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곰은 등을 기댄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연애는 고등학생 때였다. 첫 연인은 기념일 챙기기를 좋아했다. 고백한 날, 사귄 지 100일이 된 날, 첫 키스를 한 날, 처음으로 몸을 섞은 날. 그 모든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내게 외우라고 강요했다.
하라고 시키기에 따랐지만 사실 나는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호감이 한순간에 생기는 게 아닌데 고백한 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세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첫 키스나 첫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만 소중한 게 아니고,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경험이 특별한데. 굳이 단 하루에 방점을 찍고 기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모든 생각이 나와 달랐던 이와의 연애는 얼마 못 가 흐지부지 끝났다. 그 뒤로 10년이 지나도록 나는 누군가와 연애를 해 보지 못했다. 두 번째 연애를 한다면 그 상대는 정운이일 거라고 믿으며 기다렸던 긴 시간. 그때 역시 내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정운이와 처음 만난 날, 즉 정운이에게 반한 날이 언제였는지 외우지 않았다. 등산 동아리에 들어가 정운이와 통성명을 한 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왜 기념일을 만들고 챙길까. 그럴 필요 없이 하루하루에 충실하면 되지 않나. 사랑하는 상대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게 연인의 의무 아닌가. 내 의문은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된 날 바로 해소되었다.
“잘 잤어?”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핸드폰을 향해 팔을 뻗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번뜩 눈을 떴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은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놀라 몸을 뒤로 젖히려 했지만 등에 닿는 벽이 단단했다. 그제야 새벽녘의 일이 떠올랐다.
긴 고백을 마치고 은겸과 나는 내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좁은 1인용 침대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잠을 청했다. 덩치 때문에 어깨를 맞대고 누울 수 없었기에 은겸은 침대 끄트머리에 몸을 걸치고 옆으로 누웠다. 나 역시 벽에 등을 바짝 붙였지만 공간이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내가 택한 자세는 은겸을 보고 누워서 그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이러면 자다가 뒤척여도 은겸이 떨어질 염려는 없을 듯했다. 평소보다 훨씬 밀착한 상태가 두근거려서 한동안 눈만 감고 있었는데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간신히 목을 골랐다.
“……응.”
태연히 굴고 싶어도 자꾸만 가슴이 떨렸다. 언제 나를 안은 것인지 묵직한 팔이 허리에 걸쳐져 있었다.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은겸의 등을 끌어안은 손을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으려니 그의 눈웃음이 진해졌다.
“나는 못 잤어.”
“미안.”
역시 침대가 좁아서 불편했던 듯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데, 은겸이 팔에 힘을 주고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볼에 닿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나는 숨을 참았다.
“널 보느라 못 잤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계속 보고 싶어서.”
“……오늘 출근 안 해?”
씩 웃은 은겸이 내 쇄골에 이마를 댔다.
“안 하면 좋겠다. 계속 널 끌어안고 침대에서 뒹굴고 싶어.”
“…….”
“그럴까, 원재야?”
좋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은근슬쩍 내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끼워 넣으면서 은겸이 엉덩이에 손을 올렸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회사에는 뭐라고 말하고.”
“애인이랑 사귄 지 1일이라서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는 쉬면서 연애나 하겠습니다, 해야지.”
“그건 그냥 퇴사하겠다는 소리잖아.”
피식 웃은 은겸이 내 가슴팍에 코를 문질렀다. 나는 살갗을 간질이는 은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끝에 감기는 머리칼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말처럼 이대로 은겸을 끌어안고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이 눈부시고 다정한 사람이 오늘부터 내 연인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시간이 소중해서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회사 가기 싫다.”
고백한 날이자 사귄 지 1일째 되는 날. 달력에 적어 놓고 싶은 아침이 밝았다.
***
회사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난 뒤에도 은겸은 미적거렸다.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돼?”
“더 늦으면 지각이야.”
“지금 당장 너희 회사에 공문 보낼까. 김원재 씨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스카우트해 가겠다고.”
“직군이 전혀 다른데 무슨 스카우트야.”
“널 위해서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는 거지.”
평소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을 테지만, 오늘따라 은겸의 농담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봉을 지금의 두 배로 주면 고려해 볼게.”
“그거면 돼? 알았어. 지금 당장 출근하세요, 김원재 씨.”
맞장구를 쳐주자 곧장 넉살을 부리는 은겸이 귀여웠다. 피식 실소를 흘리며 나는 안전띠를 풀었다. 눈웃음을 지은 은겸이 내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이따 저녁에 보자.”
“응.”
아쉬움을 삼키며 나는 차 문을 열었다. 그때 은겸이 문득 생각난 듯 질문을 던졌다.
“아, 원재야. 내일 시간 되면 데이트할까?”
데이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요동쳤다. 순간적으로 치솟는 입꼬리를 수습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답했다.
“내일도 출근해.”
“일요일은?”
“일요일은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랬지. 우리 이제 사귀기로 했었지. 앞으로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데이트가 되는구나. 은겸과의 데이트를 상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헛기침을 하는 척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나를 빤히 보던 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요일로. 코스는 네가 정해.”
“어?”
“늦겠다. 올라가 봐. 오늘도 수고하고.”
“어. 너도.”
얼떨결에 은겸을 따라 인사를 건넸다. 조수석의 문을 닫자 손을 흔든 은겸이 차를 돌렸다. 나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으로 은겸을 배웅하면서도 머릿속에는 그가 던져 주고 간 숙제만이 맴돌았다.
‘데이트 코스를 정하라고?’
은겸과 함께 보낼 시간 자체에 들떠 있었는데, 내가 뭘 할지 정하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도, 사무실에 도착해 내 자리에 앉아서도 나는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뭘 하면 좋지?’
당장 떠오르는 건 영화, 저녁 식사, 카페 같은 평범한 코스였다. 거기에 더하면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정도. 하지만 영화를 빼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사귀기 전부터 나는 은겸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하룻밤 묵고 오는 날도 다반사였다. 함께 저녁을 먹은 날도 수두룩하게 많았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당연히 있었다. 이미 우리 사이에 일상으로 자리 잡은 일에 데이트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행을 가기에는 내가 시간이 안 되고…….’
역시 무난한 게 영화인가. 나는 볼을 긁적였다. 영화관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혼자 영화를 보곤 했는데, 은겸과 만난 이후부터 모든 여가를 그에게 쏟아부은 탓이었다.
최근 개봉작 중에서 데이트할 때 볼 만한 영화가 있으려나.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남에게 물어보는 쪽이 빠를 듯했다. 나는 눈을 들어 사무실을 쓱 훑어보았다. 각자 일에 열중한 팀원들의 머리꼭지와 쫑긋 선 귀가 눈에 들어왔다.
‘……아냐.’
팀원들에게 물어보았다가는 ‘기획팀 김원재 씨가 주말에 영화관 데이트를 한다’는 소식이 회사 전체에 퍼질 게 분명했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려 달라며 다들 달려들 터였고. 꼬투리를 잡힐 여지는 처음부터 주지 않는 게 나았다. 빠르게 포기하고 시선을 내렸다. 회사 사람들이 안 된다면, 다음으로 물어볼 곳은 정해져 있었다.
요새 영화 볼 만한 거 뭐 있어?
예주의 답변은 바로 돌아왔다.
애인이랑 보게?
응.
로맨틱 코미디는 어때? 이번에 개봉한 거 재밌던데.
무슨 장르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그럼 그 사람한테 물어봐.
예주는 내가 답할 틈도 주지 않고 연이어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안 되겠다.
점심 먹고 전화해.
나랑 상담하자 원재야.
너 마지막으로 연애한 지 10년 넘었잖아.
그대로는 안 돼.
쉬지 않고 떠오르는 메시지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냥 인터넷에서 찾아볼 걸 그랬나.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예주는 정확히 12시 반이 되자 전화를 걸어 왔다.
─밥 먹었어?
