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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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으로 베개를 내려쳤다. 퍽, 하고 베개 중앙이 움푹 팼다. 한 번 더 퍽, 두 번 더 퍽, 퍽, 퍽 연속으로 내려치던 홍화가 아으으, 앓는 소릴 내며 베갯잇을 이로 물어뜯었다. 실밥이 튀어나올 정도로 물어뜯어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유백영이라니, 유백영이라니!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그날 밤 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싶었다. 제발 다른 사람 다 좋아도 그 남자와는 자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말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모두 헛된 바람이었다.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왜, 왜 하필!”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 제 인생이 이리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 신이 저를 만들 때 고난을 듬뿍 넣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절망스럽다. 홍화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대본을 노려봤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겠다고 전화해야 하나 싶다가도,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놓치기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명식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라 홍화의 낯빛만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젠장, 씨발. 왜 하고많은 인간들 중에, 왜. 왜!”

발버둥 쳐도 정해진 배역이 바뀔 리는 없다. 홍화는 눈 끝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내고 벌떡 일어나 대본을 들었다. 종이를 쭉쭉 넘기며 유백영과 부딪치는 장면을 셌다. 손가락 열 개가 다 접히고 도로 펴졌다. 단역인데도 유백영과 함께하는 양이 상당했다.

하필이면. 같이 등장하지만 않아도 다른 촬영 팀으로 갈라질 거라는 희망이나마 있을 텐데.

도망치고 싶다.

홍화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훌쩍였다. 촬영 시작일만을 그리 기다렸는데도, 정작 유백영과 같이 연기하려고 하니 위장이 다 아파왔다.

“그래도 해야지……. 어후, 어떻게 안 해. 이걸 어떻게 놔…….”

얼굴에 철판 깔고 만난 적도, 밤을 보낸 적도 없다는 듯이 굴어야 한다. 유백영이 무슨 눈썰미로 저를 알아봤는지는 몰라도 겨우 그깟 것에 배역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홍화는 대본을 품에 안고 이불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품에 안긴 대본이 난로처럼 따스해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촬영 전날, 이불 위에서 뒤척이다가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새벽에 일어났다. 주연들은 따로 차 타고 오고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가기에 약속된 장소로 나가면 그만이었다. 명식이 데려다주겠다고 나서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뭣도 아닌 조연이 처음부터 매니저 차를 타고 갔다가 시건방지다고 찍힐 수도 있지 않은가. 하여, 홍화는 샤워를 마치고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틀간은 지방 촬영이었다. 버스에서 정신을 놓고 잠들었다 일어났더니 벌써 목적지였다.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일개미처럼 바지런히 장비며 도구를 날랐다. 먼 옛날 뮤직비디오 촬영 때 빼고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하다가, 리허설 준비하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뛰어갔다.

홍화는 고개를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며 유백영부터 찾았다. 최대한 부딪치지 않게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숨어있으려 했다. 리허설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겠지만, 최대한 붙어있는 시간을 줄이자는 게 목표였다.

“뭐 해요.”

으힉, 하고 홍화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허리를 굽혀 홍화의 귀에 대고 속삭인 유백영이 굽힌 허리를 펴고 내려다봤다. 홍화는 따스한 입김이 스쳐 소름 돋은 귀를 감싸 쥐고는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웬 존대?”

인사보다 퉁명스런 질문이 먼저 나갔다. 유백영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홍화가 유백영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올려다봤다. 맡은 역답게 수더분한 차림이었다. 대본 리딩 날과 달리 앞머리를 내렸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잘생긴 외모도, 빤드르르한 대꾸도, 갑자기 친한 척하는 것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홍화가 슬며시 발을 뒤로 물렸다.

“어딜 그렇게 도망가요. 내가 잡아먹을 줄 아나.”

그 밤이 떠올라 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유백영의 굵다란 눈썹이 움찔하고 위로 솟았다. 기분이 상하든 말든 홍화와는 상관없었다. 드라마만 아니면 다시 얽히기 싫은 사람이었다.

“와, 두 사람 벌써 친해졌어요?”

