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A. 열여덟, 여름
방학을 기다리는 일주일은 길고도 길었다. 모두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방학식 당일에는 그들을 속박하는 어른들의 감옥에서 해방되었다는 극도의 환희를 느끼며 교문을 찢고 달려 나갔다.
그러나 방학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일주일이 하루처럼 흘러가는 기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선호는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방학 내내 이명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아무 소용없었던 노력.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 노력. 처음으로 그를 배신한 노력.
선호는 매일 자기 전에 한국 기원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버릇을 새로 들였다. 그의 발걸음은 한솔 아파트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유난히 느려졌다. 길을 가다가, 학원에서, 이명의 동네를 지나갈 때면 마주치고 싶은 마음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치열하게 충돌하며 신경이 곤두섰다. 선호는 어느 때보다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상태로 개학을 맞았다.
그런데 개학식 날 나타난 이명은 너무 쉬웠다. 고민하던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선호의 눈앞에 있었다. 뒷모습을 훤히 드러낸 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구김 없는 하얀색 하복 셔츠와 다림질 자국이 남은 회색 바지를 입고, 걸 그룹 노래를 들으며, 무심한 얼굴로.
한 달 동안 그를 보지 못한 선호에게는 그 모습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낯설었다. 어둠 속에서 썩어들어 가던 구덩이에 눈 부신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에게 말 붙이기는커녕 감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함께 영화도 한 편 봤고 작은 분식점에서 밥도 같이 먹었지만 여전히 친구라고 부르기엔 서먹한 사이였다.
“정신 못 차리고 들떠서 2학기에 성적 떨어지는 놈들은 각오해라. 매 들 거야. 알았어? 이상.”
“차렷, 선생님께 경례.”
“반장은 교무실에서 나 좀 보고.”
선호는 가방을 챙겨 메고 교무실로 향했다. 다갈색 복도와 먼지 낀 수많은 창문들, 익숙한 얼굴들을 지나쳤다. 한 달이 지나고 돌아온 학교는 그대로였다. 담임이 부르면 가야 하는 처지도, 바퀴가 달리고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왕처럼 앉아 있는 담임의 모습도.
“부르셨어요, 선생님?”
“그래. 일단 중간고사가 다음 달이지? 지금 방학 끝나서 풀어진 놈들 분명히 있을 텐데, 선호가 책임지고 분위기 못 흐리게 딱 잡아야 돼. 알았어?”
“예.”
“이건 전달 사항. 내일 조례 시간에 나눠 주고 다음 주 목요일까지 가져오라고 해.”
담임이 A4용지 뭉치를 건넸다. 선호는 받아 들자마자 무심코 가장 윗줄을 읽었다.
<수학여행 참가 여부 조사>
잠잠했던 호수에 파문이 일었다. 그의 시선이 교장의 인사말과 비용 소개를 건너뛰고 일정표로 향했다.
수학여행지: 제주도
선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축구부 애들이랑 이명한테는 안 줘도 돼.”
“네?”
한순간 들떴던 마음이 툭 꺾였다. 선호는 서서 기다렸으나 담임은 중지 손톱에 낀 때를 반대쪽 손톱으로 빼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걔네 9월에 전지훈련 간대.”
‘걔넨 관심 없고요.’
“병욱이 걔 지나가다 봤는데 공 기똥차게 잘 차데?”
‘축구 특기생인데 당연하죠.’
“꼭 나 어릴 때 생각나더라고.”
‘진심이세요, 선생님?’
“이러다 나중에 TV 나오는 거 아냐? 사인받아 놔야 하나. 이명 건 진작 받아 놨는데.”
담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서 하품을 했다. 곧 찢어질 것처럼 크게 벌린 입 사이로 목젖이 보였다.
“이명 말이야.”
“네? 네.”
“원래 어머니께서 수학여행 같은 건 건강상 안 보낸다고 하셨는데, 이번엔 간다네. 아까 찾아오셨길래 설명지 드렸다.”
그전까지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듣던 선호의 몸이 굳어 버렸다. 담임이 혀를 차며 이어 말했다.
“골치 아픈 애들은 차라리 빠져 주는 게 속 편한데 말이야.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좀, 특이한 애잖아. 반장은 무슨 말인지 알지?”
