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쫓아와 목덜미를 잡고 짤짤 흔들 것 같던 유백영은 의외로 홍화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인터넷에서 ‘<라스트로드>, 살인적인 촬영 일정’, ‘휴일 없는 <라스트로드> 촬영에 잔뜩 야윈 규리나’ 따위의 뉴스를 보고 이유를 알았다. 단순히 저 바빠서 괴롭힘을 중단한 것이었다.
평화로운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어느새 드라마 방영일이 코앞이었다. 홍화는 일부러 제작발표회도 찾아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백영의 잘생긴 낯짝을 쳐다보기 싫었다. 거리를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커다란 빌딩의 광고판에서 우연히 보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방영 첫날, 홍화는 다 같이 모여서 보자는 선배들의 제안을 물리고 일찍 집에 돌아왔다. 명식과 윤진이 특히 서운해했지만 같이 보다가는 민망해 죽을지도 몰랐다.
거금을 들여 치킨과 맥주도 품에 안고 왔다. 티브이 앞에 상을 놓고 그 위에 치킨과 맥주를 올려놓았다. 홍화는 두 손을 겹쳐 이마에 대고 티브이를 향해 공손하게 큰절을 올렸다. 돼지머리는 아니나 홍화 나름의 드라마의 안녕과 흥행을 기원하는 고사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광고가 끝나길 기다렸다. 광고에서 유백영의 얼굴이 두어 번이나 지나간 다음에야 드라마가 시작했다. 홍화가 손을 모아 이불을 그러쥐고 침을 꼴깍 삼켰다. 화면의 새파란 빛이 홍화의 두 눈에 안광처럼 스미었다.
홍화는 치킨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맥주도 그대로였다. 드라마가 끝나고 광고가 흘러나오는데도 홍화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을 쩍 벌리고, 붕어 같은 눈을 끔벅이며, 감격에 젖어 화면만을 응시했다.
새벽 추위에 달달 떨며 외운 대사 부분도,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부분도 댕강댕강 잘려나갔지만 괜찮았다. 자연스러운 편집에 힘입어 피디가 강조한 대로 어느 동네 덜떨어진 멍청이처럼 보일 뿐, 살인을 저지를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크흐…….”
그래, 이 느낌이었지.
뮤직비디오 때를 제외하고 명실공히 첫 티브이 출연이었다. 그마저도 하도 오래전이라 티브이에 나오는 기분이 어떤지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맥주 한 모금 들이켜지 않았는데도 목구멍과 식도를 탄산이 훑고 간 듯하다. 흥분이 뱃속에 휘몰아쳤다. 어깨며 손이 가볍게 바르르 떨렸다. 진정하려고 이불 속을 파고들어 몸을 둥글게 말았다.
띠링, 띠링, 핸드폰도 난리가 났다. 화면에 연극단원들이 보내는 문자가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전화벨도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 수신 거부를 누를까 하다가, 홍화를 눈여겨보고 같이 영화나 찍어보자고 제안할 감독일지도 몰라 얼른 받았다.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기에 흠, 흠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라스트로드> 정호 역을 맡은 이홍화입니다.”
―끊지 마.
낮은 목소리에 바로 핸드폰을 내던질 뻔했다. 아직 할부의 노예로 묶여 있는 몸이라 홍화가 기겁을 하며 두 손으로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화면을 응시했다. 여전히 통화가 이어지고 있다. 하늘로 솟구쳤던 기분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봤냐.
홍화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얼른 응, 하고 대답했다.
―넌 실물보다 화면이 낫더라. 실물은 존나 못생겼는데.
“누가 할 소릴……. 고작 그거 말하려고 전화했냐?”
―아니, 봤는지 궁금해서.
“안 볼 리가…….”
―그럼 됐어. 너 아직 수신 차단 안 풀었더라. 목 닦고 기다려. 촬영 끝나면 네 목부터 따러 갈 거니까.
“오지 마, 이 개새, 야, 야!”
홍화가 말을 채 뱉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바탕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을 향해 악을 써봤자 헛수고였다.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애먼 핸드폰만 노려봤다. 이홍화 보고 있느냐며, 얼른 답장을 하라고 재촉하는 단원들의 문자가 줄을 이어 떠올랐다.
처음에 찾아오겠단 협박을 받았을 때는 잠결에라도 찾아올까 봐 무서웠다. 두 번째는 아니었다. 전보다 협박이 심해졌는데도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죽이러 온다는데도 안 무섭다니. 홍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궁둥이를 굼실거려 상 앞에 앉았다.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가장 보기 싫은 인물이었다. 홍화 인생을 통틀어 철천지원수가 있다면 당연히 유백영이었다. 안하무인에 막무가내고, 첫인상과 만남도 거지 같은 데다가 취미가 협박질인 인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넌 실물보다 화면이 낫더라.」
“……참 내.”
그간 오디션을 볼 때마다 카메라에 비치는 얼굴이 실물과 너무 다르다고, 인상이 안 좋다고 고개를 젓던 면접관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유백영의 말이 칭찬처럼 들리다니. 귀에 이상이 생겼나 싶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도 파봤다. 고막 안쪽에서 유백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가 빈 머릿속을 둥실둥실 떠다녔다. 욕과 칭찬 사이, 자세히 따지자면 욕에 더 가까운 그 말이 간지러웠다.
홍화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닭 다리를 손에 쥐었다. 누글누글해진 튀김옷도, 노랗게 굳은 기름이 낀 살덩이도 이상하게 맛있었다. 식은 치킨이 맛있어서 자꾸만 입꼬리가 삐죽삐죽 솟았다.
치킨이 맛있어서 그런 것이다. 웃음이 새는 이유는 딱 그뿐이라고, 홍화가 속으로 되뇌었다.
케이블 드라마 특성상 큰 시청률은 기대하지 않았으나, 유백영이라는 흥행 보증 수표가 떡하니 주연을 맡아서 그랬는지 첫 방영부터 시청률이 순풍을 탔다. 이미 팬층을 확보한 공중파 드라마와 같은 시간대 방영이었음에도 시청률이 기대 이상으로 나와 촬영팀은 물론, 홍화가 속해 있는 단역들 채팅방도 난리가 났다. 이대로 큰 이변이 없다면 포상 휴가까지 기대할 만한 인기였다.
홍화도 들뜨기는 다른 이들과 똑같았다. 더군다나 2화까지 방영하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홍화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라스트로드’ 충격 반전, 범인은…….]
[‘라스트로드’ 동네 청년 정호, 그의 놀라운 정체는…….]
눈으로 기사를 훑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순박한 청년이 가면을 벗은 듯 바뀌는 장면이 압권이었다고, 그 덕에 드라마에 빠졌다는 누리꾼들의 반응이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구박을 일삼던 단원들도 이홍화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냐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았다.
바로 이거야.
하루하루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기분은 이미 해외에 진출하는 인기 배우 못지않았다.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유명한 기획사가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하자고 하면 어쩌지, 광고는 무슨 광고를 찍을까. 돈이 들어오면 일단 소고기부터 사 먹어야지. 복권에 당첨되면 뭘 할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홍화는 매일 히죽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난 너 잘될 줄 알았다.”
명식이 어깨를 토닥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홍화가 혀엉, 끝자락을 늘려 부르며 명식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너 말이다. 흠, 흠. 나 매니저로 쓴다는 약속, 안 잊었지?”
명식이 바로 본론부터 내뱉었다. 곰 같은 명식에게 기대 한참 애교를 떨던 홍화가 고개를 발딱 들었다. 기억이야 하고 있었다. 명식이 얼마나 성심성의껏 저를 보필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명식이 원한다면야, 그 자리는 당연히 명식 것이었다.
다만.
홍화는 단꿈에서 빠져나와 냉정하게 판단했다. 저가 매니저 월급을 꼬박꼬박 줄 수 있는 고정 스케줄이 있거나, 이름 있는 소속사에 들어갔으면 모를까 지금은 우연히 맡은 단역이 평가를 좀 좋게 받는 나부랭이였다. 명식을 또 그런 고생길에 밀어 넣기는 홍화의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형, 나 아직 그렇게 인기 많지 않아. 전처럼 고생할 건데 그래도 괜찮겠어?”
“고생 한두 번 해보냐. 시켜만 줘라.”
