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은 달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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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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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곰은 뜻을 굳힌다
금요일부터 함께한 사흘 동안 은겸은 내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푹 쉬어야 한다며 설거지나 청소 같은 사소한 집안일도 돕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나는 주말 내내 은겸의 집에서 빈둥거렸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한가로운 한때였다.
어느새 주말도 몇 시간 남지 않은 늦은 시각.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아 별생각 없이 TV를 켰다. 뭐 볼 거 없나 싶어 리모컨을 누르던 도중 힐링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채널을 고정하고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사이 뒷정리를 마친 은겸이 한 손에 책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뭐 봐?”
설명하는 대신 TV를 가리켰다. 마침 드론 촬영으로 화면이 바뀌면서 폭이 넓은 강이 한 번에 잡혔다. 상류를 향해 튀어 오르는 연어 무리가 화면 하단에서 파닥거렸다. 빠른 유속으로 흐르는 강과 파닥거리는 연어들의 생생한 몸부림을 주시하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기분 좋아.”
“아, 이번 주는 곰 특집인가 보네.”
내 다리를 베고 벌렁 누운 은겸이 책을 펼쳤다.
“좋겠다. 저거 사자는 잘 안 해 주거든.”
“발정기 따로 없다고?”
“응.”
내가 고른 프로그램은 매주 다른 종을 선정하여 해당 종의 힐링 영상을 틀어 주는 방송이었다. 수많은 종 중에서 단 한 종을 선정하는 기준은 바로 발정기였다. 예민한 시기에 방송을 보면 너무 심한 자극이 될 수도 있기에 발정기인 종을 피해서 방송하는 듯했다. 반대로 발정기가 끝난 종은 지나치게 우울감이 들 수 있는 시기에 방송을 통해 기운을 차리도록 선정되곤 했다.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침이었다. 발정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기에 우선순위에서 밀릴 종의 입장에서는 차별받는 느낌이겠지만.
은겸은 금방 TV에서 관심을 잃었다. 책을 읽는 은겸을 위해 나는 음소거를 선택하고 화면만 바라보았다. 연어 떼의 이동을 비추던 화면은 이내 쏟아져 내리는 도토리로 바뀌었다. 동그란 갈색 열매가 데굴데굴 땅을 구르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 저녁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요새 도토리를 안 먹은 것 같은데. 도토리묵도 먹고 싶다.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아래에서 은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밤 만주 있는데 먹을래?”
“어?”
“회사에 샘플 들어온 거 가져왔어. 차에 있는데 깜빡했다.”
책을 배 위에 내려놓은 은겸이 턱을 들었다. 은겸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꽁지 머리가 허벅다리를 찔렀다. 뒤로 묶은 머리는 은겸이 설거지를 하고 왔다는 증거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귀찮은지 설거지를 할 때면 은겸은 앞머리를 뒤로 넘겨 고정하곤 했다.
힐링 영상도 보고 싶고 밤 만주도 먹고 싶지만, 그보다 내 배에 귀를 붙이고 누운 은겸의 잘생긴 이마를 감상하는 게 먼저였다. 항상 앞머리로 덮여 있으니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다가 무심코 물었다.
“머리카락 말이야.”
“응?”
“기르면 관리하기 힘들지 않아?”
“아, 이거.”
은겸이 짧은 꽁지를 흔들었다.
“워낙에 숱도 많고 부스스해서. 짧게 자르면 더 관리가 힘들거든.”
흐트러진 밝은색 머리카락이 천장 등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어릴 적에 머리 자르고 찍은 사진이 어디 있을 텐데……. 보면 너도 웃을걸. 머리카락은 정전기 일어난 것처럼 곤두섰지, 짧게 자른 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는 울상이지. 그 와중에 귀까지 뒤로 젖혀서 정말 노란 밤송이 같이 생겼어.”
팔을 뻗은 은겸이 내 머리를 장난스럽게 헤집었다.
“나는 너처럼 짧은 머리가 좋아. 귀여워.”
“……귀엽다는 소리 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듣는 거 같다.”
“진심인데.”
씩 웃은 그가 손을 옆으로 옮겼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귀를 만지작거리는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분명한 열기가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귀여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은겸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노란 눈에 욕망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짧은 거리가 좁혀지면서 숨결이 닿기까지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은겸이 상체를 들어 올렸다. 내 뒷덜미를 붙잡은 은겸이 물어뜯을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읏.”
무심코 내뱉은 신음이 그를 더 부추긴 듯했다. 혀를 내밀어 길게 입가를 핥은 은겸이 거침없이 좁은 틈으로 파고들었다.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그를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입맞춤인데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거친 키스 때문인지, 아래로 숙인 허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영상의 영향인지 알 수 없었다. 도망치려 해도 목을 꽉 붙든 은겸의 힘에 허리를 세울 수 없었다.
점차 숨이 거칠어지면서 몸이 뜨거워졌다. 나는 헐떡이며 은겸의 어깨를 밀었다. 거부 의사를 알아차린 은겸이 입술을 떼어 냈다. 불편한 자세로 나누던 키스가 중단되자마자 몸을 바로 세웠다. 머리에 어찌나 피가 쏠렸는지 띵할 정도였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은겸이 몸을 일으켰다. 소파 아래로 떨어진 책이 툭 소리를 냈지만 나도 은겸도 그쪽을 돌아볼 정신이 없었다.
“얼굴만 보면 섹스한 거 같네.”
“…….”
“이쪽도 빨개지면 좋을 텐데 말이야.”
은겸의 손이 거침없이 내 성기를 쥐었다. 반응이 없다는 걸 확인하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은겸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나와 마주 보고 앉아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어진 것은 전신에 열이 오를 정도로 농밀한 키스였다. 혀끝으로 나를 전부 맛보려는 사람처럼 은겸은 집요하고 꼼꼼하게 내 입 안을 쓸었다. 샅샅이 훑어진 점막이 따끔거렸다. 핑 도는 머리로는 그것마저 자극적이었다. 은겸의 혀를 빨아들이며 나는 눈을 감았다.
흥분한 맹수의 숨이 사방으로 퍼졌다. 코를 찌르는 은겸의 냄새가 끈적끈적했다. 조금만 더 하면 나도 발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신없이 은겸을 끌어안고 몸을 겹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숨이 가라앉자 나를 들뜨게 만들었던 열기도 서서히 식어 갔다.
비발정기가 오늘처럼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내 생각에 동의하기라도 하듯 은겸이 끈기 있게 내 성기를 주물렀다. 반응하지 않는 몸을 언제까지고 애무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려 은겸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은겸의 것이 단단했다. 바지 위로 튀어나온 두툼한 기둥을 문지르며 나는 눈을 떴다.
“입으로 해 줄게.”
“괜찮겠어?”
“내가 하고 싶어.”
느른하게 눈을 내리뜬 은겸이 바지를 끌어 내렸다. 몸을 뒤로 물리고 나는 허리를 수그렸다.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은겸의 페니스를 쥐자 은겸이 전에 했던 소리가 떠올랐다. 잘못하면 턱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경고. 이미 몇 번 입으로 해 준 적이 있기에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잘 알았다. 내 턱의 안녕을 기원하며 입술을 내밀어 선단에 입을 맞추었다. 흠칫 몸을 떤 은겸이 내 어깨를 쥐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나는 입을 벌렸다.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한껏 벌린 입으로 귀두를 머금었다. 금세 비릿한 맛이 입 속에 맴돌았다. 혀를 세워 끄트머리를 살살 핥으며 달래자 은겸이 긴 숨을 내뱉었다. 더 커질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흉기가 꿈틀거리며 부피를 더했다. 기둥을 고쳐 쥐고 더 깊이 은겸을 빨아들였다.
굵은 것이 입 속을 채우자 목이 꽉 막혔다. 간신히 숨만 몰아쉬면서 반쯤 남은 기둥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목구멍 깊숙이 삼켜도 은겸의 것을 다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너무 길고 굵어서 물고만 있어도 괴로웠다. 앞 입꼬리로 흘러내린 타액을 삼킬 틈도 없었다. 잔뜩 벌린 입술의 가장자리가 찢어질 것같이 아팠다.
입으로 할 때마다 시도한 ‘서은겸 전부 집어넣기’를 포기하고 힘겹게 페니스를 입에서 빼냈다. 앞니에 살갗이 긁히자 은겸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 이상 이를 세우지 않으려 애를 쓰며 나는 은겸의 반응을 살폈다. 내 뒷덜미를 어루만진 그가 눈짓했다.
“무리하지 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벌렸다. 내 서툰 구음에도 은겸의 것은 착실하게 반응했다. 커다란 페니스를 빨아들이고 끝을 핥을 때마다 비릿한 맛이 혀에 감겼다. 젖은 소리가 거실을 울리자 은겸이 참기 어려운 듯 허리를 들썩거렸다.
그대로 입에 박을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던 은겸이 억눌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원재야. 가슴 좀 빌려줄래?”
“응.”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겸이 나를 소파에 밀어 눕히곤 내 위로 올라탔다. 시야를 가리는 은겸의 커다란 상체를 올려다보며 티셔츠를 벗었다. 평소라면 드러난 내 가슴팍을 희롱하느라 바빴을 텐데, 정말 급했는지 은겸은 페니스부터 쥐었다. 소파 아래에 티셔츠를 던져 버리고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핥은 은겸이 가슴골에 끝을 맞추고는 느릿하게 문질렀다.
뜨겁고 굵은 것이 앞뒤로 오갔다. 타액과 선액으로 범벅이 된 기둥이 내 가슴 위에서 번들번들 빛났다. 은겸이 크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귀두가 미끄러져 올라와선 턱을 쿡쿡 찔렀다. 나는 턱을 끌어당기곤 입을 벌렸다.
“후우.”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은겸이 허리를 쳐올렸다. 가슴 위를 미끄러진 성기가 입술 사이로 빨려들어 왔다. 단단한 선단이 입천장을 푹 찔렀다. 혀를 내밀어 기둥 아래쪽을 감싸며 은겸의 것을 더 담으려 노력했다. 뒤로 빠지는 귀두를 입술로 물고 쪽 빨아들이자 은겸의 탄탄한 배에 핏줄이 벌떡였다.
“김원재, 진짜…….”
말을 잇지 못하고 은겸이 내 머리 옆을 양손으로 짚었다. 허전해 보이는 페니스 위쪽을 손으로 눌러 감싸면서 나는 입을 크게 벌리는 데에 집중했다. 빠르게 가슴과 입술을 오가던 단단한 페니스의 끝에서 곧 진한 액체가 흘렀다.
어깨를 들썩이며 사정의 여운을 즐기던 은겸은 곧 허리를 숙여 내게 입을 맞추었다.
“누워 있어.”
일어선 은겸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팔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책을 집어 들었다.
무슨 책을 읽나 했더니 동화책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붉은 눈의 백사와 금빛 눈의 너구리를 본 순간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몇 페이지를 뒤적거리고 있을 때 수건을 든 은겸이 거실로 돌아왔다.
“그 동화 알아?”
“응. 유명하잖아, 이거.”
은겸이 읽고 있던 책에 실린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전래동화였다. 아직은 인간이 멸종하지 않았고 수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던 먼 옛날, 우연히 만난 너구리 수인과 뱀 수인이 행복하게 무리를 짓는다는 이야기.
소파에 털썩 앉은 은겸이 수건으로 내 입가와 가슴을 닦았다.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흔적을 닦아 내며 은겸이 중얼거렸다.
“멋진 세계라서 마음에 들더라.”
“인간이 있어서?”
“아니. 다른 종끼리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거.”
동화는 너구리 수인과 뱀 수인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로 끝난다. 사실 현실적으로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우선 이야기의 주인공부터가 그러했다. 뱀 수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먼 옛날, 세상을 채운 많은 동물 중 뇌가 크고 체온 조절이 쉬운 포유류만이 수인으로 변했다. 파충류도, 조류도, 양서류도 그저 동물일 뿐 수인과는 다른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가 동족을 포식한다는 죄책감 없이 먹이로 여기는 것이고.
그리고 수인은 다른 종끼리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더군다나 이야기에 등장하는 너구리와 뱀은 둘 다 수컷. 백번 양보해도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그야말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설정이었다.
은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적에 제일 좋아하던 동화야. 이 세계에서라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거든.”
마치 지금 이 세계에서는 누구와도 행복해질 수 없다고 체념하는 듯한 어조였다. 또 선이 그인 기분이 들었다. 안쪽으로 들어오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듯한.
그렇다고 밖으로 떠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동화책을 소파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들이대자 은겸이 피하지 않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노란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세계가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자신이 이종성애자, 그중에서도 곰성애자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은겸이 포기했을 수많은 행복을 내가 전부 채울 수 있으리라곤 장담하기 어려웠다. 나는 동화 속의 너구리처럼 사랑스럽지도 않고, 연인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도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은겸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항상 네 옆을 지키며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내가 줄 수 있는 행복이, 은겸이 잃어버린 행복을 전부 덮을 만큼 커다랗기를 바라며.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꺼낼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을 내보였다.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예상과는 달리 은겸은 쓸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기쁨이나 설렘 같은 감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혹시 내 약속조차 공허하게 들린 것일까. 별생각 없이 건넨 빈말이라고 느낀 걸까. 무슨 말로 부연해야 그가 믿어 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나는 은겸을 바라보았다.
다시 눈꺼풀을 끌어 올린 은겸이 빙긋 미소 지었다.
“……응. 고맙다.”
팔을 뻗은 은겸이 나를 끌어안고는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은근슬쩍 가슴을 쥐는 손을 내버려 두고 나는 긴장을 풀었다. 어째서인지 배 속이 자꾸 울렁거렸다.
