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호흡 2권
<목차>
15. 스물일곱, 겨울
2B. 열여덟, 겨울
3. 열여덟, 겨울
6. 열여덟, 봄
8. 열여덟, 여름
9B. 열여덟, 여름
10. 열여덟, 가을
11. 열아홉, 겨울
12. 열아홉, 겨울
16. 스물일곱, 겨울
1. 열일곱, 여름
15. 스물일곱, 겨울
처음 보는 골목들은 핏줄처럼 서로 얽혀 있었다. 그 안을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뒤섞여 혈류처럼 빠져나가고 밀려들었다.
가사가 뭉개진 유행가와 고함, 간헐적으로 울리는 차량 경적이 뒤섞인 소음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휙휙 바뀌는 광경에는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골목을 지나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버거울 정도로 화려한 시각적 자극에 원형은 흐려지고 색만 기억됐다.
짙푸른 거리, 녹색 거리, 노랑과 주황색 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지나며 버릇처럼 수를 읽었다. 상대가 취할 법한 행동을 예측해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을 설계한다.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선점해야 하는 요지를 짚어 낸다.
복잡한 전략을 거미줄처럼 확장해 나가면서도 이명은 분석이 무용하다고 느꼈다. 현실은 바둑이 아니며 그의 기재는 바둑판 바깥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공평하게 한 번씩 착점하지도 않는다.
현실의 이명은 8년 만에 만난 남자의 손에 이끌려 낯선 장소를 통과하고 있었다. 주도권은 상대가 쥐고 있었고 바둑처럼 기다리면 차례가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것은 얼마나 일방적일까. 가만히 저울질해 봤지만 그 질문은 마치 허공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끌고 가는 한선호 이전에 그의 손을 붙잡은 이명이 있었다. 그 전에 손을 내민 한선호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한선호를 남몰래 좋아한 이명이 있었다. 누가 주도하고 누가 따른단 말인가. 주도하든 혹은 이끌려 가든 뭐가 달라지는가.
어차피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을 잡은 순간에 속을 활짝 열어 보인 셈이니까. 반면에 한선호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으니 결국 그가 승리자일까? 이겨서 기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한선호가 꽉 붙잡고 있던 이명의 손을 놓은 건 온통 붉게 번들거리는 거리의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아, 하아…….”
“으응…….”
매일 다른 사람이 머물다 가는 방은 깔끔했지만 온기가 없었다. 미색 벽에는 정사각형 정물화가 걸려 있었고 그 외에는 필요한 가구만이 존재했다. 복도에서부터 붙어 있던 그들은 연인처럼 서로의 입술을 빨며 발을 움직였다. 쏟아지는 키스에 입술을 활짝 열면서도 이명은 자꾸 뒷걸음질 쳤다.
등이 벽에 닿자 커다란 손이 외투를 긁어내듯이 벗겼다. 이명은 밤처럼 캄캄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소매에서 팔을 뺐다. 스웨터의 성긴 코 사이로 한기가 스며들어 어깨가 살짝 떨렸다. 입술 위로 쪽, 쪽 소리가 나는 부드러운 키스가 몇 번 반복되더니 잇새로 다시 혀가 들어왔다. 그는 치열을 쓸고 입 안의 여린 점막을 헤집었다. 혀를 찾아 질척하게 얽자 뿌리까지 깊숙이 닿았다.
처음은 너무 놀라서 정신없이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확실한 자각이 들었다.
한선호와 키스하고 있구나.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한선호는 무슨 생각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을 멈추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는 혀도, 목도, 뺨에 닿은 손가락도 체온이 높았다. 셀 수 없이 그려 보았던 장면이었지만 실제는 상상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이명의 뺨과 목을 부드럽게 감싸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니트 위로 허리를 만지더니 능숙하게 엉덩이를 쥐었다. 맞닿은 입술 모양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코트와 스웨터를 벗어 바닥으로 휙 던진 한선호는 셔츠 차림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도 흰 교복 셔츠를 입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어릴 때는 순수하고 깨끗해 보였다면 지금은 건드리면 벨 것처럼 날카롭고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바지가 속옷과 함께 쭉 당겨져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민망해할 새도 없이 한선호가 한 손으로 엉덩이를 쥐며 상체를 밀착했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 그의 눈을 피했더니 이번에는 반대편 손이 성기를 감싸 쥐었다.
