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열여덟, 가을 (14/21)

10. 열여덟, 가을

버스가 펜션에 도착했을 땐 저녁 9시가 지나 있었다. 첫날 일정은 수목원 한 군데와 저녁 식사가 다였지만 이동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이명은 진작부터 녹초가 되어 있었다. 버스, 비행기, 버스, 버스, 버스. 이쯤 되면 여행지가 제주도가 아니라 버스인 것 같았다.

버스가 주차장 앞에 정차하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담임이 일어나서 아이들을 향해 섰다. 그는 첫째 줄 등받이에 팔꿈치를 기대더니 차량에 비치된 관광용 마이크를 들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라고 말하는 동안 마이크가 귀를 찢는 기계음을 내며 그때까지 졸고 있던 아이들을 깨웠다.

“야, 다 일어나! 쟤 좀 깨워라.”

하품하거나 기지개 켤 시간이 잠시 주어졌다. 담임은 귀찮다는 듯 주머니에서 구겨진 A4 용지를 꺼내곤 애들이 내는 우두둑우두둑 뼈 꺾는 소리를 배경으로 내일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림 공원, 천지연 폭포, 중식, 가상현실 박물관, 우주 과학 테마파크, 석식……. 모두 그리 흥미롭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재미있겠지?’

이명은 품에 껴안은 배낭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를 설득하고 설득해서 겨우 허락을 받아 낸 첫 수학여행이었다. 달력에 표시해 두고 손꼽아 기다렸고 전날에는 설레서 잠도 설쳤다. 이동만 하다 끝난 첫날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아직 기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숙소 들어가서는 자유 시간인데…….”

“와아아아아악!”

“시끄러워!”

힘없고 졸려 보이던 아이들은 ‘자유 시간’이란 말에 쌩쌩함을 되찾았다. 일정상 취침할 일만 남았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이명은 아이들이 잠자는 시간에 열광하는 게 좀 의아했다.

“들어가서 씻고 조용히 잠만 잔다. 알았어?”

“네에!”

“경고했다, 어?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는 놈 가만 안 둬.”

“네에에에에엣!”

아무래도 5반 아이들은 이명만 모르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눈치였다. 모른 척 넘어가 준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담임까지 포함해서.

담임은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방은 두 개로 나눠서 잔다. 1, 2조는 B동 203호에 들어가고 반장이 인솔해.”

그가 맨 앞자리에 앉은 반장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동그란 뒤통수가 의자 위로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이명은 매우 운 좋게도 반장과 같은 1조였다. 학교를 한동안 결석하다 출석했을 때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3, 4조는 B동 204호. 부반장이 책임지고 인솔하고.”

담임은 부반장을 향해 손짓하더니 하품을 크게 했다.

“10시에 점호할 거니까 취침 준비 마치고 떠들지 말고 있어.”

“네!”

40인승 버스의 문이 열리자 담임이 가장 먼저 내렸다. 앞쪽부터 아이들이 차례차례 내리는 동안 이명은 앉아 있었다.

‘이 자리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다.’

같이 앉을 친구가 없는 이명에게 버스를 탈 때마다 자리가 바뀐다는 건 은근한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오늘은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은 운 좋게 혼자 앉거나 옆에 반장이 앉았지만 내일은 모르는 거니까…….

이명은 창문 위에 입김을 불었다. 소매를 끌어당겨 쓱쓱 문지르자 어둑한 배경이 나타났다. 밤의 밑자락은 검은색이었지만 윗부분은 진한 보랏빛이었다. 이명은 유난히 밝은 달 테두리를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고서 버스에서 내렸다.

숙소는 여러 동으로 된 높은 흰색 건물이었다. 멋스럽기보다는 단순했고 그만하면 깨끗해 보였다. 건물끼리 비슷하게 생겼으며 조약돌 길로 연결돼 있었다. 조장들은 조원들을 불러 모아 인원을 체크하고서 B동으로 향했다. C동 앞에서도 한 학급이 모여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뒤에서도 모르는 아이들 한 떼가 걸어왔다.

‘정말 정신없다.’

이명에게는 1조에 배정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걸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어도 조장을 찾기가 쉬웠으니까. 한선호는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장신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그는 교복이 잘 어울리는 만큼 사복 차림도 근사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도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모델처럼 보였다.

“방에 짐 풀고서 반장, 그리고 명이는 101호로 와.”

“네.”

담임은 B동 앞에서 열쇠를 반장과 부반장에게 전달하고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5반 아이들은 짐이 든 가방을 하나씩 메고 시시덕거리면서 건물로 들어갔다.

내부는 외부보다 훨씬 허름했다. 천장에는 깨지거나 갈라진 흔적이 있었고 벽에는 다리 긴 벌레가 벽지 무늬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형광등이 세 개에 하나꼴로 나가 있어서 조명이 침침했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곳을 삼십여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려니 보통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명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파도와도 같은 인파에 휩쓸려 얼결에 돌계단을 올랐다.

