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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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지 마.”

철썩 소리가 나도록 유백영의 손을 휘갈겼다. 백영의 손등이 금세 벌겋게 물들었지만 홍화는 콧방귀만 흥 뀌고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백영은 제법 아프게 얻어맞고도 뭐가 좋은지 내내 실실거렸다. 웃는 얼굴 보면 저도 얼빠진 인간처럼 같이 샐샐댈까 봐 홍화는 백영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홍화.”

화아아, 하고 끝이 길게 늘어졌다.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부리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눈 끝까지 곱게 휘고서 홍화의 옆구리에 슬금슬금 몸을 붙여왔다.

“붙지 말랬지. 꺼져.”

질색하며 소파 구석으로 몸을 피해도 백영이 능글맞게 몸을 붙이더니 결국 홍화의 허벅지를 베고 덜렁 누워버렸다. 홍화가 백영의 머리를 쥐고 밀치려 하자 그 손목을 붙들고서는 손등이며 손바닥에 쪽쪽 소리가 다 나도록 뽀뽀를 퍼부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나른한 고양이처럼 반쯤은 감겨서 어딘지 모르게 야시시한 느낌마저 흘렀다.

“아, 싫다고!”

홍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짧게 지르는 소리도 변성기 소년처럼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홍화가 귀 끝을 벌겋게 물들이고 괜히 발을 쿵쿵 구르며―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허리가 제발 그만하라고 찌릿찌릿한 고통으로 호소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식탁으로 피신했다. 유백영을 피하려면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미 오전에 시도했다가 실패한 바가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가도 잠귀가 귀신같이 밝은 유백영에게 들키고, 아예 옷 다 갖춰 입고 나가려면 힘으로 휙휙 벗겨 알몸으로 만들었다. 집에 있으면 옷은 주겠지만 나가면 안 줄 거란다. 당당한 표정이 얄미워 이를 득득 갈고 어떻게든 집에서 탈출하려고 온갖 용은 다 써봤으나, 유백영이 매번 옆구리에 둘둘 만 이불처럼 끼고서 도로 들고 들어왔다. 결국 현관 한번 벗어나지 못하고 유백영을 피해 집 안만 뱅뱅 맴돌고 있었다.

「정 나가고 싶으면 나도 데려가. 아, 모자도 마스크도 안경도 안 쓸 거니까 알아두고.」

맨 얼굴의 유백영을 데리고 나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개새끼라고 홍화가 욕해도 백영은 타격 한번 안 받았다.

침실에 가도, 거실에 앉아있어도, 심지어 식탁에 홀로 앉아있어도 바로 따라와 마주 앉았다. 저 성질머리에 이 정도 정성으로 매달렸으면 용서해줄 법도 한데, 홍화는 단호하게 대본만 내려다봤다.

부아도 부아지만, 사실 오늘 새벽까지 유백영에게 시달린 게 떠올라 그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잠 안 재울 거라더니 새벽빛이 밝아오는 그때까지 징글맞게도 괴롭혔다. 나중에는 그만하라는 말마저도 목이 잠겨 안 나왔다. 기절하듯 잠들고 나서야 절정이 끝나지 않던 잠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침 느지막이 눈을 떴을 때 몸이 보송보송하기에 그래도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 몸은 닦아줬구나, 하고 백영을 기특해하려 했다. 아랫배가 묘하게 부푼 느낌이 이상해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대로 기절할 뻔했다. 그때까지도 아랫도리가 자석처럼 붙어있었다.

홍화가 식겁해서 몸을 앞으로 빼자 백영이 반짝 눈을 떴다. 도망가려는 홍화를 꼭 껴안고 반쯤 빠졌던 기둥도 도로 안으로 깊게 밀어 넣었다. 밤새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점막이 기둥을 삼킬 듯이 오물거렸고, 뒤에 있던 백영도 홍화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낮게 신음했다.

“…….”

홍화가 열이 오르려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문질렀다. 대본이 잘 안 읽혀 짜증이 인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백영이 맞은편에서 식탁에 뺨을 대고 그런 홍화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리고.

느슨하고 느린 정사였다. 과격하고 몰아치는 잠자리에만 익숙한 홍화를 백영이 사탕처럼 오랫동안 녹여 먹었다. 다 녹아서 이제 뼈도 안 남았을 거라고, 넋이 나갈 때가 되어서야 절정에 올랐다. 처음부터 뜨겁게 팔팔 끓여서 터트리는 것과 오래도록 달궈 터트리는 쾌락은 과가 전혀 달랐다.

후자는 매우, 굉장히…….

툭, 하고 백영이 식탁이 놓인 홍화의 손끝을 건드렸다. 홍화가 황급히 손을 뒤로 잡아 뺐다. 시선이 이마에서 콧대와 코끝, 입술로 내려왔다.

백영이 입을 다물었다. 긴 목선, 불룩하게 솟은 목울대가 위아래로 부드럽게 일렁였다.

홍화는 대본만 쳐다봤다. 흰 종이와 검은 글씨 위로 다음 장면이 그려졌다. 노곤하게 가라앉은 몸과 달리 요의가 들어 일어나려는 그때로.

홍화가 일어나자 백영도 따라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벗어나려는데도 결합을 풀질 않았다. 오히려 홍화의 등 뒤에 끈적거리는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제 발등에 홍화의 발바닥을 올려놓고 펭귄이 새끼 옮기듯 한 발 한 발 느릿느릿 움직였다. 홍화가 버둥거리지 못하게 아랫도리를 인질로 쥐고서.

「어젯밤에 두 번이나 보여줬으면서 더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홍화의 화려한 욕설을 배경 삼아 기어코 화장실에 둘이 들어갔고, 변기를 앞에 두고 무슨 치욕을 당했는지는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홍화의 손아귀에서 대본 귀퉁이가 팍삭 구겨졌다. 얼굴 전체가 분노와 수치심으로 홍당무 색이었다.

홍화가 식탁에서도 벌떡 일어났다. 부질없는 술래잡기라지만 항의하듯 입을 꾹 다물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곧 백영이 문을 따고 술래처럼 잡으러 들어왔다.

“왜 자꾸 따라와. 네가 개냐.”

홍화가 비꼬아도 백영은 싱글거리는 얄미운 미소 지우지 않은 채 침대 위에 올라와 홍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홍화가 치우라고 팔을 잡아떼도 흡사 문어처럼 또 들러붙었다. 홍화가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품에다가 살금살금 머리를 기댔다.

“이홍화가 날 좋아한대서. 옆에 있어주려고.”

홍화가 침대에서 벗어나려다가 멈칫했다. 간신히 가라앉힌 낯빛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연기라고.”

진실을 고해도 백영은 듣지 않았다. 홍화의 배에 제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올려다보기만 했다. 빤한 시선에 홀려 저도 모르게 연기가 아니었노라 사실을 고할까 봐, 홍화가 홱 소리 날만큼 세게 고개를 돌렸다.

“연기야.”