이게 친한 걸로 보이나. 홍화가 아니라고 즉답하려다 박 피디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대충 둘러대고 자리를 뜨려는데 어깨에 툭, 하고 두꺼운 팔이 걸쳐졌다.

“이 형, 박 피디님이 뽑으셨다면서요. 저번에 보니 연기 되게 잘하시던데.”

형이란다. 은인 앞이라 홍화도 본심을 숨기고 장단에 맞춰 헤헤거렸다.

“이 친구가 연극 좀 했거든요. 괜찮더라고요. 근데 드라마는 처음이라, 백영 씨가 많이 도와주세요.”

“제가 한 수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너스레가 수준급을 넘어 밉살맞다. 지하 주차장에서 야, 너를 부르짖던 인물과 전혀 딴판이었다. 혹시 이중인격 아닌가, 고개를 틀고 빤히 쳐다보자 유백영이 홍화와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발간 입술 사이로 송곳니만 유독 희고 날카롭고 커다랬다. 사냥을 준비하는 늑대 같기만 해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박 피디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홍화가 어깨에 걸쳐진 팔을 냅다 집어 던졌다. 천 년 묵은 구렁이 무게도 이보다는 가볍겠다. 뱀이 꽁꽁 싸맸다가 떠나간 듯 어깨가 저려서 노인네처럼 주물럭대며 백영을 노려봤다.

“무슨 꿍꿍이야. 왜 친한 척하냐.”

“궁금한 게 있어서요.”

존댓말을 재수 없게 하는 것도 능력이다.

“난 너랑 만난 적 없다. 내 인생에, 결단코.”

백영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왕 발뺌하는 거 완벽하게 해내려고 진지한 표정을 끄집어냈다. 중대 발표를 하는 중역진이나, 마지막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비장함이 넘치는 얼굴로 대본을 쏘아봤다.

“연기하는 거 티 나네.”

백영의 지적에 얼굴 근육이 무너졌다. 홍화가 일부러 요란하게 쿨럭대며 고개를 돌렸다. 귓등까지 새빨개졌다.

“어차피 나 계속 봐야 할 텐데 그냥 사실대로 불지. 그렇다고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너 맞잖아.”

“아니라고.”

내려다보는 시선이 자못 날카로워 뺨에 구멍이 뚫릴 듯하다. 홍화가 따끔따끔한 뺨을 문지르며 촬영장 쪽을 바라봤다. 분주한 스태프 중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곤경에 처한 저를 알아보고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두고 보면 알겠지.”

마침 홍화의 열렬한 시선을 눈치챈 스태프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유백영이 금세 표정을 풀고 사람 좋게 방긋 웃었다.

“리허설 곧 시작할 거예요. 먼저 가 있을게요. 얼른 와요.”

백영이 격려하는 것처럼 홍화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스태프들에게 살갑게 인사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방금까지 홍화를 괴롭히던 모습과 천양지차였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무리 가운데 서 있는 백영을 쳐다봤다. 백영이 시선을 알아챈 것처럼 돌아보며 웃었다. 곱게 휜 두 눈이 가증스럽고 사악했다.

악마 같은 그 낯짝을 보자 그날의 비참함이 목을 죄려고 달려들었다.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 밤을 기어이 파내서 끄집어내는 유백영이 밉고 싫었다. 홍화가 이를 빠드득 소리 나게 갈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홍화는 무기 대신 대본을 둥글게 손에 말아 쥐었다.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컷, 오케이, 소리가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스무 번째 테이크였다. 홍화가 그 자리에 푹 쪼그려 앉았다. 만반의 준비를 다 했는데도 카메라 앞에 서니 저가 뱉은 대사가 맞는지 틀린지도 알 수 없었다.

리허설 때만 하더라도 자신감이 넘쳐흘렀건만, 막상 슬레이트가 딱 소릴 내니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 대사 뒤엔 저 대사, 이렇게 움직인 다음에는 저 동선으로 가야지, 기계처럼 움직였다가 NG도 두세 번 냈다.

