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참에 군대나 다녀와, 이 새끼야.
명식은 홍화를 설득하지 않았다. 눈물만 뚝뚝 떨어트리는 홍화를 보다가 군대나 갔다 오라고 딱 한마디 했다. 그 말이 맞았다. 생각을 비우려면 몸이 고단해야 했다.
일부러 힘든 곳에 지원해서 들어갔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딴생각할 순간을 주지 않는 곳에 들어가 바라던 대로 열심히 굴렀다. 그간 무대에서 뛰며 키운 매너로 선임들에게 사랑도 받고, 마음에 안 드는 후임을 골리기도 하며 무던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제대가 코앞이었다. 병장님, 병장님 하며 딸랑이를 흔들어대던 후임들이 좋으시겠다며 추켜세웠다. 홍화는 까까머리를 쓱쓱 쓸며 후임들의 부러움 섞인 소리를 웃어넘겼다. 나가서 뭘 해 먹고 살지, 포기해버린 그 길이 떠올라 먹먹하기만 했다.
명식은 계속 연락했다. 누가 보면 죽고 못 사는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지극 정성이었다. 홍화 앞에선 무대의 무, 자도 꺼내지 않았으나 그 속내는 짐작 가고도 남았다.
그래도 명식을 내치지는 않았다. 도망치듯 입대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쪽과 관계된 사람이면 코빼기도 안 볼 거라 그렇게 다짐했거늘,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외면하던 티브이도 보게 됐다. 속도 없이 하하호호 따라 웃고 나면 입맛이 그렇게 씁쓸할 수가 없었다.
이놈의 미련, 개 같은 미련. 크리스마스트리의 꼭대기에 매달린 별이 그리 갖고 싶든. 손을 뻗어도 안 닿는 줄 알았으면 깔끔하게 포기했어야지.
속으로 등신, 등신, 상등신이라고 욕하면서도 포기는 멀기만 했다. 특히 후임으로 유명한 엔터테인먼트에 속해 있는 연습생이 들어왔을 때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얼굴도 잘생겼고 노래도 잘하는, 끼가 넘치는 녀석이었다. 저런 사람이 무대에 어울린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난 열등감에 많이도 괴롭혔다. 착한 아이라 괴롭힘도 다 받아주고 제대가 가까워졌을 때는 울어주기까지 했다.
“꼭 연락 주셔야 합니다. 이 병장님, 꼭이요. 꼭, 꼭.”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약속하라고 우겨댔다. 어디서 말끝에 ‘요’ 자를 붙이냐고 타박해도 제대 앞둔 병장은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이었다.
“꼭 성공해라. 앨범 내면 하나 사줄 테니.”
“연락 안 하실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연락해주십쇼. 제가 맛있는 거 잔뜩 사드리겠습니다. 앨범 안 사셔도 됩니다. 제가 직접 드리겠습니다.”
간절한 태도가 웃겨 대놓고 킬킬거렸다. 웃지 말라며, 자신은 진지하다고 후임이 울먹였다. 까슬까슬한 머리를 개 쓰다듬듯이 만져주었더니 후임이 킁, 하고 콧물을 들이마셨다.
이등병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군 생활이 끝나기는 하는 건가 싶었는데 돌이켜보니 순식간이었다. 제대를 앞두니 그간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른 것들은 미련이 남지 않지만 후임은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눈에 밟혔다.
후임이 들어오고 얼마 안 됐을 무렵 선임 중 한 명이 작당하고 녀석을 괴롭혔다. 옆에서 보기에도 눈살 찌푸려질 만큼 악독하게 괴롭혀 방관하던 홍화가 나서서 말렸다. 말리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으나, 괴롭히던 주동자가 다른 곳으로 배치되면서 다행히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연습생임을 알고 난 뒤에는 홍화가 후임을 들들 볶았다. 쫓겨난 선임이 하던 짓거리보다야 약하지만 충분히 쪼잔하고 치졸한 괴롭힘이었다.
잡일 미루기, 잔심부름시키기, 괜히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 등등. 나중에는 그래봤자 다 소용없는 일임을 깨닫고 그만뒀지만, 괴롭히는 동안에도 후임은 홍화를 치 떨리게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뭘 시켜도 배시시 웃으며 병장님이 최고라고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착한 녀석이었다. 이제 녀석을 괴롭힐 일도, 사람도 없어 마음 놓아도 되건만, 덩치만 커다랗지 어수룩해 보이는 녀석이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홍화의 옷자락을 잡고 애처럼 우는 모습을 보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저만 보는 똥강아지를 말뚝에다 묶어놓고 이사 가는 기분이었다.
군대 인연이 사회에 나와서까지 이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나. 끼 많은 녀석이니 금방 인기를 얻을 테고, 그러면 후임이 먼저 홍화를 까맣게 잊으리라.
홍화는 속내를 숨기고 웃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후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야, 너 고향이 어디냐.”
다 뜻하는 바가 있어 물었다. 후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착실하게 대답했다.
“남해입니다.”
북쪽은 아니네. 귀인은 확실히 아니었다. 홍화가 후임의 머리통을 밀며 저리 꺼지라고 손짓했다. 길게 잡을 인연은 아니었다.
한 달이야 군대에서 고이고이 모아둔 돈으로 해결하겠다마는,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래 버틸 자금은 되지 않았다. 당장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다. 회사에 덥석 취직할 능력은 아니라 아르바이트부터 물색했다. 발품 팔아 간신히 고시원 근처에 일자리를 잡았다.
“무슨 고시원이야. 그냥 우리 집에서 눌러살라니까. 눈치 볼 사람도 없는데 뭘 그리 튕겨.”
명식이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툴툴댔다. 빚진 건 군대 가기 전으로 차고 넘쳤다. 갚을 길도 요원한데 또다시 신세 지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홍화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일하는 시간인데 이렇게 방해할 거야? 이러다가 나 잘리면 진짜 형이 책임져야 해.”
맨 앞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하는 둥 마는 둥 마우스만 짤깍짤깍 건드리던 명식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 걱정해줘도 저런다고, 군대에 싸가지를 놓고 왔다며 한탄했다. 귓등으로 들어 넘기며 행주를 들었다. 바쁘지 않은 틈을 타 군데군데 어질러진 곳을 치워야 했다.
“애들이 오늘 모이자는데 시간 되냐. 너 제대 축하 겸.”
행주 든 손이 멈칫했다. 홍화는 곧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을 정리하고 널브러진 쓰레기를 주웠다. 명식이야 줄기차게 봐서 괜찮으나 연극단원들은 아직 만나기 꺼려졌다. 면회 오는 것도 불편했는데 그 모임에 끼라니 거부감부터 앞섰다.
“다음에.”
“언제, 인마.”
“다음에. 오늘은 바빠.”
일 끝나면 할 것 없지만 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명식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 한숨을 뱉었다. 못 들은 척 쓰레기를 들고 부엌으로 숨었다. 손에 든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버리고 싶은 게 저인지 아니면 쓰레기인지 조금 헷갈렸다.
명식은 집요했다. 첫눈에 반한 여인을 쫓아다니듯이 홍화를 괴롭혔다. 대체 왜 이러냐고, 형이 이럴수록 더 힘들다고 소리쳐도 명식은 눈만 데구루루 굴리며 딴청이었다.
그 속내를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명식은 죄책감이 얼룩진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했다. 다 때려치운 원인이 저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그 착각을 바로잡게끔 진실을 고백할 수는 없어서, 홍화는 애꿎게 화만 냈다.
