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31)

16746522732042.jpg

아이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마이크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는 촌스러운 노래였다. 판정단이 노래 한 곡 더 뽑으라고 부추겨 선택한 노래였다. 긴장이 역력한지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노래가 끝나자 방청객이 예의처럼 박수를 보냈고, 아이는 주먹을 움켜쥐며 판정을 기다렸다. 아이에게 희망만 주어도 모자랄 터인데, 방송에 재미를 곁들이고 싶은지 판정단의 점수가 짜고 날카로웠다.

그래도 아이는 노래 가사를 이루었다. 적어도 카메라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나. 홍화는 비식거리다가 핸드폰을 뒷좌석에 집어 던졌다. 심지어 애한테도 치졸하게 열등감을 느끼다니, 안 그래도 초라한 저 자신이 바닥을 기는 버러지 같았다. 우울한 마음에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에 기댔다.

잠시 우울을 즐길 틈도 없다. 드르륵, 차 문이 열리고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는 명식이 턱짓했다.

“여기서 뭐 해. 빨리 안 움직여?”

“아, 어차피 그쪽 정신없잖아. 좀만 쉬게 해주지. 여기 온다고 새벽같이 깨웠잖아.”

“오는 동안 내내 처잤으면서 무슨 소리야. 얼른 나와!”

굼벵이를 쪼아대는 닭 부리처럼 명식이 콕콕 쪼아댔다. 홍화가 구시렁거리며 좁은 차에서 내렸다. 햇볕이 은색 재킷을 비춰 눈이 부셨다. 제주도 바다를 화려하게 헤엄치는 은색 갈치가 모티브라며 가게 주인이 훤히도 웃었더란다. 주머니에 꽂아둔 시장표 선글라스를 척 하니 쓰고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역의 작은 축제였다. 고추 축제였던가, 콩나물 축제였던가. 비몽사몽간에 명식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영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른 무대 앞 간판을 보고 축제 이름을 확인했다. 고추 축제였다. 가는 길에 고추나 선물로 한 박스 받아 갈까 싶다.

무대 앞에 앉은 이들이라곤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한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간간이 머리가 뽀글뽀글한 아주머니들이 유일한 젊은 피였다. 이거라도 어딜까. 흘흘 웃는 노인네 서너 명 있던 노인정에서 노래 부른 적도 있는데. 이 정도면 단독 콘서트급이었다.

앞서 각설이 공연이 끝나서 그런지 분위기가 제법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망칠 수야 없지. 홍화는 뺨을 짝짝 소리 나게 치고 얼른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명식이 잘하고 오라며 뒤에서 파이팅을 외쳤다.

사회자의 맛깔 나는 소개와 함께 홍화가 무대에 올랐다. 흥 오른 노인들이 소녀 팬처럼 두 팔을 들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노래에 걸맞은 몸놀림이 돈 주고 고용한 백댄서보다 훌륭했다.

“청양 고추 축제, 파이팅!”

마이크를 두 손 검지와 엄지로 조신하게 들고 힘차게 외쳤다. 노인들이 껄껄 웃으며 호응해줘서 다행이었다. 새끼손가락을 야무지게 든 홍화가 목청을 높였다. 차 안에서 우울하게 가라앉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또 라면이냐.”

“다음에 돈 들어오면 고기 살게. 좀만 참아.”

동전을 닥닥 긁어모아 사 왔는데도 밥투정이었다. 그래도 명식이 없었더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정이라 홍화는 젓가락만 얌전히 상 위에 놓았다.

누구는 축제 한 건 뛸 때마다 기백씩 번다는데. 홍화에겐 해당 사항 없는 말이었다. 아끼고 아껴 일주일간 먹고살면 그만일 돈이었다. 이쯤이면 포기하고 다른 길을 알아볼 법도 하건만, 미련이 무언지 홍화에겐 그놈의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티브이에 나오겠다는 일념으로 연극 동아리에 뛰어들었다. 고등학생 때 일이었다. 어차피 공부는 뒷전이라 온 힘을 다해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동아리가 발전해 극단이 되었고, 단역을 맡아 무대 위에도 서봤다.

무대에 서는 게 좋았다. 박수갈채가 좋았고, 조명 아래서 구질구질한 자신이 사라지는 게 좋았다. 연기를 할 때만큼은 현실이 생각나지 않아 행복했다. 운이 좋아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우수에 찬 첫사랑 역할이었다. 이렇게 인지도를 쌓고 연기도 하고 영화도 찍고 상도 타고.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그 길이 잘 깔린 고속도로가 아니라 자갈 깔린 비탈길임은 뒤늦게 깨달았다. 내리막길의 연속, 아니, 애초에 내리막길의 가장 낮은 곳에서 빌빌 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회사에 취직하면 달에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받으며 살 것을. 홍화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돈도 인맥도 심지어 소속사도 없다. 그나마 괜찮은 얼굴은 카메라에 안 받는다는 이유로 족족 떨어졌다. 무턱대고 작은 기획사에 들어갔다가 트레이닝비 명목으로 돈만 뜯기고 버려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무대에 서고 싶은 열망은 포기할 수 없어 돌고 돌아 선택한 것이 결국 트로트 가수였다. 그조차도 인지도가 없는 수준이라 명식이 지역 축제라도 물어다 주면 그곳이 섬일지라도 배 타고 달려가는 실정이었다.

“형은 뭘 믿고 내 옆에 계속 있어? 물론 난 나중에 대박 터트릴 거지만. 긁지 않은 복권은 맞지.”

명식은 같은 동네 출신 형이었다. 연극단에 입단하게 된 것도 명식의 공덕이 컸다. 전생에 악연이 깊은지, 아니면 연극단을 소개해준 책임을 지겠다는 건지 제 옆에서 고생을 자처하고 살았다. 잘 살고 있는 사람 괜히 가시밭길 걷게 하는 듯해 죄책감도 컸다. 언젠가 최고의 배우가 되어 이 은혜 갚겠노라 입에 발린 말만 수천 번이었다.

“몰라, 새끼야. 내가 왜 너 같은 거에 코 꿰여서……. 그래도 요새는 축제 기간이라 돈은 좀 들어와 다행이지. 다음 주에 하나 더 잡아놨으니까 옷이나 골라놔.”

“주희 누나한테는 소식 없어?”

“걔 요새 딴 애들 곡 주느라 바쁘다. 저번에 작곡한 거 하나 빵 떴잖아. 그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요. 야, 원로들보다 젊은 애들한테 인기가 아주 터졌어. 네가 가서 애교 좀 떨어서 받아와 봐라.”

아는 작곡가라고는 강주희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곡을 받고 싶어도 보통 정해진 가수가 있어 새로운 길을 뚫기 어려웠다.

홍화가 툴툴대며 티브이를 틀었다. 좁은 단칸방에 비해 화면이 커다랬다. 다른 곳에는 동전 한 닢도 벌벌 떨면서 티브이만큼은 할부를 끊어가며 큰 걸로 샀다. 언젠가 저가 티브이에 나오면 저렇게 큰 화면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로 주제넘은 사치를 부렸다.

“나는 나중에 뜨면 꼭 차 광고 찍을 거야.”

홍화의 꿈이었다. 차 앞에서 멋들어진 슈트를 입고 우아하게 서서 비싼 손목시계를 흘긋 보는 그런 장면.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얼씨구.”