“5반 1, 2조 이쪽으로!”

2층에 도착하자마자 한선호가 크게 소리쳤다. 그가 앞장서자 아이들이 아기 새들처럼 뒤꽁무니를 졸졸 따랐다. 이명은 그중 가장 끄트머리에서 반장의 뒤통수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걸었다. 반장이 203호의 문을 열자 반 전체가 들어가도 될 만큼 넓은 공간이 나왔다.

“와, 존나 넓어.”

“이날만을 기다렸다!”

남학생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폴짝폴짝 날뛰며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익룡이 연상되는 고음을 내며 장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이명만 빼고 거의 모든 애들이 극도의 흥분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한 아이가 서랍장을 열자 다른 녀석들이 이불과 요를 마구 끄집어내 바닥에 던졌다.

“이불 개좋은데?”

“우리 집 거보다 부들부들함.”

깨끗하게 비어 있던 바닥이 순식간에 아무렇게나 펼친 이불로 가득 찼다.

‘자리……! 어떡하지?’

자리가 어떻게 배정되는지 내심 신경 쓰였는데 선착순이었나 보다. 이명은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머리는 당장 뛰어들어 가서 이불을 하나 낚아채라고 명령하는데 몸은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에 메고 있던 스포츠 백을 안으로 휙 던졌다. 무심코 옆을 보았더니 한선호가 팔짱을 낀 채로 방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반장, 반장! 담탱한테 갈 거지? 언제 잘 건지 떠봐.”

“반장아, 이 방 넓은데 우리 그냥 다 여기서 자면 안 됨?”

“혹시 소화제 있어?”

온갖 문의 사항이 빗발쳤다. 버스에 핸드폰을 놓고 내렸다는 녀석부터 충전기를 그새 잃어버렸다는 녀석까지, 일반적으로 시답잖고 개인적인 사항들이었다. 반장이 총대 메고 담임과 담판을 지으러 가기라도 한다는 듯 진지하게 응원하는 녀석도 있었다. 한선호는 문 앞에 서서 어떤 건 웃어넘기고 어떤 건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다 문득 이명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가방 내려놔. 담임 선생님이 짐 놓고 오라고 하셨잖아.”

이명은 황급히 배낭을 풀어 벽면에 조심스럽게 세워 놓았다.

“가자.”

눈이 마주쳤지만 잠깐이었다. 한선호는 고개를 휙 돌리고서 캄캄한 복도 위를 앞장서서 걸었다. 이명은 문을 닫고 그를 뒤따랐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반 아이들이 흥분해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203호와 충분히 멀어져서일까, 아니면 너무 설레서 아무것도 안 들린다고 착각하는 걸까.

천장에 붙은 형광등 하나가 깜빡깜빡 점멸했다. 미미한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걸 제외하면 복도엔 사선으로 들어온 월광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 폭군이 색을 모조리 빼앗아 버린 것처럼 세상에는 온통 창백한 회색만 남았다.

소음도 색채도 없는 복도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이명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와 마주 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웠다.

온 힘을 다해 달리던 소년의 등. 친구들과 축구하던 소년의 등. 늘 앞장서는 소년의 등. 언젠가 이명이 곤란했을 때 손을 잡아 주었던 소년의 등.

“명이야, 오고 있…….”

한선호가 고개를 휙 돌렸다. 넓은 등에 쏟아지던 광선이 뺨과 목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TV에서 본 액상 초콜릿 광고에서처럼 물결무늬가 남을 것만 같았다.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명은 자신이 한참 전에 걸음을 멈추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한선호의 발치에서부터 길게 진 그림자가 흰 러닝화 앞코에 닿아 있었다.

“아…….”

잿빛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내뱉고 싶다는 듯이. 그러나 그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빛에 흠뻑 젖은 소년이 이명을 바라보았다. 이명은 무채색의 아름다운 소년과 아주 오랫동안 시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니, 사실은 찰나에 불과했는데 그 순간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빚어낸 착각이었는지도 몰랐다. 심장 박동을 세기에는 너무 빨랐고 벽에는 시계가 없었다. 그곳에는 그들과 창백한 회색뿐이었다.

고요한 무중력 상태를 깨 버린 건 웅성거리는 소음이었다. 군화를 신었나 싶을 정도로 요란한 발소리가 이명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여기다!”

복도 끝에서 머리 몇 개가 보이더니 남학생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그중 맨 앞에 있던 녀석이 손을 들고 한선호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5반도 2층이구나? 몇 호야?”

“아, 203호, 204호.”

“바로 옆이네. 술 넉넉하면 우리 좀 나눠 줘. 담임한테 다 뺏겼다.”

