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곰은 비를 긋는다
동거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은겸은 원래 살던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내 회사에서 너무 멀다는 이유에서였다.
“너하고 내 회사 중간 정도가 좋을 것 같아.”
은겸이 직접 발품을 팔며 새집을 찾는 사이 나는 내 집의 물건을 정리했다. 당분간 은겸의 집에서 지내다가 이사를 가면 편할 것 같았다. 필요한 물건들이 대부분 빠져나가자 원래 살던 집은 생활감 없이 박스만 가득한 곳이 되었다.
내게 절대 월세를 받을 수 없다는 은겸의 고집에 따라 새 보금자리는 공동명의로 구입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적당한 가격에 위치도 괜찮은 매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더라도 당장 이사를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도 은겸도 각자의 집을 처분해야 했고, 이사 날짜도 회사 일정에 맞추어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주소를 사용하는 날을 기다리면서 나는 은겸과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났다. 회사에 있는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오로지 은겸하고만 보냈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와의 관계에 대해 어떠한 확신이 생겼다.
은겸은 완벽한 연인이었고 나는 더 할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했다. 우리는 사소한 오해나 다툼 한번 없이 일상을 공유했다. 서로가 서로의 옆을 채운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괜찮을 것 같았다.
겨울답지 않게 뜨거운 연말을 보내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동안, 나는 크나큰 행복에 빠져 있었다. 눈을 가리고 머리를 비우는 거대한 행복에.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느지막한 설 연휴도 지나가 버린 2월 초. 새해를 맞이한 기념으로 등산 동아리의 모임이 진행되었다. 회장인 예주는 작정한 듯 내게 연락을 퍼부었다. 작년부터 계속 모임에 나오지 않은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등산도 아니고 간단히 회식만 진행한다는데 더 빠지기 힘들 듯했다. 마침 등산 동아리의 모임 날짜는 은겸의 주말 출장 일정과도 겹쳤다. 나는 은겸의 양해를 구하고 모임에 참여했다.
“김원재 오랜만에 본다?”
“요새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빴냐?”
약속 장소인 해물탕집에는 벌써 사람들이 가득했다. 툭툭 날아오는 환영을 눈인사로 넘기며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대학 시절부터 쭉 봐 온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부르며 술병을 내밀었다.
술자리는 놀라울 만큼 편안했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동아리 사람들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나 자신이 달라진 탓이었다. 정운이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으로 모임을 찾던 때와, 은겸을 만나며 안정된 지금의 내 마음가짐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는 한결 편하게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나를 반긴 이들 중 누구보다도 내 귀환을 기뻐한 사람은 예주였다.
“드디어 왔네, 김원재.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거 아냐?”
“미안.”
술자리가 무르익자 예주는 손짓으로 나를 자신의 옆자리에 불렀다. 오늘 만남이 반갑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통화만 몇 차례 했을 뿐, 예주와 얼굴을 마주한 것은 작년 추석 이후 처음이었다. 결혼 생활은 어떤지, 예주의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으며 나는 예주와 대화를 나누었다.
주위를 힐끗 둘러본 예주가 눈웃음을 쳤다.
“이제 말해 봐.”
“뭘.”
“그때 그 사람. 아직도 만나고 있어?”
“응.”
“소개시켜 준다더니.”
“요새 좀 바빠. 이사 준비 중이라.”
“이사해?”
“어, 그게 사실은.”
은겸과 이사 계획을 짤 때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느꼈는데, 막상 타인에게 털어놓으려니 쑥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은겸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된 것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았다. 아니, 처음 만난 것 자체가 작년 여름이었으니 우리는 이제 고작 세 번째 계절을 같이 맞는 것이었다. 확실히 진도가 빠르긴 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침대를 함께 쓴 사이인걸.’
뭐, 그렇게 치자면 사귀기도 전에 모든 단계를 다 거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예주의 눈을 피했다.
“동거하기로 했어.”
“뭐? 누구? 그 사람이랑?”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예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정도로 깊은 사이야?”
“……응.”
“그럼 이제는 나한테도 설명해 줘야지. 어떤 남자야. 연상? 연하? 곰이야?”
“우리보다 한 살 연상이고, 사자야.”
“사자?”
“어. 너도 아는 사람이야.”
“뭐? 나 아는 사자 없는데?”
내 연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듯 예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그토록 싫어했던 라이벌의 형제를 만날 거라곤 상상하지 못하겠지. 나 역시 1년 전의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예주가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라며 답했다.
“주인호네 형.”
붕붕 흔들리던 예주의 꼬리가 멎었다. 싸늘하게 식은 노란 눈에 의문이 가득 담겼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설명을 덧붙였다.
“거봐. 너도 아는 사자잖아.”
“…….”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야. 다음에 너한테도 꼭 소개해 줄게.”
예주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삭막해진 분위기가 진땀 났다. 서둘러 예주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사자는 너무 가벼울 줄 알았거든. 근데 의외로 잘 맞아. 입맛이나 취향 같은 것도…….”
“원재야.”
냉랭한 예주의 목소리가 변명처럼 풀어놓던 이야기를 멈춰 세웠다. 미간을 찌푸린 예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 사람은 너 진지하게 만나는 거 맞아? 프라이드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은겸과 처음 만났을 때 나 역시 예주와 똑같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사자는 모두 똑같을 거라는, 차별에 사로잡힌 선입견을.
“프라이드는 구성하지 않을 거랬어. 한 사람하고만 살고 싶다고. 그래서 결혼도…….”
“결혼? 너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 할 거야?”
“그게 아니라.”
“그럼 설마 유부남이야?”
“아니. 예전에 했는데 이혼했어.”
“뭐? 이혼?”
예주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두 번 이혼했다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하고 나는 자세한 답변을 피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예주가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어디서 어떻게 만난 사이야. 얘기해 봐.”
괜한 소리로 성난 늑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띄엄띄엄 은겸과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술을 마시다 쓰러졌고, 그런 나를 은겸이 집으로 데려간 첫 만남.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몸을 섞었고, 얼마 안 가 재회해선 이런저런 일을 거친 끝에 섹스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는 것까지.
“발정기가 끝난 뒤에도 옆에 있고 싶었어. 함께 있다 보니까 좋은 사람인 게 느껴져서. 그래서 계속…….”
고개를 내저은 예주가 내 말허리를 잘랐다.
“원재야. 좀 정상적인 상대를 만나면 안 되냐.”
“뭐?”
“정운이도 그렇고 그 사자도 그렇고. 너랑은 안 어울리는 거 같아.”
“야.”
무슨 증거로 그렇게 단언하려는 걸까. 은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설명을 더 들으라는 의미에서 나는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예주는 내 항변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늑대라서 더 찜찜하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사자는 좀 아닌 것 같아. 그 사람들은 여러 명하고 사귀잖아. 게다가 벌써 결혼에 이혼까지 했으면 얼마나 연애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마음대로 말하지 마. 다 이유가 있다고 했…….”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혼남이랑 만나냐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 예주가 이를 갈았다. 멍멍해진 귀를 가리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를 돌아본 주위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다.
“야, 왜 그래.”
“누구 이혼했대?”
“뭐야, 뭔데.”
“하.”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뱉곤 예주가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따끔따끔하게 박혀 드는 시선을 무시하며 나도 물컵을 들었다. 차마 그 이상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이 머뭇머뭇 입을 다물었다.
우리에게 쏠렸던 관심이 사그라든 뒤에야 예주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는 곰이잖아, 원재야. 너 정운이 6년이나 못 잊었잖아.”
“……정운이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데.”
“원재야. 정운이는 인호랑 만나자마자 너를 잊었어. 원래 그런 애니까. 가볍디가벼운 토끼니까. 그게 맞는 거야. 네 애인만 태어나길 유별나게 태어나서 다른 사자들이랑 다를 거 같아?”
“아니라니까.”
“원재야. 정신 차려.”
예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사람 너만 바라볼 것처럼 잘해도 사자야. 본성은 못 이기는 거야.”
“황예주. 아무리 너라도 그 이상은 못 참는다. 그만해.”
대체 은겸에 대해 뭘 안다고. 내 연인에 대해서는 내가 훨씬 더 잘 아는데. 불쾌해져서 미간을 찌푸리자 예주가 술잔을 쿵 내려놓았다.
“애초에 아무나 집에 데려와서 원나잇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말을 믿어?”
“그건…….”
말문이 막혔다. 필사적으로 은겸을 변호하려 단어를 찾는 사이, 예주가 선수를 쳤다.
“그리고 인호 형이라며. 너 주인호가 어떤 앤지 몰라?”
길게 뻗은 늑대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침묵으로 답했다. 은겸에 관해서 내가 예주보다 많은 것을 알듯, 예주는 주인호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았다. 주인호라면 치를 떨었던 나와 달리 동아리 부장으로서 계속 연락을 취해 왔으니까.
“걔 정운이 위해서면 뭐든지 다 하는 애야. 원재야. 나는 아무래도 그 사람 좀 의심스럽다.”
“……주인호한테 내 얘기 들은 거 없다고 했어.”
“그 말을 믿어?”
비웃음에 가까운 헛웃음을 흘린 예주가 나를 노려보았다.
“하필 네가 정운이하고 6년 만에 재회한 날에, 주인호네 형이 우연히 네가 찾아간 술집에 들렀다는 말을 믿냐고.”
“……나는…….”
“그 사람 회사나 집이 술집에서 가까워? 자주 가는 곳이야? 응?”
물으면서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예주가 곧바로 술잔에 술을 채웠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는 멍하니 시선을 떨구었다. 뭐든 대꾸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은겸과 처음 만난 날, 내가 간 바는 동아리 모임이 있던 생선구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무 곳이나 골라서 들어갔기에 상호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껏 기억에만 묻어 둔 장소였는데. 예주의 질문을 듣고 보니 이상했다. 그 가게는 은겸의 회사나 집에서 상당히 멀었다. 거래처와의 미팅이 있었다고 칠 수도 없었다. 은겸은 동행 없이 혼자 술을 마셨다.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점은 따로 있었다. 내가 처음 술집에 들어섰을 때, 은겸은 그곳에 없었다. 그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알아봤을 테니까.
은겸은 내가 술기운이 올라 취했을 무렵 어디선가 나타나서 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은겸이 있던 술집을 찾아간 게 아니었다. 은겸이 내가 있는 술집에 우연히 찾아 들어온 거였다. 예의 토끼 귀 머리띠를 들고서.