“진짜 싫다. 형이 이러니까 더 가기 싫어졌어.”
“누가 가서 연기하래? 애들 보러 가는 거라니까 왜 김칫국부터 들이마셔. 그냥 애들만 보고 오면 된다고.”
“왜 하필 만나는 곳이 소극장인데. 차라리 딴 데서 만나. 거긴 가기 싫다고.”
“걔네들도 공연하느라 바쁘거든. 정 뭐하면 뒤풀이 때 오든가.”
“내가 거기 단원도 아닌데 왜 가?”
도돌이표였다. 홍화가 지끈대는 머리를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술도 안 마셨는데 숙취가 몰려온 것처럼 괴로웠다. 명식은 넘어가는 척하다가 오 분 뒤에 또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어봤다.
자꾸만 부지깽이로 잿더미를 들쑤시는 것만 같다. 뒤집고 헤집으면 그 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을까 봐. 무대를 보고 연기하는 그들을 보면 죽어가는 불씨가 다시 살아날 거라 믿는 사람처럼 끈질겼다. 홍화는 답답한 가슴을 퍽퍽 두드리고 돌아섰다. 매정하게 인연을 끊지 못하는 저가 제일 바보였다.
결국 명식이 승리했다. 명식은 홍화가 중간에 어디로 도망갈까 무서운 사람처럼 팔뚝을 꼭 붙들어 맸다. 범인을 연행하는 경찰도 이리 단단하게 옥죄지는 않을 것이다. 홍화는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극단이 회식하는 고깃집까지 질질 끌려갔다.
“아이고, 이홍화 님 납시셨소!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오! 그 옥안 좀 잘 보게 이리로 앉으시오!”
이미 술을 사발로 들이부은 양 얼굴이 불콰한 윤진이 명식에게서 홍화를 건네받고 제 옆자리에 앉혔다. 분장을 지울 시간도 없었는지 낯짝이 저승사자처럼 푸르뎅뎅했다. 공포 연극이라고는 했는데, 변명을 대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마지막 공연에도 가지 않았다. 그게 못내 섭섭한 듯 윤진이 홍화의 등허리를 두꺼운 손바닥으로 퍽퍽 내려쳤다. 고등학교 선배로 만날 때부터 그랬지만, 힘이 역도 선수 못지않았다.
“요 매정한 자식, 요 무정한 것! 내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고 예쁜 얼굴을 한 번도 안 비추니! 내 남자 친구 군대 면회도 너보다는 적게 갔었어!”
“아파, 누나! 아파! 그만 때려!”
내버려 뒀다간 허리가 요절날 것만 같아 홍화가 뱀처럼 몸을 비비배배 꼬며 윤진의 강타를 피했다. 맞은편에 앉은 다른 선배가 껄껄대며 저것은 더 맞아야 한다며, 아예 주리를 틀라고 부추겼다. 명식도 수다를 떠느라 바빠 저를 구원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홍화는 몸을 웅크리고 폭력을 견디다가 훌쩍이며 윤진의 팔에 매달렸다.
“누님, 내가 누님 진짜 많이 보고 싶었는데 입에 풀칠하느라 바빠서 그랬어. 용서해줘. 용서해주세요.”
잔뜩 불쌍한 척을 해 보이자 윤진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홍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안쓰럽게 보이는 외모거늘, 작정하고 마음먹으면 간도 쓸개도 내줘야 할 것처럼 측은했다. 눈보라 몰아치는 추운 날, 차 밑에서 이야옹 이야옹 목청껏 우는 새끼 고양이를 볼 때처럼 가슴이 애달파졌다.
윤진이 손을 내리고 소주잔을 들이켰다. 앞에서 폭력을 부채질하던 선배도 홍화의 앞에 고기를 잔뜩 놔주었다.
“제대하고 연락 한 번도 안 한 죄가 괘씸하지만 내가 너른 마음으로 봐준다.”
홍화가 언제 울상 지었냐는 듯 히죽 웃었다. 간신배처럼 어깨를 구부정히 굽히고서 두 손으로 술병을 들고 공손히 술잔을 채웠다.
“못난 소인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디 받아주시옵소서.”
오기 싫다고 고집 피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바닥에 나부죽이 엎드릴 것처럼 아부를 떨었더니 선배와 윤진의 입꼬리가 슬며시 밀려 올라갔다. 두 잔을 채우고 제 빈 잔에도 술을 받았다. 한입에 탁 털어 넣고 씁쓸함을 목 뒤로 넘겼다.
누가 극단 아니랄까 봐 음주 가무에 능한 인간들이었다. 그래도 다른 손님들 배려하겠다고 가무는 생략하고 음주만 실컷 했다. 홍화가 오기 전에도 빈 병들이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온 뒤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눈을 돌려보면 술병의 반이 비어있었다. 인원은 몇 되지도 않으면서 소주 두 궤짝으로 부족했다.
이러다가 술독에 빠져 죽을까 봐 오줌 마렵다는 핑계를 대고 바깥으로 나왔다. 명식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옆 사람을 껴안고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말리다가 말려들까 봐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싫어했는데. 냄새도, 피우는 것도.
시간이 이렇게 무섭다. 싫었던 것도 하게 만든다. 익숙해지면 결국엔 별것이 아니게 된다.
라이터를 켜고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윤진이 어느새 옆에 섰다. 선배 앞에서 맞담배 피울 만큼 버르장머리 없는 건 아니라 끄려는데, 윤진이 됐다며 담뱃갑을 턱으로 가리켰다.
“한 대만 빌리자.”
말술은 말술이다. 술독이 아니라 술 바다에 떨어져도 안 취하고 헤엄쳐 나올 인물이었다. 홍화가 담뱃갑을 고이 내밀자 윤진이 제 것처럼 꺼내 불을 붙였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윤진은 홍화에게 왜 포기했냐고 묻지 않았다. 이유를 어림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캐묻지 않는 이상 답하지 않아도 된다. 저만의 비밀로 묻어두면 시간에 묻혀 사라질 이야기다.
“홍화야. 너, 왜 명식이가 너 여기까지 끌고 왔나 안 궁금하니.”
제 추측이 맞을지도, 틀릴지도 모른다. 정답은 알고 싶지 않았다. 덮어두고 외면하고 싶기만 했다.
“쟤 술자리만 오면 너한테 미안하다며 울더라.”
“…….”
“그런 제안 하는 게 아니었다고, 저가 미친 새끼였다고 울더라. 자기 때문에 포기한 거 같아서 미칠 거 같다고 매일 가슴을 치더라.”
“형 잘못 아니야. 내 선택이지.”
비참함을 못 견디고 도망치고 도망쳐 여기까지 왔다. 미련과 재가 무덤처럼 쌓인 이곳까지.
“나, 너 같은 제안 받은 사람 많이 봤어. 어떤 놈은 잘 비벼서 나가기도 하고, 어떤 놈은 싫다고 꿋꿋하게 무명 생활하고……. ……선택. 그래, 네 말대로 다 선택이었겠지.”
담배가 다 타들어 갔다.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발끝으로 비벼 껐다. 얼룩진 시멘트 바닥에 새카만 자국이 남았다.
“말이 왜 이쪽으로 샜지. 아, 맞아. 저 자식이 너 이곳에 데려온 이유 말해주려고 했지.”
“별로 안 궁금한데.”
