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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열여덟, 여름 (6/21)

7. 열여덟, 여름

아무리 인상적인 일도 시간이 지나면 선명함이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선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던 그날도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이명은 그날 고마웠노라고 따로 찾아와서 인사하지도, 그날 일은 정말 이상했다고 너스레를 떨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선호는 웬만하면 그날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건 선호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하고 예외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애쓰면서까지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들추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선호는 이명에 관해 궁금해졌다. 1학년 때 몇 반이었는지, 어디 사는지, 중학교는 어딜 졸업했는지. 이렇게 기본적인 것부터 해서 취미는 무엇일까,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맨날 무슨 노래를 듣는 걸까, 바둑은 언제부터 배웠을까, 사복 입은 모습은 어떨까 하는 따위의 개인적인 궁금증까지.

호기심을 채울 길은 요원했다. 주변에 물어서 중학교 어디 나왔는지를 겨우 알아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명이야, 너 무슨 음악 좋아해?”

그래서 지나가는 말처럼 직접 물어봤다.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고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이명은 마치 선호가 도를 아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 방송부장이잖아. 네가 좋아하는 거 점심시간에 틀어 줄까?”

선호는 웃으며 덧붙였다. 수상한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강조했지만 이명은 조금도 설득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괜찮아.”

그는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남이 말 거는 게 불편한가? 그래서 늘 혼자 있는 걸까.’

선호는 뒷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명이 놓고 간 이어폰을 살짝 들어 보았다. 한쪽을 집어 귀에 꽂자 전혀 예상도 못 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걸 그룹이라니, 의외다. 드뷔시 같은 거 들을 줄 알았어.’

선호는 웃으며 이어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날부터 그가 졸업할 때까지 남산고 점심시간에는 여자 아이돌 노래만 줄기차게 나왔는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3일간 결석했던 이명은 모의고사 전날 나타났다. 어쩐지 안 본 사이에 조금 수척해진 것처럼 보였다.

“재우, 그쪽 창문 좀 열어 줘.”

“왜? 에어컨 틀 거 아냐?”

“공기가 안 좋으니까 그렇지. 빨리 열어 줘.”

쉬는 시간마다 환기하는 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그날 이명은 기침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화학 수업 때는 미리 화학실에 도착해 창문을 열어 놓느라 체육복도 갈아입지 못했지만 선호는 그러한 수고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외엔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날이었다. 수업 듣고, 쉬는 시간에 애들하고 축구하고, 점심 먹고, 축구하고, 또 수업을 들었다. 마지막 수업 시간은 자습이었다.

재우는 맨 앞줄에 앉았으면서도 코를 골며 엎어져 있었고 그의 공부를 도와주겠다던 뒷자리 경민도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라고 나을 건 없었다. 교실의 절반 이상이 잠들어 있는데도 교사는 책을 보느라 그들을 방관했다. 선호 또한 쏟아지는 잠기운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헌법의 의의와…… 기능은……. 기본권의 한계는……. 아, 졸려서 미치겠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차례 쓸고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왼편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애는 꾸벅꾸벅 잘도 졸고 있었다. 평소에 그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명과 코미디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 않나.

‘진지한 애가 저러니까 더 웃겨.’

이명처럼 성실한 아이조차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목요일 마지막 교시에는 졸음과 관련된 저주라도 있나 싶었다.

이명의 고개가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앞뒤로 까딱거렸다. 그 폭은 조금씩 커지다가, 급기야 코끝이 교과서에 닿을 정도까지 고개가 꺾였다. 그 반동으로 상체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동시에, 잠에서 깬 이명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고 살짝 몸서리쳤다.

‘무슨 상황극도 아니고…….’

선호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숨죽여 웃었다.

시간은 느리게 갔다. 선호는 교과서를 세 페이지 정도 더 읽다가 너무 졸려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통을 갖고 나가 정수기에서 찬물을 가득 떠 마시고 나니 잠이 조금 깼다. 뒷문을 통해 자리로 돌아오는 길, 아예 볼을 책상에 댄 채로 잠든 이명이 눈에 들어왔다. 귀에서 빠져나온 검정 이어폰이 책상 아래로 늘어져 흔들거렸다. 선호는 슬그머니 웃으며 이어폰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 뒤로도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자습은 책과의 신경전이 아닌 잠과의 전쟁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는 자꾸만 눈꺼풀을 끌어 내렸고, 졸다가 본인 눈두덩을 펜 끝으로 찌르는 애들이 속출했다. 선호는 의식의 25% 정도만 깨어 있는 상태로 앉은 자세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생존자가 한 명씩 줄어들다 급기야 다섯 명도 남지 않았을 때 담임이 들어와 종례를 점잖게 시작했다.

“이 셰끼들이, 여기가 호텔인 줄 알아!”

그날 종례 시간에는 다 같이 엎드려서 엉덩이를 한 대씩 맞는 특별 행사가 열렸다.

종례가 끝나고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혹은 학원으로 흩어졌다. 청소 당번들은 남았고,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꼭 옆에서 깔짝거리는 아이들도 함께 남았다.

선호는 담임의 심부름으로 친구 세 명과 함께 무거운 박스를 행정실까지 날라야 했다.

“아, 팔 빠질 것 같다고!”

“담탱이 새끼 진짜 좆같네. 지가 들든가, 왜 우리한테 시켜?”

“아오 개빡쳐. 그런 의미에서 피방 고?”

“고오?”

“좋아, 좋아. 2:2 가자.”

“머릿수도 딱이네. 선호, 갈 거지?”

선호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화제가 바뀌어 있었다. 아까까진 분명히 담임 욕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PC방에 가자며 세 명이 저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놀랍도록 강렬한 유혹이었다. 선호는 입맛을 다셨다.

‘모의고사 전날이라 독서실 가려고 했는데…….’

그는 내면의 갈등을 느꼈지만 금세 죄책감을 털어 버렸다. 어차피 오늘은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이다. 그러니 2시간 정도 놀다가 들어가면 집중이 더 잘되지 않을까?

“그래, 가자.”

“크! 역시 반장은 타의 모범을 보여야제. 나랑 같은 팀 먹자. 그럼 저 새끼들 울 듯.”

올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던 재우가 가장 의욕적이었다.

“지랄을 하세요.”

경민이 어김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으로 재우를 가리켰다.

“아 맞다, 근데 남재 너 그거 되게 잘하잖아.”

“나야 다 잘하지. 뭐? 뭐?”

“나한테 솔킬 따이는 거요, 등시나.”

“……개새끼야.”

선호는 친구들의 일상적인 말싸움을 배경음 삼아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가 눈앞에 펼쳐진 순간, 1반에서 남학생 한 무리가 총알처럼 튀어나와 일제히 복도를 다다다 뛰어갔다.