“응.”
그럴 줄 알고 일찌감치 점심을 해치우고 옥상으로 올라온 차였다. 여기저기서 담배를 피우는 회사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나는 구석으로 향했다. 성격 급한 늑대답게 예주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그 사람이 영화 보자고 해?
“아니. 그냥 데이트하자길래. 영화가 무난할 거 같아서.”
─아, 그럼 그 사람한테 뭐 하고 싶은 거 있는지 물어봐. 영화 안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물어보기가 좀 그래.”
─왜? 일할 때 연락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너무……. 나잇값 못 하고 들떴다고 생각할까 봐.”
서른이나 된 성인이 데이트 코스를 못 정해서 끙끙거린다는 걸 알면 서투르다고 웃지 않을까. 특히나 은겸처럼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한 이라면 한심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은겸이 나를 무시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걱정부터 앞섰다. 어쩔 수 없었다. 소풍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신나서 일도 손에 안 잡힌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은겸의 앞에서 솔직한 내 모습을 드러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설픈 모습보다 멋지게 결정하고 이끄는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관계가 변하면서 마음가짐까지 변할 줄은 몰랐다. 은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유는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였다. 은겸이 언제나 내게 반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왜 이러지.’
이마를 문지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딴생각에 잠긴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그 와중에도 예주는 열심히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뭐 어때. 나이 먹으면 설레지 말라는 법 있어? 난 지금도 우리 언니만 보면 설레는데?
“너는 신혼이잖아.”
─그러는 너는? 결혼도 안 했으니까 당연히 나보다 더 설레야지. 아직 사귀자고 말도 못 했다며.
“……오늘 새벽에 고백했어.”
─뭐?
귀청이 울리도록 예주가 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잠시 스마트폰을 얼굴에서 떼어 냈다. 군데군데 서 있던 사람들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까닥여 사과를 건네면서 통화 볼륨을 줄였다. 그리고 예주가 진정할 때까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한참 만에 스마트폰을 귀에 대자 흥분한 예주의 목소리가 빠르게 건너왔다.
─걱정 마, 원재야. 너 지금 영화는 고사하고 아무것도 생각 못 해야 정상이야. 아니, 그러고 어떻게 출근했대? 그 사람은? 고백받고 그 새벽에 그냥 간 거야?
“아니. 내 집에서 자고 같이 출근했어.”
─야, 그랬으면 아프다고 병가라도 내고 오늘은 그 사람이랑 보냈어야지!
“회사가 요새 바빠서. 거짓말까지 하면서 쉬는 건 좀.”
─아, 김원재 진짜.
한숨을 쉰 예주가 미련퉁이 어쩌고 하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빈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솔직히 말해 봐. 빨리 퇴근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지?
“……응.”
손바닥에 닿는 뺨이 뜨뜻했다. 보는 사람도 없건만 달아오른 얼굴이 민망했다. 옥상 벽에 몸을 기대며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와, 얘 좀 봐.
감탄사를 던진 예주가 풋 웃었다.
─그 사람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런가 봐.
나는 소리 없이 대답했다. 좋아한다는 말 외에는 이런 내 모습을 설명할 수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모든 게 이상하고 낯설었다. 초여름에 처음 만나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껏 은겸과 나는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오늘 아침까지 함께 있었고,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왜 또 보고 싶을까.
예주가 추천해 주는 영화의 제목이 귀에 도통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데이트고 뭐고 그저 은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예주의 말을 잘랐다.
“사무실 들어가야겠다.”
실은 은겸과 통화하고 싶어서였지만. 적당히 눈치를 챘는지 예주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래. 아무튼 데이트 잘하고. 영화 재미있게 봐. 축하해, 원재야.
“고맙다.”
감사 인사를 건네고 나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은겸의 번호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새 부재중 전화 알림과 메시지가 와 있었다.
통화 중이네.
짧은 메시지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내가 은겸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 은겸도 나를 생각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나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은겸이 전화를 받았다.
─원재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을 죽였다. 대답을 기다리던 은겸이 말을 이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
─뭐라고 말 좀 해 봐, 원재야. 듣게.
아.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까.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고작 목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벅찬 감정이 넘쳐흘러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내가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었나. 담백하고 무덤덤했던 나는 대체 어디로 가고 이런 설렘만 남았을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왜 이리도 좋은 걸까.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일투성이였다.
“……안 되는데.”
─응?
“나도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한 거야.”
─…….
“네가 먼저 말해.”
웃음소리가 건너올 줄 알았다. 아니면 짧은 한숨이라도. 하지만 스마트폰 건너편은 조용했다. 목소리를 들으려고 전화한 보람이 전혀 없었다. 은겸도 나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저 스마트폰을 붙잡고만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조차도 좋았다. 이렇게라도 이어져 있다는 게 좋았다.
─……너랑 연애하니까 좋다. 진작 할걸.
한참 만에 들린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은겸이 꺼낸 연애라는 단어가 달콤하게 귀에 감겼다. 내가 서은겸과 연애를 하고 있구나. 정말로 우리가 하는 게 연애 맞구나.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지 아직 하루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온몸에 번지는 따뜻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만큼 오래 하면 돼.”
─그러네.
뒤이어 들려온 대답에 나와 같은 기대가 실려 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 오래오래 연애하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
둥실둥실 떠오른 기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의식해서 내리지 않으면 어느새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괜스레 씩 웃는 모습을 주위에 들킬세라 수시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몸은 회사에 있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당연히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후 시간이 끝나고 야근이 시작된 뒤에도 나는 의미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 이러느니 차라리 일찍 귀가해서 쉬다가 내일부터 정신 차리고 일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퇴근할 결심을 한 순간 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움직였다. 나는 순식간에 작업창을 전부 닫아 버렸다. 컴퓨터의 시스템 종료 메뉴를 띄워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바로 퇴근하기는 민망한 노릇이었다. 야근한답시고 저녁까지 먹었는데.
‘한 시간이라도 채우고 가자.’
은겸에게 8시쯤 끝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들썩이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그때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일하는 틈틈이 작업 표시줄의 시계를 확인하며 8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고장 난 것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초조하게 시선을 옮기기를 수십 차례. 마침내 시간을 가리키는 숫자가 7에서 8로 바뀌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갑니다.”
“오늘 늦게까지 있는다더니?”
“머리가 좀 아파서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컴퓨터를 껐다. 아픈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내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함께 야근을 하던 옆자리 동료가 나를 훑어보았다.
“원재 씨 내일 출근할 수 있어요?”
“네.”
“어, 데이트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내가 오늘 사무실 근처에서 은겸과 통화를 했던가. 황급히 돌이켜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동료가 피식피식 웃었다.
“오늘 하루 종일 표정이 환하길래. 어제 그 기사 보고 애인이랑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했죠. 과장님 빼고 사무실 사람들 다 눈치챘을걸요.”
잘 숨긴 줄 알았더니 전부 들통난 모양이었다. 코트를 한쪽 팔에 걸치고 나는 동료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니, 왜 사과해요.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원재 씨 항상 일에만 파묻혀 살더니, 요즘 생기가 돌아서 참 보기 좋아요.”
한쪽 눈을 찡긋거린 동료가 펜을 빙그르 돌렸다.
“회사 눈치 보지 마요. 이것도 다 내가 행복하자고 하는 짓이지. 나도 오늘은 일찍 정리하고 우리 남편이나 보러 가야겠네.”
“…….”
“그렇다고 원재 씨가 연애 때문에 일을 내팽개칠 만큼 불성실한 사람도 아니잖아.”