“그냥 들어.”
“…….”
“쟤 말로는, 평소에는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빌빌대는 녀석이 무대만 올라가면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게 보기 좋았다더라. 날개 단 것처럼 뛰어다니는데 그게 참 예쁘게 보였대. 쟤 남동생 하나 있던 거 알지? 암으로 죽은. 걔가 살았으면 너처럼 살았을 거래. 걔도 티브이 나오는 게 소원이었나, 그랬다더라.”
명식의 남동생이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남동생의 꿈이니 뭐니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홍화는 밑바닥만 죽으라고 노려봤다. 눈 밑이 시큰했다. 윤진의 담담한 말이 끝이 무뎌진 바늘처럼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래서 네가 다시 무대에 올라갔으면 하더라. 남동생 대신이든 뭐든. 네가 반짝거리는 걸 다시 보고 싶대.”
“…….”
“나도 그렇고. 사실 다른 애들도 네 말 나올 때마다 그래. 딴 때는 불쌍해 뵈는 놈이 무대만 올라가면 참 예뻐 뵌다고.”
목이 메 대답할 수 없었다. 시야가 어룽졌다가 맑아졌다가 다시금 흐려졌다.
“울라고 해준 이야기는 아니야.”
홍화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훔쳤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나왔다.
“너 요새 피시방 아르바이트한다며. 야, 차라리 전속 단원 월급이 낫겠다. 우리 극단 들어오려고 오디션 보는 애들 엄청 많은데, 넌 낙하산 태워줄 테니 필요하면 연락해. 그만 눈물 뚝 그치고. 불알 떨어지니까, 뚝!”
윤진의 너스레에 홍화가 손목으로 입을 틀어막고 억지로 웃었다. 윤진이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나니까 그만하라며 놀려댔다. 홍화가 아예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윤진이 토닥였다.
∞ ∞ ∞
낙하산 시켜준다면서 오디션은 봤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다들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이 둥글게 모여 앉아 각각 상황을 주고 즉흥 연기를 시켰다. 주어진 대본도, 벌어진 판 분위기도 술판과 비슷했지만 홍화는 진지했다.
“너는 지금 너무 슬퍼. 영장이 나왔거든. 근데 가기 너무 싫어서 눈물이 나. 그런 찌질한 내면 묘사를 해봐.”
군대야 다녀왔고, 입영 통지서를 받았던 때도 별로 슬프지 않아 상황이 와 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켜보는 눈이 수십인 곳에서 못 하겠다며 다른 상황을 달라고 쪽팔리게 요구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해낼 거라고 홍화가 이를 악물며 눈물을 쥐어 짜냈다.
“가기 싫어. 딴 새끼들은 다 빼줬다는데 난 이게 뭐야. 가서 뒈지면 아빠가 책임질 거야?”
굳이 캐릭터에 이름을 붙이자면 재벌 집 철없는 막내아들 정도가 될 것이다. 서럽게 땅을 치고, 화를 내고, 없는 애비까지 멱살을 잡아다가 욕을 하니 홍화는 엉엉 우는데도 앞에 포진한 선배들은 배를 잡고 으하하 웃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다.
“와, 이홍화 이거 아직 쓸 만하네. 그럼 두 번째.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널 미국으로 보낸대. 군대 안 가도 된다.”
선배가 근엄한 표정으로 “사랑하는 우리 아들, 아빠가 우리 아들 군대 면제받아 왔다.” 하고 대사를 쳐줬다. 홍화가 반색해서 선배에게 달려들었다.
“아빠 최고!”
안기고, 볼에 뽀뽀를 퍼붓고, 눈물이 아직 다 떨어지지도 않는 눈으로 애교 살을 접으며 눈웃음을 쳐대니 저 여우 보라고 선배들이 손가락질했다. 홍화야 막내아들 역에 심취해서 선배 가슴팍에 뺨을 비비고 좋아하느라 정신없었다.
“아, 근데 아버지가 병역 비리 신고받아서 너 다시 군대 가야 한대. 어쩔래.”
해맑던 홍화의 얼굴이 충격을 받아 일그러졌다. 아버지 역할을 한 선배 품에서 떨어져 터덜터덜 걷다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골릴 생각이었는지 눈물을 짜내라고 하다가도 웃으라 하고, 웃다가도 울라 그러는 둥 홍화를 가지고 놀았다. 홍화는 이를 득득 갈며 애교 살이 짓무르도록 울고 웃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알고 지낸 세월은 오래라도 신입은 신입이라 잡일거리부터 주어졌다. 무대 위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아직 이르다며 단역조차 주지 않았다. 대본을 손에 쥐어도 무대 위에서 대사할 날은 멀기만 했다. 언더의 서글픈 인생이 그렇지, 싶으면서도 언젠가 오를 그 날만 꿈꾸며 대본 끝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이런 거만 시킬 거면 왜 오라고 했어!”
오디션에서 시킨 그 많은 연기는 어디다 써먹으라고 줬단 말이냐.
홍화는 바닥을 대걸레로 벅벅 밀다가, 제 현실이 서글프고 화나서 바락 외쳤다. 당장 무대에 올려줄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동네북처럼 불러다가 죄다 잡일만 시키니 속에 시커먼 재가 쌓였다.
무대 소품인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핸드폰을 하던 윤진이 홍화에겐 시선 한번 안 주고 낄낄거렸다. 홍화의 툴툴거림도 그저 귀여워했다.
“그러게 누가 늦게 오라 합디까. 오라고 했을 때 왔으면 지금쯤 주연도 많이 맡았을 텐데, 얼마나 좋았을꼬. 아이고, 불쌍해라.”
윤진이 과장되게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렸다. 그러다가 축 늘어져 핸드폰 액정만 손가락으로 쭉쭉 밀었다. 소파 팔걸이에 반쯤 엎어져서는 중얼댔다.
“우리 백영이는 어쩜 이리 예쁠까. 나날이 더 예뻐지네. 야, 너 누나랑 영화 보러 안 갈래. 우리 백영이 나오는 영화 곧 개봉하는데.”
“우리 백영이?”
“유백영이 몰라? 모를 리가.”
홍화의 어깨가 위로 홱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얼굴도 대걸레 막대를 쥔 손도 새하얗게 질렸다. 춥고 아팠던 그 날이 뇌리를 스쳐 갔다. 닮은 사람이지, 같은 사람이 아닌데도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심장이 덜컥했다. 티브이를 볼 때도 유백영이 나오면 가슴이 벌렁벌렁하여 채널을 돌리거나 전원을 꺼버리곤 했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났다. 옷자락에 슥슥 문지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 걔 싫어해.”
“왜? 잘생겼지, 연기도 잘하지, 매너도 좋지. 가만히 있을 때는 남자도 이런 상남자가 없는데 웃으면 또 소년 같아서 누나 마음이 설레. 우리 백영이만큼 잘생긴 사람을 내 평생 본 적이 없어요.”
윤진이 액정에다 쪽쪽거리며 부담스레 뽀뽀를 퍼부었다. 홍화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잘생긴 건 인정해도 정 안 가는 외모였다.
“눈빛이 싫어.”
“그 눈빛이 매력이거늘. 백영이의 매력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윤진이 비련의 주인공처럼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그 눈빛 어디가 매력적이란 말인가. 인터뷰할 때는 나른하다가 연기할 때는 미친 자처럼 빛이 번들거리는데. 그건 광기란 단어 외엔 붙일 말이 없다.