“어, 쟤네 왜 저러냐.”

“뭔 일 났나?”

그들은 궁금해서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싸움이래, 싸움!”

“야아아아아……! 5반에 싸움 났다아아아!”

선호와 친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서 약속이라도 한 듯 달렸다. 애들은 하나같이 싸움 구경에 환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선호는 처지가 달랐다. 그는 교실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함께 불려 가는 반장이었다. 어떤 싸움이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대체 우리 반에 싸울 만한 애가 누가 있지?’

남고에서 큰 싸움은 대개 아무 징후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 이전부터 두 당사자 간에 팽팽한 긴장 상태가 전제되며, 그러고서도 미미한 갈등이 한두 번쯤은 발생하고서야 큰 싸움이 터지는 법이었다. 5반은 애초에 학생 구성이 무난한 편이었으며 체육 대회 3관왕을 기점으로 형제애 같은 끈끈함마저 생겨난 분위기였다.

“5반에서 누가 책상 엎었다며? 어떻게 됐어?”

“와, 존나 책상을요? 나 못 봄. 누구임? 누구임?”

“한 명은 오형석이고 한 명은 모르겠어.”

뛰어가는 중에도 다른 반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오형석은 못 말리는 다혈질이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다가도 조금만 기분 상하면 앞뒤 안 가리고 화내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선빵 칠 놈은 아니니 분명히 누가 건드렸을 것이다.

‘대체 누가 오형석한테 덤볐지?’

반 아이들 대부분이 그를 은근히 무서워했기 때문에 더더욱 짚이는 상대가 없었다.

5반 앞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간 선호는 바글바글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뒷문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숨을 고르며 두리번거렸다. 교실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싸움의 주체를 찾아내기 위해 아이들의 얼굴을 기민하게 살피던 눈매가 어느 순간 찌푸려졌다.

교실 한가운데서 예상대로 오형석이 팔짱을 끼고 날 선 기운을 뿜고 있었다. 소위 ‘노는 애’라 교복 상태가 불량했고, 매일 종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들여 세우는 앞머리는 하늘을 향해 빳빳하게 뻗어 있었다. 그의 발아래 널브러진 책상은 각도로 보아 발로 차서 넘어뜨린 게 분명했다.

상대는 놀랍게도…….

“그런 거 아니거든?”

플라스틱 빗자루를 든 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명이었다.

선호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문을 가로막은 애들 몇 명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 상황을 걱정하는 것 같은 애들은 아무도 없었고 죄다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났다는 듯 흥미진진하단 눈빛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명은 친구도 없었다. 그러니 이 싸움을 말릴 만한 사람은 전교에서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선호는 구경꾼의 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오형석이 책상을 차서 넘어뜨린 정황이 있었지만 아직 대화로 풀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아니라고? 담탱이 씨발놈이 너만 봐주던데?”

“그건…….”

“네 엄마가 뇌물 갖다준 거 아냐?”

오형석은 그 가정을 본인이 생각해 낸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내뱉었지만, 사실은 반에서 공공연하게 도는 소리였다.

상식적으로 이명은 뇌물까지 바쳐 가면서 담임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다른 애들이야 대입에 생활 기록부가 중요하니 사정이 다르지만 이명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니까. 냉정하게 말해 김지남 선생은 애초에 그 애의 인생에 눈곱만큼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존재란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이명이 결석하거나 자리를 비워도 담임이 혼내지 않는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발췌하여 소비할 뿐이었다.

이명은 오형석의 말을 듣고서 얼음처럼 차갑게 웃었다. 평소에도 냉한 구석이 있었는데, 기분 상했다는 티를 숨기지 않으니 주변의 공기가 다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청소해야 되니까 좀 가 줄래?”

그가 눈을 치켜뜨며 말하자 주변에서 ‘오오오오오!’나 ‘우와아아아!’ 따위의 추임새를 넣으며 싸움을 부추겼다. 오형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뒤집어 까며 이명에게 이마를 들이밀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잘난 척이야? 병신 주제에!”

그 말에 속 시원하다는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진짜 병신한테 병신이라고 하면 어떡하냐!”

“그냥 팩트 아닌가.”

선호는 수도 없이 겹쳐진 구경꾼의 벽을 더욱 거칠게 헤집으며 앞으로 몸을 밀었다. 저도 모르는 새 꽉 쥔 주먹이 떨렸다. 이명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 상처를 못 줘서 안달일까.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는 조용한 아이인데, 가만히 두면 안 되는 건가.

‘진작 와서 말렸어야 했어.’

이명이 또 공격당한 것이 제 탓인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너 뭐라고 했어, 씹새끼야!”

선호는 날카로운 고함을 듣고서 우뚝 멈춰 섰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리라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심지어 한창 열 내고 있던 오형석조차 당황해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선호는 그럴 순간이 아닌데도 통쾌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웃음이 핏 나왔다.

“와, 와……. 너, 너너, 너…… 지금 나한테 욕했지?”

“말은 똑바로 해. 네가 먼저 욕했잖아.”

“네가 폐 병신이니까 병신이라 불렀지! 뭐가 문제야?”

“하, 그렇게 치면 넌 진작 소각됐어야지. 쓰레기니까.”

둘의 체급 차이가 플라이와 슈퍼미들쯤 된다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오산이었다. 이명은 겁먹은 기색이 없었고 단 한마디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한 어조로 신랄하게 후벼 파는 말 때문에 오형석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듣자 듣자 하니까!”

오형석은 화를 이기지 못해 책상을 하나 더 엎었다. 천장을 향해 포효하는 요란한 퍼포먼스를 마치고서 이명에게 달려들었다.

선호는 늦지 않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오형석이 이명의 멱살을 쥐기 전에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놈의 손끝이 이명의 와이셔츠 깃에 닿기 직전이었다.

“바, 반장?”

“교실에서 뭐 하는 거야.”

선호가 아는 오형석은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물어봤을 뿐인데,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너…… 저 새끼 편드는 거야?”

“교실에서 뭐 하냐고 묻잖아, 형석아.”

선호가 재차 묻자 요란하게 웅성거리던 주변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선호는 오형석이 대답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나 그는 대답하는 대신 선호가 쥐고 있던 팔목을 거칠게 뺐다.

저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너무 세게 쥐었나 보다. 오형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발간 자국이 띠처럼 생겨난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문질렀다.

“저게 먼저 시비 걸었어.”

선호는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다가, 고개 돌려 이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명이 우물쭈물하며 작게 대답했다.

“청소하려면 책상 밀어야 해서…… 비켜 달라고 한 것뿐이야.”