사람의 이미지라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평소에 성실하게 일해 놔서 다행이었다. 하루 종일 일을 내팽개쳤다는 진실은 묻어 두고 나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손을 흔드는 동료를 뒤로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긴장이 풀리자 퍼뜩 은겸이 떠올랐다. 8시가 넘었으니 기다릴 텐데.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은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끝났어.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은겸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회신을 보냈다. 진작 거기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했다. 걸음을 빨리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가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는 최상층까지 올라갔다가 한참 만에 내려왔다. 승강기에 올라타서 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먼저 탄 사람이 나를 힐끔거렸지만 무시했다. 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서서 계기판에 뜨는 숫자를 계속 올려다보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이 견딜 수 없게 길었다. 몇 분이나 지났지. 초조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는 찰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실수를 깨달은 것은 앞으로 두어 걸음 내딛고 난 후였다. 어두컴컴해야 할 사방이 너무 밝았다.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다가 아, 소리를 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지하 주차장이 아니라 1층 로비였다. 시간을 보다가 엉뚱한 층에서 내린 모양이었다.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 버린 뒤였다.
승강기가 도로 올라오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비상계단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자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공간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망설이지 않고 서늘한 공기 속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어두운 층계참에 불이 켜졌다. 구두 뒤축이 단단한 바닥을 때리자 쿵쿵거리는 소음이 사방을 울렸다. 은겸이 기다리고 있을 지하 2층을 지나치지 않도록 비상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 칸씩 밟던 계단을 결국 세 칸씩 밟고 뛰어내렸다. 이러다 발이 꼬여 넘어지면 크게 다칠 거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지하 2층의 문을 연 순간,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익숙한 차가 서 있었다.
“어디로 온 거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리자 곧 두꺼운 유리가 빠르게 내려갔다. 계속 엘리베이터 쪽만 지켜보았는지 은겸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보닛 앞을 뱅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계단.”
“왜 거기로?”
“……운동 삼아서.”
내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다. 차에 오르는 내 발을 은겸이 힐끗 내려다보았다.
“구두 신고 운동하면 무릎 다쳐.”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이상 둘러댈 생각을 접어 두고 나는 조수석 의자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정신없이 뛰어 왔더니 숨이 가빴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은겸이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어?’
진정되어 가던 가슴이 다시 요동쳤다. ‘벌써?’와 ‘아직 숨찬데 어떡하지’ 두 문장이 패치워크처럼 머릿속을 반복해서 수놓았다. 그렇다고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저절로 꽉 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리고 허리를 세웠다. 긴장 때문에 입 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은겸과의 입맞춤은 인사나 다름없는 행위인데. 새삼스레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은겸의 입술은 닿지 않았다. 간지러운 게 볼을 스칠 뿐이었다.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어깨와 가슴팍을 무언가가 눌렀다. 나는 슬쩍 실눈을 떴다. 내게 안전띠를 채운 은겸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은겸의 눈이 반원을 그렸다.
“키스하는 줄 알았어?”
민망해서 고개를 저었다. 은겸의 눈웃음이 화사해졌다.
“그래? 그럼 관두고.”
“뭘.”
“나는 할 생각이었거든.”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은겸이 가슴에 걸쳐진 안전띠 위를 톡톡 두드렸다.
“다시 물어볼까? 키스 기대했어?”
맥박과 뒤섞인 작은 진동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동시에 아찔하게 퍼지는 은겸의 체취가 한 가지 답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말하면 해 줄게.”
나는 가까스로 숨을 참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키스해 달라는 말이 튀어 나갈 것 같아서였다. 두근거리는 마음과는 별개로, 대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나를 떠보는 은겸이 얄미웠다. 말주변이 좋으면 보란 듯이 맞받아칠 수 있을 텐데. 뭐라고 말하건 또 은겸에게 휘말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서투른 유혹을 포기하고 본능을 따랐다.
은겸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겼다. 거칠게 입술을 포개곤 얼얼할 정도로 힘주어 누르며 비볐다. 은겸은 빠르게도 태세를 전환했다. 내 어깨를 붙든 그가 혀를 내어 안으로 파고들려 했다. 나는 곧장 은겸을 밀쳤다.
코앞에서 마주친 호박색 눈에 끈적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조금 전 나를 놀리던 여유는 사라진 뒤였다.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나는 앞을 주시했다.
“너만 입 있는 거 아니야.”
“……와.”
“네가 안 해 주면 내가 한다고.”
“김원재 진짜 너무하네.”
“내가 뭘.”
“너무 야하잖아.”
은겸이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원재야. 내가 소박한 꿈이 하나 있는데.”
“응?”
“차에서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변태 같은 소리 좀 그만해. 여기 회사 주차장이야.”
당장 덮쳐들 기세인 그를 저지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겸이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는 내내 은겸은 진한 냄새를 뿜어냈다. 삽입을 못 해서 욕구불만인 듯, 요새는 조금만 건드려도 계속 이 모양이었다. 무거워진 공기를 못 이기고 나는 차창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 와 체향을 흐트러뜨리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은겸도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를 냈다.
“일요일에 뭐 할지 정했어?”
“영화 보려고 하는데.”
“아, 우리 아직 영화 보러 간 적 없었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인 은겸이 룸미러를 통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집에서 볼까?”
“집에서?”
“내일도 출근한다며. 피곤할 테니까 VOD로 보자.”
“그럼 데이트가 아니잖아.”
“뭐 어때. 어디서든 오붓하게 보내면 된 거지. 아, 와인 마실래? 사 둘게.”
그러겠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은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어디에 가서 뭘 사고, 저녁은 뭘 만들고 하는 주말 계획이었다. 그를 흘깃거리다가 나는 피식 웃었다.
‘나만 들뜬 게 아니구나.’
진지하게 생각에 빠져든 은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던 화려한 외모는 옆에서 보아도 여전했다. 밝은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둥근 귀가 쫑긋거렸다. 긴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꿀빛 눈은 계속 들여다보고 싶을 만큼 예뻤다. 높게 뻗은 코를 타고 시선도 아래로 미끄러졌다. 내 앞에서는 항상 양 끝이 올라간 붉은 입술이 달싹이자 조금 전 짧게 끝난 입맞춤이 떠올라 목이 말랐다.
도드라진 목울대 아래의 상반신은 옷에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어깨와 허리를 쭉 편 은겸의 자세 덕분에 셔츠가 당겨져서 그 밑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항상 내게 가슴 어쩌고 말하는 은겸도 탄탄한 몸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벨트 아래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황급히 끌어 올려 은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은겸의 외모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은겸은 내가 좋아했던 이들에 비하면 체격이 너무 컸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타입이라 부담스러웠다. 가벼워 보이는 인상도 한몫했다. 내키는 대로 유혹했다가 언제든 손을 흔들고 떠날 사람을 또 사랑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겪어 본 은겸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는 미남은 사실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타인과 깊이 얽히지 않으려 하는 건 사람들과의 관계를 쉽게 여겨서가 아니라 지난 상처로 인한 두려움 탓이고. 장난스러운 농담과 스킨십은 모두 애정 표현의 하나였다.
외모로만 판단할 수 없는, 진심으로 다정한 사람.
어떻게 사람이 첫인상과 이리도 달라질 수 있을까.
은겸의 오른쪽 볼에 있는 까만 점을 뚫어져라 보았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콕 박힌 점은 작은 크기임에도 잘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은겸이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바라봐. 또 반했어?”
“……무슨 자신감이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고방식이었다. 키득거리며 은겸이 핸들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래.”
“뭐가.”
“매일 너한테 반하거든. 조금씩 더 너를 알게 될 때마다.”
“…….”
“오늘은 애인 앞에선 그렇게 긴장하는구나 싶어서 반했어.”
다가온 은겸의 손이 내 무릎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무슨 소린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둥글게 움켜쥔 주먹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다리 위에 올려놓고 정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나는 그냥.”
“그냥?”
“그냥……. 보고 싶었으니까 본 건데.”
분명 내 취향의 외모도 아니고, 첫인상도 별로였던 사람이었지만.
“……목소리로는 모자랐어.”