명식이 저만 믿으라며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홍화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명식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명식은 본인이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듯 홍화의 프로필을 온갖 곳에 뿌리고 다녔다. 어느 이름 없는 인터넷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들고 오는가 하면, 연락 온 소속사 중 그나마 괜찮은 곳을 골라 홍화에게 내밀기도 했다. 계약 사항이 노예 취급이나 마찬가지라 모두 고사했지만 말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드라마 종방일이었다. 케이블 드라마치고는 놀라운 시청률을 유지한 데다가, 마지막 방송은 특별히 십 분이 추가되었다. 포상 휴가 이야기는 종영하기 며칠 전부터 흘러나왔다. 홍화에게도 갈 의향이 있냐고 묻는 전화가 왔다.
스케줄은 문제없었다. 수중에 돈이 없음이 문제였다. 해외로 간다는데 홍화의 주머니에는 여권도, 돈도 없었다. 전보다 금전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라면 먹을 거 도시락 사 먹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때는 스케줄이 있어서요.”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했다. 촬영 동안 홍화와 친해졌던 스태프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그러냐고 대답하고는, 휴가는 못 가도 종방연은 꼭 오라고 거듭 당부했다.
―뷔페에서 하니까 와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가. 마지막이니까 드라마도 같이 보구. 홍화 씨한테 도움 많이 받아서 내가 쏴야 하는데, 그건 다음에 하고 일단은 종방연에 얼굴이라도 보자고.
스태프 목소리가 절절하다. 기자들도 오는 자리에 빠지면 안 된다며 명식이 부추겼다. 유백영이 꺼려졌지만 맛있는 한 끼 공짜로 해결한다는데, 게다가 얼굴 익은 단역들도 죄다 간다는데 저 혼자 빠지기엔 영 모양이 좋지 않았다. 홍화가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배우들 모임이다.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면 좋은 일감이 떨어질지도 모르잖는가. 홍화가 옷장을 엉망으로 헤집으며 그나마 괜찮은 옷들을 몸에 대봤다. 거울 속 홍화의 양 볼이 코스모스 꽃잎처럼 발그레했다.
1차 종방연은 공개로 진행해 입구부터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레드 카펫이 깔린 길도 아니건만 혹 기자가 저를 찍을까 봐 홍화가 빳빳하게 목을 굳히고 걸었다. 안타깝게도 홍화는 기자들의 표적이 아니었고, 관심은 뒤따라 차에서 내린 다른 배우가 가져갔다. 맵시 좋게 차려입은 모습이 그 역시 대기한 기자들을 의식한 듯했다.
홍화가 씁쓸하게 웃고는 안으로 향했다. 홀에 이미 스태프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연회장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바깥만 돌고 있기에, 홍화가 의아해하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저쪽에서 홍화에게 연락한 스태프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사람이 너무 많네. 홍화 씨 찾느라 힘들었어.”
“전화 드릴 걸 그랬네요. 근데, 왜 다들 안 들어가고 여기 있대요?”
“아, 홍화 씨 몰랐구나. 스태프는 안에 못 들어가. 배우들만 들어가지. 홍화 씨도 얼른 들어가 봐. 나올 때 나 떡 하나만 가져다줘. 배고파 죽겠다.”
스태프가 배를 문지르며 턱으로 연회장을 가리켰다. 말 그대로 스태프들은 연회장 안쪽만 흘긋거릴 뿐 들어가지는 않았다. 간간이 배우로 보이는 이들만 허락받은 것처럼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밖에 있는 스태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님 2차 갈 때 같이 가. 홍화 씨도 좀 늦게 와서 밥 먹을 시간 없을걸.”
2차도 있냐고 물으려는데, 스태프가 시계를 보고 늦었다며 홍화의 등을 떠밀었다. 홍화가 인파에 밀려 간신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혔다.
뷔페라 해서 잔뜩 먹을 줄 알고 점심도 적게 먹고 왔거늘, 음식은 멀리 있고 단상은 가까웠다. 이미 사회자가 임직원 누구의 말씀이 있겠다면서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꼬르륵 우는 배를 붙들고 홍화가 멀리 있는 음식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봤다.
빨리 끝나면 좋을 텐데 말이 길다. 지루해서 하품이 다 나왔다. 밥이고 뭐고 당장 떠나고 싶은 마당에, 저쪽 단상 근처에서 유백영도 발견했다. 언제부터인지, 이 사람 많은 곳에서도 정확히 홍화를 보고 있었다.
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거겠지. 홍화가 고개를 휘휘 돌리며 저 아닌 다른 누가 곁에 있는지 확인했다. 일부러 구석에 서 있는지라 홍화 주변만 한산했다. 설마. 홍화가 백영을 보며 검지로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백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보고 있는 게 맞구나.
제 혓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려고 했던 미친놈이 절 보고 있었구나. 홍화가 소름이 돋은 팔뚝을 비비며 백영의 시선을 피했다. 2차는 포기하고 그냥 가는 게 신상에 이로울 듯했다.
케이크 커팅에 유백영과 여배우가 올라갔다. 감독과 셋이 손을 잡고 웃는 얼굴로 커팅을 마쳤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홍화도 성의껏 박수를 보냈다. 유백영 얼굴은 보기 싫어 일부러 여배우 얼굴만 주야장천 바라봤다.
스태프 말이 옳았다. 음식 먹을 시간이 없었다. 북새통을 헤집어 아는 얼굴들과 인사하고 몇 마디 나누니 드라마가 시작할 시간이었고, 스태프들도 우르르 몰려 들어와 다 같이 마지막 방송을 시청했다. 고로 밥은커녕 과일 한 조각 주워 먹을 틈이 없었다.
드라마를 다 본 뒤에야 첫 번째 종방연이 끝났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친한 스태프가 2차는 고깃집이라고 귀띔했다. 유백영만 안 가면 딱 좋은데. 홍화가 내심 기대하며 백영 쪽을 흘긋거렸다. 사진 요청이 쇄도해 그쪽만 사람이 드글드글 들끓었다. 몇 장 인심 좋게 찍어주다가 백영이 홍화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홍화가 질색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자 사연 모르는 스태프가 홍화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홍화 씨도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어딜 가. 2차 가자, 2차.”
네 목부터 따겠다는 협박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얼른 도망치고 싶건만 옷깃을 쥔 손힘이 천하장사급이다. 홍화가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에 백영이 스태프 옆에 섰다. 굴 끝까지 주둥이를 밀어 넣고 기어이 토끼 뒷다리를 낚아챈 여우같이, 백영이 씩 웃으며 홍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랜만이에요.”
스태프의 낯이 기쁘게 달궈진 반면, 홍화의 낯빛은 푸르스름하게 식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로봇처럼 돌리며 백영을 외면했다. 백영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홍화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팔뚝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저기, 사, 사진 좀…….”
스태프가 용기를 쥐어 짜냈다. 백영이 흔쾌히 허락했다. 홍화의 어깨는 그대로 잡은 채, 스태프가 치켜든 카메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홍화 씨도 같이 찍어요.”
스태프의 요청에 백영이 손아귀에 힘을 줘 홍화를 끌어당겼다. 팔뚝에 손자국을 남길 듯이 힘이 강했다. 홍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스태프의 카메라를 쳐다봤다. 찰칵, 소리 날 때까지 대기하는 시간이 길디길었다.
“둘이 친한지 몰랐네요. 홍화 씨, 왜 이야기 안 했어.”
“하하, 홍화 씨가 제 이야기 안 했어요? 우리 번호도 교환한 사인데. 서운하네.”
안 친하니 이야길 안 하지. 꿀 먹어 입술 붙은 사람처럼 차마 말로 뱉지 못하고 홍화 혼자 끙끙 앓았다. 백영의 팔에서 벗어나고 싶건만 놓아주질 않는다.
“백영 씨도 2차 가요?”
“물론 가야죠. 다른 분들 다 가시는데 빠지면 섭하지.”
제발 가지 말라는 홍화의 촛불 같던 바람이 백영의 입김에 훅 꺼졌다. 홍화가 고개를 푹 숙이고 실망하자 백영이 달래듯 토닥였다. 홍화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스태프와 백영의 손에 잡혀 2차까지 질질 끌려갔다. 식당이 근처에 있어 몰래 도망칠 기회가 없었다. 홍화는 도살장 끌려가는 심정으로 상 앞에 앉았다. 옆자리는 당연하다는 듯 유백영이 차지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통은 그냥 고깃집에서 끝내거든. 이번 드라마는 완전 대박 나서 연회장까지 빌려 한 거지! 이게 다 누구 덕이겠어, 우리 유백영 씨 덕이지!”
저쪽에서 고기가 익기 전에 술부터 들이켠 스태프가 호쾌하게 떠들었다. 다들 맞장구치며 유백영을 찬양했다. 옆에 있던 백영이 이 모든 게 고생한 스태프분들과 다른 배우들 덕이라며 겸양을 떨었다. 가식이 하늘을 찌르기는. 홍화 혼자 술잔으로 일그러진 입가를 가렸다.