명식이 비웃었지만 홍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면 안에서 유백영이 홍화의 상상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차 광고인지, 유백영 헌정 광고인지. 오늘 본 인터넷 뉴스에서 유백영의 광고 효과가 기적적이라며 떠들었던 게 떠올랐다. 평온하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난 저 새끼 싫더라. 눈빛이 별로야.”

“야, 질투 추하다.”

홍화는 유백영이 싫었다. 유치한 질투라고 해도 할 말 없음이나 유백영의 눈매며 눈빛이 불편했다. 남들은 반항적이다 묘하다 떠들지만 홍화에겐 저를 괴롭히던 양아치 같았고 굶주린 짐승처럼 보였다. 큰 키에 칭송이 자자한 몸매도 멋있다기보다 사냥하려고 몸 부풀린 육식동물 같아 정이 안 갔다.

“진짜야. 형은 못 느껴? 눈빛이 존나 더럽잖아. 저 새끼 분명 뒤가 구릴 거야. 군대나 갈 것이지.”

“쟤 다녀왔어. 최전선으로. 제대한 뒤에 인터뷰한 거 못 봤냐. 원래 미국 시민권 있어서 안 가도 되는데 간 거라 다들 칭찬했잖아. 넌 뭐 어제 출소했냐.”

뭐라도 흠집 잡고 싶어 떠들었다가 머쓱해졌다. 괜히 리모컨을 꾹꾹 누르며 채널을 돌렸다. 마침 멈춘 채널에서도 유백영이 나왔다. 손익분기점을 훨씬 넘긴, 소위 말해 대박 난 영화였다.

“너보다 어린데 연기도 잘하지, 잘생겼지, 잘 나가지, 성격 좋지. 그래, 네 질투 이해한다.”

“쟤 성격 좋대?”

“뭐 나쁜 말은 안 돌던데? 매너 괜찮다는 소리 많아.”

입으로는 명식과 떠들며 시선은 화면에 고정했다. 홍화도 본 영화였다. 유백영이 나온다는 소리에 안 보려다가 명식의 등쌀에 못 이겨 영화관까지 가서 봤다. 기분 나쁜 눈매와 달리 연기는 훌륭했다. 기회주의자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정의의 편에 서서 제 목숨을 버리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인물 그 자체인 양 위화감이 없었다. 나름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어 홍화는 본인 연기는 몰라도 남 연기는 잘도 평가했다.

화면을 꽉 채운 유백영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졌다. 좀 전에 먹은 라면이 얹힌 것일지도 모른다.

“야, 설거지 안 하고 어디 가!”

“아, 라면 내가 끓였잖아! 설거지는 형이 해!”

명식에게 발끈 신경질을 부리며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찬바람이 콧구멍을 찌른 뒤에야 답답증이 눈곱만큼 가셨다.

∞ ∞ ∞

돈이 떨어질 만하면 명식이 일거리를 물어와 배곯는 일은 없었다. 가끔 휴게소에서 음반 판매하는 매대 앞을 서성이다가, 빨갛고 반짝거리는 재킷을 입은 제 얼굴이 보이면 몰래 하나둘 집어 오기도 했다.

첫눈이 오는 그 날에도 미래는 여전히 어두워서 큰맘 먹고 점집을 찾았다. 명식이 뭐 그런 미신을 믿냐고 구박하다가 저가 먼저 돈을 내고 무당의 말을 경청했다.

“자네가 전생에 저치한테 어마어마한 빚을 졌어. 이번 생에 저치한테 잘해야겠네.”

무당이 턱 끝으로 홍화를 연신 가리키며 명식에게 당부했다. 볼 거 하나 없는데도 왜 이렇게 도와주나 했더니, 기억도 나지 않는 전생 인연이 원인인가 싶었다. 명식도 납득한 듯 쉴 새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는 언제쯤 뜰까요.”

명식의 상담이 끝나자마자 물었다. 이 바닥을 벗어나야 하냐고는 아예 묻지 않았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평범한 아주머니처럼 생긴 무당이 손가락을 접으며 요건 아니고, 요건 맞고 하며 중얼댔다.

“고생 끝에 낙이 오겠네. 근데 고생이 길어.”

“많이 길어요? 내년에도 힘들까요?”

“입에 풀칠만 간신히 하는 정도인데……. 딴따라 인생이 그렇지, 뭐. 근데 자기,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명식이나 연극 동아리 사람들이 전부였다. 연인이 있냐고 묻는가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무당이 스읍, 길게 숨을 들이켜며 볼펜 끝으로 낙서가 가득한 공책을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 인연이 있네. 이 인연 잘 물면 일이 풀리는 게 좀 더 빠를 수도 있겠어. 악연 같지만 귀인이니까 잘 잡아. 무조건 잡아. 이거 놓치면 인생이 말짱 황이니까 악을 쓰고 잡아.”

“무슨 인연이요? 언제 만나는데요?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온대요?!”

홍화가 책상을 손으로 쥐고 상체까지 앞으로 쭉 기울이며 무당을 닦달했다. 알기만 한다면야 발목에 매달려 울부짖는 한이 있더라도 붙잡을 각오가 있었다.

“북쪽.”

“북쪽이라고요. 북쪽. 북쪽.”

가슴과 머리에 깊이 새길 요량으로 무당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북쪽에서 귀인이 온다. 그게 삼도천 건너자는 저승사자라도 귀인이라 여길 거라며 홍화는 명식과 손을 맞잡고 찬란한 미래를 그렸다.

겨울이라 일거리가 줄었다. 지역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이라도 불러주면 감사합네 달려갈 텐데, 그 정도 인기도 없었다. 주희에게 온갖 애교를 부려 간신히 새 음반을 냈지만 이번에도 휴게소 테이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녹음하는 동안 트로트는 구성진 가락이 생명인데 AI 음성 같다고, 애교 떨 때처럼 콧소리도 내고 성대도 떨어보라고 잔뜩 잔소리를 얻어먹었는데도 결과는 슬프기만 했다.

북쪽의 귀인은 언제 오는지. 명식은 그 말에 혼을 판 듯 북쪽과 한 걸음이라도 떨어진 곳에서 왔으면 허리를 굽실거리며 명함을 뿌렸다. 홍화도 포도청 같은 목구멍 채우겠다고 명식 옆에서 땅바닥에 코끝이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보일러를 넣어도 웃풍이 들어 방 안이 추웠다. 연극부 단원들이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고 불렀는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나갈 수가 없었다. 지긋지긋한 가난 같으니.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았다. 아직 철모르는 애처럼 언젠가 뜨겠지, 하며 속만 초조하게 태우고 있었다.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코를 훌쩍이며 채널을 돌렸다. 화면이나 들여다보며 현실을 잊고 싶건만, 벨 소리가 목덜미를 잡고 현실로 끌어냈다. 문자로 모자라 전화까지.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할 사람이었다. 아니나 달러, 받자마자 대뜸 당장 나오라고-! 하며 소릴 질렀다. 주변이 벌써 시끌시끌했다.

“바빠서 못 나가는 거야. 바빠서!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데!”

―아이고, 귀한 얼굴을 티브이에서라도 뵈어야 하는데 대체 어디에 출연하셨을꼬? 됐고, 나와 새끼야. 형이 사줄게.