***
느릿느릿 흐르던 주말은 짧은 굿나잇 키스와 함께 조용히 끝났다. 새로운 주가 시작되는 아침, 나는 은겸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또다시 월요일이 찾아왔다.
씻고 아침을 먹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출근 이후의 풍경이 뻔히 눈에 그려졌다. 팀원들은 안 그런 척하면서 나를 신경 쓸 것이고, 그들의 태도가 의식되어서 나도 태연하게 굴지 못하겠지. 서로 조심하느라 어색해질 사무실의 분위기를 상상하니 답답했다. 그러다 효영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흘간 은겸의 옆에서 푹 쉬면서 가라앉혔던 속이 다시 쓰려 왔다.
은겸의 다독거림 덕분에 잠시 잊었을 뿐, 내 문제는 뭐 하나 해결된 것이 없었다. 회사에 가면 다시 골치 아픈 현실과 대면해야 했다.
어느 때보다도 출근하기 싫었다. 나는 꾸물꾸물 옷을 챙겨 입었다. 일찌감치 출근 준비를 끝내고 나를 관찰하던 은겸이 내 가방을 챙겨 들었다.
“데려다줄게.”
“버스 타고 가면 돼.”
“오늘 같은 날은 편하게 출근해야지.”
거절하는데도 은겸은 굳이 자신의 차로 나를 회사까지 바래다주었다. 주말 내내 내 기분을 맞추고서도 또다시 기사 노릇을 자청하는 은겸에게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나를 회사에 데려다준 뒤 도로 위의 정체를 견디며 자신의 회사로 가야 하는 걸 알기에 더했다.
정작 은겸은 함께하는 출근길이 즐거워 보였다. 무슨 노래인지 알아듣지 못할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그가 불쑥 말했다.
“앞으로는 출근도 같이 하자.”
“됐어. 데리러 오기 번거로울 텐데.”
“매일 내 집으로 퇴근하면 되잖아. 데리러 갈 필요 없게.”
무어라 대꾸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매일 은겸의 집으로 퇴근하고, 매일 함께 출근하는 관계를 상상해 보자 말문이 막혔다. 은겸이 곁눈질로 나를 돌아다보았다.
“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
“……가긴 가야지. 집 오래 비워 놓기도 그러니까.”
“오래 비우면 안 돼?”
말끝을 올린 은겸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한 석 달쯤 비웠다가, 일주일 정도 돌아갔다가, 다시 석 달 정도 비우면 안 돼? 아, 그건 집이 아니라 별장 같은가.”
다시 말문이 막혔다. 아, 설마.
“그냥 내 집을 네 집처럼 생각해.”
이거 설마. 내가 너무 설레발치는 게 아니라면.
“네가 원하는 만큼 있어도 되니까 오래 있다가 가.”
동거 제안인가.
설마 하던 마음이 확신으로 굳어진 순간,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스쳐 지나가는 간판을 아무거나 읽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소용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헛기침을 하는 척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살갗에 닿는 얼굴이 따끈따끈했다.
“싫어?”
은겸의 목소리가 두근거리는 박동 소리와 섞여 들었다. 나는 귓가에서 맴도는 질문에 가까스로 답했다.
“귀찮다고 쫓아내지나 마.”
“설마. 원재 네가 못 견디고 도망치면 몰라도.”
“못 견딜 게 뭐가 있어.”
“얼굴 마주칠 때마다 키스할 건데?”
농담처럼 덧붙인 은겸의 마지막 말이 사실 진담이라는 것쯤은, 이제 나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은겸을 빤히 보았다.
“그건 곤란하겠네.”
“그렇지?”
“나도 키스하려고 했는데.”
“……원재야. 조금만 지각하자. 차 세워야겠어.”
“안 돼.”
단칼에 거절하고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조수석으로 날아올지도 모르는 음흉한 손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나를 계속 힐끗거리던 은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큰일이야.”
“뭐가.”
“네가 나날이 야해져서.”
“무슨 헛소리야.”
“김원재 씨 잡아먹고 싶어서 죽겠다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고 빨고 하면서 한 입도 남김없이 삼켜 버리고 싶…….”
“운전이나 해.”
“하긴. 너는 많이 크니까 한입은 무리다. 여러 입에 걸쳐서 나눠 먹어야지.”
그새 기세를 회복한 은겸이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씩 웃었다. 애써 참았건만, 더는 치솟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은겸과 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은겸이 거친 숨을 내쉬며 내 배꼽 아래로 손을 미끄러트렸을 무렵, 나는 먼저 입술을 떼었다.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은겸이 순순히 손을 치웠다. 은겸의 아랫입술을 핥아 주곤 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이따 봐.”
나를 붙들고 한 번 더 볼에 입을 맞춘 뒤에야 은겸은 나를 놓아주었다. 그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발을 돌렸다. 주말 내내 은겸의 다정함에 파묻혀 기운을 회복했으니 지금부터는 나 혼자 현실과 맞부딪칠 차례였다.
제일 껄끄러운 상대는 제일 먼저 나타났다.
지하 3층에서부터 층층이 멈춰 선 엘리베이터의 문은 1층에서도 열렸다. 느리게 벌어지는 문틈으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지친 표정의 효영이었다.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효영이 시선을 들었다.
“…….”
효영의 두 귀가 위로 바짝 섰다.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효영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바짝 얼어붙은 채로 효영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아, 뭐야.”
문 앞을 가로막고 선 효영의 뒤에서 사람들이 원성을 쏟아 냈다. 밀고 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효영은 억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듯한 표정이 안쓰러웠다.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주자 효영은 내 옆에 와서 섰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래로 늘어진 효영의 긴 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부디 빈정거림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진급 축하한다. 이 대리님.”
효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꽉 깨문 입술을 억지로 열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닫히는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 층씩 올라가는 동안 북적였던 엘리베이터도 한적해졌다. 아래층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내리면서 엘리베이터 안에는 효영과 나만 남겨졌다. 자리가 생기자 효영은 내게서 두어 걸음 떨어져서 따로 섰다. 아무래도 내 옆자리가 부담스러운 듯했다. 씁쓸한 심정으로 나는 닫힘 버튼을 눌렸다.
작은 목소리가 승강기의 소음에 파묻히지 않은 건 행운이었다.
“미안해.”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한 팔을 감싸 안은 효영은 여전히 나를 외면한 채였다. 감쳐문 입술을 바르르 떠는 효영에게 무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나는 효영의 축 처진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가 왜 미안해.”
그제야 효영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진하게 그린 아이라인이 흘러내릴 듯했다. 효영도 나처럼 힘든 주말을 보내고 왔을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윗선들에 의해 나를 밀어내고 승진한 꼴이 되어 버린 효영은 누가 위로하기도, 축하하기도 곤란한 처지니까.
주눅 든 치타의 얼굴을 차마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말투를 가볍게 꾸몄다.
“정 미안하면 밥 쏘든가.”
“…….”
“비싼 거 먹을 거야.”
다시 입을 다문 효영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 입술만 달싹이던 효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쏠게.”
나는 피식 웃었다. 그제야 효영도 우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짧은 대화 이후 효영과 나는 침묵을 지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도 우리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효영도 나도 각자의 사무실로 향하는 걸음을 망설이지 않았다. 사무실의 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 나는 효영에게 다시 눈인사를 보냈다. 이번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효영이 목례를 건넸다.
힘내라. 시끄러울 거야.
너도 힘내.
말없이 주고받은 응원을 뒤로하고 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자리의 동료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주임님!”
“어서 와, 원재 씨.”
“잘 쉬고 왔어요?”
“주임님 진짜 걱정했어요…….”
곧 우르르 몰려든 팀원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다. 사람들의 얼굴에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특히 신입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마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사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하긴, 퇴사라는 방법을 떠올린 건 나 혼자만이 아닐 터였다.
어색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팀원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물론 가슴속에 진 응어리가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회사 동료들은 근본적으로 친구나 연인만큼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걱정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모두에게 인사했다. 신입을 다독이며 내 자리로 향하는 나를 모두가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목요일에 퇴근했을 때와 달리 책상 위가 복작복작했다. 커피며 과자, 초콜릿까지. 팀원들이 하나둘 사다 놓은 게 분명한 다양한 간식거리가 책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내 눈치를 보며 팀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그거 전부 원재 씨 거니까 혼자 먹어도 돼.”
“저희는 먹었어요.”
책상 위를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인사를 건네며 나는 과자를 집어 들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봉지를 뜯어 내용물을 한입에 삼키면서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PC를 켜니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요일에 별일은 없었어?”
동료들과 아무렇지 않게 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업무 모드로 복귀했다. 뒤늦게 출근한 과장님이 머쓱하게 나를 보았을 때도 예의를 차려 인사를 건넸다.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던 분노는 어느새 식었다. 금요일에 냈던 월차가 내 일탈의 전부였다. 나는 무리 없이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모든 게 은겸이 발판을 마련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업무 시간 내내 머릿속에서 은겸이 떠나지 않았다. 작게나마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일에도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었으니 반드시 감사를 전해야 했다.
잠깐 일에서 손을 떼고 나는 턱을 괴었다. 그러고 보면 은겸이 뭘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지 않나. 은겸은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보고 내게 먼저 맞추었는데, 나는 은겸의 취향이나 기호는 잘 알지 못했다. 끄응.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보다 가진 것도, 경험도 많은 은겸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어떤 선물을 받아야 그가 제일 기뻐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섹스 아닌가.’
내 발정기가 끝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은겸을 위해 여러모로 도와주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행위가 아니었으니 성에 차지 않았을 터였다. 나는 턱을 고쳐 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잠자리 선물을 줄 수는 있었다. 촉진제를 구입해서 하면 되니까. 하지만 고맙다는 표현을 어영부영 몸을 섞으면서 해도 괜찮은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나는 ‘촉진제를 쓴 하룻밤’을 선물 후보에서 삭제했다. 한순간의 짧은 희열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까지 채울 만족감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성교를 어떤 대가처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와 은겸이 서로를 원할 때 함께 나누는 애정 표현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은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나만이 안겨 줄 수 있는 선물. 그에게 내 진심을 표현할 방법.
데이트? 근사한 저녁? 함께 보내는 주말? 야한 속옷? 그것도 아니면 이직?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혼자 끙끙대느니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듯했다.
혹시 받고 싶은 거 있어?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불현듯 아침에 은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기껏 적은 질문을 모두 지우고 나는 새로운 문장을 완성했다.
석 달 있어도 된댔지?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지 은겸의 답은 곧바로 날아왔다.
일 년 있어도 돼♥
아. 이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준에서 괜찮은 선물을 고를 게 아니었다. 선물을 받는 상대가 기뻐할 만한 것이야말로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은겸이 제일 바라는 소원을 이뤄 주는 것. 그것만큼 좋은 선물은 없을 듯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메시지를 보냈다.
토요일에 내 집으로 와 줘.
짐 더 가져갈게.
뭐?
놀란 듯한 은겸의 대꾸가 마음에 들었다. 따지고 보면 머무르는 기간과 내 짐만 늘어날 뿐 지금과 크게 달라질 점은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거창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한 단어를 덧붙였다.
각오해.
은겸은 내 충동적인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토요일 아침, 은겸은 일찌감치 나를 데리러 왔다. 전날 밤 싸 놓은 짐을 보여 주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박스의 숫자를 헤아렸다. 나와의 동거를 기대한다기보다, 내가 얼마나 오래 있을지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제일 무거운 박스를 집어 들며 나는 말했다.
“대충 챙겼어. 지금도 갖다 놓은 짐이 많으니까.”
“…….”
“필요한 거 생기면 그때 새로 사도 되고.”
그제야 은겸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짐을 차에 싣고 은겸의 집으로 가는 길. 예전에 함께 보냈던 추석이 떠올랐다. 그때는 고작 일주일을 함께 보낼 생각에 두근거렸었는데, 이제는 기약 없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더니. 산더미 같은 짐을 챙겨 또 은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될 줄이야.
그때와 달리 은겸은 긴장한 듯했다. 그는 운전을 하는 내내 나를 힐끗거렸다. 내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는 듯한 태도였다. 어떻게 하면 괜찮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할 수 있을까. 은겸처럼 말주변이 좋다면 마음을 다독이는 표현을 척척 건네면서 안심시켰을 텐데. 결국 내가 내뱉은 것은 멋없기 짝이 없는 직설적인 말이었다.
“나 어디 안 도망가.”
“…….”
“짐 싸 가지고 왔잖아. 걱정하지 마.”
“그래.”
은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경직된 자세나 그답지 않게 짧은 말투는 변함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불안은 가신 듯 은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현관 안까지 박스를 옮기는 중노동을 하면서도 은겸은 줄곧 웃는 얼굴이었다.
마침내 짐을 집 안으로 전부 들인 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옷을 제외한 내 물건은 대부분 은겸의 서재에 처박혀 있었다. 나머지 짐도 거기에 풀면 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나를 붙든 은겸은 뜻밖의 추천을 했다.
“저쪽 방 써.”
은겸이 가리킨 방은 항상 잠겨 있는 곳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비워 두면 아깝잖아. 너라도 써 줘.”
앞장서서 걸음을 옮긴 은겸이 손잡이를 돌리자 방문이 열렸다. 나를 데리러 오기 전에 미리 열쇠로 열어 놓은 것 같았다. 문을 연 은겸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비어 있는 방을 둘러보며 그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짐 정리하기 편하게 수납장이라도 사야겠다. 아, 옷장도 네 거 따로 살까?”