한 번 더 강조했다. 백영이 홍화의 상의를 홀랑 까서 홀쭉한 배 위에 뺨을 문지르며 무시했다.

“그러면 다시 한번 해보든가. 연기라며.”

하라면 못 할 것도 없다. 홍화가 하, 비웃으며 입을 열려 했다. 대본에서 눈을 떼고 백영을 내려다보는데, 눈이 마주치자 어제는 술술 잘 나오던 대사가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백영이 얼른 해보라고 채근하며 홍화의 배꼽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가느다란 입김이 얇은 뱃가죽 안으로 스며들어 내장을 죄다 간질이는 느낌에 홍화가 옆구리를 비틀었다.

“왜 못 해. 연기라며. 연기면 수십 번도 똑같이 할 수 있어야지. 해봐. 얼른.”

“네가 감독이야? 한 번 보여줬으면 됐지 뭘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아. 다시 하기 귀찮아. 아, 좀 떨어져!”

팔꿈치로 밀어도 백영이 그간 키워온 팔심 자랑하며 홍화를 껴안았다. 백영이 배 위에 뺨을 문지르자 안에 든 내장이 때는 이때다 하며 꾸르륵 시끄럽게 울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무리하게 운동한 데다가, 백영을 피한다고 쏘다니느라 아무것도 집어넣지 못한 위장이 참다못해 시위하는 소리였다. 배에 귀를 대고 있어 그 소릴 누구보다 적나라하게 들은 백영이 멈칫했고, 홍화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가 온몸을 새빨갛게 태웠다.

“이, 이건, 네가 눌러서…….”

변명이 먹힐쏘냐. 홍화의 안쓰러울 정도로 빨개진 얼굴을 보고 백영이 어깨를 잘게 떨며 큭큭거렸다. 홍화의 배 쪽으로 얼굴을 기울인 채 웃어서, 그 잔떨림이 뱃가죽을 물결처럼 두드렸다. 홍화가 웃지 말라고 성질을 부려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어린애처럼 키득거리기만 했다.

“맛있는 거 해줄게. 뭐 먹고 싶어. 아니면 장 보러 갈까?”

“너 근신해야 하는데 무슨 장이야. 그냥 있는 거 먹지.”

홍화가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열애설 해명 기사가 떴다지만 화제의 중심에 유백영이 서 있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뜩잖은 티를 팍팍 내는데도 백영은 아 맞다, 하고서 씩 웃었다. 가지런하고 하얀 이를 곱게 드러낸 얼굴이 지나치게 눈부셔서, 홍화가 눈살을 살짝 구겼다.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그래서, 뭐 먹고 싶은데.”

가끔은 백영이 자신을 사육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잘 먹이고 잘 키워서 살이 통통하게 오르면 한입에 날름 삼키지 않을까 싶을 때가. 홍화는 저를 잡아먹으려고 목에다 냅킨을 두르는 백영을 상상했다가 그만뒀다. 언젠가 실제로 일어날 일처럼 느껴져 무서웠다.

“크림 파스타.”

먹는 걸로라도 심술을 부리겠다며 홍화가 뚱한 표정으로 주문했다. 백영이 상체를 세우고 앉아 홍화의 뺨에 뽀뽀하고 머리를 헝클었다. 메뉴가 별로라며 타박할 줄 알았는데, 그게 설령 어려운 요리라도 기꺼이 해주겠다는 양 태도가 다정하고 온화했다.

“쉬고 있어. 어디 도망갈 생각 말고.”

엉덩이까지 토닥토닥 두드리고서 백영이 일어섰다. 나직한 허밍 소리가 백영의 등 뒤를 따라갔다. 홍화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쳐다봤으나 새처럼 지저귄 백영은 방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멀리서 희미해진 낮은 허밍이 그런 홍화를 놀리듯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아, 진짜.”

홍화가 무릎을 세우고 그 사이에 뺨을 묻었다. 백영의 손길이 닿은 곳에, 입술이 닿은 곳에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발가락이 꼬물거려지는 충족감, 기포가 터지듯이 솟아오르는 기묘한 고양감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심지어 과격했던 어젯밤도 백영의 질투처럼 느껴졌다. 백영이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착각이 일어 아랫입술을 깨물어도 헤실거리는 웃음이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갔다.

좋아해.

백영이 없을 때나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그 말. 연기가 아니었다.

“……좀 많이.”

사실은 아주 많이.

온몸 위로 눈처럼 사랑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마치 아침에 나눈 정사가 그러했듯이, 소복소복 천천히.

∞ ∞ ∞

“이-홍-화-.”

순덕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한 목소리로 홍화를 불렀다. 한참 대본에 열중하던 홍화가 고개를 들자 순덕이 능글맞은 아저씨처럼 흐흐흐 소리 내어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훑고 가서 홍화가 대본을 닫고 순덕의 뒤에 선 김강수를 쳐다봤다. 김강수도 저도 뭔 일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요. 오늘은 무슨 계시를 받아서 그래.”

“계시라니!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는 게 아니야. 아니 글쎄, 내가 이번에 고향에 내려갔다 오다가 잠깐 휴게소에 들렸거든.”

뒷말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홍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순진무구한 눈으로 순덕을 쳐다봤다. 혹 휴게소에서 저나 백영을 봤다는 목격담이나 나올까 잠시 짐작도 해봤지만, 쉬는 동안 집 안에서만 데굴데굴 굴러다녔기에 그럴 일은 없었다.

꼭 한 몸처럼 얽혀서 굴러다녔더랬지. 드라마에서 노출 장면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쇄골 아래로 백영이 수놓은 자국이 봄날 산들에 핀 진달래처럼 알록달록하게 피어있었다. 심지어는 등과 엉덩이와 허벅지에도 빼곡하게.

“이걸 보거라!”

순덕이 품에서 꺼낸 네모난 플라스틱이 붉은색으로 번쩍 빛났다. 홍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번개같이 손을 뻗었다. 순덕이 팔을 높이 들고 뒤로 물러났다.

“요, 요 앙큼한 것. 어쩐지 노래 좀 한다 했지. 이런 화려한 과거를 숨기고 있었다니!”

“그건 또 언제 샀어!”

당황해서 반말이 절로 나갔다. 순덕이 철 덜 든 애처럼 깔깔대면서 폴짝폴짝 도망갔다. 손에 들린 앨범에 지금보다 오히려 나이 들어 보이는 홍화가 반짝거리는 붉은색 재킷을 걸친 사진이 박혀 있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표지, 촌스럽기 짝이 없는 제목이었다.

“노래 좋던데, 왜. 김강수, 받아!”

김강수가 순덕이 던진 앨범을 받고서 허공에 높이 들고 쳐다봤다. 김강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전에 홍화가 달려들었다. 백영보다는 작아도 키든 덩치든 홍화보다는 훨씬 크다. 홍화가 방향을 달리해 김강수의 무릎 뒤쪽을 가볍게 걷어찼다. 앨범을 뺏으려면 달리 방도가 없었다.