고기나 먹자.
불판에서 소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갔다. 어쩌다 돈이 들어와도 소고기는 꿈도 못 꿨다. 큰맘을 먹더라도 삼겹살이었지, 소고기가 든 팩은 들었다가 놓기를 수 번 반복한 끝에 포기하고 집에 간 적이 번번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저런 질 좋은 소고기를 먹으랴. 홍화가 백영 쪽으로는 시선 한번 안 주고 고기에 열을 올렸다.
홍화의 앞 접시에 고기 몇 점이 툭툭 떨어졌다. 집게를 따라 시선을 올리니 백영이 온화하게 내려다봤다.
“많이 드세요.”
삼키려던 고기가 컥, 하고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홍화가 당황해 쿨럭거리자 백영이 또 친절하게 맥주 담긴 컵을 건넸다. 맞은편 멀리서 백영 쪽을 흘긋대던 스태프가 홍화가 부럽다는 듯 힝힝 콧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백영 씨 옆자리에 앉을 걸 그랬어요. 홍화 씨 부럽다.”
그럼 자리 바꿉시다. 홍화가 기침하느라 말을 못 뱉자 백영이 홍화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홍화가 손길을 피해 몸을 돌리며 얼른 맥주에 입을 댔다. 잔을 모두 비우자 백영이 빈 잔에다 솜씨 좋게 맥주와 소주를 섞어 건넸다. 제조하는 손길이 워낙 자연스러워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더 마셔요.”
홍화가 거절하려 했으나 다 같이 짠, 하자는 분위기에 휩쓸려 다음 잔도 모조리 비웠다. 비우기 무섭게 술이 다시 차올랐다. 백영이 주고 나서는 스태프가, 스태프가 주고 나서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단역이 와서 잔을 채웠다. 저 혼자 있으면 사람들이 이리 많이 오지는 않을 텐데, 유백영의 옆이라 그런지 계속 새로운 사람이 와서 술잔을 채우고 갔다. 맥주만 붓고 가도 유백영이 그 위에 소주를 부어 폭탄주로 만들었다.
고기 먹으랴, 술 챙기랴 홍화는 입이 바빴다. 사람들 장단에 맞춰주겠다고 한 잔씩 들이켜다 보니 주위에 빈 병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아무리 극단의 술고래들 사이에서 주량을 키웠다지만, 폭탄주를 연거푸 들이붓고도 이겨낼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어지러워…….”
눈앞이 어찔해 가까운 데 보이는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명식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튼튼하고 너른 어깨였다. 술기운에 헷갈린 홍화가 명식에게 자주 그랬듯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보통이라면 술을 얼마나 처마신 거냐며 타박이 돌아왔겠으나, 어깨의 주인은 움찔하고 말았다.
“홍화 씨가 많이 취했나 봐요.”
“……그러게요.”
술자리가 슬슬 끝나갔다. 아직 아쉬움이 남은 이들은 3차로 빠지고, 집에 갈 이들은 안녕을 고하면 그만이었다. 백영이 옷을 걸쳐 입고는 홍화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홍화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움직이다가, 고개를 팍팍 휘젓고 백영을 벗어나려 했다.
“내가, 걸을 수 있어!”
‘있어’보다 ‘이쒀’에 가까운 혀 꼬인 발음이었다.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홍화가 끙, 거리며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홍화와 친한 스태프가 백영의 눈치를 보며 얼른 부축하려고 다가갔다. 백영이 웃으며 홍화의 옆구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제법 무게가 나갈 텐데도 깃털 드는 것처럼 훌쩍 든다. 홍화가 비틀거리자 백영이 무척이나 다정하게 제 품을 빌려주었다. 널찍한 품이 홍화에게 꼭 맞춤처럼 들어맞았다.
“제가 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백영이 선하게 웃으며 홍화를 다독였다.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홍화가 가슴팍에 볼을 비비며 그억, 그억 좀비 같은 소릴 냈다. 벗어나려는지 파고들려는 건지 모를 몸짓으로 팔을 휘휘 저었다. 힘이 없어 백영의 옷깃도 못 잡고 바닥으로 자꾸만 떨어졌다.
친하다니까 알아서 하겠지. 저 정도로 만취한 사람 뒤치다꺼리하는 것보다 귀찮은 일이 없다. 스태프가 번거로운 짐을 덜었다는 듯 냉큼 물러났다.
홍화가 미약한 반항을 멈추고 고개를 백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3차 갈 거야…….”
“3차는 무슨.”
백영이 픽 코웃음 쳤다. 낮은 목소리라 홍화의 귀에만 들렸다. 홍화는 저가 누구의 품에서 술주정을 부리는지 알고 싶어 고개를 들었다. 선 굵은 턱만 보였다. 얼굴을 보려고 손으로 볼을 쥐려는데, 허공에서 손이 잡혔다.
“저희도 이만 가볼게요.”
뭔지 몰라도 헤어지는 상황인가보다 싶어 홍화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옆구리를 감고 있는 팔에 붙들려 흐물흐물한 해파리처럼 끌려갔다.
“……토할 거 같아.”
홍화가 백영을 밀고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한동안 앉아 숨을 골라도 속이 메슥거렸다. 어쩔 수 없이 전봇대를 붙들고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왝왝 소리를 내도 꽉 막힌 속은 뚫리지 않았다.
머리도 어지럽고 배 속도 엉망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토해버리는 게 나아서, 손가락을 입안 깊숙이 넣고 혀를 꾹 눌렀다. 구역질만 거푸 터졌다.
“좀……, 등 좀 두드려봐.”
홍화가 눈물 그득 고인 눈으로 백영에게 호소했다. 얌전히 서서 기다려주던 백영이 쯧, 혀를 차고 홍화의 등을 두드렸다. 제 딴에는 살살 치는데, 손바닥이 솥뚜껑만 해 한 대 맞을 때마다 홍화의 몸이 가랑잎처럼 잘게 흔들렸다.
홍화가 토해내는 데 실패하고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발갛게 익은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퐁퐁 솟아났다. 그 얼굴로 백영을 올려다보며 무어가 그리 서러운지 엉엉 소리 내서 울다가 두 팔에 고개를 묻었다.
“참……, 가지가지 한다.”
옆에서 백영이 혀를 차도 홍화는 제 답답한 속을 가라앉히기에 급급했다. 나오라는 구토는 안 나오고 눈물만 한 줄기, 두 줄기 또르르 떨어졌다.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두드려도 체기도 멀미도 그대로였다.
“토하고 싶어…….”
그때도 술 마실 때 이랬나. 백영이 기억을 더듬으며 홍화를 일으켜 세웠다. 뱃멀미하는 사람처럼 헛구역질만 해대는 홍화의 볼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붕어처럼 뻐끔대는 홍화의 입에 망설임 없이 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질퍽거리는 혓바닥 위를 긁고, 입천장을 지문으로 쓱 긁다가 안쪽 깊숙이까지 박았다. 말랑거리는 혓바닥이 손가락을 뱉어내려고 뱀장어처럼 꿈틀거려 볼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홍화가 손목을 잡고 말리건 말건, 백영은 두툼한 검지와 중지를 목구멍에 쑤셔 박을 것처럼 깊이 넣고서 꿈틀대는 혓바닥 깊숙한 곳을 내리눌렀다.
“욱-!”
홍화가 있는 힘을 다해 백영을 밀쳤다. 백영의 손가락이 흠뻑 젖어서 홍화의 입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홍화가 입을 틀어막고 전봇대를 부여잡았다. 속을 틀어막고 있던 것이 주르륵 쏟아졌다.
한참을 게워낸 홍화가 백영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도와달라는 게 등 두드려달라는 거였지, 입에다가 손가락 박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줬더니 왜 그렇게 쳐다봐.”
백영이 손수건으로 젖은 손가락을 꼼꼼히 닦아냈다. 손수건은 근처 쓰레기더미에 미련 없이 버렸다. 홍화가 고맙다고는 차마 말 못 하고 혀로 아릿한 입 끝을 할짝거렸다. 백영의 손마디가 긁어 찢어졌는지 짭짤한 피 맛이 났다.
힘이 쭉 빠진 홍화가 근처 난간에 걸터앉았다. 입에 토사물 맛이 남아 고개를 돌리고 안 보이는 구석에 퉤퉤 침을 뱉어댔다. 술기운에 열이 나야 정상인데, 코끝에 닿는 바람이 얼음을 품은 듯해 몸이 떨렸다. 옷깃을 여미며 몸을 웅크렸다.