그 토끼 귀의 정체도 수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토끼 귀 머리띠에 관해 물었을 때 은겸은 그걸 동생에게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프라이드에서 막내였던 은겸이 동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주인호 한 명뿐이다. 게다가 그 머리띠를 쓰고는 바텐더에게 ‘애인의 취향’이라고 표현했었지.
“아무리 봐도 그 사람 말만 믿을 게 아닌 거 같아. 원재야. 내가 인호 번호 알려 줄 테니까 연락해 봐.”
“……필요 없어.”
“아니. 꼭 해. 반드시 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반드시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단호하게 내뱉곤 예주는 메시지로 번호를 전송해 주었다. 열한 자리 숫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 연인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고 경고해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 역시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구석이 분명 있었으니까.
은겸이 선사하는 달콤하고 다정한 행복에 파묻혀서 잊고 있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
주말 내내 고민에 잠겼다. 번호를 지우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그나마 은겸이 출장 중이라 다행이었다. 주인호의 번호를 받아 와 놓곤 은겸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월요일 낮에나 돌아갈 것 같아.
출근길 못 보겠다ㅠㅠ
우는 이모티콘을 잔뜩 붙이며 은겸이 메시지를 보내 왔지만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손톱을 깨물며 나는 갈등했다. 예주의 말대로 전화를 하든, 또는 무시해 버리고 번호를 지우든. 월요일이 되어 은겸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했다.
한숨을 쉬며 등 뒤의 쿠션에 몸을 기대었다. 푹신한 쿠션에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조금 웃음이 났다. 내 등을 받치고 있는 소파 쿠션은 얼마 전 은겸이 새로 구입한 커플 아이템이었다. 적당히 비슷한 무늬로 고르면 될 텐데, 은겸은 굳이 사자와 반달가슴곰이 함께 그려진 것을 소파 위에 두고 싶어 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자 몇 시간이고 인터넷을 뒤지더니, 결국 원하는 걸 찾지 못했는지 주문 제작을 선택했다.
어렵게 구입한 쿠션은 다행히 은겸의 마음에 든 듯했다. 은겸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누워 있곤 했다. 아이처럼 구는 그가 귀여워서 키스했던 게 바로 엊그제의 일이었다.
쿠션뿐만이 아니었다. 어디를 둘러보든 은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집 한가운데에 앉아 있으니까.
은겸과 함께 밥을 먹고, 은겸의 침대에서 잠들고, 은겸의 차에 타서 출퇴근을 하는 일상은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굳어졌다. 내 하루에서 은겸을 분리하기란 어려웠다. 잠시 떨어져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졌을지언정, 나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다고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예주가 날카롭게 찌른 문제가 더 마음에 걸렸다. 지금처럼 은겸을 의지하는 상황에서 찜찜한 구석을 남겨 둔다면 내 일상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문제로 오래 고민하는 것조차 은겸을 배신하는 일일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나는 은겸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향한 믿음이 흔들리도록 둘 수 없었다. 아주 간단한 확인만 거치면 되는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오래 끌어안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일요일 저녁. 나는 주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주가 알려 준 번호는 틀리지 않았다. 처음 한 번은 통화를 거부했는지 전화가 바로 끊겼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역시 실패였다. 신호음이 한참 울리다가 전화가 끊겼다. 나중에 다시 걸까 고민했지만,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나는 곧장 세 번째로 통화를 시도했다.
길게 울리던 신호음이 마침내 끊겼을 때, 나는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부스럭거리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주인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적당히 끊어.
낮게 잠긴 목소리 뒤로 다른 이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애교가 잔뜩 담긴 섹시한 음성이 익숙했다. 그제야 주인호가 왜 계속 통화를 거절했는지 감이 잡혔다. 겨울은 호랑이의 발정기였다.
심호흡을 한 뒤에야 입을 뗄 수 있었다.
“주인호.”
─누구시죠?
“나 김원재인데.”
─……끊습니다.
“끊지 말고 들어. 물어볼 게 있으니까.”
─뭔데요.
“네 형에 관한 일.”
─…….
낌새가 수상했다. 은겸을 언급하자마자 주인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불길한 침묵이 이어졌다. 빨리 전화를 끊으라며 치근덕거리는 정운이의 목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정운이는 흥분했을 때 저런 목소리를 내는구나. 생각지 못한 발견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쓴웃음을 삼키며 나는 주인호의 답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주인호가 낮게 중얼거렸다.
─한 시간만 기다리세요.
“10분.”
─10분 안에 못 끝냅니다.
“아예 팍 식게 만들기 전에 일찍 끝내.”
─……씨발.
욕설을 내뱉은 주인호가 으르렁거렸다.
─30분. 끝나면 전화 걸 테니까 먼저 전화하지 마세요.
“알았어.”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주인호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던져 놓고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내 선택이 정말 옳았을까. 이래서야 몰래 연인의 뒤를 캐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내가 멋대로 주인호에게 연락했다는 사실을 알면, 은겸이 내게 실망하지 않을까.
‘아니, 들을 것만 듣고 이야기하자.’
짧은 후회를 욱여넣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주인호와 무슨 대화를 나누건, 나는 그 내용을 은겸에게 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만약 이번에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내지 못한다면 그다음은 은겸 차례였다. 나는 두 형제에게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를 의심하는 관계에서 사랑이 성립할 수 있을까.
은겸과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확인이 필요했다.
주인호는 정확히 30분이 지난 뒤에 연락을 해 왔다.
─……뭘 물어보실 건데요.
주인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의 건방진 태도는 어디 갔는지 말투도 꽤 고분고분했다. 그 모든 게 섹스의 여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걸 눈치채자 한숨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 있었을 정사를 무시하려 애쓰며 나는 목을 골랐다.
“똑바로 대답해.”
─뭘요.
“작년 여름. 등산 동아리 모임이 있었던 날.”
짚이는 게 있었는지 주인호가 조용해졌다. 점점 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었다.
─그날 서은겸한테 토끼 귀 머리띠를 준 게 너야?
“아뇨.”
곧장 들려온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릴 틈은 없었다. 주인호가 피식 웃었다.
─형이 그날 토끼 귀 머리띠 하고 있었어요? 참 귀여운 거 골랐네.
“……뭐?”
─직접 준 건 아닌데요. 제가 가져가라고 시켰어요. 토끼와 관련된 소품 뭐든 간에.
처음 질문을 던질 때보다 두 배는 더 불안해졌다.
“왜?”
─뭐가요.
“그걸 왜 가져가라고 했는데?”
─제가 그걸 왜 선배한테 얘기해야 하는데요?
어느새 기세를 회복했는지 주인호는 삐딱하게 답할 뿐이었다. 눈앞에 그려지는 건방진 호랑이를 향해 나는 으르렁거렸다.
“너 나 싫어하잖아.”
─잘 아시네요.
“나 네 형이랑 꽤 진지하게 사귀는 중이라서. 어쩌면 가족으로 재회할지도 모르겠는데.”
─……미친.
“선배로서 물을 때 말해. 그날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내 윽박지름이 통했는지, 아니면 ‘가족’이라는 표현이 어지간히 싫었던지, 또 다시 욕설을 중얼거린 주인호는 그 이상 뜸을 들이지 않았다. 짧게 한숨을 쉰 호랑이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은겸 형이 곰성애자인 건 아시죠?
“말 돌리지 마라.”
─그럼 두 번째로 이혼했을 때 우울증 생겼던 건 아세요?
“……뭐?”
─얘기 안 했을 줄 알았어.
주인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어진 건 사실인지 거짓인지 나로서는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때가 은겸 형 인생에서 제일 어두웠던 때였거든요. 상태 엄청 심각했어요.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가족이고 지인이고 할 것 없이 연락도 다 끊고서.
“…….”
─모든 게 다 사자로 태어난 자기 잘못 같았대요. 그렇다고 해서 원래 프라이드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고요. 사자는 한번 자기 가정을 꾸려서 프라이드를 나가면 돌아갈 수 없거든요.
귀에 박혀 드는 생경한 이야기를 초조하게 흘려 넘겼다. 단 한 번도 이런 과거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하필 들어도 주인호의 입을 통해 알게 될 줄이야. 은겸이 내게 숨기고 있었을 비밀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된 게 기분 좋지 않았다. 그 이상 마음대로 떠들지 말고 물어본 사항에 대답이나 하라고 재촉하려 할 때였다.
주인호가 또 이상한 말을 꺼냈다.
─혹시 은겸 형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무슨 흔적 있는지 아세요? 제일 아래 마디요.
“반지 자국이잖아.”
쯧. 혀를 차는 소리가 건너왔다. 진지한 사이라면서 어떻게 그것도 몰랐냐는 듯, 한심하게 여기는 투였다.
─아, 역시. 그것도 말 안 했구나.
처음 통화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작았던 불안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혹시 내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듣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전화를 끊어 버려야 할까. ‘확인’이라는 명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커져만 가는 혼란스러움은 주인호의 설명에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
─그거 반지 자국이 아니라 흉터예요.
“뭐라고?”
─생각해 보세요. 형이 이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거기에 반지 자국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
─그때 형이 손가락 잘라 버릴 뻔했다고요. 결혼반지 자국을 못 견뎠는지 아예 그 모양대로 살점을 도려내려고 했어요.
아.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주인호가 늘어놓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은겸이 ‘방황’이라는 짧은 말로 넘어갔던 세월에 이런 진실이 숨어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조용해졌던 전화기 너머가 다시 주인호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컸던 사람이거든요. 그때 은겸 형이 유일하게 만난 게 저희 가족이에요. 저랑 아버지가 형 데리고 병원 다니면서 간신히 예전처럼 만들어 놨어요. 지금 회사도 아버지가 자금을 대 줘서 시작한 거고요. 그때 일 때문에 은겸 형은 아직도 저희 가족 부탁은 거절을 못 해요.
전부터 이상하게 여겼던 두 사람의 형제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연인 흉내까지 내면서 성욕 촉진제를 받아다 줄 정도로 동생을 아끼는 형. 그리고 그 형의 연애 이야기는 절대 묻지 않는 동생.
내가 아는 주인호라고 믿을 수 없는 배려는, 은겸의 힘든 과거를 직접 목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은겸이 평범한 형제 관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탁을 들어주는 이유는 주인호와 그 가족이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게 도왔기 때문이고.