유백영을 닮은 이도 그랬다. 침대 위에서 홍화를 내려다보던 눈빛이 떠올라 모골이 다 송연했다. 그딴 관상을 가진 이 중에 정상인은 없을 거라고, 홍화는 단언할 수 있었다.
홍화가 뭐 씹은 표정으로 윤진을 쳐다보고 바닥을 벅벅 밀었다. 장단 맞춰줄 시간 없다. 오늘 밤 공연을 준비하려면 얼른 청소를 끝마쳐야 했다.
대기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공연 전 긴장이 넘쳐흘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바깥에 잠시 나갔다가 돌아와 분위기 파악이 늦은 홍화가 고개를 길게 빼고 웅성거리는 무리를 살폈다.
“아, 씨발. 좀 미리미리 알려주든가. 공연 당일에 펑크가 말이나 돼. 그만둘 거면 공연 끝나고 그만두든가.”
“핸드폰 전원 꺼놨어. 이 미친 새끼가.”
“이 새끼 내가 언젠가 일 칠 줄 알았어. 야, 내가 그러기에 좀 잘해주라 그랬지.”
“미친! 내가 못 해준 게 어디 있다고! 버르장머리 없는 것도 오냐오냐 받아줬거든!”
“다들 정신 차려! 그게 문제야? 당장 빈자리 어떻게 할 거야!”
윤진이 일갈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공연이 딱 세 시간 남은 시점이었다. 주연 중 한 명이 연락도 없이 잠수를 탔다. 어쩐지 요새 연습할 때도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이더니,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연출자도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바닥을 향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하필이면 대사 분량도 가장 많은 메인 캐릭터다. 동선도 길고 몸짓에 손짓에 소화해내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윤진이 손톱을 딱딱 물어뜯으며 고심했다. 언더야 있다지만 펑크 낸 인물만큼 연기를 해낼 이는 드물다. 일단 배우가 바뀌었으니 전액 환불 고지부터 하라고 이르고, 윤진이 대기실을 쭉 둘러봤다. 언더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저를 가리킬까 봐 무섭기라도 한 것처럼.
윤진의 시선이 구석에 서 있는 홍화에게 박혔다. 다들 피하기 바쁜 와중에 홀로 멀뚱히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아니면 자신을 뽑아달라고 하는 건지 도통 모를 표정이었다.
“이홍화, 이리 와봐.”
윤진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숨어있던 먹이를 발견한 눈빛으로 홍화를 불렀다. 홍화가 다른 언더들을 화급히 돌아보았다. 다들 홍화의 시선을 피하며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역이면 모를까, 지금 빈자리가 난 역할은 대사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오랜 연습을 하지 않고는 어려웠다. 절호의 기회도 소화해낼 크기라야 잡을 수 있는 법이었다.
“너 시키면 잘할 수 있어?”
아까까지만 해도 왜 잡일만 시키느냐고 그리 대거리하더니만, 정작 기회를 주니 홍화가 우물쭈물했다. 윤진이 홍화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홍화가 거부해도 억지로 시킬 것처럼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홍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른 선배들도 홍화의 입술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긴 침묵 끝에, 홍화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꺽 넘어갔다. 입술을 꾹 깨물고 거절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윤진과 눈을 마주쳤다.
“해볼게. 대본 줘.”
억지로 떠안기기는 했다지만 윤진도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언더들 중 그나마 무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홍화이기에 눈치껏 알아서 즉흥연기라도 하겠지 싶었다. 홍화가 인물의 대사를 다 외우고 있다는 건 계산 안에 없었다.
“……너 대체, 이건 언제 다 외웠어?”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언더고, 언제 무대에 오를지 모르니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지만 대본을 통째로 외우고 있을지는 몰랐다. 윤진이 홍화의 손에 들린 대본을 빼앗아 펼쳤다. 모서리가 너덜너덜하고 모든 대사에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그 아래 적어놓은 본인 의견이 흐트러진 깨알 같다. 홍화가 부끄러운 듯 대본을 숨기고 이럴 시간 없다며 반대로 윤진을 다그쳤다.
“지금 이럴 시간이 어디 있어? 당장 연습 시작해야 하는 거 아냐?”
홍화의 지적이 맞았다. 감탄할 시간도 부족했다. 무대 올라가는 배우들이 모조리 합세해 홍화를 무쇠 단련하는 것처럼 두들겨 패며 교육을 시켰다.
등짝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몇 개나 찍혔고, 발성이 조금이라도 약하면 선배가 입을 크게 벌리라며 악을 썼다. 그따위로 대사를 읊으면 객석 뒤쪽까지 전달이 안 된다며 꾸중이었다.
항상 꽉 차던 객석에 빈 공간이 더 많았지만 홍화는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할 겨를도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을 뒤집어써 객석의 빈자리는 눈에 뵈지도 않았다.
무대 가장자리에 놓인 소파에 두 다리를 얌전히 모으고 앉았다. 드문드문한 객석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온몸을 찔러왔다. 손끝 발끝이 찌릿찌릿하고, 물을 마셨음에도 또 갈증이 일었다.
『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무대에 홀로 입을 열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쳐댔다. 미미한 희열이 미열처럼 올라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 사이로 첫 대사가 지나갔다.
『자라봉동 납골당의 막내아들 강학구입니다.』
오로지 저에게만 집중된 시선들. 이홍화를 보되 홍화가 연기하는 인물만 알 사람들. 이 자리에 이홍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
홍화는 거울을 보고 수도 없이 연습한 인물을 뒤집어썼다. 허구이자 실제였다. 적어도 관객들은 실제로 느껴야만 했다.
죽은 줄 알았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타오를 조건이 갖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객의 시선이, 무대의 조명이 장작이었다. 홍화는 기꺼이 장작더미에 오를 각오가 되어있었다.
소파의 손잡이를 잡고 홍화가 객석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연극의 첫 번째 막이 올랐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공연이 끝났다. 홍화가 배우들과 손을 맞잡고 객석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이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레와 같지는 않았으나 손바닥 부딪치는 소리에 울컥,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환희였다.
공연을 계기로 잡일꾼 신세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신입들이 들어오며 막내 신세와도 안녕이었다. 윤진은 여전히 홍화를 막내 취급하며 놀려댔지만 연습을 할 때는 회초리 든 훈장님 못지않게 매서웠다.
“처음에 운이 더럽게 좋았던 거야. 좀 더 똑바로 못 해!”
조금만 호흡이 어긋나도 꾸중이 끊이지 않았다. 막바지 공연까지 그랬다. 오히려 다른 선배들이 살살 하라며 윤진을 말렸다. 이러다가 홍화도 도망가면 어쩌느냐며 걱정이었다.
“이홍화, 도망갈 거야?”
“이제 안 가. 가라고 등 떠밀어도 안 갈게.”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또 도망을 논하랴. 홍화의 대답에 선배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명식만 크흠, 헛기침하며 붉어진 눈 밑을 숨겼다.
∞ ∞ ∞
매니저는 침만 꿀꺽 삼키며 소파의 맞은편에 궁둥이를 갖다 댔다. 테이블에는 이미 종이 더미가 탑을 이뤘다. 모두 백영에게 반려 당한 것들이었다. 이건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고, 이건 이야기가 중간에 딴 길로 새며, 이건 피디가 이만한 스토리를 구성할 능력이 없다고 죄다 거절했다.