담임은 악당처럼 야비하게 웃으며, 그들만 아는 비밀을 공유한다는 듯이 말했다. 선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나가 봐.”
“네.”
선호는 교무실에서 나왔다. 청소하려고 활짝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보라색 꽃잎이 날아 들어왔다. 선호는 너무 작아서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꽃잎을 손바닥에 두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먼지 낀 창 너머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한 가지만 빼면.
* * *
어영부영하는 사이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선호는 인생에서 가장 불안정한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문득 가슴이 두근거려서 참을 수 없다가도 급격히 싸늘해져 모든 것이 싫어지기도 했다. 수학여행을 생각하면 기대감이 차올랐고, 그러다가도 화가 나거나 비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채 아무것도 안 하고 몇 시간씩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한 번도 속 썩인 적 없는 외아들이 사춘기를 뒤늦게 겪는가 보다 짐작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선호는 원래 생각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때만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절대로 결론이 나지 않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생각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던 중에 중간고사가 새벽처럼 닥쳐왔다. 잠에서 막 깨어난 선호는 눈을 비볐다. 그는 준비되지 않은 아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준비되지 않은 예비 낙오자였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는 부담,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책임감, 야망 등 여러 욕심들이 최전선으로 불려 나왔다. 원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호한 무언가는 일견 물러나는 듯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적지 않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었다.
친구 필기 베끼기, 서로 설명해 주기, 퀴즈 내기, 교과서 필사, 외울 때까지 읽기, 줄임말로 암기하기, 벼락치기……. 예로부터 성적을 급상승시키는 데 좋다고 알려진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수면 시간은 세 시간씩 늦춰졌다. 중간고사 이틀째에는 급기야 코피가 터졌다.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서 옷장에서 다시 춘추복을 꺼내 입은 날, 1학기에 그랬던 것처럼 교실 벽면에 A3 용지가 붙었다.
4등: 한선호 (평균 93.7점)
선호는 점수를 확인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아쉬움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었다. 거의 모든 과목을 벼락치기로 때운 것치고 운이 상당히 좋았다. 결과는 이보다 훨씬 안 좋을 수 있었다.
“오, 나 2등 올랐다.”
“어디? 네 이름,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되냐…….”
선호는 주변 애들이 떠드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위쪽을 훑었다. 그런데 1, 2, 3등 어디에도 그가 찾는 이름이 없었다. 시선이 아래로 빠르게 내려왔다.
13등 : 이 명 (평균 81.9)
친구들은 제 점수만 확인하고 돌아섰지만 선호는 발이 땅에 붙은 듯 한참 동안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평균 점수가 10점 이상 떨어졌다. 80점대 턱걸이라니, 대체 이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혹시 몸이 안 좋았을까, 방학 동안 집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있는 걸까.
“오, 선호. 막판에 코피까지 터지더니 선방했네.”
“……어.”
“난 점수 올랐다! 아싸.”
선호는 벽에서 눈을 떼고 자리로 돌아갔다.
걱정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냉소가 채웠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어차피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이명에게는 내신 성적이 아무 의미도 없는데.
생각해 보면 이명이 아이들 사이에서 겉도는 건 당연했다. 그는 교실에 있는 누구와도 다르니까. 그는 컴퓨터용 사인펜과 성적표의 세계가 아닌, 바둑돌과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되는 프로필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지금이야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다른 길을 갈 것이다.
이명은 이방인이었다. 선호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안개였다. 그가 자신을 위협하고 뒤흔드는데도 선호는 그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잠이 많고 깜짝깜짝 잘 놀란다는 것밖에는. 보이는 것만큼 소심하지 않으며 밥을 잘 먹는다는 것, 그리고 생김새가 귀엽고 예쁘다는 것밖에는. 그를 조금만 지켜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사실 밖에는.
누가 짝사랑이 솜사탕이나 유리알 같은 것이라고 했던가. 선호에게 처음 해 보는 짝사랑은 마치 당구공으로 하는 농구 경기나 주소를 잘못 쓴 편지 같았다. 힘껏 던져도 되돌아오지 않았고, 답신을 기대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이름 붙이기 곤란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조금도 유쾌하지 않고 더러운 기분이었다. 마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폭우처럼.
‘명이는 좋겠네.’
공부 안 해도 돼서.