주인호의 폭탄 발언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래서 형이 선배랑 만난 거예요.
“……뭐라고?”
─은겸 형이랑 선배가 만난 거. 제가 형한테 시킨 거라고요.
어?
귀에 담긴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눈을 깜빡이며 나는 주인호가 한 말을 해석하려 노력했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선배’라는 단어가 나를 가리킨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서은겸과 나의 만남은.
─선배 발정기 끝날 때까지만 만나면서 관계 가지라고 했어요. 다른 데 눈 못 돌리도록요.
주인호의 사주였다는 뜻인가.
귀가 윙 울리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형은 계속 거절했는데 꼭 가라고 시켰죠. 스스로 잘 아시잖아요. 은겸 형이랑 처음 만난 날, 선배가 정운이 형한테 무슨 짓 했는지.
흔들리는 머리를 가누기 어려웠다. 이마를 짚고 숨을 골랐다. 멍해진 시야에 그날의 모습이 환각처럼 번졌다.
그날. 은겸을 처음 만났던 작년 초여름의 그날.
그날 나는 정운이와 6년 만에 재회했다. 이대로 영영 못 보는 건가 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할 무렵이었다. 예주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정운이는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도 사귀고 있다던 주인호 없이 혼자 와서는, 주인호의 발정기를 기다리기 힘들다며 예주와 장난스럽게 대화했다. 차라리 섹스 파트너라도 구하고 싶다면서.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일었다.
그래서 잠시 숨을 돌리러 나간 정운이의 뒤를 쫓아나갔다. 놀란 정운이를 붙들고 정말 오래 끌어안고 있었던 내 마음을 밝혔다.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고, 이제는 제발 나를 봐 달라고 처절하게 고백했다.
─그때 정운이 형한테 섹파 제안하셨죠.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정운이에게 애인이 아니라 섹스 파트너라도 괜찮다고, 다시 만나게만 해 달라고 애원했다. 너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냐고, 나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빌었다.
─정운이 형한테 키스하려고 하셨고요.
또 놓치고 싶지 않아서 정운이를 벽에 밀어붙여서 도망치지 못하게 잡았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은 정운이에게 입 맞추려고도 했다.
모든 건 정운이와 내가 단둘이 골목 안쪽에 서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모든 상황을 마치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주인호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부인하고 싶은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너 그날…… 봤어?”
─네. 다 봤죠. 선배가 남의 애인한테 어떻게 집적거리는지 전부 다.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숨을 참는 사이, 주인호가 낮게 목을 울렸다.
─저는 선배 용서 못 해요. 내가 어떻게 둘 사이를 벌려 놨는데. 다시 만나자마자 그런 짓을 해?
“……네가 막았냐?”
─뭘요.
“정운이 연락. 네가 막았냐고.”
─당연한 거 아니에요?
피식 코웃음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정운이 형이 선배한테 호감 있었던 건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아는데. 미쳤다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내버려 둬요? 6년이나 못 만나게 했으면 선배도 어련히 포기할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마음 놓고 보내 줬더니 좋다고 섹파 얘기나 주고받고.
손이 덜덜 떨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런 형태로 확인받을 줄은 몰랐다. 주인호가 중간에서 정운이의 연락을 가로채지만 않았어도. 딱 한마디만, 기다리지 말라는 한마디 말만 전하도록 해 주었어도 나는 6년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도 긴 세월 동안 정운이를 원망하면서 계속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 역시 헛된 희망을 품고 정운이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고. 섹스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정운이의 농담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듯한 정운이를 밀어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 한마디만. 기다리지 말라는 단 한마디만 들었어도.
그 오랜 시간을 홀로 버티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제가 은겸 형한테 위치 알려 줬어요, 그날. 술집에 곰 한 마리가 있으니까 제발 데려가서 적당히 상대하라고요. 토끼 관련 물건을 가져가면 분명 눈에 띌 거고, 어쩌면 선배가 먼저 말을 붙일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 뭐라도 가져가라고 했죠.
그리고 서은겸과 만날 일도 없었겠지.
─선배 발정기 동안 또 정운이 형한테 접근하지 못하도록 은겸 형이 붙잡고 있으면 되겠다 싶었죠. 선배가 정운이 형 앞에 자꾸 나타나는 거 진짜 거슬리거든요. 생각보다 은겸 형이랑 오래가서 놀라긴 했지만.
“…….”
─이걸로 서로 빚 갚은 셈 치죠.
인호가 한숨 비슷한 소리를 냈다.
─앞으로도 쭉 가족으로 만날 일 없기를 바랍니다. 선배.
깍듯한 인사말은 이미 비아냥거림에 가까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이었네.
멍한 머릿속에 제일 먼저 그 말이 떠올랐다.
내게 말한 건 전부 거짓이었구나. 나에 대해서 몰랐다는 말도. 주인호에게 나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는 말도. 은겸은 나와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를 만날 작정으로 그 술집에 찾아온 거였다.
그래서였구나. 은겸이 내 발정기가 끝난 뒤에 헤어지려고 했던 건. 그렇게도 깔끔하게 우리 관계를 끊어 버리려고 했던 건. 주인호가 시킨 기간이 끝나서, 더는 내게 볼 일이 없어서였다.
가볍게 데리고 놀려고 접근했으니 첫눈에 반했다는 말도 거짓말. 나를 잃기 두렵다는 말도 거짓말. 내게 건넸던 다정했던 모든 말이 전부, 거짓말.
숨이 막혔다. 새로이 알게 된 진실의 무게가 너무나도 버거웠다. 마음속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린 무언가가 온몸을 짓눌렀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나는 소파에 엎드렸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
은겸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원재야.”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은겸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덕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와 마주쳐야 했다. 나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사흘 만에 보는 은겸은 출장을 떠날 때와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화려한 외모, 나를 볼 때면 언제나 띠고 있는 미소, 잘 가꾼 신체가 돋보이는 옷차림. 예전 같으면 눈부시게 보기 좋다고 느껴졌을 그의 모습이 이제는 하나하나 다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멈춰 선 나를 기다리던 은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팔을 크게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리나 싶더니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나는 묵묵히 은겸의 품에 안겼다. 밀쳐 내고 싶었지만, 함께 내린 동료들의 눈을 의식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곧장 본론을 꺼냈다가는 어영부영 넘어갈 것 같았고.
반응이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은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을 떼어 낸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많이 피곤해?”
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차를 향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은겸이 나를 뒤따라 왔다. 내 등에 대고 말을 거는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가자.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지.”
터지려는 헛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새삼 은겸의 다정한 말투가 뻔뻔스럽게 다가왔다. 이런 식으로 나를 안심하게 만들어 놓고 뒤에서는 정말 속이기 쉽다면서 비웃고 있었을까.
은겸의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힐끗힐끗 옆눈으로 나를 관찰하는 시선이 거슬렸다. 꾹 참고 기다렸다가 집에 가서 제대로 물으려 했는데. 자꾸만 치미는 울화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차가 교차로의 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서은겸.”
“응?”
“나하고 처음 만난 날, 주인호한테 내 위치를 들은 거였어?”
나를 돌아본 은겸이 귀를 쫑긋거렸다.
“인호?”
“응.”
“그러고 보니 그랬네. 어, 맞아. 인호 덕분에 너랑 만났어. 어떻게 알았어?”
신기하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하는 은겸의 태도가 어이없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너무 화가 나니 도리어 머릿속이 냉정해졌다. 은겸이 적어도 놀라거나 미안한 척이라도 했다면, 내게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지녔다는 걸 드러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싸웠을 텐데.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쾌했다.
나는 가방을 집어 들고 안전띠를 풀었다. 그리고 차 문을 열었다.
“원재야!”
뛰어내리듯 도로에 내려서자 뒤쪽에서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모든 소란을 무시한 채 인도로 향했다. 당황한 듯 나를 부르는 은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내 집으로 가는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어디더라. 요새 계속 은겸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퇴근해서 그런지 모든 게 낯설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가방 안쪽에서 부웅부웅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자 예상대로 은겸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통화를 수락하자마자 빠른 말투가 건너왔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은겸은 갑자기 차에서 뛰쳐나간 내게 ‘왜’ 내렸는지 묻지 않았다. 오로지 내 안위만을 물을 뿐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면 가슴을 설레게 했을 그의 걱정이 이제는 가증스러웠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
─원재야.
“너한테 할 말 없어.”
빌어먹을 형제의 손바닥 안에서 더 이상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꺼 버렸다.
정류장에서 내려 걷는 길에 낯선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카페였던 자리에 새싹비빔밥 집이 생겼고, 라면 전문점이었던 곳도 새로운 가게가 들어오는지 내부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다. 내 집으로 퇴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끔씩 오더라도 은겸의 차를 빌려 탔기에 이쪽 거리로는 걸을 일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헛된 꿈에 빠져 있었는지 실감하자 쓴웃음만 나왔다.
내 현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지금껏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현관문을 열자 박스가 가득한 살풍경한 풍경이 나를 반겼다. 대충 겉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비로소 은겸에게서 벗어났으니 홀가분해야 하는데, 계속 속이 답답했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도 갑갑한 마음은 가실 줄을 몰랐다. 물이라도 마시면 나아질까 싶어서 벌떡 일어났지만 헛수고였다. 냉장고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이 집을 떠난 지 오래된 탓이었다.
빈 냉장고만 노려보고 있을 게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떠올리며 나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가서 물을 사 오는 김에, 당분간 지내면서 먹을 만한 간단한 요깃거리도 사는 게 나을 듯했다. 겉옷을 걸치고 지갑을 챙겨 들었을 때, 현관 쪽에서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재야. 여기 있어? 문 좀 열어 봐.”
은겸의 목소리였다. 지갑을 내려놓고 나는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은겸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나가면 될 듯했다.
“원재야.”
하지만 은겸은 집요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이러다 난동이라도 부리면 옆집에서 경찰에 신고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체인을 걸고 문을 열었다.
한 뼘 정도 열린 문틈으로 마주친 은겸은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무슨 일 있어?”
“없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뭐가.”
쌀쌀맞게 답변하자 은겸이 입을 다물었다. 내 머릿속을 헤아리려는 것처럼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아직도 눈치를 못 채는 걸까. 내가 모든 비밀을 알았다는 사실을.