선호는 또 한 번 눈과 귀를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욕하며 소리 지르던 남학생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명은 어느새 평소의 내성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선호는 다시 오형석 쪽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명이가 그렇다는데, 맞아?”

“…….”

“청소 당번을 도와주지는 않아도 방해하면 안 되지.”

오형석은 선호의 시선을 피하더니 제 자리에서 가방을 거칠게 집어 어깨에 멨다.

“책상 네가 한 거지? 바로 해 놓고 가.”

선호는 오형석이 뒷문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를 등진 채로 말했다. 조용히 말했지만 교실 안팎에 바글바글한 학생들이 숨죽이고 있어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오형석은 한동안 꼼짝 않고 있다가 어느 순간 쿵쿵거리며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아이씨!”

그는 거친 손길로 책상 두 개를 세워 두고 다시 뒷문으로 향했다. 빽빽하게 모인 애들을 힘껏 밀쳐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뭐, 구경났어? 너네 반으로 꺼져.”

옆에서 가장 열심히 구경하던 경민이 다른 반 애들을 쫓아냈다. 그놈들은 한창 재미있다 말았다며, 이럴 바엔 괜히 여기까지 왔다며, 마치 김빠진 사이다나 다름없다고 각자 툴툴대며 어디론가 흩어졌다.

스포트라이트를 잃은 이명은 여전히 플라스틱 빗자루를 꼭 쥔 채 창문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에게 말 걸기가 영 어색했다. 선호는 헛기침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명이야, 너 말고 청소 당번 누구야?”

“……쟤.”

선호의 시선이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이명만큼 조용한 남학생 하나가 빗자루로 교실 구석을 열심히 쓸고 있는 게 그제야 보였다.

“너랑 규일이 말고는?”

“다 도망간 것 같아.”

“그럼 너희 둘이 하고 있었던 거야?”

이명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말싸움의 여파인지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선호는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지만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너, 보기보다 용감하더라.’

저보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큰 상대와 맞붙으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얌전한 외모 이면에 이런 강심장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반장, 안 가?”

“선호 빨리 와. 애들 기다려.”

어느새 사람이 다 빠져나간 교실은 텅텅 비었다. PC방에 함께 가기로 한 친구 셋이 뒷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고 내부에는 선호를 빼면 청소 당번인 이명과 최규일밖에 없었다. 유난히 넓어 보이는 교실은 그날따라 상태가 엉망이었다. 먼지투성이인 거야 매일 그렇다 쳐도, 싸움 구경하러 왔던 다른 반 애들 때문에 분단 구획이 흐트러져 있었다.

선호는 교실을 가만히 살펴보며 말했다.

“너희 먼저 갈래? 게임하고 있으면 이따 합류할게.”

“아, 왜! 나랑 팀 먹기로 했잖아.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

“아니야. 먼저 가.”

“알았어.”

재우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서자 경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까불었다.

“이히히히히! 2:1 뜨셔야겠네. 덤벼, 덤벼. 워후!”

“아, 싫다고! 정정당당하게 하라고!”

“선호, 우리 먼저 갈 테니까 빨리 와. 알았지?”

“야 김경민, 인간적으로 반장 올 때까지 딴 거 하고 있자.”

“싫은데. 어! 이 새끼,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진 거 보소?”

친구들이 떠난 뒤, 선호는 책걸상을 모조리 교탁 앞까지 밀었다. 그동안 청소 당번 둘이 교실 뒤에서부터 바닥을 쓸었다. 원래는 여섯이서 해야 하는 일을 셋이서 해치우면서도 그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았다.

규일이란 애는 워낙 조용해서 선호조차 말을 섞어 본 기억이 거의 없었고, 이명은 선호가 그곳에 없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청소에 열중했다. 그리고 선호는 혼잣말하는 취미가 없었다. 그래서 청소 시간 30분은 적막 속에서 흘러갔다.

쓰레질이 끝나고 책상을 줄 맞춰 뒤로 민 뒤에야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규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뿌듯하거나 기쁜 기색도 없이 어깨에 배낭을 멨다. 그러고선 선호를 향해 정답게 손을 흔들었다.

“고생했어, 규일아. 잘 가. 내일 보자.”

그는 웃어 보이곤 교실에서 총총 퇴장했다.

그다음은 이명이었다. 그도 어깨에 배낭을 멨다. 그러나 규일과는 달리 선호에게 인사하지 않고 뒷문으로 도망치듯이 빠져나갔다.

선호는 혼자 남아 교실 문을 잠그며 심란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가를 바라고서 싸움을 말린 것도, 청소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이렇게 허전한 걸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선 대가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명과 이야기할 기회라든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선호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충동적인 행동을 했다.

복도를 질주하고서 계단을 두 칸씩 밟아 내려간 것이다. 빠르게 1층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명은 슬리퍼를 벗어서 신발장에 넣고 있었다.

“명이야.”

다가가서 어깨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살짝 튀어 오르며 신발장 문 모서리를 무릎으로 찍었다. 꽤 아팠는지 크게 뜬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찡그린 얼굴만 남았다.

“어, 명이야……. 괜찮아?”

“괜찮, 괜찮아. 아……. 으으…….”

“진짜 괜찮아? 봐 봐.”

“아니야. 괜찮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 놓고도 꽤 아픈지 무릎을 문지르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분주했다. 선호는 그를 돕고 싶었지만 사실상 가만히 서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

1분 뒤, 부상에서 회복한 이명이 한숨을 쉬며 한쪽 발을 운동화에 집어넣었다. 요란법석을 떤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선호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며 최대한 정직하게 들릴 말씨로 말했다.

“명이 너, 집 어디야?”

슬리퍼를 벗어 신발장에 넣으며 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 양쪽 운동화를 다 신은 뒤에야 돌아왔다.

“한솔 아파트.”

“나도 그쪽 사는데, 같이 갈래?”

사실은 반대 방향에 살았지만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번에도 이명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본 바로 그는 말이 느린 편인 것 같았다. 말하는 속도도 느리지만 무엇보다 말과 말 사이의 텀이 길었다. 침묵은 구령대를 지나 운동장 한중간을 가로지를 때까지 이어졌다.

‘아……. 그냥 내 말을 씹은 거구나.’

같은 내용을 다시 물어보기가 민망하고 혹시라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선호는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도로 눌렀다. 대신에 교문 앞에서 한솔 아파트 쪽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틀었다. 그리고 이명과 나란히 걸었다.

전형적인 여름날이었다. 태양이 뜨거운 빛을 내리쬐고 지척에서 매미가 맴맴 울었다. 산책 중인 개들이 주저앉아 혀를 길게 뺀 채 헉헉거렸고 킥보드를 탄 초등학생들이 과일 맛 아이스크림을 물고 자전거 도로 위를 질주했다.