이제는 그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거울에 비친 은겸의 눈이 번뜩이나 싶더니, 갑자기 차가 옆 차선으로 끼어들었다. 뒤쪽에서 요란한 경적이 울렸지만 은겸은 개의치 않았다. 재빠르게 길가에 차를 세운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말장난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렸다. 곧바로 내 뒤통수를 쥐고 끌어당긴 은겸이 입을 겹쳤다. 급하게 파고들어 안쪽을 훑어 내리는 혀 놀림에 나는 신음을 흘렸다. 돌기에 쓸린 입 안 점막이 따끔거렸다.
말랐던 입이 은겸의 타액으로 젖어 들면서 숨이 막혔다. 가슴을 꽉 누르는 안전벨트가 갑갑했다. 그를 슬쩍 밀어내며 헐떡이자 은겸이 손으로 아래를 더듬어 벨트를 풀었다. 그러더니 곧장 내 다리 사이를 쥐었다.
“내일 월차 내.”
“주말 근무라 안, 읏, 만지지 말라니까.”
서지도 않는 중심을 정성 들여 문지르며 은겸은 그르렁 목을 울렸다.
“이제 막 내 거가 됐는데, 회사에 뺏길 거 같아?”
“뺏기기는 무슨.”
“너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보다 널 더 오래 보잖아. 아, 그 회사 내가 사 버릴까?”
입술에서 떨어진 은겸이 내 코를 깨물고, 볼을 깨물고, 턱을 깨물었다. 마침내는 이를 세워 귓등을 잘근거리며 속삭였다. 나는 눈을 떠 은겸을 올려다보았다. 귀찮아야 할 질투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싫지 않았다. 아니, 싫기는커녕 어쩐지 은겸이 귀여워 보였다.
이 사람도 온종일 나를 생각했던 걸까.
“……사든 말든 맘대로 해도 되는데. 그래도 내일은 못 쉬어.”
“후.”
“대신에.”
나는 은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일 좀 여유 있게 출근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오래 해.”
“…….”
“……다른 때는 몰라도 밤이랑 아침은 같이 보내고 싶어.”
괜히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낼지언정, 사적인 시간은 모두 은겸에게 주고 싶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은밀한 밤을 함께 보내고, 새로운 아침이 찾아오면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자고.
은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 재킷 안으로 손을 넣은 그가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못 참아, 이제는.”
“집에 가서 하자니까.”
“네가 먼저 도발했어.”
“여기 밖이라고.”
“이거 안 빼면 운전 못 해.”
이미 불룩해진 아래를 곁눈질로 가리키며 은겸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허리를 굽혔다.
“한 번만이야.”
“두 번도 괜찮…….”
“물어뜯기 전에 가만히 있어.”
사귄 지 2일째도, 3일째도. 앞으로도 계속 하루의 끝과 시작을 함께 맞이하고 싶다고, 우리가 함께한 나날을 달력에 적어 놓고 싶다고 말하면 아마도 모두가 웃겠지. 나조차 우스우니까.
그런데도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도, 수업을 듣는 학생도 사이좋게 괴로워하던 11월이 지나가자 겨울이 찾아왔다. 회사의 인사 시즌도 함께 돌아왔다.
인사팀에서 들려줄 소식을 기다리며 나는 은겸에게 한턱낼 식당을 미리 검색했다. 은겸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골랐다. 항상 내게 무언가를 먹이며 좋아하는 은겸에게, 이번에는 내가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었다.
은겸이 없었다면 캔 맥주 하나로 기념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내가 받을 직함은 유별나게 대단하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사장인 은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회사를 오래 다니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대가였다. 하지만 은겸은 그것도 내가 노력한 결과물이라며 인정해 주었다. 그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은겸에게 먼저 진급 사실을 알리고 축하받고 싶었다. 은겸이라면 순수한 선의만을 담아 기뻐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빨리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인사팀은 잠잠했다. 12월 초면 결정 나곤 하던 인사 결과는 12월 중순이 되도록 발표되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나는 인사팀을 찾아가거나 상사에게 넌지시 묻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소식이 올 것이라 믿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기다리던 소식은 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오랜만에 복작복작한 버스를 타고 출근한 날이었다. 작게 하품을 하며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최상층까지 올라갔던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1층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이러다 지각하는 거 아닌가. 시간을 확인할 때 타박타박 가벼운 발소리가 울리더니 누군가 내 뒤에 섰다. 이어서 두 목소리가 수군거렸다.
“이 주임님 진급 확정됐다며.”
“부서까지 옮긴다던데.”
“이 주임님 이번에 진급 어렵다고 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바뀐 거야?”
“몰라.”
별다른 생각 없이 듣다가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미심쩍었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나는 버튼을 누르는 척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타는 다람쥐와 여우의 얼굴이 낯익었다. 언어팀 사람들이었다.
“어.”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제야 나를 알아보았는지 두 사람이 더듬거리며 알은척을 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곤, 닫힘 버튼을 눌렀다. 웅 소리가 나면서 기계가 올라가는 내내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내가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사람들이 말한 이 주임은 효영이 분명했다. 언어팀에서 이씨 성을 가진 주임은 효영뿐이었다.
내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데 효영에게는 벌써 소식이 들어간 듯했다. 게다가 부서 이동이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 뒤를 따라 우리 팀의 사무실로 향하면서도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항상 그대로 들어맞는 것일까.
막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한 10시 무렵이었다. 갑자기 사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과장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손짓으로 대강 과장님에게 답한 부장님이 거드름을 피우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팀원들이 하나둘 일에서 손을 떼고 부장님을 바라보았다. 헛기침으로 사람들을 주목시킨 부장님이 목을 골랐다.
“소개할 사람이 있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부장님이 아침부터 우리 사무실에 오는 일 자체가 드물기도 했고, 누군가를 소개할 일이라곤 더더욱 없었다. 호기심마저 느끼며 나는 몸을 돌려 부장님을 보았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새로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털을 지닌 치타의 귀를 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굳은 얼굴의 효영이 부장님의 옆에 와서 섰다.
흐뭇한 눈으로 효영을 바라본 부장님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이효영 주임은 다들 알지? 내년부터 콘텐츠기획팀에서 같이 일하게 될 거야. 아, 그때는 이 주임이 아니고 이 대리겠지만.”
“……예?”
“신 과장이 아직 말 안 했나?”
부장님의 시선이 과장님에게로 옮겨지자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과장님을 바라보았다. 움찔 놀란 과장님이 시선을 떨구었다. 부장님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 팀 지금 대리가 없잖아. 그래서 그 자리로 이 주임이 온다고.”
사무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효영의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꼬리털을 쭈뼛 세운 효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거 영 삭막한 팀이구먼. 동료가 될 사이인데 환영 인사도 안 해?”
“아, 예. 이효영 씨. 앞으로 잘 부탁해.”
과장님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혀를 찬 부장님이 휙 몸을 돌렸다. 주춤거리며 부장님의 뒤를 따르던 효영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더 보았다. 나는 말없이 효영을 외면했다.
오전 내내 사무실의 분위기는 삭막했다. 누구도 내게 함부로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일에 집중하려 노력하면서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끊었던 담배가 그리워졌다.
부장님이 나가고 난 뒤 안절부절못하던 과장님은 얼마 못 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고 치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과장님이 어딜 갔는지는 뻔했다. 타닥타닥,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팀원들이 모니터 속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더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귀를 틀어막았다.
과장님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야 돌아왔다.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며 과장님이 내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다들 먼저 밥 먹으러 가라고. 김 주임은 잠깐 나 좀 보지.”
힐끔거리며 날아드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마지막 사람이 나가며 문을 닫자마자 나는 책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찔끔 목을 움츠린 과장님이 정수기를 가리켰다.
“자, 그러지 말고 커피라도 마시면서…….”
“과장님. 한 부장님이 아까 하신 말, 대체 무슨 뜻입니까.”
“아, 그게 말이야.”