그리하여 백영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가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이 시나리오만큼은 마음에 들어 하리라. 투자자도 나머지 배우들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다. 내용이 산으로 간다 하더라도 티켓 파워가 쟁쟁한 배우들이라 흥행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백영이 마지막 장을 넘기고 대본을 탁자 위에 툭 던졌다. 다른 두꺼운 종이 더미가 새로운 종이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딴 거 말고, 좀 괜찮은 거 없어? 왜 다 거지 같은 것만 골라. 삼촌 감 떨어졌대?”
“왜, 그거 여기저기서 투자한다고 난리 났는데. 듣기로는 그거 텐트폴tentpole이래. 배우들도 장난 아니고 시놉도 재밌잖아. 최소한 망하진 않겠더라.”
대외비로 들은 이야기까지 남발하며 매니저가 백영을 꾀었다. 백영은 퍽 건방지게 양팔을 벌려 소파 등받이에 걸고 다리를 길게 뻗었다.
“형……. 제발. 이딴 시시한 조폭 영화가 아직도 먹힌다고 생각해? 매일 똑같은 레퍼토리만 나오는데 잘도 먹히겠다. 남자들 우르르 나와서 의리니 뭐니 떠들다가 칼 맞고 뒤지는 거, 룸 가서 여자 끼고 노는 거, 정치 공작입네 하고 옛적에 우려먹었던 거 또 우려내는 게 뜰 거라고 생각하냐고. 실화 바탕도 아니잖아? 사골도 이 정도 우려냈으면 씨발 뼈에 구멍밖에 안 남아. 시대가 어느 땐데.”
그렇게 잘났으면 지가 찍든가. 욕이 목구멍을 넘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밥줄이 우선이라 뱉지 못했다. 실제로 백영은 가명으로 찍은 독립 영화가 갖가지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된 경험이 있었다. 지금까지 저가 직접 시나리오를 골랐고, 실패한 경험도 없었다. 운과 안목이 기막히게 따라주는 ‘개새끼’였다.
하긴. 눈앞의 인간이 인생에 아쉬운 게 뭐가 있으랴.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 건강과 체력과 재력에 연줄과 핏줄까지 다 쥐고 태어났다. 돈이라면 차고 넘쳐나는 부모에 성공한 엔터테인먼트를 소유한 외삼촌, 유럽에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외조모와 현역으로 국회에서 잘 나가는 친조부모까지. 머리도 좋았다. 매니저는 살면서 대본을 한 번 보고 외우는 인간은 유백영 외에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모자란 걸 찾자면 배려심과 도덕성이었다. 그 빈자리를 이기심과 뻔뻔함이 채우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매너 좋게 굴어 사람들이 백영의 모자란 부분을 눈치챌 일은 없었다. 유백영은 사람들이 연예인의 비치는 면만 본다는 점을 매우, 굉장히, 엄청 잘 알았고 또한 잘 써먹었다.
차라리 배우 말고 딴 길을 걸으면 이렇게 부딪칠 일도 없겠거늘. 영화는 한번 찍어보더니 그 후로는 간간이 관심만 내비칠 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아직은 감독으로서 부족하다고 여기거나, 배우 일에 약간의 미련이 남은 듯이.
“형, 박 피디 조금 있으면 신작 들어간다며. 시놉 나온 거 같은데 말 안 해?”
딴생각에 빠져있던 매니저가 퍼뜩 놀라 대화로 뛰어들었다. 박 피디면 백영이 햇병아리 시절에 같이 일해본 사람이었다.
“공중파도 아니고 케이블 드라마인데 너한테 연락 오겠냐. 있더라도 넌 한 백 순위야, 일 순위가 아니라. 걔네들 네 몸값 감당 못 한다.”
통쾌한 기분으로 사실을 알려줬다. 속된 말로 ‘급’이 높아 같이 못 논다는 이야기지만, 유백영이 원하는 걸 손에 못 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조율하면 되는 거고. 박 피디 번호 알려줘. 직접 전화해보게.”
“야,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지.”
“삼촌한테는 내가 말할 거야. 빨리 번호나 줘.”
이래서 가족 회사는 가‘좆’ 회사의 오타라지. 매니저가 눈물을 삼키며 주소록에서 박 피디의 이름을 찾았다. 백영이 발로 종이 더미를 밀어버리고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렸다. 딱 그 성격다웠다.
∞ ∞ ∞
“이홍화. 오늘 특히 잘해라.”
윤진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툭 던졌다. 공연 전에 언제나 똑같은 말을 던지는데, 오늘따라 그 무게가 남달랐다. 유난히 긴장한 것 같아 홍화가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 밤 이 한 몸 불 싸지르겠사옵니다, 누님.”
“장난치지 말고, 인마. 오늘은 특히 잘하라고.”
“왜, 아는 사람이라도 왔어?”
대답이 없다. 홍화도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본에 눈을 박았다. 귀퉁이가 너덜너덜할 정도로 보았는데도 혹시 빠진 부분이 있을까 꼼꼼하게 확인했다.
전처럼 주연은 아니지만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이었다. 무대 앞에서 두 팔을 펼치고 웅장한 톤으로 대사를 읊다가, 맨 앞자리에 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경 너머로 쏟아지는 눈빛이 칼처럼 날카로웠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지만, 지는 기분이 싫어 똑바로 마주 보았다.
여자의 정체는 공연이 끝나고 드러났다. 윤진이 여자 앞에서 장군 만난 이등병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누구 앞에서든 느물대던 윤진이 저렇게 군기 든 모습은 처음 본 홍화가 그쪽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윤진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이리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이 친구가 제가 말한 그 친구입니다. 이홍화, 인사드려. 박 피디님이셔.”
피디. 그 말에 홍화도 굳었다. 윤진이 홍화의 뒤통수를 잡고 억지로 눌렀다.
“하하하, 이 녀석이 아직 무대인 줄 아나, 행동이 느리네.”
괜찮아요, 하고 여자가 손을 들어 윤진을 말렸다. 홍화는 눈을 끔벅대고 여자를 바라봤다. 저보다 연배가 높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즉흥연기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한번 해볼래요?”
갑작스러운 주문이 당황스러웠다. 홍화가 윤진과 박 피디를 번갈아 바라보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박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울어봐요.”
“……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것처럼 울어보라고요.”
제 주변인들은 왜 저를 못 울려서 안달인가. 까라면 까야 하는 군인 정신으로 홍화가 주먹을 쥐고 눈물을 쥐어짰다. 설움이 가득한 인생이라 눈물 뽑기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다. 사랑한 경험도, 연인도 없는 삭막한 인생이었으나 금세 비참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겨우 일 분도 안 되는 짧은 새에 홍화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속눈썹이 촉촉이 젖고, 방울방울 모여든 눈물이 흰 볼을 타고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렸다. 입이 슬쩍 벌어졌지만, 차마 목이 메어 말을 뱉지 못하는 것처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게 보내줄 수 있나. 저라면 바짓자락을 붙잡고서라도 말릴 것이다. 박 피디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고 말았다. 눈물이 손을 흠뻑 적시고 계속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옷자락을 잡고 싶은 듯 손끝도 버르르 떨렸다.
무릎이라도 꿇을까 고민하고 있을 무렵, 박 피디가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눈물을 잔뜩 짜내게 시켜놓고는 평은 딱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도 고마운지 윤진의 입매가 헤벌쭉 늘어졌다. 박 피디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드라마 나올 생각 없어요? 그쪽과 딱 어울리는 역이 하나 비어있거든.”