잔뜩 토해내고 나니 취기가 눈곱만큼 가셨다. 홍화는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치고 허리를 폈다. 완전히 깨지는 않아도 이 정도라면 알아서 집까지 찾아갈 수는 있었다.
홍화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서로 인사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다. 고맙다는 말도 입이 찢어졌으니 못 하겠다.
“어디 가.”
백영이 어깨를 잡아채 강제로 돌아보았다. 캡 모자에 안경에 턱을 가린 마스크까지, 누가 연예인 아니랄까 봐 완벽한 무장이었다. 꽁꽁 싸매도 유백영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볼일 끝났는데, 왜.”
“3차 가야지.”
고깃집에서 나올 때 기억이 희미해 3차까지 이어지는 줄도 몰랐다.
“너도 가냐?”
“아니.”
“……어디서 하는데?”
유백영이 안 간다는 이야기에 홍화의 귀가 번뜩 뜨였다. 그가 신경 쓰여 다른 단역들과는 말 한마디 못 나눴다. 술기운이 훅 날아갔다. 그만 없다면 술을 궤짝으로 더 들이부어도 좋았다.
“몰라.”
“데려다주는 길 아니었어?”
홍화가 순진하게 물었다.
“아니. 넌 나랑 가야지.”
“내가 왜?”
“소주 두 병.”
“이 미친…….”
홍화가 욕을 하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유백영이 뻔뻔하게 빨리 갚으라고 요구했다. 이참에 관계 정리를 확실하게 하자 싶어, 홍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편의점을 찾았다.
“너, 여기서 딱 기다려.”
유백영이 대답 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허락임을 알고 홍화가 잽싸게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숙취 음료부터 단번에 마시고 소주 두 병과 그때 주워 먹던 과자―정확하지는 않지만―도 사서 나왔다.
백영이 마침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 있었다. 홍화가 그 앞까지 척척 걸어가 봉투를 내밀었다.
“자. 이걸로 빚은 끝이다. 이제 연락하지 마.”
백영이 봉투를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빤히 내려 보기만 했다. 홍화가 백영의 손을 잡아 봉투를 직접 쥐여줬다. 백영이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고 도로 홍화에게 건넸다.
“같이 마셔야지. 난 같이 마셔줬잖아.”
“내가 미쳤냐.”
“그럼 도로 가져가든가. 안 가져가도 상관은 없어. 빚은 안 갚은 걸로 하면 되니까.”
완전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이대로 무시하고 가면 또 유백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게 분명했다. 결정을 내린 홍화가 유백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봉투에서 소주를 꺼냈다. 이대로 들이부으면 또 한 번 잔뜩 토해낼 수도 있으나 상관없었다. 지긋지긋한 유백영을 떨쳐내는 게 먼저였다.
유백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소주병 주둥이를 입에 댔다. 꼴깍거리며 삼 분의 일까지는 들이부었는데 더 마시려니 목구멍이 열리지 않았다. 안 마시면 죽을 거란 각오로 꼴깍꼴깍 삼켰다. 좀 전에 마신 숙취 음료를 희망 삼아 소주병의 반까지는 비웠다.
이쯤 하면 말릴 법도 한데, 유백영은 홍화가 어디까지 하나 구경하려는 듯 묵묵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오기가 생긴 홍화가 나머지의 반은 턱 밑으로 줄줄 흘리며 힘겹게 끝까지 비웠다.
끄으윽, 터진 긴 트림을 손등으로 숨기고 빈 병을 쓰레기더미에 던졌다. 두 번째 병을 꺼내 손에 쥐기는 했으나 심히 꺼려졌다. 두 병 연속 마셨다간 단순히 구토에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쓰러진다고 저치가 따뜻한 곳에 데려다 놓을 것 같진 않고. 이런 날에 바깥에서 방치됐다가는 최소한 동사다. 영안실에서 흰 천을 덮고 누워있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홍화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왜? 더 마시지. 재밌네.”
“…….”
뚜껑을 따는 손이 버들버들 떨렸다. 숙취 음료를 마셔도 깡 소주를 이겨내기는 무리였다. 질 수는 없어서 힘을 내 뚜껑을 따고 입을 대려는데 백영이 빼앗아 갔다. 홍화가 어, 하는 사이에 병 주둥이를 입술에 대고 홍화가 그랬듯이 꿀꺽꿀꺽 삼켰다. 마시는 게 소주가 아니라 얼음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아래로 울렁이는 목울대가 시원시원했다.
시선을 홍화에게 꽂은 채, 백영이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소주병을 비웠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빈 소주병을 던졌다. 산산조각 나 깨지는 소리가 요란한데도 둘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가는 눈빛에 색이 있다면, 불꽃 튄 전류처럼 새파랬을 터였다.
“불쌍해서 봐줬다. 이제 한 병 남았어.”
기 싸움이었다. 홍화도 지지 않고 노려봤다. 흔들림 없이 꽂히는 시선에 홍화의 동공이 점차 불안하게 흔들렸다. 뭔 놈의 눈빛이 저리도 서늘하고 매서운지, 쳐다보고 있자니 이 추운 날에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맺혔다.
……괴물 같은 새끼. 저놈도 만만치 않게 마셨을 텐데.
질린 홍화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승리를 거머쥔 유백영이 홍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홍화가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꽁꽁 옭아맨 포승줄이었다.
결국 소주며 맥주며 바리바리 싸 들고 근처 모텔로 향했다. 인근 술집에서 술 마시는 걸 들켰다간 3차 간 다른 이들이 안 좋게 볼 거라는 백영의 주장 때문이었다.
과거의 원흉과 단둘이 밀폐된 장소에 간다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원수 같은 빚을 털어버리려 홍화는 눈을 딱 감고 모텔에 발을 들였다. 어쨌거나 미친 유백영이 빚을 다 갚았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홍화가 죄인이고 노예였다.
바닥에 안주며 술병을 늘어놓고 부어라 마셔라 했다. 술고래라면 종류 가리지 않고 많이 봐왔으나, 백영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술고래였다. 온갖 술을 때려 부어도 낯빛이 멀쩡했다. 취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미친 거 아냐. 너 대체 주량이 얼마나 돼.”
“취해본 적 없어서 몰라.”
“얼마나 마셔봤는데.”
“안 세봤어. 보통 궤짝으로 놓고 마셔서.”
질리지도 않는지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백영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기 싸움은 졌지만 술로는 지기 싫어 홍화도 잔에 반쯤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놈의 오기 때문에 싫은 일 참 많이 겪었으면서, 호승심에 눈이 멀어 홍화가 부러 빈 잔 가득 술을 채워 마셨다. 간신히 가라앉힌 술기운이 빈 배 속에서 휘몰아쳤다.
“야, 너 냄새 나. 씻어.”
백영이 침대에 등을 기대며 욕실을 가리켰다. 홍화가 옷자락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들숨 날숨 모두 술 냄새만 풍겼다.
“별 냄새 안 나는데.”
“아까 토한 거 묻었어.”
어디에 묻었는지 몰라 옷자락을 들춰 봤다. 무릎께와 발목에 백영이 지적한 대로 토사물이 묻어있었다. 아까 튄 모양이라고, 홍화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존나 더러워.”
백영이 닿는 것도 싫다는 듯 몸을 뒤로 물렸다. 사내새끼가 더럽게 깔끔 떤다며 홍화가 비죽거렸다. 홍화가 죽치고 앉아있으려 하자, 백영이 몸을 일으키더니 홍화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취기가 올라 반쯤 해롱거리는 홍화를 질질 끌고 가 욕실에 처박았다.
“아, 씨발, 뭐 하자는 짓……. 윽!”
백영이 말없이 샤워기를 잡고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욕실 구석에 웅크린 홍화 위로 쏟아졌다. 홍화가 물을 피하려고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열심히 두 팔과 다리를 놀려도 물줄기는 멈추지 않았다. 찬물이 뜨끈한 물로 바뀔 때까지, 흠뻑 젖은 홍화의 몸에서 흰 김이 올라올 때까지 물고문은 계속되었다.
“……미친 새끼.”
홍화가 질린 얼굴로 중얼댔다. 찬기가 물러나니 물로 얻어맞고 있어도 살 만했다. 젖은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고 홍화가 올려다보았다. 사실, 백영을 밀치고 욕실에서 도망칠 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팔다리가 술 먹은 솜, 물먹은 솜이었다.