밝은 말투가 도리어 더 쓸쓸하게 들렸다. 몇 달 전만 해도 이 방의 문을 열 엄두조차 못 내던 은겸이 지금의 그에게 겹쳐졌다.
나는 가만히 은겸의 뒤로 다가갔다. 중얼거리는 그를 끌어안자 은겸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은겸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은겸이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원재야.”
“응.”
“원재야.”
“응.”
“김원재.”
“응.”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대답했다. 몇 번이고 답해 줄 수 있었다. 나 여기 있다고. 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네가 부르는 이름의 주인이 맞다고. 이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와 함께 서 있는 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수차례 나를 부르던 은겸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복잡한 심정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존재가 비어 있던 방을, 은겸의 허전함을 모두 채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랗기를 빌었다.
그렇게 우리는 묵묵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방 안에서, 서로의 온기만을 느끼면서.
한참 만에 은겸이 그의 허리를 안은 내 손을 풀었다. 그리고 손아귀에 작은 물체를 쥐여 주었다. 감촉만으로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방문 열쇠였다.
“네가 가지고 있어.”
조용히 중얼거린 은겸이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선뜻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 대신 나는 은겸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오래 있을게.”
“…….”
“내가 여기에 오래 있을게. 다시는 잠글 일 없도록.”
언젠가 은겸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던 것처럼, 은겸의 손가락 위에 입술을 눌렀다. 아직도 과거의 흔적이 남은 네 번째 손가락의 뿌리 쪽 마디였다. 하얀 테두리를 따라 혀로 쓸자 은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게서 손을 빼내며 그가 가볍게 말했다.
“내일 같이 가구 보러 가자.”
오래도록 방을 비워 두었던 은겸이 먼저 빈 곳을 채우자고 말해 주는 게 기뻤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일은 다른 곳에 같이 가 줬으면 하는데.”
“데이트 신청이야?”
“응.”
“뭔데?”
“전시회. 네가 좋아할 만한 거.”
동거와 더불어 따로 준비해 둔 선물이 있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은겸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국중박물관 그거?”
“응.”
내 대답을 들은 은겸의 얼굴이 환해졌다. 덥석 나를 끌어안으며 은겸이 외쳤다.
“그거 진짜 가고 싶은 거였어.”
“그럴 것 같았어.”
기뻐해 주니 다행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는 은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반 동거와 함께 내가 준비한 데이트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연말까지 열리는 특별 전시회였다. 아무 생각 없이 나가면 분명 나한테 코스를 맞출 게 분명하니 은겸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사전에 골라 두어야 했다. 은겸이 뭘 좋아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인터넷으로 데이트 코스 검색을 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바로 <인간: 사라진 신비>라는 이름의 전시회였다.
인간 유물전, 정확히는 한반도에 살았던 인간들의 신화와 관련된 유물을 모은 전시회라는 소개 글을 읽자마자 티켓을 예매했다.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은겸에게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실제로도 좋아하니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은겸과 함께 방 바깥으로 나섰다. 심각했던 분위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 은겸은 여유롭게 농담을 던지면서 점심을 준비했다.
그날 오후 내내 침대 위에서 뒹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반 동거 기념식이라도 치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은겸은 내게 덮쳐들었다. 그리고 야릇한 손길로 나를 더듬었다. 발정기가 아닌데도 몸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흥분한 그를 다독이며 나는 숨을 골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이트 말고 제대로 된 섹스를 선물해 줄 걸 그랬나. 조금 후회가 들었다.
밤늦도록 나를 끌어안고 헐떡이던 은겸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넓디넓은 은겸의 침대에 누워 나도 잠을 청했다. 별거 아닌 짐이라도 옮기고, 그 뒤에 줄곧 몸을 써서 그런가. 잠들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은겸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더라도 나보다 일찍 일어나곤 하던 그였기에 잠든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은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둥근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내려간 긴 속눈썹과 높은 코, 붉은 입술. 시선이 입에 닿자 지난밤의 그가 저절로 떠올랐다. 집요하게 내 몸 구석구석을 물고 빨고 핥으면서 은겸은 무척 즐거워했다. 원재 너는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흰색도 빨간색도 잘 어울려. 허벅지 안쪽 연한 살에 흔적을 남기며 흘리던 은겸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얼굴만 보면 참 예쁜데. 어쩌다 이 안에 변태가 숨어들었을까.’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잠든 은겸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불을 젖혔다. 몸을 덮은 것이 사라지자 밤새 은겸이 쏟아부은 노력의 결과가 드러났다.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내 알몸 여기저기에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모기떼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울긋불긋한 가슴과 배, 팔다리를 확인하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 겨울이라 다행이지, 여름이라면 옷으로 가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지간히 쌓였나 보네.’
역시 조만간 잠자리 선물을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침대를 내려섰다. 그때, 은겸이 덥석 내 손목을 붙들었다.
“어디 가.”
아직 졸음에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물 마시러.”
“아침이야?”
“응. 더 자.”
“일어나야지. 데이트하려면.”
중얼거리며 은겸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불 밑으로 드러나는 길쭉한 팔다리와 꼬리가 보기 좋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오후에 가도 돼.”
“그럼 너도 물 마시고 돌아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은겸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 은겸과 나누는 대화 쪽이 끌렸다. 나는 은겸의 옆에 앉았다.
“기분 좋아 보이네.”
“신혼 첫날 같아서.”
“그런가.”
나야 겪어 본 적 없으니 신혼 첫날이 어떤 분위기인지 모르지만, 두 번이나 겪었을 은겸은 잘 알 터였다. 그 사람들과도 나와 했던 것처럼 뜨거운 밤을 보내고, 다정한 아침을 맞았을까. 비발정기의 나는 안겨 주지 못한 신혼 첫날의 달콤함을 만끽하면서.
‘……아냐.’
또다시 고개를 드는 질투심을 꾹꾹 욱여넣고 나는 허리를 수그렸다. 은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자 둥근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허니문에 삽입을 못 해서 미안.”
“…….”
“대신에…….”
그 대신 다가오는 기념일에 제대로 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려 했는데.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은겸이 내 팔을 무서운 힘으로 끌어당겼다. 균형을 잃고 침대 위로 쓰러지자 벌떡 일어난 은겸이 내 위로 올라탔다. 그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원재야.”
또 뭐에 스위치가 눌렸을까. 매번 궁금해하기도 지쳤다. 포기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겸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박물관 오후에 가도 된댔지?”
이미 눈빛이 변한 은겸을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나는 무릎을 세워 그의 다리 사이를 꾹 눌렀다. 은겸의 반응은 빨랐다. 아래가 단단해지나 싶더니 은겸이 순식간에 덮쳐들어 내 목덜미를 세게 물었다. 넓은 등을 끌어안고 나는 한숨을 흘렸다. 일찍 외출하기는 다 틀린 듯했다.
결국 은겸과 나는 폐관 시간을 조금 남겨 놓고 아슬아슬하게 전시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한 시간 후에 폐관하니 빠르게 관람하라는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목도리와 코트를 꼼꼼하게 여몄다. 추운 날씨 탓에 단단히 무장하고 데이트를 나선 차림 같아도 사실 그 아래 맨살에는 은겸의 잇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었다.
촉박한 시간 탓에 전시는 보는 둥 마는 둥일 줄 알았는데 은겸은 첫 전시관에서부터 발길을 천천히 옮겼다. 전시장의 입구에는 인간의 멸종과 수인의 등장에 관한 역사가 짤막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은겸을 따라 나도 안내문 앞에 멈춰 서서 글을 읽었다.
인간의 멸종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 인간만 걸리는 전염병이 돌았다, 대전쟁이 일어나 서로를 학살했다, 인간이 생존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 환경이 변화했다 등등. 모든 것이 짐작일 뿐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사라진 뒤, 그때까지 정체를 숨기고 동물인 척하며 산에, 들에, 강에,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숨어 살던 수인들이 역사의 물결 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인은 손쉽게 인간의 빈자리를 차지했다. 직립보행과 자유로운 손 사용이 가능한 몸으로 생활하면서 인간이 남기고 간 문명과 지식을 물려받았다. 더는 인간의 눈을 피해 동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기에 수인들은 차츰 본모습으로의 변신 능력을 잃어 갔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른 현재, 꼬리와 귀를 내놓고 살며 아주 드물게 신체의 일부를 동물형으로 바꿀 수 있는 수인의 기본적인 모습이 자리를 잡았다.
관람객의 눈높이를 고려했는지 안내문에 적힌 것은 기초적인 개괄이 전부였다. 누구나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을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인간의 유물과 함께 박물관에 와서 접하니 느낌이 남달랐다.
은겸은 모든 유물과 안내 패널을 진지하게 훑었다. 인간들이 착용했다는 꼬리 구멍이 없는 하의, 귀 구멍이 없는 모자를 보며 감탄했고, 인간들의 신화가 적혀 있는 고서적 앞에서는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한 마디 없이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의 속도에 맞추어 나는 천천히 전시실을 돌았다.
두 번째 전시실에 도착하자 커다란 그림 패널이 우리를 맞았다. 두 동물이 그려진 안내판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눈앞의 그림을 가리키며 은겸이 씩 웃었다.
“이 얘기가 첫 번째로 나올 줄 알았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에게 관심이 그다지 없는 나도 ‘한반도에 살았던 인간들의 신화’라는 전시 주제를 듣자마자 이 이야기를 떠올렸으니까.
커다란 안내판에는 동굴 속에 앉아서 쑥과 마늘을 먹는 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는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호랑이의 뒷모습도 보였다. 인간이 되고 싶어 신에게 빌었던 곰과 호랑이의 신화였다.
나는 마치 수인이나 인간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그림 속 곰과 눈을 맞추었다. 그림 속의 곰은 내가 아는 곰 수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온몸이 털로 뒤덮였고 네발로 걷는, 이미 사라진 동물의 모습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멸종한 건 인간만이 아니다. 과거의 포유동물은 수인이 번성하면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포유류는 수인뿐이다. 그래서 나는 곰 수인이지만 보통 곰이라고 줄여서 불린다. 이 세상에는 수인이 아닌 곰이 없기 때문이다.
기다란 발톱이 달린 두툼한 곰의 앞발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내 몸에는 사라진 두 존재, 인간과 곰이 반씩 섞여 있다. 아무리 싫어도 그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인간을, 또는 곰을 닮고 싶지 않더라도. 이 몸으로 태어난 이상 나는 곰 수인이다.
“이 얘기는 참 멋진 것 같아.”
곰과 눈싸움을 하는 사이 안내 문구를 전부 읽었는지 은겸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은겸의 감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반도 곰 수인의 시조로도 불리는 이 곰은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을 버티라는 신의 계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약속된 기한을 견뎠다. 반면 함께 인간이 되기로 했던 호랑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굴 밖으로 도망쳤다.
영민한 호랑이는 떠났지만, 미련한 곰은 남았다. 신화의 내용은 그게 전부다. 곰은 기발한 꾀를 내거나 강인한 신체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그저 굴에 앉아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버티기만 했다. 곰의 신화는 신비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인간들의 신화에서조차 곰은 미련퉁이로 묘사될 뿐이다.
“곰은 멍청하게 속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응?”
“처음 보는 사람이 쑥과 마늘만 먹으며 버티라고 했는데 대책 없이 믿고 기다린 거잖아. 만약 그게 거짓말이었다면 죽었을 텐데도. 호랑이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가 버린 거고.”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
가볍게 답한 은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예전부터 이 이야기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은겸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 계기가 주인호 때문이라는 것도.
정운이와 나, 주인호의 관계는 인간들의 신화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날쌔게 정운이를 채간 주인호는 상황 판단력이 좋은 호랑이의 후예였고, 뒤에 남겨져서 정운이를 하염없이 기다린 나는 미련한 곰의 후예였다. 수천 년 전에 제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는 호랑이와 곰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신화조차 나를 조롱하는 듯했다.
은겸은 고개를 숙여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 곰의 긴 기다림은 결국 헛되지 않았잖아? 마침내 인간이 되어 좋은 상대와 맺어졌으니까.”
은겸이 다음 그림을 가리켰다. 인간 여성으로 변한 곰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 신 옆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빙긋 미소 지으며 은겸이 손깍지를 꼈다.
“곰은 미련한 게 아니라 약속을 성실히 지킨 거였어. 인간들이 숭배하고 시조로 삼은 동물도 도중에 포기한 호랑이가 아니라 끝까지 남은 곰이었고.”
“…….”
“그건 결국, 인간들이 호랑이의 행동력보다 곰의 신의를 소중하게 여겼단 뜻이잖아. 그러니까 멋진 이야기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은겸이 머리를 톡 기댔다.
“사자하고 이어지지 않은 게 좀 슬프긴 하네.”
“……인간이 됐는데 사자하고 이어지면 어떡해.”
“그런가.”
키득키득 웃은 은겸이 나를 이끌고 다음 전시실로 향했다.
전시관을 반도 돌기 전에 폐관 시간이 다가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쉬워하는 은겸을 잡아끌며 나는 말했다.
“다음에 또 오자.”
“그럴까?”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보면 되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은겸이 발길을 돌렸다. 아직 남아 있는 전시관을 대강 눈으로 훑고 나는 출구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은겸은 전시 이야기를 계속 꺼냈다.
“재미있었어.”
열심히 관찰한 듯, 내가 보지 못한 디테일을 설명하는 은겸은 들떠 있었다. 나도 은겸과 같은 취향이었다면 함께 즐거워하며 떠들 수 있었을 텐데. 인간에게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영혼 없는 맞장구를 간간이 들려주는 게 고작이었다.