‘명이는 좋겠네.’
아무렇지 않아서.
‘명이는 좋겠네.’
늘 그렇게 무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기만 하니까.
“야, 선호! 안 가냐?”
경민의 목소리가 빗물 웅덩이로부터 선호를 건져 냈다. 그제야 물기라곤 한 점도 없는 하늘이 보였다.
“체육이 오늘부터 체력장 한다고, 빨리 오라 하지 않았어?”
“아……. 그랬지.”
선호는 서둘러 셔츠를 벗고 몸을 체육복에 구겨 넣었다. 등이 땀으로 축축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렸을 때, 시야 끝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남학생의 어깨가 걸렸다. 그 순간만은 그의 모든 것이 싫었다. 햇살보다 더 하얀 팔꿈치도, 물기라곤 한 점도 없어 보이는 체육복도,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하고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을 거면서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저 습관도.
“반장 갑자기 왜 저래?”
“성적 떨어져서 그런 듯?”
“왜? 얼마나 떨어졌는데? 하, 남 일 같지가 않다.”
“네? 쟤는 4등이고, 님은 34등인데여……?”
“뭐야, 졸라 재수 없네.”
선호는 이명에게서 등을 돌리고 교실을 나섰다.
체육 교사는 무신경한 인간이었다. 학생들에게 관심도 없고 기억력도 나빠서, 검은 테이프로 둘둘 만 매를 수시로 건들거리며 ‘저 새낀 왜 안 뛰어?’ 같은 말을 버릇처럼 했다. 선호는 괜히 이명이 눈총받는 게 싫어서 그의 대리인을 자처했었다. 매번 수업 시작하기 전에 교사에게 조용히 말했던 것이다.
‘명이는 호흡기가 안 좋아서 뛰면 안 된다고 담임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명이는 담임 선생님께서 열외로 해 달라고 하셨어요.’
‘명이는 뛰지 말라고 담임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그러고 나면 교사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그러고선 이명을 요주의 인물처럼 날카롭게 바라보았지만, 다음 시간이 되면 또 무신경한 얼굴로 같은 말을 했다. ‘저놈은 왜 안 뛰어?’라고.
그늘에 삐딱하게 선 체육 교사에게 버릇처럼 다가가던 선호는 운동장 중간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내리쬐는 태양이 머리 위로 따끔한 열기를 쏘아 댔다.
체육 교사가 물어보기 전에 기를 쓰고 이명을 열외 시키는 것도, 공기 나쁜 화학실에 미리 도착해서 환기하느라 화학 수업을 체육복 차림으로 듣는 것도, 교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는 것도, 왼쪽 뒤편에서 기침 소리가 나면 몸을 긴장시키는 것도, 기흉 수술 부작용과 과호흡을 진정시키는 요령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 본 것도 다 반장의 의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의와 친절이었다. 호감의 발로였다. 조금도 의미가 없는.
“체력장 개싫음.”
“그래도 운동장 도는 것보단 낫잖아.”
“뭐부터 한대?”
“몰라? 한선호한테 물어봐.”
아이들이 정문에서부터 줄지어 나타났다. 그 끄트머리에 체육복을 입은 이명이 있었다. 다른 애들보다 가느다랗고 긴 팔다리가 햇살을 받아 창백해 보였다.
“반장, 부반장, 이리 와 봐.”
“네, 선생님.”
“오늘부터 체력장인 거 알지? 일단 오늘은…… 100메다, 유연성, 턱걸이 이렇게 한다. 시간 되면 윗몸까지. 다음 시간에 나머지랑 1,000메다 할 거야.”
“네.”
“내가 결승선에서 초 잴 테니까 반장이 저기 출발선에서 애들 줄 세워서 번호대로 스따뜨 시키고, 부반장 네가 내 옆에서 딱딱 적어. 알겠지?”
선생은 대답도 듣지 않고 나무 그늘에 섰다. 부반장에게 결과표가 끼워진 파일 홀더와 펜을 건네고서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삑 불었다.
선호는 출발선으로 달려가 아이들을 줄 세웠다.
“1번, 2번부터 나와.”
“아, 존나 떨린다.”
강 씨 성을 가진 아이 두 명이 출발선 앞에 섰다. 교사가 호루라기를 불자 그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출발했다.