백영이 샤워기를 걸이에 꽂아두고 홍화 앞에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물줄기가 백영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소낙비처럼 머리카락을 적시고 콧날을, 볼을, 입술을, 턱선을, 그리고 목선과 어깨를 적셨다. 젖은 손가락이 홍화의 눈 밑을 스쳤다가 목덜미로, 머리카락 속으로 밀고 들어와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코끝이 맞닿았다. 입술은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물방울 어린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렸다가 위를 향했다. 커피색 눈동자에 홍화가 있었다. 가련하고, 초라하게.
“……키스는 하지 말자.”
언젠가 백영이 했던 말이었다. 홍화 저가 했던 대답도 기억이 났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술병을 늘어놓는 그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한 일이었다. 싫어도 결국엔 일어날 일, 싫다고 말해도 끝내 하겠다는 말을 쥐어짜낼 유백영. 힘껏 밀어봤자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소주 두 병은 진짜 목적을 덮으려는 가벼운 위장일 뿐이다.
한번 대주면 그만 귀찮게 굴겠지.
유백영이 찔러보며 과거를 들춰대는 데 신물이 났다. 잊고 싶은 기억을 억지로 잡아 올리는 것도, 떠올릴 때마다 자괴감이 드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 뭣보다 모기처럼 앵앵대며 신경을 거슬리는 유백영을 털어낼 수만 있다면, 하룻밤 따위는 똥개에게 적선하듯 먹고 떨어지라고 줘버릴 수 있었다.
어차피 처음도 아닌데.
술김에 저질렀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도 줄 수 있지 않나. 예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홍화가 눈을 깜박이며 물기를 털어냈다. 전처럼 밤을 보내도 비참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피차 존나 역겹다.”
백영이 대답했다. 홍화가 돌려줬던 그 답이었다.
∞ ∞ ∞
이랬나. 이랬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젖은 몸뚱이에 들러붙은 옷을 찢듯이 벗겨내고 백영이 홍화를 침대 위로 던졌다. 입을 맞추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더니 대신에 이를 세우고 물어뜯었다. 홍화의 귓불에, 목덜미에, 어깨에, 팔뚝에 개 이빨 자국처럼 벌건 상흔이 남았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시뻘건 피멍이 되리라.
백영은 밑에 깔린 게 사람이 아닌 고기라도 되는 듯 야금야금 물고 씹었다. 홍화가 죽을 것처럼 끙끙거리며 백영의 머리를 밀었다. 물지 말라고 소릴 질렀다가 두껍고 무자비한 손바닥에 입이 틀어 막혔다.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흐으으…….”
숨소리도 새지 못하게 입을 꽉 짓누르며 가슴팍에도 혀끝을 댔다. 뾰족하게 날 선 혀끝이 세밀한 붓처럼 흰 가슴팍을 돌아다니다가, 새알콩처럼 자그마한 젖꼭지 위를 맴돌았다. 오돌토돌한 주변을 넓적한 혓바닥으로 쓸며 젖꼭지도 함께 삼켰다. 쭈읍, 하고 살점을 잘라다가 삼키는 소리가 났다.
“……!”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홍화가 소리 없는 비명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정말 떨어진 줄 알고 홍화가 겁에 질려서 내려다봤다. 열이 올라 발긋해진 입술에서 빠져나온 젖꼭지가 아직 제자리에 붙어있었다. 쥐눈이콩 크기가 팥알 색에 팥알 크기가 됐다. 그 위에서 슬금슬금 입김을 뿜던 입술이 다시금 벌어졌다. 흰 이에 빛이 닿아 번쩍했다. 놔뒀다가는 젖꼭지를 뜯어 먹겠다 싶어서 홍화가 침대 헤드 쪽으로 도망가려고 버둥거렸다. 허리가 단단히 붙들려 도로 질질 끌려 내려갔다.
“하지, 히, ……윽.”
이로 물어뜯을 줄 알았다. 삼 일 굶은 애가 빨 듯 쭙쭙 빨려서 시큰시큰한 젖꼭지를 혓바닥이 감쌌다. 물컹하고 뜨끈한 젤리 덩어리 속에 퉁퉁 부은 젖꼭지가 녹아든 느낌이었다. 그쪽부터 짜릿하더니 기어이 발끝까지 저렸다. 홍화가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차라리, 그냥 박아!”
반대쪽 젖꼭지도 뜯어 먹을 것처럼 쳐다보던 백영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기름칠한 양 번들번들했다. 홍화가 더는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베갯잇에 파묻었다.
“원하는 대로.”
라고 짧게 대답한 백영이 홍화를 홀딱 뒤집었다. 아랫배에 손을 넣어 궁둥이만 위로 삐쭉 들게 했다. 허벅지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틈을 만들어놓고는, 그 사이에 매달린 불알을 꾹 쥐었다. 홍화가 목 졸린 소리를 내며 움찔댔다. 하지 말라고 말리는 목소리에 이 갈린 소리가 섞였다.
잘 익은 홍시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다가, 손을 뻗어 굳다 만 기둥도 매만졌다. 검지로 기둥 앞쪽도 건드렸다가 구명을 후벼 파며 빙글 돌렸다. 홍화의 허리에 잔물결이 일었다.
“그냥 박으라고 이 미친, ……억!”
손길이 그악스러워졌다. 홍화가 손목을 잡고 말려도 가지고 노는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불편한지 팔로 홍화의 아랫배를 감싸고 용두질해줄 것처럼 아래를 움켜쥐었다. 기둥 끝을 잡고 늘렸다가 손바닥 전체로 그러쥐고 흔들었다. 장난감이 부서져도 개의치 않을 아이 같은 손장난이었다.
물기 없는 손에 놀아나 고통이 더 큰데도, 홍화가 끙끙대며 다리를 오므렸다. 불알이 조금씩 오그라들고, 아랫도리도 퉁퉁하게 물이 찼다.
홍화가 잇새로 베갯잇을 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캄캄한 눈앞에서 하얀빛이 번쩍번쩍 휘몰아쳤다. 아파서 비명이 나오려다가도 등골에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면 금방이라도 뜨끈한 물을 조르륵 싸버릴 것만 같다. 다른 이도 아니고 유백영 앞에서는 고꾸라져도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홱홱 저으며 반항했다가, 엉덩이만 철썩 거세게 얻어맞았다.
“가만있어.”
홍화의 등허리를 내리누르며 뱉는 말이 퍽 강압적이었다.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구멍으로 들어오자마자 통통한 엉덩잇살이 바르르 떨렸다. 홍화의 눈동자도, 어깨도, 날개뼈와 허벅지도 버들버들 떨렸다.
백영의 손에 꽉 쥐인 아랫도리에서 찔끔찔끔 새던 투명한 물이 흰빛을 머금더니 흰 줄기가 팍 튀어나왔다. 백영의 손바닥과 홍화의 아랫배를 긁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백영이 손을 떼기 전에 한 줄기 더 쏟아졌다.
“너…….”
홍화가 숨을 쌕쌕거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쾌감이 가시자마자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접싯물에 코 박고 뒈지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빚이고 나발이고 이 자리에서 사라져야 했다. 홍화가 타조처럼 베개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조루에, 호모에, 변태에…….”
“다 아냐, 이 돌은 새끼야…….”
홍화가 할딱이며 해명해도 백영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아직 안 끝났다며 홍화의 궁둥이를 쥐고서 떡 반죽처럼 주물렀다. 홍화가 틈을 봐서 도망가려고 했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바닥에 떨어진 벨트를 주워 들었다. 혹시 그걸로 때리려나 싶어 홍화가 고개를 젓자, 나는 너 같은 변태가 아니라는 싹수 노란 대답이 돌아왔다.
벨트는 수갑 대용이었다. 변태보다 더했다. 홍화가 얌전히 손을 내어주지 않자 범인 검거하는 형사처럼 홍화를 뒤집어 깔고서 뒤로 손을 모아 묶었다.
“너만 즐기면 쓰나.”
입에도 속옷 자락을 쑤셔 넣고 백영이 전처럼 홍화의 무릎을 세웠다. 한 번 더 도망가려고 하면 이번에는 양 발목도 묶어버리겠다고 협박해서 홍화가 송장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차가운 젤이 허벅지 안쪽에, 엉덩이 사이에, 쪼그라든 불알에 처덕처덕 발라졌다. 소름이 돋아 몸을 비틀면 백영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홍화의 허리를 내리눌렀다.
“아, 콘돔 안 가져왔다.”
희망이 생겼다. 홍화가 고개를 번쩍 들고 힘들게 돌아보았다. 백영이 성성한 아래를 쥐고 아쉬운 듯 홍화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이대로 놔주면 좋을 텐데 백영은 홍화의 희망을 무참히 부수고 젖어서 더 크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선단으로 젖은 살갗을 꾹 눌렀다.