왜 인간을 좋아할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존재에 흥미를 가져 봐야 현실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조심스럽게 내 관점을 설명하자 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특히나 인간은 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존재니까.”
말을 이으며 은겸이 좌회전 신호를 따라 핸들을 돌렸다.
“나는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서 좋아하는 거야. 영영 없어졌거나 닿지 못할 만큼 먼 존재들은 내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잖아? 그 흔적을 되짚어 보면 거꾸로 안심이 되거든.”
“무슨 안심?”
“내게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거.”
역시나. 은겸의 취향은 뿌리 깊은 상실감과 맞물려 있었다. 곧바로 답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루 이틀 생각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나는 그 이상 은겸에게 묻지 않았다.
‘오래된 취향일 테니까.’
그런 허무한 취향을 버리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고작 은겸과 1년도 만나지 않은 내가, 그가 오래전부터 느낀 공허함을 전부 덮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비어 있는 마음을 채우고 싶다. 다시는 무엇도 끝나지 않게 해 주고 싶다. 그러려면 은겸에게 끊임없이 표현해야 했다. 내가 은겸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함께해 달라고.
이제 네 옆에서 사라지지 않을 나를 믿어 달라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흩어지는 말 대신 확실한 증표를 건네면 어떨까.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나는 작은 계획을 세웠다.
***
12월 중순에 접어들며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었다. 겨울을 타느라 잠이 많아진 나를 은겸은 귀엽게 여겼다.
“요새는 집에서도 항상 자고 있네.”
담요를 둘둘 감고 꾸벅꾸벅 졸다가 은겸의 말에 퍼뜩 깨어났다. 집에서 연인다운 짓은 못 하고 잠만 자니 은겸이 답답할 만했다. 눈을 비비며 나는 중얼거렸다.
“미안. 커피 좀…….”
“아냐. 그냥 자.”
다가온 은겸이 이불째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자는 너 보면 돼.”
“30분만 잘게.”
“더 자, 원재야.”
나를 토닥인 은겸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노곤한 잠에 휘말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무드등의 빛이 어두운 방을 은은하게 비췄다. 나를 품에 안은 은겸은 이불 없이 잠들어 있었다. 감기 걸리게 왜 이러고 있지. 나는 둘둘 만 이불을 풀어 은겸에게 덮어 주었다. 내 움직임에 깬 듯, 눈썹을 이리저리 찡그린 은겸이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깼어?”
“응.”
“나도 깜빡 잠들었다.”
“더 자.”
이번에는 내가 은겸을 다독였다.
“자는 너 볼게.”
“그럼 멋지게 하고 자야겠네.”
손을 올려 앞머리를 두어 번 매만진 은겸이 씩 웃었다.
“어때?”
“그냥 자.”
“알았어.”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곤 은겸이 고개를 수그렸다. 기어이 가슴팍 한가운데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에야 은겸은 잠이 들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커다란 상체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침대 옆으로 팔을 뻗었다. 무드등을 끄고 은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은겸처럼 잠을 청해야 할 텐데. 한번 깨서 그런지 정신이 또렷했다. 나는 이불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렇다고 침대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집 안은 포근하지만 바깥은 추울 터였다.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다 잘 요량으로 다시 팔을 뻗었다. 화면의 밝기를 최저로 줄이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SNS를 확인하고, 뉴스 몇 개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도 졸음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뭐 하지. 고민하며 검색창을 터치하자 얼마 전 내가 검색한 키워드가 줄줄이 화면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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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애인
사자 남자 선물
사자 기념일
사자 남자 크리스마스
잠든 은겸이 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민망함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검색창에 남은 것은 크리스마스를 대비한 사전 리서치였다. 주위에 사자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니 집단 지성의 힘을 빌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뭐라고 검색하면 좋을지 몰라서 이것저것 입력해 보았다. 검색에 잡히는 내용은 대부분 같이 고기를 먹으러 가라거나, 구두나 시계를 선물하라는 평범한 조언뿐이었다. 프라이드 내 다른 애인의 선물과 겹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팁과 마주친 순간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나는 검색을 포기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끙끙대던 기록과 다시 마주치자 기분이 묘했다.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인터넷 창을 끄려 할 때였다. 사이트 하단에 뜬 연관 검색어가 눈에 들어왔다.
사자 궁합
나는 손을 멈추었다.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슬쩍 내려 은겸을 확인했다. 고른 숨을 내쉬는 그가 잠들어 있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손가락이 움직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두 단어 사이에 한 글자를 추가했다.
사자 곰 궁합
짧은 로딩이 끝나고 검색 결과가 떠오르는 짧은 사이, 나쁜 짓이라도 꾸미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신중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검색 결과를 훑어보았다. 대부분 유료 궁합 사이트 안내가 나와 있는 가운데, 페이지의 중간쯤에 역술가 블로그의 링크가 보였다.
‘……이런 거 안 믿는 편인데.’
맹세코 지금껏 사주나 운세 같은 걸 찾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확실치도 않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찾아볼 시간에 현재를 열심히 살면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자♥곰 궁합’이라는 제목의 게시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블로그에 들어갔다.
블로그 글은 사자와 곰의 일반적인 특성부터 장황하게 다루었다. 내가 찾던 사자 남자와 곰 남자의 궁합은 끝부분에 적혀 있었다.
태양같이 화려한 사자와 달처럼 고독한 곰은 어울리기 힘든 조합입니다. 성격부터 다른 두 사람이 맞춰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왜 안 좋은 말이지. 미간을 찌푸리며 마저 화면을 내렸다.
연인 사이에 꼭 필요한 속궁합 또한 맞지 않습니다. 발정기 차이로 인한 갈등 외에도, 적극적인 사자는 좀처럼 먼저 다가오지 않는 곰을 답답하게 여길 가능성이 큽니다.
“아닌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굉장히 잘 맞는 편인데?
나는 은겸이 완벽한 잠자리 파트너임을 첫 만남부터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은겸은 몸을 겹칠 때마다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다. 그와의 모든 잠자리는 짜릿하고 강렬했다. 진정되었던 발정기마저 되살릴 정도로. 설마 나 혼자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겠지.
은겸은 나와 보내는 밤이 만족스럽지 않을까?
잠든 은겸을 깨워서 묻고픈 충동을 꾹꾹 눌러 담고 마저 글을 읽었다. 속궁합 밑으로도 독립적인 성격의 곰과 프라이드를 구성하는 사자가 커플이 되면 싸울 일밖에 없다는 악담이 한참 이어졌다.
게으르게 뒹구는 걸 좋아하는 점은 닮았으니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있겠네요.
블로그 글은 끝까지 부정적인 뉘앙스였다. 참고하려고 봤던 궁합 때문에 괜히 기분만 찜찜해졌다. 나는 핸드폰을 내던지듯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에 잔상처럼 남은 불쾌한 문장을 지우려 애쓰며.
새벽의 리서치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무의식에 강렬하게 남았는지 불쾌한 꿈으로 이어졌다.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면서 가까스로 꿈에서 풀려났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졸음과 함께 찜찜한 감정을 몰아냈다.
눈을 뜨자 언제나처럼 은겸의 얼굴이 제일 먼저 시야에 닿았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던 은겸이 입을 열었다.
“잘 잤어?”
다정한 목소리가 기분 좋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몸을 쭉 폈다. 따스한 이불 아래에 파묻힌 몸이 노곤했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춘 은겸이 미소 지었다.
“잠 깨면 씻고 와. 아침 먹자.”
이마에 닿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반쯤 눈을 감고 말캉한 감촉을 즐기다가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새벽에 본 블로그의 글이 떠올랐다. 적극적인 사자는 먼저 다가오지 않는 곰을 답답하게 여긴다고 했던가.
“응? 원재야, 읍!”
절대 블로그 글에 휘둘리는 게 아니야. 속으로 되뇌면서 은겸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당황한 은겸의 입술 틈으로 내가 먼저 혀를 밀어 넣었다. 금방 이성을 챙긴 은겸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입술을 빨며 그가 목을 울렸다. 아침 인사로는 과할 정도로 진한 키스였다.
마냥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은겸은 먼저 물러났다.
“이 이상은 좀 위험할 것 같다.”
내 어깨를 가볍게 밀며 은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리에 닿는 뜨거운 것을 인식하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침이라 위험할 텐데 괜히 불을 지폈나 싶었다.
내가 주도해서 나눈 키스는 하반신 자극 외에도 다른 효과가 있었다. 은겸은 아침을 차리는 내내 만족스러워 보였다. 프렌치토스트를 우물거리면서 나는 그를 살폈다. 싱글벙글 웃으며 잼 뚜껑을 닫는 은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질 않았다. 거짓이나 가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진짜로 내가 먼저 안 해서 답답했었나.’
기분 나쁜 궁합 풀이에 반박하기 위한 키스였는데, 도리어 그 글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착잡해지는 기분을 오렌지 주스 한 입으로 추슬렀다. 비발정기인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은겸이 먼저 스킨십을 조른다 치더라도, 발정기 때는 어땠었나.
‘그래도 키스는 먼저 몇 번 했던 것도 같은데.’
정작 내가 먼저 섹스를 제안한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진짜로 우리의 속궁합이 별로라면 큰일이었다.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망칠지도 모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입 안에 든 토스트를 꿀꺽 삼켰다.
“서은겸.”
“딸기잼 더 줄까?”
“나랑 했던 섹스 어땠어?”
“……응?”
은겸의 두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하긴, 귀를 의심할 만한 주제이긴 했다. 아침 식사 자리에 어울리는 이야기도 아니고. 태연한 척 티슈로 손을 닦으며 그를 건너다보았다.
“발정기 때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해서.”
“그런 건 왜 묻는데?”
은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리는 그가 수상쩍었다. 나는 곧바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답해.”
“글쎄.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내 채근에도 불구하고 은겸은 미적거렸다. 정말로 내가 적극적이지 않아서 불만이었던 건가. 그동안 나처럼 은겸도 만족하고 있었던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반응에 심적 타격이 컸다. 침울해진 기분을 감추고자 나는 토스트를 한 장 더 집어 들었다.
은겸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원재 너는 섹스할 때마다 놀랍지.”
“……뭐가.”
“어떻게 이렇게 야한가 싶어서.”
혼자 무언가 납득한 듯 은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에는 이 악물고 참다가, 사정할 때쯤 되면 못 견디고 막 신음하잖아. 그리고 항상 두 번째부터 울거든. 그게 진짜 사람 못 참게 만드는 포인트란 말이지. 그래서 처음만큼이나 두 번째, 세 번째도 미친 듯이 꼴리는 거 알아?”
그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가슴이 커서 쥐기도 좋아. 반달무늬도 귀엽고.”
“…….”
“아, 가슴만 좋아하는 건 아니야. 전체적으로 다 크잖아. 그래서 원재 네가 끌어안으면 숨 막히거든. 그 압박감이랑 묵직함이 좋더라고.”
그 정도면 됐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나는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은겸은 멈추지 않았다.
“안도 엄청 좁지. 넣으면 얼마나 꽉 조이는지 모를걸. 그야말로 잡아먹히는 기분이야. 미끈거리는데 뜨거워서 내 거가 녹는 것 같고.”
“…….”
“그게 또 엄청나게 자극적이란 말이야. 빼지 말라고 붙잡는 거 같아서. 특히 끝까지 밀어 넣으면 좀 좁아지는 데가 있어. 거기에 닿으면 네 안쪽이 경련하거든. 그래서 24시간 박고 싶어지는…….”
“그만해.”
“왜. 얘기해 보라며.”
“음담패설을 하라는 게 아니었어.”
“섹스 얘기가 안 야할 수 있어?”
은겸의 꼬리가 허공을 느릿하게 갈랐다.
“더군다나 너랑 하는 섹스 얘긴데.”
은겸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그런 걸 물어본 내 잘못이었다. 더 듣지 않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곤, 나는 토스트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싱글거리며 은겸이 눈웃음을 쳤다.
“결론만 말하자면 진짜 좋았어.”
“그래.”
뭐, 그래도 좋았다니 다행이었다. 만약 별로라고 하면 어쩌지 싶었는데 고민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자 개운해졌다. 남은 토스트를 깨끗이 삼키고 난 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낼 수 있어?”
“왜? 데이트하게?”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은겸은 가볍게 대꾸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은 크리스마스였다. 고로 금요일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특별한 기념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은겸도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 뒀을 가능성이 컸다.
은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의 주도권은 내가 가져갈 계획이었다.
“그날 같이 가 줘야 하는 데가 있어.”
“어딘데?”
“병원.”
“어디 아파?”
“그런 거 말고. 사러 가야지.”
“……뭘?”
오래 준비해 왔던 단어를 선뜻 꺼내기 어려웠다. 주스로 한 번 목을 축이고 나서야 매끄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촉진제.”
은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은겸에게 미리 말을 안 했을 뿐, 병원의 예약은 몇 주 전에 잡아 두었다. 크리스마스라는 대형 이벤트를 앞두고 촉진제를 찾는 커플들이 많은 듯, 가까운 병원은 죄다 예약이 밀려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이곳저곳에 문의한 끝에 크리스마스 전에 진단과 처방전 발급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냈다.
어렵게 예약을 잡았다 한들 은겸이 같이 가지 못한다면 말짱 헛수고였다. 성욕 촉진제는 사용 당사자와 파트너가 함께 가지 않으면 판매하지 않으니까. 설마 휴일 전날이라 바쁜가. 서프라이즈 선물로 감춰 둘 게 아니라 일정을 조정하라고 진작 알려 주는 게 나았을까. 밀려드는 불안감을 삼키며 나는 은겸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은겸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원재야, 그거…….”
