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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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과 통화 이후로 홍화는 내내 저기압이었다. 억지로 발랄하게 굴려고 해도 주변에서 유백영 스캔들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홍화를 잡고 억지로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가도 누군가가 열애설을 떠들면 바로 아래로 처졌다. 혹시 다른 이에게 들킬세라 재빠르게 밀어 올리니 홍화의 입꼬리가 시종일관 요동치는 그래프였다.

“유백영네 소속사 발 빠르네.”

대기하는 동안 핸드폰을 가지고 노닥거리던 순덕이 엄지로 화면을 쭉쭉 밀어 올리며 중얼댔다. 옆에 있던 김강수가 순덕이 뭘 보나 싶어 고개를 길게 뺐고, 대본에 코 박고 있던 홍화도 자연스레 순덕의 머리 옆에 제 옆머리를 붙였다.

“해명 나왔어요?”

“응. 부인했어. 둘이 화보 촬영 갔을 때 찍힌 사진이라고, 사귀는 거 아니래.”

순덕이 홍화부터 흘끔 보았다. 홍화의 시선이 부산스레 기사를 훑었다. 촬영 내내 우울하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가 기사를 읽어감에 따라 점점 빛을 되찾았다. 마지막 점까지 다 훑고 나서는 커피차를 봤던 그때처럼 두 눈동자가 빛 받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이거 그거 아니에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치고 빠졌다가 방심한 순간에 다시 치는 거. 지금이야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그러다가 결혼한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얘네들도 어느 날 갑자기 말없이 결혼한다고 터트리는 거 아냐?”

김강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이자 홍화의 얼굴이 고 사이에 무른 호박처럼 썩었다. 순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을 쳐다봤다. 행간에서 김강수의 예언 같은 지적이라도 읽어낼 듯이.

“그러고 보니 홍화 너, 저번에 유백영한테 커피 차도 받았지? 완전 잊고 있었네. 커피 차도 받을 정도면 엄청 친할 텐데 유백영이 스캔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해? 사실이래, 거짓이래?”

좀처럼 뭉개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홍화가 급작스러운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입을 합 다물었다. 친하기야, 매일 밤마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며,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한 차를 타고 다니고, 시간이 나면 같이 소파에 기대앉아 철 지난 영화를 보는 사이기는 하지만, 그런 놀라운 사실을 이들이 어찌 알까. 당사자들과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소수 빼고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진실이었다.

“글쎄요. 사생활에 대해선 말을 잘 안 해서. 스캔들은 묻지도 않았어요.”

해명이 사실이다. 둘은 유럽에 화보 촬영 갔다가 사진이 찍혔고, 정치계 뉴스 덮으려고 터트린 것이다. ―라고 홍화도 믿고 싶었다.

“소속사에서 밝힌 게 사실이겠죠. 설마 회사가 거짓말하겠어요.”

“과연 그럴까요.”

김강수가 소품인 안경을 검지로 추켜올리며 예리한 척했다. 순덕은 아무 말 없이 홍화만 가느스름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둘 다 홍화가 숨기는 이면까지 다 캐낼 듯 뚫어지게도 쳐다봤다. 홍화가 뒷머리만 긁적거리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저도 모른다니까요.”

“냄새가 나는데. 알고 있다는 냄새.”

순덕이 홍화의 근처에 코를 갖다 대며 개처럼 킁킁거렸다. 무당의 피가 섞였다더니 감이 날카로웠다. 곰처럼 둔한 덩치의 김강수도 홍화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아이고, 둘 다 오늘따라 왜 그런대. 준비 안 해요? 이렇게 놀다가 NG 내면 무슨 욕을 얻어먹을라고!”

홍화가 일부러 성을 내며 둘의 등짝을 촬영장 쪽으로 쭉쭉 밀었다. 촬영이란 말에 정신이 번뜩 든 김강수와 달리 순덕은 묘하다, 묘해 하고 중얼대며 가느스름하게 뜬 눈을 좀체 제 크기로 돌리지 않았다. 반쯤은 맞는다는 그 감, 좀 더 파고들면 홍화와 백영의 사이까지 간파할까 봐 홍화가 순덕의 등을 더욱 힘주어 밀었다. 백영의 스캔들이 거짓으로 판명 난 거야 행복하지만, 둘의 관계를 남에게 들키는 불행이 뒤따라오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홍화를 괴롭히던 난관 하나가 해결되니 연기를 함에도 어려움이 덜했다. 다른 때보다 씩씩하게 촬영을 끝마쳤다. 실수는 죄다 순덕과 강수가 저지르고 홍화는 단 한 번의 NG 없이 매끄럽게 해냈다. 얼마나 신나게 날뛰어댔는지, 칭찬에 인색한 조감독마저 홍화 연기가 나날이 물이 오른다고 칭찬했다.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면 안 되는데. 열애설이 터졌을 때는 기분이 땅을 파고들다 못해 해구에 도달할 듯 가라앉았건만, 해명 기사 하나 읽고 나니 몸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발걸음도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홍화씨 오늘 기분 좋은가 봐요. 무슨 일 있었어요?”

“예? 아뇨. 별일 없는데.”

그렇게 티가 났나. 싱글벙글한 낯짝으로 스태프들과 동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던 홍화가 뺨을 붉혔다.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한 게 못내 부끄러웠다.

“그러게. 우리 홍화, 오늘 좋은 일 있나 아주 그냥 날아다니네. 그런 의미로 오늘 술이나 한잔?”

순덕이 홍화의 어깨에 팔을 걸며 다른 손목을 가볍게 꺾어 보였다. 백영이 데리러 오겠다고 문자를 남겨놓은 상태라 홍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절했다. 순덕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아쉬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열애설 해명 기사도 났겠다, 유백영의 뺨에 낮에 미처 못한 뽀뽀를 퍼부어줘야 했다.

촬영 끝났다고 백영에게 문자를 보내자 마치 보고 있었던 것처럼 답변이 금방 도착했다. 곧 갈 테니 항상 가던 카페에서 기다리란, 흔한 웃음소리 하나 안 붙은 딱딱한 문자였다. 그걸 보고도 홍화는 좋다고 히죽거렸다. 문자만 봐도 백영의 동그란 뒤통수가 떠오르고,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이 눈앞이 훤하게 그려졌다.

이 캐릭터는 너무 애교 부리는 것 같고, 저 캐릭터는 너무 푼수 같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대충 귀여운 캐릭터나 하나 골라 보내면 끝인데 백영이다 보니 신중하게 고르게 된다. 홍화는 미간까지 찌푸리고 캐릭터를 고르다가 제풀에 지쳐 이응 두 개만 보냈다. 이미 출발했는지 확인만 하고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발걸음 가볍게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백영이 말한 카페는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길 막히는 시간이라 백영이 오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겠으나 먼저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다.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다가 홍화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앞에 선 이가 홍화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머뭇거렸다. 남루한 차림에, 커다란 덩치를 구기고 있으나 홍화는 사실 그림자만 봐도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았다.

“……형.”

홍화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명식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옷차림보다 더욱 꾀죄죄했다. 턱수염은 며칠간 깎지 않아 덥수룩하고, 듬직하던 풍채도 바람이 빠지기 시작한 풍선처럼 전보다 쪼그라들었다. 누가 보면 마음에 상처를 입은 건 홍화가 아니라 명식이라고 알 듯했다.

“이야기 좀 하자.”

명식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홍화는 명식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저번과 같은 비난과 외면을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명식과의 관계를 무 자르듯이 잘라낼 수는 없다. 이 세상에 핏줄 한 명 남아있지 않은 홍화에게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였다.

“무슨 이야기.”

명식이 한 걸음 다가왔다. 홍화가 주춤거렸다. 명식이 움찔한 홍화를 보고 그 자리에 멈췄다. 얼굴이 아픈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미안하다.”

“뭐가……. 형이 뭐가 미안해.”

상처는 받았지만 홍화는 명식을 미워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보수적인 사람이, 친동생같이 여기던 이가 어느 날 말도 없이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고 하니 당황스러웠겠지. 말도 안 하고 꼭꼭 숨긴 홍화에게도 화가 났을 것이다.