“아냐. 진짜 바빠서 그래. 일 끝나면 갈게.”

사정 다 아는 이여도 쥐뿔만 한 자존심을 뻗대며 거절했다. 핸드폰 너머로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웃음이 이런 사람인 건 알지만, 자격지심 때문인지 비웃음으로 들렸다.

―조명식도 바쁘다고 하더니 이홍화 너도 그러냐. 둘 다 잘하는 짓이다.

“이준재야. 이름 바꾼 지가 얼마인데 아직까지 옛날 이름으로 불러.”

연예인이 되고자 마음먹은 날 지은 가명이었다. 홍화라는 이름은 기생 같다며 명식이 추천해준 새 이름이었다. 정작 명식도 홍화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준재나 홍화나. 홍화야. 명식이랑 같이 나와라. 애들이 너 많이 보고 싶어 한다.

손가락만 꼼질거리며 애먼 바닥만 긁었다. 노란 장판이 뜨끈뜨끈했다. 코끝은 추워서 빨개졌는데도. 전화 건 이가 있는 그곳은 따뜻할 것 같았다.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무렵, 문이 벌컥 열리며 명식이 들어왔다. 연말 모임 간다고 하더니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왔다.

“잠깐만. 명식이 형 왔다. 형이랑 이야기하고 연락할게.”

갈 거면 명식과 같이 움직이는 게 낫다. 혼자 가면 환영 받아도 초라했다. 전화를 끊고 명식을 돌아봤다. 명식이 비틀거리다가 현관문에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소주 냄새와 담배 냄새가 풀풀 났다.

“형, 나오라고 하던데. 같이 갈까?”

대답이 없다. 혹시 곯아떨어졌나 싶어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명식이 벽에 머리를 기대고 크흐흐, 웃다가 크흑흑, 하고 울먹였다. 술에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다. 아직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제대로 술을 부었는지 냄새가 고약했다.

이래서는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 앓는 소리 해대는 명식을 버릴 수 없어서, 도저히 갈 상황이 아니라고 문자를 보냈다.

“어후, 냄새.”

코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면서도 홍화는 끙끙대며 명식을 이부자리로 옮겨줬다. 소매가 닳은 패딩도 벗겨주고 구멍이 난 양말도 벗겨줬다. 명식이 추운지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파고들었다.

숙취 음료를 사 오려고 패딩을 걸쳐 입으려는 때였다. 명식이 번뜩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덜 취한 듯 눈이 또랑또랑했다. 홍화를 보더니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한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땅이 꺼질 만큼 무거운 한숨이었다.

“형,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얼굴도, 입술도 거칠다. 명식이 입술 거스러미를 잡아 뜯으며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뭘 말하고 싶은데 도저히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초조해했다. 머리도 엉망으로 헝클어놓고 바닥만 뚫어지라 보았다. 답답한 홍화가 무슨 일이냐고 캐어묻자, 이내 결심한 듯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대본 들어왔다.”

말도 안 돼. 홍화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뭐? 진짜? 정말? 거짓말 아니고? 형, 나 속이는 거 아니지?”

손을 벌벌 떨면서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진짜 대본이었다. 빛에 비춰 보고 눈을 비벼 보고 난리를 쳐도 대본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홍화는 산타한테 선물 받은 애처럼 종이 뭉치를 품에 안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어깨가 절로 으쓱이고 몸이 공중으로 붕붕 뛰어올랐다. 어떤 역할이든―그게 스쳐 지나가는 단역이라도― 무슨 상관이랴. 마음 같아선 맨몸뚱이로 바깥에 나가 만세를 부르며 뛰어다니고 싶었다.

신나게 궁둥이를 씰룩이며 춤까지 췄는데, 평소라면 손가락질하며 웃을 명식이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형, 왜 그렇게 우울해? 캐스팅이 됐는데! 이제 티브이에 나오는데! 우린 살았어!”

오디션도 없이 바로 캐스팅이라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점괘가 들어맞았다.

홍화가 벌써 연말 시상식에 초대받은 것처럼 야단법석을 피워도 명식은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조촐하게 파티라도 열까 계획하던 홍화가 명식의 기색이 수상해 그 앞에 마주 앉았다. 들여다본 낯빛이 저승사자 피부처럼 퍼렇고 거뭇거뭇했다.

“홍화야…….”

“응. 형.”

“그게, 근데 그거……. 한 번 대줘야 한단다.”

“……응?”

잘못 들었나. 홍화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되물었다. 명식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잘못 들은 말만큼 지독하지는 않아서 참았다.

“조연이긴 한데 비중이 꽤 있는 역할이야. 많이 나오고……. 근데 그 새끼가 변태라 한 번만 대달라고 하더라. 알지? 김 감독 그 새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두꺼비 같은 낯짝에 눈이 축 처지고 덩치가 커다란, 그런 사람이었다. 능력은 있되 손속이 더러워 그의 작품에 들어가려면 몸이든 돈이든 대주는 건 필수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꺼지라고 하려고 했는데, 거절하려고 했는데, 너 평생소원이잖아. 드라마 나오는 거. 그래서…… 눈 딱 감고 받아 왔다.”

“……형.”

“네가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받아 오기만 한 거야. 싫으면, 거절해도 되니까.”

명식이 변명처럼 주절거렸다. 차마 홍화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이 애먼 바닥만 헤맸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홍화의 손아귀에서 종이 뭉치가 있는 대로 구겨졌다. 차마 갈기갈기 찢지는 못하고, 홍화는 처참한 표정으로 대본을 내려다봤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던 기분이 단번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이 바닥이 더러운 거 모르는 사람 있던가. 연극단원 중에 잘 풀려 영화에 캐스팅된 사람도 크랭크인 바로 전날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됐다는 소식도 들어봤고, 건너건너 누구는 스폰을 받았다가 단물만 빨리고 버려졌다는 말도 들었다. 다 저하고는 먼 소리였다. 저는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더러운 길 걷지 않고 차근차근 쌓아 올라가 정상을 밟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이 이러면 안 되지.”

화가 났다.

“형이 이러면 안 되잖아.”

홍화가 대본 쥔 손을 높이 들었다. 벽에 내동댕이치고 싶어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마 던지지는 못했다.

“형은 다 알잖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괜찮다고, 바른길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위로한 사람이.

“……알아! 안다고! 네 그 좆같은 가정사 누가 모른대? 근데 어쩌라고! 너 평생 이 바닥에서 빌빌 길 생각이야? 기회는 올 때 잡아야지 어쩔 거야! 너 같은 새끼들 쌔고 쌨어! 당장 그 역할도 딴 새끼들한테 넘긴다는 거 내가 사정사정해서 받아 온 거 알기나 해?!”

“형!”

지지 않고 맞고함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제 분을 못 이기고 씨근덕거리던 명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옷자락 잡고 말리고 싶건만, 저도 분을 삭이느라 뛰쳐나가는 명식을 잡지 못했다.