다른 반 반장이 문을 열자 조금 전에 본 광경의 데자뷔가 이는 듯했다. 아이들이 까악까악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뛰어든 것이다. 조금 질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명은 다시 한선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한선호가 턱짓으로 층계를 가리키고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이명은 그를 따랐다.

101호는 숙소의 임시 교무실 같은 역할이었다. 비교적 작은 방에는 얼굴이 눈에 익은 남자 교사들이 모여 있었다. 진짜 교무실과의 차이점이라면 그들이 애들과 마찬가지로 드러누워 있다는 것이었지만.

“애들 술 가져왔지?”

담임은 한선호를 보자마자 심드렁하게 물었다. 한선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마셔. 알겠어?”

“…….”

“웬만큼 눈감아 줄 테니까,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는 새끼 없도록 하란 거야. 매 가져온 거 알지? 꺼낼 일 없게 해.”

“네.”

“이따 10시 점호 잘 준비하고.”

“네. 소화제 하나만 가져갈게요, 선생님.”

담임은 방 한구석에 있던 약통에서 뭔가를 꺼내 한선호에게 던졌다. 그리고 하품을 쩍 하더니 양반다리로 고쳐 앉았다. 발가락 양말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벅벅 긁으며 이명을 보았다.

“그래, 명이는 수학여행 오니까 어때? 불편한 점은 없었어?”

이명은 그의 발가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도 중요하지만 가끔 이렇게 바람도 쐬면 좋지? 어머니께서 잘 결정하신 거야.”

“…….”

“힘든 일 있으면 바로 반장한테 말하고, 응?”

예기치 않게 들린 단어에 이명은 움찔하며 곁을 보았다. 한선호의 옆얼굴은 무표정했다.

“반장도, 명이 불편하지 않게 특별히 옆에 붙어서 잘 챙겨야 한다.”

“네.”

이렇게 특별 취급을 받기는 싫은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둘 다 가 봐.”

한선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명은 그를 따라 했다. 그들은 함께 101호에서 나왔다.

돌아가는 길도 조용했다. 이번에는 나란히,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거리였다.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차라리 한선호가 담임의 특별한 부탁에 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거나 불평하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이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몹시 신경이 쓰였다.

‘애들 말은 신경 쓰지 마. 뭘 모르고 하는 말이잖아. 너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께 하교하던 날,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한선호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경멸하는 줄 알았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체육 시간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수업에 마음대로 빠져도 혼나지 않는 이명. 특별 취급받는 재수 없는 이명.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달랐다.

‘네가 잘해 주니까 자꾸 욕심이 나…….’

한선호는 원래 책임감이 강하고 친절한 아이일 뿐인데,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명의 기분은 끓는점과 어는점을 오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가도 어떨 때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가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행복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대화하고 싶어졌고, 같이 걷고 싶어졌고, 영화를 함께 보고 싶어졌고, 나란히 달리고 싶어졌고, 이제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명의 욕심은 밑바닥이 없는 구덩이 같아서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층계를 오르고 다른 반 애들이 묵는 방을 지나 긴 복도를 통과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끌벅적한 소음의 낌새가 나더니 203호가 보일 때쯤엔 문을 닫아 놨는데도 애들이 빽빽거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와 귀를 찔렀다. 한선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문손잡이를 쥐었다.

“으어어억! 어억!”

“어! 어휴, 반장이네. 간 떨어지는 줄.”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던 아이가 요란하게 죽는 시늉을 했다. 분명히 203호와 204호에 반씩 나눠서 자도록 조까지 짜 주었건만, 아이들은 왜인지 모르게 죄다 203호에 와서 이불을 펴 놓았다. 넓은 방은 이제 거의 발 디딜 데가 없었다.

“4반 애들은 다 뺏겼다는데.”

한선호가 문을 닫으며 말하자 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올려놓으며 지나가듯이 중얼거렸다.

“우린 마셔도 된대.”

그러자 고막을 찢고도 남을 함성이 울렸다. ‘월드컵 우승’ 같은 헤드라인을 붙이면 어울릴 만한 장면이었다.

“대신 내일 못 일어나면 알아서 하래.”

덧붙인 말은 연이은 환호에 파묻혔다. 그 와중에 한 녀석이 소주를 생수병에 옮겨 담고 천으로 감싼 뒤 테이프를 박박 붙여 바지통에 숨겨 왔는데, 왜 검사를 안 하냐면서 억울해했다. 이명은 뒤늦게 그들이 술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는데…….’

덜컥 걱정이 들었다. 아무 데서나 잘 자는 편이기는 해도 모르는 애들 사이에서 자기는 껄끄러웠다. 아마 그 애들도 이명이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애들처럼 진작 뛰어들어 가 구석 자리를 잡았어야 하는데. 네 귀퉁이와 세 변은 진작 점거되었고 남은 자리는 요가 들어가지 않을 만한, 비뚤어진 공간뿐이었다.