“네가 뭘 하든 옆에서 응원할 거라고 해놓고 딴소릴 했어. 정말 미안하다.”

명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다. 홍화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지그시 물었다. 사과를 받으면 비난을 받았던 그때가 떠올라야 하는데, 모순적이게도 명식이 도와줬던 과거가 먼저 연달아 떠올랐다.

아프면 제일 먼저 달려와 간호해주고, 굶어 죽지 않을까 매번 와서 들여다보고,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을 때는 저 역시 없는 돈으로 삼시 세끼 밥을 사주고, 옷을 사주고, 월세를 내주고,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는 거 잘하지도 못하는 양반이 행사 잡아준다고 간에 무리가 갈 정도로 접대를 뛰었다. 명식이 없었다면 홍화는 아마 이미 좁은 단칸방에 고독사 한 시체로 발견되고도 남았으리라.

그래서 홍화는 다시 연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명식이 분식집과 매니저를 병행한다고 해도 이해했다. 명식은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이홍화.”

명식이 고개를 들었다. 홍화와 눈이 마주쳤다. 외양은 초췌한데 눈빛은 형형했다.

“그 새끼는 아니야.”

명식은 유백영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건만 그 이름을 다른 누군가 들을까 봐 겁먹은 듯도 보였다.

“……하, 형. 지금 그 말 하려고 사과니 뭐니 밑밥 깔았어?”

명식이 진심을 담았든 어쨌든 뒷말이 나온 순간 앞의 말은 의미가 없었다. 홍화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자 명식이 한 걸음 다가왔다. 홍화도 주먹을 콱 쥐고 물러나지 않았다. 여차하면 명식의 멱살이라도 잡을 각오가 있었다.

“너 지금 그 새끼한테 눈멀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나 본데. 홍화야, 네가 남자 좋아하는 것까지는 내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놈은 진짜 아니야. 너, 만약 둘이 그런 사이인 거 들키면 회사에서 누구 손 들어줄 거 같냐. 네 손? 아니. 사장은 무조건 걔 편들어줄 거야. 네가 있는 소속사 사장이 지금 그놈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데 걔한테 흠집 나는 걸 두고 보겠냐. 다 네 탓 하고 버리겠지!”

“들킬 일 없어. 그런 깊은 사이도 아니…….”

“깊은 사이건 아니건! 너 이제야 떴잖아, 홍화야. 이제야 좀 알려졌잖아. 너 배우한테 그런 소문이 얼마나 큰 타격인지 몰라서 그래? 이 바닥이 얼마나 보수적인데. 낙인 한번 찍히면 다들 등 돌리는 거 순식간이야. 박승훈 이야기 몰라? 걔 아웃팅 당하고 아예 못 나올 만큼 밟히고 까이는 거 너도 봤잖아.”

그 소문도 댓팻치였다. 남의 일이라 혀만 차고 넘어갔지, 그 일을 중요하게 여겨본 적은 없었다. 박승훈을 옹호하는 팬들도 있고, 강제로 남의 비밀을 밝힌 잡지사라 댓팻치를 욕한 사람들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 배우는 다시 스크린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걸 단번에 무너뜨리려고 해.”

“형. 그럴 일 없어.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도 않을 거고. 형이 나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요번엔 좀 과하네.”

홍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명식은 멈추지 않았다.

“네가 단단히 눈먼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홍화야.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봐. 유백영은 아니야.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어떤 고생을 하고 올라왔는데…….”

소귀에 경 읽기 한 사람처럼 명식이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내려쳤다. 홍화도 속이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형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럴 일 없다고. 몇 번 말해야 해.”

“그걸 누가 알아. 잘 생각해봐, 이홍화. 너한테 뭐가 이득일지.”

명식이 저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임은 알았다. 단지 머리만 알았다. 가슴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느껴질 뿐이었다.

“형은……. 결국 나한테 사과하러 온 게 아니라, 잔소리하려고 온 거네.”

한참의 침묵 후 홍화가 입을 열었다. 어둑한 와중에도 명식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게 홍화의 눈에 보였다. 정곡을 찔러서인지 아니면 오해여서 그런지, 홍화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홍화, 잔소리라니…….”

“애초에 사과하려면 사과만 하고 갔겠지. 내가 형을 모를까.”

명식이 홍화를 잘 아는 만큼 홍화도 명식을 알았다. 미안한 감정이 아주 없음은 아니나 그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홍화를 찾아왔을 터였다.

홍화가 사실을 정확히 지적한지라 명식이 바로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홍화도 뭐라고 대꾸하는 것도 지쳐 허공을 보며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속이 뭉그러지는 와중에도 홍화는 명식이 왜 저를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만큼 저를 걱정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아서, 그래서 더욱 답답했다.

“오늘은 그냥 가, 형.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해해줘서 고맙고. 근데 당분간 연락은 하지 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관계를 완전히 끊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명식이나 저나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이. 시간이 흐르면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일 없었던 양 하하호호 떠들겠으나 단지 지금이 아닐 뿐이었다.

홍화가 먼저 명식을 지나쳤다. 명식이 홍화를 잡을 것처럼 손을 움찔했다가 주먹만 꾹 쥐었다.

멀어진 홍화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명식이 등신 같은 자식이라고 자신에게 욕을 던졌다. 그날 홍화에게 퍼부은 만큼 돌려받았다. 깔끔하게 정산해 홍화의 손목을 잡고 늘어질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저 당분간, 이란 기간이 제 예상보다 빠르게 끝나기만을 바랄 뿐.

몸은 피곤하지 않았다. 정신이 피곤했다. 백영을 만나면 전에 못 한 뽀뽀나 실컷 하려고 했는데, 명식이 진을 다 빼고 가 뽀뽀는커녕 손잡을 힘도 없었다. 홍화가 등받이에 등을 대고 축 늘어졌다.

“오늘 힘들었어?”

다정하기도 하지. 다른 사람이면 아무렇지 않을 일상적인 질문이 유백영의 입을 거치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질문이 된다. 타고난 성정과 말버릇이 무뚝뚝하고 버르장머리는 엄마 배 속에 버리고 왔음을 아는 까닭이다.

“응. 좀.”

“오늘은 액션도 없었을 텐데.”

“뭐…….”

홍화는 괜히 앞머리만 툭툭 건드리며 딴청을 피웠다. 피곤한 이유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명식이 와서 하고 간 말은 백영에게 밝힐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명식이 한 말을 속으로 곱씹는 동안 시야가 급작스레 어두워졌다. 쪽, 하고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웃팅’. 무서운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홍화가 백영의 어깨를 밀쳤다.

“미쳤냐. 제발 때와 장소 좀 가려.”

“가릴 만큼 잘 가리고 있어. 너, 진짜 아무 일 없었어?”

“일은 무슨 일이 있다고 그래.”

몸을 틀어 벨트를 매며 홍화가 시선을 피했다. 백영이 아예 홍화가 움직이지 못하게 턱을 꽉 잡고서 고개를 틀었다. 힘없이 열린 입술 틈으로 물컹한 혓바닥이 들어와 안에 숨은 혀와 뒤엉켰다. 아랫입술이 빨리고 윗입술이 깨물리고, 코끝이 부딪치고 입술 도장이 찍혔다.

처음과 달리 이번엔 홍화도 백영을 밀칠 수 없었다. 짧은 입맞춤이 손에서 힘이 빠질 정도로 달았다. 고된 하루를 위로하고도 남는 입맞춤이었다.

“뉴스 안 봤어?”

“아, 뉴스……. 해명 기사?”

백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 너머의 눈빛이 의기양양했다.

“내가 내 말 믿으랬지.”

콧대가 차 천장을 뚫게 생겼다. 홍화는 아, 하고 싱거운 대꾸만 했다. 열애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 나서 좋았던 기분은 촬영장 안에서 끝났다. 명식이 남긴 말만 자꾸만 홍화의 신경을 깔짝깔짝 긁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지든 넌 내가 말한 것만 믿어. 난 너한테 거짓말 안 해.”