NG를 낼 때마다 맞은편에서 유백영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눈초리로 홍화를 쳐다봤다. 감독의 욕설도 어김없이 날아왔다. 저 멍청한 새끼 누가 데려왔냐며 조감독에게 욕을 퍼붓는 목소리가 펜촉처럼 귀를 푹푹 찔렀다.

욕 듣는 거야 감독이 갑 중의 갑이니 한 귀로 들어 넘긴다 해도, 유백영의 눈빛은 신경이 쓰였다. 다른 이들의 한숨보다 그 눈빛이 실상 더 거슬렸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어서.”

조감독이 손짓하며 불렀다. 유백영이 먼저 자리를 잡아 가기 싫었으나 카메라에 어떻게 찍혔는지 궁금해 홍화도 슬금슬금 다가갔다. 멀찌감치 뒤꿈치를 들고 서서 고개를 길게 뺐다. 화면 한가득 잡힌 제 얼굴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괜찮네. 잘 나왔어.”

“진짜 순해 보이네요. 원래도 좀 순해 보이긴 하지만, 화면으로 보니 더 그래요.”

화면 속의 홍화가 헤 벌어진 입술에 멍한 눈빛, 엉성한 태도로 말을 더듬었다. 연기를 잘한다는 칭찬으로 알아듣고 하하, 멋쩍게 웃었다.

“역할과 잘 어울리네요, 특히 외모가.”

백영이 한마디 덧붙였다. 홍화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그라졌다. 온화한 목소리에 내용 역시 흠잡을 곳 없지만, 홍화의 귀엔 욕으로 들렸다. 얼굴이 멍청하게 생겼다고 에둘러 뒷말한 것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쏴줄 수는 없어 못 들은 척 넘어갔다.

반 사전 제작이라 좀 더 여유롭다고는 해도 촬영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다음 장면엔 저가 등장하지 않아 홍화는 구석에 앉아 주연들의 연기를 구경했다. 제 앞에서는 껍질 벗은 듯 날티 나는 모습을 보여주던 백영은, 카메라 앞에선 새삼 진지하게 맡은 바 역할을 다 했다. 끔찍한 주둥아리에 비해 연기 자체는 몰입도가 높았다.

『그 양반은 죽은 지 오랜데 무슨 헛소리야. 정신 나갔어? 정신 병원은 나가서 다섯 시 방향으로 쭉 가면 하나 있어. 태워다 줘?』

어쩌면 연기가 아니라 본연의 성격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여배우에게 뱉는 대사가 싸늘하고 차가웠다. 홍화는 팔짱을 끼고서 촬영을 진지하게 쳐다봤다. 동선, 몸짓, 손짓, 발성과 눈빛까지 모조리 잡아낼 기세로 집중했다.

저를 몰아붙이던 태도를 떠올리자면 당장 주리를 틀어도 모자라건만. 감독이 컷, 소리를 냄과 동시에 홍화가 핫, 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백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고 있었다.

또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백영과 눈이 마주쳤다. 보고 있던 것을 들킨 듯해 얼른 시선을 피했다.

“어, 아직 안 가고 있었어요?”

마침 옆을 지나가던 이가 말을 붙여 자연스레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동료 형사 역인 배우였다. 아직 촬영 전인지 대본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내일도 새벽 촬영인데 얼른 가서 눈이라도 조금 붙여요. 때 놓치고 휩쓸리면 저치들처럼 개고생할 겁니다.”

그가 턱 끝으로 감독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스태프들을 가리켰다. 촬영 첫날인데도 낯빛이 다들 희멀건 하고 힘이 없었다.

다들 정신없이 일하는데 신입 주제에 쉴 수 있나. 감독에게 눈도장 찍는 거야 언감생심이지만 그래도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건 조금 더 보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더 있다 가죠, 뭐. 배울 것도 많고…….”

“후회할 텐데.”

그가 씩 웃으며 경고했다. 홍화가 대본을 훑으며 이 부분 촬영까지 보고 가겠노라 볼살을 밀어 올리며 답했다. 밤을 지새운 터라 피곤하긴 했지만 버틸 수 있었다.