즉흥연기를 해보라니 하긴 했지만 명함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안이 벙벙해진 홍화가 박 피디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꽂힌 명함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윤진이 대신 명함을 받아 홍화의 손에 반 억지로 쥐여주었다.
“소속사 애들 중 한 명 쓰라는 압박이 들어오긴 했는데, 영 마음에 차는 놈이 없어서. 얼굴 알려진 놈들은 역할에 안 맞고……. 뭐,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니까. 그쪽 마음 내키면 연락 줘요.”
박 피디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홍화는 입을 쩍 벌린 채 아직도 석상이었다.
“적어도 이번 주 토요일까지는 연락 줘요. 안 주면 거절이라고 생각할게요.”
박 피디가 몸을 돌릴 때까지도 홍화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윤진이 팔꿈치로 매섭게 옆구리를 찍은 다음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리까지 반으로 접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크게 외쳤으나 박 피디는 이미 객석을 벗어난 뒤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객석에 대고 감사합니다, 를 세 번 연이어 외치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손에 든 명함이 현실성이 없다. 혹시 꿈을 꾼 건 아닌지 싶어 멀거니 서 있었다.
“설마, 꿈이겠지. 이게 현실일 리 없어. 현실일 리가.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가.”
깨려고 중얼거린 말에 윤진이 홍화의 볼을 거세게 꼬집었다. 쏙 들어갔던 눈물이 다시 튀어나오고 눈앞에서 별이 번쩍했다. 홍화는 얼얼한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윤진을 돌아보았다. 제 일인 듯 환하게 웃는 윤진의 뒤에서 신성한 후광이 일었다.
“누나……, 혹시 고향이 이북이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윤진이 홍화의 등허리를 팡팡 내려쳤다. 홍화는 현실이란 걸 깨닫고도 믿기지 않아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소식을 들은 명식이 버선발로 달려와 헥헥대며 진짜냐고 물었다. 윤진이 제가 더 신나서 콧대를 높이 세우고 그렇노라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명식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드디어 쥐구멍에 볕이 들었다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정작 희소식의 주인공인 홍화는 멍하기만 했다. 예전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했을 일이었다. 토요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당장 하겠다고 승낙했을 터였다.
연극과 달랐다. 연극은 변수가 많았고, 언젠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 저에게 기회가 온다면 준비된 모습으로 잡고 싶어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했다.
한데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라니. 꼬깃꼬깃 접고 구겨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인 꿈이었다. 다시 펴 볼 용기도 나지 않는 그런 바람이었다.
홍화는 비상구 계단에 앉아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날카로운 모서리로 지문을 쿡쿡 찌르자 둔탁한 통증이 찌릿찌릿 올라왔다. 따끔따끔한 고통도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과연 수락을 하는 게 맞는 길일까. 몸을 대라는 더러운 제안이 아닌데도 바로 연락을 주기는 꺼려졌다. 시험 삼아 모르는 남자와 하룻밤 보낸 그 날의 기억이 여태 생생했다. 그날의 비참함이 어제 일처럼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서 뭐 하냐.”
“어, 형.”
명식이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어깨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명식의 손에 따뜻한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한 잔을 홍화에게 주고서 그가 계단 위에 앉았다. 할 말이 많을 텐데도, 명식은 침묵만 지켰다.
“형.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하냐. 지혜 좀 빌려주라.”
홍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명식이 홍화를 힐끗 보더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선택이지, 뭘. 나, 이번에는 강요 안 한다. 너한테 진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겠냐. 다만…….”
“다만, 뭐.”
“기회라는 게 말이야. 참 드물게 오더라. 한번 놓친 기회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하고.”
그때 저가 걷어찬 건 기회였나. 오늘따라 입맛이 씁쓸했다. 입맛을 달랠 겸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따끈따끈하고 달콤했다.
“내가 너라면, 할 거야. 예전에야 절박해서 앞뒤 분간 못 했다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안 되면 돌아올 곳도 있는데 망설일 필요가 뭐 있겠어.”
돌아올 곳. 그 말이 마음 한구석에 박혔다. 포기하면 모든 게 사라지는 과거와 달랐다. 저를 받아줄 든든한 둥지가 있었다.
홍화가 명함을 손에 쥐고 명식을 돌아보았다. 앞을 쏘아보는 눈빛이 단호했다. 말하지 않아도 홍화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빤히 보였다. 명식이 피식 웃고는 얼른 다녀오라고 홍화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홍화가 아, 형! 하고 투덜대며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귀 끝이 발갛게 상기되어있었다.
∞ ∞ ∞
박 피디 앞에서 눈물 짠 걸로 발탁은 끝난 줄 알았더니, 두 번째 오디션이 남아있었다. 감독에 작가에 카메라까지 떡하니 놓여있는 곳에서 예고도 없이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박 피디야 어깨를 툭툭 치며 걱정 말라고 했으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홍화는 대본을 콧구멍으로 읽는지 목구멍으로 뱉는지도 모르고 연기를 끝마쳤다.
복도 의자에 앉아 한참 손톱을 질겅질겅 씹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박 피디의 강력한 추천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지만 불안했다. 한 명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간신히 잡은 줄이 바로 날아갈 수도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박 피디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입술도 미간도 딱딱하게 굳어있다. 홍화가 벌떡 일어나 차마 말도 걸지 못하고 박 피디만 애절하게 쳐다봤다. 박 피디가 씩 웃었다.
“됐네요. 축하해요.”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고 코가 땅에 닿도록 꾸벅꾸벅 인사했다. 말리지 않으면 밤새 인사하고 있을 듯해 박 피디가 홍화에게 설레설레 손을 저었다.
“우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네요. 가는 길에 계약서에 사인하고 대본 받아 가요. 요샌 결말 유출될까 봐 단역들도 다 와서 받아 가거든.”
대본을 품에 안고도 믿기지 않았다. 책 두께의 종이 뭉치를 성스러운 성물처럼 더듬다가, 위로 치켜들었다가, 품에 꼭 안았다가 별짓을 다 했다. 사랑스러운 동물이라도 되는 듯이 뺨이 비벼대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표지를 바라봤다. <라스트로드Last Road>라고 적혀 있는 글자가 그리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대본 리딩이 생각보다 이르게 잡혔다. 종이 끝이 닳도록 보고 이미 자기 분량은 다 외웠지만 다른 이들과 합을 맞춰본 적이 없어 적잖이 떨렸다. 혼자 가도 된다고 했거늘, 끝까지 우기며 데려다준 명식이 차 창문을 내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쳤다.
드라마 초보 티 내지 않겠다고 일찍 도착했더니 회의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테이블 위에 물병이며 펜을 놓던 스태프가 홍화와 눈을 맞추고 꾸벅 인사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홍화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구십 도로 허리를 꺾었다.
“이렇게 예의 바른 배우님은 또 처음이네.”
스태프가 소리 내어 웃고는 그렇게 인사할 필요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부끄러움에 목이 메어 턱 끝까지 올린 목 티를 잡아 내렸다. 배우, 그 단어가 홍화에게 주는 어마어마한 희열을 스태프는 모르는 듯했다.
조연들은 대부분 들어온 듯한데, 주연 배우들이 아직이었다. 대본 리딩을 촬영할 기자들이나 방송사 로고를 단 카메라만 구석에 즐비했다.