“아, 윽…….”
이명에게는 너무 빨랐다. 갈빗집 앞에서 키스한 것도, 한선호의 손을 잡고 모텔로 따라 들어온 것도, 들어오자마자 바지가 벗겨진 것도 갑작스러웠다. 자리를 옮겨 술이라도 한잔했다면 좋았을 텐데.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면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져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중간 과정을 건너뛴 채로 도달한 단계는 이명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비록 이런 배경에, 이런 식이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지만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으니까.
바르고 순진했던 소년은 기억 속에서 반짝반짝 웃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의 긴 손가락이 이명의 몸에서 나온 점액으로 끈적끈적하게 젖어 갔다. 순진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열해 보이는 눈은 그늘에 덮여 있었다. 밤처럼 어두운 시선은 마치 감시라도 하듯 한시도 이명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으읏, 흑.”
성기를 부드럽게 쥐었다 폈다 하던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지가 미끄러운 기둥을 천천히 타고 올라가자 이명의 몸이 움찔거렸다.
“으아, 아…… 앗!”
“뒤로 빼지 말고.”
낮은 목소리가 질척거리는 마찰음에 뒤섞였다. 뒤로 빼지 말라면서 그만큼 다가왔다. 그의 성기를 놀이처럼 능숙하게 손안에서 굴리는 한선호는 이명이 모르는 남자였다. 한때 간절하게 알고 싶었던, 그러나 알지 못했던.
“아……아!”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후들거리는 몸을 가눌 길이 없어 한선호의 몸에 무게를 실어 버렸다. 단단한 팔에 안기다시피 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붙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명은 한선호를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응……. 하아……. 앗.”
수치심과 함께 성감이 화악 올랐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한선호의 팔을 꽉 잡아 봤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똑바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가 만져 주는 것이 황홀할 정도로 좋으면서도 끔찍하게 싫었다. 훤히 드러난 성기와 허벅지가 부끄러워 그가 보지 않았으면 싶었고, 손대는 대로 흥분하는 제 몸이 원망스러웠다.
한선호가 손을 위아래로 강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이 마찰하는 속도에 따라 이명의 입에서 억누른 비음이 새어 나왔다. 소름 돋는 쾌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고 땀이 비 오듯이 내렸다. 땀방울이 눈두덩의 굴곡을 타고 흘러 눈시울을 적셨다. 뜨거운 자극에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부끄러움과 오랫동안 간직해 온 기억이, 두려움과 비밀스러운 미련이 한데 얽혀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한선호가 구둣발로 바지를 발목까지 밟아 내렸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악당의 음성처럼 들렸다.
“아! 아윽, 읏! 읏…….”
그는 이명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듯했다. 더는 참을 수 없겠다 싶은 순간,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짓이기고 이를 악물었는데도 폐가 신음을 위로 밀어냈다. 절정에 다다르자 눈앞이 흐릿해지고 공기가 모자랐다. 이명은 부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자 턱 끝에서 흐른 땀과 한선호의 손끝에서 미끄러진 정액이 검은 바닥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아, 하아…….”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검은 눈동자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들여다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이명은 눈을 감았다.
흥분을 감출 기색이 없는 숨결이 귓가에 부딪혔다.
“명이는 좋겠네.”
한선호가 속삭였다. 부드럽고 비열하게, 다정하고 싸늘하게.
돌연 그들이 공유했던 시간이 또 한 번 밀려들었다.