말없이 걷는 동안 선호는 남산고 하복이 이명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피부가 희어서 그런지 흰색이 잘 받았다. 칙칙하다고 전교생이 혐오하는 회색 바지도 그가 입으니까 단정해 보이기만 했다.

‘춘추복을 입은 모습은 어땠더라…….’

아쉽게도,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교실에 들어와 창가 자리를 차지하려고 쭈뼛거리던 모습만 오래된 사진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은 눈이 왔었다. 한겨울이라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느새 땀 뻘뻘 나는 계절이 된 게 신기할 뿐이었다.

선호의 시선이 이명의 각 잡힌 교복 바지를 타고 올라와 도톰하게 튀어나온 엉덩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고서 길게 뻗은 팔을 지나 깨끗한 와이셔츠 깃 위로 뻗은 목으로 미끄러졌다. 그 얼굴의 다른 부분만큼 섬세하고 예쁜 귀 위로 햇빛을 잔뜩 받은 갈색 머리카락이 한들거렸다. 선호는 그의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부드럽게 날리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느껴지더니 팔을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잊어버렸다. 선호는 먼 곳의 아파트를 보며 깡통 로봇처럼 어색하게 걸었다. 나무에 붙은 매미들이 그를 놀리듯 쩌렁쩌렁 울어 댔다.

그렇게 이상한 기분으로 걷고 있는데 건너편에 소방서가 보였다. 이명의 집까지 가는 길 중 절반 정도 왔다는 신호였고 적어도 15분 동안 말없이 걸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눈 깜짝할 새 그의 집 앞에 도착할 것이다. 이명은 이번에도 아무 인사 없이 들어가 버리겠지.

“왜 안 왔어?”

선호는 급한 마음에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급하다 보니 주어와 부사어를 모조리 생략해 버렸다.

“어……?”

이명은 선호가 방금까지 옆에서 같이 걷는 줄 모르고 있던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놀란 것이 아니고 표정이 좀 이상했다. 언짢은 것 같기도 하고 아픈 아이 같기도 했다. 얼굴은 빨갰고 날씨가 더워서인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선호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너, 요 며칠 왜 학교 안 왔어?”

이명은 선호를 바라보지 않으며 목을 긁적거렸다.

“몸이 안 좋았어.”

어쩐지. 안 그래도 안 본 사이에 볼이 조금 핼쑥해졌다고 생각했다.

“호흡기?”

“아니.”

이명은 곤란한 질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괜한 걸 물어봤나 보다.’

어쩌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에게 건강에 관해 물은 게 실례였는지도 모른다. 선호는 마음이 타들어 갔다. 그와 대화할 기회를 겨우 얻었는데,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망쳐 버린 것만 같았다.

“감기.”

사과하려는 찰나에 이명이 툭 내뱉었다. 기어들어 갈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감기?”

“응.”

목소리는 한층 더 작아져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교실에서 기분 나쁜 말을 듣고서 사납게 화내던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동일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이명은 선호를 힐끔 보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대서…… 안 말하려고 했는데.”

선호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여름 감기 아냐. 아직 봄이잖아.”

6월 초순, 짝짓기에 미친 매미들이 발광하고 아스팔트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마당에 파렴치한 소리였다. 이명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가? 이렇게 더운데.”

“명이 넌 사람이니까……. 아직 여름이 아닌가 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꽤 오랫동안 대화가 끊겼다.

선호는 마음 같아서는 더 천천히 걷고 싶었다. 발을 뗄 때마다 목적지에 착실하게 가까워지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명과 이렇게 단둘이 대화할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너 아까.”

“어?”

“그, 오형석하고 싸울 때…… 목소리 엄청 크더라.”

“……아.”

‘위로하는 거, 생각보다 어렵구나.’

선호는 괜히 손바닥으로 제 목을 감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애들 말은 신경 쓰지 마. 뭘 모르고 하는 말이잖아.”

“…….”

“너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덧붙이자마자 후회가 들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면서, 친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이명을 잘 안다는 듯이 말한 것 같아서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옆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동안 가만히 걷던 이명이 불쑥 말했다.

“너…… 우리 엄마 학교 온 거 봤잖아.”

“봤지.”

또다시 침묵.

이명이 엄마 화제를 툭 꺼내 놓고 말을 아끼는 동안 선호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추하느라 바빴다.

“너는 오해 안 해?”

이명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오해?”

“뇌물…… 줬다고.”

오형석이 했던 터무니없는 소리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날 스승의 날이라 과자 주고 가셨잖아. 아니야?”

“맞아.”

“그날 우리도 돈 모아서 롤 케이크 샀는데, 너희 엄마가 주신 게 훨씬 맛있어 보이더라.”

“…….”

“담탱이도 막, 군침 흘리더라고.”

실없는 농담이라도 하면 이명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슬그머니 덧붙여 봤다. 이런 건 김경민 같은 애들이 잘하는데, 자신이 하니까 영 재미가 없는 것 같았다.

“풋.”

그런데 이명이 웃었다. 눈꺼풀이 가늘어지며 동그란 눈동자를 가렸고, 경직되어 있던 입가가 움직여 곡선을 그렸다. 선호의 귓가에 음악이 들렸다. 아주 희미하게.

“그 마들렌, 더럽게 맛없어.”

“응?”

“맛없다고. 누가 우리 집에 선물 세트로 보냈던 건데, 맛있는 건 나랑 동생이랑 다 먹었어.”

“……뭐?”

“그거만 두 박스 남아서 엄마가 유통 기한 지나기 전에 담임한테 갖다준 거야.”

선호는 갑자기 돌변한 어투를 가만히 듣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나지막한 웃음이었는데 곱씹을수록 웃겨서 폭소로 변해 갔다.

“하하하, 하하. 진짜 웃겨.”

“어?”

“명이야, 너 개그맨 같아. 아하하.”

“개그맨은 무슨.”

이명의 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뒤에서 보이는 뺨과 목 언저리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선호는 벌어진 거리를 서둘러 좁혔다.

‘헤어지기 싫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텐데, 이대로 인사하기 아쉬웠다. 내일 보기야 하겠지만 그들은 학교에서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와 단둘이 길을 걸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선호는 이명을 잠깐이라도 더 잡아 둘 구실을 생각해 냈다.

“명이야.”

부를 때마다 일일이 깜짝 놀라는 반응에도 이제 익숙해졌다.

“출출한데 뭐 먹을래?”

“어……?”

“친구네 엄마가 하시는 분식집이 여기 근처거든. 되게 맛있어.”

“어? 음…….”

“가자. 내가 사 줄게.”