휘청거리는 김강수의 손에서 앨범을 빼앗아 제 품에 쏙 숨겼다. 지켜보던 순덕이 바락 소릴 질렀다.

“그거 내 돈 주고 정당하게 구입한 거야. 내놓거라!”

“안 돼요.”

“아니, 내 거라니까. 도둑질이야, 그거.”

“그래도 안 돼요. 전액 환불해줄게.”

민망한 과거였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들키고 싶지도 않은.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대자로 넘어지거나 버스에서 졸다가 옆 사람 어깨에 침을 질질 흘린, 낯부끄러운 기억이나 마찬가지였다.

홍화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자 순덕이 볼을 쀼루퉁하게 부풀렸다. 그러다가 마치 알밤을 노리는 청설모처럼 눈을 희번득 뜨고서 김강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신호를 알아차린 김강수가 홍화의 겨드랑이에 팔을 쑥 넣어 제압했고, 그사이에 순덕이 홍화의 품에 손을 넣어 앨범을 가져가려 했다.

홍화 역시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이런 제압은 그간 백영에게 신물 나도록 많이 당했다. 두 팔을 위로 쑥 들어 미꾸라지처럼 미끄럽게 김강수의 팔에서 빠져나오고 순덕에게서도 벗어났다. 액션 장면 촬영하며 온몸으로 습득한 몸놀림도 한 몫 거들었다.

“이거 버리고 올게요! 돈은 이따 줄게!”

크리스마스에 나 홀로 집에 남은 소년처럼 순덕이 두 손바닥으로 뺨을 꽉 누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김강수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지만 저쪽에서 촬영 대기하라는 외침에 강수가 볼만 긁적였다. 홍화야, 제 순서가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 남아 여유만만이었다.

무사히 앨범을 구출하고서, 홍화가 주변에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증거 인멸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휴게소 전체에 뿌려진 앨범을 다 사 와 소각할 수야 없다지만, 일단 눈에 띈 놈들부터 차근차근 없애리라 마음먹었다.

쓰레기통을 찾아 헤매다 보니 촬영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나왔다. 너무 멀어지면 곤란하기에 앨범 처리를 다음으로 미루고 품에 잘 숨겼다. 혹시 순덕이 난리 피우면 걔는 이미 저세상 갔다고 거짓말이라도 치면 그만이었다.

뒤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등 뒤에서 버스럭 풀 밟는 소리가 났다. 홍화가 돌아보려는 찰나에 뒤에서 커다란 손이 시야 안으로 불쑥 뻗어 나왔다. 김강수가 여기까지 따라올지는 몰랐다. 촬영 대기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나. 누가 차순덕 추종하는 신도 아니랄까 봐, 촬영까지 뒤로 미루고 홍화의 뒤를 끝까지 쫓아온 모양이었다.

턱이 잡혀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어라, 하는 사이에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모자챙이 턱을 부드럽게 스치고, 코끝에 익숙한 향이 쑥 밀려 들어왔다.

홍화가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봤다. 마스크를 턱까지 내린 백영이 홍화의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쪽 소리 내며 닿았다가 떨어졌다.

“너 언제…….”

“저쪽에서부터 따라왔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홍화를 사냥할 것도 아니면서, 덩치는 산만 한 놈이 발걸음 소리 한번 없었다. 홍화는 난데없이 나타난 유백영에게 놀랐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은 없다지만 누가 볼까 무서워 백영의 손목을 잡고 근처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촬영장과 멀어 사람들이 쓰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까지 왜 왔어.”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백영이 홍화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새벽에도 본 얼굴인데 뭐 그리 볼 게 있다고.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에 낯이 달아올라 홍화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백영이 몸을 낮춰 홍화의 입술에 또 입을 맞췄다.

“……입술 닳는다. 그만해.”

뽀뽀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예전에 백영과 다른 여배우가 키스하던 장면에서도 그랬지만, 정말 지독하게 좋아했다. 틈만 나면 뺨이든 입술이든 눈가든 입술 닿는 곳이면 죄다 뽀뽀를 퍼부었다. 받을 때마다 누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설탕과 꿀을 섞어 한 바가지씩 퍼부어대는 기분에 온몸이 아렸다.

“보고 싶어서.”

“이따 볼 건데 뭘 또 보겠다고.”

입으로는 툴툴거려도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가 없다. 귓가에 열이 올라 홍화가 괜스레 손을 올려 긁적였다. 백영이 그런 홍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옆구리에 팔을 감고 안아 들었다. 홍화의 발꿈치가 위로 한껏 들릴 만큼 세게. 홍화가 잠시만, 하고 말릴 틈도 주지 않고 고개를 틀며 입을 맞췄다.

아무리 인적 드문 곳이라도 누가 찾아오면 어쩌려고. 대책 없는 유백영을 위해서라도 홍화가 이성을 잡아야 했다. 하나 오동통한 입술이 눌리며 벌어지고, 설탕 가루 가득 묻은 혓바닥이 입안을 솜사탕처럼 녹여대고, 혀가 크기가 딱 맞는 좁은 원통에 빨려들어 간 것처럼 빨리고 깨물리면 백영을 말려야 할 손끝 발끝이 힘을 잃고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저도 모르게 두 팔로 백영의 목을 껴안고 술 취한 사람이 전봇대에 매달리듯 기대게 되는 것이다.

“……씨! 홍화 씨 어디 계세요!”

이성은 딴 사람이 찾아줬다. 화장실 바깥에서 들리는 스태프의 목소리에 홍화가 퍼뜩 놀라 백영을 밀치려 했다. 백영이 홍화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화장실 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스태프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보통 연락은 핸드폰으로 줄 텐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있어야 할 핸드폰이 거기에 없었다. 아마 촬영장에 대본과 함께 두고 온 듯했다.

스태프가 화장실에 들어와 백영을 발견하기 전에 나가야 할 텐데. 홍화가 백영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놓아달란 신호에도 백영은 홍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만 있었다. 찰싹찰싹 때려도 요지부동이었다.

홍화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점점 다가오더니 덜컥 화장실 문이 열렸다. 홍화가 숨을 흡 들이켜며 입을 막았다. 백영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들키면 곤란했다. 접점 없는 둘이 외진 화장실에서, 그것도 한 칸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고 스태프가 어떤 오해를 할지 안 봐도 빤했다.

“홍화 씨, 혹시 여기 계세요?”

들키면 어쩌지 싶어 홍화의 가슴이 쿵덕쿵덕 시끄럽게 뛰었다. 차라리 오 분 뒤에 나가겠다고 알려야 하나 싶은 그때, 백영의 손이 상의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왔다.

목 옆에 입술을 붙이고 백영이 좀 전에 입 맞췄듯이 진득하게 혓바닥으로 핥고 올라갔다. 귓불을 잇새로 물었다가, 산맥처럼 굴곡진 귓속을 뾰족한 혀끝으로 덧그렸다.