과장님이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필사적으로 변명을 찾는 게 뻔했다. 나는 눈에 힘을 싣고 과장님을 노려보았다.
“효영이가 대리로 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과장님. 제 진급은요?”
“……김 주임한테는 미안하게 됐어.”
“설마 효영이 진급 때문에 제가 밀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그렇게 됐어.”
“왜요? 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린 겁니까?”
곤란한 표정을 한 과장님이 볼을 긁었다.
“그게 말이지. 우리 부서에는 지금 대리가 없잖아.”
“그래서 저 대리로 올려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저 내년이면 입사한 지 몇 년째인지 아시잖습니까!”
작년에는 진급을 못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는 우리 팀에는 다른 대리가 있었으니까. 그분이 하필 인사 시즌을 넘기고 퇴사하면서 우리 팀의 구성도 어정쩡해졌다. 그래도 자리가 있으니 기회가 올 거라는 과장님의 말을 믿으며 1년을 더 참았다. 올해는 반드시 진급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
“그래. 김 주임이 실질적으로 대리 역할까지 다 맡아서 한 거 알아.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어떡해. 위에서 우리 팀 대리 두 명 만들지 말라잖아.”
“그럼 효영이는 자기 팀에서 진급하고 저는 저대로 진급하면 되잖습니까.”
과장님이 한숨을 쉬었다.
“그 팀이 지금 한 명을 다른 부서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야. 그냥 보내면 뭐하니까 진급이라는 명목 쌓아서 보낸 거지. 언어팀도 난감할 거야.”
“……하.”
“그렇다고 우리가 반대할 일도 아니지. 이효영 씨야 워낙 실력이 뛰어나잖아. 성격도 좋으니까 우리 팀에서도 잘할 거고.”
“실력이 뛰어난 건 언어팀에서의 얘기죠. 효영이 우리 팀으로 오면 처음부터 하나씩 다 배워야 합니다. 팀원들, 강사들과 친해질 시간도 필요하고요. 언어팀에서 강사 관리 같은 건 하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부서 이동과 동시에 진급요?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과장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아시면서 찬성하셨어요? 저 진급하지 말라고요?”
화가 너무 나서 말이 막 나가는데도 참을 수 없었다. 내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과장님이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아, 이 사람 참. 나라고 자네 진급을 왜 싫어하겠나. 작년부터 계속 윗선에다가 얘기했어. 김 주임 진급시켜 달라고.”
“그런데 뭐가 문제랍니까. 작년에는 영어 자격증 때문에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따 오기만 하면 올해는 반드시 진급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잖습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자격증이 필요하답니까?”
“……그게 말이야.”
손목을 푸는 것처럼 과장님은 양손을 맞잡고 꿈지럭거렸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꺼낸 답변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위쪽 분들이 자네가 곰이라서 못 미더운 모양이야.”
“예?”
“자네도 알다시피 곰 이미지가 좀 그렇잖아. 부하 직원으로는 부리기 좋지만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위 직급에는 어울리지 않다, 뭐 이런 얘기.”
상상도 못 한 이유였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 근무 태도나 업무 능력, 하다못해 부장님 앞에서 섹스 파트너 운운했던 말실수를 지적받을 줄 알았는데. 곰? 곰 이미지가 어떻다고?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고정 관념이란 게 무서운 법이야. 나이 드신 양반들이야 워낙에 고양잇과를 선호하는 거 알지 않나. 그쪽 종들이 눈치 빠르게 일을 잘 처리하고, 사람들도 카리스마 있게 잘 휘어잡으니까. 그에 비해 곰은 체육계처럼 몸을 쓰는 직군에서 활약한다는 인상이 강하고.”
“그래서요. 저는 곰이니까 이런 일은 그만두고 몸으로 때우란 소리입니까?”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효영이는 진급하고 저는 안 된 겁니까? 고작 그 이유 때문에?”
분이 치밀었던 머릿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노동부에 신고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리야.”
벌떡 일어선 과장님이 내 팔을 붙들었다.
“대놓고 곰이라서 안 된다는 건 아니었어. 그냥 그런 느낌이라는 거지.”
“종 차별로 신고할 겁니다. 곰이라서 진급 누락시켰다고요.”
“그러지 말고, 김 주임. 1년만 더 참아 봐. 그럼 반드시 대리로 올려 줄 테니까. 응?”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못 믿어도 믿는 척이라도 하라고 하는 소리야.”
손목을 붙든 과장님의 손아귀 힘은 예상보다 강했다. 나를 올려다보면서 과장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직장 생활이 다 그런 거야. 말도 안 되는 걸 트집 잡아서 끌어내리고, 어리숙한 놈 공은 다 가로채 가고. 평소에 머리를 잘 써야지, 그러니까. 내가 곰이라도 미련한 놈이 아니다, 이만큼 사교적이고 싹싹하다고 어필을 해 줘야지. 응? 그래야 상부에서도 아, 그렇구나, 아랫사람들 잘 이끌 수 있겠구나 하고 눈도장을 찍는 거 아니겠어.”
“그래도 원칙이란 게…….”
“아니, 세상에 원칙대로만 굴러가는 게 어디 있어.”
“안 지킬 거면 원칙을 왜 만듭니까?”
“안 지켜지니까 원칙을 만드는 거야. 안 지켜지니까! 그거라도 있어야 그럴듯해 보이지!”
언성을 높인 과장님이 원망 어린 눈으로 날 보았다.
“아, 그러게 그때 왜 부장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 김원재 씨는 결혼 생각도 없어 보이지, 부양가족도 만들 생각 없는 것 같지. 그럼 위에서도 누굴 진급시키겠어.”
“그래도…….”
“나라고 과장으로 계속 있고 싶은 줄 알아? 나는 차장 승진 못 한 지 벌써 10년째야.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월급쟁이 처지인 거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라고. 한 부장 그 양반 안 그런 척하면서 자기한테 대드는 사람한테는 포악한 거 알잖아. 좀 이해해 줘.”
자기 이야기까지 끄집어내며 내 문제를 덮으려 하는 과장님의 태도에 더욱 속이 터졌다. 작은 일에도 파르르 떨며 예민하게 군 덕에 과장님은 라인을 잘 잡았다. 승진은 못 했다지만, 최소한 좌천당하는 일은 없었다. 과장님이 유독 한 부장님에게 굽실거리는 것도 전부 사내 정치 때문이었다.
왜 효영이 우리 팀으로 왔는지는 뻔했다. 부장님의 눈치를 보며 자진해서 내 진급을 없던 일로 만들었겠지. 나를 못 미더워하는 윗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부하를 감쌀 의지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비워 놓은 자리에 마침 갈 곳이 없었던 효영을 데려왔고.
“언어팀도 지금 분위기가 장난 아니야. 거기도 갑자기 사람을 뺏기는 셈인데. 그 팀은 우리보다 더 심각하다고.”
“…….”
“이효영 씨 빈자리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되는 줄 알기나 해?”
알 게 뭔가.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과장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건 자네만 알고 있어. 그 자리 내년 초에 특채로 충원될 거야.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거긴 벌써 내정자가 있다고. 듣기로는 이사님 지인 아들이라는 것 같던데. 우리 팀으로 안 왔으면 그 팀의 누구가 어디로 발령받았을지, 아니면 잘렸을지도 모른다고, 이 사람아.”
“…….”
“그나마 이효영 씨는 한 부장님한테 잘 보여 놔서 살아남은 거야. 그러니 평소에 잘하라고. 응? 밖에서 아무리 평등 대우, 차별 폐지 외쳐 봐야 뭐 해. 실상은 다 이런 거야. 어디나 똑같다고. 당장은 인식이 안 바뀌어. 김 주임도 잘 알잖아.”
벌써 몇 개월 전 효영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자신은 주말마다 필드를 나간다며, 영어 가산점이 얼마나 도움 되겠냐며 말하던 발랄한 효영의 목소리가.
