으나, 북망산에서 내려온 이는 아마 유백영이었으리라. 홍화를 잡으러 온 사자인지, 구하러 온 귀인인지 그것이 헷갈렸다.
“또, 또 쓸데없는 걱정 한다. 유백영이 뭐가 아쉬워서 홍화 씨 장기를 떼다 팔아요. 각막부터 피부까지 다 떼서 팔아도 저 인간 하루에 들어오는 이자만큼도 안 될 건데. 우리보다 저 사람이 더 잘 챙길 테니까 고기나 더 먹어요.”
김강수가 무심하게 답했다. 역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지 진작 눈치챈 모양이었다. 모른 척 의뭉스레 군 태도가 얄미워 순덕이 김강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찔렀다. 김강수가 온갖 엄살을 다 부리며 찡찡거렸다.
∞ ∞ ∞
정체 모를 것에 쫓기다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떴는데도 사방이 어둡고 몸이 무거워 현실인지 악몽의 연속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홍화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부터 살폈다. 유리창 너머로 가로등 불과 신호등이 주홍빛으로 껌벅껌벅 흔들렸다. 홱홱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나서야 현실임을 깨달았다. 차 안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백영이 홍화를 흘끔 쳐다봤다.
“일어났어?”
아직 졸음기가 남은 귀에 무뚝뚝한 음성이 퍽 달게 들렸다. 더 듣고 싶은 마음에 뭐라도 대답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가 머리를 퉁퉁 치는 두통이 일어 입을 닫았다. 백영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혀를 찼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넙죽넙죽 받아 마시래. 요령껏 거절했어야지.”
홍화가 이마를 잡고 등받이에 널브러지자 백영이 잔소리했다. 홍화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백영을 노려봤다. 처음 시작을 누가 끊었더라. 다른 사람이 와도 옆에서 넌지시 홍화 씨는 폭탄주 좋아해요, 라며 맥주와 소주를 섞게 만든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네가 시작만 안 했어도.”
“그 덕에 안 끌려가고 일찍 빠져나왔잖아. 고마워해야지.”
병 주고 약 주기요, 칼로 찌르고 응급실에 데려다준 격이다. 수작질 한번 고약했다. 저 뻔뻔한 작태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한 살이라도 많은 저가 어른스럽게 참아주자며 홍화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거 마셔.”
차가운 유리에 머리를 괴고 술기운을 견디고 있을 때, 시야에 백영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커다랗고 든든한 손에 숙취 해소 음료가 들려 있었다. 홍화가 방금 타박받은 건 새카맣게 잊고 냉큼 음료를 건네받았다.
언제 이런 건 준비했는지. 유백영은 항상 밉다가도 가끔 사랑스럽다.
“웬일이냐. 저번에는 엄청 쓴 거 먹였잖아.”
“그건 내일 아침에. 아니면 오늘 먹고 잘래?”
그럼 그렇지. 이홍화를 고문하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릴 유백영이 아니다. 홍화가 으, 하며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혀를 녹일 것처럼 쓰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홍화가 숙취 음료를 들이켜며 기억 속의 쓴맛을 지웠다.
“이거 마신 걸로 퉁 치면 안 되나?”
“안 돼.”
“나 내일은 숙취 없을 거 같아.”
“그럼 오늘 마시고 자.”
고집 피우는 걸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다. 홍화가 어떻게든 독약 같은 유백영표 숙취 음료를 피해보겠답시고 힝힝거리며 온갖 불쌍한 척은 다 했다. 술기운이 남아서 부릴 수 있는 나름의 애교였다.
“그거 진짜 쓰단 말이야.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맛이 아니야. 꿀도 안 타주잖아.”
“대신 효과가 좋잖아.”
“……너, 솔직히 말해. 그냥 내가 그거 먹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러지.”
백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홍화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대답을 종용하자 옆으로 슬쩍 고개를 틀고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이제 알았어? 둔해, 하여튼.”
“개새끼야.”
홍화가 마른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속이 꽈배기처럼 비비배배 꼬인 놈에게 코 꿰인 저가 제일 큰 죄인이다 싶으면서도, 저렇게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 화가 나려다가도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결론은 다 제 탓이다. 저 얼굴에 홀리고, 미소에 홀리고, 백영이 짓궂게 굴어도 짜증이 치밀다가 십 초도 안 되어 사그라지는 멍청한 제 탓이다. 이게 다 자기 팔자 자기가 꼬는 거라고, 홍화는 팔자에도 없는 팔자타령을 하며 한숨을 길게 뽑았다.
차마 백영에게 바가지 긁지는 못하고 신세 한탄만 속으로 줄줄 뱉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백영의 집이었다.
백영이 퇴원한 이래로 홍화는 제집에서 잔 적이 손에 꼽았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 돌아가 보겠다고 해도 백영이 옷자락을 잡으면 팔다리가 흐물흐물해졌다.
손목을 잡고 홍화를 바라보는 눈빛이 처연해 보이는 건 왜인지. 기울인 고개 덕에 숨김없이 드러난 뺨의 흉터는 왜 그다지도 아파 보이는지. 홀로 두고 갔다가는 밤새 우울하게 소파에 앉아있을 거라는 망상은 대체 왜 드는지. 든든한 어깨는 왜 처져 보이고 없는 뾰족 귀가 갑자기 백영의 머리에 솟아나 축 늘어져 있는 건지.
오늘만이야, 라는 토를 달며 백영의 집에 붙어있길 벌써 며칠째였다. 열심히 마련한 제집은 이제 그냥 창고였다. 예전에 윤진이 둘이 사귀면 한 명 집은 창고가 된다는 말을 흘리듯 던졌는데, 그게 홍화 본인에게도 해당될 줄은 몰랐다.
차에서 내려 죄수 호송하는 사람처럼 백영이 홍화를 앞세우고 걸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홍화가 마음을 바꿔 어디로 도망가기라도 할 듯이 한쪽 팔을 홍화의 어깨에 걸었다. 홍화가 지레 놀라서 움찔하며 옆으로 피하자 손아귀로 어깨를 꽉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
그놈의 술기운. 한숨 자서 빠져나간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뺨이 뜨끈뜨끈하게 익었다.
열기는 백영의 손바닥이 닿은 곳부터 피어올랐다. 처음엔 그쪽만 뜨겁게 달군 돌을 댄 듯 달아오르다가 핏줄을 타고 다른 곳으로 점점 영역을 넓혀갔다. 피가 끓어오르듯 심장이 쿵쾅쿵쾅 뜀박질하고, 발가락 손가락 끝도 뜨거운 걸 만진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입술조차 말랐다. 홍화가 마른 입술을 축이려고 윗입술 아랫입술을 맞물었다.
“좀 떨어져.”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마자 홍화가 백영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백영이 순순히 팔을 거뒀다. 저가 떨어지라고 했으면서 괜히 아쉬워 홍화가 백영의 손이 닿았던 어깨 쪽을 만지작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묵직하게 올라가는 소리만 정적을 가로질렀다. 침묵이 어색할 사이는 지나도 한참 지났건만, 기묘한 기운에 짓눌려 홍화가 침만 꿀꺽 삼키며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봤다. 잠깐 백영의 시선이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땡, 하는 소리에 홍화가 화들짝 놀랐다. 백영이 성큼 앞서나갔다. 홍화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꾸물거리자 백영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잡힌 곳은 손목인데도 종아리와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익숙한 집이었다. 이제는 눈 감고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낯선 기분이 드는 건 아마 유백영 때문이겠지. 홍화는 이유 없이 달아오르는 낯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데 마치 처음 온 것처럼 민망하고 부끄럽다. 홍화는 간신히 신발을 벗었다. 백영이 먼저 들어가 뭉그적거리는 홍화를 바라봤다.
백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홍화의 손을 잡았다. 아까 상 밑에서 그랬듯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길고 굵직한 손가락들을 끼워 넣으며 깍지를 꼈다. 꽉 잡힌 손이 허공으로 끌려 올라갔다.
홍화의 볼록한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맞물린 입술이 하얗게 질린 반면 뺨에는 홍조가 돌았다. 발그스레한 복숭앗빛이 볼을 지나 귀 끝도 물들였다.
백영이 홍화의 손을 잡아당겼다. 힘 빠진 홍화의 팔이 백영 쪽으로 끌려갔다.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백영이 홍화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말캉말캉한 입술이 손등을 꾹 누르며 온기를 퍼트렸다. 그 온기가 손끝과 발끝까지 모조리 침략하고 전복시키고 뒤엎을 파도처럼 커다랗게 홍화를 뒤흔들었다.
홍화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얼굴은 이제 숨기지 못할 만큼 새빨갛게 익었다. 깍지에 잡힌 손가락도 낯부끄러운 것처럼 안쪽으로 오그라들었다.
“잘 자.”
손깍지가 떨어졌다. 어, 하고 홍화가 백영을 올려다봤다. 백영이 미련 한 톨 안 보이며 돌아섰다. 홍화가 현관 쪽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이럴 거면 손등에는 왜 입 맞춘 건데. 거대한 파도처럼 홍화를 집어삼키려던 기대감이 물거품으로 흩어졌다. 뭐에 대한 기대감이었는지는 일단 묻어뒀다.
“왜.”
뽀뽀는 안 해주냐.
불러 세웠으니 이유는 말해줘야 함인데. 머릿속을 맴도는 말을 꺼내기가 무척이나 민망하다. 홍화가 아니, 뭐 등등의 말만 웅얼거리자 백영이 다시 등을 보였다.
“할 말 없으면 먼저 잔다.”
백영이 피곤한 것처럼 어깨를 주무르며 침실 방문을 열었다. 술 취한 저를 이고 지고 온 백영에게 뭐라고 할 수도, 왜 뽀뽀 안 하냐고 투정부릴 수도 없고. 홍화가 꿀 먹은 사람처럼 입술만 삐죽이며 제 방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어차피 각 방에 욕실이 딸려 있어 방에 들어온 이상 딱히 백영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코딱지만 한 제집과 달리 백영의 집은 둘이 살아도 마주치지 않고 살 수도 있을 만큼 각자의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홍화는 가방을 구석에 던져놓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예전이라면 씻고 유백영의 너른 침대에 누워 뒹굴거렸겠지만, 지금은 손님방 신세였다. 손님방이라도 저가 새로 들어간 집보다 깔끔하고 넓고 좋았으나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했다. 새집에 홀로 있을 때보다 유백영과 같은 공간에 있는 지금이 더욱 외로운 건 무슨 조화인지.
홍화는 다리를 꼬고 발을 까닥이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잠그지 않아도 밤사이 열린 적이 없었다. 열기처럼 남았던 술기운은 방에 들어온 즉시 사라졌다.
홍화는 침대 위를 굴러다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문을 쏘아보고, 일어나서 성큼 다가섰다가 문고리는 잡지 못하고 멈칫했다.
“……아오, 진짜.”
결국 머리카락만 쥐어뜯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가고 싶어 몸이 달았다가도, 나가서 백영과 마주치면 부끄러워 달팽이 집에 숨는 달팽이처럼 방으로 도망칠 게 눈에 보였다.
퇴원하고 백영의 손에 잡혀 집에 머물면서 홍화는 사실, 내심은 기대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고백은 없었어도 둘이 비슷한 마음이란 건 확인했으므로. 이제 남은 일은 연인끼리 할 수 있는 그런 일인데, 백영은 홍화의 손만, 가끔은 발목이나 어깨만 만지작거려 열을 올려놓고 그 이상으로 나가질 않았다.
뽀뽀도 못 했다. 키스도 못 했다. 포옹은 목록에 끼지도 못했다. 백영은 홍화를 무슨 아끼는 개 새끼나 고양이 새끼 취급했다. 하긴, 걔네들은 주인한테 뽀뽀도 받고 포옹도 받고 쓰다듬도 받으니 홍화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이럴 거면 잡지 말지.”
문 앞에 앉아 홍화가 투덜거렸다. 발끝으로 문을 툭툭 차다가 괜히 비참해져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갔다.
저는 손끝만 부딪쳐도 정전기가 튄 것처럼 찌릿한데. 포옹도 하고 싶고 입맞춤도 하고 싶은데. 신줏단지 모시는 것도 아니고, 손등에 입 맞춰 사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고서 유백영은 뒤로 쏙 물러났다. 그 속내가 궁금해도 대놓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홍화는 배 아픈 강아지처럼 끙끙 앓기만 했다.
확 먼저 덮쳐버릴까.
카메라 앞에서는 민망한 연기도 잘만 하면서 백영을 덮칠 용기는 쥐뿔도 안 솟는다. 홍화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굼벵이처럼 몸을 말았다. 백영의 살갗이 스친 곳은 죄다 불이 옮겨붙은 것처럼 따끔따끔하고 뜨끈뜨끈했다.
이놈의 열기, 해소할 수도 없으면 오르지나 마라. 홍화는 쓸데없이 제 몸만 탓하며 눈주름이 지도록 눈을 굳게 감았다. 감은 눈에도 백영이 선명해서 앓느니 죽지 하며 잠을 청했다.