이명이 우물쭈물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꼭 눈이 커다란 토끼 같다고 선호는 생각했다. 문득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동시에 그러한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랐다.

이명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보행자 신호등이 두 번 바뀌었다.

“알았어. 대신…… 내가 사 주면 안 돼?”

“하하, 일단 가자. 저쪽이야.”

그들은 횡단보도 앞에서 어색하게 서 있다가 길을 건넜다. 그늘을 벗어나자 뜨거운 햇빛이 눈을 찔렀다. 선호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를 받쳤다. 눈을 내리깔자 땅을 딛는 깨끗한 운동화가 보였다. 그리고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는 흰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멀리 있지 않아 자칫하다간 선호의 팔에 스칠 것 같았다.

시커먼 바닥을 밟는 걸음이 거칠어졌다. 동물이 피부 안쪽에서 그르렁거렸다.

녀석이 좋아하는 검은색,

녀석이 기피하는 흰색.

녀석이 좋아하는 검은색,

녀석이 기피하는 흰색.

횡단보도의 띠가 시야에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분식점은 길 건너편 골목에 있었다. 학기 초에 한 번 오고서 석 달 만에 다시 찾은 거였다. 초등학교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왔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점점 할 일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출입이 뜸해졌다.

재연이네

파란 시트지가 붙여진 유리문을 열자 테이블 네 개가 옹기종기 놓인 가게가 드러났다. 선호가 2인용 자리에 앉자 이명이 쭈뼛거리며 건너편에 앉았다.

주방에서 김밥을 말던 재우 엄마가 그들을 보지도 않고 크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어머, 선호잖아? 오랜만에 왔네. 우리 아들은?”

“재우는 먼저 독서실 갔어요.”

선호는 친구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한 뒤 옥색 식탁에 팔꿈치를 올렸다. 테이블 표면이 습기로 약간 끈적거렸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바라보는 이명은 경직된 어깨 때문인지 긴장한 눈빛 때문인지 그 자리와 영 안 어울렸다.

“명이 너 뭐 좋아해?”

“나 다 괜찮은데.”

“그래? 그럼 내가 알아서 시킬게.”

선호는 주방으로 걸어가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하고 재우 엄마와 신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돌아왔다. 이명은 여전히 불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선호는 식탁 옆에 비치된 물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왔다. 하나는 이명의 앞에 놓고 하나는 반을 마셔 버린 뒤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괜히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등에 정맥이 튀어나오고 마디마다 뼈가 불거진 손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명의 손등으로 향했다. 손가락이 그의 몸매처럼 길쭉하고 늘씬했다. 손톱은 연한 분홍빛이었다. 살결은 부드러워 보였으며 이상하리만치 희었다.

재우 엄마가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2인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떡볶이 한 접시와 수북하게 쌓인 모둠 튀김, 쫄면에 어묵까지 나왔다. 단지 떡볶이와 튀김 몇 가지를 시켰을 뿐인데.

선호는 당혹스러웠지만 그녀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차마 마다하지 못했다.

“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아니야. 우리 선호가 맨날 재우 챙겨 주는데 내가 더 고맙지. 어휴, 우리 재우가 선호 반만큼만 의젓하면 좋을 텐데…….”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선호를 재우의 과외 선생처럼 대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도. 그녀는 음식을 내려놓고 선호와 이명을 번갈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잘 먹고 가. 선호 친구도, 응?”

그녀가 등을 툭툭 치자 이명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뒤로는 전쟁이었다. 5인분쯤 되어 보이는 음식을 모두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먹는 일에만 집중했다. 떡볶이를 입에 한 입 넣고 나면 고구마튀김이 기다렸다. 쫄면 접시를 비워야 했고 어묵도 먹어야 했다. 절망적인 건 그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재우 엄마가 어묵 국물을 채워 주면서 은근히 떡볶이를 더 주었다는 점이었다.

이명은 선호의 생각과는 달리 음식을 잘 먹었다. 깨작거리지 않았고 입이 짧은 것 같지도 않았다.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그건 음식을 일일이 앞접시에 덜어 먹기 때문이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든 게 그때였다.

“나도 앞접시 쓸 걸 그랬나?”

“응?”

“이미 늦었나……. 미안.”

선호는 난처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앞접시를 쓰는 건 다른 사람과 음식 같이 먹는 게 불편해서일 텐데,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이랑 늘 하듯이 편하게 먹은 것이다.

“어? 어? 아니야. 괜찮아.”

이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저었다.

“넌 그렇게 먹어도 돼. 진짜 괜찮아.”

“진짜?”

“응.”

선호는 이명과 식사할 땐 앞접시를 꼭 써야겠다고 머릿속에 입력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난 짜장면 같은 거 먹고 나면 물이 많이 생기더라고…….”

“…….”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야.”

이명이 조용히 내뱉은 말을 듣자마자 입 안이 마르고 얼굴로 피가 몰려들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타액이 뚝뚝 흘러내리던 왼손과 숨을 헐떡이던 소년의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선호는 기묘한 갈증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막처럼 타들어 가는 갈증이었다. 그는 조금은 성급하게 그릇을 들고 어묵 국물을 들이켰다. 조금 전에 재우 엄마가 뜨거운 국물을 리필해 줬다는 걸 잊고서 한 행동이었다.

“아뜨, 뜨거…….”

그릇을 재빨리 내려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지만 이미 혀를 뎄는지 느낌이 얼얼했다.

“하하, 하하하…….”

그때 건너편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났다. 선호는 제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갈 것 같아서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명이 활짝 웃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것도 잠시, 선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고 싶은 마음과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선호는 가까스로 입을 열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야, 정말 너무한다. 넌 내가 혀 덴 게 재미있어?”

“미안…….”

장난스럽게 한 말에 진지한 사과가 돌아왔다.

“농담이었어.”

선호가 재빨리 말하자 이명의 낯빛이 다시 편해졌다. 그는 젓가락으로 떡을 집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난 네가 완벽한 줄 알았거든.”

“내가?”

“응.”

선호는 완벽과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한참 부족했고, 가끔은 수업 시간에 졸기도 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일부러 친구들과 축구를 하거나 PC방에 가는 일도 허다했다.

학생으로서도 그럴진대, 인간 한선호는 완벽과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흐, 헉, 흐읏…….”

집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소리를 죽이려 이를 꽉 악물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샤워실 유리 벽에 김이 뿌옇게 서렸다.

‘난 네가 완벽한 줄 알았거든.’

웃음기 감도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고 웅웅 울려 댔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떠올려선 안 될 다정한 음성이었다.

“아, 읏, 허억, 헉……!”