‘야, 회사에서 중요한 인사 결정을 누가 내리겠냐. 과장님? 아니야. 과장님이 아무리 힘을 써도 위에서 안 된다고 하면 안 돼. 그러니까 위쪽을 직접 공략해야지.’
만족스러운 성적이 나올 때까지 영어 공부를 계속했던 나는, 과장님의 말만 믿고 자격증 공부에 올인했던 나는, 그냥 멍청이였다. 멍청하고 답답하게 굴었을 뿐이었다. 정석대로 진행하면 모든 게 다 이뤄질 줄 알고.
과장님의 말대로 나는 미련한 곰이었다.
6시 정각이 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지 않았지만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지 못했다.
회사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은겸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버스에 실려 한가롭게 퇴근할 기분이 아니었다. 가는 길에 은겸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이제 집에 가려고.
“빨리 와.”
─어? 퇴근했어? 연락하지 그랬어. 데리러 갔을 텐데.
“됐으니까 네 집으로 와.”
긴 설명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은겸을 보고 싶었다. 그라면 기분 나쁜 모든 일을 한꺼번에 잊게 만들어 줄 것 같았다. 머릿속을 비우려면 역시 섹스가 제일 좋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촉진제를 구해 둘걸. 입술을 잘근거리며 나는 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소용없었다. 뻔뻔스럽게 우리 사무실에 들어와 새 식구를 소개하던 부장님과, 주눅이 들어 눈을 피하던 효영과, 내게 한바탕 훈계를 퍼붓던 과장님을 떠올리자 치가 떨렸다. 설마 그때 그 회식도 우리 팀에 효영을 선보이기 위해서 만든 자리였나.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확정되어 있던 인사이동이었던 것일까. 당사자인 내게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로. 설마 효영마저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설마. 알고서도 입을 다물었을 리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효영은 자기 승진을 위해 친구를 속일 사람이 아니니까.
‘……윗분들이 입단속을 시켰다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지.’
한때 내 앞에서 어색하게 굴던 효영의 태도가 기억났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설령 미리 알았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효영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텐데.
‘그만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효영이나 나나 높으신 분들의 편의에 의해 희생양이 된 꼴은 비슷했다. 효영이 내 자리를 가로챘다며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효영을 억지로 지우자 원망의 화살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네가 곰이라서 못 미더운 모양이야.”
“나이 드신 양반들이야 워낙에 고양잇과를 선호하는 거 알지 않나.”
과장님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분했다. 분해서 치가 떨렸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태생적인 조건을 가지고 나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이 어이없었다. 내가 만드는 교재, 내가 서포트하는 강사들의 강의에서는 어떤 종이든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이야기뿐인데. 정작 내가 속한 집단은 차별과 편견을 바탕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건물 입구에 서서 은겸을 기다렸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쌌지만 화가 치민 탓에 그리 춥지 않았다.
내 전화를 받고 바로 퇴근한 듯, 은겸이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올라왔는지 은겸은 건물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가 포옹했다.
“원재야.”
반갑게 나를 부르는 은겸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가슴을 아프게 저몄다. 보고 싶었던 이를 만났는데도 도무지 감정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리어 은겸과 함께 가려고 골랐던 식당의 목록이 떠오르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거칠게 숨을 쉬며 나는 은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은겸이 가만가만 내 등을 토닥였다.
“무슨 일 있어?”
“섹스하자.”
“뭐?”
“섹스하자고.”
말끝에 따라 나오려는 욕설을 삼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은겸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나를 떠민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그냥 하고 싶어졌어.”
“……일단 올라가자.”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카드를 찍자마자 나는 그를 끌어안고 입술을 비볐다. 은겸은 나를 밀쳐 내지 않았다. 한 손으로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은겸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벌린 입술 틈으로 침입하는 은겸의 혀가 짜릿했다.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기기에 몸을 싣고 은겸과 숨을 나누었다. 머리가 멍할 때까지 입술을 겹쳤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은겸이 발정기 내내 내게 주었던, 정신없이 쏟아지는 쾌감이 필요했다. 그걸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숨 막히는 고통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으로 걸어가는 짧은 사이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찰나가 못 견디게 길었다. 신발도 벗지 않고 나는 은겸을 벽으로 떠밀었다.
“원재야.”
은겸이 고개를 저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의 외투를 벗기고 넥타이의 매듭을 끌어당겼다. 느슨하게 풀리는 넥타이 아래로 드러난 셔츠 위에 손을 올렸다. 은겸이 내 팔을 붙들었다.
“왜 그래.”
“섹스하자니까.”
항상 먼저 덤벼들지 못해 안달이면서 오늘따라 나를 막아 세우는 은겸이 답답했다. 나는 그를 뿌리쳤다. 셔츠는 됐고, 중요한 건 아래에 있으니 바지부터 벗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벨트에 손을 가져가자 은겸이 다시 내 손목을 잡아챘다.
“너 안 서잖아. 발정기도 아니면서 왜 그래.”
“촉진제 먹고 왔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지만 그냥 지껄였다. 은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네가 어떻게 구했어.”
“상관없으니까 그냥 해.”
뒤가 찢어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냥 은겸과 몸을 겹치면서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은겸이라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을 만큼 나를 뒤흔들어 줄 것 같았다. 나는 은겸에게 붙잡힌 채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바지 위로 은겸의 중심을 만지면서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이거 넣어 달라고.”
평소에는 조금만 자극하면 넘어왔던 주제에. 은겸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억지로 참는 기색도 아니었다. 달콤하면서 진한 체향도, 눈동자 가득 퍼지는 욕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은겸이 내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원재야. 무슨 일인데.”
“그냥 하면 안 돼?”
“나는 네 화풀이용으로 쓰는 딜도가 아니잖아. 이야기를 해 줘야 나도 알지.”
“…….”
“이대로는 너도 기분이 안 풀릴 거고. 나도 착잡하기만 할 거야. 그러니까 원재야. 말로 하자, 우리. 무슨 일이야.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처 입은 마음을 감싸는 듯했다. 부글거렸던 감정이 식으면서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그대로 은겸에게 몸을 기댔다. 나를 품에 안은 은겸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얘기해. 내가 다 들어 줄게.”
내내 나를 괴롭혔던 울분이 서러움으로 변했다. 숨을 고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다정한 손길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외투와 가방을 건네받은 은겸이 침실로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따스한 공기가 그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내 집처럼 익숙한 공간의 모든 것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을, 은겸과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곁을 지키는 공간을 내 마음대로 더럽힐 뻔했다.
나 자신의 한심함에 치가 떨렸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구로서 이용하려 했다니. 은겸은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결국은 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밖으로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 밑바닥에 도사린 진짜 모습은 남들과 똑같이 시커멨다.
그 모습을 은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겸에게만은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먼저 밀어붙여서 바닥을 드러내 버렸다. 그것도 은겸의 잘못이라곤 전혀 없는, 다른 사람과의 문제 때문에.
“미안하다.”
“아니야. 꿀물 마실래?”
은겸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로 내 의사를 묻곤 부엌으로 향했다.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내가 마실 꿀물을 준비하는 은겸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곧 거실로 돌아온 은겸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은겸이 건넨 따끈따끈한 컵을 쥐고 손을 녹였다. 내가 이토록 다정한 은겸의 위로를 받아들일 자격이 있을까.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댔다. 달콤한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르자 어느 정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갑갑한 속이 모두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은겸을 돌아보았다.
“담배 있어?”
은겸은 ‘너 안 피우잖아’라거나, ‘끊은 거 아니었어?’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의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 주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의 맛은 썼다. 조금 전까지 꿀물을 마시고 있던 혀라서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꾹 참고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얼마 안 가 현기증이 일면서 눈앞이 핑 돌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자 은겸이 내게서 담배를 빼앗았다.
“무리하지 마.”
“떨어졌어.”
“응?”
불쑥 꺼낸 말에 은겸이 되물었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뒤덮고 마른세수를 했다.