∞ ∞ ∞
광고가 들어왔다. 의류 광고였다. 홍화는 저가 들은 소리가 믿기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매니저를 쳐다봤다. <크라프트> 촬영 중반쯤에 회사에서 홍화의 고정 매니저로 꽂아준 스물 초반의 윤만호가 흰자를 희번덕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라니까요. 홍화 형, 형 이제 떴어요. 크라프트 시청률 수직 상승한 거 못 봤어요? 이 형이 아직 실감이 안 나나 보네.”
만호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만세를 불렀다. ‘Get Some’이라는, 홍화는 들어본 적 없는 브랜드였다.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서 탄탄하게 입지를 다져가는 브랜드라고, 만호가 저도 몇 벌 샀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가격대는 높은데 품질도 좋고 디자인도 심플하면서 괜찮아요. 체형별 코디도 다 따로 잡아놔서 고르기도 쉽고.”
만호가 패드에서 홈페이지를 열어 홍화에게 보여줬다. 단정하고 캐쥬얼한 남성복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사이트였다.
“이제부터 형 엄청 바빠질걸요. 할 거 되게 많아요. 관계자도 만나야 하고, 피부 관리도 받아야 하고, 여름용 옷 촬영이라 몸매도 관리해야 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광고라니. 꿈꿔온 일이긴 하지만 당장 코앞에 들이닥치니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다. 홍화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만호가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홍화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외 촬영을 할 거래요! 형 덕에 저도 비행기 탑니다!”
정말 감격스러운지 만호가 입을 가리며 울컥했다. 사이트만 정신없이 훑던 홍화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해외 촬영? 해외로 나가서 촬영한다고?”
“네! 발리에서 촬영한대요. 형, 여권 있어요? 있으면 유효기간부터 확인해요, 당장. 아니다. 이참에 새로 발급받으러 가요. 옛날 거면 입국할 때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아직 한다고 결정한 것도 아닌데 만호의 마음은 이미 바다 건너에 있었다. 홍화가 거절하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서라도 제발 수락하라고 엉엉 눈물을 짜낼 듯 보였다.
어차피 <크라프트> 촬영이 끝난 이후로 잠시 휴식기였다. 게다가 해외에서 촬영을 진행한다니, 그것만으로도 광고를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형, 하실 거죠……?”
만호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홍화를 바라봤다. 반짝거리는 두 눈에 제발 거절하지 말라는 소망이 적나라했다. 홍화가 히죽거리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호가 만세를 부르며 홍화의 손을 잡았다. 당장 여권을 만들러 가자며, 저가 먼저 신나서 헐레벌떡 뛰어갔다.
그간 공과금이며 월세며 자금난에 허덕이느라 홍화는 여행다운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는 수학여행조차 돈이 없어 건너뛴 터라 여행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경험은 극단원들과 단합차 함께 간 바다 외에는 없었다. 그조차도 술 마신 인간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즐기기보단 고생만 실컷 하고 돌아왔다.
이런 슬픈 역사를 이유로 이번이 명실공히 첫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주된 목적은 일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다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고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하루라도 자유 시간을 주면 제대로 만끽하고 오겠노라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서 서점에서 여행 관련 책도 야무지게 사 왔다.
“나 왔어.”
홍화가 발랄하게 인사하며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던 백영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자랑하고 싶어 목구멍이 근질근질한 동시에 그 반질반질한 면상을 보자 아침에 마셨던 쓴 물이 다시금 위로 역류했다.
홍화가 저도 모르게 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에 유백영이 들이부은 쓰디쓴 숙취 해소 음료 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사악한 유백영은 기어이 정체불명의 음료를 홍화의 목구멍에 붓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낄낄댔다.
입맞춤이라도 해줬으면 이렇게 성이 나지는 않았을 텐데. 예전에는 사탕 주듯 뽀뽀도 해줬건만 이번엔 고문만 하고 약도 안 줬다. 분노가 차올라 오늘은 기필코 제집에서 잘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나왔으나, 일이 끝나자 발걸음은 자연스레 백영의 집 쪽으로 향했다. 마침 자랑할 게 있어서 그렇다고, 유백영의 놀란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홍화가 합당한 이유를 붙였다.
“야, 나 광고 들어왔다.”
“무슨 광고.”
백영이 책에서 시선을 뗐다. 긴 다리를 꼬아 소파 팔걸이에 올리고서 홍화를 올려다봤다.
“쇼핑몰 광곤데, 해외 촬영한대!”
극적인 효과를 위해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었다. 적어도 잘됐네, 하는 축하의 한마디는 돌아올 줄 알았는데 백영은 잠잠했다. 민망해진 홍화가 조용히 팔을 내렸다.
“무슨 브랜든데.”
“남성복 브랜드. ‘Get Some’이라고 하던데. 알아?”
저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니 백영에게도 그럴 거라 여겼다. 그러나 백영이 홍화의 예상을 깨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사장이 윤태용하고 잘 아는 사이야. 아마 윤태용이 사진 찍을걸.”
윤태용이 누구인지 단번에 생각나지 않았다. 백영이 찰리, 하고 알려준 다음에야 홍화가 아, 하며 입을 벌렸다. 혹시 태용이 입김을 불어 광고를 따게 된 걸지도 모른다. 오늘이 가기 전에 태용에게 전화라도 한 통 넣어야 하지 싶다.
“여권은?”
“오늘 신청하고 왔어.”
해외 촬영을 한다고 알려도 백영은 별반 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런 일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무덤덤했다. 묘한 섭섭함이 올라와 홍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까닭에서 비롯된 감정인지 몰랐다.
“증명사진 줘봐.”
백영이 당당하게 손을 뻗었다. 홍화가 가방을 뒤로 숨겼다. 화보도 아니고. 얼굴은 비대칭에, 무표정에, 눈 밑도 까맣게 나왔다. 만호야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이라고, 증명사진을 찍어도 어쩜 이렇게 잘 나오냐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매니저가 담당 배우에게 하는 입 발린 말이야 빤하지 않던가.
홍화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자 백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랑은 끝났으니 이제 문을 열고 나가야 하나, 홍화가 뒤를 흘끔대며 간을 봤다.
백영이 성큼 다가왔다. 홍화가 훌쩍 멀어졌다. 백영이 가볍게 피식 웃더니 새를 낚아채듯이 팔을 휘둘렀다. 홍화가 한 치 차이로 피했다.
“안 보여줄 건데.”
“좋은 말로 할 때 주지.”
“억울하면 뺏어보시든가.”
그간 단련한 실력으로 요리조리 도망가리라. 그런 홍화를 보며 백영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나른하던 눈에도 반짝하고 빛이 돌았다. 흡사 쥐를 앞둔 고양이요, 통통한 사슴을 발견한 범 눈처럼 금빛이었다. 저가 도발했으면서 홍화가 속으로 식겁했다.
괜히 건드렸다. 그냥 얌전히 줄걸. 말을 뱉어놨으니 자존심 상해서라도 갖다 바칠 수 없고. 그까짓 사진이 뭐라고. 속으로 울며 홍화가 가방을 끌어안고 백영을 피해 냅다 도망쳤다.
집이 넓어도 운동장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도 집주인이 열고 들어올 터라 홍화가 주방이며 거실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조금만 더 따돌리면 현관문을 열고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을. 하필이면 침실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이불자락을 밟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홍화를 밑에 깔고서 백영이 가방을 빼앗았다. 탈탈 털자 필기도구와 잡동사니가 엉망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영은 그중 손바닥만 한 작은 봉투를 용케 발견해서 주웠다.
“무거워.”
“참아.”
홍화의 허리를 두 다리 사이에 가두고서 백영이 봉투를 열었다. 홍화가 이불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못생기게 나와서 보여주기 싫었는데 기어이. 사람이 싫다면 좀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이 개새끼는 인생에 배려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잘 나왔네.”
“무겁다고. 비켜.”
빈말이 아니라 정말 골반 뼈가 무너질 듯이 무거웠다. 그리고 야했다. 옷감이 막고 있어도 비벼지는 살갗이 뜨거워져 홍화가 시트를 움켜쥐었다. 앓는 듯한 신음이 무거워서, 힘들어서 나왔다고 여기길 바랐다.
“그러니까 누가 약 올리고 도망가래. 버텨. 허벅지에 힘주고. 이참에 운동해, 이홍화.”
“네 몸무게를 생각해. 날 죽일 셈이냐.”
“백 킬로 안 넘어.”
“솔직하게 말해.”
“구십팔.”
오랜만에 씨발, 하고 욕이 나왔다. 그간 유백영이 할 거 없다며 운동에 치중하더니만 예전보다 훨씬 더 묵직해졌다. 홍화가 이러다가 등뼈가 두 동강 날까 봐 허리를 비틀었다. 백영이 홍화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막았다.
“좀 비키라고!”
더 붙어있다가는 허리도 허리거니와 아랫도리가 서서 침대에 엎어진 채 일어나지도 못할까 봐 홍화가 애가 타서 외쳤다. 백영은 놀리고 도망간 홍화에게 벌이라도 줄 것처럼 꿈쩍도 안 했다. 아예 홍화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정도도 못 버티면서 무슨 해외 촬영이야. 그렇게 운동을 시켰는데 아직도 근력이 엉망이네.”
“양심 좀, 제발…….”
씨름 선수가 와도 유백영 무게는 못 버틴다. 홍화가 목덜미까지 선홍색으로 물들이고 끙끙대자 백영이 슬쩍 몸을 뗐다. 홍화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래서 빠져나왔다. 백영과 멀찌감치 거리를 둔 홍화가 양반다리 사이에 베개를 두고 껴안았다.
백영을 쳐다볼 수가 없다. 시선마저 촉각을 건드렸다. 언젠가 주완이 쿠션을 껴안고 있던 적이 떠올랐다. 제 상황과 달랐겠지만, 그래도.
“언제 가.”
“다음 주 월요일.”
백영은 음, 하고 말았다. 언제 돌아오냐는 질문은 없었다. 예전과 같았다. 백영이 해외로 촬영을 갔을 때, 홍화도 언제 돌아오냐고 차마 묻지 못하고 바닥만 벅벅 긁었다.
“씻고 나와. 저녁 먹어야지.”
“어……, 응.”
백영은 홍화의 손만 한 번 꾹 쥐고 말았다. 그 외의 접촉은 없었다.
백영이 나가고 나서 홍화는 제 손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손가락이 쓸고 간 온기가 손바닥에 아직 남아있었다.
온기를 품은 손바닥이 홍화의 얼굴에 천천히 가까워져 오더니 입술에 꾹 붙었다. 제 의지로 해놓고도 꼭 남이 억지로 하게 만든 것처럼 홍화가 눈살을 구기며 손바닥에서 입술을 뗐다.
“미쳤지,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베개를 던져버릴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출국일이 다가왔다. 미팅하랴, 몸매 만든다고 운동하랴, 피부 관리받으랴, 매니저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쏘다니다 보니 벌써 오늘이었다.
홍화는 멍한 얼굴로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눈 밑이 퀭한 남자가 홍화를 마주 보았다. 줄기차게 피부 관리를 받은 덕에 다른 곳은 깐 달걀 저리 가라 반질반질한데 눈 밑에는 숨길 수 없는 피곤이 푸릇푸릇 돋아나 있었다.
정신을 차릴 겸 찬물로 샤워를 하고 욕실을 나왔다. 어젯밤 잠을 설쳐가며 몇 번이고 확인한 캐리어가 방 가운데 우뚝 서서 홍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3박 4일간의 일정인데도 캐리어는 원래의 늘씬함을 잃고 과식한 듯 통통한 뱃살을 자랑했다.
홍화가 터지려는 캐리어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손잡이를 잡았다. 백영을 깨우지 않으려고 문고리를 최대한 살살 돌렸다. 샤워 소리에 이미 깼을지도 모르지만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처음에는 보고 가려고 했다. 3박 4일, 짧다면 짧지만 백영 없이는 긴 시간이었다. 최근 홍화가 바쁜 만큼 백영도 바빠 마음 놓고 얼굴 본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런 와중에 해외 촬영이니, 이러다가는 몸이 멀어지고 마음도 멀어지는 과정을 밟을까 봐 홍화 홀로 노심초사였다.
하나 자는 사람을 깨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고 가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도착해서 전화나 걸어야지, 하고 홍화가 아쉬운 마음을 눌렀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어, 하고 홍화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졸음이 조금 남았던 눈동자도 커다랗게 벌어졌다. 백영이 소파에 앉아 기다릴 거란 건 상상도 못 했다. 붕어같이 뻐끔거리던 입술이 헤벌쭉이 벌어졌다. 눈도 여우 눈처럼 가늘게 뜨며 홍화가 실실댔다.
“너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샤워하는 소리가 잠을 깨워 나왔다 하더라도 집 떠나기 전에 백영을 한 번 더 볼 수 있어 홍화는 그저 좋았다. 홍화가 헤실헤실 웃자 백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릇처럼 홍화의 뺨에 손을 뻗다가 멈칫하며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해외 가는 게 그렇게 좋아?”
불퉁한 목소리도 좋다. 찬물을 흠뻑 뒤집어썼는데도 잠이 덜 깼는지 홍화의 입가에 웃음이 실실 배어 나왔다.
“어, 좋아.”