세뇌를 시킬 요량인지 백영이 전에 한 말을 또 던졌다. 홍화는 창밖을 보며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 싶건만, 그럴 새도 없이 마침 차창 너머로 명식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게 보였다. 명식 역시 마치 홍화의 시선이라도 눈치챈 양 백영의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팅이 진해 안에 누가 있는지는 못 봤을 텐데도 홍화라는 걸 알아챈 듯 표정이 어두웠다.

신호등에 걸리지 않아 차가 미끄럽게 명식을 스쳐 지나갔다. 홍화는 사이드미러로 작아지는 명식을 보다가 이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

그게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홍화는 눈을 질끈 감고 잔상처럼 남은 명식의 초라한 모습을 지웠다.

∞ ∞ ∞

주완과의 만남이 껄끄러웠다. 보자고 조르는 말도 예전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겠지만 마음의 단면을 엿보고 나자 어리광을 받아주기 영 어려웠다. 막말로 주완이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아닌데, 의뭉스레 넘어가줘야 하는지, 아니면 알고 있다고 티를 내고 그만하라고 잘라야 하는지도 고민이었다. 아니면 이 모든 게 홍화 자신의 착각이고, 주완은 전처럼 좋은 선배로만 여긴다는 보기도 있었다.

[오늘 마지막 에피소드 올라와요. 같이 보실래요]

마지막 에피소드라는 문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백영이 보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저번에 퀴어 드라마를 찍었는데도 아무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던 걸 떠올리고 홍화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백영에게 질투를 기대하지 말자고 그토록 굳게 다짐했건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제멋대로였다.

일 편이야 주완과 미묘한 감정선만 나왔지, 직접적인 접촉은 없어 마음 편히 같이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었으나, 마지막 편은 돌이켜 보건대 수위가 높았다. 어색하고 민망해서 그 장면을 주완과 나란히 앉아 볼 자신이 없었다.

<크라프트> 촬영에 명식과 백영까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지금은 홍화의 인생에서 최고 바쁜 시기였다. 그 탓에 <오늘의 세계>가 얼마만큼 인기를 얻었는지 검색조차 해보지 못했다. 저번 주였나, 작가에게서 대만과 수출 계약 맺었다고 신나서 전화가 오긴 했지만.

인지도가 높아지면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거나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줄 알았다. <오늘의 세계>는 생소한 장르에 비해 조회 수도 높고 수많은 사람들의 호응도 이끌어냈으나 홍화의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인터넷 세상에서의 인기인 듯싶었다.

그래도 이 드라마 덕에 여러 군데에서 캐스팅 제의가 왔고, 개인적으로도 깨달음의 기회를 가졌기에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과거로 돌아가라 해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하리라.

[촬영 때문에 안 될 것 같다. 미안. 다음에 보자]

적절한 변명거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촬영이 끝나는 시간이야 항상 달라 언제 끝날지 확답은 못 해도 최소 <오늘의 세계> 마지막 편이 끝난 다음에 촬영도 끝날 것이었다. 그보다 일찍 끝나더라도 주완과 사이좋게 앉아 키스 신을 보는 것도 사양이었다.

눈물을 흩뿌리는 캐릭터가 답장으로 돌아왔다. 홍화는 핸드폰의 전원을 눌러 끄고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요상하다, 요상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속삭임에 홍화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힉, 소릴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덩달아 같이 놀란 순덕이 가늘게 떴던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홍화를 쳐다봤다.

“아오, 예고도 없이 다가오심 어떻게 해요.”

“아니, 언제는 예고하고 왔나? 이홍화 씨, 숨기는 거 있어? 왜 이렇게 놀래.”

“형은 나만 보면 매일 숨기는 거 있냬.”

순덕이 싸구려 합죽선을 촤르륵 펼쳐 보이며 기품 있는 척 부채질했다. 김강수가 어디선가 쪼르륵 달려와 부채를 받아 들고 머슴처럼 옆에서 부채를 흔들며 굽실거렸다. 백영의 열애설이 불거지기 전, 백영의 이름 한 번 올리고서 순덕은 신내림 받은 무당처럼 굴었다.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는데 핸드폰 전원을 끄고 넣었다 함은 분명 누군가와 싸움이 있어서 그런 것일 터! 어허, 귀신을 속이지 나를 속여? 죄인 이홍화는 어서 자신의 죄를 이실직고하여라!”

“이실직고 하랍신다!”

김강수가 부채질을 멈추지 않은 채 간드러진 목소리로 순덕의 뒷말을 따라 했다. 저번에는 신부더니 이번에는 사또 역인 모양이었다. 참 개성 강한 사람이라며 홍화가 손사래를 쳤다.

“형, 신기 떨어졌어요. 싸우긴 누가 싸워. 세상에 나만 한 평화주의자가 어디 있다고.”

“어허, 거 이상한지고. 앞길에 먹구름이 드리웠는데 아직도 싸움을 하지 않았단 말이냐? 거참, 이상한지고…….”

순덕이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갸웃하며 말끝을 흐렸다. 홍화도 한때는 사주를 믿고 거기에 큰돈을 들인 적도 있었다. 사실 아직도 북쪽에서 온 귀인이 저에게 행운을 물어다 줄 거라는 점괘는 믿기도 했다. 하지만 순덕은 아니었다. 한 번도 정확하게 꼬집어 맞춘 적 없는 데다가 선무당 냄새가 폴폴 났다.

“무슨 먹구름이요?”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 밑져야 본전이라며 홍화가 넌지시 물었다. 순덕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홍화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밀어붙였다. 홍화의 목이 뒤로 넘어갈 만큼 가까이 붙이고서 가는 눈 사이로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흐으음, 하고 순덕이 고개를 뒤로 빼며 김강수의 손에서 부채를 빼앗았다. 부챗살을 촤르륵 소리 나게 닫고서 순덕이 손바닥에 툭툭 두드렸다.

“폭풍이 불어 닥치겠네. 주변 사람한테 몸조심하라 그래라.”

“예?”

계속 숨긴다 어쩐다 하더니 이번에도 생뚱맞았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 홍화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뭔가에 홀린 듯 멍해졌던 순덕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채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뭐야. 몰라. 그냥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가데.”

“진짜 잠깐이라도 신 내린 거 아녜요, 형?”

“에이, 그럴 리가.”

김강수의 진지한 말에 순덕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났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르르 떨면서 팔뚝을 벅벅 비볐다.

“아, 씨발. 진짜면 나 안 돼. 신내림 받으면 안 된단 말이야!”

“원래 배우와 무당은 한 끗 차이라고 합니다. 형이 신내림 받으시면 제가 조수로 들어갈게요. 무서워하지 말아요, 형.”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때에 배우 말고도 살길을 뚫어놓겠노라며 김강수가 애절하게 순덕의 손을 잡았다. 순덕이 꺼지라고 소리치며 온 힘을 다해 김강수의 손을 털어냈다.

“홍화 너도 그거 큰 의미 두지 마. 내가 헛소리한 거야.”

그런 것 치고는 접신한 듯 눈빛이 몽롱하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았다. 여기서 김강수를 따라 정말 신내림 받은 것 같았다고 밝히면 순덕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칠 미래가 신을 영접한 적 없는 홍화의 눈에도 보였다. 지금껏 저를 놀린 게 괘씸해 곯려줄까 하다가, 발발 떠는 모습이 진심으로 겁먹은 것처럼 보여 홍화가 씩 웃고 말았다.

“형……. 저는 형 믿어요. 형 말이 의외로 잘 맞더라고요.”

물론 얌전하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홍화의 발언에 순덕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등 뒤에 귀신이라도 붙은 양 돌아봤다가, 스태프들 틈바구니로 꽁무니 빠져라 후다닥 도망쳤다.