“진급. 안 시켜 준대.”
“……거의 확정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었지. 나 혼자 그렇게 믿고 떠들었지. 입술 끝이 저절로 비틀렸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두가 시치미를 뗄 때 나는 혼자서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 멍청한 소리를 은겸에게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고.
은겸도 나만큼이나 좋은 소식을 기다렸을 텐데.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굴을 가린 채로 아침부터 퇴근 시간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울컥울컥 목이 막혀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설명이 불친절했을 텐데도 은겸은 말없이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미안해. 그런 식으로 화풀이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은겸에게 사과를 하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은겸이 내 손등을 감쌌다. 따뜻한 손가락이 살갗을 어루만졌다.
“그 사람들은 네 진가를 모르나 보다.”
“…….”
“너를 너로 보지 않고 곰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라서.”
그 순간 온종일 막혔던 속이 훤히 트였다. 그 어떤 위로보다 이 말이 먼저 듣고 싶었다. 나는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기다렸던 진급이 미뤄진 것도,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효영과 얽힌 것도 용납하기 어려웠지만. 나를 제일 화나게 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과장님은 내 업무 태도를 지적하거나 진급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곰이라서, 곰의 이미지가 별로라서 안 된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나는 곰이지만, 그렇다고 곰인 게 전부는 아닌데. 나는 곰이기 이전에 나인데.
은겸이 천천히 내 손을 끌어 내렸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고 여기면 될 텐데. 왜 전부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 가지 선입관에만 기준을 두고 말이야.”
비로소 쓰라렸던 상처에 약이 발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진급이 안 되더라도 이런 식일 줄은 몰랐어.”
“그랬겠지. 말도 안 되는 이유니까.”
“부장님이나 과장님한테는 고작 대리 자리 놓쳤다고 난리 치는 것처럼 보이겠지.”
“남의 시선으로 네 감정을 판단하지 마. 힘든 건 그냥 힘든 거야.”
“왜, 왜 과장님 말만 믿었는지 모르겠어. 미련하게 그러지 말고 나도 효영이처럼 진작에…….”
진작에 내가 곰답지 않은 곰이라고 상사들을 찾아가 어필이라도 해야 했나. 그러니 잘 좀 부탁드린다며 비위를 맞추면서. 꽉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재야.”
가만히 내 이름을 부른 은겸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너 자신을, 타인을 의심 없이 믿는 건 정말 강한 사람만 할 수 있어.”
“…….”
“내가 보증할게. 너는 미련한 게 아니라 강한 거야.”
빛나는 노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겸은 내가 느끼는 패배감과 자조를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었다. 태생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수없이 해 봤을 테니까. 억지로 그를 따라 웃어 보려 해도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입꼬리만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은겸이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매만졌다.
“촉진제는 어떻게 구했어.”
그러고 보니 그런 거짓말을 했었지. 침묵으로 답하자 은겸이 눈썹을 찡그렸다.
“사실은 안 먹었지?”
“…….”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말자. 너 상처 입히기 싫다.”
“……미안해.”
몇 번째인지 모를 사과를 웅얼거렸다. 입술에서 손을 뗀 은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은 먹었어?”
“생각 없어.”
“그래. 고생 많았어, 오늘도.”
손을 내민 은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만약 은겸이 없었다면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았을까. 아마 또 혼자 술이나 마시다가 사고를 치고 후회했겠지.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이 다정한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자고 가도 될까.”
“당연하지.”
“오늘 밤만 말고, 내일도…….”
“기분 풀릴 때까지 있다 가.”
뒤이어 들린 말에 목이 메었다.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은겸의 앞에서는 멋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는데. 형편없는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은겸에게 상처를 줄 뻔했다. 그랬는데도 은겸은 옆을 채우면서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런 은겸이 고마워서, 그래서 더 마음이 울컥거렸다. 나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속이 너무 쓰렸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과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월차를 신청했다. 이런 식의 돌발적인 휴가는 처음이었다. 항상 일을 우선시했고, 월차는 반드시 출근해서 신청하라는 규칙을 지켰기에.
하지만 한 번쯤은 나도 막무가내로 굴고 싶었다.
과장님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마음 잘 추스르고 월요일에는 꼭 출근하라는 말뿐이었다. 휴가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는지 9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회사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연이어 날아왔다. 힘내시라는 상투적인 표현부터 엉엉 우는 이모티콘에, 보고 싶다는 말까지 있었다. 회신을 안 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았기에 월요일에 보자는 답을 일괄적으로 전송했다.
은겸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자신의 출근 준비에 더불어 나까지 챙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부엌에서 떠나지 않는 그를 쫓아내고 나는 두유와 시리얼을 꺼냈다.
“이거면 충분해.”
“샐러드라도 만들어 줄게.”
“됐으니까 회사나 가.”
아무리 떠밀어도 은겸은 막무가내였다. 기어이 내가 아침을 먹는 모습을 다 보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에야 회사에 갈 채비를 했다.
“일찍 퇴근할 테니까 기다려.”
“응.”
“심심하면 전화해도 되고.”
“알아서 놀게.”
“이따 저녁 나가서 먹을까?”
“집에서 먹고 싶은데.”
“알았어. 그럼 바로 집으로 올게.”
은겸은 계속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출근이 늦은 편이라 실질적으로 오래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짧은 시간이 걱정되는 듯했다. 점심 잘 챙겨 먹으라는 신신당부를 마지막으로 은겸이 외투를 챙겼다.
멀끔한 차림새로 변한 그를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구두를 신은 은겸이 나를 돌아보며 팔을 벌렸다.
“다녀올게.”
“다녀와.”
나는 순순히 은겸의 품에 가서 안겼다. 그러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밤을 함께 보내고, 바쁜 아침도 같이 맞은 뒤 이제는 잠시 헤어질 시간. 포옹으로 대신하는 작별 인사가 오늘따라 특별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너랑 결혼한 것 같아.”
중얼거리는 은겸의 말에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내 감상도 비슷했다. 둘이서 노닥거리거나 함께 출근한 적은 많았어도, 은겸의 출근길을 배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치 한 집에서 동거하며 서로의 곁을 채우는 배우자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조금 뻗친 뒷머리를 꾹꾹 눌렀다. 수트 차림인 은겸의 앞에서 편한 일상복에 부스스한 머리로 서 있자니 부끄러웠다.
은겸이 내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월요일에는 함께 출근하자.”
“응.”
“좋다, 이런 거. 오랜만이야.”
몽글몽글 부드러워졌던 마음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막연한 내 상상과 달리, 은겸은 정확한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록 길게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을 한때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은겸의 기억이 기껍지 않았다. 저절로 목소리가 무뚝뚝해졌다.
“나는 이런 게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
아, 짧게 내뱉은 은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내가 실수했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를 받을 일까지는 아니었다. 어차피 은겸에게 배우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말을 몇 번 듣긴 했다. 추석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게 오랜만이라는 식의. 이전에는 괜찮았던 것들이 오늘따라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껄끄럽게 다가왔을 뿐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라고 손을 저을 때였다.
“지금은 원재 너 외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믿어 줘.”
언젠가 내게 들려주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하며 은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네가 질투해 주니까 고맙다.”
아. 이번에는 내 입에서 짧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늘따라 은겸이 하는 말이 왜 이렇게 거슬렸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과 달콤한 시간을 보냈을 은겸의 과거가 싫었다. 그 과거를 돌아보는 은겸도 싫었다. 그냥 나만 바라보면 좋겠다고, 현재의 나에게만 집중하면 좋겠다고 욕심을 부리느라 그런 거였다.
이런 게 질투였구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선을 피하며 나는 은겸을 떠밀었다.
“출근이나 해.”
“내 말 믿어 주면 갈게.”
“믿어.”
“대답이 너무 빠른데?”