실상은 백영이 새벽에 일어나 절 배웅하는 상황이 좋아 죽겠지마는. 홍화가 머리에 꽃 꽂은 양 웃기만 하자 백영이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잠깐 영어로 욕도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화는 제 세상에 빠져서 백영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없었다. 3박 4일간 보지 못할 거, 지금이라도 실컷 봐두어 눈에 담아두자 했다. 새벽임에도 졸음기라곤 눈곱만큼도 안 묻은 멀끔한 눈동자와 매끄러운 뺨,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는 아픈 흉터와 도톰하고 맛있어 보이는 입술을.
“간다며.”
입술에 시선을 빼앗겼다. 백영의 퉁명스러운 대꾸는 안 들리고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어둑어둑한 거실에서도 입술만큼은 또렷하게 잘도 보였다.
불현듯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3일을 백영이 없는 곳에서 자고 4일을 백영이 없는 곳에서 지내야 했다. 백영이 눈앞에 있는데도 3박 4일을 벌써 홀로 지낸 것처럼 그리웠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갑자기, 자제할 겨를도 없이 울컥하고 치솟은 감정을 홍화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홍화가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뒤꿈치를 바짝 세웠다. 백영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서 고개를 틀었다. 이보다 더한 행위도 한 지 오래건만, 입술과 입술을 맞추는 데에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소꿉놀이 같은 입맞춤이었다. 포개고 꾹 눌렀다가 홍화가 뒤꿈치를 바닥에 붙이며 입술을 뗐다. 찰나에 닿고 떨어진 입술이 도수 높은 술이 닿은 듯 화끈거렸다.
백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홍화를 쳐다보기만 했다. 응시하는 시선에 홍화의 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추태인지. 얼른 한 걸음 떨어져 내팽개친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도망가려 했다.
“갔다 올…,”
인사의 마지막 말이 달아났다. 허리가 잡혔다. 백영이 고개를 틀며 홍화가 그랬듯 입술을 맞부딪쳤다. 홍화가 뒷걸음질 치다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윽, 하고 터진 신음은 백영의 입술이 먹었다. 홍화의 뒤통수가 부딪치지 않도록 손으로 감싼 백영이 홍화를 깔아뭉개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프다는 투정도 못 부렸다. 백영이 입술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홍화의 입술을 눌렀다. 막힌 숨을 터트리려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매끈한 혓바닥이 파고들었다.
홍화를 제 몸 아래 깔고 누르고 다리와 다리를 엉키며 백영이 입을 맞췄다. 보들거리는 입천장과 고른 치열을 맛보고 안으로 숨어들려는 혀를 찾아내 휘감고 쪽쪽 빨았다. 오래도록 굶었다가 고기를 맛본 짐승처럼 홍화가 도망가지 못하게 두 팔로 옭아매고 야금야금 뜯어 먹었다. 입술을 물고, 젖은 입술을 비비고, 아랫입술을 삼켜 오물거리다가 홍화의 혀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열매라도 된 듯이 혓바닥 위에서 굴려 먹었다.
다리가 뱀 두 마리처럼 엉키고 상체도 입술처럼 들러붙었다. 홍화가 할딱이며 백영을 밀치려다가, 마음을 바꿔 두 팔로 그 목을 껴안았다. 앞으로 며칠간 못 본다는 아쉬움이 나가야 한다는 이성을 눌렀다.
“읏……!”
입술이 살짝 떨어진 순간에도 아랫도리는 바짝 붙어있었다. 뭉개진 아랫도리가 둘 다 불룩하니 곧이라도 터질 듯했다. 가쁘게 터진 숨결 사이로 홍화의 신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허벅지를 오므리고 싶은데 백영이 한쪽 다리로 막고 있어 불가능했다.
백영이 홍화의 턱을 잡았다. 뺨에, 입술 위에, 눈 위에 대중없이 입맞춤을 퍼부었다. 입술이 얼굴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홍화가 움찔거리며 다리를 뒤틀었다.
“키스만……? 키스만 해야 해?”
백영이 다리 사이를 꾹 누르며 홍화를 내려다봤다. 그 이상을 갈구하는 목소리에 오금이 저렸다. 코앞에서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열이 올라 황홀한 금색이었다.
홍화가 빠득 소리 나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해외 촬영이고 나발이고 당장 다 취소하고 싶은 마당에 입맞춤이 끝이라니. 한편에서 이성이 이제 그만 나가야 한다고, 캐리어 손잡이를 잡으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홍화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눈앞의 백영이 귀도 막았다. 야해 빠진 유백영이 이홍화의 이성을 틀어쥐고 바닥에 거꾸로 처박았다. 백영이 이성의 숨통도 막을 것처럼 홍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댔다.
키스만, 은 무슨. 홍화가 두 팔로 유백영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그간 손만 잡고 각방 쓰던 설움이 봇물이 터지듯 왈칵 쏟아졌다.
“……빨리. 아……!”
이번엔 백영이 웃었다. 유독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더니 홍화의 아랫입술을 콱 물었다. 뜨끔한 고통도 반가워 홍화도 이를 세워 백영의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짭짤하고 비린 피 맛마저 설탕처럼 달콤했다.
백영이 가느다랗게 목울대를 떨며 으르렁대다가 홍화의 바지를 잡고 뜯어버릴 듯이 아래로 벗겨냈다. 홍화도 더듬더듬 백영의 바지춤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손에 잡힌 기둥이 오랜만이어선지 전보다 훨씬 커다랗게 느껴졌다.
“흐읏.”
누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신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입술을 떼지 않고서 홍화가 빳빳하게 대가리를 곤두세운 기둥을 잡고 서툴게 흔들었다. 백영도 손을 아래로 뻗어 홍화의 것을 쥐었다. 커다랗고 굳은살 박인 손에 꼿꼿하게 선 기둥이 부딪쳤다. 엄지 끝이 점 같은 구멍을 문지르자 홍화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백영이 쫓아와 귓불을 물고 그 위에서 모은 숨을 터트렸다. 숨결이 귓바퀴와 귓구멍 깊숙한 곳을 훑어 홍화가 바르르 떨었다. 백영의 엄지에 투명한 물방울이 묻어났다.
“벌써 가려고 하면 어떡해.”
“시간…… 읏, 없…….”
저는 숨이 넘어갈 것 같건만 백영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어디 한번 당해보라며 홍화가 손아귀에 힘을 주고 문질렀다. 백영이 낮게 신음을 터트리며 홍화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홍화가 피하려고 도리질을 쳐도 백영은 귓불을 잇새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아!”
아랫도리가 더욱 가까이 맞붙었다. 안으로 말린 손마디끼리 부딪치다가, 백영이 아예 두 기둥을 겹쳐 잡았다. 홍화가 히익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빼려 하자 체중으로 짓누르고 상의를 걷어 올렸다. 판판한 배와 안으로 쏙 들어간 배꼽, 살가죽이 덮은 갈비뼈를 덧그리며 올라가 빨지도 않았는데 위로 솟은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랫부분을 쥐어 손가락 사이에 솟은 볼록한 부분이 농익은 앵두처럼 뻘게졌다.
“하윽!”
신음이 커다랬다. 백영이 홍화의 옷자락을 잡아 입에 물려줬다. 홍화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백영을 노려보며 옷자락을 잇새로 물었다.
두 개를 한꺼번에 잡고 턱턱 흔들어대는 손길이 거칠었다. 홍화가 다리를 바르작거리다가 아래팔로 눈을 가렸다. 백영이 잡고 끌어 내렸다. 눈가와 뺨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속눈썹엔 절정을 앞둔 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흰 이 사이로 옷자락을 물고 힘겹게 버티던 홍화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허리가 붕 떠올라 바닥 사이에 아치형의 공간이 생겼다. 백영이 그 사이로 팔을 넣어 홍화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
홍화의 입이 벌어지며 옷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백영이 제 다리 위에 홍화를 앉히고 속살에 박아대듯 퍽퍽 몰아붙였다. 옷자락이 한쪽이 부푼 젖꼭지를 가리며 흘러내리다가 백영의 팔에 걸려 위아래로 나풀나풀 흔들렸다.
“흐아, 아아, 아흐으……!”
홍화가 위아래로 흔들리다가 눈을 홉뜨고 백영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허벅지가 좁아들며 백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백영의 옷 위로, 홍화의 희멀건 뱃가죽 위로 흰 풀 같은 정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홍화가 바들바들 떨며 기둥에 남은 정액을 쏟아냈다. 백영의 손마디를 타고 희고 긴 점액질이 구불구불한 길을 그렸다.
홍화가 지친 듯 백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그만큼 지쳤다. 이대로 한숨 푹 자고 싶은 마음이 이는 가운데, 저쪽에 떨어진 핸드폰이 빛을 번쩍이며 큰 소리로 울었다. 매니저였다.
“아…….”
벨이 홍화를 현실로 끌어왔다. 벌게진 얼굴로 백영의 품에서 일어서려 했다. 백영이 아랫도리를 인질로 잡았다. 물렁물렁해진 기둥이 백영의 손과 아직 우람한 기둥에 짓눌려 힘없이 짜부라졌다.
“나, 가야 하는…….”
백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만에 보는 불만 어린, 그리고 후환이 두려워지는 표정이었다. 홍화가 울어대는 핸드폰과 백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저걸 보라고, 저를 찾는 전화라고 눈으로 호소했다.
“박진 않아. ……대신.”
백영이 정액이 축축하게 물들인 손으로 홍화의 허벅지를 쥐었다. 살집 적은 허벅지를 주물럭거리며 적시던 백영이 홍화의 몸을 홱 돌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홍화가 엎어진 자세로 백영을 돌아보았다. 어, 하는 사이에 엉덩이는 허공으로 들리고 어깨는 바닥에 닿았다.
“잘하면 빨리 끝내줄게, 홍화야.”
백영이 열심히 적신 허벅지 사이로 기둥이 쑥 미끄러져 들어왔다. 쪼그라든 불알을 문지르고 아래로 축 처진 기둥도 간질였다. 홍화가 어, 어, 하는 물음표 어린 소리만 반복하며 눈을 껌벅였다. 그런 홍화의 뒤에서 자리를 잡은 백영이 홍화의 허벅지 바깥쪽을 힘으로 누르고 허리를 움직였다.
사정을 해서 민감하기 짝이 없는 기둥이 백영이 꾹꾹 찔러올 때마다 움찔거렸다. 협조하면 빨리 끝내줄 거란 말을 희망 삼아 홍화가 허벅지를 바짝 조였다. 살집 사이에 파묻힌 백영의 기둥이 뜨겁고 미끈거렸다.
“흐, 으, 하으…….”
귀가 먹먹했다. 벨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홍화가 손목을 물며 신음을 참았다. 그래도 튀어 나갔다. 작게라도 소리가 튀어 나가면 뒤에서 미는 백영의 몸짓이 폭풍우처럼 거세졌다. 까슬까슬한 거웃이 흰 볼기를 따끔따끔하게 쓸고 지나가 벌겋게 물들었다. 홍화가 허리를 비틀면서도 두 허벅지가 벌어지지 않도록 끙끙댔다.
조그마해진 불알과 기둥이 움찔거리며 점점 아랫배로 고개를 들었다. 흰 물이 아직 식지 않은 기둥 끝에서 쿠퍼 액처럼 투명한 점액질이 둥글게 맺혔다가 아래로 거미줄처럼 떨어졌다.
홍화의 허벅지를 쥔 백영의 손등에 힘줄과 핏줄이 도드라지게 올라왔다. 손바닥에 혀가 달렸으면 살갗을 다 적셨을 듯이 문지르며 올라가 낭창한 허리를 쥐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홍화의 허리가 두 손에 다 쥐일 듯했다.
아랫입술이 희게 질리게끔 깨물고 백영이 홍화의 등에 상체를 바투 붙였다. 개가 교미하듯이 올라타자 홍화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짜부라졌다. 백영이 홍화의 아랫배에 팔을 넣어 억지로 들어 올리고 봉긋한 엉덩잇살에 기둥을 문질렀다. 대가리 아래가 뭔가를 토해낼 듯이 굵어지고 기둥 전체에 핏줄이 넝쿨처럼 엉켰다.
백영의 손이 멈춘 순간 크고 두툼한 기둥 끝에서 흰 물이 터져 나왔다. 한 번은 위로 솟아 홍화의 허리 위에 고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 주름 없이 눌린 홍화의 불알과 엉덩잇살에 들러붙었다.
하아아, 하고 긴 신음이 누구 입에서 터져 나왔는지 몰랐다. 홍화가 간간이 떨며 백영을 돌아보려 했다. 백영이 홍화의 허리를 놓고 그 위에 제 무게를 실었다. 아직 모자란 듯이, 아직 덜 죽은 아랫도리로 둥글게 솟은 엉덩잇살 사이를 문질렀다. 홍화의 엉덩이에 보조개가 움푹 팼다.
“…….”
침묵이 무겁고 야했다. 들뜬 열기가 금방이라도 홍화를 잡아먹을 듯 기회를 엿봤다. 홍화가 어깨를 움찔했다. 백영이 홍화의 옷자락을 들치고 날개뼈 위를 느릿느릿 빨아올렸다. 자국이 남지 않도록 가볍게, 하지만 혓바닥에 체취와 살맛이 남도록 느리게.
