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잠재우면 다른 걸 터트리지. 유백영 이 새끼는 전쟁 지역에서 용병을 시켰어야 해. 언제 뒈질지 모르는 환경이었으면 차라리 없는 놈 취급하며 걱정거리 없이 잘 살았을 텐데.
사장이 두통약을 물 없이 씹어 삼키며 차에서 내렸다. 이제 집에 들어가서 쉬나 했더니만 유백영이 또 폭탄을 던졌다. 이번엔 자폭이었다.
사망 소식이라면 차라리 올 게 왔구나 인정할 것을. 일 인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거즈와 깁스한 팔 한쪽만 아니면 제법 멀쩡해 보인다. 이성을 잃고 쌍욕을 뱉으려다가 문소리를 듣고 일어난 한 사람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유백영이 이홍화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가 불쾌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사장은 부디 유백영이 혈육이라 죽이지 않는다는, 갸륵하고도 아량 넘치는 저의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이홍화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끔벅거리더니 사장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유백영이 옆구리에 끼고 살고자 하는 사람이 최소한도 인간적인 도리는 아는 이라 다행이었다.
“잠깐 유백영…… 씨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줄래요.”
“할 얘기가 뭐 있다고. 그냥 있어, 이홍화.”
딴 인간들 앞에선 사장 취급해주더니 이홍화 앞에선 그런 것도 집어치웠다. 이홍화가 유백영과 제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음료수 좀 뽑아 오겠다고 병실 바깥으로 쏙 도망쳤다. 유백영이 칫, 하며 애처럼 툴툴거렸다.
“아, 여기까지 왜 왔어. 살아있으면 됐지.”
여기서 유백영을 창 너머로 던지면 기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까. 사장이 성호를 그으며―비록 무교지만― 치미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유백영을 데려오고 나서 익힌 반야심경과 성경 구절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려 했다. 유백영이 일어나서 걸어가려 하지 않았으면.
“어딜 가, 이 새끼야. 너 얼굴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긁어먹었지. 못 써, 이제.”
“볼 건 얼굴밖에 없는 새끼가 그걸 긁어먹었어? 미쳤냐? 돌았네, 우리 조카.”
“현대 의학으로도 안 된다는데 어쩔 거야.”
목숨에 큰 지장은 없으나 팔 하나가 부러지고 오른쪽 뺨부터 턱까지 길고 깊은 상흔이 남았다. 팔이야 시간이 흐르면 낫겠지만 얼굴에 생긴 상처가 문제였다. 상처가 깊은 데다가 벌어져 꿰매야 했고, 이로 인해 생긴 흉터는 수술 한 번으로는 깨끗하게 지우기 어렵다는 소견을 받았다.
백영은 크게 놀라거나 충격받지 않았다. 연기에 슬슬 질려가던 참인데 오히려 기가 막힌 핑곗거리다 싶었다.
배우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소리를 유백영은 참 담담하게도 내뱉었다. 속이 답답해 사장이 무심결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았지만 빈 껌 종이만 굴러 나왔다.
“일 이따위로 할래? 너 지금 계약 오 년 더 남은 거 몰라? 개처럼 일해서 돈 벌어야지 어디서 공으로 처먹으려고 해. 위약금이 얼만지는 알아?”
“삼촌, 스크루지 영감 몰라. 그러다가 삼촌도 크리스마스 날 사슬에 묶여서 끌려다닌다. 거, 이제 나이도 찼는데 공덕 좀 베풀고 살아.”
“내가 언젠가 네 쓸데없이 긴 혓바닥 요리해 먹을 거라고 이야기했던가.”
“맛있게 드십쇼.”
사장이 이를 갈며 화를 내든 말든, 백영은 사장의 어깨만 툭툭 두드렸다. 나머지 성한 팔 한쪽도 깁스를 하게 해줄까, 사장이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백영의 무릎 뒤쪽을 다리로 퍽 차서 침대에 도로 앉혔다. 뒤로 나동그라질 뻔한 백영이 짜증을 내며 올려다봐서 그 이마에 매운 손길로 알밤을 날렸다. 백영이 손바닥으로 막아 실패했다.
“왜 때리고 지랄이야.”
“배우는 못 해도 막노동을 해서라도 돈 벌어 와. 알겠냐.”
“어련히 할까. 삼촌 배곯게는 안 하니까 걱정 마. 할 말 다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시지. 나 바쁜데.”
“스케줄도 없는 새끼가 바쁘긴. 이십 분. 이홍화는 내가 데려간다.”
“걜 삼촌이 왜 데려가.”
사장이 방긋 웃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푹 꽂아 넣고 느리게 허리를 굽히며 유백영의 코앞에 얼굴을 디밀었다. 어둡게 그늘이 드리운 얼굴에서 흰 치아만 짐승의 송곳니처럼 빛났다.
“너 쫓아오면 너 대신 걔를 개처럼 굴릴 거야. 산간오지로, 일본과 중국으로, 섬으로, 해외로. 그러면 우리 조카는 적어도 일 년간은 이홍화의 머리카락 한 올 못 보겠지?”