질척한 소리는 아마 제 귓속에만 울리리라. 선뜩하고 오싹해서 홍화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탓에 가슴 위를 배회하던 백영의 손가락이 우연처럼 젖꼭지를 톡 건드렸다.

“!”

하마터면 문을 발로 찰 뻔했다. 입에서 손을 떼려다가 더욱 세게 틀어막았다. 백영의 머리통을 잡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쥐뿔도 안 먹혔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스릴이라도 느끼는지 홍화의 젖꼭지를 조몰락거리며 손끝으로 가지고 놀았다. 얇은 옷자락 위로 백영의 손가락이 노니는 게 태동처럼 그려졌다.

“홍화 씨……? 아무도 없어요?”

스태프가 인기척이라도 느낀 것처럼 저벅저벅 다가왔다. 홍화의 가슴에서 터지는 고동 소리가 백영의 손바닥에 진동을 일으킬 듯이 커다랬다. 유두를 희롱하는 손가락은 멈추지 않고, 귓가를 적시는 습기도 스태프가 오든 말든 여전했다. 홍화만 들킬까 초조해져서 백영의 손등을 쥐고 그 위에 손톱을 세웠다. 귓불만 소리 없이 세게 빨렸다.

스태프의 발이 둘이 있는 칸 바로 앞에서 멎었다. 긴 한숨 소리. 홍화가 숨을 바짝 죽이고 바깥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백영도 스태프가 제자리에 서자 홍화의 귀에서 입술을 떼고 그림자가 드리운 아래쪽을 바라봤다.

“아, 어디 있는 거야. 이쪽으로 갔다는데. 강수 씨가 거짓말했나. 촬영 대기해야 하는데 전화도 안 받고. 아이고, 내 신세야.”

스태프가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덜컹, 화장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홍화가 가슴을 부풀렸다가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갔네.”

백영이 아쉬운 듯 속삭였다. 이런 망측한 꼴을 들켜도 상관없다는, 아주 평이한 목소리였다. 부아가 치민 홍화가 백영의 명치를 향해 사정없이 팔꿈치를 날렸다. 백영이 한 손으로 막아내기는 했지만 반쯤은 들어갔는지 욱, 하며 허리를 숙였다.

“하지 말라고 꼭 말을 해야 아냐. 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욕도 같이 퍼붓고 싶었으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 홍화가 후다닥 화장실 칸을 벗어났다. 한 대 얻어맞은 유백영이 무슨 응징을 할지 약간 무서웠던 점도 있다.

백영은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 얼굴로 홍화에게 맞은 명치를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따라 나왔다. 홍화가 화장실 문고리를 잡자 기어이 뒤에서 잡아당겨 인사처럼 입을 맞췄다. 홍화를 금붕어로 만들어 조금 전 만행을 잊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홍화가 기억력이 삼 초 이하로 떨어지기 전에 정신을 다잡고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이홍화.”

홍화는 이미 문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화난 척하며 이따 보자는 흔한 인사도 안 한 것을 백영이 불러 잡았다. 급해 죽겠는데도 백영이 부르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왜. 빨리 말해.”

백영은 홍화를 불러놓고 지금껏 입 맞추느라 내리고 있던 검은 마스크만 올려 썼다. 그리고 손을 들고서 홍화에게 인사하듯이 흔들었다. 홍화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이 벌어졌다.

“야, 너 그건 언제……!”

백영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홍화가 그토록 인멸하고 싶어 한 앨범이 꽂혀 있었다. 손이 워낙 커다래 홍화의 손바닥만 한 앨범이 손가락 두 개 사이에서도 책꽂이 사이에 꽂힌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홍화가 손가락질해도 백영은 눈가를 싱긋 접어 웃고는 앨범을 제 주머니 안에 쑥 집어넣었다.

“잘 들을게.”

홍화가 시뻘건 얼굴을 하고 백영에게 달려가려는 찰나, 딴 곳에서 헤매던 스태프가 드디어 홍화를 발견하고 홍화 씨이이, 하며 목 놓아 불렀다. 스태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홱 돌아보았을 때, 백영은 근처에라도 숨었는지 시야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홍화가 씩씩대며 백영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스태프가 헥헥거리며 다가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한참 찾았잖아요! 아니 곧 촬영인 사람이 핸드폰도 두고 가면 어떡해! 얼른 가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감독님 폭발하고 우리도 둘 다 죽어요!”

유백영이 앨범을 가져가 마음이 어지럽지만 울먹이는 스태프에게 그 일을 고할 수 있으랴. 애초에 원인 제공을 따져보면 빨간 반짝이 재킷을 입고 트로트를 불러댄 저에게 있었다. 홍화가 미련이 잔뜩 남은 듯 아무도 없는 뒤를 연거푸 돌아보며 스태프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갔다.

촬영 분위기가 다른 드라마보다 좋다지만 어디까지나 출연자들의 관계일 뿐, 스태프들의 열악한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샘 작업을 밥 먹듯이 하는 스태프들이나 쉬는 날 없이 굴려대 점점 눈에 띄게 말라가는 주연들을 보며 순덕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조연이야 촬영하는 시간보다 대기가 길고 심지어 촬영 없는 날엔 집에서 쉴 수도 있어 다른 이들보다 상태는 나았다.

드라마의 후반부에 들어갈수록 스태프들의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짙어졌다. 멀끔한 건 홍화를 비롯한 삼인방 외엔 없는 듯했다. 그 고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은 조명 담당이 꾸벅꾸벅 졸다가 조명을 주연의 머리 위로 떨어트릴 뻔했다. 감독은 당연히 노발대발했고, 삼 일 동안 겨우 두 시간 남짓 잤다는 조명은 그날 바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주연이 저는 괜찮다며 감독을 잘 달래려 했으나 조명 담당 또한 마음이 틀어진지라 잡을 수가 없었다.

“정신 바짝 차려. 안 그러면 크게 다친다.”

순덕이 홍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했다. 대역 없이 액션을 소화하는 홍화를 걱정하는 차원에서였다. 이런 사태를 보면 겁이 나서 한 발 뒤로 물러설 법도 한데, 홍화는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지키겠노라 대역 없이 촬영에 임했다.

하지만 이번 장면은 무리였다. 바이크를 타고 달리다가 넘어지는 장면인데, 홍화는 바이크를 탈 줄 몰랐다. 미리 알았으면 면허라도 따놨겠건만 중간에 쪽대본으로 삽입된 장면이라 홍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몇 번 같은 장면을 촬영해도 감독의 오케이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모니터링하며 영 마음에 안 차는 것처럼 숨만 습 들이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가 사고 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다들 조심하고 있는데. 사인도 잘 들어맞고.”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순덕이 옆에서 엄지손톱을 딱딱 씹으며 촬영을 지켜봤다. 홍화도 옆에 서서 바이크가 아슬아슬하게 곡예 하는 장면을 쳐다봤다. 홍화와 체구가 비슷한 남자가 바이크의 핸들을 잡고 아스팔트 바닥에 닿을 듯이 엎어졌다가 일어나는 장면이었다.