눈이 마주치면, 입을 열면 이 이상으로 넘어가리라. 홍화가 백영을 보려고 틀었던 고개를 도로 숙였다. 잠시 끊겼던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홍화가 퍼뜩 고개를 들었고, 백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홍화의 귀 뒤와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가야 해.”
“알아.”
안다면서도 백영은 붙은 몸을 떼지 않았다. 홍화의 목덜미에, 옆으로 고개를 돌려 드러난 뺨에, 눈썹 끝에,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입술이 살갗에 닿는 소리가 벨 소리보다 진하고 커다랗게 홍화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안다면서…….”
“조금만 더…….”
백영이 홍화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홍화가 주먹을 쥐듯 손가락을 안으로 움켜쥐자 백영의 손가락이 같이 밀려들어 왔다.
팔을 뻗으면 닿을 핸드폰이 까맣게 죽었다가 다시 빛이 들어왔다. 벨 소리가 정신 차리라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홍화는 눈을 꾹 감고 벨 소리를 외면했다. 갈비뼈를 짓누르는 무게감이 이상하게 안락해 이 아래에서 모자란 잠을 채우고만 싶었다.
벨이 끊겼다가 또 한 번 울었다. 받을 때까지 울릴 성싶었다. 더 넋 놓고 있다가는 정말 비행기를 놓치게 생겼다고, 받지도 않았는데 매니저의 울먹임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홍화가 꾸물거리며 몸을 틀었다. 백영이 홍화의 목 뒤에 긴 입맞춤을 남기고 상체를 일으켰다. 굳어가는 정액을 대충 닦아내고 홍화가 바지를 추슬러 입었다.
“다녀올게.”
여전히 뚱한 표정인 백영을 두 팔로 껴안고 포옹으로는 모자라 뺨에도 입을 맞췄다. 백영이 후우, 길게 한숨을 뽑으며 천장을 쳐다봤다가, 보내주기 싫다는 티 팍팍 내며 홍화를 두 팔에 가두고 부둥켜안았다. 홍화의 가슴이 턱턱 막히도록 굳세게.
“도착하면 전화해.”
“……응.”
가기 싫다. 정말 가기 싫다. 이대로 백영과 하루 종일 뒹굴고만 싶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해외 촬영임에도 다 취소하고만 싶었다.
꾸물거리는 홍화의 기색을 알아챈 듯 벨 소리가 요란하게 둘 사이를 갈라놨다. 백영이 홍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맞붙였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짧은 입맞춤이 오갔다. 붙이고 비비고 핥고 빨고 깨물어도 모자라고 또 모자랐다.
“진짜 다녀온다.”
숨소리가 달아오르기 전에 홍화가 먼저 몸을 뒤로 뺐다.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현관으로 도망치듯 성큼성큼 걸었다. 몇 걸음 못 가 백영이 홍화의 등 뒤에 호랑이 가죽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홍화의 길을 막을 속셈은 아닌지 단순하게 붙어있기만 했다.
배웅은 엘리베이터 앞까지였다. 땡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야속했다. 홍화는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 일부러 백영을 보지 않았다. 백영과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다음 비행기 타고 가겠다고 달려들까 봐 무서웠다.
마지막으로 다녀온다고 인사하려는데 문이 닫혔다. 좁아진 틈으로 백영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묵묵한 표정으로 홍화를 보다가 굳게 닫힌 문 뒤로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하강했다. 홍화가 땀이 배어 나왔다가 식은 얼굴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읏.”
큰일이었다. 벌써부터 유백영이 보고 싶었다.
∞ ∞ ∞
태양이 작열했다. 한여름 삼복더위는 애 취급하는 날씨였다. 해 뜨기 전엔 그나마 숨 쉴 만하더니 해가 솟아오르자 사물을 아이스크림처럼 녹게 만드는 더위가 찾아왔다. 신발 밑창이 도보에 눌어붙어 쩍쩍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더울 줄은 몰랐어요.”
매니저가 옷자락을 펄럭펄럭 흔들며 홍화에게 아이스팩을 건넸다. 홍화가 양손에 아이스팩을 들고 뺨에 갖다 댔다. 발갛게 익은 뺨이 차게 식었다.
그늘이라 땡볕이 떨어지는 바깥쪽보다는 사정이 나은데도, 홍화나 매니저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홍화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매니저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등 쪽이 물 한 바가지 맞은 듯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끈적거리는 습도와 후끈한 공기가 홍화를 환영하듯 피부에 들러붙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미적지근한 물방울이 코점막과 목구멍을 강제로 적셨다.
“홍화 씨, 괜찮아? 땀이 좀 나네. 촬영 들어가기 전에 화장 좀 수정하자.”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커피를 쪽쪽 빨며 태용이 다가왔다. 홍화가 들고 있던 아이스 팩을 태용에게 내밀었다.
“이거 목에 대실래요? 그나마 좀 시원해요.”
“어머, 나 주는 거야? 우리 홍화 씨는 참 친절하기도 하지.”
태용이 볼에 손바닥을 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광고 촬영을 태용이 맡은 걸 알고 홍화가 전화를 걸었을 때와 비슷했다. 태용이 깜짝 놀라며,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느냐고 뛸 듯이 기뻐했다. 자기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라고, 홍화 씨가 모델이었으면 튕기지 않고 바로 수락했을 거라고 능청을 떨었다.
「그럼 우리 같이 발리 가는 거야? 어우, 너무 좋다.」
정작 같이 오고 싶던 백영은 저 멀리에 있었다. 도착하고 나서 너무 피곤한 나머지 전화도 길게 못 했다. 오늘은 피곤하더라도 꼭 그 목소리를 오래 듣고 말 거라고 홍화가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충분히 쉬었지? 더 더워지기 전에 촬영 들어가자. 빛나, 넌 이리 와서 홍화 씨 메이크업 좀 다시 해주고, 김 군! 촬영 준비해!”
홍화 앞에선 한 떨기 꽃처럼 수줍던 태용이 우렁차게 외쳤다. 각자 그늘에서 땀을 식히던 스태프들이 꿍얼꿍얼하며 느릿느릿 움직였다. 홍화도 얼굴에 어린 땀을 박박 닦아내고 메이크업을 받았다. 해가 머리꼭지에서 약 올리기 전에 촬영을 끝내려면 개미처럼 바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수영장에서 첫 화보 촬영을 끝내고 오후에는 꿀 같은 자유 시간이었다. 그래봤자 바깥으로 나갈 엄두는 쥐뿔도 나지 않았다. 여유로운 해외여행은 무슨. 매분 매초가 더위와의 사투고 햇볕과의 전쟁이었다. 살기 위해서 그늘과 에어컨을 찾아 헤매야 하는 생존의 장이었다. 시원한 호텔에서 쉬며 오후 늦게 있을 촬영에 쓸 힘을 비축해놓는 것이 차라리 남는 장사였다.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햇빛이 찬란한 바깥을 구경하는데, 심심한 홍화를 알아차린 양 핸드폰에 빛이 들어왔다. 백영이었다. 어젯밤엔 영상 통화를 걸더니 오늘은 목소리만 들으려는 모양이었다.
―뭐 해.
항상 같은 질문. 홍화는 뭐 하냐는 단순하고 무뚝뚝한 질문이 좋았다. 저가 유백영의 일상이 궁금하듯 유백영도 제 일상을 궁금해한다는 방증이었다.
“호텔에서 놀고 있어.”
―촬영은.
“오전 촬영은 끝났고, 이따가 오후에. 여기 너무 더워. 잠깐만 나가 있어도 녹을 거 같아. 다른 사람들은 시내 구경 갔는데 난 그냥 호텔에서 쉬려고.”
―모처럼 해외에 나갔는데 호텔에서만 뒹굴면 뭐해. 나갔다 와.
“여기 엄청 더워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 너도 오면 느낄 거다.”
―지역이 어딘데?
날씨 뉴스라도 확인하려는지 백영이 뜬금없이 물었다. 나라만 말해주고 지명은 말해준 적 없었다. 내친김에 호텔명도 같이 알려줬다.
―오후 촬영은 어디서 해?
어디였더라. 지명이 생소해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홍화가 매니저와 주고받은 일정표를 확인하고서야 알려줬다. 어디 해변이라는데 노을 지는 광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관광객들 사이에서 최근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다.
―아, 거기.
“너 여기 와본 적 있어?”
―촬영차 가끔. 그 해변 괜찮아. 저녁에는 좀 시원할 거고.
시원하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홍화가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백영의 숨소리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넌 뭐 해?”
―미팅하고 왔어. 일이 좀 들어와서.
홍화가 벌떡 일어났다. 뺨에 흉터가 새겨진 이래로 광고든 영화든 드라마든 스크린에 일절 나간 적이 없었다. 배우로서 더는 활동 안 할지도 모른다고 내심 걱정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하긴, 아무리 흉이 졌다 한들 그 잘생긴 얼굴이 어디 가랴.
“어떤 일? 광고? 드라마? 영화? 화보? 뭐 들어왔어.”
홍화가 저가 더 신나서 물었다. 발바닥을 꾹꾹 누르며 수화기 너머로 귀를 곤두세웠다.
―다른 일이야. 아직 확정이 안 나서 자세히는 말 못 해.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해줄게.
김이 푸시시 빠졌다. 홍화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가 침대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푹신한 침대에 울렁거리며 홍화를 요람 태우듯 흔들었다.
그래도 일감이 들어왔다니 다행이지 않은가. 이대로 유백영이 백수 되면 어쩌나 큰 고민 했었다. 물론, 이제 슬슬 자리 잡아가는 저가 먹여 살리면 되겠지만서도.
―찰리는 잘해줘? 구박 안 하고?
구박은 받았다. 햇볕이 강렬해 눈을 제대로 못 뜨자 처음 듣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태용이 눈 좀 크게 뜨라고 소릴 질렀다. 바로 합죽이가 되어 저도 놀란 듯 어머나, 감탄사를 내뱉긴 했지만, 그것도 구박이라면 구박이었다.
백영과 첫 화보 촬영 때 겪었던 고난에 비하면 태용의 짜증은 새 발의 피도 안 되었다. 웃어넘길 작은 일이기에 홍화가 그런 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음식이 입에 맞니, 날씨가 어쩌느니, 난기류를 만났을 때 추락하는 줄 알아 겁먹었다는 말도 하고, 매니저의 코 고는 소리가 엄청 커서 새벽에 일어났다는 말도 했다. 오랜 비행에 몸이 천근만근이라 매니저의 극악한 코골이에도 곧 도로 잠에 빠지긴 했다.
백영의 집에서 나와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털어놓고 나자 딩동, 하고 매니저에게서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시내 구경 다 하고 돌아가는 길인데 혹시 필요한 거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매니저 곧 돌아온대. 그만 끊어야겠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별다른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냥 떠들었다. 저가 이처럼 수다스러운 사람이었을 줄은. 스물 몇 해를 살고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면을 유백영은 자연스럽게 캐냈다.
―이홍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끊으려는 홍화를 백영이 막아섰다. 하고 싶은 말이라. 순간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한마디를 홍화가 재빨리 내리눌렀다.
“없는데.”
―있잖아.
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그럼에도 그 말이 뭐라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어 뱉기 어려웠다.
“없어.”
입 밖으로 내면 백영이 숨 막히게 보고 싶을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내가 먼저 할까.
“…….”
―보고 싶어.
홍화가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질렀다. 목구멍을 넘어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뱉고 싶어서 입술이 들썩거렸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방인데도 귓가며 뺨이며 목덜미며 태양 빛이 닿은 듯 뜨겁게 익었다. 백영의 입술이 닿고 간 것처럼 화끈거리고 간질거렸다.
―보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아.
윽, 하고 홍화가 신음했다. 직접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욱 해로웠다. 심장이 자리를 이탈해서 바깥으로 빠져나와 주인을 마주 보고 안녕이라고 인사할 것처럼 뛰었다.
―대답은?
감상할 시간도 안 주고 대답부터 요구하는 게 역시 유백영이다 싶다. 홍화는 수화기를 감싸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쳐들고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음을 알지만 혹시 인기척이라도 느끼면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듣는 이는 백영 외에 없겠지만, 홍화는 어깨를 움츠리고 손을 둥글게 말아 수화기에 댔다. 백영이 옆에 있었다면 귀에 달라붙어 속삭이듯이 소곤거렸다.
“나도. ……나도 보고 싶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아마 유백영이 보고 싶은 정도의 열 배쯤.
오후부터 시작된 빗줄기는 다음 날을 잡아먹고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멎었다. 하루를 꼬박 날려 출국 마지막 날임에도 자유 시간은커녕 촬영을 마무리하기 바빴다. 머리꼭지에서 태양이 이글거리든 말든, 스태프 한 명이 열사병에 걸려 죽겠다고 투덜거리든 말든, 해외까지 나왔는데 제대로 못 하고 가면 그게 무슨 프로냐고 태용이 쉴 새 없이 홍화와 스태프를 쪼아댔다.