“애인하고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인데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아.”
“…….”
“그러니까 같이 가 줘.”
살짝 벌어진 은겸의 입술에선 그 이상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많이 당황한 듯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충분히 예상할 텐데 깜짝 선물로서의 의미가 있나 고민했던 지난 시간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는 은겸의 눈치를 살폈다.
“시간 내기 어려우면 그만두고.”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은겸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저은 그가 눈을 감았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원재야.”
“응.”
“그거 나랑 섹스하겠다는 뜻이지.”
“응.”
“……내가 불쌍해서 그래? 아니면 설마 내가 너한테 잠자리를 강요했다거나…….”
자신 없이 잇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은겸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나도 은겸을 따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념일을 맞아 함께 밤을 보내자는 연인에게, 혹시 나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그러냐고 묻는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상대의 발정기가 끝나자 아무리 격렬하게 흥분해도 촉진제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았던 마음도. 애초에 은겸은 자위조차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거절했었다. 자칫하다가 자신 때문에 내가 무리하게 될까 봐 스스로 조심했겠지.
성욕도 자신감도 넘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움츠러드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았다.
착잡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은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
“너하고 섹스하고 싶어.”
단호하게 말하자 은겸이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것처럼 모아 쥔 양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중얼거렸다.
“발정기가 아닌데 나랑 하고 싶다고.”
“응.”
“너도 나만큼…….”
역시 진작 말할 걸 그랬다. 조금 후회하면서 나는 손을 뻗었다.
“너를 원해, 서은겸.”
손끝으로 길쭉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뼈가 불거진 마디를 톡톡 건드려도 은겸은 고개를 들거나 손을 풀지 않았다. 손등 위에 비치는 파란 핏줄을 쓸어내리며 은겸을 기웃거렸다.
“그러니까 금요일부터 밖에 나가지 말자. 사람도 많고 춥잖아.”
“…….”
“일요일 밤까지 집에만 있고 싶은데.”
손목뼈를 간질이며 나는 계속 내 계획을 털어놓았다. 미동조차 없이 웅크린 은겸을 깨우기 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은겸이 위아래로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굳었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기쁨이 번져 있었다.
내 손을 붙잡은 은겸이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살갗을 타고 몸속까지 울렸다.
“응. 크리스마스는 단둘이 보내자.”
***
은겸과 나는 약속대로 주말 내내 집밖에 나서지 않았다. 3년 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 있을지 흥분한 사람들이 방송이며 거리에서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바깥 날씨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금요일 오전에 일찌감치 병원에 갔다. 내가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비발정 진단서를 끊는 동안 은겸은 옆을 지켰다. 반드시 본인의 성교에만 사용하겠다는 각서에 사인할 때도, 모든 복잡한 절차가 끝나고 약 처방만이 남았을 때도 은겸은 긴장한 듯 입술만 잘근거렸다,
“며칠 치 필요하세요?”
그래서 의사의 마지막 질문에는 내가 먼저 답할 수 있었다.
“사흘 치면 됩니다.”
“사흘?”
놀란 눈으로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무심히 답했다.
“오늘 금요일이야.”
“…….”
“모레까지 써야지.”
은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환희가 드러났다. 우리를 번갈아 보던 의사가 픽 웃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겠네요.”
“네. 그러려고요.”
간단히 답하는 내 손을 은겸이 붙잡았다. 흥분한 듯 아랫입술을 핥는 그를 데리고 병원을 나섰다.
약국에 들러서 사흘 치 성욕 촉진제를 샀다. 주의 사항에 대해 안내를 받는 내내 은겸은 집중하지 못하고 꼬리를 흔들거렸다. 그러더니 내 귀에 대고 소곤댔다.
“언제 먹을 거야?”
“집에 가서.”
“약효 돌 때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릴 텐데.”
“그사이에 씻고 준비하면 되잖아. 못 기다리겠으면 같이 씻든가.”
은겸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그의 노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대에 가득 찬 은겸이 귀여웠다.
“알았어.”
가방에 넣어 둔 약봉지를 꺼냈다. 개별 포장된 봉지를 뜯는 순간부터 은겸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보란 듯이 약국 한편에 마련된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서 약과 함께 삼켰다.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오자 은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한 시간 남았어. 빨리 집에 가자.”
내 손을 붙든 은겸이 당장 약국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에 오는 내내 은겸은 아슬아슬하게 과속을 피했다. 초조한 듯 핸들을 두드리고, 자꾸 룸미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턱을 괴고 모르는 척 밖으로 보았다. 괜히 흥분하면 약효가 더 빠르게 돌지도 몰랐다. 그러면 집까지 버티지 못하고 좁은 차 안에서 불편하게 몸을 겹칠 수도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섹스인데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느낌 오면 말해 줘.”
나보다 더 긴장한 목소리로 은겸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한 번도 촉진제를 먹거나, 복용한 사람과 함께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언제 어떻게 흥분이 차오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시간이 되면 성욕이 고조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만 있을 뿐. 이런 건 나보다 은겸이 더 잘 알 텐데, 이미 이성을 놓은 듯한 은겸에게 정확한 정보를 얻기란 어려워 보였다.
은겸은 병원에 갈 때는 30분이 걸렸던 길을 돌아올 때는 15분 만에 돌파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그는 재빠르게 내리더니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괜찮아? 혼자 내릴 수 있어?”
“멀쩡해.”
“힘들면 말해. 안고 갈 테니까.”
안절부절못하는 은겸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아무리 힘이 세도 나 같은 거구를 안고 집까지 가는 건 무리일 게 뻔했다. 나는 내 발로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은겸은 도통 안정을 취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가 정신 사나울 정도였다.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에서 꼬리 끝을 붙잡자 은겸이 흠칫 놀라며 내 손을 뿌리쳤다.
“만지지 마.”
꼬리 끝으로 얻어맞은 손등이 제법 얼얼했다. 손을 문지르며 나는 은겸에게 사과했다.
“……미안.”
“후우.”
한숨을 쉰 은겸이 내게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좀 떨어져 있자.”
아직 약효가 퍼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과민하게 반응하면 나중에는 어쩌려고. 은겸이 지나치게 기대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발정기 때만큼 열기를 끌어내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처음 먹는 촉진제가 몸에 안 받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과장이나 거짓은 아니더라도 오늘은 충분히 소리도 내면서 은겸에게 맞추어 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다짐을 취소했다.
현관문이 닫힌 순간 은겸은 오랫동안 품어 온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침실까지 향할 틈이 없었다. 신발을 벗고 현관을 벗어나는 짧은 순간에도 은겸은 긴 꼬리를 정신 사납게 휘두르면서 안달했다. 그러더니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내게 덮쳐들었다.
두꺼운 겉옷은 은겸의 재빠른 손길에 의해 금방 벗겨졌다. 내 옷을 바닥을 던져 버리곤 은겸은 거침없이 셔츠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를 팔꿈치로 저지하며 나는 목 부분의 단추를 풀었다. 가슴 부근에서 손을 놀리던 은겸이 미간을 찌푸리곤 혀를 찼다. 단추를 하나하나 푸는 게 성가신 듯했다.
발정한 사자의 인내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투둑,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팽팽했던 가슴께가 헐렁해졌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은겸이 셔츠의 앞자락을 쥐곤, 양쪽으로 잡아 벌리고 있었다.
“잠깐, 서은겸!”
말리려 해도 이미 소용없었다. 뜯겨 나간 단추가 툭툭 튕겨 올라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상체가 다 드러나도록 셔츠를 벌려 놓은 뒤에야 은겸은 손을 놓았다.
“하…….”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쉰 은겸이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내 몸을 훑었다. 지금껏 수없이 봐 온 주제에, 마치 처음 타인의 나신을 접한 듯한 반응이었다. 살결을 집요하게 핥아 올리는 듯한 노란 눈을 피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코트도 벗지 않은 은겸의 눈앞에 나 혼자 가슴팍과 배를 훤히 드러내고 있으려니 민망했다.
은겸은 보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불쑥 손을 올린 그가 가슴의 아래쪽을 움켜쥐었다. 말캉한 살을 주무르는 커다란 손이 뜨거웠다. 그대로 애무를 시작할 기세인 은겸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더라도 침대에서 하고 싶었다.
“침대로 가.”
내 의견은 이번에도 묵살되었다. 내 몸을 이리저리 더듬던 은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직 미지근하네.”
“30분도 안 지났으니까. 좀 더 기다려.”
혼잣말에 대꾸해 주자 은겸이 쯧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곧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기할까?”
“무슨 내기.”
“10분 안에 네가 흥분하면.”
날카롭게 눈을 치뜬 은겸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여기서 잡아먹히기.”
순간 퍼진 진한 체취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허리에서부터 올라온 소름 때문에 몸이 떨렸다. 지금껏 은겸이 보였던 욕망은 비발정기인 나를 배려해 반도 드러내지 않은 것이었다. 먹이를 앞에 두고도 오랜 시간 참아 왔던 맹수의 눈빛과 마주치자 짜릿짜릿한 긴장이 전신에 퍼졌다. 만일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금방이라도 은겸이 덮쳐들어 나를 바닥에 눕힐 것만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질 게 뻔한 내기를 승낙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제대로 발정하지 않은 지금도 저렇게 안달인데,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은겸은 거칠 것 없이 폭주할 터였다. 옷도 벗지 않은 채로 다리만 얽고서는 곧장 나를 꿰뚫겠지.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여기서, 바로 몸을 겹치고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는 것도.
‘……안 돼.’
바닥에 누운 채로 은겸에게 안겨 정신없이 흔들리는 상상에 잠겨 있다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나는 어느새 잠긴 목을 골랐다.
“안 해.”
“왜? 나한테 먹히기 싫어?”
“그게 아니라.”
매섭게 노려보는 노란 눈의 기세에 질려 한 걸음 물러섰다. 흥분한 사자 앞에서 도망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팽팽했던 분위기가 깨지자 기다렸다는 듯 은겸이 내 턱을 붙잡았다.
“흐읏…….”
무작정 겹쳐 드는 입술을 거부하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잡힌 턱이 얼얼할 정도로 손끝에 힘을 주곤 은겸은 입술을 짧게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춥춥 하는 야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집에 올 때까지 은겸이 나와 거리를 유지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살이 맞닿자 이성이고 뭐고 전부 날아가 버렸다. 나는 곧장 은겸을 끌어안았다.
더 길게 키스를 졸라도 은겸은 키스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짧게 내려앉기만 할 뿐이었다. 넓은 등에 팔을 두르며 나는 입을 벌렸다.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하자 못 이기는 척 축축한 살덩이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대뜸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
자세를 바꾸며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입술은 이내 내 위에 자리 잡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에 점차 입가가 젖어 들었다. 치열을 훑는 은겸의 혀를 빨아들이면서 나는 신음을 흘렸다. 까끌대는 혀의 표면이 입천장을, 점막을 긁을 때마다 허리가 떨렸다. 멍해진 머릿속에는 은겸이 더 깊게, 더 세게 입 안을 헤집어 주기를 바라는 욕구만이 남았다.
콧속이 아렸다. 은겸의 향에 익숙한 나도 놀랄 만큼 진한 냄새가 은겸에게서 흘러나왔다. 흥분한 맹수의 체취가 진득하게 피부에 달라붙는 듯했다. 온몸이 짜릿하게 달아올랐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험 신호가 숨을 가쁘게 했다.
입 안이 따끔거리다 못해 희미하게 피 맛이 돌 때쯤 은겸은 입을 떼어 냈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짧은 찰나조차 참기 어려웠다. 길게 이어진 은실을 따라가 붉은 입술을 핥자 입을 벌린 은겸이 혀를 맞대고 비볐다. 부드러운 살을 자극하는 돌기가 못 견디게 기분 좋았다. 나도 모르게 은겸의 어깨를 붙들고 끙끙 목을 울렸다.
피식 웃은 은겸이 턱을 쥔 손을 치켜들었다.
“입 벌려 봐.”
이어질 자극을 기대하며 나는 입을 한껏 벌렸다. 안을 들여다보는 은겸의 시선마저도 야릇하게 느껴졌다. 마치 은밀한 몸속을 벌려서 구석구석 보여 주는 기분이었다. 입천장이며 볼 안쪽, 혀 위까지 꼼꼼하게 훑은 은겸이 고개를 저었다.
“키스는 안 돼. 더 하면 살점 떨어져.”
“더 해.”
“안 돼. 이제는 다른 거 해야지.”
단호하게 말한 은겸이 볼을 핥아 올렸다. 까끌까끌한 혀의 감촉은 턱을 타고 목으로 향했다. 목을 잘근거리며 흔적을 남기는 그의 숨결이 이미 거칠었다. 붉게 상기된 은겸의 귓불과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나는 숨을 골랐다. 키스가 끊긴 건 아쉽지만, 은겸의 말대로 아직 우리 둘 사이에 할 것은 많이 남아 있었다.
아플 정도로 쇄골을 깨문 은겸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하는 섹스도 아닌데, 너한테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다가온 은겸의 얼굴이 가까웠다. 아, 키스하고 싶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을 벌린 모양이었다. 턱을 놓은 은겸이 내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지고 싶고, 울리고 싶고, 제일 깊은 곳까지 박아 넣고 흔들다가 뿌리고 싶어.”
콧잔등에 닿는 숨결이 감질났다. 아, 빨리. 빨리 어떻게든 해 주길. 정신없이 은겸만을 보면서 애타게 숨을 헐떡였다. 코끝을 살짝 깨문 은겸이 뒤로 물러났다. 커다란 몸이 멀어졌는데도 어지러운 체향은 그대로였다. 입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건 은겸이 내뿜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서 나는 체취였다.