“어, 어, 어……!”

순덕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홍화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스태프들도 다르지 않았다. 감독마저 좁쌀 같은 눈을 크게 뜨고 점점 가까워지는 바이크와 차를 쳐다봤다. 확성기로 컷을 시끄럽게 외쳐댔으나 쾅, 하고 바이크가 바닥에 구르는 소음이 감독의 지시를 잘라먹었다. 바이크에 탄 대역이 종잇조각처럼 휙 날아갔다가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 위를 통나무처럼 굴러갔다. 아아악, 긴 비명이 검은 헬멧을 뚫고 메아리쳤다.

촬영이 바로 중단되었다. 홍화도 대역에게 달려갔다. 대역이 팔을 붙들고 벌벌 떨며 신음했다. 핏물이 재킷 소매 아래로 길게 흘러내리다가 새끼손가락 끝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구급차 불러!”

시동이 꺼지지 않은 바이크가 바퀴를 굴려대는 소음이며 사람들의 웅성거림, 감독의 짜증 섞인 외침까지 한바탕 난리였다. 순덕이 하얗게 질려서 핏물 자국이 그득 남은 사고 현장을 바라봤다. 창백해진 낯빛은 홍화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 사람 앞으로 어떡하냐.”

“…….”

순덕이 걱정스레 말해도 홍화는 답하지 못했다. 홍화야말로 앞이 캄캄했다. 대역이란 게 원래 위험한 장면 대신하라고 있는 직업이긴 하지만 큰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하니 죄책감부터 일어났다. 대역이 다친 게 다 제 탓인 듯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대역이라도 큰 사고가 났으니 하루 정도는 쉴 법도 한데, 감독은 시간이 없다며 혀만 쯧쯧 차고 촬영을 재개했다. 사고 난 장면은 다음에 다른 대역이 촬영하기로 하고 넘어갔다.

흩어진 핏물 위로 물이 뿌려졌다. 홍화는 점점 옅어지는 핏자국을 쳐다보며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촬영 중 스턴트가 크게 다쳤는데도 작은 기사 하나 뜨지 않았다. 홍화가 착잡한 마음으로 기사를 검색하다가 핸드폰을 옆에 툭 던지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저도 예전에 촬영 중 사고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백영이 아니었다면 아마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었으리라. 제 부주의였다지만 그때의 아찔했던 심정이 떠올라 이번 사고가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제 대역이지 않은가. 저에게 일어났어야 할 불운이 대역에게 옮겨간 성싶어 여간 찝찝하지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는 홍화를 백영이 불러 깨웠다. 홍화가 고개만 팔걸이 뒤로 젖혔다. 거꾸로 보이는 백영이 커피를 홀짝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홍화의 뒤통수를 받쳐 들어 팔걸이에 올려놓고 저도 소파에 앉았다.

“촬영장에서 사고가 났어. 내 대역이었는데. 뉴스에도 안 떴어.”

“스태프들은 죽어야 기사가 뜨고 배우들은 상처만 나도 기삿감이지.”

백영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걸맞은 말이었다. 딱히 꼬집을 곳 없는 사실이라 홍화가 괜히 말투만 꼬투리 잡고 툴툴대며 백영의 허벅지 위에 두 다리를 턱턱 올렸다.

“근데 그게 왜.”

“……내 탓 같아서.”

백영이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홍화를 쳐다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였다.

“그게 왜 네 탓이야.”

“나 대신하다가 다친 거잖아. 내가 했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싶어서.”

다치더라도 제 역할 하다 다친 것이니 죄책감은 덜했을 것이다.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더 잡히겠다는 욕심과 달랐다. 물론 대역들은 전문가고, 홍화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건 알고 있으나 사고 현장을 직접 맞닥뜨리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홍화가 거푸 한숨만 쉬자 백영이 발의 오목한 부분을 가볍게 쥐고 주물렀다. 굳은살 박인 못생긴 발이라 얼른 잡아 빼자 백영이 다시 잡아 좀 전보다 힘을 실어 꽉꽉 눌렀다.

“그게 그 사람들 직업이야. 사고는 안됐지만 네 탓은 아니지. 죄책감 가질 일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만.”

“그거 때문에 계속 우울했어?”

백영의 손가락이 발바닥을 꾹꾹 누르다가 복사뼈 근처를 맴돌았다. 엄지에 힘을 실어 문지르자 종아리까지 느슨하게 풀어졌다. 손길이 닿는 곳은 발바닥인데 깃털로 간질이는 느낌은 가슴께에 흘렀다. 홍화가 발가락을 꼬물거리다가 발을 잡아 빼고 일어나 앉았다.

“꼭 그런 건 아닌데.”

흠, 하고 백영이 목을 울리며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씩 웃었다. 어딘지 음흉한 것이 홍화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너 무슨 생각 하냐. 뭐 하려고.”

“우울하다며.”

백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티브이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뭘 해도 그게 저에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홍화가 고개를 길게 빼고 지켜봤다. 백영의 널찍한 등에 가려져 잘 안 보여 따라 일어나려는 순간, 티브이 양쪽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두 스피커에서 현란한 음악 소리가 빵빵하게 터져 나왔다.

“신나는 노래라도 들어야지.”

홍화가 입을 쩍 벌렸다. 얼굴은 물론 반소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과 손가락까지 삽시간에 뻘겋게 익었다. 사고에 정신이 팔려서 백영에게 앨범을 빼앗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쿵작거리는 흥겨운 노랫가락에 홍화가 작곡가의 반강요로 집어넣은 추임새가 섞여 나왔다. 후르르라끼, 잔잔자라 등등, 앵무새가 혀를 굴려 사람 말 하듯이 추임새가 높고 경박했다. 단 일 초라도 더 듣고 싶지 않아서 홍화가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전원을 누르려는 절박한 손길을 백영이 막아섰다. 홍화가 어떻게든 스피커를 끄려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헤엄쳐도 백영은 흡사 꼿꼿한 수문장이었다.

“아, 꺼! 당장 끄라고!”

“왜, 신나는데.”

다리까지 벌게진 홍화가 백영의 품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백영이 그런 홍화를 번쩍 안아 들고 스피커에서 멀어졌다. 귓가 바로 옆에서 백영이 홍화가 부른 노래를 흥얼거려서 수치심이 열 배로 치솟았다.

“안 우울해. 이제 진짜 안 우울하니까 저것 좀 제발, 제발 꺼주라…….”

우울함은 물론 죄책감과 사고에 대한 기억까지 깡그리 사라졌다. 쪽팔림과 온몸이 오그라드는 부끄러움만이 넘치는 밀물처럼 불어났다.

이건 능욕이고 능멸이다. 홍화가 백영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엉엉 소릴 냈다. 기분 전환만은 확실했다. 치욕적이라 그렇지.