종이만 꾹 쥐고 있다가 벽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엉망으로 구겨진 대본을 보고도 화가 식지 않았다. 누런 종이가 저에게 현실 참 모른다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참담하고 끔찍해서 도저히 저 종이와 한 공간에 있을 수가 없었다. 씨발, 욕을 짓씹어 뱉고 홍화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막상 나왔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카페에 들어가려 해도 주머니엔 맨 동전만 굴러다녔다. 낡은 패딩 하나에 의지해 코를 훌쩍거리며 정처 없이 걸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거리가 찬란했다. 어디를 돌아봐도 반짝이는 전구와 크리스마스트리만이 가득했다. 카페 안의 주홍빛 조명은 따스해 보였고 목도리를 동여매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또한 걱정거리 하나 없어 보였다. 세상의 모든 걱정이 제 등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가 서 있는 곳만 차갑고 어두운 듯해 홍화는 걸음을 서둘렀다.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고 걸었다. 찬바람이 귀와 코를 시뻘겋게 얼리고 지나갔다. 코딱지만 한 단칸방이라도 돌아가면 뜨뜻하겠거니와, 대본이 거기 있다는 생각에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반대편으로 걸었다.

목적 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강물 앞이다. 동전을 긁어모아 편의점에서 소주를 한 병 샀다. 안주도 사고 싶었는데 주머니 사정이 저처럼 초라했다. 홍화가 비식거리며 소주를 들고 강과 마주 앉았다. 추운 날씨에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살하고 싶다.”

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있을까. 몇 명이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소주를 들이켜니 그마저도 쓱 지워졌다. 당장 물에 빠져 뒈진다 한들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슬퍼할 이도 없고, 상황은 최악이고. 최선의 선택은 자살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좆같다, 진짜.”

세상이 언제는 친절했던가. 누구도 원치 않았는데 태어났고, 누구도 키우고 싶지 않아 했기에 알아서 자랐으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 쳤다.

제 인생은 원래 좆같았다. 나아질 희망도 안 보였다.

소주가 달았다. 반병을 후딱 비우고 잠시 옆에다 내려놨다. 이 정도로는 취하지 않았다. 예전에 오디션 좀 보겠다고 부지런히 발품 팔며 술자리란 술자리는 다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소주 두 병이면 죽어 나갔던 주량이 그때를 빌려 소주 네 병 정도로 늘어났다.

“이름이 기생 같아서 그런가. 노래 팔고, 웃음 팔고, 몸도 팔라고 그러나. 무슨 팔자가 이렇게 좆같지.”

명식을 향한 분노는 가라앉았다. 자조감만 무럭무럭 자라났다. 애초에 태어나길 잘못 태어났다. 누구 씨인지도 모르게 어미 배 속에서 자라났다. 배가 영 부르질 않아 임신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어느 날 배가 아파 똥을 누려고 끙, 힘을 줬더니 저가 나왔다고. 담배 연기 뿌연 방에서 그녀는 항상 너 따위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홍화를 원망했다.

죽도록 놔뒀어야 했는데. 고아원에 버렸어야 했는데. 젖이 아프게 불어서 물려줬더니 고 목숨 부지하겠다고 쪽쪽 빨았다더라. 빌어먹을 모정이 뭔지, 그래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방에 놔뒀다더라.

“인생, 씨발.”

옛날 생각이 떠올라 더욱 기분이 저조해졌다. 병 주둥이를 입에 물고 병을 뒤집어도 술이 한두 방울 떨어지고 말았다. 혀를 길게 빼고 그 위에 탈탈 털어도 야속하리만치 안 나왔다.

쨍그랑, 병 깨지는 소리에 홍화가 고개를 돌렸다. 제 소주병은 아직 손에 무사히 잡혀 있었다. 저 멀리서, 방금 병을 집어 던진 남자가 새 소주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주머니에 돈은 없고, 소주는 더 마시고 싶고. 홍화는 염치 불고하고 남자한테 소주 한 병 빌리고자―절대 공으로 얻어먹는 것이 아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덩치가 커다란 이였다. 다리를 구부렸는데도 그 길이가 숨겨지질 않았다. 등판은 어떻고. 어디서 운동깨나 했는지 어깨와 등이 과장 보태 축구장 같았다. 얼굴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턱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홍화가 다가가자 남자가 소주병을 쥐고 마스크를 코까지 끌어 올렸다. 쓱 노려보는 기색이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홍화는 다른 이에게 애교를 부릴 때 그러는 것처럼 배시시 웃었다. 남자의 눈빛이 전보다 험악해졌다. 소주 한 방울이 간절한 홍화는 굴하지 않았다.

“저, 소주 한 병만 빌려주세요.”

검지까지 치켜들고 사정했다. 남자가 홍화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눈매가 무척이나 사나웠다.

“딱 한 병만. 나중에 갚을게요.”

진짜였다. 남자의 연락처를 받아놓을 생각이었다. 남자가 무시하며 강가로 고개를 돌렸다. 이쯤이면 자존심 상해서 돌아갈 만도 한데, 홍화도 오기가 생겼다. 남자 옆에 철퍼덕 주저앉아 그 옆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이거 거지새끼 아니야. 꺼져.”

“갚는다고. 꼭 갚을게. 나 거짓말 안 해.”

남자의 반말에 홍화도 말을 낮췄다. 남자가 어쭈, 이거 보라는 시선으로 홍화의 얼굴을 살폈다. 홍화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평생 먹은 눈칫밥이 남자의 눈을 피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뭔지는 몰라도 피하면 좋지 않을 거라고, 야밤에 만난 산짐승 보듯이 마주 보라고.

마스크 안에서 피식, 비웃음 소리가 났다. 남자가 마음을 바꿨는지 비닐봉지에서 소주병 하나를 꺼내 홍화에게 건넸다. 홍화가 반색하며 병을 건네받고 목말랐던 사람처럼 꿀꺽꿀꺽 들이켰다. 몇 분 전만 해도 죽고 싶더니만, 남자에게서 술을 얻어냈다는 기쁨에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안주도 먹어도 돼?”

“먹어라, 먹어.”

남자가 포기한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홍화가 희희낙락하며 과자에도 손을 뻗었다. 마치 오랜 지기처럼 남자 옆에 앉아 안주 한 번, 소주 한 번 번갈아 속에 부었다.

한 병을 더 비우자 얼큰하게 술이 올랐다. 그간 묵묵하게 술만 마시던 남자를 돌아봤다. 마스크를 내려 코와 입술이 보였는데, 우뚝한 콧대와 입술이 참으로 잘생겼다. 누구를 닮은 것도 같은데, 술에 취해서 누구인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홍화는 미간을 구기고 끙끙 소릴 내며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콧대와 입술만으로도 자기 존재가 뚜렷한 그 사람이 떠올랐다.

“유백영. 그쪽 유백영 닮았네. 그런 소리 많이 듣지?”

남자가 세 번째 소주병을 멀리 집어 던졌다. 남자의 눈이 커다래졌다가 도로 가늘어졌다.

“어.”

“그 새끼 존나 닮았네. 당신도 세상 살기 좆같겠다.”

유백영일 리는 없었다. 지폐를 허공에 뿌려도 안 아까울 인간이 이 추운 날 강변에서 소주 따위를 깔 리가. 그런 궁상맞은 짓은 저에게나 어울렸다.

“유백영 닮으면 세상 살기 좆같나?”

“좆같지. 진짜 아니면 다 좆같은 세상이야.”