제 잇새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와 보건실 가는 길에 들었던 신음이 겹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순수하고 밝게 웃는 얼굴과 괴로워서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아서 온통 깜깜해진 시야에 퇴폐적으로 뒤섞여 있을 뿐, 그에게는 똑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안에 살고 있는 동물을 유혹해 내는 위험한 얼굴들. 한선호는 둘 중 어느 모습이 자신을 더 괴롭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흐, 흐으.”

단단하게 선 성기를 덮은 손이 더 빠르게 움직일수록 이마가 더 강하게 벽에 짓이겨졌다. 한선호는 절정으로 치달아 가는 순간에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섹스하고 싶은지, 관음증 같은 병의 일종인지, 아니면 단지 부드러울 게 분명한 이명의 살갗을 빨아 보고 싶은 충동일 뿐인지.

30분 전에 보았던 웃는 얼굴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기침 때문에 침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모습이 문제였을까. 얼굴은 왜 그렇게 하얀 건지, 발목은 왜 그렇게 가느다란 건지, 남자애가 엉덩이는 대체 왜…….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화장실에서 몰래 하는 수음이 막바지에 달했다. 한선호는 팔에 힘을 주고서 뱃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갈망에 온 힘을 집중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지끈거리다 못해 폭발할 것 같다고 느낀 순간에 손가락이 뜨끈뜨끈하게 젖었다.

“하아, 하아. 하…….”

김 서린 유리 벽에 끈적끈적한 욕정이 희끄무레한 자취를 남기며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선호는 그 모습을 얼마간 보고 있다가 샤워기를 틀어 차가운 물로 쓸어 버렸다.

흠뻑 젖은 교복 셔츠를 벗어서 샤워실 밖으로 던졌다. 구겨진 옷이 검은 욕실 타일 위로 천천히 내려앉으며 더러운 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선호는 다시 샤워기를 틀고 찬물을 몸에 맞았다. 짧은 머리카락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입술이 떨렸다.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건만 그는 수치심을 느꼈다.

체온이 금세 떨어져 이가 저절로 딱딱 마주칠 지경인데도 안에서 들끓던 기묘한 욕망은 진정되지 않았다. 선호는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동물이 두려워졌다. 자신을 마치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하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런다고 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선호는 그런 일이 있고서 자신이 이명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각 외로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죄책감을 늘 마음 한구석에 안고 있긴 해도 이명을 보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이명은 늘 그랬듯 조용해서 튀지 않는 아이였고 선호는 반장으로서 할 일을 평상시와 똑같이 해 나갔다. 고개 돌리다 이명과 시선이 마주쳐도 눈을 피하지 않았고 유인물을 나눠 줄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건넸다. 개인적으로 대화할 기회는 없었다. 축제 기간이 되기 전까지 내내.

6월 말은 축제를 준비하느라 모두가 바쁜 시기였다. 선호도 그때만은 급우들보다 동아리 애들과 붙어 지내며 축제를 준비했다. 방송부는 축제 홍보 영상을 제작하고 연극부와 합작해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한 짧은 드라마를 만들어야 했으며, 축제 프로그램까지 진행해야 했으므로 영상 촬영 및 편집, 타임라인 정리 및 리허설로 몹시 바빴다. 방송부장인 선호는 세 가지 프로젝트를 총괄하느라 매일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직장인으로 치면 야근이 끊이지 않는 나날이었다.

그날도 선호는 홍보 영상 때문에 수업까지 빠지고 방송실에 가 있었다. 교장의 덕담을 30초 정도 넣으려고 했는데 후배가 2분 분량이나 찍어 와서, 이를 1.3배속으로 돌려 교묘하게 편집하느냐 솔직하게 말하고 다시 찍느냐 10분간 회의한 끝에 편집을 맡은 동기가 힘을 내 보기로 했다. 그 외에도 행사 상품을 최종 결정하고 축제 스태프 몇몇을 변경한 뒤 교실로 돌아왔다.

마침 마지막 수업이 끝난 시간이라,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담임이 들어왔다. 김지남 선생의 유일한 장점은 종례를 빨리 끝내 주는 거라고 했던가. 그는 전달 사항이 없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나가 버렸다.

아이들이 부산스럽게 가방을 싸서 교실을 나가고 청소 당번들이 슬슬 일어나 책상을 밀기 시작했다. 선호도 책가방을 등에 메고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늘도 방송부실에서 일하다 가야 한다고 엄마에게 연락을 하는데 눈앞에 팔이 하나 나타났다 사라졌다. 남자애답지 않게 늘씬하고 햇빛을 한 번도 받아 보지 않은 것처럼 창백한 팔이었다.

일순 몸이 굳었던 선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명은 이미 등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뭐지?’

재우네 분식점에서 함께 식사하고서 2주나 지났다. 그동안 한 번도 알은체하지 않던 이명이 갑자기 왜 책상 앞에 와서 얼쩡거렸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알 수 없었다.

‘바쁘니까 일단 일어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책상에서 무언가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책상 색과 비슷해 눈에 띄지 않았던 종잇조각이었다. 선호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영화감상부 상영회에 초대합니다*^^*♠♤

☆언제? ☞☞☞ 축제날 15:00

☆어디서? ☞☞☞ 1-8 교실

☆무엇을? ☞☞☞ 불후의 명작 ‘살인자들의 궁전’

글자도 몇 개 없는 쪽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동아리는 얼마나 예산이 없으면 초대권을 색상지에 프린트해서 잘라 주는지, 대체 디자인은 왜 이렇게 조악한지, 명색이 축제인데 왜 이렇게 난해한 영화를 골랐는지, 의문투성이였다.

그보다 이명은 왜 이 쪽지를 버리듯이 주고 가 버린 걸까. 선호는 뒷문을 바라보았으나 미스터리의 주인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호는 앉은 자리에서 여러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책상 앞까지 와서 손을 내밀었으니 실수로 떨어뜨리고 간 건 아닐 테다. 이명의 성격상 장난치는 것일 리도 없고.

선호의 시선이 다시 쪽지로 향했다.

초대합니다*^^*

‘하하. 이명에게 초대를 받다니.’

이명은 늘 혼자 다녀서 누구와도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그에게 초대받은 학생은 전교에 단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의식되고 손에 땀이 났다. 선호는 쪽지가 쪼글쪼글해지기 전에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방송부실로 향했다.

“선호 선배! 선호 선배! 졸업생 인터뷰 3번 방금 도착했어요.”

“그래? 파일은?”

“웹하드에 올려놨어요.”

부실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빴다. 선호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아나운서가 행사 진행 대본을 수정하면서 감수해 달라고 하는 바람에 다시 읽어 봐야 했다. 문서가 열리는 동안 축제 스케줄 표를 슬쩍 보았다.

‘3시면 동아리 공연이랑 시간 겹치네.’