더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재미있었어?”
은겸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사람 속이면서 데리고 노는 거 재미있었냐고.”
“무슨…….”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 나 정도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 싶었고?”
아둔하고 어리석은 곰이 마침 술에 취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주인호의 판단은 옳았다. 은겸의 눈앞에 나타난 나는 잘 차려진 밥상이었을 것이다. 곧장 집어삼킬 수 있을 법한. 그랬으니 만난 날 바로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손을 댔겠지.
“원재야. 진정하고 설명해 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은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한 뼘만큼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부신 그이기에, 나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더 화가 났다. 더 실망스러웠다.
은겸이 만들어 준 모든 행복했던 시간이 모조리 부정당했으므로.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 위치를 말해 준 게 주인호라며.”
“인호? 인호가 왜.”
아직도 짚이는 게 없는지 은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만도 했다. 주인호를 싫어하는 내가 직접 연락을 취해서 모든 사실을 들었다곤 상상조차 못 하겠지. 은겸이 감을 잡지 못한다면 내가 먼저 친절하게 설명하는 편이 빠를 것이었다. 튀어 나가려는 욕설을 억누르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새끼가 너를 나한테 보냈다며, 발정기 끝날 때까지만 적당히 데리고 놀라고.”
“뭐?
“주인호 그 새끼랑 짜고 나한테 접근한 거잖아. 쓰레기 같은 자식아.”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으르렁거림을 마지막으로 나는 문을 닫아 버렸다.
은겸은 더 문을 두드리거나 벨을 누르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복도를 걸어가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대화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한바탕 퍼붓고 나니 물을 사러 편의점에 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대로 끝난 줄 알았던 신경전은 얼마 안 가 다시 이어졌다. 두 시간 뒤, 은겸이 돌아왔다.
“원재야. 문 열어 봐.”
조금 전의 당혹감이 사라진 자리에 침착함이 끼어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겸이 나를 불렀다.
“김원재. 이야기 좀 하자.”
“할 말 없다고 했을 텐데.”
“그러지 말고 문 열어 봐. 다 설명할게.”
열지 않고 싶었다. 감정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으로도 그랬다. 자리를 비운 동안 은겸이 어디서 무엇을 했을지는 뻔했다. 두 시간은 주인호와 말을 맞추고 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은겸의 변명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었다.
현관에 들어선 은겸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인호한테 이야기 들었어.”
나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선 채로 팔짱을 질렀다. 그러지 않으면 분노로 떨리는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래서.”
“원재야. 네가 화낼 일이 맞아. 맞긴 맞는데,”
“할 말은 그게 다야?”
한숨을 쉰 은겸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리 얘기 안 해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그걸 신경 쓸 줄 몰랐어. 인호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도 상상해 본 적 없고. 그날 내가 인호에게 들은 건 어떤 술집에 곰이 있으니까 가서 만나 보라는 게 다였어.”
치미는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두 시간이나 걸려 만들어 낸 변명이 고작 이것뿐일 줄이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순간 은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너와 인호가 무슨 관계인지 들은 게 없어. 네가 곰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어. 거짓말이 아니야.”
“곰이라는 사실만 알았더라도 데리고 놀 생각으로 접근한 건 마찬가지잖아.”
“아니야. 처음에는 그냥 네 얼굴만 보고 돌아가려고 했어. 가서 만나라고만 했지, 그 이상 너한테 뭘 하란 조건은 없었으니까.”
“그러면서 나한테는 왜 그랬는데.”
“얘기했잖아. 그때, 그날, 널 만나고 첫눈에 너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날카로운 말로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도중에 끊긴 말을 주워 담듯, 은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곧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 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그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
“…….”
“바로 돌아가려다가 집까지 데려갈 정도로 반했던 주제에. 내 발정기가 끝났을 때 발 빼려던 건 뭐야.”
“그건…….”
“주인호가 그때까지만 나를 데리고 놀라고 시켰으니까 그랬겠지.”
“아니야. 원재야, 그게 아니야.”
아무리 은겸이 부인해도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주인호가 늘어놓은 소리는 아귀가 딱딱 맞았는데, 은겸이 하는 변명에는 증거가 없었다. 그저 덮어놓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만 할 뿐이었다.
차라리 그냥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면. 허튼소리로 변명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면. 그랬다면 내 안에서 시퍼렇게 벼려지는 분노를 조금이라도 막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너도 결국 똑같은 놈이었어. 나를 데리고 놀기 쉬운 곰으로만 보고 대했잖아. 빈방을 채울 새로운 곰 한 마리로.”
“……그런 게 아니…….”
“나는 이제 너 못 믿겠다.”
은겸에게 품었던 사랑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커져 가는 배신감을 걷잡을 수 없었다. 냉랭하게 은겸의 말을 자르고 나는 벽에서 몸을 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기였는지 모르겠어.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처음부터 다 거짓이었는데 어떻게 널 믿고 만나.”
“원재야.”
“나가. 다시는 찾아오지 마.”
서슬 퍼런 경고를 마지막으로 나는 뒤돌아섰다.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도 은겸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했다. 박스를 열어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 식탁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쥐었다. 한참 만에 은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일 다시 올게.”
몸을 돌린 은겸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발소리가 사라졌을 때야, 나는 똑같은 페이지만 계속 띄워 두었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하아.”
조금 풀리나 싶었던 속이 다시 갑갑해졌다. 이마를 감싸 쥐고 식탁에 머리를 파묻었다. 은겸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들다가도, 지금 내가 그를 걱정할 때인가 싶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은겸은 약속대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원재야.”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은겸의 커다란 몸이 보였다. 밤을 새우기라도 했는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심코 괜찮냐고 물으려다가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고 은겸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나를 따르는 은겸의 발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내내 은겸은 내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은 지난밤 들었던 것의 연속이었다. 인호가 그런 속셈으로 보낸 건 줄은 몰랐다. 그저 곰이 있다는 말만 들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거나 속인 적 없다. 제발 믿어 달라. 원재야. 원재야. 원재야, 제발 나 좀 봐.
“시끄러우니까 그만하고 가.”
절박하게 변명을 늘어놓던 은겸이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등 뒤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류장이 가까워졌을 무렵,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어떻게 하면 날 믿어 줄래.”
“아무것도 하지 마. 네가 뭘 하든 안 믿어.”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멎었다. 멈춰 선 은겸을 남겨 놓은 채 나는 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올라타고 난 뒤에야 내내 꽉 쥐었던 주먹을 풀 수 있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
은겸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은겸은 매일 출퇴근길에 나를 기다렸다. 아침에는 집 앞에 서 있다가 내가 집 밖으로 나오면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내가 퇴근할 때까지 건물 밖에서 기다렸다가 아침처럼 정류장까지 동행했다.
은겸 나름대로 진심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은 역효과만 가져왔다. 밤사이 간신히 식힌 화가, 업무에 집중하며 가까스로 잊은 배신감이 은겸과 마주치기만 하면 활활 타올랐다.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 냉정을 되찾으려면 당분간 나를 뒤흔드는 장본인과는 마주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나는 은겸을 철저히 무시했다. 내 시야에서 은겸만이 깨끗이 지워진 것처럼 그를 피해 걸었다. 은겸도 나를 억지로 붙잡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저 나를 발견하면 다가와서 뒤따라 걷는 게 다였다. 시끄럽다고 화를 냈던 걸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일방적인 동행이 괴로울 테도 은겸은 제법 잘 버텼다. 우리가 아직 섹스 파트너라는 관계를 맺기 전, 그가 얼마나 귀찮게 들러붙었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포기하지 않고 다가왔기에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숨이 막히는 건 오히려 나였다.
아침저녁으로 이어지는 짧은 만남은 회사 사람들의 눈에도 금방 띄었다.
목요일, 야근이 확정되어 저녁을 먹으러 동료들과 회사를 나섰을 때였다. 건물 출입구로 나서자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선 은겸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고 몸을 세웠던 은겸은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서 나온 나를 보고 퇴근이 아님을 알아챈 듯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면서도 은겸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은겸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보내 주었다. 의아한 표정의 동료들이 하나둘 내 뒤를 따랐다.
“그냥 가도 돼요?”
“우리는 괜찮으니까 둘이 밥 먹고 와요.”
“아뇨.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나는 무뚝뚝하게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해가 바뀌면서 우리 팀으로 넘어온 효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모르는 척 무시했다.
우리가 저녁을 먹는 내내 기다렸는지, 회사로 돌아갔을 때도 은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보내는 동료들에게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인 은겸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앞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힐끗힐끗 은겸을 돌아본 이들이 안쓰럽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 카페 같은 데라도 들어가 있으시지. 날도 추운데.”
“원재 씨, 애인이랑 싸웠어요?”
“웬만하면 받아 주세요. 저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누구의 말에도 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직전, 효영이 내 팔을 붙들었다.
“야, 김원재.”
화장실 쪽으로 나를 끌고 간 효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애인 바람피웠어?”
“묻지 마.”
“언제까지 밖에 세워 둘 거야. 몇 시쯤 끝난다고 얘기라도 해.”
“알아서 가겠지.”
“알아서 가기는. 매일 저러고 있잖아. 아침에도 너 회사 들어가고 난 뒤에 한참 동안 밖에 서 있더라.”
“자기가 그러겠다는데 어쩌라고.”
“어휴.”
그 이상 참견할 마음은 없었는지 효영은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나를 올려다보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 그러다 후회한다.”
효영이 복도를 가로질러 사무실로 쏙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후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흐지부지 화를 거두고 은겸을 받아 준다면 그것만큼 후회할 일이 있을까. 화를 낼 때조차 상대를 배려하면서, 앞으로의 관계를 걱정하면서 내야 하나?
정작 나를 속인 이들은 내 심정이 어떨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 나만 그래야 하지?
새삼 부푸는 분노를 삼키며 나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날의 야근은 9시가 넘어서 끝났다. 짐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잊고 있었던 은겸이 떠올랐다.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세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 한 번 없었으니까. 기다리고 있더라도 뭐 어쩌란 말인가. 내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향하는 동안 불안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계속 다잡았다. 괜찮다고, 죄책감을 지니지 말자고.