‘차라리 옆방에 가서 잘까?’

오는 길에 슬쩍 보았던 204호는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명은 203호에서 자야 하는 1조 소속이었다. 함부로 방을 바꿔도 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디서 잘 거야, 명이야?”

귀 따가운 소음을 비집고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제게 말을 건 적이 없다는 듯 태연한 한선호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 나는…….”

“창가?”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명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응? 응.”

한선호는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서랍장에서 요를 꺼내 품에 안더니, 창가가 있는 오른쪽 벽면으로 향했다. 귀퉁이에는 이미 남학생 한 명이 자리를 깔고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냐?”

한선호는 발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쳤다. 그 애가 깍깍 웃으며 몸을 뒤집었다.

“저리 가, 반장!”

“네가 저리 가. 저기 왼쪽으로.”

“아, 왜? 내 자리야!”

“너 3조잖아. 여기 네 자리가 어디 있냐?”

남학생이 킬킬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명은 자연스럽게 친구의 요를 옆으로 밀어내는 한선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감쪽같이 자리를 빼앗다니,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선호는 구석에 요를 가지런히 깔고서 이불과 베개를 갖다 놓았다. 그러고선 문가에 선 이명에게 손짓했다.

구경에 정신이 팔렸던 이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신발을 벗었다. 운동화를 집어 들어 신발장에 올려놓고, 남의 이불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이명이 비틀거리며 요를 살짝 밟았을 때 누군가가 눈을 부라리며 신경질을 냈다.

“아이씨, 뭐야?”

“……미안.”

다른 애들이 자리를 턱턱 밟고 다녀도 웃어넘겼으면서, 그에게만 까칠하게 굴었다. 이런 취급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데도 이명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그에게 무관심했다면 이곳에서는 적대감이 더 피부로 와닿았다. 핸드폰을 보며 낄낄거리다가도 그만 지나가면 고개를 휙 돌리며 노려보는데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너는 이곳에 속해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오른쪽 구석 자리가 이렇게 멀었던가. 한선호가 맡아 놓은 자리에 도착했을 때 이명은 진이 빠져 있었다.

‘수학여행, 힘든 거였구나…….’

무릎을 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허리를 다시 펴고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한선호는 어디론가 가 버린 뒤였다.

“후…….”

이명은 한숨을 쉬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벽 모서리에 몸을 맞추었다.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릎을 접어 올리고 등을 웅크렸다.

“야, 점호 15분 남음!”

“3, 4조 애들 일단 옆방으로 돌아가.”

“이불 정리는 하고 가야지, 미친 새끼들아!”

가만히 앉아 있는 이명과 달리 다른 애들은 정신이 없었다. 마구잡이로 끄집어 놓았던 이불을 다시 장에 쑤셔 넣고 트럼프 카드 팩과 화투를 이불 아래 숨겼다. 남학생들로 바글바글하던 방은 곧 인구 밀도가 절반으로 줄었다. 때는 9시 52분이었다.

툭.

이명은 오른쪽에서 들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어느새 흰 티셔츠로 갈아입은 소년이 서서 이불을 펴고 있었다.

‘엇…….’

“반장, 너 구석탱이에서 잘 거야? 여기 남는 이불 있는데?”

문 근처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한선호는 허리를 숙여 요와 이불의 모서리를 맞추며 대답했다.

“어. 나 여기서 자려고.”

“왜?”

“너 코 골까 봐.”

같은 방에서 자는 것만으로 설렜는데 바로 옆에서 자게 될 줄이야. 이명은 입술을 이불에 파묻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가 멀쩡하게 고개를 들 수 있었을 때쯤 담임이 문을 벌컥 열었다.

점호는 종례만큼 빠르게 끝났다. 담임은 인원을 확인하고서 경고의 말을 몇 마디 던진 뒤 불을 껐다. 문이 닫힌 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방 안은 조용했지만 완전히 고요하지는 않았다. 이명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소리와 부드러운 속삭임, 낄낄거림 따위를 들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완전히 깜깜하지는 않았다. 벽에 기다랗게 난 창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질이 얇아서 뒤가 비쳐 보이는 흰색 커튼이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하늘거렸다.

몸을 뒤척이는 척 오른쪽을 슬쩍 보았다. 한선호는 제 팔을 구부려 뒤통수를 받친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자기는 글렀다.’

이명은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려 덮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런 게 수학여행이라면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끼익.

그때 문소리가 나더니 형광등이 일제히 켜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형제님들…….”

