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열아홉, 겨울 (15/21)

11. 열아홉, 겨울

오랜만에 가는 학교는 낯설었다. 이명에게 학교란 언제나 낯설었지만, 이번에는 한 달 만에 가는 것이라 유독 그랬다.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마지막에 등교했을 땐 가벼운 춘추복 차림이었는데 어느새 재킷과 코트까지 갖춰 입어야 하는 겨울이었다.

‘축하한다, 명아. 이제 네가 나를 가르쳐도 되겠어.’

이번에 이명은 국내 대회에서 우승하며 5단으로 승단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드나들던 바둑 도장의 부원장인 김 사범과 동급이었다. 비록 그와 겨뤄서 지지 않게 된 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이명의 선생이었고 이명은 그의 제자였다.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이명은 달라지는 것들과 달라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며 걸었다. 한 달만 더 다니면 고등학교도 졸업이다. 다른 애들은 성인이 되어 이전까지 금지되었던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하고, 알바도 하고, 대학에 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단조로워지리라.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무수한 길이 있는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격자무늬 세상이 그의 전부가 될 것이다.

프로 바둑의 세계는 정글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명은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처럼 바둑돌로 세상을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낙관하지도 않았지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아홉 살짜리 이명은 바둑판에 361개의 교차점이 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특히 화점이 동그랗고 검은 원으로 강조되어 있는 것을 좋아해서, 어릴 때는 그 위에 포석 까는 걸 유난히 즐겼다. 프로 선수로 입단한 지 4년이 된 지금도 이명은 바둑을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은사인 임 사범은 그래서 이명이 ‘그렇게 약한 멘탈’로도 잘 버티는 것 같다고 했다. 아직도 바둑을 좋아하기 때문에.

걷다 보니 벌써 정문 앞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발바닥 아래 모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고서 달려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러닝화를 벗어 거꾸로 잡고 공중에 흔들자 삽으로 퍼 넣은 것 같은 양의 모래가 바닥으로 후두두 쏟아졌다.

‘신발이 문젠가, 아니면 내가 이상하게 걷는 건가.’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고서 괜히 앞코를 땅에 툭툭 찍어 내렸다. 죄 없는 실내화에 살짝 화풀이하기는 했지만, 교문을 통과하면서부터 들뜬 기분은 그대로였다. 이래 봬도 그는 한 달 만의 등교를 몹시 고대하고 있었다.

엄마는 어차피 수업 일수도 다 채웠으니 이제부터 학교에 가지 말고 내년에 있을 국제 대회를 준비하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며 책가방을 어깨에 멨다.

‘명이 너, 언제부터 학교 가는 걸 그렇게 좋아했어?’

‘그런 거라기보단…… 수능도 끝났으니 수업 시간에 영화 틀어 줄 것 같아서요.’

‘영화라면 집에서 보면 되잖아?’

엄마에게 왜 학교에 가고 싶은지 설명하기란 아주 어려웠다.

이명은 학교 건물이 싫지 않았다. 아주 커다랗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는 늘 교실이 무척 넓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어폰을 끼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비록 사람들 사이에 있더라도 혼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긴 복도를 걸을 때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목을 스치면 소름이 돋으면서도 시원할 때가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애들은 수업하지 말자고 선생을 졸라 대곤 했다. 선생이 못 이기는 척 영화를 틀어 줄 때마다 이명은 마음속으로 행복해했다. 자습 시간에 몰래 엎드려 자는 것도 은근히 즐기는 편이었다. 잠기운에 나른해지는 기분도, 항복의 표시로 책에 볼을 댔을 때 맡을 수 있는 눅눅한 종이 냄새도 좋아했다. 지금처럼 음악을 들으며 층계 위를 걸을 때, 수많은 발걸음에 마모된 나무 바닥 위로 실내화가 스르르 미끄러지는 느낌도 싫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T자 주차? 그건 강사님이 알려 주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우리 형이 그거 어렵댔는데.”