그래서 건물 바깥에 서 있는 은겸을 보고도 나는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
놀란 듯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는 효영을 피해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은겸이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함께 걷는다고도, 따로 걷는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애매한 동행은 전날처럼 버스 정류장까지만 이어졌다. 내가 버스에 올라타자 은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으로 나를 배웅했다. 내가 탄 버스를 올려다보는 그를 힐끗 훑어보았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추위에 파랗게 질린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욕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무작정 기다리면 뭐든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나? 계속 얼굴을 비추면 내가 정성에 감복해서 받아 줄 거라고? 자기 몸만 혹사할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데도? 차라리 주인호라도 데려와서 사과를 시킨다면 모를까. 아니, 그러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데.
내일부터는 오지 마.
며칠간 차단해 두었던 은겸의 번호를 되살렸다. 빠르게 한마디만 적고 다시 차단하려 했는데, 곧바로 읽음 표시가 뜨자 숨이 턱 막혔다.
회사 사람들이 다 보잖아.
뭐 하는 짓이야.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적어 넣고 나는 어플을 껐다. 사흘 만에 은겸에게 말을 건 부작용인지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답이 오면 그때 차단해야지. 생각하며 나는 가방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은겸은 내게 그 어떤 답도 보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집 앞으로 데리러 온 것도 변함없었다. 그 대신 퇴근길에서는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를 조금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하루에 두 번이던 만남이 한 번으로 줄어서 부담이 덜하다고 안심한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은겸이 서 있었다.
“…….”
우울한 표정의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젓곤 나는 발을 옮겼다.
집 앞까지 따라온 은겸은 내가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 말없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채울 수 있는 온갖 잠금장치를 다 채우고 나는 숨을 죽였다. 그러곤 은겸이 복도를 걸어 사라질 때까지 현관에 서서 기다렸다. 멀어지는 기침 소리가 걱정스러웠지만 문을 열고 나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잠금장치를 채워 둔 거였으니까. 은겸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따라가려는 나를 막기 위해서.
은겸이 돌아가고 난 뒤에야 나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풀지 않은 박스로 가득 찬 집에서 대충 저녁을 먹고 또 하룻밤 잠을 청했다. 어느새 낯설어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심란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반복해야 할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왜 하필 주인호의 형인데. 왜.”
은겸이 원망스러웠다. 그냥 우리가 우연히 만난 사이였다면. 다른 누구와 아무런 관련 없이, 우연히 바에서 마주쳐서 사랑에 빠진 사이였다면. 아니, 최소한 은겸이 주인호와 가족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나도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믿을 수 있을 텐데. 은겸이 내게 그럴 리가 없으니까. 오로지 나만 바라보며 다정하게 감싸 주는 사람이 설마 다른 목적으로 내게 접근했을 리 없으니까. 내가 아는 서은겸은 나를 속이고, 비웃고, 가지고 놀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은겸이 주인호의 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모든 가정이 박살 나 버렸다. 이성이 내게 경고를 외치면서 은겸을 향한 감정을 싸늘하게 식혔다. 그럴 수도 있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애초에 내가 은겸과 만난 건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를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서은겸을 믿어.
복잡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은겸을 밀어내려 해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한참 뒤척이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그나마도 긴 잠은 이루지 못했다.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아침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멍하니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주말이니 조금 더 눈을 붙여도 될 법한 시각이었다. 닷새째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피곤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몽롱한 정신의 끈을 놓으려 할 때였다.
이번 주 내내 아침마다 찾아온 은겸이 퍼뜩 떠올랐다.
설마 주말까지 그럴까.
주말에는 출근하지 않는 걸 은겸도 알 테니 굳이 찾아올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한번 은겸을 의식하자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선 뒤에도 나는 망설였다. 꾸물꾸물 시간을 확인하고 물을 마시면서 현관 쪽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딱히 무슨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
외벽에 기대어 서 있던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할 말을 잃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추운 날씨 탓에 은겸의 뺨이며 코가 붉었다. 오래 기다린 듯했다. 이러다 건강이라도 해치면 어쩌려고. 회사에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게다가 오늘은 주말인데. 만일 내가 주말 내내 외출을 하지 않는다면 이틀 동안 계속 밖에 서 있을 생각인가.
이제는 걱정이 앞섰다. 무시하기보다 은겸을 돌려보내는 게 먼저였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 은겸의 앞에 섰다.
“가. 스토커로 신고한다.”
며칠 만에 듣는 은겸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야기 들어 주면.”
“할 얘기 다 하지 않았나.”
“제대로 사과를 못 했어.”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지 은겸은 벽에 기댄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은겸이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그럼 여기 있으라며 계속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들어와서 기다려.”
지금의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를 내뱉곤 나는 집 안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피해 다닌 거였는데. 결국에는 정에 넘어간 내가 한심했다.
은겸은 나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집 안쪽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내 허락을 기다리듯 서 있을 뿐이었다. 은겸을 현관에 방치해 둔 채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시리얼을 부어 아침을 간단히 먹었다. 도로 비어 버린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뭘 사 올지 체크한 뒤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 시선으로 나를 좇고 있었던 은겸을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얘기해.”
“미안해.”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겸이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 물어봤었지. 인호한테 너에 관해 얘기 들은 거 없냐고.”
마냥 생각 없이 나를 따라다니기만 한 건 아닌 듯했다. 은겸의 어조가 진지했다.
“나는 그걸 뒷이야기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해석했어. 그래서 그때 아니라고 답했던 거고.”
“…….”
“계속 말했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가 인호에게 들은 건 어느 술집에 곰이 있으니까 토끼와 관련된 물건을 가지고 가 봐라, 그게 다였어. 그 곰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았고. 아마도…….”
은겸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마도, 자기 목적을 밝히면 내가 가지 않을 테니까 숨긴 거겠지.”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단순한 소개팅이라고 생각했어. 이혼한 뒤로 사람들이 곰을 소개해 준 적이 많거든. 정식으로 자리를 잡으면 내가 거절하니까 그런 식으로 불쑥 연락해서는 누굴 만나고 오라고 하는 경우도 꽤 있고. 다른 때 같았으면 거절했겠지만 인호 부탁이니까 잠깐 얼굴이나 보려고 나간 거였어. 토끼와 관련된 물건을 가져가라는 건 이벤트 같은 거려니 했고.”
그러고 보니 나와 만나는 중에도 다른 곰 수인과의 자리를 주선하려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지. 나는 묵묵히 은겸의 해명을 들었다.
“막상 인호가 알려 준 장소에 가 보니까 너는 취해 있었어. 이상하긴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지. 아직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거든. 기왕 온 김에 술이나 한잔 마시고 돌아가자 싶어서 바에 앉아 있었는데.”
은겸이 나직하게 털어놓는 그날의 이야기가 낯설었다. 언제나 내 기준으로만 기억했던 그날의 광경이 조금 다르게 되살아났다. 그랬다. 내가 먼저 그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은겸이 들어와서 바에 앉았다. 내게 다가오거나 말을 걸지 않고서 은겸은 바에 앉아 홀로 술을 마셨다. 토끼 귀 머리띠를 쓰고 바텐더와 농담을 지껄이면서.
우리의 인연은 그걸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저 한 공간에서 각자 술을 마신 게 전부인 짧은 인연으로.
그랬는데.
“기억해? 네가 먼저 나한테 다가왔어. 먼저 다가와서, 나를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어.”
내가 먼저 은겸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끝까지 덮어쓴 취기를 핑계 삼아 처음 보는 이에게 다가갔고, 흔들리는 토끼 귀를 무작정 끌어안은 채 정신없이 고백을 뱉어 냈다. 은겸의 말이 맞았다. 내가 먼저 은겸을 붙들었다. 멀찍이 떨어진 바에 등을 돌리고 앉은 은겸을 굳이 찾아간 것도, 다음 날 아침 그의 유혹을 거절하지 않은 것도.
“운명이라고 느꼈어.”
대면조차 하지 않고 끝날 뻔한 우리의 관계를 시작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처럼 그날의 기억을 곱씹는 듯 은겸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나한테 세 번째 인연이 있다면 바로 너라고 생각했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야. 원재야, 나는…….”
조금 비쳤던 그의 미소가 다시 사라졌다. 여전히 식탁 의자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는 내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간절한 눈으로 은겸이 나를 바라보았다.
“미리 얘기하지 않아서 미안해. 사전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도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못하게 조심할게.”
길었던 사과는 기운 없는 부탁으로 끝났다.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믿어 줘.”
나는 눈을 감았다.
은겸의 설명을 듣는 동안 갑갑했던 가슴이 트였다. 그의 행동은 이해 못 할 범위가 아니었다. 내가 품었던 의혹도 대부분 해소되었고. 주인호가 한 이야기와 크게 어긋나지 않으니, 거짓으로 나를 속이려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은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를 농락하려 했던 사람은 주인호 한 명이고, 은겸조차 이용당한 처지인데. 애먼 은겸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지 않을까.
며칠간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배신감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나는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초조하게 내 눈치를 살피던 은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인호 대신 사과…….”
“나가.”
주인호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나는 곧장 은겸의 말을 잘랐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당황한 은겸을 떠밀어 문밖으로 내쫓았다.
“원재야.”
“가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은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바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나는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잠시 가라앉았던 가슴 속이 다시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은겸이 아무리 몰랐더라도, 그리고 진심을 담아 내게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주인호가 은겸을 이용해서 나를 가지고 논 건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은겸과 주인호가 가족인 이상 나는 두 사람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온전히 은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예전처럼 그를 대할 수 있을까.
우리 관계가 처음부터 주인호에 의해서 계획되었다는 점만 떠올라도 모든 걸 뒤엎고 싶은데.
다음 날 아침에도 은겸은 집밖에 서 있었다. 더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대치 상황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외투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서성대던 은겸이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차 가져왔어?”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앞장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그럼 네 집으로 가.”
“원재야.”
“다른 말은 안 할 거니까 태워다 달라고.”
냉랭하게 건넨 요구를 은겸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저 운전기사 역할을 수행할 뿐, 내게 섣불리 손을 대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차가웠던 마음은 은겸의 집에 도착하자 조금 누그러졌다.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 따스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밥을 먹으며 대화했던 식탁. 나란히 앉아 한가한 때를 보내곤 했던 소파. 서로를 끌어안고 뒹굴다 잠들었던 침대. 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은겸의 집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은겸도, 은겸의 집도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이곳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였다.
풀리려는 마음을 다잡고 나는 작은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분간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캐리어를 꺼내어 짐을 하나씩 담았다.