홍화가 허허허, 맥없이 웃었다. 남자가 네 번째 소주 뚜껑을 땄다. 저에게 주어진 술을 다 마신 홍화가 입맛을 쩝 다시며 남자 손에 들린 병을 쳐다봤다. 눈빛이 지나치게 애처로웠는지, 남자가 제 입에 가져다 대려다가 홍화에게 넘겼다. 홍화가 히죽대며 소주 두 병 빚은 꼭 갚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세상이 왜 좆같은데.”

둔치에 다다랐을 때만 해도 추웠는데, 술기운 덕에 귀도 볼도 목도 홧홧했다. 뜨뜻한 술기운에 힘입어 보통 때라면 웃어넘겼을 질문에 답해주고 싶어졌다.

“몸 팔라더라.”

“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한 번 대달래. 그럼 주겠대. 엄마도 몸 팔고 살아서 씨발, 난 그렇게 안 살려고 존나 발버둥 쳤는데 나도 몸 팔라네. 엄마나 아들이나 인생 똑같이 살라네.”

생각 외로 덤덤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눈물도 안 나왔다. 울컥했다가도, 모두 허무해졌다. 뭣 때문에 그리 발버둥 치고 사나 싶었다. 어차피 뒈지면 썩을 몸뚱어리, 눈 한번 딱 감으면 소원을 이룰 텐데.

“제안한 사람이 남자냐?”

“응.”

“…….”

“너라면 어쩌겠냐.”

남자가 대답 대신 소주를 들이켰다. 홍화도 술을 들이켜고 강물만 바라봤다. 가로등 불이 강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발끝만 닿아도 얼어붙을 것이 분명한데, 제가 앉아있는 이곳보다 따뜻해 보였다. 풍덩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나랑 같네. 나도 그렇거든.”

“뭐가.”

“나한테도 몸 팔라는 제안이 왔다고. 씨발, 할 게 없어서 후장을 파이고 싶어 하냐. 미친 새끼.”

목소리에서 분노가 들들 끓었다. 소주병이 제안한 이의 목줄이나 되는 듯이 손등에 관절 도드라지게 쥐었다. 그 꼴을 보고 홍화가 푸흐흐 웃었다. 세상에 저가 제일 끔찍한 상황인 줄 알았더니 똑같은 처지인 사람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할 거야?”

“씨발, 안 해!”

남자가 속 시원히 내질렀다. 홍화가 배를 잡고 까르륵 웃었다. 저도 저렇게 단호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명식이 피 토하듯 외친 말이 떠올랐다. 언제까지 바닥을 구를 거냐고. 돈 없어서 라면만 줄줄이 먹는 주제에 언제까지 자존심 세울 거냐고.

“난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연기를 하고 싶었다. 취미에도 없는 트로트 타령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사랑도 고프고 돈도 고팠다. 골방 신세가 지겨웠다. 한 발자국만 눈 딱 감고 떼면 편할 길인데. 마음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었다.

죽어도 싫지만, 해도 죽지는 않는다.

험난한 가시밭길이 어려웠다. 조금 많이 지쳤다. 간단하고 빠른 지름길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넌 할 거냐?”

남자가 물었다. 홍화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었다.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 신세였다. 추운 겨울 굶어 죽을 일만 남은. 개미가 안락한 개미굴을 들춰 보이며 유혹하고 있었다. 개미들에게 뜯어 먹힐는지 아니면 겨울을 무사히 보낼는지 아무도 모른다.

“야, 고개 들어봐.”

남자가 명령했다. 어조도 목소리도 어명 같았다. 알 수 없는 힘에 머리채를 잡혀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대체 어느 구석이 몸을 팔라는 제안을 받을 정도인지 따져 보는 눈길을 주었다. 홍화도 남자를 쳐다봤다. 가로등 불이 비추고 있더라도 모자 캡이 음영을 드리워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홍화의 턱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품평하듯 흠, 하고 소리를 내더니 양 볼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홍화의 입술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오게끔.

으븝, 홍화가 불평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남자의 손목을 쥐고 떼어내려 했으나 아귀힘만 세졌다. 홍화의 고개를 뒤로 넘겨 턱까지 꼼꼼하게 살핀 남자가 드디어 손을 떼어냈다. 홍화가 볼을 매만지며 혀로 꽉 눌린 볼 안쪽 살을 밀어냈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양쪽 볼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씨발, 뭐 하자는…….”

“존나 꼴리게 생기긴 했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홍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소주를 꿀꺽꿀꺽 삼켰다. 손등으로 입을 막았는데도 끅, 하고 내뱉는 숨에 술 냄새가 지독하리만치 진했다.

“너, 나랑 잘래.”

“…….”

“너라면 박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욕하고, 걷어차고, 화를 내고, 소주병으로 대가리를 후려 팬 다음 도망치면 된다, 라고 이성이 말했다. 홍화는 빈 소주병 주둥이를 단단히 말아 쥐고 만에 하나 남자가 한마디만 덧붙이면 작전을 시행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목격자도 없는 어두운 밤이니 시체는 강에다가 던져버리고 도망치면 된다.

“너 모르겠다며. 실험이나 해보자고. 되는지 안 되는지, 자지가 서는지 안 서는지. 적어도 나랑 하면 몸 파는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술병 주둥이를 움켜쥔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남자와 잔다고 세상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고. 술기운이 이성의 사지를 잡아 눌렀다.

좀 전에 남자가 그런 것처럼 홍화도 남자의 턱을 잡아다가 이리저리 돌려봤다. 남자가 얌전히 당해줬다. 잘 나가는 연예인 닮은꼴이라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외모는 합격점이었다. 유백영이 싫지만 미모는 인정했다. 술 젖은 입술도 도톰하고, 눈빛도 좀 야한 것 같다.

“그래.”

맨정신엔 불가능한 일이니, 술김에 미친 짓 좀 해보자. 홍화가 흔쾌히 허락했다. 남자가 옷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홍화도 따라 일어나 뒤꿈치를 한껏 들고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남자가 홍화의 팔을 차갑게 내치고 저가 홍화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무르기 없어.”

너도, 나도. 남자가 쐐기를 박았다. 홍화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정뱅이처럼 별것 아닌 대화에 낄낄대며 가까운 모텔까지는 들어왔다. 모텔이라는 이름만 달았지 낡고 허름한 내장이 오래된 여관 같았다. 주인장이 키를 주면서 수상하단 눈길도 같이 주기에 뻔뻔하게 되받아쳤다. 남자끼리 떡 치러 온 거 처음 보느냐고 시비 걸려다가 참았다.

급하게 들이켠 술이 이제야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좀먹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남자의 품에 반쯤 의지한 채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우렁찬 코 고는 소리, 질 낮은 신음, 침대가 삐걱거리며 바닥을 긁는 소음과 입 좀 닥치라는 걸쭉한 고함이 복도를 메웠다. 그런 소리들마저 웃겼다. 이 시끄러운 상황에 이제 제가 만들어낼 소음도 겹칠 거란 생각에 홍화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키득댔다.

담배 냄새 밴 누런 벽지가 오랜 기억에서 끄집어낸 것처럼 익숙하다. 부축은 여기까지라는 듯 홍화의 옆구리를 단단히 쥐고 있던 남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창문을 드르륵 열고서, 남자가 침대에 앉아 담배를 빼 물었다. 홍화가 벽에 옆머리를 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담배 냄새 싫은데.