선호는 잠깐 고민하고서 입을 열었다.

“상혁아, 내가 축제 날 3시부터 어딜 가야해. 2시간 정도.”

“정말요? 뭐 급한 일 있으세요?”

“응. 영화 감상부 상영회 초대받았거든.”

“네?”

“음향 세팅 다 해 놓고 갈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 줄래?”

“어, 네……. 저희 다 있을 거니까 별일 없긴 하겠지만……. 선배 정말 자리 비우시는 거예요? 그, 상영회 때문에요?”

“응. 왜?”

“그냥…… 선배답지 않아서요?”

선호는 대답하는 대신 씩 웃고서 문서 작업을 시작했다.

* * *

방송부실에 틀어박혀서 혹사당하는 나날은 축제 당일까지 계속되었다. 모든 영상 제작이 완료된 뒤에도 행사 및 공연 순서와 동선을 맞춰 보느라 수많은 동아리 부장들이 방송부실로 불려 왔다. 같은 반 애들은 수업의 반이나 빠진다며 부러워했지만 선호 입장에선 그리 좋을 것도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친구한테 필기를 보여 달라고 해서 따로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상영회 쪽지로 선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던 이명과는 대화하기는커녕 눈 마주칠 일도 없었다. 선호는 너무 바빴고 이명은 늘 그렇듯 조용했다.

그렇게 축제 당일이 되었다.

선호는 아침 9시부터 교무실과 강당, 운동장, 방송부실을 뛰어다니며 바삐 일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아나운서로서 점심 방송을 진행하고 이어지는 이벤트를 모니터링했다. 그동안 부원들이 찍어서 가져오는 영상들은 실시간으로 편집하는 아이들에게 넘겨 축제 마무리 영상을 만들게 했다.

3시가 되기 10분 전, 선호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최대한 대비해 둔 채 동기들과 후배들에게 방송부실을 맡기고 퇴장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하도 만지작거려서 너덜너덜해진 종이가 손끝에 닿았다. 꺼내 보지 않아도 내용이 이미 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선호는 여유롭게 1학년 8반 교실에 도착했다.

복도는 휑했다. 교실 앞에는 A4용지에 프린트한 포스터가 두 장 붙어 있을 뿐 곧 행사가 열릴 기미는 없었다. 영화 감상부는 그만큼이나 주목을 못 받는 동아리였다. 학교에서 부실을 내주지 않아서 1학년 교실을 빌린 것만 봐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선호는 뒷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내부는 제법 준비를 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책상을 치우고 의자를 늘어놓은 공간은 시시했지만 커튼을 쳐서 적당히 어두웠고 빔 프로젝터와 스크린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향도 꽤 신경 썼는지 교실에서 쓰는 제품이 아닌, 커다란 우퍼가 달린 스피커를 가져다 놓았다.

안타까운 점은 교실 안에 학생이 몇 명 없다는 점이었다. 달랑 관객 한 명이 팝콘 과자를 들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컴퓨터를 조작하는 아이 두 명은 동아리 소속인 것 같았다. 놀랍게도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마지막 한 명은 이명이었다.

초대권을 준 걸 보면 이명도 영화 감상부원일 텐데, 컴퓨터 앞에서 얘기하는 아이들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뒤로 꺾고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비밀스러운 생각에 푹 빠진 듯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두세 줄기의 빛이 그 장면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명은 선호가 바로 앞까지 다가갔는데도 멍하게 있었다. 가까이서 어깨를 톡 치자,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과격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비명을 크게 지르며 의자를 넘어뜨릴 뻔했지만 선호가 때마침 등받이를 잡아서 아무런 사고도 나지 않았다.

“미안. 놀랐어?”

선호는 작게 속삭였다. 교실이 워낙 조용해 어쩐지 영화관에 온 기분이라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이명은 입술을 꽉 다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크게 뜬 눈에 원망이 담겨 있었다.

“거기서 볼 거야? 중간에 앉자.”

이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아까 너무 놀란 탓인지 걸음걸이가 살짝 비틀거렸다. 그가 선호를 휙 돌아보며 작게 물었다.

“음료수…… 마실래?”

“응. 좋아.”

선호가 적당한 중간 자리에 먼저 앉자 이명이 왼쪽에 와서 앉았다. 손에 캔 콜라와 빨대가 들려 있었다. 얼결에 받아 든 캔은 미지근했다.

“명이야, 네 건?”

“네 것만 준비했는데…….”

“그러다 목마르면 어떡하려고? 이거 너 마셔.”

“아니야. 너 마셔.”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더 권할 수도 없었다. 선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책상에 종이컵과 나무젓가락 같은 집기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 보니 빨대 뭉치가 있길래, 주저하다가 한 개 더 집어 왔다.

‘너무 속 보이는 짓인가…….’

이성은 그리 생각했지만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캔을 따서 빨대 두 개를 꽂고 있었다. 선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같이 마시자. 이러면 되겠지?”

“난 괜찮은데…….”

선호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남은 빨대를 이명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때 준비가 끝났는지 영화 감상부원이 커튼을 더 꼼꼼하게 치고 교실 문을 닫았다. 나머지 한 명이 크게 말했다.

“영화 감상부 3차 상영회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 ‘여러분’이 선호와 앞줄에 앉은 남학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명까지 포함하는지 선호는 궁금해졌다. 이명은 영화 감상부원이면서 스태프다운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3시 타임에 상영할 영화는, 세기의 역작이죠? 예술적인 광기로 미쳐 버려서 지금은 정신 병원에 있다는 천재 감독 쟝 오귀스트 샤르도네가 2001년에 제작한 ‘살인자들의 궁전’입니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선호는 영화에 관한 장황한 설명을 흘려들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보았다.

“명이야, 너도 이 영화 잘 알아?”

“아니. 잘 몰라.”

“쟤는 완전 영화 애호가 같은데, 너네 부장이야?”

“잘 모르겠어.”

이명을 알면 알수록 불가사의한 점이 늘어났다. 그러나 마침 설명이 멎고 영화가 시작됐기 때문에 선호는 자잘한 의문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배급사와 제작사 타이틀이 나타나고 음침한 분위기의 음악이 흘렀다. 영화의 시작은 늘 기대되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유난히 입체적으로 들리는 음향이 제 심장이 요란하게 두근거리는 소리를 덮어 줄 것 같아서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매일 앉는 의자인데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르겠다. 그날따라 유난히 작게 느껴지고 등받이도 낮은 것 같았다. 다리를 어떻게 두어야 할지가 헷갈렸다.