수없이 옷을 갈아입고, 땀 닦기 무섭게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화보 촬영을 흘끔거리며 구경하는 외국인들의 시선까지 받아내자니 몸도 정신도 모두 녹초였다. 저만 고생하는 게 아니라며, 홍화가 이를 악물고 태용의 꽹과리 같은 잔소리에 맞춰 춤을 췄다.
“거기서 고개 왼쪽으로 조금 더 틀고! 그렇지, 잘한다! 웃어야지 왜 찌푸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태용도 홍화의 열의를 읽고 칭찬과 구박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집중했다. 다들 얼른 끝내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그리는지 촬영 내내 입도 벙긋 안 하고 열중했다.
얼마나 남았을까. 홍화의 체력이 슬슬 바닥을 드러낼 무렵 한 스태프가 조심스레 태용의 어깨를 툭툭 쳤다. 태용이 심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스태프를 노려봤다. 움찔하며 겁먹은 스태프가 조용히 속삭이자, 태용이 입을 쩍 벌렸다. 안경 너머로 흰자가 보일 만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어머나, 세상에. 어디래? 지금 어디라는데?”
태용이 카메라를 든 손까지 아래로 내렸다. 다들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전달한 스태프만 바라봤다. 스태프가 이어 우물쭈물 속닥였다.
“십 분 휴식! 잠깐 다들 쉬고 있어!”
태용은 휴식을 외치자마자 스태프를 따라 총총걸음으로 모습을 감췄다. 매니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홍화가 작달막한 태용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모랫바닥을 통통 뛰는 모습이 물을 발견한 목마른 산토끼 같다.
“어디 가신대?”
“글쎄요. 아는 사람이라도 왔나?”
매니저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일단 휴식부터 즐기자며 홍화가 비치타월 위에 철퍼덕 누웠다. 얼마나 피곤한지, 몇 발자국만 나가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인데 발을 담글 기운도 없었다.
십 분이 넘었는데도 태용은 오지 않았다. 태용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연락해보려고 스태프가 핸드폰을 찾는 동시에, 저 멀리서 “자기들-!” 하고 보통보다 높은 목소리로 외치며 태용이 팔랑팔랑 뛰어왔다. 홍화가 그늘 아래 늘어지게 누워있다가 일어나라는 모닝 벨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상체를 벌떡 세웠다.
태용의 두 손에 흰 봉투가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옆에 선 스태프의 손에도 봉투가 한 보따리였다. 그 뒤로 짐을 든 사람이 하나 더 따라오는데, 느지막한 오후 햇살이 강렬해 잘 보이지 않았다.
홍화가 손바닥으로 차양을 드리우고 눈을 가늘게 떴다. 커다란 키와 여유로운 발걸음이 지금 다른 곳에 있어야 할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에이, 설마.
그래도 설마가 사람 잡는다며 홍화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고개를 길게 뺐다.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던 이가 시야에 점점 선명하게 들어왔다.
세상 어디서 마주친들 저 외모를 몰라보랴.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 반대편에서 우연처럼 스치더라도 이홍화가 저 얼굴을 몰라볼 리 없었다.
“백영 씨도 같이 왔어!”
유백영이었다. 편안한 복장에 커피를 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홍화 쪽으로 걸어왔다. 홍화의 앞뒤에 늘어져 있던 스태프들이 난리가 났다. 수군거리고, 환호를 하고, 누구는 유백영을 구경하느라 입을 헤 벌리고서 넋을 잃었다.
대체 유백영이 왜 여기에.
태용이 신나서 뛰어간 이유가 있었다. 뒤에 백영을 매달고 온 태용의 얼굴에서 오전부터 이어진 강행군의 피로는 싹 씻겨 있었다.
홍화는 제 눈앞에 있는 백영이 믿기질 않아 눈을 비비고서 올려다봤다. 세상 어딜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빼앗는 외모와 뺨의 흉터가 빼도 박도 못하게 백영이 맞았다.
백영이 손수 커피를 홍화에게 건넸다. 홍화가 커피를 받을 생각도 못 하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눈앞의 백영이 저가 그리워서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의심했다. 제 뺨을 꼬집어보고 나서야 현실임을 깨달았다.
“요 앞 카페에서 만났어요. 잠깐 쉬러 왔는데 여기서 뵐 줄은.”
백영이 스태프를 돌아보며 천진무구하게 인사했다. 누구도 거짓말이라는 걸 짐작 못 할 만큼 진실 어린 목소리였다.
“어우, 나도 몰랐어.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백영 씨는 언제 도착했어?”
“어제저녁에요.”
의뭉스럽기 짝이 없다. 어제저녁에 통화를 할 적에도 이곳으로 오리란 내색 한번 안 했다.
“나한테 연락 한번 주지 그랬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여기서 촬영하는 거 알았으면 연락 드렸죠.”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홍화가 전화로 스케줄을 줄줄 말해 시간은 정확히 몰라도 어디서 촬영하는지는 꿰고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진심처럼 술술 잘도 뱉었다. 홍화는 빨대로 커피만 쪼오옥 빨아 마시며 백영의 연기를 구경했다.
“우리 해 지기 전에 얼른 촬영 끝내자. 백영 씨까지 왔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오늘 저녁에 풀에서 파티할 거야. 다들 강제 참석이니까 알아둬. 백영 씨, 당연히 올 거지? 꼭 와야 해.”
태용이 눈을 반짝이며 백영을 쳐다봤다. 백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야호, 하고 태용이 두 팔을 번쩍 들며 만세를 불렀다. 다른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홍화 혼자 동떨어진 채로 백영의 유들유들한 옆얼굴을 뻔뻔한 사기꾼 보듯이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백영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씩 웃었다. 판사도 얼굴만 보고 무죄를 선고할 만큼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왜요?”
백영의 입에서 나오는 존대가 어색하다. 홍화가 시선을 피하며 아니,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쁘긴 한데, 상황이 상황이라 잘 왔다는 흔한 인사 한번 뱉기 어려웠다.
“자, 그럼 빨리빨리 촬영하자. 다들 일어나! 준비해!”
백영을 보고 소녀 팬처럼 꺅꺅 돌고래 소릴 내던 태용이 노예 감독관으로 전직했다. 스태프들이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그늘을 벗어났다. 홍화도 좀비 대열에 끼려고 하는데, 팔꿈치에 무언가 닿더니 아래팔을 타고 천천히 내려와 손바닥 아래의 통통한 살을 슬쩍 쓰다듬었다.
바윗돌을 타고 내려온 뱀이라도 되는 줄 알고 홍화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뒤돌아보았다. 백영이 빙긋 웃으며 홍화의 손바닥을 간질이던 손을 들며 잘 가라고 까닥였다. 저놈의 손가락이 뱀이었다.
“홍화 씨! 뭐 해?”
“네, 가요!”
생각 같아선 못된 손가락을 콱 깨물어주고 싶지마는. 태용이 채찍을 휘날리기 전에 홍화가 그늘을 뛰어나갔다. 돌아보았을 때, 백영이 그 자리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홍화와 눈을 맞췄다.
홍화가 간질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질을 쳤다.
백영을 보자 호랑이 같은 기운이 샘솟았는지 태용이 전보다 기세등등하게 스태프들과 홍화를 모랫바닥에 굴렸다. 군대 조교가 옆에서 한 수 배워갈 솜씨였다. 덕분에 예상보다 이르게 촬영이 끝났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노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해변인데 일만 하고 갈 수는 없노라며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라 주홍빛 태양이 물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으며 하늘이 보랏빛과 주홍빛, 남청색으로 물들었다.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장난기 많은 스태프가 물방울을 튀기며 옆 사람에게 장난을 걸었고, 삽시간에 스태프들이 줄줄이 엮여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다들 합심해 한 명을 물속에 넣으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물귀신처럼 끌어들이고 난리였다.
태용은 저쪽에서 스태프들과 노는 홍화를 바라보다 옆을 흘끔 돌아봤다. 백영이 제 옆에 앉아있었다. 언제 봐도 감탄이 비어져 나오는 외모가 노을빛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카메라 너머로 볼 때는 농후한 맛이 더 짙었는데, 흉터 때문인지, 노을 때문인지 오늘따라 백영이 아직 앳된 티를 못 벗은 소년처럼 보였다.
“백영 씨는 저기 안 가?”
백영의 시선은 줄곧 물놀이를 하는 이들에게 꽂혀 있었다. 가서 끼워달라고 하면 다들 난리 치며 어서 오라고 레드카펫을 깔아줄 텐데, 시선은 그쪽으로 고정해놓고 정작 발걸음은 하지 않는다. 의아해 물었더니 백영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 것치곤 계속 저쪽만 보던데.”
백영은 빙긋 웃기만 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직감에 태용이 백영의 시선을 따라가봤다. 멀리 떨어져 누굴 보고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느낌상 시선의 끝이 홍화에게 꽂혀 있었다. 파도를 피해 뒤로 도망갔다가 스태프들의 손에 잡혀 바다에 처박히는 홍화에게.
그럴 리가 없는데. 태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홍화와 백영을 번갈아 보았다. 백영의 시선은 어디선가 한번 본 느낌이었다. 곰곰이 기억을 헤집던 태용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날이었다. 백영과 홍화의 첫 화보 촬영 때, 홍화를 사냥감처럼 껴안고 내려다보던 그 눈빛과 비슷했다. 그때보다 조금 더 들떠있다는 점만 살짝 달랐다.
백영이 홍화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선생님, 하고 입을 열었다. 태용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왜?”
“이홍화 사진, 전부 저한테 보내주세요.”
“어?”
파도가 크게 일었다. 아까 스태프들이 햇볕을 피해 쉬던 커다란 바윗돌에 부딪혀 부서져 내리며 모랫바닥에 흰 거품을 흩뿌렸다. 홍화가 이미 젖은 바짓단을 걷으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흰 발목이 얕은 파도에 흠뻑 젖어들며 고운 흙모래가 발찌처럼 흔적을 남겼다.
“왜?”
어쩌다가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으면 달라고 청하기는 했어도 전부를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것도 피사체가 본인이 아닌 이홍화다.
태용이 백영을 올려다봤다. 백영의 시선은 여전히 파도와 노닥이는 홍화에게 꽂혀 있었다. 시선이 형상을 가지면 갈고리고, 그 갈고리로 홍화를 찍어서 당장에라도 제 곁으로 끌고 올 것만 같았다.
“이홍화가 제 거라서요.”
백영은 숨기지도 않았다. 태용이 입을 쩍 벌리고 돌부처가 되어도 정정도 해명도 없었다. 태용의 예상이 맞았다고 도장 쾅쾅 찍어주고서 백영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예.”
그 말을 끝으로 백영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물놀이 별로 안 좋아한다더니. 백영은 곧장 신나게 놀고 있는 무리에게 다가가 그 사이에서 홍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홍화를 애처럼 들어다가 넘실거리는 파도 속으로 홱 집어 던졌다. 홍화가 빠진 자리에 물보라가 크게 일어나고, 스태프들이 백영의 장난에 깔깔거리며 숨넘어가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 참.”
얼마나 놀랐는지 걸걸한 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이는 어려도 어른스러운 줄 알았더니만, 지금 보니 마치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관심 한번 받으려고 못된 짓을 일삼는 꼬맹이처럼 보이지 않는가. 사랑에 빠지면 다들 철부지 애가 된다더니만. 백영이 어려 보인 이유는 노을 탓도, 흉터 탓도 아니다. 이홍화 탓이었다.
태용은 혀를 끌끌 차며 그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손에 카메라가 잡혀 저도 모르게 뷰파인더로 들여다봤다. 스태프들이 물러난 사이에 둘만이 오롯이 사각 틀 안에 담겼다.
둘이 우연처럼 맞잡은 손에 초점이 머물렀다. 태용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해변에서 그렇게 바다로 뛰어들었으면서 아직도 물이 모자랐는지 스태프들이 풀에 풍덩풍덩 잘도 몸을 던졌다. 홍화의 발목도 잡고 끌고 들어가려는 거, 푸엣취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용케 빠져나왔다. 물가에 있다가는 풀에 그득한 물귀신들이 호시탐탐 끌고 갈 기회를 엿볼까 봐 홍화가 슬금슬금 멀어졌다.
점점 거리를 두다 보니 어느새 꽤 멀리 떨어진 나무 그네에 홀로 자리를 잡았다. 발을 구르자 연결고리가 삐걱거리며 그네가 흔들렸다. 어릴 적에는 집에 가기 싫어 운동장에 있는 그네에 오랫동안 머물곤 했었는데. 텅 빈 운동장에 노을이 질 때쯤이 되어서야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갔더란다.
피식하고 웃음이 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이런 순간이 현실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언젠가 해외에서 광고를 촬영하는 날이 오리라 꿈을 꾼 적은 있으나 그게 현실이 될 줄이야. 길게 살다 보니 쥐구멍에도 볕은 들었다.
푸에취, 하고 재채기가 한 번 더 튀어나왔다. 몸이 오슬오슬하고 목덜미에 개미가 기어가듯이 소름이 돋았다. 닭살이 올라온 팔뚝을 벅벅 문지르며 홍화가 비치타월을 어깨에 둘렀다. 이 맥주만 비우고 태용에게 인사하고 방에 들어갈까 싶다.