“먼저 씻어.”

“예, 예.”

연기를 피할 겸 좁은 욕실로 도망쳤다. 찬물을 뒤집어쓰고도 술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남자와 자겠다는 각오도 흐무러지지 않았다. 이왕 할 거 빨리하고 끝내는 게 나았다.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고, 살다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끝마치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거품을 잔뜩 내 몸을 문지르는 손은 느려지기만 했다. 구석구석 닦아야 한다면서 쪼그려 앉아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도 문질렀다. 물이 드디어 뜨끈해져서, 그래서 나가기 싫다고 속으로 변명하며 샤워기 아래 앉아있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홍화가 놀라서 돌아봤다. 남자가 홀딱 벗고서 안으로 척척 들어왔다. 옷으로 가렸을 때보다 어깨가 드넓어 보였다. 가슴팍도, 복근도 누가 그쪽만 조각으로 박아놓은 양 나눠진 선이 단단했다.

“존나 오래 있네.”

남자가 홍화의 팔뚝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꽉 쥐여 아픈 팔뚝을 뒤로하고, 홍화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뜨거운 물로 달아오른 낯빛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아, 아무래도.”

잘못 선택했다. 차라리 크기가 작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평균 크기라도 되었다면 이리 겁먹지는 않았을 테다. 분명 반응하기 전일 텐데도 그 크기가 가히 무서웠다. 처음부터 저런 크기가 가능할 리가. 아니, 처음이 아니더라도 저건 짐승과 사람을 모두 잡을 흉기였다.

홍화가 겁에 질려 주춤대며 남자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려고 몸을 비틀었다. 손아귀는 단단해지기만 할 뿐,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홍화를 돌려세웠다. 목덜미를 꾹 누르고 엉덩이부터 한 손에 쥐었다. 커다란 손으로 살집을 주물럭거리자 홍화의 목덜미로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건, 이건 아닌 거 같아. 안 될 거 같아. 이거 놔. 나 안 할래.”

“여기까지 와서 왜 빼고 지랄이야. 무르기 없다고 말했어, 안 했어.”

“씨발, 그거야 몰랐을 때고! 이거 놔!”

“시끄러.”

남자가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홍화가 억, 소릴 내며 딱딱하게 굳었다. 남자가 엉덩이를 힘껏 쥐어 손자국을 남겨놓고 앞으로 손을 돌렸다. 홍화가 궁둥이를 이리저리 빼도 끝까지 쫓아와 주머니와 기둥까지 한 손에 쥐고 조몰락거렸다.

“존나 작아. 털도 없네.”

뒤에는 남자가, 앞에는 벽이 가로막았다. 꼼짝없이 갇혔다. 자존심은 두 번째 문제였다. 홍화가 이를 악물고 벗어나려 했으나 남자의 힘과 덩치를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끙끙거리다가 헉헉대며 욕실 벽에 이마를 기댔다. 아래를 흔드는 남자의 손목을 쥐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손아귀가 억세서 야릇한 느낌 반, 고통이 반이었다.

“좀, 살살…….”

홍화가 간절하게 사정했다. 손 떼라는 말은 해도 안 들을 게 분명해 아예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도망치고 나발이고 일단 아래를 쥔 손만 빼도 살 것 같았다. 남자는 귀가 없는 듯 홍화의 다리 사이가 조금 더 통통해질 때까지 문질러댔다. 풍만한 가슴을 쥐려는 듯 홍화의 가슴살을 그러모으다가, 혀를 쯧 차고 젖꼭지만 비틀었다. 홍화가 고개를 뒤로 넘기며 비명을 삼켰다.

“나랑 잔다고 하면 놔줄게.”

남자가 손을 놓는 즉시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고 도망칠 계획이었다. 그런 홍화의 생각을 알아챈 듯, 아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불알을 쥐어 짜이는 고통에 홍화가 으헉, 볼썽사나운 소릴 지르며 허리를 움츠렸다.

“빨리.”

“……개새끼…….”

걸려도 어쩌다 이런 놈에게. 홍화가 눈물 맺힌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가 손에 더 힘을 주면 아래가 터져서 고자가 될 것이었다. 홍화가 그만하라고 씹어 뱉고는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할게. 씨발, 할 거니까 이거 놔, 이 씨발 새끼야.”

“입도 존나 험하고. 어쩌다 이런 거가 걸려서.”

“내가 할 말이야. 존나 미친개한테 물려서.”

“음, 내가 봐도 난 좀 미친 거 같긴 해. 그러니까 그만 너도 협조하지. 더 물리기 싫으면.”

남자가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리며 손에서 힘을 뺐다. 홍화가 씩씩대자 남자가 홍화의 손목을 잡고 얼른 나오라며 끌어당겼다.

“키스는 하지 말자.”

“피차 존나 역겹다.”

“그래, 그래.”

하겠다고 했는데도 행여 도망갈까, 남자는 홍화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홍화에게 수건을 던지는 그 순간에도 감시의 눈길도 멈추지 않았다.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물기를 닦아내고 홍화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두렵다. 무섭다. 도망가고 싶다. 속내는 그러했다. 그러나 포기가 더 빨랐다. 하룻밤만 버텨내면 된다. 홍화는 불안과 초조감에 휩싸여 엄지손톱을 딱딱 깨물며 남자에게 등을 돌렸다.

눈앞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였다. 홍화는 차마 그림자의 정체를 돌아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끈한 손바닥이 목덜미를 쥐고 내리눌렀다.

∞ ∞ ∞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새소리처럼 높았다. 봉선화 씨 방울이 터지듯 엄마의 웃음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엄마는 제 앞에선 거의 웃은 적이 없었다. 해봤자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비웃음만 지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궁금해 조심조심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엄마가 방 밖으로는 절대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호기심이 궁둥이를 거세게 떠다밀었다.

미닫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었다. 손톱만 한 틈새로 바깥을 엿봤다. 엄마가 음식과 술이 늘어진 탁자에 앉아있었다. 술에 취해 낯빛이 불콰해진 아저씨 둘이 엄마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더없이 친한 친구처럼 굴었다.

아저씨가 뭐라고 떠들자 엄마가 탁자를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댔다. 콧소리 섞인 트로트였다. 엄마는 그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우연이라도 나오면 당장 끄라고 신경질을 냈다.

구성진 가락에 아저씨들이 어깨를 덩실덩실 흔들었다. 노래가 끝나자 아저씨들이 엄마의 푸근한 가슴골에 푸른 지폐를 꽂아줬다. 엄마가 지폐를 꺼내 들고 또 높은 소리로 까르륵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엄마는 새처럼 웃지 않았다. 누군가의 비위에 일부러 맞춰주려고 꾸며낸 소리였다. 엄마가 아저씨의 뺨에 뽀뽀를 퍼붓는 걸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문이 바닥 긁는 소리를 들었는지, 닫기 바로 직전에 엄마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 얼굴에 미소는 없었다.

홍화는 꾸물거리며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방금 듣고 본 장면을 지우고 자기 전에 본 철 지난 영화만 떠올렸다. 상상 속에서 저는 영화의 주인공이었고, 엄마는 영웅에게 구출되는 가련한 여주인공이었다. 엄마가 주인공인 홍화의 손을 잡고 까르륵 웃었다. 새처럼 높고 기쁘게.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눈을 껌벅였다. 누런 벽지, 날파리가 무덤처럼 모여 죽은 네모난 형광등이 보였다. 창밖에서 오토바이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살아있구나. 살아났구나.