“……씨발.”
잘 알아들은 백영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얌전히 침대 위로 다리를 올렸다.
유백영을 우리에 가둬놓고 사장이 병실에서 나왔다. 문밖에는 음료수 세 개를 품에 안은 이홍화가 쭈그려 앉아있었다. 사장이 나오자 바로 일어났지만 눈치가 빨라 병실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야기 좀 하죠.”
굳이 나눌 이야기는 없지만 이십 분간은 유백영 애타도록 떼어놔야 했다. 이홍화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사장을 졸졸 따라왔다.
경호원들이 막고 있어 옥상의 작은 정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장은 난간 쪽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전보다 기자들 숫자는 줄었어도 여전히 죽치고 있는 진드기 같은 이들이 몇 남아있었다. 가끔 이쪽을 올려다보는 감 좋은 친구들도 있어서 사장이 몸을 돌려 이홍화를 바라봤다.
사고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이미 상세하게 보고받았다. 멍청한 조카 탓이었다. 앞에서 누가 뒈져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던 놈이 미쳐가지고는 지가 먼저 달려들었단다.
저 청년이 대체 어느 매력이 있어서.
“사장님께서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사장이 뚫어지라 보고만 있자 홍화가 품에서 음료수를 주섬주섬 내밀었다. 무안 줄 생각은 없어 개중 아무거나 하나 받았다.
“저 새끼가 뭐가 그렇게 좋아요?”
“……예?”
허를 찌른 질문이었는지 이홍화의 얼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게졌다. 연예계에서 제법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반응을 보니 갓 들어온 사람처럼 순박한 구석이 있다. 사장은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이홍화의 얼굴을 세세하게 뜯어봤다. 얼굴에 열이 오르자 눈이 촉촉해졌다. 곧 울 것처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알고 싶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이라는 게 있다. 이홍화의 어느 부분이 유백영을 꿰었는지 알아차린 사장이 으, 하고 벌레 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조카의 아비는 분명 다른 씨인데 꽂히는 점은 무섭도록 저와 비슷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가 이홍화에게 끌리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이홍화와 소형은 사장에게 마치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갖고 싶은, 품 안에 애지중지 끼고 살다가 죽을 때도 무덤에 같이 묻힐 보석 정도의 차이였다.
“저 새끼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필요 없겠네. 홍화 씨, 저거 앞으로 배우는 못 하니까 홍화 씨가 대신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오세요.”
간판 배우가 다치는 데 일조한 셈이니 욕을 얻어먹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장 입에서 나온 말이 예상과 딴판이었다. 홍화가 눈을 크게 떴다가 허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고 인사해도 사장은 손만 흔들며 돌아섰다.
“아, 그리고 이십 분만 있다가 내려가요. 이유는 묻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가지 자르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이십 분 있다 내려가라는, 이유 모를 명령에 불복할 리가. 홍화가 타이머까지 맞춰놓고 옥상에 앉아 기다렸다. 홀로 있는 이십 분이 이십 시간처럼 느리게 흘러갔지만 사장 명령이라 꾹 참고 견뎠다.
이십 분을 칼같이 지키고 병실로 내려갔다. 홍화가 들어오자마자 백영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손을 잡고 침대로 끌어당겼다.
“사장이 뭐라고 안 했어?”
“너 대신 일 열심히 하래.”
“……Fuck it, One day I’ll kill him. I’ll definitely kill him.”
백영이 홍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중얼댔다. 의미를 묻기 전에 목덜미에서 흩어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홍화가 몸을 틀었다. 백영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전이었다면 입 맞췄을 백영이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허락받은 부위는 손뿐이라는 듯, 손만 꼭 쥐고 만지작거렸다.
“왜 이렇게 말랐어. 밥 안 먹고 살았어? 잘 찌워놨는데 왜 사람 고생한 거 헛수고로 만들어.”
“너도…… 빠졌잖아.”
“난 빠져도 돼. 넌 아니야. 뭐 먹고 산 거야, 대체.”
백영의 집에서 나온 후로 입에 넣은 것이 거의 없었다. 먹어도 토해내기 바빠 굶고 살았다고 해도 거짓은 아니었다. 백영을 보자 그간 까맣게 잊고 지낸 허기가 되살아났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울릴 것 같아 홍화가 손바닥으로 배를 꾹 눌렀다.
“뭘 제일 먹고 싶어.”
“크림 파스타. 그게 제일 먹고 싶어.”
“퇴원하면 우리 집으로 가자. 해줄게.”
거절할 이유가 있나. 당연히 없다. 홍화가 배시시 웃으며 백영의 손을 마주 쥐었다. 이제 이 손을 놓을 일 없으니, 이 손으로 만든 음식 역시 놓칠 리 없다.
“응. 갈게.”
우리 집. 내 집이 아닌.
‘우리’의 사전 정의를 이제 잘 아는 홍화가 환하게 웃었다. 창문 너머로 빛이 스며들어와 그런 홍화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백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윽고 피식 웃었다. 비 오고 무지개가 뜬 것도 아닌데, 이홍화가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