홍화가 눈으로 태용을 찾았다. 그러다가 태용 옆에 있는 백영에게 시선이 꽂혔다. 실상 아까부터 주시하고 있었지만 아는 척은 차마 하지 못했다. 태용과 스태프들이 백영의 주위를 둘러싸고 틈을 내주지 않아 간간이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며 못 본 척만 열심히 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느라 백영의 옆얼굴 선이 드러났다. 누가 저리 조각을 했는지, 보고 있으면 넋 빠진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 안에 든 사납고 더러운 성격이 웬만한 성격파탄자 못지않은데도 외양만큼은 사람을 홀리게끔 잘 빠졌다. 특히 저 눈이. 약간 내리깐 눈에 속눈썹이 머리 위의 둥근 조명 빛을 받아 공작새 깃털처럼 반짝거렸다.
맥주에 입술을 댄 것조차 잊고 바라보다가 백영과 시선이 부딪쳤다. 홍화가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괜히 봤다. 훔쳐보다가 들킨 기분에,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 귀 끝이 뜨거워졌다.
백영이 태용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일어서서 홍화 쪽으로 다가왔다. 홍화는 괜히 안 본 척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곳만 바라봤다. 백영이 홍화의 시야를 턱 하니 가로막고 섰다.
“여기서 혼자 뭐 해.”
홍화가 대답 대신 맥주병을 들어 올렸다. 백영이 맥주병을 받으며 홍화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시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백영이 남은 맥주를 단번에 비워내고 바닥에 내려놨다.
맥주를 다 마시면 방으로 돌아가려 했건만.
홍화가 발바닥에 힘을 주자 그네가 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백영의 무게가 실려 홍화 홀로 앉아있을 때보단 움직임이 둔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정말 쉬러 온 건지, 아니면 저를 보러 온 건지 백영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알면서도 물었다는 게 정확했다.
“몰라서 물어?”
백영이 홍화를 빤히 쳐다보며 반문했다. 무뚝뚝하기는. 홍화는 연기력 좀 발휘하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언제 이홍화가 저렇게 뻔뻔해졌냐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고 손가락질할 얼굴이었다.
“응.”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 홍화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백영과 눈을 맞추면 연기라는 게 금세 들통날 것이므로.
낮은 휘파람 소리처럼 백영이 웃었다. 홍화의 연기가 가소롭다는 듯 눈 끝을 달처럼 접고 웃다가 다리에 힘을 주고 그네를 세웠다.
“보고 싶어서.”
“누굴?”
“너를.”
“누가.”
“내가.”
백영이 스스럼없이 고백했다. 홍화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조몰락거렸다. 조개 입 닫듯이 꾹 누르고 있지 않으면 변태처럼 흐흐거리며 웃어댈 게 뻔했다.
보고 싶다는 그 말, 전화로도 들었건만 유백영이 제 옆에서 말해주는 것과는 그 감상이 완전히 달랐다. 좋다. 좋다는 표현으로는 심히 부족했다. 더 훌륭한 표현이 어디 없을까. 홍화의 손가락 발가락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며 비비배배 꼬였다.
“하루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귀국까지 겨우 하루 남았다. 내일 밤이면 볼 수 있었다. 백영이 해외 촬영을 가고, 저 홀로 남아 기다렸던 적에 그랬다. 하룻밤만 더 자면 된다고, 길디긴 하루만 더 버텨내자고.
“넌 그게 돼? 난 안 되던데.”
단호한 대답. 홍화가 백영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귓바퀴와 옷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 그 안쪽까지 새빨갰다.
어깨에 두른 타월 때문인지 온몸이 더웠다. 좀 전까지만 해도 춥더니 참 변덕스러운 몸뚱이였다. 술 한 잔 더 하면 좀 나아지려는지. 홍화가 방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맥주 한 병을 더 가져오려고 했다.
“이홍화.”
하고 부르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돌아봤다. 백영의 얼굴이 불시에 코앞에 들이닥쳤다.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턱이 단단하게 잡혔다.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다른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빛이 닿는 이곳에서.
홍화가 으헉,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저쪽이 워낙 시끄러워 홍화의 식겁한 소리에도 무슨 일이냐며 관심을 던지지 않았다. 그래도 홍화는 시뻘건 얼굴로 주위를 홱홱 돌아봤다.
“사람들 다, 다 있는 데서 이러면……!”
“그럼, 없는 곳에서는 키스해도 돼?”
도망가려는 홍화의 손목을 잡고 백영이 속삭였다. 올려다보는 짙은 갈색 눈에 빛이 떨어졌다. 언젠가 놀이터 벤치에서 본 눈빛이었다. 가로등 불이 주렁주렁 떨어져 백영의 눈 속에만 들어찼던 그 순간, 알겠다고 말하지 않느냐며 제 손목을 놓지 않았던 유백영.
그때도 사실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돼.”
이제는 할 수 있다. 홍화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영이 벌떡 일어났다. 태용에게 인사해야 한다며 머뭇거리는 홍화를 둘러맬 듯이 끌어당기고서 백영이 보폭 넓게 걸었다. 태용 쪽을 힐끔대다가, 홍화도 고개를 푹 숙이고 백영의 손에 잡혀 풀을 빠져나갔다.
입맞춤만 한다기에 근처로 갈 줄 알았더니 끌려온 곳이 생판 다른 곳이었다. 으슥한 곳이나 저가 머무는 방이나, 그도 아니면 같은 호텔의 다른 방이겠거니 했건만, 아예 격이 다른 숙소일 줄은.
백영의 손에 잡혀 미로 같은 정원을 줄줄 헤매다가 드디어 방에 들어왔다. 구경은 하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백영이 홍화의 허리를 휘감았다. 홍화의 발꿈치가 바짝 서도록 꽉 끌어안고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가 영 불편한지 엉덩이를 손아귀에 힘을 줘 잡고는 번쩍 들어 안았다. 홍화가 으억, 볼품없는 소릴 내며 두 다리로 백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아, 야, 잠깐, 흐, 읍……!”
차에서는 손잡는 것도 조심하더니만 방에 들어오자 거칠 것이 없다. 홍화의 입술을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걸로 모자라 혓바닥으로 안을 진탕 휘저으며 쪽쪽 빨아댔다. 혓바닥이 뒤엉키는 게 아플 정도라 홍화가 입술을 떼어내려고 해도 백영이 으르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하는 대로 하게 냅두란다. 홍화가 숨이 막혀 가슴팍을 부풀리며 할딱여도 저 좋을 대로 입을 맞추고 홍화의 호흡을 막았다.
인간인지 짐승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본 주인을 덮치고 핥아대는 늑대처럼, 홍화의 온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들어버릴 것처럼 뽀뽀를 퍼부어댔다. 말리면 역효과라 한동안 놔뒀지만 유백영이 입맞춤으로 끝낼 리가. 옷자락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홍화가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려고 하자 그 육중한 무게로 아랫도리를 깔고 앉아 홍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흠뻑 숨을 들이마셨다. 한숨 돌리나 했더니, 백영의 손은 또 부지런히 홍화의 바지를 찢어버릴 듯이 벗기고 있었다.
“야, 먼, 저 씻고……!”
파티에 참석하기 전 씻고 왔다지만 더운 날씨에 살갗이 끈적끈적할 텐데 백영은 좋다고 파고들었다. 입을 크게 벌려 살갗을 우물우물 씹고 빨고 손으로는 전보다 제법 살과 근육이 붙은 맨살을 더듬고 주물럭거렸다. 젖꼭지를 꼬집고 옆구리를 양손으로 쥐어보고, 판판한 뱃살을 덧그렸다가 팬티를 움켜쥐었다. 홍화에게 입을 맞추고 시야를 가린 다음 손등과 아래팔에 힘줄을 곤두세우더니 그대로 종이 찢듯이 찢었다.
홍화가 놀라가지고 뒤로 몸을 빼도 조각난 속옷은 명을 달리 한 채 바닥에 흩어졌다. 그냥 놔두려고 했건만 이러다가는 제 몸도 두 조각으로 찢어놓게 생겼다. 홍화가 말리려고 백영의 어깨에 두 손을 대고 밀었다.
“……그만!”
백영이 멈칫했다. 눈빛은 맛이 갔는데도 용케 알아들었다. 뺨과 눈 밑은 붉고 홍화의 입술을 먹고 부딪치느라 바빴던 입술도 새빨갰다. 불만이 팽배하다 못해 이를 세우고 달려들 성싶게 씩씩대면서도 백영이 주먹을 꽉 쥐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홍화가 사인만 주면 그대로 덮칠 것처럼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내려다만 본다.
조금만 천천히, 라고 말하려고 했다. 바지를 뚫고 올라올 것처럼 부푼 아랫도리를 하고서 얌전하게 참는 백영을 보자 홍화도 이성의 끈이 머리카락 한 올처럼 얇아졌다. 매번 고삐 풀린 미친개처럼 날뛰던 인간이 제 한마디 들어주겠다고 욕망을 참고 견디는 그 모습이 이성을 가느다랗게 저밀 만큼 야해 빠졌다.
“이홍화, 빨리.”
숨결이 거칠어졌다. 홍화도 마찬가지였다. 홍화가 다리를 꼬물거렸다. 유백영을 말려야 한다고, 이러다가는 뼈째 발라 먹힐 거라고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윙윙 돌았지만 눈앞의 유백영이 그런 사고를 살라 먹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제발, 빨리.”
꽉 쥔 주먹과 아래팔에 핏줄이 돋았다. 관자놀이에도 힘줄이 섰다. 인내심이 슬슬 닳아가는지 목소리 끝이 설핏 떨렸다. 그게 홍화의 이성도 끊어놨다. 다 먹고 다 가지라고, 우리 너머에 있는 짐승에게 제 몸을 던지듯이 홍화가 백영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다 가져. 네가 다 가져.”
내일이 오지 않아도 된다. 뼈만 남아도 상관없었다. 홍화가 실오라기 한 올 없는 맨몸으로 백영의 아래 만찬처럼 펼쳐졌다. 굶주린 짐승이 무얼 거절하랴. 백영이 손톱을 세우고 고깃덩이 물어뜯듯 홍화를 삼켰다.
참는 모습이 야하다고 제 몸을 던질 필요는 없었는데. 성급한 선택을 후회해봐도 침대 위는 이미 식탁이었고 이홍화는 그릇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송아지 뒷다리였다. 입이 달린 이홍화가 어흑어흑 울어대도 우리를 열고 뛰쳐나온 유백영이 그만 먹을 리가. 식사는 끊임없었다.
오랜만이니 살살 해달라는, 살려고 발버둥 치는 홍화의 요구는 반만 들어줬다. 들어줬나. 과연 들어줬다고 할 수 있나. 홍화는 침대에 엎어진 채 묵살당한 제 요구를 반추해봤다.
입을 맞추면서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이었을까. 아님 다리로 허리를 휘감고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이었을까. 부탁했던 상황을 그려보다가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미미한 통증과 정수리가 저릿저릿한―실제로도 침대 헤드에 부딪혔기에― 쾌감에 허벅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딴생각하지.”
개새끼야.
욕하고 싶지만 입에 백영의 손가락이 들어와 휘젓는 바람에 울먹이는 소리만 새어 나갔다.
처음에 백영은 나름 다정하게 대하려는 듯 보였다. 입을 맞추고, 홍화의 온몸에 발갛게 꽃을 피우고, 허벅지 안쪽과 아랫도리를 입안에 쑥 넣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홍화는 잡아먹힐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백영을 받아들일 때만 하더라도, 천천히 구멍이 벌어지고, 한계 이상으로 늘어나서 찢어지지 않을까 숨을 할딱거리며 걱정했을 때도, 너무 깊이 들어와 배 속이 울렁였을 때도 홍화는 괜찮았다. 버틸 수 있었다.
「오랜만이니까……, ……천천히.」
뭘 꿈꿨었더라. 그래, 언젠가 했던 정사처럼 느리고 사랑이 충만한 교합을 꿈꿨더란다. 백영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고, 두 팔로 목을 감싸고, 고개를 들어 입 맞추며 속삭인 이후로 희망찬 꿈이 와장창 깨졌다.
그나마 조금은 이성이 남았던 눈이 회까닥 돌아갔다. 입맛을 다신 백영이 홍화의 부탁을 들어줄 것처럼 다정하게 미소 지어놓고는 입을 크게 벌려 홍화의 목덜미에 잇자국을 진하게 새겼다. 식사의 시작이었다. 홍화가 악, 하고 비명을 지르자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허리를 흔들고 허벅지에 근육을 불끈 세워 후려치는데, 홍화가 눈을 크게 뜨고 도리질을 하고 베갯잇을 움켜쥐고 살려달라는지, 살살 하라는지 모를 말로 ‘살’이라고만 헐떡이며 뱉어도 백영은 모르쇠로 일관이었다.
「씨발, 이홍화 진짜, 너, 내가…….」
그 뒤로는 영어로 떠들어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한글로 떠들어도 홍화는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모든 말 앞에 에프로 시작하는 욕이 섞인 것만 얼핏 들었다. 침대가 출렁이며 벽에 쾅쾅 부딪히는 소리와 홍화가 애처럼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백영의 목소리를 잡아먹었다.