감독이 오 분만 쉬고 가겠다고 꿀 같은 휴식을 외쳤다. 여배우가 지친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백영이 웃는 낯으로 여배우에게 농을 걸었다. 주변 이들도 단란한 분위기를 훈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홍화만 눈을 가늘게 떴다.

앞뒤가 흑백 같은 놈.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백영이 홍화의 속을 엿본 양 힐끔 쳐다봤다. 홍화가 눈을 댕그랗게 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돌렸다. 백영은 그대로 있는지, 시선 꽂히는 곳이 따끔따끔했다.

선배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뚝 떨어져. 언젠가 윤진이 조언이라며 던진 말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동료 형사 역을 맡은 이는 적어도 홍화보다 이 판에서 좀 더 굴렀을 선배였고, 그가 가라고 했을 때 빠져나갔으면 지금쯤 내일 있을 촬영을 대비해 대사라도 한 줄 더 연습할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침 일곱 시에 시작된 촬영은 점심과 저녁을 넘어 밤 열한 시가 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한 장소에서만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장소만 대여섯 번을 옮겨 나중에는 홍화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스태프들을 도왔다.

두 눈이 가물가물해 손등으로 벅벅 비비고 크게 떠봤다. 스태프들은 죽으려고 하고, 연기를 지시하는 감독의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첫날부터 이런 강도로 몰아칠 줄은 몰랐는지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도 자세가 많이 흐트러졌다.

잠시 쉬는 시간에 매니저들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피를 배우의 손에 들려줬다. 졸음을 쫓을 최적의 무기였다.

커피, 좋겠다.

따스한 커피 한 잔이 권력의 척도였다. 감독과 주연 배우들 외에는 커피 컵은커녕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도 접하지 못했다. 홍화는 사람들 눈이 닿지 않는 구석에 앉아 백영의 손에 들린 커피를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손목시계를 흘긋 보니 짧은 바늘이 숫자 십이와 일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조명이 꺼지고, 좀비처럼 비척거리는 스태프가 촬영장을 정리했다. 단역 배우들을 찾는 목소리에 홍화도 쪼그렸던 무릎을 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다 쓰러져가는 모텔이었다. 시골에 있는 숙소가 거기서 거기라지만, 전체가 어두컴컴하니 복도에서 오래 묵은 유령이라도 불쑥 튀어나올 분위기였다.

“우리는 그래도 운 좋은 거예요. 스태프랑 다른 사람들은 찜질방 행이야.”

언제 온 건지, 저에게 일찍 가라고 충고했던 이가 옆에 서 있었다. 서너 명에게 한방을 쓰게 한 것도 감지덕지라고, 눈 붙일 시간도 없이 다시 촬영장에 와야 하는 이들보다는 나은 거 아니냐며 그가 허허 웃었다.

“그럼 다른 배우들은…….”

“그네들이야 호텔 갔지. 이런 데 같이 묵을 급이 되나.”

단역 배우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눈에 보이는 차별에 체념한 듯했다. 반대로 홍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숙소가 아무리 열악해도 제 반지하 방보다 좋을 테고, 게다가 유백영과 우연이라도 만날 일이 없어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피로가 단번에 싹 씻겨 내려간 기분으로 홍화가 싱글벙글 웃었다.

“내일도 새벽 촬영인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야죠! 이야, 숙소가 좋네, 좋아!”

내친김에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홍화가 앞장섰다. 그가 뒤에서 홍화를 이상한 눈길로 훑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저 배우는 대책 없게 낙천적이거나, 정신머리가 좀 빠진 이인 듯싶었다.

곯아떨어진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건만 벌써 알람이 울렸다. 다른 이들이 누가 이 시간에 알람을 맞춰놨냐며 욕을 했다. 홍화가 발딱 일어나 알람을 끄고 사과하며 욕실에서 조용히 씻고 나왔다.

아직 새카만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손톱 달이 하늘 아래에 달랑달랑 달려 있었다. 집합 시간이 한참 남아 모텔 앞은 사람 한 명 없이 고요했다. 공기가 살을 에는 듯 차가워 그나마 남아있던 졸음이 날아갔다.