허리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 이유가 바로 보였다. 바지를 찢을 기세로 중심이 부풀어 있었다. 나는 실소를 흘렸다. 예상대로 은겸과의 내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지난여름에도 그랬듯, 그가 이길 테니까.
촉진제의 약효를 걱정한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계절답지 않게 온몸이 후끈후끈했고 머릿속에는 온통 은겸과 뒤엉킬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발정기가 끝나서 잠시 잊고 있었다. 발정이 가능한 상황에서라면 은겸은 손쉽게 나를 흥분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내 몸은 은겸의 앞에서는 언제든지 흥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곧, 은겸이 더는 나와의 섹스를 참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도 그래.”
은겸의 손을 붙들어 내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두툼한 굴곡을 확인한 은겸이 느릿하게 호흡했다. 내뱉은 숨결에 뜨거운 열기가 실려 있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내 것을 만지게 하면서 나는 말했다.
“너하고 하고 싶어서 약 먹은 거야.”
은겸의 손이 닿자 내 성기는 터질 듯 발기했다. 끝부분부터 뿌리 부근까지 길게 더듬은 은겸은 바지의 지퍼를 내려 안을 확인했다. 벌써 축축해진 속옷 위로 숨길 수 없게 커진 성기의 모양이 두드러졌다. 동그랗게 젖은 곳을 문지르며 은겸이 웃었다.
“벌써 이렇게 됐어?”
“읏.”
“내가 이겼네.”
은겸이 손톱을 세웠다. 젖은 천 위로 성기를 긁어내리는 날카로운 감각이 미칠 듯이 자극적이었다. 저절로 허리가 앞으로 꺾였다. 자신의 어깨로 나를 지탱한 은겸이 빙긋 웃었다.
“맛있게 먹을게, 원재야.”
“흐읏, 내기, 안 했거든.”
헐떡이면서도 나는 은겸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성이고 뭐고 날아가기 전에 제대로 말을 전해야 했다.
“섹스는 침대에서.”
“아, 그래?”
건성으로 답한 은겸이 속옷 위로 기둥을 문질렀다.
“그럼 다른 걸 하면 되겠네.”
“뭐?”
내게 답하지 않고 은겸이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배꼽 위로 슬금슬금 올라온 그의 손이 갈라진 복근의 골을 문질렀다. 중심에서 떠난 손길을 아쉬워할 틈이 없었다. 곧 은겸은 내 몸을 어루만지며 살갗에 잇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숨이 부족해 어깨를 들썩였다. 이전에 겪은 전희와는 확연히 달랐다. 오랜만에 발정해서인지, 우리가 연인이 된 뒤 처음으로 함께 발정해서 뒤엉킨 탓인지, 아니면 촉진제의 효과가 원래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신이 성감대가 된 것같이 들끓었다. 은겸의 입술이, 손이 내려앉는 곳마다 델 듯이 뜨거워졌다. 애무만으로도 사정할 것 같아서 몇 번이고 배에 힘을 주어야 했다.
고개를 숙인 은겸이 가슴에 입술을 댔을 때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허벅지를 뻗어 은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은겸의 허벅다리에 내 것을 가져다 대고 꾹 누르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은겸은 내가 느끼는 곳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얀 무늬를 따라 입을 맞추고, 이를 세워 깨물었다. 마침내 반대편 무늬의 끝에 도달한 은겸이 유두를 빨아올렸다.
“흐윽!”
절로 숨이 터져 나왔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운 은겸이 장난스럽게 돌기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다 다시 입술을 대고는 빨았다. 금세 단단해진 젖꼭지가 바짝 서자 은겸이 작은 돌기를 잘근거렸다. 아릿한 통증과 쾌감이 함께 피어올랐다. 은겸의 머리를 붙들고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저 그에게 몸을 맡기고 솔직하게 반응하는 수밖에.
바짝 닿은 하반신에 흠칫거리는 내 움직임이 전해졌을 텐데도 은겸은 줄곧 모르는 척이었다. 속옷 안에 갇혀 갑갑한 성기를 꺼내 주기는커녕, 의도적으로 다른 곳만을 끈적하게 지분거렸다. 여유를 부리곤 있어도 은겸 또한 몸이 달았다는 건 얽혀 있는 다리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내려 은겸의 다리 사이를 쥐었다. 손아귀에 빠듯하게 차는 커다란 것이 점차 제 형태를 지니고 단단해졌다.
불이 피어오르는 듯 뜨거운 기둥을 빠르게 문질렀다. 조금이라도 빨리 은겸과 이어지고 싶어서 초조했다. 자위를 도울 때 했던 것처럼 대고 비비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제대로 그를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싶었다.
“침대로, 하아.”
은겸을 재촉하며 단단하게 얽힌 다리를 세게 눌렀다. 스스로도 이런 내가 놀라웠다. 남자에게 안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내가, 이제는 은겸에게 박히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변화를 깨닫자 목이 탔다. 더는 다른 쾌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은겸과의 섹스가 얼마나 강렬한지 알아 버린 이상, 나는 오로지 그만을 원했다.
귀를 뒤로 눕힌 은겸이 눈을 빛냈다.
“입.”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떼고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손가락이었다. 기대한 것이 아니라서 실망할 겨를은 없었다. 혀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은 손가락이 볼 안쪽 점막을 문질렀다. 나는 혓바닥을 넓게 눕혀 입 안 구석구석을 누르는 손가락을 감싸고 빨았다. 은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잘 빠네.”
손가락이 질척하게 젖을 때까지 그는 손을 빼내지 않았다. 마치 성기를 빠는 것처럼 나도 그의 손목을 붙들고 열심히 혀를 놀렸다. 칭찬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은 은겸이 손을 빼냈다. 빠져나가던 손끝으로 입천장을 긁은 건 분명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혀 돌기에 혹사당했던 점막이 긁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미있다는 듯 내 볼을 톡톡 두드린 은겸이 내 허리 뒤로 팔을 돌렸다.
젖은 손이 향한 곳은 허리 아래였다. 바지 속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엉덩이를 가볍게 쥐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자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단단해진 근육을 토닥거린 은겸이 속옷 밴드 안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나는 꼬리를 옆으로 치우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손가락의 최종 목적지는 아직 닫혀 있는 입구였다.
은겸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내 몸을 열었다. 촘촘한 주름을 쓸어 올리면서 간지럽혔다. 미끈미끈하게 입구를 적신 끝에야 그는 천천히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좁은 틈이 벌어지면서 힘겹게 은겸을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은겸을 받아들이는 구멍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빡빡한 입구는 어떻게든 통과했지만, 좁은 안쪽이 문제였다. 고작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 이물감이 생생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힘 풀어.”
가볍게 내 목덜미를 문 은겸이 곧바로 두 번째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빠듯하게 밀고 들어온 긴 손가락이 버거웠다. 내가 적응하도록 가만히 상태를 살피던 은겸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안팎으로 출입하는 두 손가락이 몸속에서 얽혔다. 타액에 젖은 손가락이 요란하게 찔꺽거렸다. 내 몸에서 난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음란한 소리였다.
발정기의 열기는 금방 회복되었다. 마디를 구부린 은겸이 안쪽을 문지르자 스멀스멀 다른 감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을 겪어도 생경한 쾌감이었다. 아랫배가 단단해지면서 조금 풀이 죽었던 성기에 피가 몰렸다. 그러다 은겸이 한 지점을 강하게 누르고 비볐을 때, 그때까지 참았던 열기가 폭발해 버렸다. 더는 억지로 버틸 수 없었다. 나는 은겸의 팔을 붙들고 몸을 떨었다.
“흐읏, 으……, 으응…….”
“벌써 간 거야?”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짧은 절정이 끝난 뒤에도 온몸의 피가 여전히 뜨거웠다. 내 상태를 살피던 은겸이 손을 물렸다. 아직은 좁은 내벽을 벌리면서 빠져나가는 손가락이 아쉬웠다. 짧게 숨을 내뱉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뒤로 물러난 은겸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을 뻗은 그가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내리자 꼿꼿한 페니스가 바깥으로 퉁 튀어 올랐다. 사정 후 예민한 성기에는 그것마저도 자극적이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나는 은겸을 내려다보았다. 핏줄이 돋은 붉은 성기를 이리저리 살피던 은겸이 불쑥 손을 뻗어 기둥을 쥐었다.
“흐윽, 아!”
“더 내보낼 수 있지?”
“어, 안, 으읏.”
“끝까지 해.”
짧게 말한 은겸이 페니스를 입에 물고 빨기 시작했다. 까끌거리는 혓바닥이 부은 포피를 핥았다. 미칠 것 같은 감각에 나는 은겸을 붙잡았다. 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쥐는 게 다였다. 차마 떼어 내지도, 깊게 끌어당기지도 못하고 끙끙댔다. 그 사이 은겸은 교묘하게 혀를 썼다. 혀끝을 세워 갈라진 틈을 쓸고, 요도구를 찔러 댔다.
기둥 아랫부분을 혀로 쓸어 올린 은겸이 귀두를 전부 삼키고 세게 빨았을 때, 나는 다시 절정을 맞았다. 손가락으로 뒤를 자극당했을 때보다 훨씬 길고 깊은 쾌감이 배 속에 번졌다.
사정이 이어지는데도 은겸은 내 성기를 놓아주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입술을 오물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벌떡거리던 아래가 진정된 뒤에야 은겸은 입을 벌렸다. 그의 입술을 툭 치면서 빠져나온 내 페니스는 끈적하게 젖어 번들거렸다. 헐떡이며 그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하아.”
은겸은 여전히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붉은 혀 위에 흥건하게 고인 액체의 색이 선명한 흰색이었다. 내 시선을 확인한 뒤, 그는 보란 듯이 입을 다물었다. 미친. 나는 당황해서 그의 턱을 붙들었다.
“뱉어.”
은겸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빙긋 미소를 지은 은겸이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 삼켰어.”
“그걸 왜 먹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뻔뻔한 소리를 중얼거린 은겸이 내 성기 끝에 쪽 입을 맞추었다. 언제부터 정액을 마시는 게 반가움의 표현이 된 거지. 숨을 고르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커다란 몸을 날렵하게 일으킨 은겸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너도 삼켜 줘.”
은겸의 눈웃음이 화사해졌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삼켜 달라는 소리가 단순히 펠라티오를 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도.
“……콘돔 껴, 서은겸.”
콘돔 소리를 꺼내자마자 은겸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과장된 몸짓이 뻔했지만 아쉬워하는 그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 쓰면 그냥 해도 돼.”
사흘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준비해 둔 콘돔을 다 못 쓸 턱이 없었기에 한 말이었는데. 오늘 안에 전부 끝장낼 기세로 은겸이 나를 끌고 침실로 향했다.
병원에 가기 전, 들뜬 마음으로 준비했던 물건들은 침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은겸은 젤이며 콘돔을 한 손으로 밀쳐 버리면서 자리를 만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빠르게 옷을 벗는 그의 옆에서 나도 이미 젖은 속옷과 바지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 먼저 빈 시트 위에 누웠다.
은겸의 가쁜 숨소리가 옷끼리 스쳐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섞여 침실을 채웠다. 지독하게 짙어진 체향 때문에 마비된 줄 알았던 후각에 새로운 냄새가 잡혔다. 끈적이는 내 아랫도리가 비릿한 체취를 피어 올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정사의 냄새가 흘렀다. 바닥에 옷을 던지는 은겸의 시선이 내 하체에 고정되었다. 나는 바싹 마른 입 안을 혀로 훑었다. 제대로 된 행위 전부터 두 번이나 사정을 했으면서 내 성기는 염치도 모르고 또 솟아올랐다. 등에, 허리에, 엉덩이에, 그리고 다리에 부드러운 시트가 스칠 때마다 피가 몰린 중심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두 차례 쾌감을 폭발시켰던 내 형편이 나았다. 나신이 된 은겸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무의식중에 헛숨을 삼켰다. 은겸의 검붉은 페니스는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있었다. 힘줄이 불거진 기둥이 배에 닿을 만큼 솟아서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꺼떡거렸다. 고이다 못해 흐른 선액이 선단부터 기둥까지 번들거리는 몇 줄기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대로 달려들 줄 알았더니, 은겸은 침대 옆에 선 채로 허리를 숙였다. 시야를 덮는 상체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의 몸으로 천장을 모두 가린 사자가 뜨거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귀 옆을 더듬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코끝이 살짝 스쳤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발정으로 달아오른 몸 끈적한 체향, 이제부터 단둘이 보낼 시간. 모든 게 완벽했다.
바짝 다가왔던 체온은 금방 멀어졌다. 실눈을 뜨고 위를 보자 콘돔 상자를 여는 은겸이 보였다. 그제야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하라고 할걸.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내용물을 손바닥 위에 쏟아 낸 은겸이 개수를 헤아리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곧 한 개를 입에 문 은겸이 베개 옆에 나머지를 던지곤 침대 위로 올라탔다. 위아래로 크게 출렁이는 침대처럼 내 심장도 거세게 요동쳤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한시라도 허비하지 않고 은겸과 이어지고 싶었다.
그러려면 침대에 멍하니 누워서 은겸에게 모든 걸 떠넘길 때가 아니었다.
은겸이 벌떡 선 자신의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사이, 나는 젤을 집어 들고 다리를 크게 열었다. 뚝뚝 떨어지는 윤활제는 섬찟할 만큼 차가웠다. 적당히 체온과 비슷해지길 기다리며 미끈거리는 점액을 살갗에 펴 발랐다. 회음부터 은밀한 입구까지 윤활제로 끈적하게 젖어 들었을 즈음. 나는 은겸을 올려다보며 뒤에 손을 집어넣었다.