[먼저 가 있어]

촬영이 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백영에게서 문자 한 통만 덜렁 와 있었다. 최근에 긴 휴가를 얻었다고 홍화의 기사 노릇 말고는 집에서 잘 나가질 않더니, 오늘은 오랜만에 약속이라도 잡힌 모양이었다. 전화를 줬더라도 촬영 때문에 받지 못했을 걸 알지만 목소리 한번 안 들려주고 문자만 달랑 보낸 게 은근히 섭섭했다.

매번 데리러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 홍화가 서운한 마음을 다독이며 털레털레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탈까 고민하다가 버스로 마음을 정했다. 주머니 사정이 전보다 나아지기는 했어도, 미터기의 말이 경주마처럼 날래게 뛰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새가슴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 이홍화!”

저 멀리서 누가 반갑게 제 이름을 불러 홍화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니저와 주차장으로 향하던 순덕이 홍화를 발견하고 손을 크게 흔들더니 발랄하게 폴짝폴짝 뛰어왔다.

“매니저는 얻다 두고 혼자 가? 내가 데려다줄까?”

좋은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쫓기는 장면을 찍는다고 바닥 좀 구른 터라 어깨며 허리가 비 오기 전날처럼 뻑적지근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참 돌아가는 것보다야 순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몸이 편안할 길이었다.

하나, 임시 매니저도 백영의 집 근처에 내려달라고 말할 수 없어 못 부른 참에, 순덕의 차를 타고 갈 수야 없었다.

“괜찮아요. 그냥 버스 타고 갈게요.”

“에이. 거절하지 말고. 부담스러우면 집 근처에다 세워줄게.”

“정말 괜찮은데…….”

홍화가 머쓱하니 뒷머리를 긁적여도 순덕은 이미 홍화 팔에 팔짱을 끼고서 질질 끌어당기고 있었다. 막무가내인 모습이 어쩐지 백영을 떠올리게 해 홍화가 피식 웃고는 순덕을 따라갔다.

“우리 매니저가 무사고 운전만 오 년이야. 걱정하지 말고 타세요.”

앳되어 보이는 매니저가 배시시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순덕이 그런 매니저의 등을 팡팡 치며 홀로 삼 인분의 수다를 떠들었다. 입담이 어찌나 좋은지, 신나게 웃다 보니 어느새 주차장이었다.

도착한 곳에 작은 경차 한 대가 주차되어있었다. 남자 셋이 탈 수 있을까 걱정하는 찰나에, 차의 창문이 내려가더니 김강수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형, 잠깐 어디 좀 다녀온다고 하더니……. 아, 홍화 씨도 오셨어요. 어서 타세요.”

김강수가 제 차인 양 살갑게 문을 열고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덩치가 큰 김강수까지 탔는데 제가 탈 공간이 남아있기는 한 건지, 버스 타고 가버릴 걸 괜히 순덕에게 끌려온 건 아닌지 홍화가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차 안을 바라봤다. 순덕이 홍화의 걱정을 무시하며 김강수 옆자리에 홍화를 구깃구깃 구겨 넣었다.

“괜찮아, 괜찮아. 예전에 이 차에 씨름선수 다섯도 타고 갔었어.”

공간상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홍화는 믿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김강수는 감명받은 듯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진심으로 믿는 얼굴이었다.

무릎이 의자에 닿고 김강수의 덩치에 밀려 어깨가 움츠러들기는 했어도 몸이 차에 들어가기는 했다. 이런 상태에 익숙한지 매니저가 아무렇지 않게 시동을 걸었다. 자, 출발합니다. 하며 순덕이 노래를 크게 틀었다. 홍화에게 익숙한 가락, 트로트였다.

트로트를 구수하게 따라 부르는 순덕을 보자 예전에 지역 축제를 돌며 무대에 서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언제쯤 무대에서 벗어날까 싶었는데, 이제는 촬영을 마치고 오는 길에 차에서 트로트를 듣는 입장이 되었다.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이제는 내 맘을 숨길 수 없어요- 사랑한단 말도! 좋아한단 말도! 바보 같은 모습은 오늘로 안녕-.”

홍화도 몇 번 들어본 노래였다.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자 옆에서 강수가 저도 아는 노래라며 합세했다. 매니저까지 같이 부르자 좁은 차 안이 트로트로 쩌렁쩌렁했다.

“와, 오늘 소리 좀 나오는데. 가다가 노래방이라도 들를까.”

두 곡을 열창한 순덕이 이마에 밴 땀을 닦으며 제안했다. 노래방도 좋지만 백영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다랬다.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지는 못하고, 홍화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냈다.

“몸만 괜찮으면 당장 갈 텐데. 오늘은 제가 너무 많이 굴렀어요.”

“네가 오늘 구르긴 했지. 어째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많이 굴리는 거 같다.”

“맞아요. 나중에 교통사고 나는 장면도 한 번 있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홍화가 맡은 캐릭터가 얻어맞는 장면이 많은 편이긴 했다. 각목으로 두들겨 맞고, 바닥을 구르고, 몸을 웅크린 채 깡패들 발에 얻어터지고.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역할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어디냐며 홍화가 헤실헤실 웃었다.

“그건 대역 써. 부상당하면 홍화 너만 손해다.”

“어차피 살짝 부딪치고 마는 건데요, 뭘. 놓치면 아깝잖아요.”

“열정이 지나쳐도 독이야.”

순덕이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김강수가 이해한다는 듯이 홍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볼 땐 이 감독이 너 우는 얼굴을 좀 좋아하는 거 같아.”

“아이고, 우리 형님이 저번에는 유백영한테 남자랑 결혼할 놈이라 그러더니 이번엔 감독님을 변태 만드시네.”

순덕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옳은 말이라고 하던 김강수가 웬일로 순덕을 제지했다. 순덕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감독도 그렇지만……. 사실 나도 홍화 네가 우는 거 보면 마음이 좀 뭉클하고 그러더라. 보통 울면 콧물도 나오고 흉해야 하는데 넌 눈물만 뚝뚝 흘리잖아. 얼마나 불쌍한지.”

<라스트로드>도 우는 얼굴 보여주고 캐스팅됐다. 저야 모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눈물 흘리는 자신이 제법 처량 맞아 보이는 듯했다.

“형님, 저는요. 저도 우는 모습은 꽤 괜찮은데.”

김강수가 입술을 삐죽이며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순덕이 곰 같은 면상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넌 절대 내 앞에서 울지 마라. 사내새끼가 우는 거 딱 질색이야. 아, 홍화 넌 빼고.”

김강수의 입술이 댓 발 나왔다. 이 자리에서 당장 눈물 연기라도 보여줄 듯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하며 눈물을 모았다. 한참을 쥐어짜도 눈물이 안 나오는지 김강수가 푸하, 한숨 쉬며 포기했다.

“우는 연기도 힘드네. 나중에 홍화 씨한테 한 수 배워야겠어요. 꼭 가르쳐주세요. 꼭.”

순덕에게 무시당한 일이 사무쳤는지 김강수가 홍화의 손까지 붙잡으며 신신당부했다. 홍화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는 연기가 세상에서 제일 쉬운 홍화에겐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먼저 가 있으라고 하더니, 집주인은 없고 텅 빈 집만 홍화를 맞이했다. 얼마나 바쁘면 전화 한 통 안 하는 건지. 홍화는 백영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뜨거운 물에 몸부터 씻었다. 비좁은 차 안에서 덩치 큰 김강수와 부딪치며 왔더니 몸이 진땀 범벅이었다.

노곤할 정도로 온몸을 뜨거운 물로 녹이고 나와도 백영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고요한 집이 어색해 홍화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틀었다. 마침 소속사의 열애설 해명 기사가 연예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열애설이 터졌을 때는 어느 채널이든 웃고 있는 백영의 사진만 갖다 쓰더니, 해명이 터지자 사진이 죄다 딱딱한 표정을 지은 백영으로 바뀌었다.

열애설은 언론이 뒤집어질 정도로 떠들어댔으면서, 해명은 짤막하게 지나가고 말았다. 홍화가 쳇, 혀 차는 소릴 내며 핸드폰을 들었다. 두 발바닥을 소파 끝에 붙이고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문자함만 부지런히 들락날락했다. 근래엔 촬영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붙어있어서 문자함에도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어디야, 뭐 해, 몇 시에 끝나, 밥 먹었어 등, 식상한 대화를 쭉 훑다가 이윽고 홍화가 자판을 두드렸다.