어젯밤 대본을 읽어보지 못하고 잠들었다. 리허설을 한다지만, 그 전에 한 번 더 대본을 읽을 계획이었다. 홍화는 일부러 옷깃을 훤히 젖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대본을 훑었다. 머릿속에 다 남아있는 대사인데도,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촬영을 해보고 나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눈에 새롭게 들어왔다.

『계, 계숙이 아줌마, 참 착, 차, 차, 착한 아줌마예요. 나한테, 꽃, 꽃도 주고……, 사, 사, 사탕도 주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야 하는데 아침이라 잘 나오지 않았다. 큼큼, 가다듬고 이어 읽었다.

『아, 아줌마 안 보여서……. 슬, 슬퍼요.』

『구라 까고 있네, 이 미친놈이.』

대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홍화가 깜짝 놀라 새된 소릴 지르며 돌아봤다. 얼마나 놀랐는지 가슴이 쿵덕거리고 손바닥에 진땀이 잔뜩 났다. 떨어진 대본 주워 들 생각도 못 하고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그다음 대사 안 해?”

유백영이 대관절 왜 첫새벽부터 여기에 있는 건지. 촬영장 외에는 볼 일 없다며 그렇게 만세를 부르고 좋아했건만.

홍화가 대놓고 얼굴을 구겨도 백영은 태연하게 떨어진 대본을 주워 건넸다. 홍화가 백영의 손에 들린 걸 빼앗아 들었다.

“여긴 왜 왔냐.”

“못 올 데 왔어?”

“너 시내 호텔에서 묵었다며.”

다들 피곤할 텐데도 자기 전까지 수다는 이어졌다. 대부분이 드라마에 관한 내용이거나 신세 한탄, 뒷담이었다. 그중에는 주연들이 머무는 숙소가 어디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볼일이 있어서.”

“어. 그럼 볼일 보고 얼른 꺼져.”

홍화가 새 쫓는 사람처럼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덩치가 범 같은 이라 홍화의 손짓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시하는 게 나아 홍화가 대본을 읽는 척 코를 박았다. 사실 대사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오물오물 움직이던 입술이 딱 멎었다. 홍화는 일부러 백영을 보지 않았다.

“몇 번 물어야 대답할 건데.”

“대답했잖아. 네가 안 듣는 거지. 다른 사람 착각한 거라고, 나 아니라고. 너 만난 적 없다고. 이제 지겹다, 진짜.”

“알리바이가 있어야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넌 증거도 안 내놓고 무슨 깡으로 널 믿으라고 하냐. 그렇게 안 보이는데 되게 뻔뻔하네.”

“네가 형사냐? 내가 죄인이야? 증거는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왜 무고한 날 괴롭혀.”

유백영은 사람을 살살 긁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다. 뻔뻔하다는 비아냥에 홍화가 울컥해서 되받아쳤다. 대본에서 눈을 떼고 똑바로 쳐다보자 이제야 말이 통하겠다는 듯, 백영의 입술선이 달처럼 구부러졌다.

“간단해. 한 번만 울면 끝나. 아니면 나랑 자든가.”

마지막 제안에 식겁한 홍화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혹여 들은 사람은 없나 확인했다. 누가 들었으면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됐으리라. ‘인기 배우 유백영, 모 남배우에게 잠자리 요구해.’ 모 남배우가 자신이 아니라면 비웃고 넘길 테지만 본인이라 큰 문제였다.

“미친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

“못 할 말 했나. 너도 지겹다며. 빨리 끝내면 너한테도 좋은 일 아닌가.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인생의 끔찍한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대답할 가치가 없어 몸을 틀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홍화를 유백영이 잡아챘다.

“좆 까세요.”

더는 체면 차릴 가치도 없다. 가운뎃손가락을 예쁘게 세워 보여줄까 하다가 그 힘을 쓰는 것조차 아까워 욕만 중얼대고 말았다. 한 번 더 잡으면 양 뺨에 시커먼 멍을 만들어주려 했으나,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미련이 없는 건지 백영이 순순히 놓아줬다. 해칠 생각 없다는 듯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꼴이 끔찍해 홍화가 있는 힘 다 끌어모아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생각해봐. 제안은 네가 알았다고 할 때까지 유효해.”