막판까지 주인공을 맡을 배우가 정해지지 않아 박 피디가 애를 먹었다는 소리는 들었다. 가장 유력하던 이 모 배우가 출연료와 소속사 문제가 얽혀 끝내 거절했다고 인터넷에 작은 뉴스가 떴었다. 주인공을 맡은 이가 누구일지는 몰라도 부디 유백영만은 아니길―그런 몸값 높은 인간이 케이블 드라마에 나온다니 말도 안 되지만― 바라며 홍화는 대본에 코를 박았다.
그토록 읽은 대본인데도 다시 읽으니 새롭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데도 모를 정도로 제 대사를 훑고 또 훑었다.
등장 부분을 몇 번 읽고서 고개를 드니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남자 주인공 자리만 비어있었다. 약속 시간 딱 오 분 전이다.
홍화는 긴장으로 목구멍이 바짝 말라 말없이 물을 들이켜며 주변을 살폈다. 다른 이들도 대본을 훑거나, 아는 얼굴이 있으면 작게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정각 일 분 전, 드디어 주인공이 들어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를 보다가 홍화는 하마터면 입에 든 물을 맞은편에 앉은 배우의 면상에 뿜을 뻔했다. 제일 늦게 들어온 주제에 고개를 빳빳하게 든 이가 홍화의 눈에 익었다. 물론, 그 면상을 모르는 인간이 이 나라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유백영이 제게 꽂혀 있는 시선들을 의식하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녜요. 약속 시간 맞춰 왔는걸. 여기 앉아요.”
박 피디가 상냥하게 권했다. 하필이면 또 홍화의 옆자리였다. 그날 밤 그 남자가 유백영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비슷한 얼굴에 체구를 보니 등골에 소름이 돋고 섬뜩했다.
홍화는 의자를 꼼질꼼질 움직이며 유백영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래봤자 겨우 몇 센티미터인데도, 그 사이에 두꺼운 벽이라도 세울 것처럼 절실하게 멀어졌다.
홍화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유백영이 홍화를 내려다봤다. 대본으로 얼굴을 가리려다가 너무 피하는 티가 날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이 꽂힌 볼이 따끔따끔했다.
“자,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죠. 안녕하세요, <라스트로드> 감독 및 연출을 맡은 김기호입니다.”
키가 땅딸막하고 뱃살이 펑퍼짐한 감독이 먼저 서문을 열었다. 작가가 이어 자기소개와 작품의 기획 의도를 말하고 나서야 배우들의 소개 시간이 돌아왔다.
자기소개라니. 언제 마지막으로 자기소개를 했는지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다행히 반대쪽부터 돌아가 생각할 시간은 벌 수 있었으나 머리를 팽팽 돌려도 상투적인 문장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홍화의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 가장 머리를 많이 굴린 순간이었다. 뇌에 과부하가 와 귓구멍에서 김이 솟을 때쯤, 옆에 앉은 유백영이 일어났다.
“강기성 역할을 맡은 유백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소개였다. 하필이면 홍화 본인이 나오는 장면에서 주고받는 대사가 가장 많은 인물을 맡았을 줄이야. 속이 새카맣게 탔다.
아득한 시간이 흐르고 기어이 제 소개 시간이 돌아왔다. 오디션을 볼 때도 이리 긴장하지는 않았다. 홍화가 두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객들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함께 연기할 이들의 시선은 꼭 가시 같았다.
“정호 역할을 맡은 이홍화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쁘게 봐주십쇼.”
이름을 뱉고 나서 아뿔싸, 혀끝을 물었다. 언젠가 카메라 앞에 서면 이준재라는 이름으로 서겠다 결심했는데, 어떻게 인사해야 하나에만 신경 쓰다가 본명을 뱉고 말았다. 박수에 묻혀 정정할 시간도 없었다. 이리저리 허리를 굽히고서 자리에 앉았다. 안이 후덥지근한지, 워낙 긴장을 해서 그런지 온몸이 홧홧했다. 손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혔다.
끝에 예쁘게 봐달라는 말은 굳이 안 붙여도 됐을까. 무대 버릇 못 버리고 뱉고 나서 홍화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다들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대본을 쥐었다.
<라스트로드>는 죽은 이를 볼 수 있는 영매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형사가 연쇄 살인범을 추적하는 이야기였다.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각 에피소드당 사건을 해결하고, 그 사건에서 연쇄 살인에 대한 증거를 하나씩 줍다가 결국에는 살인범을 검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홍화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을 맡았다. 한없이 순수하고 순박한 청년이었다. 영매와 같은 마을에 사는 청년으로, 마지막에는 반전으로 마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다.
「‘프라이멀 피어’ 봤어요? 에드워드 노튼 데뷔작이요. 그런 느낌이에요. 누구도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알아서는 안 돼요. 오히려 살인범 손에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지. 마지막에야 다들 속았다! 소리 지를 정도로 순하게 보여야 해요.」
대본을 안겨주며 박 피디가 주문한 내용이었다.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지만 누구도 장난으로 하지 않았다. 다들 이미 촬영에 임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하던 홍화도 분위기에 휩쓸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연기했다. 우는 장면에서는 정말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돈은 없고, 월세는 밀렸고. 아줌마가 빨리 내라고 재촉하니까 화가 났겠지. 그래서 회칼 들고 돌아와 찔렀잖아. 푹, 푹, 푹.』
백영이 손에 회칼을 든 것처럼 허공을 푹, 푹, 푹 내려 찔렀다. 홍화가 고개를 홱홱 저었다. 겁에 잔뜩 질려서,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도 눈물이 후드득 떨어질 듯했다.
『아녜요! 전 안, 안 그랬어요! 아, 아줌마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 해, 해줬는데요! 제가, 제가 어떻게 아줌마를 죽이냐구요. 별, 별이 불러줘요. 별이는 아줌마 봤을 거야. 아, 아줌마가 내가 죽였대? 내, 내가 죽였다고 했어? 아냐, 아니라고. 형사님, 전 진, 진, 진짜 아니에요.』
말더듬이 역할이었다. 홍화가 버들버들 떨며 고개를 돌렸다. 유백영이 대본에서 눈을 떼고 홍화를 마주 보았다. 선 깊은 눈매가 가늘어졌다. 연기에 몰입해 있던 홍화가 남자의 기이한 눈빛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죽은 사람은 말 못 해. 산 사람만 말하지. 그러니까, 개소리 말고 사실대로 불어.』
그다음은 장면 전환이었다. 홍화가 속으로 후우, 숨을 내쉬고 고개를 틀었다. 유백영과 눈을 마주치고 있기 어려웠다. 연기를 할 뿐인데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오래전 그 밤이 파도처럼 밀려와 발목을 타고 기어올라 왔다.
제 몫의 대사를 다 읽었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끝까지 자리를 보존하고 연기를 지켜봤다. 연기력만 보고 뽑았는지 다들 빈틈이 없었다. 특히 유백영의 목소리가, 다른 이들 대사보다 귀에 콕콕 박혔다. 낮고 풍성해서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항간에 얼굴이 잘생기면 발연기라는 속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다들 잘난 외모에 집중해 연기를 못 본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백영은 속설을 깨트리는 배우였다. 타고났는지 캐릭터 파악이 빠르고 제 것으로 흡수하는 데 능했다.
유백영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연기력은 인정해야 했다. 세상이 불공평한 거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 갖춘 유백영을 바로 옆에서 보니 입맛이 더욱 씁쓸했다.
