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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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춥다.”

해가 쨍쨍하고 하늘이 파란데도 입에서 흰 김이 나오는 날씨였다. 홍화는 주머니에 넣은 핫팩을 주물럭거리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패딩 안에 입은 도포 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찬바람이 벌어진 옷깃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홍화가 몸을 웅크리며 코를 훌쩍거렸다.

어제만 해도 포근하더니, 야외 촬영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온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촬영이 미뤄지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아 홍화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추위를 피했다.

소속사 유무의 차이가 크긴 했다. 그전까지는 발바닥에 땀띠 나도록 뛰어다니며 오디션에 도전했다면, 이번엔 소속사에서 편하게 밥숟갈을 물려줬다. 전과 비교하면 누워있는데 떡 먹여주는 머슴이 옆에 붙어있는 셈이었다. 잘 나가는 배우들처럼 비중 높은 배역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나, 잠깐 얼굴만 비치고 사라지는 단역이라도 그저 감사했다.

각설, 사극이라 그런지 대기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다. 바깥에서 마냥 기다리다가는 감기 걸린다고 명식이 편의점이든 어디든 안에서 기다리라 권했다. 홍화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실내에서 쉬다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촬영에 늦으면 그게 무슨 민폐란 말인가.

차라도 가까운 데 주차해놨다면 그 안에서 기다리겠으나, 명식이 급한 일로 어딜 가는 바람에 차 안에서 쉬는 호사는 누릴 수 없었다.

촬영을 구경하는 것도 지쳐 홍화가 자리에 쪼그려 앉아 대본을 펼쳤다. 저가 등장하는 부분은 닳고 닳았다. 저잣거리에서 여염집 처녀를 희롱하다가 혼쭐이 나고 연못에 빠지면 오늘 분 촬영은 끝이었다.

홍화는 대본을 다 훑고 연못 쪽으로 흘끔 시선을 주었다. 주연이라면 대역을 썼겠지만 홍화는 단역 나부랭이라 대역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역을 써주겠다고 해도 거절할 터이나 뿌연 연못을 보니 더럭 겁이 났다.

슬금슬금 연못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더욱 오싹하다. 살얼음 사이사이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박제처럼 굳어있고, 망치로 깨부순 구멍 아래로는 언뜻언뜻 검은 등을 가진 물고기가 먹이를 노리는 상어처럼 헤엄치고 다녔다.

지금 와서 무서워하면 뭣하리. 이제 와 못 한다고 발 빼면 앞으로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힌다. 아예 시야에서 안 보이면 덜 무서울까, 홍화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등에 툭, 뭔가 부딪쳐 발걸음을 세웠다. 남색 도포 자락이 먼저 보였고, 고개를 쭉 따라 올리자 식겁할 얼굴이 거기 있었다.

으, 하고 홍화가 먼저 진저리를 쳤다.

“네가 왜 여기 있냐.”

붙은 몸을 떼내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홍화가 으허억,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또 백영의 품에 부딪혔다. 백영이 본능적으로 홍화의 팔뚝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대로 연못에 밀쳐 버릴까 봐―그간의 행적을 보건대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홍화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올려다봤다. 저를 내려다보는 무표정이, 영어로 욕설을 내뱉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해 차라리 물속에 뛰어드는 게 안전하지 않을지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이거 놓지?”

질문에 대한 답도 없고, 한참이 지나도 팔을 놔주지 않았다. 홍화의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뚫어지라 쳐다만 봤다. 언제 돌풍처럼 변할지 몰라 홍화가 먼저 입을 뗐다. 백영이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마치 악력기를 쥐듯 움켜쥐어 옷자락 너머에 손자국이 남을 듯했다.

윽, 홍화가 인상을 찌푸리며 잇새로 소릴 냈다. 보는 눈이 많아 놓으라고 성격대로 욕해줄 수 없어 호소하듯 백영만 올려다봤다.

“이것 좀 놔, 이 씹…….”

욕을 끝까지 못 뱉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서 눈 끝에 눈물이 다 맺혔다. 홍화가 입술만 달싹이고 있자, 멍하던 백영의 눈동자에 퍼뜩 빛이 돌았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기가 막혀 허, 소리밖에 안 나왔다.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홍화가 냅다 팔을 휘두르고 연못과 백영 사이를 빠져나왔다. 연못에서도, 백영에게서도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에야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게 미쳤나, 진짜. 멍들면 고소한다.”

“너……. ……음. 홍화 씨도 여기서 촬영할 줄은.”

옆을 지나가는 스태프를 의식했는지 백영의 말투가 고와졌다. 미주알고주알 일정을 고해바치기 싫어 홍화는 대꾸하지 않았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제 순서를 기다리려다가, 문득 궁금해져 백영을 돌아봤다.

푸른색 도포가 기분 나쁠 만큼 잘 어울렸다. 얼굴은 고고한 선비인데 다부진 어깨와 너른 등짝이며 큼지막한 손 덕에 글줄만 읽는 쪽보다 검을 휘두르고 다닐 무관이 어울렸다.

아니꼬운 눈을 하고 위아래로 훑어보니 백영이 시선을 맞받아쳤다.

“화대 어쩌고 떠들더니 결국 계약했더라, 너.”

스태프가 멀어지자 바로 반말이었다. 혹 누가 들었을까 무서워 홍화가 주변을 홱홱 둘러봤다가, 울컥해 눈을 세모꼴로 치뜨고 백영을 노려봤다.

“아니라며. 아니라며, 개새끼야.”

“어. 아냐. 줄려면 네가 줘야지.”

“원하면 줄게. 얼마야? 얼마면 돼.”

“네 전 재산 털어도 못 내.”

“가치는 내가 정해. 한, 백 원은 되나? 그것도 많네.”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백 원짜리라도 던져주려고 빈정거렸다. 돌아오는 답이 영 늦었다. 가격을 계산하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백영이 조용히 홍화를 내려다봤다. 홍화가 어깨를 움칫 떨었다. 이러다가 정말 전 재산이라도 바치라고 하면. 손바닥에서 진땀이 났다. 손바닥을 패딩에 슥슥 문질러 닦으며 시선을 힘겹게 받아쳤다. 백영의 눈 끝이 가늘게 접혔다. 웃고 있었다.

“한 번 더 해보면 대충 견적이 나오겠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홍화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얼마나 빨간지 땀이 삐져나오면 붉은색일 듯했다. 콧김을 숭숭 뿜어대며 홍화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구매자가 구매할 생각이 없다고 전하래. 제품이 존나 시원찮다고!”

홍화가 바락 성을 냈다. 마침 스태프가 홍화가 등장할 장면 번호를 큰소리로 외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지금은 백영의 옆보다 시커먼 연못 바닥이 더 편했다.

한 손에는 흰 호리병을 잡고 시정잡배처럼 껄렁껄렁하게, 술 취한 것처럼 걸음은 비틀비틀, 코끝과 볼은 술주정뱅이답게 불콰하고 눈빛은 흐리멍덩하다.

이종우는 다른 날과 똑같이 술에 취해 저잣거리를 헤집고 다니다가 아리따운 여염집 규수를 발견한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세가의 망나니 아들답게 규수를 말로 희롱하고 손목을 덥석 쥐며 잡아당긴다.

『이러지 마시옵소서.』

『어허, 이 몸이 누구인 줄 알고! 이조정랑 이규읍의 막내아들인 날 감히 거절해?』

옥신각신 끝에 화가 난 규수가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친다. 차디찬 연못에 풍덩 빠진 남자가 고래고래 화를 내지만 규수는 이미 몸을 돌려 사라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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