선호는 3, 4번을 출발선에 세우고서 손을 펴서 이마에 얹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그리하지 않으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습관처럼 등나무 아래로 향했다. 무릎을 세우고 쪼그린 자세로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소년을 눈으로 찾으려 들었으나 속에서 치밀어 오른 무언가가 그 행위를 끊어 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린 선호는 놀랍게도 애들 틈에 섞여 있는 이명을 보았다.
그는 웅크린 자세도 우울한 표정도 아니었다. 떠들어 대는 아이들 사이에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 사람처럼.
삑! 삐이이익!
신경질적인 호루라기 소리가 그를 상념으로부터 끌어냈다. 선호는 정신이 번쩍 들어 손짓으로 5, 6번을 출발선에 세웠다. 고개를 숙이고 눈 모서리로 이명의 깨끗한 운동화를 노려보았다.
넌 대체 무슨 생각이지?
‘체육도 무조건 열외, 알겠지? 너 이거 꼭 기억해 놔야 한다, 응? 체육 쌤한테 내가 따로 말해 놓긴 할 건데, 혹시 까먹고 명이 안 혼내시게 네가 책임지고 잘 해야 돼. 알았어?’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이가 폐가 많이 안 좋다 보니 숨이 차면 힘들어해요. 심하면 응급실에 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선생님만 믿고 아이 맡겨요.’
폐를 수술한 아이. 아픈 아이. 달리다가 숨이 차면 힘들어하는 아이. 체력장 점수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뛰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에 남학생 네 명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선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말해, 명이야. 선생님한테 가서, 뛸 수 없다고 어서 말해.’
한쪽에는 이명이 화학실에서처럼 기침하고 숨을 쉬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선호가 있었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얼마나 잘 뛰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이명이 차라리 망가지기를 기다리는 냉담한 한선호가 있었다.
선호는 속에서 들끓는 두 가지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 될 감정들이었지만 마치 이중인격자처럼 마음속에 양립하고 있었다.
삐이이이이익!
또다시 재촉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귀에 박혔다.
“13번 뛸 차례, 맞지?”
이명이 선호를 바라보며 작게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터벅터벅 걸어가 출발선 앞에 섰다. 담담한 눈빛으로 결승선을 바라보며, 팔을 쭉 뻗어 관절을 풀고 모래 위에 오른발을 부드럽게 두 번 굴렀다.
“야, 반장! 너 뭐 하고 자빠졌어? 빠릿빠릿하게 다음 놈 준비 안 시켜?”
멀리서 체육 교사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선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학생들의 줄을 바라보았다. 14번은 늘 결석하는 축구부 아이였다. 그러니까 선호는 다음 번호를 이명의 오른쪽에 세워야 했다. 그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선호는 15번을 부르는 대신 느릿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 이명의 곁에 섰다.
밝은 햇볕이 어두운 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손에 땀이 나고 입 안이 말랐다. 쿵, 쿵, 쿵, 쿵. 얇은 체육복 아래서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이래도 되는 걸까.’
저 애는 무슨 생각으로 뒤로 빠지지 않는 걸까. 모친이 그렇게 신신당부했던 제 몸 상태를 모르는 건가. 100m 정도면 괜찮겠거니 싶은 건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는 건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다른 목소리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이명은 유치원생이 아니고 선호는 그의 보모가 아니다. 뛸 만하니까 뛰는 거겠지. 누구도 이명더러 달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만약 다친다고 해도 미리 빠지지 않은 그의 책임이다.
삐익!
선호는 호루라기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달려 나갔다. 잔뜩 긴장한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고 운동화가 땅을 힘차게 밀어냈다. 폐가 더운 공기로 가득 부풀었다. 땀에 덮인 몸에 티셔츠가 달라붙으며 바람이 소매 사이로 들어왔다.
왼쪽을 구태여 보지 않아도 경쟁자의 존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명은 눈에 띄게 빠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선호는 그가 조금의 여유도 없이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운동화와 모래가 마찰하는 소리, 팔이 움직일 때마다 체육복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폐활량이 적은 사람 특유의 짧은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으니까.
그의 손목을 붙잡고 보건실 가던 날에 등 뒤에서 들렸던 신음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의 입을 막았을 때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오던 뜨거운 숨과도 비슷하지만 달랐다. 아스팔트 길 위를 나란히 걸었을 때 들었던 고른 호흡과도 비슷하지만 달랐다.