∞ ∞ ∞

주완과의 연락이 뜨문뜨문해졌다고 해도, 관계를 완벽히 잘라낸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엿봤다고 해서 아끼는 후배를 단박에 내칠 정도로 홍화는 매정하지 않았다.

홍화에게 연습을 시켜달라고 할 때만 해도 소속사에서 트레이닝 받던 연습생이더만, 오히려 주완이 공중파 드라마 데뷔가 빨랐다. 그 외모에 몸매에 싹싹한 성격과 연기력까지 보태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소소한 문자만 주고받으며 근황이야 들었지만 드라마에서 주완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여자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사채업자인데, 본인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질투가 아예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같은 소속사에, 저보다 어리기까지 한 후배가 더 잘나가는 것 같아 속이 아주 약간 쓰렸다. 그래도 주완이 얼마나 좋은 녀석인지 알기에 시기하지는 않았다. 주위에 잘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워낙 변죽 좋은 녀석이니 발도 넓었을 테고, 홍화 역시 큰 도움을 받았기에 좀스러운 마음을 지우고 주완의 앞길을 응원했다.

하지만 이 녀석도 양반은 못 된다. 홍화가 저 나온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어디서 듣기라도 한 양 바로 전화가 왔다. 드라마 촬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도 선배는 어여쁘게 부지런히 챙겼다.

“어, 웬일이냐. 바쁘지 않아?”

―오늘은 쉬는 날이라서요. 형은 안 바쁘십니까. 요새 촬영하느라 바쁘시죠.

“에이, 조연이 바쁠 게 뭐 있어. 시간이야 넉넉하지.”

―아, 그럼 오늘 뵈러 가도 될까요? 저녁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완이 청했다. 항상 징징대며 조르던 목소리가 오늘따라 진중했다. 그간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주워 열심히 거절한지라 오늘만큼은 허락해줘야 할 듯싶었다. 같이 앉아서 <오늘의 세계> 마지막 회를 볼 것도 아니고, 계속 이렇게 어색한 사이로 남아있고 싶지도 않아 홍화가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백영에게는 순덕이네와 저녁 먹고 들어간다고 문자 했다. 주완과 먹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드라마에서 입 맞춘 후배와 식사한다고 하면 유백영 성질머리에 무슨 난리를 피울지 몰랐다.

그 난리. 홍화가 발그스레해진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푸힛, 푼수데기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시엔 힘들어 죽을 것만 같고 끝까지 몰아간 유백영이 미웠는데, 돌이켜보니 질투 같아 피부 아래가 근질근질 달아올랐다.

열에 들뜬 눈빛,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하게 옥죄이던 팔과 으르렁거리며 거친 숨 사이로 협박하듯이 내뱉던 말들. 다른 해석을 붙이지 않아야 함을 알지만 도무지 질투 외엔 다른 걸 떠올릴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이러다가 주완에게 무슨 흉한 꼴을 보이려고. 홍화가 비비배배 꼬이는 손가락 발가락을 펴며 심호흡했다. 확 트인 유리창 아래 펼쳐진 야경을 보니 열이 조금 식는 것 같기도 하다.

주완이 예약해놨다며 알려준 곳이었다. 근처에서 고기나 사주려던 홍화에게 이미 점 찍어둔 곳이 있다며, 직접 모시고 가겠다고 주완이 선수를 쳤다. 뭘 번거롭게 그러냐며 거절하고서 홍화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메뉴에 적힌 가격대가 상당하다. 홍화는 눈으로 높은 숫자를 훑다가 메뉴판을 닫았다. 예전이라면 벌렁벌렁한 가슴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최근 보증금용으로 들어놓은 적금이 만료되어 주머니 사정이 제법 여유로웠다. 이 정도쯤이야 아끼는 후배를 위해서 감당할 수 있었다.

비단 목돈 마련에 성공해서뿐만 아니라, 단역이나 무대 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수입이 올랐다. 통장에 찍힌 액수를 보고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명식이 옆에 있었다면 호탕하게 소고기라도 사줄 만큼 행복했다.

명식을 떠올리자 반자동으로 하아아, 하고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당분간이라고 말했으나 홍화도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연락을 하려다가도 백영 옆에 있으면 또 같은 비난을 받을까 봐 용기가 푸시시 빠져나갔다.

“형.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상념에 젖어있느라 주완이 온 걸 뒤늦게 눈치챘다. 유리에 비쳤을 텐데도 멍하니 있느라 놓쳤다. 홍화가 활짝 웃으며 돌아봤다. 촬영이라도 하고 왔는지 정장에 헤어며 심지어 향수까지 완벽했다. 프라이빗 룸이 아니었다면 모든 사람들의 눈길도 확 사로잡을 만큼.

“오올, 신수 훤한데.”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살이 빠져 턱선이 날카로워졌지만 오히려 앳된 티가 사라지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홍화가 한쪽 팔을 등받이에 걸치고 능글스레 칭찬하자 그것도 좋다고 주완이 볼을 붉히며 긁적였다.

“촬영 끝나고 바로 온 거야?”

“아……. 예.”

오늘 쉬는 날이라고 주완이 답했던 걸 홍화가 까맣게 잊고 물었다. 저를 만나는데 굳이 꾸밀 필요가 있겠냐고, 합당한 변명을 찾다 보니 사고가 그렇게 흘러갔다.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고 주완이 마주 앉았다.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여기 음식 괜찮아요. 와인도 괜찮고.”

와인은 생각조차 못 했다. 감당 가능할 금액일까, 홍화의 눈썹 아래로 아주 잠시 먹구름이 드리웠다. 주완과 눈이 마주치자 자존심상 시키지 말라는 말은 못 하고 홍화가 양쪽 입꼬리만 방긋 말아 올렸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주완이 홍화의 고민을 알아차린 듯이 빙그레 마주 미소 지었다.

“여기 아는 형님이 하시는 곳이라 부담 없이 시키셔도 돼요. 그분이 예전에 저한테 도움을 좀 받으셔서, 오면 대접해주신다고 하셨거든요. 혼자 오기는 부끄럽고……. 누구와 같이 와야 하나 고민했는데, 형이랑 오니 좋네요.”

마당발 중의 마당발이다. 홍화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더불어 돈 없다는 티를 팍팍 뿜어댄 게 부끄러워 목덜미까지 후끈해졌다. 마른 손으로 붉어진 피부를 북북 문지르고 손바닥을 뗐다.

“내가 다음에 소고기 사줄게.”

“형 대박 나시면 그때 같이 한정가 가요. 저번에 못 간 게 너무 아쉬워서요.”

대박 나면 뭔들 못 해주랴. 요트 하나도 우정의 증표로 주고받는다는데, 한정가쯤이야. 홍화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홍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주완이 메뉴를 보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서 귀 끝까지 발갛게 익었지만 조명이 어두워 홍화는 보지 못했다.