“아윽, 흣, 으아……, 아!”
안에 싸놓은 정액이 백영의 허벅지가 부딪칠 때마다 철퍽철퍽 젖은 소리를 내며 바깥으로 질금질금 흘러내렸다. 볼기짝 사이와 조그만 사과 알처럼 줄어든 불알과 허벅지를 핥으면서 길을 그리다가 침대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홍화가 버티다 못해 허벅지를 떨어가며 앞으로 엉금엉금 도망가면, 백영이 어딜 가느냐고 옆구리를 콱 쥐어다가 제 앞으로 도로 끌어다 놨다.
“아, 흐으, 흐아, 살, 살……, 제발. 제……발!”
“이렇게 박아줘야 네가 싸잖아. 응? 이거 봐.”
백영이 손아귀에 물렁물렁한 아랫도리가 잡혔다. 정액을 빼다 못해 파업을 선언하기 직전인 불알까지 한 손에 쥐고 어린애가 물러터진 홍시 쥐듯이 주물럭거렸다. 홍화가 도리질을 치며 목울음을 토해내도 백영은 박는 몸짓을 멈추지도, 손을 놔주지도 않았다.
검지와 엄지로 홍화의 아랫도리 끄트머리를 비틀고 비비자 흰 물이 쪼르륵 또 새어 나왔다. 터진 자극에 홍화의 속살이 안에 든 기둥을 물고 입속처럼 오물거렸다. 백영이 홍화의 날갯죽지를 깨물며 그 사이로 낮게 신음을 뱉었다. 잠시 행동이 멈춘 사이 홍화가 숨을 돌리려는데, 그 쉬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백영이 푹푹 찔러왔다.
“흐, 아, 아, 아프……. 아, 아윽!”
온몸의 신경이 이게 쾌감인지, 쾌감이 너무 지나치다 못해 고통인지 몰라서 눈앞에 뻘겋고 허연빛만 번쩍번쩍 내보냈다. 좋아, 라는 말이 나오려다가도 속살까지 오그라드는 쾌감은 정의할 말이 고통이란 말뿐이라 아파, 라는 문장으로 바뀌어 나왔다.
좋아 죽는 걸 넘어 배 속이 뚫릴 때마다 홍화가 정말 죽을 것처럼 허리를 뒤틀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눈가와 뺨이 흠뻑 젖었는데도 새로 눈물이 흘러서 입술과 턱을 적시고 갸름한 턱 끝에 모였다. 백영이 정을 박듯 박아대는 터라 손등으로 닦을 새도 없이 눈물이 침대 시트에 베개에 팔 위에 떨어졌다.
“하, 하으, 흐으으, 아으……, 아, 아……, ……!”
백영이 아랫도리를 주무르던 손을 슬금슬금 올려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배가 눌리며 안에 든 기둥의 요철까지 느껴지도록 속살이 꽉 오므라들고, 배꼽에서 전신으로 퍼진 감각이 뇌를 엉망으로 녹여대 홍화가 침대 헤드를 쥐며 도망가려고 몸을 앞으로 뺐다. 백영이 혀를 길게 빼 홍화의 등 선에 밴 땀방울을 핥으며 아랫배를 꾹 눌렀다.
홍화가 도리질을 치며 하지 말라고, 배 터질 것 같다고 발버둥 쳐도 배꼽 부근을 누르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속살이 기둥을 잘라 먹을 것처럼 조여대 백영의 관자놀이에도 힘줄이 섰으면서, 무슨 흉한 꼴을 보자고 이러는지 홍화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홍화가 눈을 홉뜨며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싫어, 싫어, 이거 싫어……!”
요도 끝이 찌릿찌릿하고 오금이 저렸다. 백영이 비틀어 짠 기둥 끝에서 투명한 물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오줌 방울처럼 매달린 주제에 색 없이 투명한 물이 예전에 겪었던 그 일의 전초전과 비슷했다. 배를 꾹 눌렀다가 놔주고, 도로 꾹 눌러오는 손길이 정액 말고 다른 걸 쥐어짜서 요도 구멍으로 분수처럼 뽑아내게 하려는 듯 요망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달래는 목소리가 부드러워도 홍화는 속지 않았다. 엉엉 울며 백영의 손목을 쥐고 손톱을 세워 긁어내렸다. 벌건 줄이 올라오게끔 긁자 백영이 홍화의 몸을 가볍게 홱 뒤집었다. 기둥이 속살에 든 채로 몸이 굴러 홍화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목을 뒤로 젖혔다. 바짝 약이 오른 아랫도리에서 물방울이 방울방울 새어 나와 기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기서는 싫어?”
백영이 홍화의 부푼 입술에 들러붙어 쭙쭙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근육 잡힌 뱃가죽에 터지기 일보 직전인 아랫도리가 문질러져 홍화가 버르르 떨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영이 보는 앞에서 실금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았어, 그럼.”
처음엔 백영이 몸을 뒤로 물려주는 줄 알았다. 잠깐만 시간을 주면 바로 욕실로 달려갈 텐데 백영은 홍화를 놔주지 않았다. 홍화의 팔을 잡아당겨 제 다리 위에 앉히고, 그 두 다리로 제 허리를 감게 했다. 너무 깊숙이 들어와 홍화가 아래턱을 바르르 떨자 귀여워 미치겠다는 듯이 뺨과 귀 아래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목에 팔 감아.”
홍화가 결합을 풀려고 했으나 백영이 먼저 벌떡 일어서 실패했다.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백영의 목을 감싸 안고 홍화가 흐으윽, 길게 울었다.
“내, 내려줘.”
“데려다줄게.”
홍화가 허리에 감은 다리를 풀지 못하게 백영이 단단하게 받쳐 안았다. 결합한 그대로 백영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홍화가 백영의 등에 손톱을 세우며 움찔거렸다. 몸이 파도에 실린 듯이 흔들리며 속살이 문 기둥이 점막 이곳저곳을 문질렀다. 그때마다 어깨와 등골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아 홍화가 끙끙거리며 아등바등 허벅지에 힘을 줬다.
침대였으면 시트라도 물고 신음을 참았을 텐데, 물 게 백영의 목덜미뿐이라 거기에 벌린 입을 묻었다. 후우, 하고 백영이 토해낸 한숨 같은 신음에 홍화의 엉덩이에 보조개가 움푹 팼다. 백영이 잠깐 멈춰 서 홍화의 엉덩이를 쥔 손에 힘줄을 세웠다.
가까스로 욕실에 도착했다. 이제 백영이 놔줬으면 좋겠는데, 백영은 홍화를 변기 앞에 세우고 제가 등 뒤를 차지했다. 풀었던 결합도 다시 맺었다. 흐물흐물한 구멍이 커다란 대가리를 쑥 먹고 그 아래 굵은 목과 두툼한 살덩이까지 죄다 단번에 삼켰다. 홍화가 무릎에 힘이 풀려 주춤하자 백영이 허리를 잡아 세웠다.
“그만 가, 좀!”
“이홍화, 너 여기까지 올라가면 확 좁아지는 거 알아?”
홍화가 사정사정해도 백영은 딴소리만 지껄이며 몸을 바짝 붙였다. 둥근 엉덩이에 까슬까슬한 거웃이 닿을 때까지 밀어붙이고서 홍화의 고간을 손에 쥐었다. 욕실에 도착할 때까지 기세가 죽지 않고 까닥이던 아랫도리가 백영의 손길을 받고 성이 나서 바짝 대가리를 세웠다.
백영에게 맞추느라 홍화의 뒤꿈치는 잔뜩 들린 채였다. 거의 발끝으로 타일을 딛고 서 있었다. 백영이 조금만 흔들어도 한쪽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더 올라가고 싶은데……. 길이 안 열려. 이홍화, 네가 지금 싸면 좀 열릴 거 같은데.”
증명이라도 할 듯이 백영이 안쪽 더 깊숙한 곳을 쿡, 쿡 느리게 찔렀다. 뭉툭한 대가리의 모양이 어떤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만큼 속살이 기둥을 틈 없이 죄었다. 속살을 비집고 깊은 곳을 슬쩍 찌를 때마다 홍화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벌건 아랫도리에도 물이 둥글게 맺히다가 뚝뚝 떨어졌다.
“나가, 라고, 좀! 읏……, 유백영!”
“나가긴 뭘 나가. 어차피 처음도 아닌데 뭐 어때. 빨리. 보고 싶어.”
홍화가 버둥거리자 백영이 아예 오금에 팔을 넣어 아기처럼 안아 들었다. 자칫하면 변기에 빠질 거라고 사악하게 속삭이고는 받쳐 안은 홍화를 인형처럼 흔들었다. 홍화가 흐으윽, 숨넘어가는 소리를 뱉고서 팔을 뒤로 뻗어 백영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얀 종아리와 다리가 백영의 팔 너머로 종이처럼 나풀거렸다. 아래서 난잡한 소리가 거푸 터지며 홍화의 아랫도리도 점점 무르익어갔다. 다리가 맥없이 흔들리다가도 발가락이 부챗살처럼 펴지고, 발바닥이 곧추서고 발가락이 안으로 오그라들었다.
홍화가 떨어질 것 같은 공포에도 한 손을 내려 아랫도리를 가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두꺼운 몸통이 구멍을 들쑤시고, 그만큼 두툼하고 무딘 대가리가 좁은 길을 어떻게든 열려고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하, 으, 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끔찍하리만치 날카로운 짜릿함이 전신을 관통했다. 손가락 틈으로 삐죽 삐져나온 끄트머리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거세게 터져 나와 변기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사정 같은 쾌감이 물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온몸을 쥐어짰다. 젖고 축축하고 뜨끈뜨끈한 점막도 백영의 기둥을 꽉 조이다가 누글누글 풀렸다가 다시 더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혓바닥처럼 살아서 요동쳤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고 누가 말했나. 두 번째라도 수치심이 지극한 건 처음과 같았다. 아니, 처음보다 더욱 부끄러웠다. 홍화의 온몸이 데친 문어보다 벌겋게 익었다. 내려달라고 욕을 섞어 외쳐도 백영은 팔을 풀기는커녕 아직도 벌름대며 방울을 찔끔찔끔 뱉는 홍화의 아랫도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씨발.”
욕은 백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백영이 홍화를 내려줬다. 드디어 살았다고 홍화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도망치려 했으나, 백영의 식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영이 홍화의 두 손을 세면대에 고정해두고 허리를 잡아끌었다. 졸지에 엉덩이만 뒤로 뺀 자세로 홍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울이 코앞에서 홍화와 뒤에 선 백영을 비추었다. 홍화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백영이 뒤통수를 잡아 고정했다.
“잘 봐. 네가 어떤 얼굴로 조르는지.”
홍화의 입에서 그만하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백영이 작살처럼 박아 올렸다. 동그랗게 벌어진 홍화의 입에서 악, 하고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거친 숨소리와 섞여 나왔다. 점막이 쥐어짜대서 더욱 단단해진 기둥이 홍화의 속살을 단숨에 끝까지 치고 들어왔다.
“흐아, 아! 아, 아흐…… 앗, 아, 아!”
홍화의 뒤꿈치가 도로 바짝 섰다. 한쪽 발은 허공에서 덜렁거리고 얼굴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입이라도 맞출 듯이 가까웠다. 김이 서린 거울에 벌겋게 달아올라 눈물을 주르륵주르륵 흘러대는 제 얼굴과 뒤에서 홍화를 쥐고서 욕심을 채워대는 백영이 비쳤다. 볼이 발갛게 익어서 미간에 금을 내놓고, 이를 악물고 저를 꿰어 올리는 백영을 보고 홍화가 세면대를 깨트릴 듯이 움켜쥐었다.
“아, 너무 깊, 흣, 깊……어! 거기, 거기는, 너무……!”
몸뚱이가 물을 다 뱉고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해졌는지, 백영을 몸속 더 깊은 곳까지 끌어들여놓았다. 비좁은 틈을 찌르고 쑤시고 박아대다가 백영 말대로 길을 연 것처럼 기어이 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홍화가 히익, 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백영의 팔이 뜀박질을 하기 직전인 짐승처럼 단단하게 굳어지자 홍화의 나머지 한쪽 발도 바닥에서 떨어졌다.
홍화의 몸은 아래로 떨어지고, 백영의 허리는 위를 향했다. 틈이라고는,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 몸처럼 이어졌다. 홍화의 살갗에 철썩 들러붙은 허벅지가 부르르 떨리고, 안쪽까지 파고든 기둥이 흉흉한 기세로 부풀었다가 새로운 점령지에 흔적이라도 남기려는지 흰 물을 줄줄이도 뱉어냈다.
백영이 허리를 내리눌러 홍화가 세면대에 바짝 엎드렸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감당해낼 수 없는 감각이 홍화를 낭떠러지로 떠밀었다. 쾌락도 고통도 아닌, 그야말로 지나친 감각이란 말 외에는 정의할 단어가 없었다.
홍화의 손끝 발끝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눈동자는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풀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거울에 비친 백영을 짚었다가 눈앞이 순간 깜깜해지며 밤이 훅 찾아왔다.
“……이홍화?”