[언제 와]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길 반복하다가 용기 내서 완성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데까지도 망설이는 시간이 길었다. 이 정도 내용은 괜찮지 않을까. 주인 없는 집에 손님 홀로 있자니 어색해서 그런다며, 홍화가 문자를 보내놓고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정신없이 두드렸다.

확인도 안 하고 답장도 없다. 대체 뭘 하기에. 키 작은 시곗바늘이 숫자 1을 가리키자 슬슬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다른 여자와 밥을 먹거나, 다른 여자와 술을 마시거나, 다른 여자와 밀폐된 공간에 있는 유백영만 떠올랐다. 머리를 탈탈 털며 망상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상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밤만 되면 항상 껌딱지처럼 붙어있었던 효과가 이제야 나타났다. 곁에서 안 떨어질 때는 귀찮을 때마저 있었건만, 막상 없으니 괜히 불안했다. 이유 없이 몰려오는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홍화가 손톱을 딱딱 소리 나게 씹었다.

전화할까.

왜 전화했냐고 물으면 무슨 변명을 대려고.

“아, 왜 이렇게 안 와.”

괜히 소리 내서 혼잣말해도 불안이 사그라지질 않는다. 홍화는 핸드폰을 멀리 던졌다가 도로 기어가 쥐었다가, 다시 던졌다가 하며 정신 사납게 굴었다. 차라리 영화를 보면 유백영에게 쏠린 관심이 흩어질까 싶어 영화 채널을 찾았다. 하필 틀어주는 영화도 유백영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다.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누르며 핸드폰을 흘끔거렸다. 이럴 거면 애초에 제 단칸방으로 돌아갔지, 유백영의 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너른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유백영을 기다리느니 코딱지만 하더라도 좁고 아늑한 단칸방이 나았다.

오래된 외화를 틀어주는 채널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홍화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연락도 없이 멋대로 늦게 오다니. 이유를 알릴 의무는 없다지만 그간의 의리가 있지, 말없이 안 오는 유백영이 얄미웠다.

영화에서 총 쏘는 소리가 요란한데도 홍화는 깜박 잠이 들었다. 도로롱 코까지 골며 자다가 잠결에 띡띡거리는 기계음을 듣고 눈을 반짝 떴다. 번호키 누르는 소리였다. 이 밤에 현관문 열고 들어올 사람이 주인 말고 누가 있으랴. 홍화가 소파에서 발딱 일어났다. 잠기운이 씻은 듯이 날아갔다.

입가를 소매로 훔치고서 까치집이 됐을 머리도 손가락으로 슥슥 넘겼다. 자연스레,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전혀 기다리지 않은 것처럼 하려고 티브이도 얼른 껐다. 달려가고픈 심정 억누르며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기둥에 기대서, 자다가 억지로 깬 사람처럼 나른하게 인사하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왔어?”

어디 갔다 왔냐는 유치한 물음은 생략했다. 바가지 긁는 남편 모양 굴고 싶지 않았다. 홍화가 벽에 슬쩍 기대며 백영을 쳐다봤다. 졸린 듯 눈을 비비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것까지는 자연스러웠다.기다렸냐고 묻거나, 집주인이 안 왔는데 뻔뻔하게 먼저 자고 있었냐고 탓할 줄 알았다. 백영의 더러운 성질머리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나 고요했다. 말 한마디 없었다. 하품을 하면서 의아함을 감지한 홍화가 시선을 들었다. 백영이 현관에 등을 기대고 홍화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영의 온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홍화가 뒤늦게 깨달았다.

“술 마셨냐?”

“…….”

누구와. 좀 전에 하던 망상이 다시금 떠올랐다. 자다 깬 척 연기하는 것도 그만뒀다. 홍화가 벽에서 어깨를 떼고 백영과 마주 섰다. 백영은 홍화의 눈꼬리에 날이 선 걸 보고도 묵묵히 문에 기대어있기만 했다. 센서 등이 꺼져 방 안이 암전되었다가 백영이 문에서 등을 떼자 다시 환해졌다. 표정 없던 백영의 얼굴에 흐리게나마 변화가 일었다.

“너, 연기 잘하더라.”

드디어 백영이 입을 열었다. 고개가 삐딱했고, 눈빛도 만나면 욕만 쏟아내던 처음처럼 차갑고 불량했다. 입술 끝이 가볍게 씰룩이다가 뺨을 밀고 위로 올라갔다. 입매가 눈빛만큼 비릿했다.

“갑자기 무슨 연기. 뭘 봤길래 그래. 그나저나 너 오늘은 왜 말도 없이 늦-,”

칭찬이지만 백영이 뿜어대는 불길한 기운상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소재를 바꿔 따져 물으려던 찰나에 백영이 커다란 손아귀로 홍화의 두 볼을 움켜잡았다. 볼살이 밀려 입술이 툭 튀어나오고 말이 끊겼다. 홍화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백영의 손목을 쥐어도 뺨을 쥔 손아귀에만 힘이 들어갈 뿐 풀리지 않았다.

“You fucking liar.”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욕인 줄은 알겠다. 난데없는 욕 세례에 홍화가 항의하려고 해도 손바닥에 입이 틀어 막혀 한마디도 뱉을 수가 없었다. 웁웁거려도 백영은 예의 그 냉랭한 시선으로 홍화의 눈동자를 뚫을 듯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You always fucking lie to me.”

입 맞출 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서 백영이 으르렁거렸다. 입술 위를 배회하는 숨결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Normal uni’ story? Don’t fuck with me.”

백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홍화가 백영의 손목을 잡고 이것 좀 놓으라며 항의했다. 백영은 놓아주지 않고 홍화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눈동자만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다른 숨기는 것들이 남아있으면 죄다 캐서 알아낼 듯이.

“내가 없는 동안 아주 예쁘게 잘 놀고 있었더라?”

홍화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또한 의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뉘앙스였다. 백영의 손목을 손에 힘을 주고 떼어내려고 해도 악력기를 쥐던 힘 다 쏟아내는지 꿈쩍도 안 한다. 무슨 헛소리냐고, 술 처마시고 개 될 거면 얌전히 처자라고 외치고 싶으나, 볼이 눌려 단 한마디도 뱉지 못했다. 그놈의 입 막힌 웁웁 소리만 계속 내는 수밖에.

“내가 조신하게 있으라고 했지, 언제 씨발 다른 새끼하고 놀아나라고 했어. 친구들까지 신경 써서 보내줬잖아.”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볼살이 쥐어 짜이는 고통이 일었다. 놀아나다니. 하늘에 맹세코 유백영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근거 없는 오해에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홍화가 백영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퍽 소리 나게 밀쳤다. 백영이 슬쩍 밀려 나갔다.

“이 미친 새끼야, 술 마셨으면 얌전히 씻고 잘 것이지 왜 나한테 지랄이야.”

잘 다독여서 침대로 끌고 가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놀아났다느니 하는 표현이 홍화의 성질을 긁었다. 백영은 홍화에게 밀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느리게 어깨를 폈다. 홍화가 움찔했다. 머리 위에 그늘이 드리우자 그간 잊고 있던 위압감이 다시금 느껴졌다.

“내가 누구랑 놀아났…,”

“키스 잘하던데, 이홍화. 언제는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홍화가 말을 잇지 못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백영을 올려다봤다. 백영이 마지막 화를 봤다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안 봤을 거라고 여겼다. <오늘의 세계>를 찍었다고 들통 난 날에도 백영은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기에, 흥미라고는 쥐뿔도 없는 줄 알았다.

“야, 그건 그냥 연기…,”

“좋아하는 사람.”