떡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주문도 주완이 도맡아 했다. 이름도 길고 어려운 와인을 주문하는데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매번 강아지처럼 꼬리 흔들고 애교 부리는 모습만 보다가 갑자기 문명인이 된 주완을 보자 거리감이 느껴졌다. 홍화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주문을 마친 주완을 쳐다봤다.

“가끔 보면 정말 부잣집 도련님 같단 말이야.”

“부자는요.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요.”

순간 머리에 ‘일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가 별똥별처럼 사라졌다. 사채업자 역할을 워낙 잘 해내서 그런 것 같다며, 홍화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크라프트> 촬영은 어때요. 그 감독님이 액션을 엄청 좋아해서 배우들 굴린다는 소리가 있던데.”

“안 그래도 이번에 스턴트 한 분 사고 났는데 기사 한번 안 뜨더라.”

“누구 대역이었는데요?”

“아, 나.”

“다행이네요.”

“응?”

홍화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주완이 웃는 낯 그대로 고개를 들고 턱을 괴었다.

“형이 안 다쳐서 다행이란 이야기였어요. 배우가 다치면 촬영도 연기되고 번거롭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럼 대역은 다쳐도 되나. 너무 꼬아서 들은 걸 수도 있어 홍화가 얼버무렸다. 작은 상처에도 응급실을 부르짖는 녀석이니 걱정이 되어 한 말일 수도 있다. 미묘하게 드는 위화감은 무시했다.

“너 이번에 들어간 드라마는 어때? 사채업자 연기한다며. 너무 잘 어울려서 무섭더라.”

“형이 잘 가르쳐주셔서 그래요. 그때 칭찬 많이 해주셨잖아요. 이번 촬영 들어가기 전에 형한테 한 수 더 배우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바쁘셔서 부탁도 못 드렸네요.”

이 어색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예전이라면 칭찬을 듣고 헤벌쭉 웃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을 텐데, 지금은 넉살 좋게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민망함을 없앨 겸 웨이터가 따라주고 간 와인만 홀짝였다. 소주와 맥주와 막걸리가 주 종목인 홍화의 입에는 씁쓸하고 달지 않은 포도 음료로만 느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가 싫어 홍화가 어떻게든 밝게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주완이 받아주질 않았다. 둔하디둔한 홍화의 피부에도 역력한 긴장이 따끔따끔하게 와 닿았다. 분위기에 짓눌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식사를 끝마쳤다.

서먹한 관계로 남기 싫어 왔거늘,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다.

“형, 혹시 기억하십니까. 예전에 행군했을 때요.”

당연히 기억난다. 주완과 친해진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무거운 완전군장을 들고 발바닥에 물집이 다 잡히도록 걷는 신참이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홍화의 얼굴이 푸근하게 풀어졌다.

“당연하지, 인마. 너 그때 진짜 무식했어. 고집은 또 얼마나 셌는지.”

무조건 완수할 거라며 피 터진 발을 양말에 밀어 넣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홍화가 등짝 갈겨가며 말리지 않았다면 완수는커녕 반도 못 가 구급차행이 되었을 것이었다.

어리바리하기 짝이 없던 주완이 어느덧 이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배우가 되다니. 세월이 무상했다.

“그것 말고도 참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야간 보초 설 때도 졸지 않게 옆에서 노래 불러주시고, 선임한테 혼날 때도 뭘 그런 걸로 혼내냐며 막아주지 않으셨습니까. 힘내라며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시고. 아마 형이 안 계셨으면 제 군 생활은 끔찍했을 거예요.”

“넌 성격이 좋아서 나 아니었어도 잘 지냈을 거야. 다른 놈들도 너 많이 예뻐했잖아.”

주완이 홍화에게 각별하게 굴기는 했어도 타고나길 싹싹하고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쁨을 많이 받았다.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하는 후임을 미워할 선임이 어디 있겠는가. 주완을 괴롭히던 선임 한 놈은 원래부터 미쳤다고 악명이 자자한 놈이었다.

“제대하고 나서도 형에게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연기 연습뿐만이 아니에요. 형은…….”

후식이 나왔다. 말이 잠시 중단되었다. 홍화는 미묘해지려는 분위기에 후식만 잘게 잘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단맛 외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주완의 깍지 낀 손이, 연거푸 물어대는 아랫입술이, 가끔씩 떨리는 눈동자가 홍화의 입맛을 앗아갔다.

“후식 맛있는데? 너도 얼른 먹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쥐어짜며 홍화가 주완의 입을 막으려 했다. 주완은 후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형, 저는…….”

“맛있다니까. 얼른 먹어봐.”

“―좋아합니다.”

터질 게 터졌다. 그간 홍화가 열심히 막아보려고 애를 쓴 게 도루묵이 되었다. 홍화는 스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못 들은 척하면 안 일어난 일이 되나. 그럴 수 없다는 건 홍화도 잘 알았다.

“좋아해요.”

“……강주완.”

주완은 표정만 여유로웠다. 깍지 낀 손가락들이 마디 사이를 눌러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착각하는 건 아니고? 윤지건 역이 강렬해서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걸 수도 있잖아.”

로맨스를 찍다가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배우들처럼. 홍화는 아니더라도 주완은 감정 이입이 지나쳐 착각하는 걸 수도 있었다. 홍화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저도 오래 고민했어요. 내가 미쳤나 싶어서요. 하지만 윤지건 역하고는 상관없어요. 형을 보고 싶고, 형을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어요. 김오늘이 아니라 이홍화가 매일 그리워요. 매일 목소리를 듣고 싶고요. 형이 나만 봐줬으면 좋겠어요.”

“…….”

“예전에 형이 물어본 적 있었죠.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깨닫느냐고. 그냥 깨달아지더라구요. 보고 싶고, 그립고. 전 형이 항상 그리웠어요. 같이 있을 때도, 형이 제대하고 나서도, 같이 촬영을 하고, 못 만나는 모든 순간에.”

차라리 연기이길 바랄 만큼 주완의 태도가 진지했다. 김오늘이 고백하던 순간보다 간절하고 애타 보였다. 홍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제 마음은 백영이 이미 다 차지해 제 존재마저 희미했다.

“나는……. ……안 돼.”

“제가 남자라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널 그런 의미로 좋아하지 않아. 그냥 좋은 후배로 남아있어주면 안 되겠냐.”

고백을 했으니 예전 같은 관계는 회복되지 않으리라. 홍화는 차마 주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요.”

“…….”

침묵은 때때로 긍정을 의미한다. 홍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완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늦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고백할걸. 형 마음에 아무도 없을 때.”

그럼 승산이 있었을까요. 씁쓸하게 덧붙이며 주완이 웃었다. 야경처럼 빛무리만 남은 미소였다.

“미안.”

제 잘못도 아니면서 홍화가 사과했다. 힘겹게 꺼낸 고백을 거절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받아줄 수도 없어서, 주완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사과뿐이었다.

“형이 왜 미안해요. 고백은 내가 했는데.”