옆방 소년들이 줄지어 입장했다. 예물로 갖가지 음식과 음료를 옆구리에 낀 행렬이 한동안 이어졌다. 누워 있던 아이들이 일어나 이불을 밀치고 둘러앉았다. 가운데 생긴 공간에는 간식과 음료를 늘어놓았다. 보온병과 텀블러, 주스 병 등 용기는 각양각색이었지만 하나같이 투명한 액체로 가득했다.

누군가가 종이컵을 꺼내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반장, 빨리 와.” 부르는 소리에 한선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건 이명뿐인 듯했다.

“뭐야, 흘렸잖아.”

“술잔 이렇게 받는 거 아냐? TV에서 봤는데.”

“그건 높은 사람한테만 하는 걸걸?”

종이컵에 액체를 따르는 소리와 과자 봉지 뜯는 소리가 났다. 이명은 그들의 말씨에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을 읽어 냈다.

‘이걸 위해서 자유 시간을 그토록 기다렸구나. 고작…… 술 때문에.’

어쩐지 시시했다. 이명은 술이라면 이미 기원에 출입하는 어른들 틈에 껴서 맥주부터 고량주까지 도수별로 마셔 보았다. 처음 마셔 본 건 중2 때, 소주였는데 맛이 없어서 뱉었던 기억만 났다. 반 애들이 왜 그렇게 술에 집착하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네 다 온 거? 빡태 안 보이는데.”

“어제 겜하느라 밤샜다고 잔대. 내일부터 달리겠다나.”

“아, 재미없는 새끼.”

“자자, 받으세요. 안 먹을 놈은 옆방으로 꺼지시고…….”

술 마실 사람은 203호, 잘 사람은 204호. 동그라미 안의 아이들은 203호, 그 외는 204호. 그것이 수학여행의 규칙인가 보다.

이명은 조금 주저하다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아이였고 여기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옆에 놔두었던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그들만의 원을 빙 둘러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명이야.”

잘못 들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학교에서 그를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이명은 우뚝 섰다. 그러자 서른 명의 시선이 제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너 자는 줄 알았는데. 안 잘 거면 같이 놀자.”

“어?”

‘나 나가려던 참인데.’

‘옆방 가서 자려고.’

‘아니야. 난 됐어.’

웬일로 대답할 말들이 빠르게 떠올랐지만 이명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자리에서 무릎을 낮춰 앉았다. 그를 탐탁지 않다는 듯이 바라보던 주변 아이들이 원을 넓히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명은 얼결에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마치 엄연한 5반의 일원이라는 듯이, 그의 앞에도 작은 종이컵이 하나 놓였다. 이걸 황송하다고 해야 할지. 이명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오렌지 주스 병을 기울여 작은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담았다.

“자자, 다 받았지?”

“그럼 건배!”

술을 마시기도 전에 볼이 상기된 아이들이 일제히 첫 잔을 비웠다.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아악! 왜 이렇게 써?”

“윽, 원래 이런 거야?”

술을 마시고도 태연한 건 이명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처음 술 마신 소감을 제각기 내놓는 동안 두 번째 잔이 채워졌다. 좀 마셔 봤다는 애들은 어디서 주워들은 술자리 예법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명과 한참 멀리 떨어져 앉은 한선호는 말이 없었다. 술을 마셔야 할 때 마셨고,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띤 채 누구의 말이든 들어 주었다.

술이 석 잔씩 돌아갈 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넉 잔째부터는 두 명이 쓰러져 잠들었고, 하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섯 잔째부터는 싸움이 벌어져 격리 조치가 실시되었다. 여섯 잔째 들었을 땐, 놀랍게도 멀쩡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3분의 2밖에 남지 않았다.

“저 저, 허접 새끼드을. 나중에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아……! 하하하하!”

“와하하, 마셔, 마셔!”

“우리 그거나 할까? 진실 게임?”

“으, 씨발. 남자끼리 진실 게임? 으웩!”

그때부터 ‘원샷’을 벌칙으로 건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공동묘지와 당근 게임, 후라이팬 게임, 바보 게임 등 ‘진실 게임’만 제외하고 온갖 게임을 했다. 실수한 사람은 벌칙으로 술을 한 잔 마셔야 했다. 이명은 게임 방법을 몰라서 슬그머니 뒤로 빠져 구경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다음엔 누군가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불을 껐다. 엘리베이터 창문을 통해 귀신을 본 이야기, 10층짜리 베란다 밖에서 누가 길을 물어봤다는 이야기, 가위눌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세 명이 하얗게 질려서 옆방으로 도망쳤다.

새벽 1시가 되었을 때 생존자는 이명을 포함해 일곱 명뿐이었다. 그중에는 뺨이 적당히 빨개진 한선호도 있었다. 불은 여전히 꺼진 채였고 주변에는 술 취한 애들이 명란젓처럼 서로 겹쳐져 쿨쿨 잠들어 있었다.