목이 칼칼했다. 목구멍이 기도며 식도며 할 것 없이 죄다 부은 것만 같았다. 허리를 굽혀 일어나려던 홍화가 억, 소릴 내며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손으로 침대 헤드를 잡고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정을 박은 듯 아팠다. 말하기 어려운 아랫구멍은, 제 몸에 달린 게 아닌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쓰라리지 않았다면 타인의 몸뚱이에 달렸대도 믿겠다.

침대를 벗어나려다가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바닥에 부딪힌 정강이가 아파 신음을 삼켰다. 홍화는 고개부터 홱 돌려 남자가 깨지 않았나 확인했다. 동이 터올 때까지 저를 고문하던 남자는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깨지 않을 만큼 곤히 자고 있었다.

이대로 목을 조르면 꿈나라에서 저세상으로 바로 갈 텐데.

살심이 들었다. 쉬이 식지 않았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범죄자가 될 미래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홍화는 침대를 꾹 움켜쥐고 다리를 발발 떨며 일어났다.

“흐윽…….”

간신히 일어나자 아랫구멍에서 미적지근한 액체가 허벅지 안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엉덩이에 보조개가 팰 정도로 힘을 줘도 한 방울, 두 방울 조르륵, 조르륵 굴러떨어졌다.

“씨발놈의 새끼가 콘돔도 안 쓰고.”

남자하고 자는 게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것처럼 외쳐대고는, 남자 뒷구멍에 환장한 인간처럼 달려들었다. 한 번 했으니 끝났다고, 꺼지라고 외치는 홍화의 입을 틀어막고 저 내키는 대로 안에 싸댔다. 산 채로 회 뜨이는 고통에 까무룩 기절했다가 깨어나도 남자의 허리짓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야 할 건 제 목숨 같았다.

어쨌든 살아남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하룻밤도 흘러가긴 흘러갔다. 홍화는 갓 태어난 사슴 새끼처럼 다리를 버들버들 떨며 욕실까지 기어가다시피 갔다. 뜨거운 물 아래서 멍하니 서 있다가 기계적으로 몸을 씻었다. 무릎 꿇고 앉아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아픈 아랫구멍을 헤집으며 안쪽도 씻어냈다. 상처가 났는지 손끝이 닿을 때마다 따끔했다.

욕실을 나올 때까지도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 일어났으면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키고 갔을지도 모른다. 홍화는 바닥에 껍질처럼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고 방문을 나섰다.

복도는 어젯밤과 달리 조용했다. 홍화도 어젯밤과 달리 묵묵히 입을 닫고 모텔을 빠져나왔다.

명식은 핸드폰을 쥐고서 초조하게 방 안을 왔다 갔다 돌아다녔다. 좁은 방을 빙빙 돌다가 핸드폰을 쳐다보고, 문을 벌컥 열었다가 핸드폰을 쳐다보고, 쪼그려 앉아 머리를 쥐어뜯다가도 핸드폰을 바라봤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낭랑한 목소리만 돌아왔다.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할까 밤새도록 고민했다. 홍화가 여린 마음에 혹여 못된 선택이라도 했을까 봐 전전긍긍이었다.

겨울 찬바람이 볼을 베고 지나가는데도 명식은 문 닫을 생각도 못 했다. 당장에 홍화가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뭐 해, 하고 인사할 것만 같았다.

저가 미친놈이었다. 술기운에 못 할 짓을 저질렀다. 구질구질하게 살더라도 막장까지는 가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해놓고는 동생에게 몹쓸 제안을 했다. 쥐뿔만 한 배역에 눈이 멀어서 포주가 되려 했다.

“거기서 뭐 해.”

명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홍화였다. 하룻밤 내내 길거리를 쏘다녔는지 눈 밑도 퀭하고 머리카락도 엉망이었다. 명식이 입을 쩍 하니 벌렸다가 대뜸 소릴 질렀다.

“이놈의 자식아! 최소한 어딜 갔는지 연락을 했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 미친놈아!”

사과하자는 마음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입을 떼자마자 욕을 빙자한 걱정만 쏟아졌다. 홍화가 침 튀기는 범위에서 슬쩍 고개를 뒤로 빼고 딴청을 피웠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서로를 물어뜯을 듯 으르릉거리며 싸웠는데도, 시간이 지나니 겨우 그깟 것이 되었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어도 인마, 내가 씨발……. 내가 죽일 놈의 새끼지, 그래.”

“형.”

“대본 버렸다. 내가 잠깐 홱 돌았었어. 그 길 아니더라도 다른 길 많다. 주희한테도 내가 한 번 더 부탁해볼게. 누가 아냐. 신곡이 빵 뜰지. 알고 보니까 주희 걔네 할머니가 이북 출신이더라. 주희도 그럼 북쪽이 고향인 거지. 프로필 사진도 오래됐으니까 다시 찍고…….”

“형.”

홍화가 가만가만한 소리로 명식을 불렀다. 목소리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명식이 홍화의 양팔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달랐다. 어린애처럼 언제나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뭍으로 올라와 아가미를 깔딱이는 생선처럼 빛이 없었다.

“나, 그만둘래.”

“……뭐?”

“다 그만둘래.”

명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진짜냐고 되묻자 홍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식의 얼굴이 푸르락누르락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다. 고함을 치거나 왜냐고 다그쳐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지금껏 해온 걸 물거품으로 되돌릴 거냐고 눈으로 찔러 물었다. 홍화는 명식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문득, 어젯밤 저가 저지른 짓을 폭로하고 싶었다. 술김에 남자와 잤다고. 명식이 권한대로 해보려고 실험 먼저 해봤다고. 나쁘지 않았다고. 좆같이 아파서 비명만 꽥꽥 지르다 왔지만 죽지는 않았다고. 살았다고. 나름, 할 만했다고.

모두 개소리였다.

온몸이 아팠다. 밤새 붙잡히고 짓눌리고 쑤셔지고 깨물리며 온갖 고문은 다 당했다. 합의한 폭력이었다. 동의했기에 멋대로 쑤셔대도 말리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고통도 있구나, 내장이 날 선 숟가락으로 푹푹 파내지면 이런 고통이겠구나 싶었다. 이를 하도 악물어서 입안 전체가 욱신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마저 힘에 부쳤다.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그만둘 거야.”