목소리가 다정했다. 홍화가 테이블만 뚫어지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주완은 같이 있을 때 언제나 그랬듯이 따스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고백 전, 사람을 위축시키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아아, 하고 주완이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에 넥타이 고리를 걸고서 잡아당겼다. 아예 풀어서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소년처럼 해맑게 웃었다.

“와, 차라리 고백하고 차이니까 마음은 편해요. 형한테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저 지금도 사실 졸려 죽겠어요. 아, 그리고 형 저한테 촬영하고 왔냐고 물었죠. 오늘 쉬는 날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까맣게 잊으시면 어떡해요.”

진지하게 분위기 잡던 주완이 촬영이 끝난 사람처럼 쾌활하게 떠들었다. 홍화의 각진 어깨에서도 덩달아 힘이 빠졌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표정도 점점 풀리다가 주완처럼 활짝 웃었다.

“너무 잘생겨서 그랬지. 매일 꾀죄죄하게 입고 다니다가 차려입으니 촬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나.”

“제가 그렇게 잘생겼어요? 그럼 아직 가능성 있다고 봐도 되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홍화가 바로 얼굴을 굳히고 벽을 세우자 주완이 호쾌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홍화를 재회한 그 날 터트렸던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말끔했다.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는 것 같지 않아 홍화도 피식 웃었다. 숨통을 콱 막는 거북한 공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일단은 안심이 들었다.

“그런데 넌 고백하면서 안 무서웠어? 내가 널 영영 안 볼 수도 있잖아.”

주완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런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처럼. 홍화가 아직 남은 후식을 입에 댔다. 이제야 맛이 제대로 느껴졌다. 주완이 손도 안 댄 제 몫의 후식을 홍화 앞에 놓아줬다.

“형, 저 영원히 안 볼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홍화가 말끝을 흐리자 주완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도 뽑았다. 가슴에 손까지 올려놓는 게 홍화가 절 아예 끊어내면 어쩌나 진심으로 걱정한 듯싶다.

“혹시…… 제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 모르면 가슴 아플 거라는 말. 이제는 아니까 차라리 후련해요. 치과 가기 싫어서 미뤘다가 막상 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냐.”

“했죠. 시뮬레이션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저 예전에 오디션 연기 연습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한 거 같아요. 최악이 형이 제 뺨 때리고 가는 건데 거기까진 안 갔잖아요. 그럼 됐어요.”

주완이 덤덤하게 말했다. 표정은 홍화를 처음 마주 봤을 때보다 훨씬 나긋했다. 정말 마음이 편해진 듯이.

“그래도 바로 포기는 못 하겠어요, 형.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저에게도 틈을 줘요.”

“없어, 그딴 거.”

홍화가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칼같이 선을 그었다. 주완이 특유의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올려다봐도 가차 없었다. 백영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차 죽겠다. 거기에 저 좋다고 꼬리 치는 대형 견까지 올려놓으면, 무게도 무게거니와 백영이 제 인생을 초토화시킬 게 분명해 홍화가 몸을 부르르 떨며 거절했다.

“데려다드릴게요. 밤길이잖아요.”

“됐어. 소화도 시킬 겸 걸어갈게. 네가 하도 분위기 잡아서 얹혔어, 인마.”

“소화제 사드릴게요. 아니면 병원 갈까요.”

그놈의 병원 타령은 고백하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한 태도에 홍화가 킥킥거리며 주완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주완이 아픈 척 엄살을 부리며 홍화의 주먹이 닿은 곳을 느릿느릿 문질렀다. 꽤 오랫동안.

“연락하면 밥 한 끼는 사줄게. 귀찮게 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한정가 아니면 이제 안 먹을래요.”

“그래, 그래.”

홍화는 단단히 한 몫 뜯어먹겠다는 주완의 투정도 너그럽게 넘겼다. 이제 그만 돌아서 가려는 홍화를, 주완이 소매를 잡으며 막았다. 홍화가 내려다보자 주완이 두 입술을 맞물려 물고서 머뭇거렸다.

“가시기 전에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안아봐도 됩니까.”

진도로 따지자면 입도 맞춘 사이다. 포옹 정도는 밥 먹듯이 쉽게 할 수 있는. 고백을 받기 전엔 그랬다. 아무렇지 않게 주완의 어깨에 팔을 걸고 제 품에 끌어안을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포옹을 자연스레 할 수 없었다. 주완의 마음을 알게 된 탓이다.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려면 차갑게 거절해야 할 텐데, 간절한 눈빛을 보자 그깟 포옹, 팔만 벌리면 끝날 거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말자 싶었다.

홍화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주완이 저보다 작은 홍화의 품에 폭 파묻혔다. 손으로 등을 껴안고 목덜미에 이마를 댄 채 아기 코알라처럼 매달려 숨을 들이켰다. 홍화의 체향을 오래도록 폐 속에 남기고 싶은 사람처럼 깊고 또 깊게.

홍화가 뭉긋대다가 주완의 등을 마주 안았다. 넓은 등을 토닥이고 쓸어내리며 주완을 위로했다. 말이 아닌 몸으로, 진심을 담아서.

“넌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주완은 답하지 않았다. 홍화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주완이 마지막으로 힘주어 홍화를 안고 떨어졌다. 한 걸음 물러서 홍화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한정가 예약해두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인사하고 홍화가 먼저 돌아섰다. 육교에 올라가기 전 돌아보았을 때, 예전이었다면 홍화가 돌아보기만을 기다렸다가 손 흔들었을 주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완은 걷다가 멈춰 서서 홍화가 간 길을 돌아봤다. 애써 웃던 얼굴은 진작 무너졌다. 씁쓸함만 가득 남아서 홍화가 지났을 육교를 올려다봤다.

좋아하는 마음은 대체 언제부터 자라났을까. 싹이 자랐음을 알았을 때 눈치챘으면 초기에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었을까. 그러기엔 홍화와 켜켜이 쌓인 기억들이 죽은 씨앗도 키워낼 비옥진 땅이라 뽑아내도 분명 새로운 싹이 났으리라.

군대에서 처음 봤던 그 날, 앳된 얼굴이 저보다 나이 많은 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제 짐을 나눠 들고도 씩씩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땠고, 재회하던 날 햇빛 쏟아진 호수처럼 빛나던 눈동자는 어땠던가. 비록 연기나마 제 앞에서 진심을 담아 고백하던 고운 얼굴 역시도.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얼마나 많은 상황을 그려봤던지. 눈을 떠도 감아도 선명한 그 얼굴에 수많은 표정을 그려댔다. 경멸, 증오, 혐오, 혹은 기쁨, 수줍음, 기적 같은 미소 등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예상한 결과였다.

주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각오하고 가더라도 고통은 바뀌지 않는 것처럼.

“형보다 좋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차마 앞에선 할 수 없던 말. 앞으로도 전하지 못할 말.

주완은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허공에 뱉어내고 그 자리에서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홍화가 돌아와 손을 잡아주기라도 할 듯이, 다시 와서 안아주기라도 할 듯이, 아주 오랫동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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