이명은 문득 창밖을 보았다. 쪽빛 하늘 남쪽에 노란색 동그라미가 걸려 있었다. 굵은 굴곡으로 물결치는 커튼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밤 풍경에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조금 취한 것 같았다.

“야, 너네 왜 진실 게임만 안 해 주냐아…….”

“여자도 없는데 무슨 진실 게임이냐고, 미친 새끼야.”

“어휴……. 그냥 하라고 해.”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함 시켜 줘라.”

이명은 ‘진실 게임’이 그들이 이제껏 했던 놀이와 같은 종류이겠거니 짐작했다. 순발력과 약간의 계산 능력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게임들. 그러나 실상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꾸준한 어필 끝에 목적을 이룬 아이가 실실 웃으며 소주가 반쯤 찬 헛개수 용기를 바닥에 대고 돌렸다. 1.5L짜리 페트병이 빙그르르 돌아가다가 천천히 멈추었다. 갈색 뚜껑이 지목한 아이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부터냐? 음……. 박민혁한테 물을게. 섹스해 봤냐?”

첫 질문을 듣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이명은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바닥을 보았다. 진실 게임이란…… ‘진실’만을 말하도록 강요당하는 게임이었다!

“당연하지, 새꺄. 마셔!”

“워어어어어!”

놀림이 다분하게 섞인 환호는 열 명도 안 되는 애들이 낸 소리 같지 않았다. 1층에서 자던 담임이 도끼눈을 뜨고 달려올 것 같은 음량이었다. 질문을 한 아이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듯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그는 다시 페트병을 돌렸다.

다음에 걸린 아이는 고심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이명은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서 곤란한 질문을 던질 것 같은 기분에 숨을 죽였다.

“다음 질문! 나도 박민혁한테 묻는다. 누구랑 했냐?”

“윗집 누나.”

“어어어어억! 어억!”

한동안 게임의 주인공은 박민혁이었다. 그 후로도 두 명이 외설적이고도 구체적인 질문을 하고서 대답을 들은 대가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섯 번째 아이가 말했다.

“선호, 너도 해 봤지?”

“뭘?”

“뭐기는, 섹스!”

“아니.”

한선호는 태연하게 답했고 질문한 아이는 뜻밖이라는 듯 놀라며 술을 마셨다. 나머지 아이들이 재미없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여유로운 미소로 웃어넘겼다. 그리고 그다음 차례에 페트병 뚜껑이 운명처럼 한선호를 가리켰다.

“음…….”

한동안 뜸을 들이던 그가 조용히 내뱉었다.

“이명.”

안 듣는 척 그쪽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이명은 뜻밖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너무 신경을 쓰느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눈빛이 자신을 향해 쏠려 있었다.

바닥을 보고 있던 한선호가 눈을 들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긴장되는 그 순간에도 살짝 웃는 얼굴이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너 취했어?”

‘응?’

그건 앞서 나왔던 질문들에 비하면 너무 시시했다. 굳이 진실 게임이 아니라 그냥 물어보았어도 대답해 주었을 만한 물음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주변 애들이 그게 무슨 질문이냐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이명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작게 답했다.

“아니.”

한선호는 시선을 다시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종이컵에 가득 담긴 술을 한 번에 마셨다. 그 행동은 이명의 가슴을 쿵쿵 뛰게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건 이명뿐, 차례는 금세 다른 아이에게로 넘어갔다.

“김경민, 너 아까 차에서 방귀 꼈냐?”

“크흐흐흐, 어.”

“씨발 새꺄, 내가 물어봤을 땐 절대 아니라매! 진심 냄새 존나 심했다고.”

순식간에 원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질문한 애가 씩씩거리며 술을 마시고서 페트병을 돌렸다. 팽이처럼 빠르게 돌다 차츰 느려지는 자취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어…….”

이명은 자신을 똑바로 가리키며 멈춘 병뚜껑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황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쩌지.’

황급히 생각해 봤지만 꺼낼 질문이 없었다. 재치 있거나 다른 애들을 웃게 할 만한 질문을 생각해 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한선호에 관해선 궁금한 게 많았지만 찔려서 물어볼 수 없었고, 나머지 다섯 명에 관해선 궁금한 게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었다.

“난, 물어볼 거…… 없어.”

좌중 침묵. 화기애애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분위기 보소.”

“뭐야, 쟤…….”

“아, 그럼 빨리 마시고 넘어가든가.”

어떤 애가 짜증스럽게 잔을 손짓했다. 이명은 죄인처럼 빠르게 잔을 비우고서 페트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른 아이들이 잡았을 때와 달리 시원찮게 돌던 병은 이명의 오른쪽에 앉은 아이를 선택했다.

“내 차례네? 음……. 반장!”