소리 없이 나를 따라온 은겸이 내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은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며 답했다.
“당분간 떨어져 있자.”
“안 돼.”
“시간 좀 가지자고.”
“절대 안 돼.”
억눌린 소리가 귀 옆에서 들리나 싶더니, 무서운 힘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은겸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노란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놔.”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서은겸.”
“다시는 오지 않을 거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면 안 돼. 원재야, 안 돼.”
은겸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성을 잃은 듯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잠깐만 떨어져 있어. 머리 좀 식히고 올게.”
“안 돼.”
“지금은 널 보는 게 괴로워.”
은겸을 떼어 놓기 위해 핑계를 대는 게 아니었다. 그를 볼 때마다 주인호가 떠올랐다. 주인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겸의 동생이 그 새끼라는 생각이 들면, 은겸마저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과 같은 눈으로 은겸을 바라보기 어려웠다.
다시 은겸을 믿을 수 있으려면, 예전처럼 그를 사랑할 수 있으려면, 혼자서 마음을 다스리며 상처를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헤어지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은겸에게 돌아오기 위한 시간이었다.
은겸을 뿌리치고 마저 짐을 정리했다. 당장 써야 하는 것만 골라낸 것인데도 처음 이곳에 가져왔던 캐리어에는 짐이 다 들어가지 않았다. 동거하면서 하나둘 물건이 불어난 탓이었다. 어수선해진 방 안의 꼴을 훑어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가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미안한데 나머지는 정리 좀 해 줘.”
“가지 마.”
은겸의 목소리는 이제 애원에 가까워졌다. 캐리어를 끌고 방문으로 다가가자 은겸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귀를 뒤로 젖힌 그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원재야. 제발.”
“…….”
“약속했잖아. 떠나지 않겠다고.”
“…….”
“제발 가지 마.”
나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만일 그때 내가 은겸에게 그렇게 답했더라면. 간절한 목소리로 나를 붙들려 하는 그를 위로하며 다독였더라면.
우리의 이야기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나는 은겸을 달래지 않았다. 그 대신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집에서 준비해 온 것들을 꺼내 은겸에게 내밀었다. 내가 건네는 카드키와 열쇠를 보고 은겸이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잘 지내.”
그때까지 흔들리던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은겸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이 서서히 하얗게 질렸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에 열쇠를 내려놓고 현관으로 향했다. 내가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을 열 때까지 은겸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내 흔적이 반절만 남은 그 방 안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뒷모습을 외면하고 나는 은겸의 집을 나섰다.
***
그날 이후 은겸은 내 앞에서 사라졌다. 출퇴근길에 나를 기다리지 않았고,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은겸이 종적을 감춘 뒤부터 나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세계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허전함을 달래기 어려웠다. 내가 먼저 잠시 거리를 두자고 했으면서, 정작 은겸이 내 제안을 수용하자 가슴이 저몄다.
모습을 감춘 그가 그리웠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계속 은겸이 나를 쫓아온다면 냉정을 되찾을 자신이 없었다. 이왕 떨어져 지내는 김에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나도, 그리고 은겸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일상을 잃었어도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회사에서는 혼자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내 일을 하는 동시에 우리 팀으로 옮겨 온 효영을 맡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업무가 바빠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가했다면 계속 은겸의 생각만 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집에 돌아오면 은겸의 집에서 가져온 짐을 풀어 대충 정리했다. 하나하나 은겸의 흔적이 묻어나는 것들이라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옷에서 풍기는 섬유유연제의 냄새. 함께 골랐던 슬리퍼. 나도 모르게 짐에 딸려온 은겸의 넥타이까지. 내쉬는 숨마다, 내딛는 걸음마다 은겸이 떠올랐다.
결국 짐 정리를 포기하고 나는 당분간 쓸 물건을 새로 샀다. 어차피 영영 헤어져 있을 사이도 아니고. 돌아갈 거니까. 복잡한 생각이 정리된 뒤에는 은겸에게로 다시 돌아갈 거니까. 집을 가득 채운 박스도, 은겸의 집에서 끌고 온 캐리어도 그때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무조건 잠을 청했다. 동면에 빠진 곰처럼 곤히 잠을 잤다. 긴 잠을 청하는 사이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은겸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모든 앙금이 마음속 밑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잠들고, 또 잠들었다. 그러다 깨어나면 멍한 정신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놓인 박스를 발견하고서야 이곳이 은겸의 집이 아닌 내 집이라는 걸 깨달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를 폭발시켰던 진실은 차차 열기를 잃었다. 언제까지고 가슴 한복판에 단단히 박혀 있을 줄 알았던 말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밑바닥에 스며들었다. 주인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은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필사적이었던 그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고, 핑계일 뿐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은겸에게 품는 감정이 오로지 깨끗한 사랑일 수 있도록. 다른 지저분한 색이 그 감정에 섞이지 않도록.
그러다 한 번씩 분노에 불이 붙으면 온갖 것들이 가슴속을 헤집었다. 억지로 가라앉혔던 감정의 찌꺼기가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깨끗해진 마음이 흙탕물로 변했다. 엉망진창이 된 속이 갑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다시 잠들어야 했다. 의심. 분노. 증오. 배신감. 실망. 경멸.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내 진심에서 걸러 낼 때까지. 은겸에게 향해서는 안 되는 모든 불순물을 분리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다시 그를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
겨우내 드문드문 내렸던 눈은 2월 말이 되자 아예 끊겼다. 가문 날씨 때문에 강이 말라 간다는 방송이 연일 이어졌다. 건조한 공기로 인한 화재를 조심하라는 안내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날아왔다.
“올해 겨울은 낭만이 없는 것 같아.”
마스크를 내리고 미스트를 뿌린 효영이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추위에 약한 효영은 겨울마다 두꺼운 패딩 점퍼와 목도리, 마스크로 중무장을 했다. 복장만 보면 출근이 아니라 겨울 산 등산이라도 하는 것 같은 차림이었다. 그러고서는 낭만 타령이라니. 버스가 언제쯤 올지 확인하며 나는 가볍게 물었다.
“인사팀 그분이랑은 이제 안 만나?”
“응. 잘 안 맞더라고.”
무덤덤하게 대꾸한 효영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너는. 애인이랑 잘 안 돼? 요새 데리러 오지도 않는 것 같던데.”
“……바쁘대.”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거짓말을 했다. 효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지금까지는 한가해서 널 만난 거래?”
“…….”
“그냥 애정이 식은 거 아냐? 예전이라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 냈겠지.”
“……그냥 좀. 이래저래 바빠.”
“마음에 안 드네, 그 자식.”
중얼거린 효영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이건 내가 고양잇과라서 하는 말인데. 사자의 순정을 너무 믿지 마라. 언제 바람피울지 몰라.”
“…….”
“그 사람들한테는 그게 바람이 아니야. 그냥 당연한 습성인 거야. 너한테는 좋아하는 사람이 머무는 마음속 방이 하나겠지. 하지만 사자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방을 여러 개 만들라고 교육받으면서 자라.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아무렇지 않게 방 한 칸을 내준다고. 옆방이 이미 차 있어도.”
그게 아니라고, 은겸의 방은 단 하나뿐이라고 답변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말없이 목도리를 끌어 올려 코끝까지 덮었다. 때마침 도착한 버스가 반가웠다. 효영에게 손 인사를 건네고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짧은 겨울 해가 사라지자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갔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추웠다. 낭만이 없는 겨울이라던 효영의 말에 동의하며 발을 옮겼다. 양말을 두 겹이나 신었는데도 구두 속 발가락이 시리다 못해 아렸다. 오늘도 따뜻한 물로 씻고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았다.
급하게 옮기던 걸음은 얼마 못 가 멎었다.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을 돌자 가로등 아래에 커다란 인영이 서 있었다.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둥근 귀와 기다란 꼬리가 뚜렷하게 보였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가벼운 기시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캄캄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걸음을 옮겼던 가을밤의 기억이 뚜렷하게 되살아났다.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상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노란 눈을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늦게 오시네요.”
불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사자가 아니었다. 커다란 호랑이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단둘이 마주친 주인호가 눈인사를 건넸다.
주인호를 노려보다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온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보나 마나 예주에게 들었겠지. 아니면 은겸에게 물어봤거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주인호와는 더 할 말도 없었고, 얼굴을 오래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무시하고 지나치기 위해 빠르게 발을 옮겼다. 가까워지는 나를 빤히 보던 주인호가 입을 열었다.
“선배.”
나는 주인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다른 생각에 잠기려 노력했다. 얼른 집에 가자. 오늘 본 건 다 잊어버리는 거다. 나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은겸 형 얘기니까 들어 주세요.”
등 뒤에서 들려온 이름이 내 발목을 붙들어 세웠다.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숨을 고르고, 나는 다시 걸었다. 내 뒤를 쫓아오는 주인호의 발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은겸 형에게 돌아가 주세요. 형이 또 무너질까 봐 걱정이에요.”
“닥치고 가라.”
욕설을 내뱉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이를 악물고 던진 경고에 주인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게 바짝 다가섰다.
“만약 지금 선배까지 떠나면 은겸 형 다시는 회복 못 할지도 몰라요.”
주인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이없었다. 그렇게 형을 걱정하는 우애 깊은 동생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질 말았어야지. 은겸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키질 말았어야지. 그래놓고 이번에는 또 무슨 목적으로 찾아온 것일까. 은겸과 내 사이를 제멋대로 뒤흔들고 싶어서?
“솔직히 저번 일은 실수였어요. 형이 이 정도로 선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면 저도 절대로 다 털어놓지 않았을 텐데…….”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작정 뒤돌아서서 주먹을 날렸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주인호는 피하지 않았다. 나도 팔에 잔뜩 실은 힘을 빼지 않았다.
퍽, 하는 커다란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턱을 감싸며 주인호가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나지막한 욕설이 들려왔지만, 반격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얻어맞을 각오 정도는 하고 왔다 이건가. 뻔뻔한 태도가 오히려 더 분노를 돋웠다. 주인호를 쏘아보며 나는 으르렁거렸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주인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선배가 저한테 화를 내는 건 이해해요. 그거에 대해 사과할 생각도 없고요. 저는 정운이 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쓰레기가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은겸 형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작정하고 찾아온 듯 주인호는 거침없이 말했다. 힘이 실린 곧은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 형,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게 두려워서 6년을 혼자 지낸 사람이에요. 외롭게 사는 거 안쓰러워서 좋은 곰 수인이 있으면 소개해 주겠다고 자주 말했었고요. 아마 은겸 형은 제가 그래서 선배를 만나게 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도 절대 저를 의심하지 않았을 거고요.”