뒤늦게 비참함이 몰려왔다. 끔찍하고 잔인할 정도로 비참했다. 명식에게 몸을 팔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남자에게 자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도, 아침에 홀로 뒤처리를 할 때만 해도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고 그런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감정은 켜켜이 쌓이고 있었을 뿐이다. 물 아래 고요히 숨어있던 갖가지 더러운 감정이 퇴적되다 못해 수면 위로 머리통을 불쑥 내밀었다. 시커먼 손으로 내면을 엉망으로 할퀴며 날뛰었다. 그 존재에 이름을 붙이라면 응당 참담함이 옳으리라. 결국 어미와 다른 삶을 살지 못할 거라는 낮은 속삭임이 비웃음을 동반했다.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에 다 흘려보낸 줄 알았던 눈물이 또 눈 아래 괴였다. 눈을 뜨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억누르고 있던 심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눈가가 뜨끈해지고, 뜨거운 물이 솟구치며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몇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다가 턱 끝에 고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제 선택이었다. 몸을 팔지는 않았다. 상호 동의하에 밤을 보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는 다 끝난 후에 찾아왔다. 정신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허무함이 너무나도 커다랗고 무거웠다. 이런 고통을 반복하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오물로 얼룩질 그 길이 과연 저가 원하던 길이었을까.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무거웠다. 그간 간신히 지탱하던 모든 것이 그 무게에 짓눌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상은 찬란했으나, 홍화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홍화는 눈을 부릅뜨며 명식을 쳐다봤다. 아직은 어미와 다른 길을 갈 선택권이 있었다. 가고 싶은 길, 반짝거리는 그 길에서 고개를 돌리면 인생의 마지막 보루는 지킬 수 있었다.

“난 이 판과 안 어울려.”

“……이홍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길을 포기할 수 있을까. 언젠가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있을까. 수없이 되물었지만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자존심은 만신창이였다. 손가락으로 톡 쳐도 무너지기 딱 좋을 만큼 헤지고 다쳤다.

이마저 쓰러지면.

홍화는 살 수 없었다.

“이제 그만 하자, 형.”

결정을 내렸다. 열망도 야망도 힘이 남아있을 때 이야기였다. 지금 홍화는 단 한 걸음 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 ∞ ∞

햇빛이 눈 부셨다. 손을 뻗어 커튼을 잡아당겼다. 누렇게 변색된 커튼을 뚫고 빛이 쏟아졌다. 이불도 바닥으로 떨어져 안대로 삼을 마땅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짜증이 치밀어 욕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제 방은 확실히 아니었다.

“씨발.”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젯밤, 장식장에 있는 양주를 동내고 모자라 나가서 소주에도 입을 댔다. 중간에 거지가 다가와 구걸한 것까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는데, 그 뒷장은 조금 희미했다. 탁자에 놓인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이고 백영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일단 술을 들이켜게 된 원인부터 찾았다. 캐스팅 문제였다. 빌어먹을 호모 새끼가 낚싯대에 배역을 걸고 입질을 시도했다. 감독이 호모라는 건 이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 새끼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주제에 능력은 탁월했다. 찍는 영화 족족 흥행을 거두는 데다가 이번 시나리오는 그 자체로도 잭팟이라, 다들 감독 눈에 들려고 흰자에 핏발 세우고 달려들었다.

본인도 미끼에 홀려 몰려든 멍청한 물고기 중 한 마리라는 게 문제의 시초였다. 바늘에 걸린 배역이 무척이나 탐스럽고 욕심나서 달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독이 이뤄낼 흥행 따위엔 관심 없었다.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은, 악마성이 돋보이는 캐릭터가 백영의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이 배역은 내 구멍에 딱 맞는 사람에게 줄 거야.」

얌전한 호모라면 그나마 찔러볼 구석이라도 있지, 남자에 아주 환장한 호모였다.

술자리에서 한 선언이 배역에 눈독 들이고 있는 사람들 귀에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선은 만선이었고 감독은 밤낮으로 포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텁텁한 입이 축여지니 담배가 고팠다. 누운 채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위로 훅 올라갔다. 누군가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느낌에 무심코 벽 쪽을 응시했다. 아무도 없는 벽에서 무슨 시선 따위를 느꼈다고. 그럼에도 살갗을 끈덕지게 찔러오는 촉각이 불쾌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

기억났다.

남자와 잤다. 소주를 구걸하던 거지였다. 술김에 저질렀다기엔 남은 기억이 생생한 색을 입고 떠올랐다.

가로등 아래 들여다본 낯짝이 제법 반반했다. 하얗고, 불쌍하고, 가련하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고양이처럼 처량 맞았다. 오들오들 떨면 참 잘 어울릴 몰골이었다. 괴롭히는 맛이 쏠쏠할 듯해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실험이나 해보자며 권했다. 거지가 덥석 물었다. 불쌍한 인생들끼리 잘해보자며 본인을 저와 동급 취급했다.

거지의 착각을 기꺼워하며 모텔로 기어들어 왔다. 씻다가 뒈졌나 싶을 정도로 욕실에서 안 나오기에 직접 들어가 봤더니 쪼그려 앉아서 청승맞게 물만 맞고 있었다. 절 보고서 눈알 빠져라 놀라기에 일단 도망치지 못하게 잡고 봤다.

축축한 피부가 의외로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었다. 짭짤한 살결은 맛있고 푹 익은 고기같이 부드러워 허기진 개처럼 질겅질겅 씹었더란다. 겁먹은 눈과 꽉 깨문 입술이 흡족하고, 콩알만 한 젖꼭지와 밋밋한 가슴, 심지어 손아귀에 들어차는 성기도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잠시 회상을 멈추고 손바닥을 오므렸다가 폈다. 어쩐지 목이 말랐다.

그리고는 어떻게 했더라. 협박을 조금 하고, 침대에 가서 실험을 진행했다. 아주 성공적이었다. 남자나 여자나 구멍이 있는 몸뚱이는 똑같았고, 박는 행위도 같았다. 거부감만 안 들면 어려울 것 없었다. 오히려 지금껏 다른 이와 보낸 밤보다 훨씬 미쳐서 달려들었던 것도 같다. 남몰래 술병에 약을 탔나, 그런 착각이 일 정도로.

동틀 때까지 기절한 인간을 자위 기구처럼 사용하다가 잠깐 잠들었다. 그리고 눈 떠보니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마치 한낮에 꾼 꿈처럼 흔적 없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어차피 더는 볼 일 없는 사이라지만, 뒤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퍽 좋지만은 않았다.

백영은 기분을 떨치듯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마침 핸드폰이 울려 받으니 스케줄이 코앞인데 어디로 사라진 거냐며 매니저가 난리를 쳐댔다. 귀에 인이 박이도록 쏟아내는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형, 나 박광준하고 미팅 잡아줘.”

―뭐, 박 감독? 미쳤냐. 호모 새끼가 돌았냐며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아, 씨발. 박아야 준다며. 그래서 박아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매니저가 사람 마음이 하루아침에 바뀌냐고, 변덕이 무슨 죽 끓듯 끓냐고 칭얼댔다. 간간이 섞인 긴 한숨은 못 들은 척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길게 늘어놓기에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위치만 문자로 보내놓고 침대에 누웠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빈자리가 더욱 눈에 띄었다. 베개를 뒤집어 보니 짙은 색으로 축축하게 물든 흔적이 남아있었다.

많이 울었는데.

“…….”

그게 꼴려서 더 괴롭혔지.

꺼지라고 지랄하는 거지를 붙잡아 고문처럼 쑤셔댄 걸 회상하면서 백영이 낄낄댔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저는 실험에 성공했다. 대성공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만큼. 거지는 어떨까. 과연 거지도 실험에 성공했을까.

백영은 다분히 뻔뻔한 생각을 하며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매니저가 귀찮은 일을 산더미처럼 가져올 테니 그전에 눈을 붙여두는 게 좋았다.

감은 눈 안으로 어젯밤의 잔상이 희미하게 스쳐 갔다. 그도 곧, 하룻밤 자자고 권했던 충동처럼 거멓게 사그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