“오냐.”

“하루에 딸 몇 번 잡냐?”

낯 뜨거운 질문에 이명은 제 일도 아니건만 목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한선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한두 번?”

“와아아아 반장, 그 정도면 현잔데?”

플라스틱병이 또 한 번 돌아갔다. 다음 차례인 아이도 음흉한 표정으로 반장을 바라보았다.

“뭐 보면서 쳐?”

한선호는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컵을 들어 단번에 비웠다.

“하하하하, 대박. 반장 뭐야!”

“하드한 거 보나 보다. 공유 좀…….”

“나 얘랑 초딩 때부터 같이 다녔는데 이걸 몰랐네?”

귓가가 화끈거렸다. 그러게, 한선호도 사람인데 성욕이 있겠지 싶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명에게 그는 너무 환하고 반듯한 사람이었다. 성적인 무언가와는 거리가 아주 먼.

그 뒤부터 한동안 모든 질문이 한선호를 겨냥했다. 키스해 본 적 있냐, 연애해 본 적 있냐. 대답은 둘 다 ‘아니요’였다. 그는 고백 받아 본 적 있느냐는 질문에만 ‘예’라고 답했다.

그러다 덜컥 한선호의 차례가 되었다. 애들은 복수의 시간이라며, 피바람이 불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한선호는 무덤덤하게 물었다.

“김경민, 비밀 하나 말해 줘 봐.”

그 질문은 평범한 편이었지만 아이들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경민을 바라보았다.

“음……. 나 똥을 3일 동안 못 쌌어.”

“아 씨바, 그래서 아까 버스에서……! 으웨에에에엑!”

“에헤헤헤헤, 뿡!”

그가 방귀 뀌는 흉내를 내자 모두가 쓰러지며 폭소를 터뜨렸지만 이명은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또 걸릴 것을 대비해서 질문을 생각해 둬야 했다.

한선호에게 묻고 싶은 건 셀 수 없이 많았다. 몇 명에게 고백 받아 봤는지, 그중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는지, 이상형은 무엇인지, 이제까지 사귀어 보고 싶은 사람은 없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주말에는 뭘 하는지, 나중에 무슨 직업을 갖고 싶은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느 과목이 제일 좋은지, 낮이 좋은지 밤이 좋은지, 화창한 날이 좋은지 비 오는 날이 좋은지……. 사실은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물어보면 안 되겠지.’

이번에는 차례가 돌아오면 곧바로 술잔을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 전에 되도록 빠르게.

낄낄거림이 잦아들자 한선호가 페트병 목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핑그르르 돌던 플라스틱 용기가 한선호의 왼쪽에 앉은 아이를 가리켰다.

“나! 나아아아, 음, 반장!”

그 애는 상체를 까딱거리는 모습이 몹시 취한 것처럼 보였다. 한선호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깨를 짚으며 괜찮으냐고 물어봤다. 이명은 그 녀석이 부럽게 느껴졌다.

“반장!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애들이 재미없고 유치한 질문이라고 투덜거렸다. 어차피 남고인데 그딴 걸 알아서 뭐 하냐는 분위기였다.

그 순간 이명은 한선호와 눈이 마주쳤다. 우연히 그가 보는 방향과 자신이 보고 있는 방향이 겹쳤던 것이다. 그러나 한선호는 그런 것치고 오랫동안 이명의 눈을 마주 봤다. 다른 곳으로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거나 씩 웃지 않고 지극히 무표정하게.

주변의 소리조차 사라진 고요함 속에서 한선호는 종이컵을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명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악! 이 새끼 토하잖아…….”

“화장실 데려가, 얼른!”

이번에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자신을 봐 주었다고, 그래서 기억할 만한 순간이었다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심장 박동을 세기엔 너무 빨랐고 벽에는 시계가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어느덧 난장판이 된 술자리를 보니, 그리고 본인이 비워 놓은 종이컵을 밟으며 급하게 일어난 한선호가 입에서 뭔가를 게워 내기 시작한 친구를 급히 화장실로 옮기는 뒷모습을 보니 시선이 맞닿은 건 지극히 찰나였던 것 같았다.

‘취했나…….’

조 원장이 그랬다. 명이 너는 보기와 다르게 말술이라고. 끽해야 두세 병 마시고 취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게 좋네.’

이명은 실실 웃으며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간 두 명을 제외하고선, 게임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제각각 앉아 있던 자리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이명은 한선호가 맡아 준 제 자리에 앉아 배낭을 열었다. 세면도구를 꺼내 비어 있는 두 번째 화장실에서 양치했다. 그러고 나니 눈이 깜빡깜빡 감겼다. 어느새 새벽 2시였다.

‘내일 8시 반에 일어나려면 빨리 자야겠다.’