이어진 말에는 한숨이 뒤섞여 있었다.
“형한테 저는 언제나 작고 귀여운 호랑이 동생이니까요.”
동생이 생기니까 마냥 좋더라. 프라이드에서는 내가 막내거든.
미소를 지으면서 동생 자랑을 늘어놓던 과거의 은겸이 내 앞에 선 호랑이에게 겹쳐졌다. 귀엽게만 여기는 동생이 자신을 이용했으리라곤 짐작조차 못 했을, 불과 몇 달 전의 은겸이.
은겸이 단 한 번도 나쁘게 표현한 적이 없었던, 사과조차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했던 그 동생이 나를 막아선 채 어깨를 움츠렸다.
“형이 다시 마음 닫기 전에 붙잡아 주세요. 그 일로 저한테 크게 화낸 이후로 제 연락은 받질 않아요. 무슨 일 생긴 것 같아서 불안한데 집에 가도 문을 안 열어 줘요.”
은겸이 네게 어떻게 대하든 내 알 바 아니라는 퉁명스러운 대꾸를 삼켰다. 은겸이 두 번째 이혼 후 손가락을 자르려 했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나를 바라보는 주인호의 눈에서 힘이 빠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선배한테 사과할 마음은 없어요. 그때로 돌아가면 또 똑같이 행동할 거니까요. 후회하지 않거든요. 선배도 후회 안 하실 거잖아요. 그날 정운이 형한테 그랬던 거.”
“…….”
“절 믿으라거나 용서하라고 온 게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은겸 형을 믿어 주세요.”
기다란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비로소 시선을 떨군 주인호가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은겸 형이 정말 좋은 사람인 거, 저보다 잘 아시잖아요.”
입술을 깨무는 주인호의 표정이 낯설었다. 정운이에게 고백하려던 나를 방해하면서 끼어들었던 첫 만남 이래 절대로 보인 적 없는 약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내 앞에서는 오만하고 당당했던 주인호가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부탁드려요, 선배.”
침묵 속에서 나는 주인호를 내려다보았다. 주인호가 허튼소리를 하면 한 대 더 날리기 위해 계속 힘을 주고 있었던 주먹이, 팔이, 어깨가 욱신거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주인호는 나를 더 쫓아오지 않았다. 뒤돌아 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등 뒤는 그저 조용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어두워진 골목을 걸으면서 얼얼한 손등을 매만졌다. 조금 전 들은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모든 일의 발단인 주인호가 직접 은겸의 결백을 주장하는데, 더 은겸에게서 멀어질 필요가 있을까. 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주인호의 말대로 나는 은겸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런 은겸이 무너지려 한다면 그 전에 내가 붙잡아야 했다. 어느 정도 추스른 감정을 그에게 되돌려 줘야만 했다.
일말의 의심도 없는 건 아니었다. 은겸에게 돌아가는 날조차 주인호가 결정하게 만든다고, 또 다시 은겸과 내 일에 남이 끼어든다고 생각하면 불쾌했다. 은겸을 들먹이면 내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라 예상한 주인호가 나를 이용하려고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 주인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극도로 싫어하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부탁해야 할 정도로, 은겸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면.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은겸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욱신욱신 쑤시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발에 걸쳐진 그림자가 무거웠다.
***
주말에 만날 수 있을까.
긴 망설임 끝에 보낸 메시지는 조용히 묻혔다. 은겸은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메시지를 보내도 반응이 없었다. 바쁜가 싶어서 기다려 보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회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은겸에게 전화를 걸고, 연락 좀 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또 하루가 흐른 뒤에도 은겸의 답은 없었다.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은겸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벌써 열흘 전이었다. 내게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 은겸에게는 너무 길었을지도 몰랐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고민하며 나는 답이 없는 스마트폰을 초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날 저녁 무렵, 은겸이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안심하기는 일렀다. 은겸의 답은 여전히 없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반차를 내고 무작정 은겸의 회사로 찾아갔다. 가는 길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명함 뒤쪽에 주소가 적혀 있었으니까. 그와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는데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회사에 가려니 어색했다. 더군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 신분을 뭐라고 밝힐지도 난감했다.
은겸의 회사는 벤처 기업들이 주로 입주한 고층 빌딩의 세 층을 쓰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제일 아래층에서 내렸다. 방문객은 누르라고 적혀 있는 호출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곧 문이 열리고 직원이 걸어 나왔다. 이상하게 들리지 않기만을 빌며 나는 용건을 말했다.
“서은겸 대표님을 뵙고 싶은데요.”
직원이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어떤 용건이신가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약속하고 오셨나요?”
“아뇨.”
“죄송하지만 그러면 만나실 수가……. 응?”
이야기 도중, 안쪽에서 키 큰 여자가 걸어 나왔다. 커다랗고 얇은 귀를 지닌 코끼리 수인이었다. 코끼리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아도 소리가 들렸다. ‘곰’이라는 단어가 몇 번 튀어나왔다.
직원이 다시 내게 물었다.
“혹시 대표님하고 어떤 관계이신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연인? 친구? 섹스 파트너? 우리의 현재 관계는 무엇일까. 남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곤란해하는 내 눈치를 살피며 직원이 말했다.
“사실은 대표님이 지금 휴가 중이세요.”
“휴가요?”
“네. 몸이 안 좋으시다고…….”
직원이 말끝을 흐렸다. 내 반응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은겸이 여기 없다면 더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나는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저기, 잠시만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와서 직원에게 무어라 속삭이던 코끼리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 바로 앞까지 걸어온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 다름이 아니라 곰이셔서 여쭤보는 건데요. 혹시 그분이세요?”
직원이 말하는 ‘그분’이 무슨 뜻인지는 바로 와닿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해 보이는 눈을 끔뻑이며 여자는 귀를 펄럭였다.
“그분이 맞으시면, 대표님 좀 설득해 주실 수 있을까요? 회사에 안 오신 지 오래됐어요. 언제 오신다는 말도 없고요.”
“……제 연락은 안 받던데요.”
“저희 연락도 잘 안 받으세요. 그렇다고 기약 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요.”
무어라 답할 말이 없었다. 은겸과 관련된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지금의 은겸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를 설득해 오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까.
“꼭 부탁드릴게요.”
난처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코끼리를 뒤에 두고 돌아섰다. 은겸을 만나기는커녕 무거운 짐만 더해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여태 알 길이 없었던 근황을 전해 들어서 다행이었다. 몸이 안 좋아서 휴가 중이라면 집에 있겠지. 나는 곧장 은겸의 집으로 향했다.
공동 현관에서 수차례 은겸의 집을 호출했다. 예상대로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없는지, 없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현관 카드키 정도는 돌려주지 않고 가지고 있는 거였는데. 은겸이 열어 줄 때까지 계속 버티고 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 서 있어도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아 일단 물러났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은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좀처럼 끊기질 않았다. 그러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오면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내 시도는 장장 열세 번째 만에 성공했다.
안내 음성으로 넘어갈 줄 알았던 신호음이 도중에 끊기면서 스마트폰 너머가 적막해졌다. 순간적으로 놓칠 뻔한 기기를 꽉 움켜쥐면서 나는 은겸을 불렀다.
“서은겸?”
─……원재야.
은겸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곤 침묵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안도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 통화가 가능하니 다행이었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은겸의 목소리가 반갑기까지 했다.
“문 열어.”
─지금 집 아니야.
“어딘데. 아니, 됐다.”
한심한 문답을 이을 때가 아니었다. 가까스로 연락이라도 닿았으니 전해야 할 말부터 전하는 게 우선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내 진심을 전하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나는 잠기려는 목을 골랐다.
“이야기 좀 하자.”
─오래 통화할 상황도 아니라서.
“짧게 말할 테니까 들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사람들 연락도 안 받고 회사도 안 나간다며.”
─…….
“다들 걱정하더라. 사생활 때문에 일까지 내팽개치지 마.”
내가 사람들에게 부탁받은 전언을 늘어놓는 동안 은겸은 말없이 내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조용해진 핸드폰 너머를 의식하며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은겸의 힘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원재야. 너는…….
느릿느릿 내 이름을 부른 은겸이 느린 숨을 내뱉었다.
─너는 내가 이 상황에서도 멀쩡하길 바라는 거야?
이 상황?
곧바로 튀어 나가려는 대꾸를 삼켰다. 은겸이 이렇게까지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떨어져 있는 것뿐인데. 그것 때문에 모든 일상을 포기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나는 내 의사를 확실히 전했다. 잠깐만 떨어져 있어. 머리 좀 식히고 올게. 그 이유도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은 널 보는 게 괴롭다고. 만일 은겸이 싫어져서 이별을 준비하려고 그러는 거였다면 어떤 설명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짐을 챙겨 그 집을 나왔을 것이었다. 비록 패닉에 빠진 은겸이 내 말을 제대로 들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래서 잘 지내라고 했잖아.”
그렇다고 나를 영영 잃은 것처럼 망가지란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잠시 조용해졌던 핸드폰 건너편이 묵직한 음성으로 가득 찼다.
─누가 시켰어.
“뭐?”
─누가 너한테 날 설득하라고 시켰어. 내 회사 사람들? 인호? 누구야. 대체 누가 너한테 그랬어.
“…….”
─누가 날 들먹이면서 널 귀찮게 했냐고.
그답지 않게 나를 몰아세우며 은겸은 그르렁 하고 목을 울렸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라고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내 묵묵부답에서 진실을 읽었는지 은겸이 곧장 말을 이었다.
─그래. 알았어.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한테 다시는 연락 안 가도록 할게. 번거롭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서은겸.”
─이제 됐지?
은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으려는 듯한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그래도 나는…….
은겸은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네가 우리 문제 때문에 전화한 줄 알았는데.
아. 나는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전달해 달라고 한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정작 내가 그에게 해야 하는 말을 잊고 있었다. 아니라고,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전하려 할 때였다.
─이럴 땐 참 잔인하네, 김원재.