백영이 홍화의 허리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홍화의 고개가 뒤로 힘없이 넘어가며 뒷머리가 백영의 어깨에 닿았다. 닫힌 눈에 아직 떨어지지 못한 눈물방울이 매달려있다가 뺨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백영이 뺨을 쓰다듬어도 홍화는 눈을 뜨지 못했다. 결합을 풀자 홍화의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끈 떨어진 인형처럼 아래로 쓰러지려 했다. 쉽게 입 다물지 못하는 구멍에서도 흰 정액이 울컥 새어 나와 얼룩덜룩한 허벅지 사이를 핥으며 흘러내렸다.
백영이 양심의 가책은 손톱만큼도 안 느끼는 얼굴로 바람 새듯 웃고는 홍화를 제 품에 안아 들었다. 땀과 눈물과 정액으로 범벅이 된 홍화를 품에 잘 갈무리하고서 아직 덜 채워진 욕구는 머리에 뽀뽀를 퍼붓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래 참았으니 이 정도는 좀 받아줘야 하지 않나. 너무하네, 이홍화.”
홍화가 들었으면 아는 욕을 죄다 퍼부었을 발언을 서슴지 않고 던지며 백영이 욕조 안에 몸을 뉘었다. 제 속도 모르고 야속하게 기절한 홍화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다가, 불시에 와락 껴안고 분홍빛 볼이 얼룩덜룩해질 만큼 입을 맞췄다.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와서는.”
제 인생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이홍화는 너무나도 쉽게 일으켰다. 어느 순간, 눈 떠보니, 찰나에 파도처럼 일어나 덮친지라 사태를 깨닫고 반항하거나 피할 새도 없었다.
차마 낯부끄러운 단어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백영이 홍화의 살갗을 주물럭거리고 입술을 갖다 대고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홍화가 기절할 만큼 뽀뽀하고 물고 뜯고 맛보고 정사를 나눠도 아직 한참 모자랐다.
이홍화는 유백영에게 언제나 모자란 만찬이었다. 뼈째 다 먹어 치워도 또 다른 허기를 야기하고 마는. 이쯤 해야지, 자제해야지 나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도 저를 올려다보는 이홍화와 눈이 마주치면, 이성은 개나 주고 양심은 소나 주는 상황이 찾아왔다. 남들보다 빈약하고 미약한 양심이라도 지켜야 할 때가 있건만.
뜨뜻한 물이 홍화의 쇄골 아래서 찰랑거릴 만큼 차올랐다. 백영이 손을 들어 물을 잠그고 홍화를 끌어안았다. 힘없이 딸려오는 몸에 팔다리를 칭칭 감고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젖은 몸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체향을 흠뻑 들이마시고 나서야 그간 불안하게 들쑥날쑥 날뛰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역시나, 이홍화의 옆자리가 제 보금자리였다.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홍화를 바투 끌어안고서 백영이 눈을 감았다. 이홍화가 나간 후 곁에 오지 않았던 잠기운이 성큼 다가와 등을 토닥였다.
일행들을 먼저 보냈다. 도저히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갈 수가 없었다. 등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백영이 가려고 발버둥 치는 홍화를 천근만근처럼 짓눌렀다. 가야 한다고 통사정해도 홍화를 달래고 어르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 백영은 기어이 여권까지 회수해갔다. 애 셋을 낳아야 날개옷 돌려준다는 나무꾼보다 파렴치했다.
“왜 못 가게 하는 건데. 나 스케줄 챙겨야 한다고.”
“내가 널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간다고. 매정하네, 이홍화. 아주 냉정해.”
이렇게 사람을 매도하지 않는가. 한 게 없기는. 지금까지 온 방을 한 몸처럼 굴러다니면서 몸 섞은 건 머릿속에서 지워진 모양이었다.
내가 부른 거 아니라고, 멋대로 와놓고 왜 사람을 못살게 구느냐고 홍화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정말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이는 백영을 보고 입술을 사리물었다. 저런 표정은 반칙이었다. 매사에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결정적일 때는 면역 없는 표정을 지어 홍화의 백기를 유도했다.
“어차피 너 촬영하느라 어디 가지도 못했다며. 여기 관광지로 유명한데.”
가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긴 했으나 촬영을 우선시하느라 다음을 기약했었다. 백영이 그 점을 알고 먼저 챙겨주니 반강제로 감금당한 분노가 반 이상 가라앉았다.
“……어. 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해.”
“잘됐네.”
바로 태세 전환하는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워 홍화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더워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려고 했던 전과 달리 홍화가 적극적으로 짐을 챙겼다. 백영과 함께라면 거기가 들들 끓는 철판 위라도 최고의 명소라 놓칠 수 없었다.
유백영은 거의 가이드였다. 촬영차 몇 번 들렀다더니, 한국인들이 없는 곳만 쏙쏙 골라 갔다. 차를 타고 외진 곳으로 나가 혹시 안 좋은 일을 겪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 기우였다.
마지막으로 촬영한 장소보다 노을 지는 게 더 아름다운 해변에서 백영의 손을 잡았다. 외국인들만 있는 데다가, 그조차도 얼마 안 되어 홍화도 용기를 냈다.
손가락을 겹쳐 쥐고서 젖은 모래사장을 걸었다. 오가는 대화가 없어도 둘은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손가락에 손가락을 얽고서는 보폭을 맞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흰 모래사장에 둘의 발자국이 남으면, 파도가 질투하듯이 움푹 파인 발자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런 게 행복이 아닐까. 홍화는 백영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저에겐 멀기만 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행복하다.
그 외에 달리 홍화의 기분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홍화가 노을을 머금어 붉어진 뺨을 하고 백영의 옆에 꼭 붙었다. 춥지도, 파도를 피하려는 몸짓도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백영은 이유를 묻는 대신 홍화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따뜻한 손아귀에 홍화가 입을 배시시 방긋거렸다.
어둠이 가라앉아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에도 둘은 오랫동안 해변에 머물렀다.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다들 걸음을 되돌린 후에, 둘은 밤바람이 차다는 핑계를 대며 손을 잡고, 몸을 붙이고, 포옹을 하고 입을 맞췄다.
홍화는 이 밤이 아주 길게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백영과 함께한 추억이 긴 밤만큼 오랫동안 이어지길 바랐다.
어느덧 사흘이나 지났다. 그야말로 쏜살같았다. 바깥에 나간 시간보다 안에 머문 시간이 길었지만 홍화는 후회하지 않았다. 뭘 하든 백영이 옆에 있었다. 그러면 단 일 분 일 초도 낭비가 아니었다.
행복 그 자체였다. 관광지를 돌아본 것도 기억에 남지만, 단순하게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나눠 마시거나, 프라이빗 수영장에 해달처럼 둥둥 떠다니는 순간들은 그동안 지친 심신을 치유했다. 피곤이 머리꼭지까지 차오른 때에 입에 넣은 초콜릿이나, 졸려 죽겠을 적에 한 모금 마신 달콤한 커피 같은 여행이었다.
꿈결 같은 나날은 이틀째 되는 날부터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이틀이 지나자 두 사람의 핸드폰에서 불이 났다. 백영을 쪼아대는 인간은 사장이었고, 홍화를 쪼아대는 사람은 매니저였다. 언제 들어올 거냐고 엉엉 우는 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홍화의 고막도 뚫을 듯했다.
「아니, 형. 물 들어올 때 노 저으셔야죠, 왜 안 들어오세요. 지금 형 찾는 전화 때문에 내 핸드폰에서 불나는데 정말 이러기예요. 내 밥줄도 끊으려고 그러시는 건가요. 크라프트가 요즘 얼마나 핫한데요. 그거 때문에 정부 음모론도 제기된 거 모르세요? 케이블에서 그런 시청률 나오기 쉽지 않거든요. 어서 오세요. 제발 어서 돌아오세요. 밀린 인터뷰가 지금, 혀어어엉……!」
아주 절절했다. 누가 보면 헤어진 전 애인에게 호소하는 줄 알겠다. 홍화가 곧 돌아갈 거라며 매니저를 열심히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원래 천국은 짧고 현실은 긴 법이지 않은가. 오늘 밤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몰라 홍화가 아쉬운 눈으로 방 안 곳곳을 돌아봤다. 그러다가 뺨과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침대는 물론 판판한 서랍 위, 테이블, 소파, 커튼, 욕조, 거울 앞 등등, 방의 모든 곳에 둘이 야하게 뒤엉킨 기억이 묻어있었다.
열을 식히려고 홍화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쿵쾅거리며 베란다로 걸어갔다. 먼저 의자에 자리 잡고 있던 백영이 홍화를 돌아봤다. 입에서 흰 담배 연기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홍화가 옆 의자에 자리를 잡으려 하자 백영이 옆구리를 감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근육이 단단해 오래 앉아있으면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일 듯 불편한데도, 홍화가 군말 없이 꼬물꼬물 자리를 잡았다.
백영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홍화의 입술에 갖다 댔다. 홍화가 말없이 담배를 받아 물고서 깊게 빨아들였다. 저가 피우는 것과 달라 혀가 알싸한 맛은 없지만 백영의 향이 배어있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홍화의 입술 사이로 흰 연기가 뻐끔뻐끔 기어 나왔다.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후, 내뱉자 짙은 크림색 연기가 멀리도 흘러갔다. 어찌 보면 못된 소년 같고, 달리 보면 능숙한 어른 같다. 백영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담배를 도로 빼앗았다.
“왜.”
“맛없어 보여서.”
백영이 마지막으로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고 필터를 잡아 재떨이 바닥에 비벼 껐다. 연기가 허공으로 희미하게 궤적을 그리며 올라가다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백영이 홍화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백영의 손등에 제 손을 겹치고서 홍화가 엄지로 가만가만히 문질렀다. 핏줄이 금맥처럼 뻗어있는 너른 손등이었다.
밤이 고요했다. 파도가 굽이치는 소리만이 베란다 너머로 들려왔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얼굴을 드러내며 검푸른 바다 위로 고고히 떨어졌다. 물결이 일 때마다 흰빛이 물거품처럼 바다 표면에 일렁거렸다.
“이홍화.”
“응.”
백영이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홍화는 재촉하지 않았다. 얌전히 기다릴 뿐. 고즈넉한 밤에 제 목소리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물었지. 생각지도 못한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면 어떡할 거냐고.”
한참 뒤에 돌아온 말이 기억을 캐묻는 질문이었다. <오늘의 세계> 촬영 당시, 백영과 나눌 말을 궁리하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더란다. 백영의 대답이 뭐였더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금방 머리에 떠올랐다. 운명이라고 여길 거라 했다. 유백영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응. 기억나.”
“대답도 기억해?”
질문보다 대답이 훨씬 더 강렬했다. 홍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영이 어리광 피우듯 날개 근처에 이마를 문질렀다. 간지러워 키득거리며 홍화가 몸을 앞으로 뺐다.
“그거면 됐어.”
질문의 요지도, 대답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홍화가 돌아보았다. 홍화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던 백영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고, 홍화는 무슨 뜻이냐고 묻는 대신 그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백영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홍화만이 그 눈동자 안에 가득 차올랐다. 홍화만 눈을 깜박이며 백영이 상기한 질문과 답을 머릿속에서 굴려봤다.
느낌표가 느리게 찾아왔다. 홍화의 뺨에 불을 옮겨붙이고 머리에 환한 전등을 켰다. 홍화가 천천히 익었다. 찜통에 들어간 홍게처럼 볼이 붉어지고, 이마와 귀와 턱과 목과 목덜미를 불이 훑고 지나갔다. 어둑한 베란다에서도 홍화의 붉어진 얼굴이 죄다 보일 정도였다.
홍화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가슴도 틀어막고 싶었다. 심장이 자꾸 바깥으로 뛰어나가려고 야단법석이었다.
“네 대답은?”
백영이 했던 대답인지, ‘내’ 대답인지 헷갈렸다. 홍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백영이 홍화의 등을 껴안고서 어깨에 턱을 기댔다.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홍화는 아래만 죽으라고 쳐다봤다. 백영의 몸이 뜨거운지, 제 몸에서 열이 올랐는지 알지 못했다.
“네 대답은, 홍화야.”
자신의 대답이 뭐냐고 묻는 걸까, 아니면 제 대답을 묻는 걸까. 심장이 거세게 뛰어대는 바람에 백영의 의도를 따져볼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백영이 홍화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그 탓에 붉어진 얼굴이 낱낱이 드러났다. 홍화의 상태가 어떤지 빤히 보고서도 백영은 대답, 하며 홍화를 몰아세웠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지.”
네 대답과 ‘내’ 대답이 뒤엉켰다. 홍화는 백영의 대답에 제 진심을 숨겼다. 이미 다 까발린 마당에 숨길 게 뭐 남아있겠느냐마는. 홍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백하자 백영이 낮게 웃었다. 파도 소리처럼 잔잔한 흐름이었다.
“맞아. 잘 아네.”
피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홍화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백영이 홍화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만지면 분홍빛이 물이 쏟아질 것처럼 붉어진 뺨에 입술을 파묻고 홍화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달빛처럼 쏟아지는 고백에 홍화의 목덜미에 붉은빛이 물결처럼 너울졌다.
밀어를 속삭이기에 완벽한, 달콤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