“아침부터 똥 뿌리지 말고 꺼져. 이거 제대로 미친 새끼 아니야.”

“아, 그리고 하나 더.”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라고 덧붙이려는 찰나였다. 유백영이 성큼 다가왔다. 웃는 낯이라 잠시 방심한 사이, 백영이 홍화의 중지를 콱 움켜쥐었다. 잡은 손가락을 뒤로 홱 넘기며, 언젠가 찍었던 광고에서처럼 백영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거, 뽑아버려도 연기는 가능하지?”

억, 하고 홍화가 손목을 비틀어도 아귀힘이 워낙 거세 빼내지 못했다. 천연덕스레 협박해놓고는 백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뒤돌아섰다. 홍화는 백영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저릿저릿한 손가락을 슬며시 세웠다. 혹여 그가 다시 돌아올까 봐 손가락을 펴고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손에 쥔 대본이 눈에 들어왔다. 죽으라고 외운 대사와 지문이 머릿속을 스쳐 가자 홍화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물들었다. 하필이면 오늘 촬영분에 우는 장면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유백영의 코앞에서.

……아, 젠장.

“좆 됐다.”

홍화가 중얼댔다. 다른 건 아무리 염불을 외도 안 이루어지더구먼, 좆 됐다는 말은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 ∞ ∞

눈가에 눈물이 금세 고인다. 소같이 커다란 눈망울이 눈물을 머금어 반짝인다. 한 번 끔벅이자 구슬방울처럼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표정만 보면 겁에 질려 오줌이라도 지릴 성싶다.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양옆으로 사정없이 굴리던 정호가 입술을 짓씹었다.

『별이도 아, 아줌마 못 봤다고, 그, 그랬는데…….』

『귀신이 무슨 증거야. 말해, 죽였다고. 네가 죽였잖아!』

강기성이 탁자를 쾅, 내려친다. 노호성이 좁은 방에 쩌렁쩌렁하다. 앞에 앉아있는 정호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겁먹은 짐승처럼 덜덜 떤다. 하얗게 질린 입술을 앙다물고 울기만 한다. 냉혈한도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줄 만큼 가련하고 불쌍한 모습이다. 조사실 밖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찬다. 심지어 그들도 울고 있는 정호에게 연민을 느낀다. 이 자리에서 정호를 불쌍하게 보지 않는 이는 강기성 홀로인 듯하다.

『네가 아줌마 배를 쑤신 칼도 발견했어.』

아직 증거가 확실하지 않지만 강기성이 강수를 둔다. 죽였다고 자백만 하면 끝난다. 강기성이 초조함을 숨기듯 팔짱을 끼고 정호를 노려본다. 정호, 눈을 크게 뜨고 강기성을 쳐다본다. 뚫어지라 쳐다보면 답이라도 나올 듯이. 말 없는 대치가 길게 이어진다. 그 사이를 초침이 가로지른다.

곧, 정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속눈썹 아래에 고인 눈물이 모두 떨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표정이 사라진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정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음영이 얼굴 반쪽에 드리운다.

『……거짓말.』

목소리가 차갑다. 말도 어눌하지 않다. 밖에 있던 이들이 정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웅성거린다. 강기성만 정호의 본질을 꿰뚫어 본 듯 놀라지 않는다.

『아저씨, 거짓말하네.』

정호가 허리를 펴고 여유롭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강기성을 깔아본다. 입가에 비웃음이 떴다. 말더듬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늘어진 눈매와 치켜든 입 끝이 그간 숨겨둔 본성을 끄집어낸 듯 날 서 있다.

『그건 못 발견해.』

정호가 단언한다. 강기성이 욕을 뱉으며 조사실을 박차고 나온다. 안에 홀로 남은 정호, 제법이라는 듯 조사실 유리창을 응시한다. 밖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수갑 묶인 손을 들고 찬사처럼 짝, 짝, 느릿한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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