조용히 중얼거린 은겸이 숨을 내쉬었다. 체념이 묻어나는 한숨을 그냥 듣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은겸을 불렀다.
“서은겸.”
─전에 물어봤었지. 너는 얼마나 오래 나를 사랑할 수 있냐고.
“내 얘기 좀…….”
─내가 너무 큰 걸 바랐던 것 같아.
가늘게 떨리는 은겸의 목소리가 쿵 하고 심장을 울렸다. 오래전 지워졌던 선이 되살아났다. 내 발이 닿지 않는 곳에 선명하고 또렷하게.
이대로 전화를 끊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서은겸. 우리 만나자. 지금 어디 있어.”
─네 짐은 이번 달 안까지는 정리해서 보내 줄게. 늦어져서 미안하다.
“짐? 무슨 짐을 보내?”
─네가 남기고 간 것들.
“잠깐만. 서은겸.”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을 것 같은 은겸을 무작정 부르면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의 기억을 재빨리 되짚었다. 그날 나는 짐을 빼면서 흐트러진 방을 은겸에게 대신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설마 ‘정리’라는 표현을 그렇게 받아들였던 건가. 남은 물건을 정리해서 보내 달라고? 그래서 내가 건네는 열쇠를 받지 않았던 건가?
그건 이미 헤어지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뒤늦게 깨달은 오해에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일이 잘못 돌아가도 한참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은겸이 보냈을 열흘은 나와는 다른 시간이었다.
“아니, 그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나중에 보자.
“기다려. 나 아직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끊을게.
“서은겸. 어디야. 내가 가서 다 얘기할게.”
─미안.
“지금 어디냐니까!”
─미안해.
작은 속삭임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믿을 수 없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왜 사과하는데.”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화를 냈어야지. 너 때문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며 원망했어야지.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거리다가 멱살을 쥐고 주먹이라도 날렸어야지. 서로 잘못했던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오해했던 점은 풀고, 이제 다시는 가지 말라고 붙들었어야 하는데.
“왜 사과하냐고.”
이렇게 도망쳐 버리면.
그럼 나도 네게 돌아갈 수가 없잖아.
오늘 만날 수 있어?
미안. 선약이 있어서요.
존댓말 뭔데.
미안.
잠깐은 볼 수 있잖아.
어려울 것 같은데요.
회사 앞으로 갈게.
출장 중이라 와도 못 만나요.
왜 갑자기 존댓말이냐고.
나중에 연락할게요.
서은겸.
서은겸.
대답해.
메시지 읽기라도 해.
서은겸.
나랑 얘기 좀 하자.
제발.
엇갈린 관계는 좀처럼 회복될 줄을 몰랐다.
여러 번 전화를 하면 한 번 통화가 되었다. 수십 건의 메시지를 보내면 한 번 답신이 왔다. 그것도 전부 만날 수 없다는 짧은 거절이었다. 갑자기 깍듯한 존댓말로 돌아간 은겸의 말투를 보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우리가 섹스 파트너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나 썼던, 그것도 얼마 못 가 은겸이 먼저 그만두자고 제안했었던 존댓말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배가 날아왔다. 내가 은겸의 집에 남겨 놓고 온 짐이 전부 담긴 택배였다. 깨끗이 정리하자는 뜻 같아 차마 짐을 꺼낼 수 없었다. 박스를 다시 닫아서 나는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집 안 곳곳에 널린 상자가 어수선했다. 내 집이 가득 찼으니 은겸의 집은 비어 버렸을 터였다. 딱 내 짐이 빠져나간 만큼.
서은겸. 전화 좀 받아.
지금 통화가 어려워서요.
그럼 언제 괜찮은데.
나중에 연락할게요.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만 했다. 은겸과 나 사이에 벽이 생겼다. 은겸이 그었던 선 안으로 들어갔던 나는 어느새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열흘 동안 선 위에는 높다란 벽이 쌓였다. 내가 아무리 발돋움해도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없는 벽이. 벽 너머로 귀 끝만 보이는 은겸은 내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내가 너무 늦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이 꼬일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일찍, 은겸의 마음이 닫히기 전에 연락했다면 괜찮았을까. 아니면, 괴롭더라도 은겸의 옆을 떠나지 말고 계속 부딪쳤다면 나았을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모든 일은 일어나 버렸으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답신이 없더라도 끈질기게 만나자고 제안했다. 거절하는 은겸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보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은겸이, 흐트러진 방에 우두커니 서 있는 뒷모습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미칠 것 같았다.
은겸은 언제나 선약이 있다, 회사가 바쁘다, 출장 중이다 같은 핑계를 대며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이대로는 영영 그를 못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도 주말에는 집에 있을 테니 잘하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나는 은겸의 집으로 찾아갔다.
공동 현관 앞에 있어.
올 때까지 기다릴게.
출장 중이니까 기다리지 마요.
기다릴게.
볼 수 있을 때 연락할게요.
집에 가요.
기다릴게, 서은겸.
출입문 옆에 서서 은겸을 기다렸다. 거주자들이 건물을 빠져나오다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건물 관리인이 내게 왔다.
“여기 서 계시면…… 아, 서 사장님 친구분 아니십니까?”
은겸의 집에 들락날락한 보람이 있었다. 나를 알아본 관리인이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하십니까?”
“카드키를 잃어버려서요.”
“사장님 집에 안 계신가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쯧쯧 혀를 찬 관리인이 공동 현관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기다리세요.”
“……감사합니다.”
관리인의 호의로 로비 안에서 기다릴 수 있었다. 카드키가 있어야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를 수 있기에 그 이상 은겸의 집에 가까워지기는 무리였다. 점퍼를 여미며 나는 입김을 내뿜었다.
아침은 낮을 지나 저녁으로, 밤으로 이어졌다. 은겸은 내게 연락하지도,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자꾸만 졸음이 찾아왔다. 자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아예 엘리베이터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은겸이 나타나겠지 싶었다.
은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여기서 뭐 해요?”
가볍게 어깨를 흔드는 손과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의식을 일깨웠다. 놀라 번쩍 눈을 떴다가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은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잠이 확 깼다. 나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웅크리고 있던 탓에 전신의 근육이 찌뿌둥했지만 내 몸을 돌볼 정신이 없었다. 드디어 마주친 은겸을 위아래로 훑으며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은겸은 정장 차림이었다. 평소보다 안색이 안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곁눈질로 은겸의 손가락 개수를 확인하며 나는 물었다.
“출장 중이라며.”
“왜 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연락한다고 했잖아요.”
“출장 중이라면서.”
“출장 맞아요. 지금은 관리인분한테 김원재 씨 얘기 들어서 잠깐 온 거고. 바로 갈 거니까 김원재 씨도 돌아가요.”
“출장 언제 끝나는데?”
“다음 주쯤?”
“그럼 그때라도…….”
정신없이 대답하며 나는 은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은겸이 내 앞에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무심결에 손을 내밀어 붙들려 하자 은겸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노란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김원재 씨. 부담스럽게 이러지 마요.”
“뭐?”
“오지 말랬는데 왜 마음대로 찾아와요.”
얼굴을 마주하고 듣는 거절은 메시지나 전화로 들을 때보다 훨씬 타격이 컸다. 또 선이 그였다. 또 벽이 높아졌다. 가까워지려고 찾아온 것이었는데, 다시 은겸이 정한 영역의 바깥으로 한 걸음 밀려나자 답답함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서은겸. 혼자 그런 식으로 마음 정리하면 속 시원해?”
“…….”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했잖아. 왜 차인 것처럼 구는데.”
우리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아직 이별하지 않았는데.
그러니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겨서 미안하다고.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인 네 이야기를 믿지 않고 혼자 있게 두어서 미안하다고. 나는 단 한 번도 헤어지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오해를 풀어 달라고 내 진심을 전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은겸은 이미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럼 뭘 어떻게 할까요.”
은겸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동요가 일었다.
“이제라도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할까요? 지금껏 김원재 씨만 기다렸다고, 어서 다시 사귀자고?”
“서은겸.”
“김원재 씨가 원하는 대로 해 줬잖아요. 나 이제 회사도 잘 다니고 일상생활도 잘해요. 더는 김원재 씨한테 연락 가는 일도 없을 거고. 원하던 대로 떨어져서 지내는 것도 잘 참고 있어요.”
“…….”
“내가 뭘 더 해야 하는데. 뭘 더 어쩌라고.”
은겸의 목소리가 억눌렸다.
“붙잡을 때는 그렇게 가 놓고. 슬퍼하지도, 힘들어하지도, 무너지지도 말고 멀쩡하게 살라고 했으면서. 이제야 불쑥 와서 뒤흔들면. 나는 어쩌라는 거야. 어떻게 버티라고.”
“……서은겸.”
“김원재 씨.”
짧게 내뱉은 은겸이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나한테도 시간을 좀 줄래요?”
“…….”
“나중에 연락할게요.”
말을 마친 은겸이 몸을 돌렸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팔을 뻗어 은겸을 붙들었다. 이 손을 놓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예감이 일었다.
“잠깐만.”
커다란 몸을 힘주어 돌려세우자마자 심장이 덜컥거렸다.
“……제발 이러지 마, 원재야.”
나를 보고 선 은겸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마른 손등 아래로 드러난 눈가가 붉었다.
“지금은 널 보는 게 너무 힘들다.”
내가 했던 말이었다. 내가 그를 홀로 버려두고 돌아설 때 했던 그 말이었다. 내가 내뱉은 것과 같은 말을 입에 담으며 은겸이 나를 보았다. 열쇠를 돌려주고 걸어 나왔던 그날처럼,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힘이 빠진 손이 은겸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멍해진 머릿속에 공허한 의문만이 맴돌았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함께 보내는 시간만으로도 행복했던 우리가, 왜 서로의 고통으로 변한 걸까.
원망도, 회한도 엿볼 수 없는 얼굴로 은겸이 눈을 감았다.
“잘 가요, 김원재 씨.”
뒤돌아서는 은겸을 붙들지 못했다. 허공에 머물렀던 손을 천천히 거두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은겸이 탄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듯했다. 혹시라도 그가 돌아올까 봐 출입문 옆에 서서 계속 기다렸다. 조금 전 새벽의 기적처럼 은겸이 내게 다시 와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아침이 하얗게 밝아온 뒤에도 은겸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리를 떴다. 욱신욱신 조여드는 가슴을 부여잡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