이명은 약간 구부정하게 앉아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옆모습이 지적으로 보였다. 머리 위에서 쏘는 프로젝터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강하게 졌다. 속눈썹 그림자가 뺨 위로 길게 늘어지고 침침한 빛이 동공에 닿아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선호는 미지근한 콜라를 한 모금 빨고서 억지로 스크린을 보았다. 지루한 화면 속에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청불 등급을 버젓이 상영하는 동아리 부장의 용기가 가상했기는 했지만.

그보다 옆 사람이 말만 걸어도 화들짝 놀라던 이명이 정작 잔인한 장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명은 겁이 많은 사람일까, 아니면 대담한 사람일까.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할까. 영화 감상부는 왜 들어간 걸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시간은 느릿하게 흘렀다. 선호는 의식적으로 앞만 보고 있었지만 온 신경이 왼쪽에 쏠려 있었다. 비록 똑바로 바라보진 못해도 이명이 자세를 살짝 바꾸거나 팔을 올려 코를 긁는 행동 따위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화 중반, 잔인한 장면이 모두 지나가고 철학적인 성찰이 무겁게 다뤄지면서, 즉 전개가 극도로 지루해지면서 이명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 곧바로 알아차렸다.

자습 시간에 졸던 모습이 떠올랐다. 답지 않게 앞뒤로 헤드뱅잉 하다 코가 거의 책상에 닿았을 때 깨어났던가. 이명은 어쩌면 잠이 많은 사람이겠구나. 아니면 잠을 잘 못 이기는 사람이거나.

‘이번에는 이쪽으로, 이쪽으로…… 제발…….’

선호는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이명은 고개를 흔들거나 손을 뒤로 보내 제 어깨를 주무르는 등 잠 깨려는 노력을 몇 번 했지만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갈 길을 잃은 그의 머리가 앞으로, 뒤로, 이쪽저쪽으로 천천히 쏠렸다가, 기적처럼 오른쪽으로 기울다가…….

선호의 어깨 위로 살포시 떨어졌다.

‘만세.’

선호는 응원하는 축구팀이 역전 골을 넣었을 때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부터 영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혈관과 피부를 타고 쿵쿵 울리는 시끄러운 심장 소리와 이명의 고른 숨소리만이 귓가에 크게 울렸다.

왼쪽 어깨에 그의 볼이 얹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팔과 어깨도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서 살짝 닿아 있었다. 선호가 내쉬는 숨에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혀를 뻗어 그의 눈두덩을 핥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야.’

남의 눈두덩을 핥다니, 불쾌하게 대체 왜. 하긴, 남의 침이 묻은 손바닥도 핥고 같은 반 남자아이를 떠올리며 자위하는 놈이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선호의 입매가 자조로 구겨졌다. 이번에는 검은 동물을 끌어올 염치도 없었다. 선호는 자신의 몸을 잠시 동안 떠나, 교실 뒤편에 서서 이명이 기댄 고2짜리 소년을 관찰했다.

어깨를 경직시킨 채 눈알 외엔 아무것도 움직이고 있지 않은 아이를. 같은 반 친구를 대상으로 해선 안 될 생각을 하는 타락한 고등학생을. 온몸의 혈관마다 피와 함께 더러운 욕망이 흐르는 남자를.

한 달 넘게 외면해 왔던 사실은 그의 생각보다 작고 단순했다. 그런 동시에 명료하고 뚜렷했다.

선호는 이명의 손을 잡고 싶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을 제 손에 가두고 꽉 쥐고 싶었다. 그리고 손을 올려 그의 뺨을 감고 손바닥으로 볼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를 품에 안아 두 팔로 감싸고 싶었다. 입술을 부드럽게 맞대고 키스하고 싶었다. 어쩌면 욕망이 거기서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선호는 아직 그 너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건너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

선호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반장이었다. 이제까지 완벽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꽤 바르게 살아왔다. 사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착한 아이, 좋은 아들, 훌륭한 학생의 범주에 들기 위해 피나게 노력한 적은 없었다. 애초부터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는 애쓰지 않아도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대체로 상식선 안쪽에 있었다. 때때로 자신도 두려울 만큼 비열한 충동이 고개를 들 때가 있었지만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그러나 같은 반 남학생한테 반하는 건 상식선을 훌쩍 벗어난 일이었다.

선호는 의식적으로 사고를 멈추었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교실 뒤편에 서서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일도, 어깨를 짓누르는 이명의 존재감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 내는 일도.

어느새 4시 52분이었다. 웬만한 영화라면 러닝 타임이 끝나 갈 시간, 스크린에서는 처음 보는 인물들이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제대로 보지 않아서 기승전결 중 어디까지 왔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선호는 심호흡을 하고서 이명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받쳤다. 그가 깨지 않도록, 둘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던 것을 깨닫고 당황하지 않도록,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비록 그것이 오해가 아니더라도-오랜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원래대로 밀어놓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명은 깨지 않았다.

선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이 콜라를 빨아 마신 것과 이명이 한 번도 입을 대지 않은, 똑같이 생긴 두 플라스틱 빨대를 뽑아 나가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찍 오셨네요?”

“별일 없었어?”

“네. 있었으면 선배한테 바로 전화했겠죠? 공연 중에 진짜 웃긴 거 있었는데. 완전 난리 났어요. 영상 보실래요?”

“응.”

그러나 뱉어 놓은 말과는 달리 선호는 창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방송부실에 앉아 있었지만 사실은 1학년 8반 교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복도에, 신발장에, 구령대 앞에, 운동장 한가운데에, 교문에, 한솔 아파트 경비실 앞에, 이명이 갈 만한 모든 곳에 서 있었다.

냉담한 표정으로 공연 영상을 보는 시선은 몇 초마다 한 번씩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대략 30분 뒤, 배낭을 메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남학생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를 발견했다.

이명은 햇살 아래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앞뒤로 흔들며, 귀에는 신나는 걸 그룹 음악이 흘러나올 이어폰을 꽂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선호의 시선은 그가 교문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본 뒤에야 방송부실로 돌아왔다.

다시 모니터를 보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위기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어쩐지 내장이 꼬이고 핏줄이 헝클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은 언제나 선호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유복하고 안정적이고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쥐고 있었고 불운은 그를 피해 갔다. 주변에는 그의 부모를 비롯해 인격이 성숙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

선호의 세계는 원인과 결과가 뚜렷했다. 유감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무언가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노력하기만 하면 되었다. 세상은 선호가 보이는 성의에 반드시 보답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선호 사이의 보이지 않았던 협정에, 이제까지 잘 유지되던 신뢰 관계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이전에 없던 무언가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험한 것이 비집고 들어오도록 세계가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는 너무 모호해서 형태도 인과 관계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인지부터가 불확실했고 선호가 잘못해서 생긴 불행도 아니었다. 그러니 없애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선호는 초조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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