홍화가 읍읍, 막힌 소리를 열심히 내며 무릎걸음 쳤다. 앞으로 도망갔다가 백영에게 잡혀서 엉덩이를 철썩, 얻어맞았다. 이래도 저래도 기어이 할 거면 차라리 모텔에 비치된 콘돔이라도 하라며 애타게 눈짓했다. 홍화의 시선 끝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챈 백영이 아아, 하며 무시했다. 뭉툭한 끝이 미끄럽게 젖은 둔덕을 누르며 그 가운데를 기어이 비집고 들어왔다.
“안 맞아. 한국 건 사이즈가 작아서. 어차피 임신도 안 될 텐데, 뭐. 맨자지가 낫지.”
힘 빼, 하고 덧붙이고서 백영이 홍화의 엉덩잇살을 그러쥐었다. 과거의 고통이 불현듯 떠올라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굵은 기둥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을 배회했다. 둔덕 사이를 쓱 스쳤다가,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져 조그마해진 불알을 툭 치고 훑었다.
백영의 입에서 쯧, 하고 불만스러운 소리가 터졌다. 홍화를 더 굳게 만드는 소리였다.
“힘 빼라고.”
백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홍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긴장이 지나쳐 몸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백영이 하, 하고 깊게 숨 쉬고 뒤로 묶인 홍화의 손을 잡아당겼다. 홍화의 상체를 세우고, 바들바들 떨리는 엉덩이에 젖은 기둥을 비볐다. 불편하고 간지러워서 홍화가 어깨를 뒤틀었다.
입에 가득한 속옷을 간신히 혀로 밀어내고 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찰나, 젖은 구멍이 꾹 눌렸다. 엇, 하고 홍화가 놀란 사이 그 커다란 대가리가 칼처럼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닳은 연필 꼭지 같은 주둥이로 좁은 구멍을 비집고, 구멍 크기를 제 몸집에 맞게 늘려놓을 것처럼 몸뚱이를 꾹 밀어 넣었다.
홍화가 눈을 홉떴다. 눈물이 금세 차올랐다. 후드득 떨어지고, 반쯤 바깥으로 밀어낸 속옷도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백영의 손등에도 힘줄이 돋았다. 손아귀에 든 벨트를 더욱 세게 쥐고서 백영이 끝없이 밀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게 목을 옭아맨 줄이라도 된 듯 홍화가 숨을 멈췄다. 큿, 하고 백영의 입에서도 신음이 샜다. 쇄골과 이어진 목줄기에도 핏줄이 돋았다. 홍화가 죽어가건 말건, 대가리를 다 밀어 넣고 나머지도 이어 넣었다.
아, 홍화가 목울음을 냈다. 비명이 터지기 전에 백영이 벨트를 놓고 홍화의 뒤통수를 베개에 내리눌렀다. 아악, 하고 터진 비명을 베갯잇이 먹었다.
눈이 닿은 베갯잇 부분이 흠뻑 젖었다. 홍화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며 학학 숨을 몰아쉬었다. 뱃가죽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천 조각처럼 찢어질 듯이 아팠다. 숨을 쉬기만 해도 배 속을 제집처럼 차지한 기둥이 생생하게 꿈틀댔다. 시뻘겋게 달군 쇠기둥을 배 속에 집어넣은 것처럼 뜨겁고, 아랫배가 그 크기를 못 이겨 윤곽을 얄팍한 뱃가죽 위로 드러낼 것만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느라 아랫배가 홀쭉하니 들어가자 예상대로 희미한 테두리가 뱃가죽 위로 살아났다가 사라졌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했다. 차라리 기절하면 편했을 텐데, 제 몸뚱이면서 야속하기도 하지.
얼굴이 처박혀 제대로 항의도 못 내뱉는 실정에, 뒤에 있는 괴물이 슬금슬금 허리를 움직였다. 푹푹 찔리고 후벼질 때마다 진흙더미에 내팽개쳐진 것처럼 철퍽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맥이 펄떡펄떡 뛰고, 살려고 벌어진 입에서 비명이 죽죽 터져나갔다. 처음에는 봐줄 것처럼 느리게 슬근거리더니 점차 힘이 실렸다. 살갗과 살갗이 퍽 닿았다가 떨어지고, 허벅지 사이로 채 다 담지 못한 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홍화의 잇새로는 고통을 삼키는 신음만 거푸 터졌다. 흠뻑 젖어서 들락거리는 것이 날 선 칼이라도 되는 듯 홍화가 눈물을 쏟아내며 베개에 이마를 비볐다. 손이 풀리면 뭘 쥐고서라도 버티겠거늘 손아귀에 쥐이는 게 맨 허공뿐이었다.
하, 하고 낮은 신음이 뒤에서 터졌다.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다가 채찍질하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철썩 내려쳤다. 엉덩이를 얻어맞으면 그 통증에 잠시 아래가 찌릿했다.
“아, 씨발, 허리 좀 들어봐. 왜 자꾸 쓰러져.”
“이, 씨발놈, 아 어떻게, 허, 릴, 들, 으라고! 악!”
홍화가 이를 악물고 소리치자 백영이 벨트를 잡아당겼다. 허리가 허공으로 붕 떴다. 순전히 백영의 힘에 상체가 들렸다. 기둥이 끄트머리만 남기고 죄다 빠져나갔다가 숨 쉴 시간도 주지 않고 푸욱 박혔다. 홍화의 고개가 홱 뒤로 넘어갔다. 허벅지에도, 엉덩이에도 힘이 담뿍 들어갔다. 배 속의 내장이 죄다 꿈틀거리며 안에 들어온 것을 물었다. 그 탓에 아랫배 깊숙하게 들어온 끝이 한곳을 갈고리처럼 긁었다. 홍화가 입을 커다랗게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불알이 고새 크기를 줄이고, 통증에 풀 죽었던 아래 기둥이 통통하게 익었다.
눈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가 젖힌 고개를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그대로 퍼들퍼들 떨다가 백영의 손을 구명줄처럼 잡았다.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백영이 움찔, 팔뚝을 굳히더니 이윽고 같은 곳을 푹 찔렀다. 홍화가 자지러졌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오므라들었다. 허벅지도 벌벌 떨었다. 안쪽도 기둥을 오물오물 씹었다. 살아있는 뜨끈한 해파리 안에 박은 것처럼 꽉 조였다가 풀고 뱉으려고 용쓰다가 안으로 더 처먹으려고 하고 아주 농탕을 쳤다.
백영이 입을 다물었다. 미간에 금을 내고서 이를 악물었다. 잡혀먹힐 것 같아서, 일부러 홍화의 손을 놓고 허리를 내리눌렀다.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에 아예 엎어놓고 위에서 푹푹 찔러 내렸다.
“하지 마, 하지, 그만, 그만, 흐……, 아, 아, 으아, 흡……!”
두툼한 손바닥이 입을 막았다. 워낙 커다래 코까지 같이 막았다. 숨이 막힌 홍화가 발을 동동 굴렀다. 발끝으로 시트를 밀고 무릎을 굽혀 종아리를 들었다가 침대 위를 정강이로 팡팡 내려 찼다. 숨이 막히는 것보다 눈앞에서 펑펑 터지는 불꽃이 더 무서웠다. 시야가 시커멓게 죽었다가 새하얗게 밝아졌다가 밤낮이 수시로 바뀌었다.
내장이 꾸물거리며 안에 든 것을 기쁘게 쫍쫍 빨다가 빠지면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뱀장어 같은 것이 좁아진 길을 헤치고 안으로 쑥 들어와 깊이 숨은 곳을 찌르면, 마치 그러라고 배운 것처럼 자지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물이 샜다. 정액 뱉을 길 닦는다고 색 없는 물을 뱉다가 흰 물도 뱉고, 그러다가 오줌도 왈칵 뱉을 것만 같다. 제 몸인데도 저가 통제할 수가 없었다.
엉덩이가 격하게 부딪치는 힘을 못 이기고 짜부라졌다가 둥글게 펴지며 흔들렸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등과 어깨, 뒷덜미도 발긋발긋하게 익었다. 침대 시트에 엉망으로 비벼지던 홍화의 아랫도리에 투명한 물이 한두 방울 맺혔다가 흰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사정인데도 사정이 아니었다. 기름 대신 노란 오줌이라도 빼낼 것처럼 인정사정없이 쥐어짜졌다.