백영이 홍화의 말을 끊고 중얼대더니 밀쳐진 거리만큼 성큼 다가와서 홍화를 번쩍 안아 어깨에 둘러멨다. 쑥 높아진 시야에 당황한 홍화가 백영의 어깨를 쥐고 상체를 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영은 제 신발을 아무렇게나 휙휙 벗어 던지고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진정해, 유백영. 네가 왜 이러는지 지금 내가 짐작이 안 가서 그러는데…….”

홍화가 아무리 주절거려도 백영은 흔들림이 없었다. 흐트러지지 않은 침대 위로 홍화를 던지고서 백영이 그 위를 덮었다. 홍화가 도망갈 듯이 두 팔꿈치로 시트 위를 짚자 아예 허벅지 위에 그 묵직한 체중을 싣고 앉아 제 상의를 훌렁 벗어 던졌다.

“그게 연기였다고.”

홍화가 정신없이 끄덕였다. 좀 전만 하더라도 못된 말만 싸질러대는 유백영이 미웠는데, 침대에 올라오고 나니 제 감정은 둘째 치고 지랄병 돋기 직전인 유백영부터 달래야 했다. 왜 유백영이 이렇게 삐뚤어졌는지 탐구하는 건 조금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연기야. 연기라고.”

“진짜 연기야? 그럼 내 앞에서도 해봐.”

다짜고짜 입 맞췄던 그때도 리허설 핑계를 대더니. 백영이 밑에 깔린 홍화의 멱살을 틀어쥐고 팔심으로 들어 올렸다. 홍화가 힘없이 딸려 올라갔다.

“어서.”

입술을 코앞에 들이밀고 백영이 우겼다. 홍화가 허공을 보고 한숨을 쉬자 빨리하라며 닦달까지 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김오늘이야 술김에 젖 먹던 용기까지 끌어내 엉망진창으로라도 고백했다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 이야기였다. 진지하게 연기했다가 거기에 진심이라도 묻어날 성싶어 홍화가 입술만 질근질근 깨물었다. 백영이 멱살 쥔 손을 흔들며 “빨리.” 하고 재촉했다.

달랜다고 달래질 것 같지도 않고. 주정꾼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겠다. 홍화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아마 박하나 씨보다 먼저일 거예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아니 모자라요. 사랑합니다. 내가 윤지건 씨를.”

대사 외울 때처럼 달달 외웠다. 혹여 백영과 눈을 마주치면 말문이 막힐까 봐 시선을 딴 데 두고서 무미건조하게 책 읽듯 읊조렸다. 깊은 입맞춤은 도저히 못 하겠어서 쪽 소리 나게 뽀뽀만 하고 말았다.

“됐냐. 이제 그만 자, 좀.”

“……적선해?”

그간 술주정 많이 들어줬지만 유백영 같은 주사는 처음이었다. 홍화가 새로운 유형의 술주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괴로워했다. 할 수만 있다면 유백영의 뒤통수라도 후려갈겨 기절시키고 싶지만, 체급도, 물리적인 힘도 약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 적선이다. 적선해줬으니까 얼른 자. 자라고.”

아무렇게나 말을 주워섬기며 홍화가 백영의 밑에서 벗어나려고 낑낑댔다. 홍화의 노력이 안쓰러운지 백영이 굳게 쥐었던 멱살을 풀어줬다.

이제 좀 저를 놔주려나. 홍화가 희망을 품고 몸을 틀었다. 백영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홍화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두 팔 안에 홍화를 가뒀다. 상체를 서서히 굽혀 꿈틀거리는 홍화를 짓누르고서,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낮게 속삭였다.

“이홍화, 나 오늘 안 잘 건데.”

백영이 굽힌 다리를 천천히 펴며 제 무게를 홍화 위에 실었다.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온몸을 내리누르는 무게감에 홍화가 막힌 숨을 할딱할딱 터트렸다. 그 밑에서 빠져나오려고 팔다리로 시트를 밀어내며 안간힘을 쓰자 백영이 팔을 좁히며 홍화를 껴안았다.

“물론 너도 오늘 못 자.”

백영이 선언했다. 눌려서 벌게진 홍화의 뺨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 ∞ ∞

처음엔 반항했다. 상의가 벗겨지고 하의가 벗겨질 때까지는. 유두가 손가락 사이에서 으깨지고 백영의 숨결이 귓불 밑을 스쳤을 때는 반항하려는 의지가 조금, 사실은 많이 허물어졌다. 그래도 꿈틀거림을 멈추지는 않았다. 백영을 진정시켜본답시고 그건 그저 연기였을 뿐이라고 입에서 침이 다 마르도록 해명했지만 백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도망치려는 홍화를 잡아 오는 게 귀찮다며 두 손목을 넥타이로 칭칭 감아 묶고 눈도 넥타이를 머리에 둘둘 말아 가렸다.

“……흐읏!”

홍화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봤자 백영이 등 뒤에서 버티고 있어 소용없었다. 백영의 손이 사타구니를 타고 올라오다가 그 안쪽에 자리 잡은 ‘친구’를 툭 건드렸다. 살짝만 건드려도 내벽이 다 떨려서 홍화가 어깨를 움츠렸다. 허벅지도 같이 오므리려다가 구멍 안쪽 깊숙이 박힌 놈이 흔들려 발가락 끝만 옴찔옴찔 떨었다.

“자지 하나로는 부족한 거 같은데. 하나 더 넣어줄까.”

정말 넣을 것처럼 백영이 홍화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엉덩잇살이 쥐어 짜일 때마다 홍화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소리도 목구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입안에서 신음으로 흩어졌다. 묶인 두 손으로 백영의 팔목을 어떻게든 떨어트리려고 헛손질만 반복했다.

“미친……. 아, 안 돼. 하지……아!”

한참 엉덩이에 손자국을 만들던 손가락이 한껏 벌어진 구멍 주변을 더듬었다. 주름 없이 벌어진 구멍이 불쌍하지도 않은지, 질척한 젤로 손가락을 적시고서 백영이 그 근처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홍화가 기겁하며 허둥지둥 몸을 앞으로 굽혔다.

“어딜.”

백영이 도망가는 홍화의 배를 팔로 감싸며 제자리로 돌려놨다. 구멍에 처박을 것처럼 굴던 손가락을 앞으로 돌려 빳빳하게 고개를 세운 아랫도리를 만지작거렸다. 선물 중에는 없었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요도 구멍에 가느다란 은색 막대가 꽂혀 있었다. 백영이 검지로 막대 끝을 톡톡 두드리자 홍화가 자지러졌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안 그래도 통통하게 물오른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붉어졌다.

“하지 마. 하지, 아, 아, 그렇게 만지, 면……!”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 난리 났네, 이홍화.”

“아냐, 아냐아…….”

홍화가 두 손목으로 얼굴을 가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백영의 손바닥이 스치는 기둥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물꼬를 틀어막았으니 불알에서 아무리 정액을 올려 보내도 기둥만 뚱뚱하게 살찌우고 말았다. 주인인 홍화만 미칠 것 같다. 막대를 뽑고 싶어도, 손을 뻗기만 하면 백영이 아랫구멍을 틀어막은 놈을 가지고 푹 찔러 넣었다가 뺐다가, 다시 찔러 넣었다. 그러면 뻘겋게 성난 기둥은 더욱 터지려 그러고, 발가락 손가락이 다 오므라들고, 깜깜한 눈앞에 번개가 번쩍 내려치면서 벌어진 입술 새로 말간 침이 흘러내렸다. 몸을 버르르 떨어대느라 막대를 뽑을 힘이 솟질 않았다.

“이거, 이거 싫어. 제발.”

홍화가 울먹이며 사정했다. 백영이 홍화를 아래에 깔고 통통한 젖꼭지만 쭙쭙 빨아대며 무시했다. 허벅지에 닿는 백영의 아랫도리도 성나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뭐가 그리 불만인지 다른 놈들로 홍화를 죽으라고 괴롭히기만 했다.

“입하고 몸하고 따로 노네. 적선해주는 김에 끝까지 한번 잘해봐. 한 개로는 모자라? 하나 더 채워줄까. 두 개도 거뜬히 삼키겠네. ……홍화야, 언제 이렇게 구멍 늘려놨어. 내가 좁다고 해서 그랬어?”