“진짜로 믿으니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과거야 어떻더라도 지금의 은겸은 나만 바라볼 테니까. 그건 단순히 연인이라서 믿어 주는 게 아닌, 오래 된 확신이었다. 짧게 답하며 나는 몸을 뒤로 젖혔다. 나를 쫓아온 은겸이 내 뺨을 감쌌다.
“출근하기 싫다.”
“얼른 가.”
“너랑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고 싶어.”
“갔다 와서 해.”
그러는 나도 은겸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큼지막한 손바닥에 뺨을 두어 번 비비곤 뒤로 물러났다. 부족한가 싶어서 손도 흔들어 주자 은겸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지간히 가기 싫은지 그의 긴 꼬리가 기운 없이 흔들렸다. 덩치는 커다랗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떼를 쓰는 아이처럼 구는 게 귀여웠다.
물론 그 아이의 애교에 무심코 넘어가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안 가면 월요일까지 스킨십 금지야.”
단호하게 말하자 흠칫 굳은 은겸이 눈을 크게 떴다.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나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섰다. 은겸이 조금 전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나도 휴가 내면 안 될까?”
“넌 출근해.”
“그럼 한 시간만 늦게 갈게.”
“다른 건 몰라도 일은 성실하게 해.”
한숨을 쉰 은겸이 마침내 포기 선언을 했다.
“다녀올게.”
“응.”
두 번째 인사를 건넨 은겸은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갔다. 은겸마저 가 버리고 나자 집 안이 휑했다. 나는 기울어졌던 몸을 바로 세웠다.
“하아.”
갑자기 주어진 휴식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
은겸을 보내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조금 더 눈을 붙이고 싶었다. 평상시에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시간이다 보니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들었다.
얕은 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의 진동 때문에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으로 화면을 확인하자 강사에게서 온 메일 알림이 보였다. 내가 휴가인 걸 모르고 업무 메일을 보낸 듯했다. 진작에 무음으로 돌려 놓고 잘걸. 후회하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날아가 버린 잠기운을 끌어모으며 한참을 더 뒤척였다. 하지만 한번 깬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기만 했다. 결국 나는 하품을 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섰다. 어느새 11시가 넘어 있었다.
조금 이른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다. 먹기 전, 사진을 찍어 은겸에게 메시지와 함께 전송했다.
점심 먹을 거야.
은겸이 한숨 짓는 사자 이모티콘으로 답변했다. 내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뭐가 문제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문장을 덧붙였다.
달걀도 넣었어.
달걀이 문제가 아니라…….
두 개 넣었어.
잘했어.
이번에는 엄지를 치켜든 사자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싱겁긴. 피식 웃으며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잘 삶아진 면발을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은겸의 메시지가 연달아 날아왔다.
저녁에는 비싸고 맛있는 거 시켜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또 덮어놓고 내 입맛에만 맞추려는 그의 질문이 못마땅했다. 그보다는 은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이를테면 고기나, 고기, 고기 같은 것들.
‘괜찮은 메뉴 뭐 있었던 것 같은데.’
은겸이 좋아할 만한 고기의 종류를 이것저것 떠올린 순간, 기시감이 일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었다. 은겸과 같이 가려고 식당을 찾아보았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그걸 활용하면 되겠다 싶었다. 따로 적어 둔 리스트를 찾으려다가 나는 손가락을 멈추었다. 내가 식당의 목록을 만든 이유가 뒤늦게 기억났다.
만약 모든 게 다 잘 돌아갔다면 어제 은겸과 그중 한 곳을 들렀다가 즐거운 밤을 보내고 오늘은 평소처럼 출근했을 것이다. 이렇게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을 일도 없었을 테고.
……너 퇴근하면 얘기해.
대답을 피하고 핸드폰을 껐다. 순식간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기껏 끓인 라면을 몇 입 먹지 못하고 나는 젓가락을 놓았다. 은겸이 걱정할 것 같아서 달걀은 전부 건져 먹었지만 나머지는 도저히 입에 댈 수 없었다.
오후 내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TV 채널을 돌려 봐도, 책을 펼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 업무와 관련된 연락이 올 것 같아 핸드폰에는 손도 대기 싫었다. 그렇다고 지나가 버린 일을 후회하고 남을 책망하기는 싫었다. 어차피 회사 생각을 떨쳐 낼 수 없다면, 차라리 미래 계획이나 세우자 싶었다. 거실 소파에 누워서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앞으로 이 회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모든 질문에 회의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10년 넘게 차장 승진을 하지 못했다는 과장님의 신세도, 대놓고 내게 무안을 주던 부장님의 태도도, 곰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위쪽 분들의 사고방식도 무엇 하나 긍정적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을 바꿀 수 없고 나 역시 지금과 크게 달라질 수 없다면 차라리 다른 선택지를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회사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
쉽지 않은 고민이었다. 이 선택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알 수 없기에 신중해야만 했다. 충동적으로 판단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 이런저런 가정을 세워 보다가 나는 몸을 일으켰다. 홀로 결정하기보다 믿을 만한 조언자와 상의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집에 오면 상담 좀 해 줘.
은겸은 내 상담 신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일하고 돌아와 피곤할 텐데도 그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퇴근하자마자 외투만 벗곤 곧장 옆에 와서 앉았다. 그를 위해 나는 최대한 짧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회사 옮길까.”
은겸의 첫 마디는 꽤 긍정적이었다.
“나는 이직도 나쁘지 않다고 봐.”
“이 업계가 좀 좁거든. 안 좋게 소문나면 경력 이직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소문 날 게 있을까? 그리고 원재야. 꼭 같은 업계로만 갈 필요는 없잖아.”
잠시 뜸을 들인 은겸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기분 나쁠 것 같아서 말 안 했는데. 지금 연봉의 두 배로 내 회사에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거. 정말이야.”
“…….”
“물론 너희 회사와는 사업 영역이 다르니까 다른 업무를 맡게 될 거고. 너만 원한다면 최대한 일하기 편한 쪽으로 자리를 만들어 볼게.”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닌 척하고 싶어도 솔깃한 제안이었다. 높은 연봉에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리, 내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줄 대표까지.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인맥으로 취직하는 건 싫다.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지금 이것도 전부 내 힘으로 이룬 경력인데, 그걸 내 손으로 버릴 순 없잖아.”
“응. 알아.”
“너한테 너무 의지하는 것도 미안하고.”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네가 끌리지 않는다면 없던 이야기로 생각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꺼낸 말인지 은겸은 선선히 물러섰다. 처음부터 내가 거절할 거라고 예상한 듯했다.
그렇다면 내 결론이 무엇일지도 알고 있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하는 일도, 지금 회사 사람들도 좋아해. 다른 회사에 들어간다고 거긴 뭐가 다를 거라는 기대도 없어.”
“그럼 굳이 회사를 옮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네.”
어렴풋했던 결심이 은겸과의 대화를 통해 단단해졌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도망치는 건 더 싫다.”
앞으로도 좋은 소식은 들리기 어려울 것이다. 기대할 일도 무엇 하나 없을 것이고. 내가 떠난다고, 혹은 남는다고 회사는 변하지 않는다. 지금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일상이 앞으로도 나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등지고 훌훌 떠날 수는 없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는 것. 그건 나를,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선택이었다. 설령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 어떤 극적인 결말도 찾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택한 일에 끝까지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래도 원재야. 누구나 마음 놓고 달아날 곳은 하나 정도 있어야 해. 너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마.”
나직이 중얼거린 은겸이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너 혼자 버티기 어려울 때는 내게 와도 돼.”
“……응.”
“언제든 너한테는 내가 있다는 걸 꼭 기억해 줘.”
맞닿은 살을 통해 퍼지는 온기가 따스했다. 나를 들여다보는 은겸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나는 은겸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억지웃음이 아닌, 진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바닥이 없는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게, 발을 디디고 서라며 기꺼이 등을 내준 연인이 손을 붙잡고 있었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곰은 달을 그린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