아냐. 알고 보면 무좀으로 고생할지도 몰라. 잘 때 이를 득득 갈거나, 코를 심하게 골지도 모르지. 혹은 거시기가 새끼손톱만 해 털 속에 파묻혀 있거나. 여우와 신포도도 아니면서 홍화는 애써 유백영의 흠집을 잡았다.
대본 리딩은 장장 여섯 시간 만에 끝이 났다. 홍화는 기운이 쪽 빠져 의자에 늘어져 있다가 다들 일어나는 걸 보고 벌떡 일어났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배우들에게 꾸벅꾸벅 허리 아프도록 인사를 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명식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문자를 보내놨다.
“오늘 잘하던데요? 기 싸움에서 밀리지도 않고. 잘했어요.”
박 피디가 어깨를 토닥이며 칭찬했다. 기 싸움이고 나발이고 제 역할 하는 데 정신이 팔려 감지도 못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라 홍화의 가슴이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부풀었다.
“그런데 너무 연극 톤이에요. 발성도 그렇고. 드라마는 조금 다르니까 좀 더 연습해 오세요.”
바로 부푼 풍선에 바늘 콕이었다. 홍화가 허리를 똑바로 펴고서 알겠습니다! 목청껏 대답했다.
지상에 자리가 없어 지하에 차를 댔다고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명식의 차가 보이질 않았다. 명식에게 전화를 걸까 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소리에 명식인 줄 알고 돌아봤다.
홍화가 헉, 숨을 들이켜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유백영이었다. 프로필상 키는 190이던데, 그보다 커 보였다.
어차피 촬영 들어가면 계속 볼 텐데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한데 유백영을 똑바로 마주 볼 용기는 안 나 홍화는 핸드폰만 내려 보았다. 유백영이 손끝으로 어깨를 톡톡 치지 않았다면, 사실은 계속 모른 척하려고 했다.
“어……. 안녕하세요.”
홍화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캡 모자를 쓰니 그 밤 그 남자와 더 닮았다. 눈동자가 유백영의 시선을 피하려고 자꾸만 구석으로 도망갔다. 유백영이 홍화의 얼굴을 뚫어지라 보다가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홍화의 눈이 바닥에 굴러떨어질 만큼 커다랗게 벌어졌다. 평범하게 말할 때와 대사를 뱉을 때 목소리가 미묘하게 달랐다.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싸가지없는 반말 덕에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옥을 선사한 이가 유백영이었다.
유백영과 닮은 이, 가 아니라 유백영이었다니. 재수가 옴 붙어도 제대로 붙었다. 그래도 아직은 발 뺄 기회가 남아있었다. 홍화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뇨. 본 적 없는데요. 그리고 왜 초면에 반말이신지…….”
소 같은 눈망울을 느릿느릿 끔벅거리며 백영을 올려다봤다. 백영의 눈매 폭이 좁아졌다.
“초면 맞아? 너 나 본 적 없어? 몇 년 전에.”
“그쪽이야 티브이 틀면 나오잖아요. 만난 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하셨나 봅니다.”
홍화가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당장 도망가고 싶어 발이 움찔움찔했다. 최대한 유백영의 시선을 피하며 홍화가 곁눈질로 주차장을 살폈다. 명식의 차가 보이면 뛰어가려고 조금씩, 조금씩 유백영에게 멀어졌다. 유백영이 짐승같이 홍화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그런데 왜 도망가? 어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나.”
“어휴,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네. 그리고 듣자 듣자 하니까, 말 안 높이냐. 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어디서 반말이야. 혀 반 토막 났어?”
“너 몇 살인데.”
“너부터 밝혀.”
“내 나이 알고서 꼰대 짓 한 거 아냐. 너도 말 놨으니 이제 억울하진 않겠네. 그래서, 너 나 본 적 있어, 없어.”
“없다고 몇 번 말해? 이거 놔.”
홍화의 촉이 맞았다. 홍화는 원래 유백영의 눈빛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봐라, 똑같이 굴어줬더니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본다. 동영상으로 찍어 윤진에게 보여주고 유백영의 성격이 이렇게 더럽다고 외치고 싶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장면을 생중계해 속고 있을 불쌍한 팬들에게 진실을 알리자는 영웅 심리마저 일었다.
“아냐. 너 맞아. 구라 까는 거잖아, 지금.”
“증거 있어? 증거도 없으면서 지랄이야.”
“증거가 왜 필요해? 지금 가서 자보면 알 거 아냐. 가자.”
“어딜 잡아! 이거 안 놔, 이 미친놈아!”
홍화가 지하주차장이 쩌렁쩌렁하게 악다구니를 썼다. 유백영이 손목을 붙잡고 그 밤처럼 홍화를 잡아끌었다. 홍화가 꽥꽥 시끄럽게 굴자 입까지 턱 막았다. 홍화가 온몸에 힘을 주고 뒤로 뻗대자 백영이 돌아봤다. 눈가에 짜증을 그득 묻히고서 홍화의 손목을 탁 소리 나게 버렸다.
“존나 시끄럽네. 안 끌고 갈 테니까, 그럼 다른 걸로 증명해.”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 말해. 귓구멍 막혔어? 내 말 안 들려? 여보세요?”
“울어봐.”
남 말은 듣지도 않았다. 뜬금없이 박 피디 같은 주문만 던졌다. 이전에 극단 사람들이 주문한 내용과도 같았다.
“뭐?”
“울어보라고. 우는 거 보고 아니다 싶음 내 갈 길 갈 테니까.”
백영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우는 모습이 기억과 다르면 보내주겠다는, 극도로 본인 위주의 제안이었다.
유백영의 말을 얌전히 따르기도 싫거니와, 혹 우는 걸 보고 유백영이 그놈이 이놈이란 걸 알아차리는 것도 막아야 했다.
“아까도 울먹였잖아. 연기 꽤 하던데, 우는 건 일도 아니겠지. ……울어보라니까. 빨리. 아니면 도와줘?”
유백영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홍화는 두 걸음 물러났다. 유백영의 주먹에 시선이 꽂혔다. 아직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홍화에게 꿀밤을 먹이던 양아치들의 주먹보다 배는 큰 듯했다.
침을 꼴깍 삼키고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여기서 냅다 뛴다 하더라도 다리 길이 차이 때문에 몇 걸음 도망치지도 못하고 잡히리라. 정말 울고 싶은 상황이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만 애타게 찾았다. 홍화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아 기적이 일어났다. 주차장 바닥과 차바퀴가 부딪치며 날카롭고 높은 소음을 냈다. 홍화가 무인도에 떨어졌다가 통통배를 발견한 사람처럼 고개를 번뜩 들었다.
“아이고, 명식이 형!”
구세주가 등장했다. 저쪽에서 명식을 발견한 홍화가 반색하며 두 팔을 번쩍 들고 뛰어갔다.
홍화가 토끼보다 날래게 명식의 차에 올라탔다. 명식이 잘하고 왔느냐 묻는 말에 대답도 못 하고 헐떡이다가, 안전벨트를 붙들고 얼른 출발하라고 닦달했다.
“빨리 가, 빨리, 빨리!”
머뭇거리다가 뒤쫓아 오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홍화가 사색이 된 얼굴로 명식을 재촉했다. 놔두면 조수석에서 발을 뻗어 저가 액셀을 밟을 기세였다. 명식이 어, 어 하다가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