알 수 없는 오기가 선호를 전심으로 내달리게 했다. 상대를 짓밟고 으스러뜨리고 싶은 욕구는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그의 안에 살고 있는 비열한 동물은 언제나 경쟁을 좋아하다 못해 숭배했다. 그러나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강렬한 충동에 비하면 이명은 너무 쉬운 상대였다. 경쟁이 되지 않았고, 선호의 앞에 놓인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그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건지, 그렇게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건지, 그렇게라도 이명이 자신을 봐 주었으면 하는 건지, 자신도 모를 복잡한 감정으로 선호는 달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간 선호가 그에게 패배하는 기분을 느껴 왔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명이 패배할 차례였다.
주먹에 힘을 꽉 쥐고 다리를 움직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결승선을 노려보며 속도를 올렸다. 발을 한 번 디딜 때마다 곁에서 느껴지던 불안정한 숨결이 멀어져 갔다.
이미 이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상대를 무참하게 찢고,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 정도의 차이를 남기며. 고작 중반이 지난 경쟁 한복판에서 승리의 쾌감에 몸이 떨렸다. 단순한 승리한 부산물이 아닌, 더욱 질 나쁘고 음습한 희열이었다.
“12.2초. 이야, 육상부 기록이네.”
속도는 결승선을 통과하고서도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이 검은 그림자를 남기며 모래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한선호는 한참을 더 달리고서야 멈춰 섰다. 온몸이 나무 그늘에 덮인 채로 거칠게 숨을 골랐다. 그러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햇볕 아래 하얗게 빛나는 모래밭 위, 짓밟아 놓았다고 생각한 소년이 달리고 있었다. 패배한 주제에 아무 흔들림 없이. 살짝 힘겨워 보였지만 하얗게 빛나며.
결승선을 일찍 밟은 것은 승패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패배감은 이명이 아닌 한선호의 몫이었다.
‘네겐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조금씩 가까워지던 실루엣이 결승선을 5m쯤 남겨 두고 비틀거렸다. 이명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을 때 선호는 이미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이명이 엎드려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때 선호는 이미 그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패배니 승리니, 흑백이니 바둑돌이니, 중간고사니 하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어차피 결론은 한 가지였다. 보답받을 수 있든 없든 선호의 감정은 한곳에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때론 그늘에 덮이거나 억눌리거나 어딘가로 숨기도 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다 나 때문이야.’
품에 꽉 안은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모두 자신의 책임이다. 선호는 비뚤어진 감정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그를 위험 속에 방치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보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번에도 아무도 없었다.
“대체 왜 맨날 자리에 없는 거야!”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이명을 안고서 미친 사람처럼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옷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명이 불편한 듯 몸부림을 치며 품에서 빠져나갔다. 선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살짝 났지만,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 괜찮아.”
“…….”
“그냥 다리를 삐끗해서……. 나 정말 괜찮아. 놀라게 해서 미안.”
이명은 곤란하다는 어조로 말했지만 정작 곤란한 것은 선호였다. 아직 숨을 헐떡이고 있으면서 도리어 자신에게 사과하는 이명이 당황스러워서, 그의 앞에서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눈물까지 찔끔 흘린 자신과 비교돼서. 선호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강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문득 이명에게 영원히 이길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세계에 영영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기분이.
“내가 너무 오버했네. 담임 선생님이, 너 뛰면 안 된다고 하셔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지만 목구멍이 뜨거웠다.
“그러게, 그냥 빠질걸. 내 주제에 괜히 뛰었나 봐.”
“…….”
“너무 한심하다. 끝까지 뛰지도 못하고 넘어지고…….”
“미안해, 명이야. 나 때문에……. 지금 가서 재시험 치자.”
“괜찮아. 나 체력장 점수 필요도 없는데, 뭐.”
이명이 담담하게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 하얀 실루엣이 조금씩 멀어지다가 복도 끝에서 사라졌다. 선호는 눈을 감고 보건실 벽에 등을 기댔다.
창밖에는 해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이 축복처럼 빛을 내리쬐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선호가 서 있는 곳은 검은 그늘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그에게 우호적이다. 하지만 한선호는 이제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