“내가, 언제, 뭘 잘못했다고……!”

백영이 대번에 홍화의 볼을 움켜잡았다. 코끝에 숨결이 스쳤다.

“왜 잘못이 없어. 내가 누차 말했지. 조신하게 있으라고. 나 없는 동안에 감히 딴 새끼한테 고백해놓고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건 누가 가르쳤어.”

잇새로 뱉는 소리가 착 가라앉아있었다. 오싹해서 홍화가 고개를 비틀며 백영의 손을 피하려 했다. 백영이 턱을 부술 듯이 움켜쥐고 돌렸다.

억지로 벌린 입술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와 혓바닥을 진탕 헤집었다. 입천장을 긁고 볼살 안쪽을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가 어금니와 잇몸까지 구석구석 덧그렸다.

“내 앞에선 그따위로 연기해놓고, 그 새끼한테는…….”

손가락이 드디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홍화가 쿨럭거리자 끈적끈적하게 젖은 손가락이 가슴 위를 덧그리다가 아래로 내려가 부푼 기둥과 둥그렇게 줄어든 불알을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그런, 적……! 아, 흐윽!”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게 연기라고. 그딴 게 연기였다고. 그럼 내 앞에서도 똑같이 했어야지. 똑같이 울고, 웃었어야지. 얼마나 좋았으면 그딴 연기가 바로 나와.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딴 얼굴이 그렇게 쉽게 나와, 홍화야.”

“아, 아흑, 아으으…… 하, 아아, 윽!”

백영이 귓가에 쏟아내는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흩어졌다. 구멍 위를 꾹꾹 누르던 손가락이 기어이 맞물린 틈새를 비집고 내벽으로 기어들어 왔다. 홍화의 허리가 붕 뜨는 걸 백영이 제압하고 검지와 그리고 중지를 꽉 찬 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경련하듯 떨리는 허벅지를 내리누르고서 한 마디, 두 마디, 마지막 마디까지 넣고 손가락을 틀어 배 쪽을 눌렀다. 아랫배 살결이 부들부들 떨리며 뜨겁고 뭉클한 내장 안쪽도 푸르르 떨렸다. 홍화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질 않고, 군데군데 젖었던 넥타이도 흠뻑 젖어들었다.

“아아, 아흐으…….”

백영이 손가락을 안에서 굽히자 홍화가 뭍으로 내쳐진 물고기처럼 펄떡 뛰었다. 백영을 밀치려고 두 팔을 뻗었다가, 백영이 예민한 점막을 지문으로 슥 긁어내리자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길게 울었다. 몸이 덜덜 떨리며 절정을 알리는데도 요도를 틀어막은 은색 막대 때문에 정액이 새지 않았다. 온몸을 퍼들퍼들 떨며 막힌 숨소리만 힘겹게 터트렸다.

“봐. 자지 한 개로는 부족하잖아.”

홍화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고개만 옆으로 돌려 백영을 외면했다. 손목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넥타이가 위로 밀렸고, 고개를 비틀자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눈물범벅인 눈으로 홍화가 백영을 쏘아봤다.

“나, 난, 잘못한 거 없어.”

절정이 식질 않아 목소리마저도 떨려 나왔다. 백영이 뿌득 이를 갈았다. 아랫도리에서 손가락이 뽑히며 틀어막고 있던 놈도 단번에 뽑혀 나왔다. 홍화가 신음을 내기 싫어 아랫입술을 콱 짓씹으며 허벅지를 오므렸다. 허벅지가 백영의 손에 잡혀 벌어졌고, 흐물흐물한 아랫구멍에 다른 것이 박혀 들었다. 더욱 단단하고 커다랗고 뜨거웠다. 홍화가 이번엔 묶인 손목을 씹으며 신음을 삼켰다.

“잘못한 게 왜 없어. 나 없는 동안 딴 새끼 좋아한다고 키스해놓고 왜 잘못한 게 없어. 이홍화, 대답해. 왜 없다고 생각해.”

“그건, 연, 그, 아, 하으, 읍, 흐읍……!”

“나한테는 못 하면서 그게 무슨 연기야. 그런 눈으로 그 새끼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 홍화야, 답해야지. 어서. 연기였다며.”

아랫배가 불룩 솟았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불룩 솟았다. 백영이 까슬까슬한 음모가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맞붙을 정도로 깊숙이 박아 넣고서는, 윤곽이 불거진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홍화가 덜덜 떨었다. 손바닥에 힘이 실릴수록 안쪽 점막이 안에 든 걸 비틀어 짜면서 떨림이 윗배로, 가슴으로, 어깨로, 그리고 입술과 손끝 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키스한다고 해놓고, 그런 눈으로 봐놓고 연기라고. 그런 거짓말을 나에게 믿으라고……. ……하.”

감각이 지나쳐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기둥은 슬쩍만 건드려도 작은 화산처럼 폭발할 듯했다. 홍화가 섣불리 은색 막대를 뽑지 못하고 흐윽흐윽 울며 백영의 손목만 쥐었다. 백영의 손바닥이 아랫배를 터트리고 더 나아가 기둥도 터트릴 것 같아 무서웠다.

“놔, 이거……. 무서……워. 그만……. 유백영, 백영아, 읏……!”

홍화가 넋 놓은 사람처럼 백영의 이름만 거푸 토해냈다. 성도 빼고, 오로지 백과 영을 붙인 단어만 아는 사람처럼 이름을 부르며 백영을 올려다봤다. 눈물이 퐁퐁 솟아 넘치는 눈가와 달아오른 뺨은 애처롭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보이는 붉은 혀끝은 그저 야했다. 백영의 눈빛이 일순 흐무러졌다.

“그 연기 다시 해봐. 그거면 봐줄게. 그대로 연기해.”

백영이 홍화의 머리에 입 맞추며 우는 아기 어르듯 얼렀다. 배를 꽉 누르던 손바닥에도 힘을 빼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끝이 퉁퉁 부은 기둥을 스치자 홍화가 덜덜 떨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에 백영이 입술을 대며 야트막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홍화가 백영에게 매달리며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작은 자극도 지금 홍화에겐 죽을 것 같은 불길과 파도였다.

“다, 아, 들어줄게. 할게. 배, 누르지 마……. 뭐, 흑, 흐윽, 든 할게. 할, 테니까……, 아…….”

“그 대사. 그 고백. 나한테 해.”

부드러운 파도처럼 몰아치던 백영이 홍화를 품에 가두고 두 뺨에 손바닥을 댔다. 빨갛게 짓무른 눈가를 손가락으로 훑고서 그 위에 입을 맞췄다.

홍화가 안개가 낀 듯 몽롱한 머리로 고백했던 대사를 찾았다. 백영이 눈을 맞추고 기다려줬다. 좀 전만 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끔하게 기억이 나더니, 머리에 열이 올라 대사가 흐릿흐릿했다. 바로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자 백영이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홍화를 쥐어짰다. 홍화가 아으으, 길게 신음하며 가까스로 대사를 기억해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아마, 박……하나 씨보다 먼저일 거예요. 그게…… 아, 아윽, 중요한 건 아니…… 흐읏, 지만…….”

푹, 하고 백영이 깊게 박아왔다. 홍화의 눈 끝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백영이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열이 올라 다른 때보다 밝은 눈동자가 홍화의 눈을 사냥할 듯이 응시했다. 홍화도 그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좋아, 해요. 좋아……합니다. 아니, 모자라요. ……사, 랑합니다. 내가, ……아……!”

“다시.”

“좋, 아해요. 좋아……. 좋……, 아, 아, 아!”

“계속해. 계속, 홍화야. 계속 말해.”

백영이 홍화의 등을 껴안았다. 홍화의 가슴이 백영의 가슴에 맞닿았다. 하얀 두 다리가 허공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고, 틈 없이 붙은 몸에서 아랫도리만 철벅철벅 부딪쳤다. 목덜미를 깨물고 귓불을 씹으며 백영이 홍화를 터트릴 듯 껴안았다.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홍화의 온몸을 조여대며 계속 말하라고 강요했다. 대사라고 볼 수 없는 낱말들만 울음과 섞여 홍화의 입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사, 랑……읏, 내가…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아마 배소희 씨보다 먼저일 거예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아니, 모자라요. 사랑합니다. 내가.