“나, 나, 갔어, 싸, 고 있다고, 싼다고, 싸는, 데……!”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애원해도 찔러대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홍화가 흐어엉, 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아랫도리는 정액을 다 뱉어 뱉을 게 없으니 오줌이라도 뱉을 것처럼 찌릿하고 아팠다.
귀 옆에 입술이 붙었다. 거친 숨결에 큿, 하고 낮은 신음이 붙었다. 침대 시트에 뭉개진 불알이 줄어들며 물줄기를 쥐어짜냈다. 연속으로 싸대느라 좀체 딱딱해지지 못한 기둥 끝에서 멀건 정액이 터져 나와 홍화의 아랫배에 들러붙었다.
좁아진 내장을 밀며 안에 든 기둥이 부풀어 올랐다. 속살이 옆으로 밀리고, 벌어졌다. 깊숙이 들어온 끄트머리가 내장 안에다가 정액을 뱉어냈다. 잔뜩 흔든 샴페인 뚜껑을 딴 것처럼 길게도 줄줄 쏟아냈다.
홍화가 허으으, 목울대로 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기가 질컥이며 빠져나왔을 때는 홍화의 얌전해진 기둥 끝에 또 물이 맺혔다.
구멍 깊숙한 곳에 젤과 정액이 뒤섞였다가, 아직 덜 오므라든 구멍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엉덩이에 보조개가 움푹 팰 만큼 힘을 줘도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히 내장이 성기를 안 뱉어낸 느낌이라 홍화가 움칠거리며 간신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뒤돌아보았다. 이제 만족했냐고, 두 번 하진 않을 거라고 말하려 했다. 단어는커녕 숨만 간신히 깔딱거렸다.
젖은 구멍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백영이 시선을 올렸다. 머리가 몽롱하고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홍화와 달리 눈이 태어난 지 세 달 된 개새끼처럼 초롱초롱하고 맑았다.
맞붙은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백영 쪽의 일방적인 불꽃이었다. 병나발 불 때는 전기처럼 푸르더니, 이번에는 용광로같이 시뻘겠다. 손대면 익을 것처럼.
“안 돼…….”
홍화가 고개를 저었다. 더 하다가는 진심 죽을지도 몰랐다. 전과 같은 쾌락을 느꼈다가는 오줌을 질질 지리다가 복상사할지도 모른다.
백영은 아래만 굽어보았다. 홍화의 다리 한쪽을 제 어깨에 걸고 가까이 붙어 앉았다. 허벅지에 닿은 아랫도리가 싼 적 없다는 듯 뜨겁고 딱딱하고 커다랬다. 도망가려는 홍화를 단단히 움켜쥐고서, 백영이 제집처럼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 ∞ ∞
구멍에서 덩어리 진 정액이 꿀럭꿀럭 새어 나왔다. 성기 대신 손가락을 깊숙이 처박고 정액을 빼주겠다며 백영이 수작질했다. 거절할 힘이 없어 구멍으로 정액을 줄줄 싸다가 욕실에서 한 번 더 당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그것도 백영 기준이었다. 홍화는 본인이 얼마나 절정에 올랐는지 세지 못했다. 그냥 계속 절정이었다. 아파서 죽어야 하는데 느껴서 죽을 뻔했다. 기절했다가 일어나도 백영이 올라타고 있는 건 과거와 같았으나, 그 밑에 깔린 자신이 달랐다. 좋다고는 말 못 했다. 쾌락이 지나치면 고통이었다. 그 밤은 분명 과하고 넘치는 쾌락에 고통스러웠다.
과거를 되짚다가 귓불이 붉게 익었다. 손끝이 움칫하고 목덜미에도 고새 열이 돋았다. 홍화는 머리가 떨어져라 고개를 홱홱 저으며 못된 기억을 털어냈다. 일부러 대걸레 봉을 세게 움켜쥐고 쭉쭉 밀고 나갔다. 소매가 거슬려 팔을 동동 걷어붙이는데, 손목에 붉더란 상흔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얼굴이 바로 불쾌감에 일그러졌다. 그런 반면 양 볼은 홍시 색이었다.
홍화는 다른 누구와 밤을 보내본 적이 없었다. 막연하게 여인과 함께 첫날밤을 보내리라고 생각했지, 남자와 그것도 같은 남자와 두 번의 밤을 보낼 줄이야. 인생이 요지경이었다. 첫 번째는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한 데 반해 두 번째 밤은……. 홍화는 입을 다물었다. 연이어 떠오르는 회상을 지우고 그 자리에 ‘똑같이 끔찍했다.’라는 묘사를 채워 넣었다.
그 밤 뒤로 백영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수신 차단을 걸어두긴 했지만, 전처럼 모르는 번호로 귀찮게 하는 일도 없었다.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애초에 더러운 일로 얽힌 적이 없는 것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한번 대주고 말걸. 속이 다 시원했다. 그간 유백영이 저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안절부절못하며 마음 졸인 시간이 아까웠다. 홍화는 일부러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티브이에서 백영이 나오거나, 광고판에서 백영이 보이면 잠깐, 찰나의 순간 넋 잃고 쳐다보기는 했어도 아쉬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앓던 이가 빠졌다. 기뻐해야 맞았다. 기뻤다. 그리고 이상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보이는 앓던 이가 쑥 빠져서, 다음에 거울을 보니 아주 약간, 매우 조금, 무척이나 미미하게 허전하고 아쉽다는 표현이 맞았다. 원수 같은 놈과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아니면 고작 하룻밤 사이에 콩알만 한 마음이라도 갔는지 마음이 영 뒤숭숭했다.
……그럴 리 없다.
“홍화야!”
홍화가 대걸레를 붙들고 이 요상한 감정이 무언지 고민하는데, 명식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품에 서류 봉투를 고이 안고 홍화가 있는 무대 위까지 단숨에 뛰어올라 왔다. 멀리서부터 뛰어오느라 낯빛이 잔뜩 상기됐고 단추 구멍 같은 눈이 단추만큼 커져 있었다.
“형, 무슨 일이야. 인터뷰라도 잡혔어?”
명식이 이렇게 기뻐할 일이 또 있나. 홍화가 묻자 명식이 품에 소중하게 안은 서류 봉투를 홍화에게 건넸다. 저렇게 밝은 얼굴로 왔으니 나쁜 소식은 아닐 테고. 홍화가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맞대 물고 봉투를 열었다.
“……스페시아?”
“응!”
믿을 수 없어서 종이를 다 꺼내 훑었다. SpeciA Entertainment. 계약서가 맞았다. 그것도 국내 최대라고 칭송받는 기획사 계약서였다. 다른 곳보다 노예 취급도 덜 하는 곳이라고 좋은 평판이 자자했다. 웬만한 인지도가 아니면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곳이었다.
복권 당첨에 비견할 행운이었다. 홍화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명식을 쳐다보자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거기서 대뜸 연락 왔더라. 네 연기가 정말 인상 깊었다고. 나도 놀랐다.”
꿈결 같아 홍화가 제 뺨을 꼬집었다. 얼얼하고 아팠다. 현실이었다. 세상에. 홍화가 너무 놀라서 계약서를 샅샅이 읽었다.
“유백영 있는 곳이잖아. 볼 게 뭐 있어. 당장 계약하자.”
“……뭐라고?”
읽느라 집중한 탓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명식이 계약하자고 했다며 딴소리했다. 홍화가 그거 말고, 누가 소속되어있냐고 물으니 명식이 해맑게 대답했다.
“유백영. 걔가 거기 소속인데 몰랐어?”
그 인간이 어디에 소속해 있는지 알아서 뭐에 쓸까. 홍화가 멍해졌다. 화대, 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들은 적 있었다. 기획사에서 간판을 맡고 있는 배우가 추천하면 낙타도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고. 백영이 입김을 슬쩍 불었다면 아무리 그 입구가 좁더라도 들어가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손에 든 계약서가 와작 구겨졌다. 명식이 혼비백산해 홍화의 손에서 계약서를 구출해냈다. 홍화는 종이 더미를 뺏기고도 멍한 눈으로 바닥만 쳐다봤다. 빛 잃은 두 눈에 파직 불똥이 튀었다.
“유백영, 그 개새끼가 있는 곳이라고.”