자리에 눕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셔서인지 가슴이 감당하기 어려운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오른쪽에 난 창으로 쏟아지는 광선이 달빛이라기엔 너무 밝아서일지도.

‘수학여행 오기를 잘했어.’

이명은 눈을 감았다. 한선호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싶었는데, 옆자리에서 잠든 그의 모습을 엿보고 싶었는데,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내일도 옆에서 잤으면 좋겠다.’

이명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잠들었다.

* * *

“담임이 10분 안에 안 나오면 알아서 하래!”

“반장, 어디 있어?”

수학여행 마지막 날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어쩌다 보니 본래 15인이 묵기로 되어 있었던 방에서 2박 3일 동안 남자 청소년 서른한 명이 꾸역꾸역 구겨져 잠들었다. 떠나기 전에 방을 정리하려니 혼란도 이런 혼란이 없었다.

옷이 없어졌다고 난리 치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웬만한 일로는 조금도 주목받지 못했다. 가방 지퍼 뜯어진 놈, 남의 안경 밟은 놈, 남에게 안경 밟힌 놈, 남의 바지에 물 엎지른 놈, 변기 막은 놈, 린스로 머리 감은 놈……. 사고도 갖가지였다.

조용한 구석 자리에서 잔 이명은 여유롭게 짐을 챙기고 이불까지 개어 놓을 수 있었다. 챙기지 않은 게 있나 주변을 확인하던 그는 베개 밑에서 옷을 하나 꺼냈다. 제 건가 싶었지만 흰색 티셔츠는 펼치고 보니 너무 컸다. ‘XL’ 사이즈를 표시하는 상품 태그 아래 정자체로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선호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는지 모른다. 새삼 한선호의 체격이 크단 생각에서 시작해 이 티셔츠를 입었을 때 그의 등이 얼마나 넓어 보였는지가 떠올랐고,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고 싶다는 이상한 욕망까지 들었다.

“어, 그거 뭐야? 내 거 아니야?”

이명은 깜짝 놀라서 티셔츠를 배낭에 쑤셔 넣었다.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한 걸 들킬까 봐 찔려서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지만, 이름도 모르는 남학생은 그의 곁을 휙 지나가 버렸다.

“니 내 거 입었잖아, 도적 새꺄! 빨리 벗어.”

“어? 이거 네 거냐?”

다행히 다른 애에게 한 말이었다. 이명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숨을 느릿하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한쪽 손은 배낭 안에서 공처럼 구겨진 흰색 티셔츠를 꽉 쥐고 있었다.

‘꺼내야지. 빨리 꺼내야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인한테 건네줘야지.’

우연히 주웠는데 태그를 보니 네 이름이 써 있더라 –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주면 될까?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으으……!’

고통스러운 고민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명은 그냥 티셔츠를 원래대로 베개 아래 깔아 두고 모른 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운이 지독하게 없었다. 티셔츠를 배낭에서 꺼내려던 순간에 하필 한선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명은 그를 보자마자 배낭 지퍼를 굳게 잠가 버렸다. 정말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한선호는 제 자리를 쓱 살펴보더니 주변 애들에게 물었다.

“내 잠옷 못 봤어?”

“뭔 잠옷인데?”

“흰 티야.”

반의 절반 이상이 팬티나 안경이나 양말이나 잠옷을 잃어버린 마당에 한선호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다른 애들처럼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요와 이불을 들추는 수밖에는. 티셔츠를 원상 복귀해 놓을 타이밍을 재고 있던 이명은 속이 타들어 갔다.

“분명히 여기에 벗어 둔 것 같은데, 이상하네. 그걸 누가 가져갔을 리도 없고…….”

이윽고 한선호가 무릎을 세우고 구석에 앉은 이명을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다시 돌리며 크게 말했다.

“흰 티 본 사람?”

“난 못 봤는데.”

괜히 찔려서 손을 들고 말하는 이명이었다. 한선호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네 가방 열어 보면 막 있고, 그런 거 아냐?”

그는 농담을 던지고서 일어났다.

“뭐, 뭐야? 줘도 안 가져!”

이명은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어 보았지만 그의 뒷모습은 이미 멀찍이 사라진 뒤였다. 뒤늦게 진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망했다……!’

남의 옷을 훔치는 건 변태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다. 자신이 이런 짓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빽빽 소리 지르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이명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윽고 그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집에 가자마자 방문을 잠그고 가방에서 한선호의 잠옷을 꺼낼 것이다. 딱 한 번만 냄새를 살짝 맡아 보고서 세탁기에 돌릴 것이다. 그러고선 잘 말려서 학교에 가져가 한선호의 사물함에 몰래 넣어 놓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 문제 없겠지.’

아무도 자신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몰라야 한다. 부디, 부디 걸리지 않게 해 주세요……. 그는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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