유백영을.

마지막 이름은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빠져나온 부분 없이 모두 내벽 안으로 파고든 백영이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이미 척척하게 젖은 점막에 뜨끈한 정액이 가득 채워졌다. 홍화를 껴안은 팔뚝에 자잘한 떨림이 일고, 귓가에 붙은 입술에서도 단 숨이 새어 나왔다. 홍화에게도 절정이 찾아왔다. 육체보다도 정신적인 오르가슴이었다.

몇 번이나 추어올리며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홍화의 안에다가 털어 넣고서 백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직한 숨결이 살갗 위를 스치기만 해도 홍화는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다시는.”

정액 나올 길이 막힌 건 여전한지라 홍화가 열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떨고 있을 때, 백영이 슬쩍 상체를 일으켜 홍화를 마주 봤다. 이마를 마주 대고, 코끝을 마주 대고, 입술을 마주 대고 속삭였다.

“다시는 그딴 연기하지 마. 다른 연놈하고 키스하는 거, 안는 거, 손잡는 거, 씨발 썸 타는 거 고백하는 것도 다 하지 마. 받지 마. 찍는다고 해도 내가 다 엎어버릴 거야. 알아들었어?”

“나, 저거……. 제발…….”

눈물이 그득 고이다 못해 관자놀이로 길게 흘러내렸다. 베갯잇이 홍화가 흘린 눈물로 흥건했다. 속눈썹 위아래도, 올려다보는 눈동자도 빗물 고인 듯이 물기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그 눈에서 백영이 시선을 거두지 않고서 입을 맞췄다. 신음을 내지르느라 마르려 했던 혓바닥과 입천장이 도로 축축하게 젖었다.

“이런 키스도 앞으로 나하고만 하는 거야. 섹스도. 나로 모자라면 다른 거라도 같이 박아줄 테니 그냥 만족하고 살아. 이런 얼굴도 눈도 딴 새끼한테 보일 생각 마. ……이홍화, 대답.”

“개……새끼야. 나, 저거, 저거……!”

“대답하면 풀어줄게. 대답부터 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흣……!”

홍화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백영이 은색 막대를 쥐고 뽁 뽑아냈다. 오랫동안 참아온지라 정액이 위로 솟지 못하고 좁다란 주둥이에서 물 새듯 졸졸 흘러나왔다. 백영이 손아귀에 넣고 조몰락거리자 금세 길이 열리고 홍화의 턱 아래까지 흰 정액이 높이도 뿜어져 나왔다. 길게 뿜어져 나와도 모자랐는지 백영의 손마디를 희게 그으며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벌름거리며 정액을 쏟아내는 구멍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백영이 아래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해방감과 탈력이 동시에 찾아와 숨만 쌔근쌔근 몰아쉬던 홍화가 기겁하며 아래를 쳐다봤다. 백영이 흘긋 위를 올려다봤다가, 아직 정액이 이슬처럼 괴인 아랫도리를 단번에 삼켰다.

홍화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오뚝이처럼 벌떡 상체를 세웠다. 아래에 매달린 머리통을 잡아도 배고픈 새끼가 어미 젖 빨듯이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아대는 백영을 밀칠 수가 없었다.

“하지, 하지, 비켜, 그……, 이상, 유백……영!”

아래서 남은 정액이 샘솟으면 백영의 목울대가 꿀렁꿀렁 넘어갔다. 홍화의 엉덩잇살이 손가락 사이로 솟을 정도로 꽉 쥐고 거세게 쭙쭙 빨아대던 백영이, 슬금슬금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더니 네 개를 예고 없이 푹 박아 넣었다. 구멍 안쪽에 고인 정액이 찔꺽거리며 바깥으로 새어 나오고, 홍화의 뺨 위로는 눈물이 빗방울 떨어지듯이 굴러떨어졌다.

“싫어, 싫……. 아, 이 개새끼야…아…-!”

홍화가 발버둥 쳐도 백영의 악력이 몇 수 위였다. 홍화가 머리통이 산 채로 날아가는 감각에 울며불며 백영의 어깨를 밀었다. 아랫도리가 뽑혀 나갈 것만 같고, 불타는 감각이 빨리는 부분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정액은 이미 모조리 쏟아냈다. 더는 내보낼 한 방울도 남지 않았건만, 백영은 핏물이라도 뽑아내겠다는 심산인지 홍화를 제 입안에 가두고 있는 힘껏 굴려댔다.

불알이 쪼그라들다 못해 호두알이 될 것만 같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백영의 어깨 위에 맺혔다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도 아랫도리를 빨려서 뒷골이 지끈한 두통과 요의까지 같이 등골을 후려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영의 입안에 실수할까 봐 홍화가 백영의 등짝을 박박 긁으며 머리카락을 쥐고 잡아당겼다.

“나와, 나, 나와, 나온…….”

푹, 하고 손가락이 젖은 점막 깊숙이 들어왔다. 홍화의 허리가 뒤로 홱 젖혀졌다. 백영이 드디어 입을 떼어줬고, 정액은 죄다 뱉어낸 아랫도리에서 소변도 정액도 아닌 투명한 액체가 위로 팍 솟구치며 뿜어져 나왔다. 백영이 손으로 감싸 쥐어도 손가락 틈으로 색 없는 물이 핏핏 올라왔다.

홍화는 아예 몸을 가눌 정신도 없어 누워서 달달 떨기만 했다. 시트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리며 어떻게든 진정시켜보겠다고 애써봤지만, 꽉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봇물 터진 것처럼 샘솟고 몸의 떨림 역시 멎질 않았다.

사정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절정이 아니었다. 큰불은 꺼졌어도 뒤에 남은 잔불들이 손끝 발끝을 따끔따끔할 정도로 태웠다.

“오줌 마려웠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여기서 이렇게 싸버리면 어떡해, 이홍화.”

백영이 입술에서 미처 닦아내지 못한 정액을 엄지로 훔쳐내며 홍화의 뱃가죽 위에 흩어진 액체를 더듬었다. 지린내 나지 않는 그 액체가 소변이 아니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놀리려고 그랬다. 제 몸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모르는 홍화가 잘게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과 어깨와 온몸 전체가 불타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백영에게 그 손 치우라고 욕할 기운도 없다. 부끄러워서 옆에 쥐구멍이 있으면 거기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나이 먹고, 다른 사람도 아닌 유백영 앞에서 실례를 저지르다니 그 수치심이 영혼마저 다 태우고도 남았다.

홍화가 떨리는 손으로 시트를 잡아 몸을 감싸고 간신히 상체를 세웠다. 유백영에게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다. 유백영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거기가 설령 욕을 들입다 처먹었던 화보 촬영장이라도 좋았다.

“어디 가려고.”

그러나 떨림이 멎지 않은 몸을 가지고 도망가자니 토끼 앞에 거북이요, 개미 떼 앞에 달팽이가 따로 없었다. 유백영이 홍화의 옆구리에 두 팔을 두르고 품에 끌어안았다.

“나, 오늘 너랑 안 자. 꺼져. 따로 잘…,”

“이홍화. 나 오늘 잠 안 잔다고 했잖아.”

잘 익은 토마토 같던 홍화의 낯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게 진심이었냐며, 홍화가 이제 하얗게 질려 유백영을 쳐다봤다. 그 뺨에, 눈물이 아직도 고인 눈가에 입 맞추고서 백영이 홍화의 오금에 팔을 걸었다. 아기 오줌 누이듯이 홍화를 들어 안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혀놓고, 귓바퀴를 잇새로 잘근잘근 씹었다.

“물론, 너도 오늘 못 자.”

시작과 끝이 같았다. 이 역시 벌겋게 달아올랐던 홍화의 뺨이 하얗게 가라앉는 선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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