한 번 풀었던 안쪽은 무리 없이 침입을 허용했다. 이물감은 여전했지만, 은겸이 넣었을 때보다는 부드럽게 손가락이 드나들었다. 뜨겁게 감기는 점막을 벌리며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은겸의 흉기를 넣을 생각을 하니 각오가 필요했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안을 누르는 사이, 은겸이 무릎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다리를 잡고 옆으로 벌린 그가 노란 눈을 빛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야 뻔했다. 내 손가락을 물고 있는 입구였다.
은겸의 시선을 무시하려 애쓰며 나는 할 일을 계속했다. 질척질척 젖은 소리가 다리 사이에서 점점 더 크게 울렸다. 너무 많이 짜낸 젤이 철벅거리며 허벅지를 타고 흘러 시트를 적셨다. 엉덩이 아래가 축축했다.
“왜 보고만, 읏, 있어.”
같이 풀어 줄 줄 알았는데 은겸은 계속 구경만 할 뿐이었다. 홧홧해진 뺨을 가리고 싶어도 손이 부족했다. 원망을 담아 묻자 은겸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구멍 벌름거리는 거 귀여워서.”
“서은겸.”
“우리 처음으로 섹스한 날도 생각나고.”
참다못해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은겸이 무릎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허벅다리를 벌려 훤히 아래를 드러내게 한 채로 그가 입술을 핥았다.
“그때도 너는 참 야했는데.”
“잔소리 말고, 하아, 빨리 도와줘.”
“처음이라면서 스스로 손가락을 넣는 게 얼마나 꼴렸는지.”
성마르게 재촉해도 은겸은 허벅지 안쪽을 은근하게 어루만질 뿐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감각이 불만스러웠다. 차라리 손가락이라도 넣어 준다면. 아니, 나는 곧장 생각을 고쳤다. 그보다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빨리 안쪽을 은겸으로 꽉 채우고 힘껏 문지르고 싶었다.
구멍을 벌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은겸의 다리 사이에서 벌떡거리는 성기는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벌써 끝났어?”
놀란 듯한 은겸의 어깨를 끌어안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기울어지는 그를 침대 위에 밀치고 위에 올라탔다.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은겸은 침대에 누운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한 번쯤은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도 좋겠지.
심호흡을 한 뒤 나는 은겸의 허리 옆으로 무릎을 꿇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은겸의 가슴팍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곧추선 은겸의 성기를 잡고 끝을 입구에 맞추었다. 은겸은 이번에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아예 팔을 위로 올려 팔베개를 베곤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리나 보자. 긴장을 풀며 나는 커다란 성기 위로 내려앉았다.
손가락과는 차원이 다른 굵기의 살덩이가 묵직하게 입구를 누르자 저절로 숨이 막혔다. 좀 더 수월한 삽입을 위해 선단을 이리저리 대고 문질렀다. 젖은 입구를 빠듯하게 벌리던 끄트머리는 이내 퉁 하고 튕겨 나가 엉덩이골로 미끄러졌다. 아직 덜 풀렸나. 다시 기둥을 붙들고 나는 숨을 골랐다. 끝을 잘 맞추고 조금 아플 정도로 꽉 누르자 은겸이 미간을 찌푸렸다.
“참아.”
나 역시 인상을 쓰며 그에게 경고했다. 은겸은 눈을 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단단한 중심이 느릿느릿 좁은 틈을 파고들 때마다 그의 복부에 힘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잘 발달한 상반신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나는 마침내 커다란 페니스를 품는 데 성공했다.
귀두가 입구를 통과하자 뜨겁고 커다란 기둥이 안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치덕치덕 윤활제를 발라 둔 보람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은겸의 것이 안쪽으로 꾸물꾸물 전진했다. 배 속을 가르는 감촉이 은겸이 삽입할 때보다 한층 적나라했다. 그에게 올라탄 내 체중이 실려 더욱 깊게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삼키면 힘들 것 같았다. 허벅지에 힘을 주며 몸을 세웠다. 적당히 반쯤 삽입한 채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의도를 눈치챈 것인지 은겸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더니 내 허리를 붙들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다리가 양옆으로 밀려나면서 나는 그만 은겸의 배 위로 주저앉아 버렸다.
“흣!”
“윽.”
단번에 안쪽 끝까지 꿰뚫리자 절로 신음이 터졌다. 엉덩이 사이의 주름이 모두 벌어진 듯 빠듯했다. 배 속 깊은 곳까지 꽉 찬 탓에 숨쉬기도 괴로웠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나는 몸을 떨었다.
신음은 내 입에서만 흐른 게 아니었다. 그를 눌러 버린 내가 무거웠는지 은겸이 억눌린 소리를 냈다. 허둥지둥 일어나려고 버르적거릴 때마다 은겸은 나를 끌어당겨 도로 앉혔다. 졸지에 엉덩이로 그의 몸을 세게 내리누르며 비비는 꼴이 되어 버렸다.
“가만히 있어. 숨 막혀.”
은겸의 괴로운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들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골반 위에 걸터앉아 은겸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었다. 내가 올라타는 체위라니, 역시 무리였나 싶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들어 올리자 은겸이 난처하게 웃었다.
“내 거 뽑힐 거 같아.”
“흐읏.”
“입으로도 잘 빨면서. 아래는 더 잘 물잖아.”
“변태 같은, 아, 소리, 응, 그만.”
“너한테만 그래.”
팔을 들어 내 흉곽을 양손으로 감싸며 은겸이 속삭였다.
“너한테만 이런 충동이 들어.”
“흐으으.”
“참 신기하지. 너만 보면 내가 자꾸 변태로 변해.”
은겸의 음성이 낮아졌다. 엄지손가락으로 유두를 누르고 문지르면서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담백한 사람인데.”
“웃기지, 응, 으응……!”
처음 만난 날부터 원나잇 제의를 했던 주제에 어디가 담백하다는 거야. 내 항의는 은겸의 들썩거리는 성기 때문에 묻혀 버렸다. 여태껏 발산하지 못한 열기가 형태를 지니고 한 곳에 뭉친 듯, 내벽을 누르는 페니스가 뜨거웠다. 나는 그의 배를 짚었다.
“움직이지, 마.”
“그럼 직접 움직일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위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흐읏, 읏……, 읏.”
뒤에 은겸을 물고 직접 움직이는 건 예상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었다. 몸을 들어 올리면 은겸의 말대로 구멍으로 그의 것을 빨아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로 내릴 때도 야릇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온전히 길이 든 안은 딱딱한 기둥을 빠듯하게 삼켰다. 뿌리까지 몸 안에 넣고 나면 곧추선 내 페니스의 밑동이 은겸의 배를 때렸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감질났는지 은겸이 한쪽 팔로 내 허벅다리를 붙들었다. 그러더니 퍽퍽 위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내 몸무게를 버티고 들어 올릴 정도라니, 무서운 힘이라고 감탄할 틈은 없었다. 굵은 기둥은 내벽을 꽉꽉 눌렀고, 단단한 귀두는 좁은 틈을 헤치며 기분 좋은 곳을 찔러 댔다.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면 저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은겸이 억지로 헤치고 들어왔다.
가슴을 움켜쥔 은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에서 보니까, 더 크게, 흔들리네.”
“하으, 아, 읏, 아!”
“귀여워.”
변태 같은 은겸의 말보다, 삐걱삐걱 흔들리는 침대의 소리나 철썩거리며 맞부딪치는 맨살의 소리보다, 내 입에서 쏟아지는 앓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나는 어느새 눈을 감고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발끝에서부터 찌릿한 감각이 기어올랐다.
헐떡이며 기분 좋은 곳을 찾아 허리를 돌리는 사이, 단단한 끝에 안쪽을 세게 찔렸다. 큽, 다급히 이를 악물고 나는 상반신을 수그렸다. 손도 대지 않은 성기가 크게 벌떡이더니 아랫배가 욱신거릴 정도로 뭉치는 느낌이 들었다. 밀려오는 사정감에 나는 일단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 갈, 갈 것, 잠깐! 아!”
서둘러 성기를 쥐려는데 은겸이 유두를 비틀며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순간 도달한 절정에 허억 하고 숨이 막혔다. 벌써 세 번째인 사정은 길게 이어졌다. 울컥 쏟아진 묽은 정액이 기둥을 타고 아래로 뚝뚝 흘렀다. 나는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꽉 움켜쥐었다.
사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은겸은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잠, 아, 으응!”
그가 쳐올리는 대로 흔들리며 신음했다. 흔들리는 성기 끝에서 정액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었다. 은겸의 하얀 가슴팍에 점점이 떨어진 액체가 색스러웠다.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리는 허벅지를 은겸이 꽉 잡아 벌렸다.
“끝까지 보여 줘.”
“흐으, 흣, 기다, 아……!”
사정의 자극에 못 이겨 뒤를 조이면 안을 찌르는 페니스의 모양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경련하는 점막을 헤치고 은겸은 계속 허리를 쳐올렸다. 쑥 빠져나갔던 그가 깊은 곳까지 쳐올릴 때마다 눈앞에서 빛이 반짝반짝 점멸했다.
이제 더는 나올 것도 없었다. 은겸의 손을 풀어내기 위해 손등을 붙들었을 때, 한숨 같은 소리를 낸 은겸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리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허리를 떠는 사이,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내 안쪽에 자신의 것을 비벼 대던 은겸이 순간 몸을 굳혔다. 배 안쪽에서 벌떡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윽…….”
미간을 찌푸린 은겸에게서 진한 향이 퍼졌다. 코피가 흐를 것처럼 안쪽 점막이 따끔거렸다. 나는 숨을 참고 은겸이 사정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계속 안을 문지르던 은겸은 한참 만에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제야 계속 이어지던 자극도 사라졌다. 허억, 허억, 거세게 숨을 몰아쉬며 나는 은겸의 가슴을 짚었다. 땀인지 내 정액인지 모를 액체로 그의 살이 젖어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엇박자로 얽혔다. 은겸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직 뒤에 들어 있는 단단한 것이 위로 치솟았다. 제대로 된 삽입은 아니라도 구멍을 드나드는 작은 움직임은 자극적이었다. 은겸 역시 잘게 움찔거리는 내 안 때문에 고역인 듯했다. 그도 나도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어진 자세를 고집했다. 은겸이 내게서 자신을 빼낼 생각이 없듯, 나도 이대로 은겸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끊임없이 숨만 헐떡거리면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게 쥐면 손자국이 남을 만큼 하얗던 은겸의 피부가 붉었다. 나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잘생긴 이마가 섹스의 여운에 젖어 상기되어 있었다. 다른 곳처럼 빨개진 귀를 쓰다듬곤 혈색이 도는 뺨을 감쌌다. 내 손길이 기분 좋은지 은겸이 눈을 반쯤 감았다. 그러곤 내 손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마치 만져 달라고 조르는 듯한 몸짓이었다.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릴 때만 해도 무섭게 번뜩이던 꿀빛 눈이 은은한 쾌락에 잠겼다.
머리를 메웠던 욕정이 사그라들자 비로소 눈앞의 상대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알몸으로 뒤엉켜 함께 절정을 즐긴 남자가 내 몸 아래 깔려 있었다. 나보다 커다란 몸집에, 화려한 외모를 지닌 남자. 섹스 중에는 온갖 낯 뜨거운 말을 서슴지 않고 잡아먹을 듯 덮쳐들어 끝 모를 쾌감을 이끌어 내는 사자.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섹스 파트너. 그리고 하나뿐인 연인.
은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사랑해.”
나는 허리를 숙여 은겸에게 키스했다. 짧게 입술만 맞댔을 뿐인데 가슴속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격렬한 섹스로도 느끼지 못했던, 깊은 충족감이었다.
은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응. 나도 사랑해.”
나를 끌어당긴 은겸이 다시 입을 겹쳤다. 포개진 입술 틈으로 들어온 혀가 톡톡 안쪽을 건드렸다. 전희 때문에 상처가 난 입 속이 걱정스러운 듯, 그의 혀 놀림이 조심스러웠다. 괜찮다는 말 대신 촉촉한 살덩이를 빨아들였다. 부은 점막을 어른어른 스치는 혀끝이 짜릿했다.
달콤한 키스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기분이 좋은지 그르릉 목을 울린 은겸이 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탄탄한 살을 주무르며 애무하던 그가 허리를 쓸어 올렸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손길이 어깨에 닿았을 무렵, 내 성기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여유가 생겼던 뒤쪽이 빠듯하게 찼다. 은겸의 것이 다시 부풀어 오른 탓이었다. 고작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 이것만으로는 부족했고.
뒤를 슬쩍 조여 내 의사를 전달하자 은겸이 입술을 떼어 냈다.
“내려올래?”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꽉 차 있었던 구멍 안에서 기다란 페니스가 쑥 빠져나갔다. 쉴 새 없이 치대진 젤이 주륵 흘러 시트를 적셨다.
내가 자리에 눕는 동안 빙글 몸을 돌린 은겸이 빠르게 콘돔을 벗겨 냈다. 정액이 고인 콘돔의 끝이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정사의 결과물을 빠르게 처리한 은겸이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코앞에 와 닿은 그의 상반신에서 비릿한 냄새가 흘렀다. 목을 조금 들어 가슴을 핥자 은겸이 작게 웃었다.
“기다려.”
“빨리.”
“알았어.”