먹고 떨어지라고 했더니 인심 쓰듯 계약서를 던져줬다. 다른 방식의 화대였다.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밑에 깔려 앙앙댄 것도, 줄줄 싼 것도, 제발 그만 하라고 사정한 것도 괜찮았다. 적어도 받을 것이 없었으니 동등하다고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유백영은 절대 이래서는 안 됐다. 사람을 깔아뭉개도 유분수지, 이렇게 뒤통수를 망치로 갈기고 등에 칼 꽂는 짓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생각 같아서는 유백영을 찾아가 속 시원히 주먹을 휘둘렀으면 딱 좋겠건만, 집 주소를 몰라 실행할 수 없었다. 대신 홍화는 핸드폰을 야구방망이처럼 움켜쥐었다. 명식이 들어 좋을 내용이 없기에 대걸레를 구석에 내던지고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수신 차단을 풀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길게 가고 받질 않았다. 담배라도 꺼내 물고 싶은데 건물 안이라 피울 수가 없었다. 흡연구역에는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비상구 계단만 초조하게 서성였다. 발로 바닥을 탁탁 차며 유백영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도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말만 나왔다. 문자로 욕을 퍼부어줄까, 마음을 바꿀 무렵 드디어 유백영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도 아니었다. 마치 뭔가를 아는 듯 왜, 라며 응대했다. 자다가 깼는지 목소리가 농무처럼 짙고 낮았다.
“야 이 씨발새끼야.”
홍화도 욕부터 뱉었다. 말 사이에 쉼표도 안 넣었다. 면전에서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어 던져주고 싶지만 못할 테니 욕이라도 속사포처럼 갈겨야 했다.
“너지? 네가 말해서 그쪽이 나한테 계약서 보낸 거지? 야, 이 돌은 새끼야. 사람이 할 짓이 없어서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갈기고 지랄이야. 내가 남창으로 보이디, 이 개새끼야? 내가 너한테 몸 팔았냐? 존나 윤리관이 썩어 문드러지셨-,”
―무슨 개소리야.
“네 소속사가 나한테 계약서 보냈다고, 이 씹새끼야. 네 짓 아냐? 이거 화대라고 준 거 아니냐고!”
―아, 씨발……, 기껏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부스럭거리며 몸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꿀꺽꿀꺽 목울대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홍화는 다음 욕을 준비하고 숨을 들이켰다.
“네 새끼가-,”
―화대? 씨발, 화대? Are you fucked in the head or something, you fucking dick head? 허리 좆 빠져라 봉사했더니 뭐, 화대? 화대는 받아도 내가 받아야지. 네가 씨발 질질 싸는 바람에 시트가 다 젖었는데 개소리가 존나 정성스럽다?
현란한 욕설에 중간에 영어까지 들어갔다. 홍화가 합죽이가 됐다. 살벌한 기세에 눌려 기껏 준비한 욕이 목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넌 내가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시간이 썩어나는 걸로 보이냐? 대가리가 꽃밭이신가.
“너, 아냐? 진짜 아냐?”
―내가 왜 그딴 수고를 해야 하는데. 아, 씨발. 끊어!
홍화가 더 캐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액정이 시커멓게 변할 때까지 귀에 대고 있다가 홍화가 아아악,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불이 있으면 팡팡 찰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귀 끝부터 시작해 안 붉은 곳이 없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화가 나고 짜증이 치솟았다.
저렇게 발광해대는 인간이 과연 힘을 썼을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사실을 들켜 일부러 거칠게 나온 걸 수도 있다. 그래도 기획사 계약서라니. 겨우 하룻밤을 보낸 것 치고는 과한 화대 아닌가.
아니다. 아닐 수도 있다. 만난 기간은 짧아도 유백영이란 인간이 대충 어떤 성격인지 파악은 했다. 만약 정말 본인이 개입했다면 ‘그래서 어쩌라고. 싫으면 오지 말든가.’ 하며 뻔뻔하게 나왔을 것이다.
하기야, 애초에 서로 합의한 관계인데 화대라니, 말도 안 된다. 그저 저가 남의 돈 탐내지 않고 착하고 바르게 살아온 보답을 한 번에 몰아 받은 것이었다. 지난한 고생 끝에 낙이 올 거라고 점쟁이도 말하지 않았는가. 홍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북쪽에서 온 귀인과 만났을는지도 모른다. 저번 술자리에서 양주석 그 사람이 강원도 두메산골 출신이란 소리도 들은 것 같다.
한구석에 남은 찜찜함을 애써 몰아내며 홍화가 뺨을 짝 소리 나게 후려쳤다. 파도 몰아치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반쯤 억지긴 해도 당사자에게 아니라는 말을 들었으니, 남은 일은 당첨된 복권 찾으러 가는 것뿐이었다. 해명 아닌 해명도 받았겠다, 눈앞에 놓인 복권을 찢어버릴 수야 없었다.
∞ ∞ ∞
백영은 핸드폰을 침대 구석에 던져두고 도로 누웠다. 새벽에 간신히 잠들어서 피곤한데도 한번 달아난 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깜깜한 눈앞에 이홍화까지 떠올라 신경을 깔짝깔짝 긁어댔다.
앞으로 스케줄을 알려면 같은 소속사인 게 편하겠다 싶어 입김만 살짝 불어 넣은 것을 화대라 착각할 줄이야. 욕을 하며 화를 내기에 지지 않고 맞고함쳤더니 꼬리를 말고 기어들어 갔다. 얼마나 당당하게 화를 내던지, 순간 다른 놈들에게 몸 팔며 빌붙어 산 게 아니라고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이 바닥이 어떤 바닥인데. 구정물이 오히려 너보단 내가 깨끗하겠다고 자위할 바닥이지 않나. 웬만하게 잘 나가는 집안 아니고서야 끈질기게 붙어있기 힘든 곳이었다.
모로 봐도 개털인 이홍화가 여태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스폰서밖에 없었다. 한둘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 밤에 어수룩하게 굴었어도 결국은 좋아서 질질 쌌으니, 남자 밑에서 구른 경험이야 차고 넘칠 것이다.
“……”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원인이 뭔지 몰라 곰곰이 따져봤다. 아마 같은 실험을 진행했는데 상대방은 성공을, 본인은 실패를 경험해서 그런 듯했다.
기저에 깔린 감정은 약간 색이 달랐지만 백영은 이성이 도출한 결론을 정답으로 쳤다.
실패, 라는 단어가 다른 기억을 물고 왔다. 박광준 감독과의 일이었다. 이홍화와 자고 나서 남자와도 가능하단 걸 알고 기세등등하게 연락을 넣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샤워가운을 입고 앉아있는 감독을 보자마자 불쾌감이 하늘 끝까지 치솟고, 심지어는 손끝이라도 스쳤다간 죽일지도 모른다는 살심마저 일었다. 욕심 나는 배역이라 눈 딱 감고 어떻게든 해보려 했으나 차라리 일을 관두면 관뒀지 도저히 못 해먹을 짓이라, 감독을 홀로 버려두고 나왔다.
영화는 대흥행했다. 주인공 자리를 꿰찬 배우도 혜성처럼 등장한 연기파 배우라고 입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선함을 타고난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고 섬세하게 묘사했다고 평론가들도 입에서 침이 마르게 칭찬을 쏟아냈다.
이게 다 그 호모 새끼의 힘이었다. 그래서 엿 같아도 어떻게든 미끼를 물어보려 했으나, 결과는 쓰디쓴 실패였다.
놓친 기회가 아쉽다가도, 그날 밤을 떠올리면 바퀴벌레가 그득히 모인 음식쓰레기 접시를 본 양, 팔뚝에 자잘한 닭살이 돋았다.
왜 이홍화만 가능할까.
이홍화는 두 번째도 성공했다. 왜 빨리 옷을 벗지 않는지 그 점만이 답답했다. 촉촉하게 땀이 배어난 살갗은 손바닥에 착착 휘감기고 봉긋한 엉덩잇살도, 하얗고 매끈한 허벅지도, 물렁물렁한 불알과 오동통한 작대기도 나름 만질 만했다. 주름 없이 불쌍하게 벌어진 구멍과 그 안쪽, 바르작대다가 도망 못 가고 엉엉 울던 그 얼굴도 봐줄 만했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단순히 상성이 맞나.
아래가 묵직해 내려 봤더니 고작 그 밤을 떠올렸다고 부풀어 올랐다. 지금 당장 이홍화를 부를 수는 없기에 다음을 기약했다. 어떤 일이든 적어도 삼세번은 해보라 하지 않던가. 이홍화와 한 번 더 밤을 보내면 대체 왜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홍화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백영은 본디 본인의 의견과 상충하는 남의 의견이나 사정 따위를 고려하는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다음번에도 이홍화의 반박은 가볍게 무시하고 제 목적을 이루리라.
이홍화를 잡아다가 처박을 생각을 하자 불쾌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미미하게 구김이 가 있던 백영의 이맛살도 주인의 기분에 따라 곧 평온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