교실에 입장하는 순간은 언제나 긴장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3인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등교하는 것이다 보니 더욱 용기가 필요했다.

이명은 누가 인사라도 할까 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어차피 아무도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으니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음, 아닌데. 별로 안 어려워.”

교실 뒤편에선 무슨 게임을 하는지 애들 몇 명이 실내화를 벗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명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서 걸으며 교실 중앙을 곁눈질했다. 밤톨 같은 뒤통수는 한 달 전과 변함이 없었다. 그동안 머리가 전혀 길지 않은 건 아닐 텐데, 그새 또 잘랐나 보다.

‘귀여워.’

양쪽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댄 소년은 나른한 표범 같아 보였다.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인 어린 표범.

한선호는 옆자리 아이의 말을 들으며 살짝 웃었다. 이명은 그 옆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아침마다 한선호와 잡담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 애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이명은 배낭을 빼서 의자에 걸고 자리에 앉아 관심도 없는 시간표를 열심히 확인했다. 미리 책을 꺼내 놓느라 부산한 동안에도 신경은 오른쪽 뒤편에 쏠려 있었다.

“봐봐. 여기가 주차 공간이잖아. 차가 이쪽에서 들어간다고 치자…….”

‘운전 얘긴가……. 나도 설명 듣고 싶어.’

교실이 워낙 시끄럽다 보니 한선호의 목소리가 퍼져서 들렸다. 이명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연기하며 일어섰다.

사물함 찬스!

그는 몸을 돌리면서 한선호가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는 모습을 스치듯이 보았다. 정면으로 자세히 보는 건 금물이었다. 그러면 관심이 온통 그쪽에 가 있다는 게 들통 날 테니까.

이명은 교실 뒤편으로 걸으며 신경 쓰이는 자리를 더욱 자세히 곁눈질했다. 한동안 노트를 보며 그림 그리던 한선호가 시선을 들어 짝과 눈을 마주쳤다.

“차폭이 있으니까 살짝 오른쪽으로 틀어 줘야 후면이 안 부딪히고 들어갈 수 있잖아.”

다시 그의 눈동자가 노트로 향하며 펜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이명은 물건도 몇 가지 없는 사물함을 뒤지는 동시에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어디서 틀어야 할지 어떻게 알아?”

한선호는 펜으로 종이를 툭툭 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왼쪽 사이드 미러로 여기 코너를 봐야지.”

“아나, 빡대가린가? 존나 모르겠어.”

“아니야. 직접 해 보면 훨씬 쉬워.”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며 옆얼굴에 귀여운 웃음이 번졌다. 이명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런데 그쪽을 엿보던 게 이명 혼자만은 아니었나 보다. 어느새 운전면허 시험에 관심 있는 아이들 대여섯이 한선호의 주변으로 몰려들며 그를 에워쌌다.

“선호, 그럼 너 도로도 나가 봤어?”

“응. 주말에 엄마 옆에 태우고 일산 가 봤어.”

“어때? 시험이랑 많이 달라?”

“비슷해. 내비만 잘 보면 돼.”

“나도 엄마가 면허 따라는데, 어느 학원이 좋냐?”

아이들은 운전에 관해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는데, 한 선생은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운전면허 학원의 가격과 장단점, 도로 주행 시험 요령, 시험과 실전의 차이점, 차량 종류, 가솔린과 디젤의 차이까지 주제가 뻗어 나갔을 때 종이 쳤다. 아이들이 투덜거리며 제각각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물함 앞에 한참 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이명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수업을 듣는 것보다 한선호의 이야기를 1시간 동안 듣는 게 훨씬 유익할 것 같았다. 그저 사심 때문만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공부도 잘하고 설명도 잘하는 완벽한 반장이었으니까.

자리로 돌아온 이명은 손바닥에 턱을 괴고 창밖을 보았다. 누군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게 아쉬웠지만 괜찮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들을 수 있으니까.

“차렷…….”

‘아, 오랜만에 들으니 좋다.’

“선생님께 경례.”

그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이명은 선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남몰래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