은겸이 항상 내게 했던 것처럼, 그의 유두를 깨물며 재촉했다. 뭘 찾는 건지 베갯머리를 더듬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지익 하고 비닐 뜯기는 소리가 나자 비로소 그가 뭘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콘돔을 빼앗았다.
“그냥 해.”
“콘돔 쓰라며.”
“그냥 하라고.”
말과 동시에 콘돔을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은겸의 시선이 내 다리 사이로 향했다.
“약속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성실한 김원재 씨 어디 가셨을까.”
“괜찮으니까, 읏, 그냥, 아.”
빙긋 웃은 은겸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입구 주변을 잠시 지분거린 손가락이 불쑥 구멍을 벌리며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은겸을 받아들였던 안쪽의 이물감은 덜했지만 부은 곳을 만져지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끙끙대는 나를 내려다보며 은겸이 중얼거렸다.
“아직 젖어 있긴 하네.”
“으…….”
“아프면 바로 말해.”
꼼꼼하게 내벽과 입구 부근을 확인한 뒤에야 은겸이 손을 빼냈다. 나는 달아오른 뺨을 베개에 대고 문질렀다. 나를 배려하기 위해서 했을 은겸의 행동은 뜻하지 않은 역효과를 낳았다. 이미 풀린 안을 자극당하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흥분이 커졌다.
얼른 넣어 주면 좋겠는데.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나는 은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기대한 삽입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은겸은 젤을 집어 페니스를 적시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다리를 들어 은겸의 허리에 둘렀다. 은겸이 나를 본 순간,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내 몸 위로 쓰러진 은겸이 헛웃음을 흘렸다.
“세 번이나 사정해 놓고 뭐가 그리 급하세요, 김원재 씨.”
“시간 아까워.”
“제대로 안 적시면 다치니까 그렇지.”
“하다 보면 젖을 거야.”
“…….”
입을 다문 은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 발정은 촉진제의 효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잊은 듯 여유롭게 구는 그가 답답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몸을 섞어야 했다. 사흘 치가 아니라 일주일 치를 받아올 걸 그랬나.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연말을 기념해서 다시 사 오자고 할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은겸을 올려다보았다.
은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야한 눈으로 보지 마.”
“왜.”
“……울리고 싶어지니까.”
맞닿은 가슴에서 쿵쿵 뛰는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은겸 역시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무릎을 세워 은겸의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터질 듯 팽창한 성기가 맨살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뜨거운 성기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좋다며. 내가 우는 모습이 꼴린다며.”
“…….”
“빨리 해.”
은겸의 노란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울어 줄게.”
은겸이 쭈뼛 곤두섰던 귀를 뒤로 눕혔다. 어느샌가 휘두르기 시작한 긴 꼬리가 시트를 스치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붉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내 뺨을 핥아 올리는 혓바닥이 조금 아플 정도로 거칠었다.
“후회하지 마.”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오싹한 기운이 허리를 타고 머리끝까지 피어올랐다. 오소소 솜털이 일어선 느낌이 가시기도 전에 은겸이 입술을 겹쳤다.
그때까지 뜸을 들였던 것과 반대로 은겸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키스를 나누는 사이 내 다리를 벌리곤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인정사정없이 분신을 밀어 넣었다. 잠시 다물렸던 구멍이 벌어지며 빠듯하게 안이 찼다. 익숙한 체위가 주는 안정감과는 별개로 배 속이 버거웠다. 은겸의 팔을 붙들며 나는 힘을 풀기 위해 애썼다.
마치 빨려 들어오는 것처럼 뜨거운 페니스는 뿌리 끝까지 단번에 삽입되었다. 탄탄한 은겸의 하체가 엉덩이에 닿자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치켜들었던 내 허벅다리를 놓아주면서 은겸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이어질 움직임에 대비해 나는 머리 아래에 눌린 베개를 붙들었다.
배꼽 위로 내려앉은 은겸의 손이 그 부근을 둥글게 문질렀다.
“여기쯤인가.”
낮은 혼잣말을 툭 던진 그가 손바닥에 힘을 실었다. 다음 순간, 은겸의 손이 내 복부를 꽉 눌렀다. 흑, 신음을 내뱉으며 나는 몸을 떨었다. 이미 꽉 찬 배 속이 눌리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은겸은 손을 떼지 않았다. 잠시 뒤로 물러난 기둥이 순식간에 끝까지 박혔다.
“허억!”
절로 허리가 휘어졌다. 더 벌어질 틈 없는 내부를 가르고 들어온 기둥의 감촉이 생생했다.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커다란 흉기가 안을 눌렀다. 위에서 누르는 힘 또한 그대로였다. 평소보다 좁아진 듯한 느낌은 이미 한 차례 혹사당한 곳도 마찬가지였다.
은겸이 자신을 박아 넣을 때마다 단단한 끄트머리가 기분 좋은 곳을 세게 찔렀다. 충격에 가까운 자극 뒤에는 굵은 기둥의 압박이 이어졌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쾌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성기가 내벽을 세게 문지르고 긁었다.
허리를 징징 울리는 감각에 파묻혀 나는 허우적거렸다. 끈적이는 체취 때문에 코가 아렸지만 그쪽을 만질 정신이 없었다. 손목을 붙든 은겸이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게 했다.
“사랑해, 원재야.”
“흐, 아! 하읏!”
안을 찌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거칠게 쳐올리는 몸짓에 혀를 깨물 뻔했지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은겸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면서 그를 붙드는 게 고작이었다.
시야를 메운 은겸이 어느 순간 부옇게 변하더니, 다시 또렷해졌다. 눈 옆을 타고 흐른 미지근한 액체가 귓가를 적셨다. 눈가를 핥는 은겸의 혀가 따끔거렸다.
“아, 잠, 윽, 흣, 잠깐, 아!”
“아파?”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간질거리는 숨결과 함께 축축한 혀가 귓불을 핥은 순간 또 한 번 머릿속이 텅 비었다. 허리를 크게 휘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악문 잇새로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밀려오는 감각을 버티지 못하고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흐으으…….”
“읏.”
작게 신음한 은겸이 귓등을 깨물었다.
“너무 조여서, 후, 끊어질 것 같아.”
“후, 으응, 후우…….”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움찔거리며 몸속에 남은 정욕을 토해 냈다. 분명 사정감이 들었는데도 피부 위로 쏟아지는 건 없었다. 크고 작은 경련만이 수시로 덮쳐들 뿐이었다. 내 떨림이 멎자 은겸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윽, 아!”
목덜미에 코를 박고 물 자리를 고른 은겸이 이를 세웠다. 턱에 힘을 준 그가 허리를 거세게 쳐올리기 시작하자 다른 의미에서 신음이 터졌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목이 아팠다.
“아프, 아, 아파. 아파.”
“하, 원재야. 원재야.”
아프다는 말을 하자마자 은겸은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아쉬운 듯 살갗 위에 입술을 댄 그가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허리를 움직였다. 퍽퍽 박아 대는 속도가 더할 수 없이 빨라졌을 때, 은겸이 부푼 성기를 내 뒤에서 빼냈다.
나는 열이 오른 머리로 은겸을 올려다보았다. 늘씬한 손가락을 놀려 페니스를 쥔 은겸이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곧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끝을 내 가슴에 겨냥했다. 벌떡이는 은겸의 배에 힘줄이 뚜렷하게 도드라졌다.
얼마 안 가 끈적한 액체가 내 가슴팍에 쏟아졌다. 흰 점액질이 성기 끝의 갈라진 틈을 타고 길게 이어져 내렸다. 가슴골을 타고 흐르는 탁액은 두 번째 사정임을 감안하면 굉장한 양이었다.
투둑투둑 정액을 흘리는 페니스를 응시하다가 나는 한쪽 다리를 들었다. 어깨를 크게 들썩거리던 은겸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머지는 삼켜 줄게.”
“…….”
당장 내 정강이를 붙들고 번쩍 들어 올린 은겸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안팎으로 드나드는 거대한 흉기를 따라 끈적이는 액체가 철벅철벅 새어 나왔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나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장담했던 것처럼 은겸의 흔적으로 젖어 드는 안팎을 느끼면서.
***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때쯤 은겸이 몸을 일으켰다. 뒤에 들어 있던 그의 성기가 미끈거리며 쓱 빠져나갔다. 애매한 자극에 한숨을 쉬자 은겸이 피식 웃었다. 나는 다리를 모았다. 계속 벌리고 있었더니 고관절이 뻐근했다.
몸을 겹치기 시작한 이래로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들끓던 열기는 잔잔한 미열로 변한 지 오래였다. 촉진제의 효과가 끝난 듯했다. 나머지는 내일 쓰는 게 좋을 듯했다. 몸 상태도 상태거니와, 흠뻑 젖은 침구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오랜만에 하는 섹스에 취해 그냥 하자고 조르지 말았어야 했다. 한 번 콘돔을 내던진 뒤로 은겸은 계속해서 내 안에 사정했다. 얼마나 싸질렀는지 숨을 쉴 때마다 뒤에서 무언가가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에 힘을 주며 뒤를 조이려 애썼다.
수건을 들고 돌아온 은겸이 내게 손짓했다.
“닦아 줄게.”
“아냐.”
“응?”
“삼킨다고 했잖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한 말인데, 은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재야. 거기까지만.”
“뭐가.”
“오늘 밤은 이제 쉬자, 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그가 손가락을 넣어 입구를 벌렸다. 구부린 손가락이 안쪽을 긁어낼 때마다 끙끙거리는 소리도 함께 흘러나왔다. 그때마다 이유 모를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은겸은 자신의 흔적을 꼼꼼히 닦아 냈다.
“일단 지금은 이걸로 참고 아침에 같이 목욕하자.”
“응.”
한 욕조에 들어가 후끈하게 보낼 아침을 상상하자 벌써 목이 말랐다. 그러려면 휴식이 필요했다. 은겸이 침대 정리를 하는 동안 나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약을 써서 억지로 발정을 끌어낸 부작용인지 평소보다 훨씬 졸렸다. 같이하자는데도 끝끝내 내 뒤처리와 침대 정리까지 홀로 끝낸 은겸이 나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포근한 이불을 덮자 졸음이 밀려들었다. 지친 몸이 노곤노곤 기분 좋게 늘어졌다. 나는 작게 하품을 했다.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던 은겸이 이불을 끌어 올렸다.
“자자.”
“응.”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쉬자고 말한 은겸이지만, 아침이 오면 기대로 눈을 반짝반짝 빛낼 게 뻔했다. 물론 나 역시 일어나자마자 촉진제를 먹을 생각이었다. 내일도 정신없이 뒹굴려면 조금이라도 자면서 체력을 회복해 두는 편이 나았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춘 은겸이 침대맡의 무드등을 껐다. 은은한 불빛이 사라지자 침실은 어둠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 이 공간을 채웠던 요란한 소리며 후끈한 열기가 거짓말 같았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불이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은겸의 얼굴이 아직 눈꺼풀 안쪽에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손을 뻗어 나를 보고 누운 은겸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정확히는 오른쪽 뺨에 있는 작은 점을.
“안 자?”
은겸의 목소리가 그새 낮게 잠겨 있었다. 잠을 방해한 건 미안하지만, 지금 말해 두고 싶은 게 있었다.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이 살자.”
손바닥에 닿는 은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를 안심시키듯 천천히 귓불을 어루만졌다. 충동적으로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은겸의 집을 마치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생활하는 내내 계속 고민했다. 이럴 게 아니라 그냥 살림을 합치는 편이 서로에게 낫지 않을까. 휑하게까지 느껴졌던 이 집을 내가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굳게 잠긴 방의 문을 열고 다시는 잠그지 않겠단 약속과 함께 열쇠를 받았던 것처럼.
“지금처럼 돌아갈 집을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이사를 오고 싶어.”
헤어진 이들의 자취를 내 흔적으로 덮어 주고 싶었다.
은겸은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기쁜 것 같기도,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은겸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파악하게 되었을 무렵, 은겸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지금도 같이 지내잖아. 굳이 이사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지금은 얹혀사는 거니까. 앞으로는 공과금이나 생활비도 부담하고 싶어. 월세도 낼 테니까 허락해 줘.”
“……나는 그냥 이대로도 좋은 거 같은데.”
중얼거린 은겸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천천히 생각해 보라며 넘어갔겠지만, 이번에는 기다리기 힘들었다. 단순히 편리성이나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하는 제안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었다.
“나는 우리 관계가 좀 더 확실해졌으면 좋겠다.”
연인에서, 동거인으로.
은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리 봐도 기뻐하는 사람의 반응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은겸의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며 나는 오래 고민했던, 하지만 이제는 더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해진 감정을 입에 담았다.
“앞으로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다음 발정기도, 그다음 발정기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가 생각해도 프러포즈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나마 ‘평생’이라는 단어를 빼서 다행이었다. 넣었더라면 부담이 더 컸을 테니까.
은겸에게 동거라는 단어가, 계속 함께하자는 프러포즈가 얼마나 무거운지 미리 가늠하지 않은 것은 명백히 나의 실수였다. 은겸은 내 고백을 반기지 않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밀어 올릴 뿐이었다. 미소의 범주에 넣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린 그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거절을 각오하며 경직되었던 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나는 그에게 즉답했다.
“안 가. 어디에도 안 가.”
“……약속해.”
“약속할게.”
말뿐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 서둘러 은겸의 손을 붙잡았다. 언제나 그랬듯 손깍지를 끼워 줄 줄 알았는데, 은겸은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싸늘하게 식은 손이 걱정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전하기 위해 양손으로 붙잡고 비비자 은겸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러자.”
가까스로 얻어 낸 허락임에도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은겸의 미소는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