수돗가에서 물로 장난치는 아이들,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던 날카로운 예비 종소리, 같은 간격으로 정렬된 책걸상, 쇠 맛 나던 정수기 물, 먼지와 분필 가루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녹색 칠판, 유리로 된 실험 기구가 들어 있던 수납장, 오래된 커튼을 배경으로 떠다니던 먼지 같은 것들이. 시청각실의 자줏빛 의자들, 매캐한 냄새, 들어가자마자 기침이 나던 화학실의 답답한 공기가.
‘어휴……. 존나 노답임.’
‘와, 저러다 뒈지겠다. 하하하.’
‘부럽다. 나도 폐에 빵꾸나 낼까.’
‘군대 면제래. 부럽다.’
‘병신.’
제법 아련하게 시작한 회상의 끝은 쓰라린 상처였다. 이명이 학창 시절에 대해 간직한 기억이란 게 대체로 그랬다. 좌절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눈이 번쩍 뜨이듯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대체 뭐 하는 거지? 바보같이.’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양 들떠 있었던 게 못 견디게 우스워졌다. 학창 시절의 짝사랑이라 잠시 헷갈린 모양이다. 그 시절의 미련이 두 눈을 가려 이렇게 하면 그와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착각했나 보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도 스트레이트가 아니란 건 놀랍지만 여기까지 따라온 자신의 안일함이 더 놀라웠다.
상대는 생면부지나 마찬가지였다. 이명은 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선호에게 이명이란 끽해야 단지 폐병 걸려 민폐 끼치던 동창일 뿐일 텐데, 얼마나 만만해 보였으면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그것도 약혼반지까지 낀 놈이.
“……미안! 아, 안 되겠어.”
양손으로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한선호가 비틀거리며 이명의 팔 길이만큼 멀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침묵 위로 숨죽인 숨소리만이 흘렀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폐가 말을 듣지 않았다.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한선호의 손이 정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평소엔 타자를 치고 서류를 만졌을 화이트칼라의 손이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왜?”
대답할 문장을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이명은 생각도 말도 느린 사람이었다. 한선호가 그런 그를 기다려 줄 것 같진 않았다.
“너, 나 좋아하잖아.”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화살처럼 귀에 박혔다.
“뭐?”
“동창회도 나 보러 왔잖아. 친구도 없는 주제에.”
그가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래로 내리깐 눈에 냉기가 감돌았지만 입꼬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정곡을 찔린 사람은 발끈하기 마련이다. 이명은 비참함과 수치심을 숨긴 채 소리쳤다.
“웃기지 마……!”
한선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젖은 손을 뻗어 이명의 성기를 다시 쥘 뿐이었다. 그가 엄지로 귀두를 꾹 문질렀다.
“다 봤는데.”
“아, 헉……. 헉, 아윽!”
“술 마시면서 나만 보는 거.”
그의 왼손이 손목을 스르륵 스치며 소매 속으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약지에 사랑의 약속을 의미하는 금색 반지가 끼워진 손이었다.
긴 손가락이 뱀처럼 옷감을 천천히 밀어 올리며 팔뚝까지 기어 올라왔다. 한선호는 팔 안쪽의 여린 살갗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만할까?”
손바닥의 뜨거운 온도와 냉랭하다 못해 벨 것 같은 차가운 눈빛은 한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모르는 남자였다. 이명은 이런 사람을 알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문 이명과 달리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로. 침묵이 그들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동안에 허옇게 드러난 이명의 허벅지 위로 쿠퍼액이 길게 흘러내렸다. 이명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한선호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만할까?”
꿈에서조차 간절히 닿기를 원했던 입술이 비틀리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선호는 선택권이 이명에게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명은 아무 선택권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늘에 숨어 양지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소년을 지켜보던 그는 철저한 약자였다.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맨살을 드러낸 채 속 모를 눈을 한 한선호를 올려다보는 이명은 그 앞에서 여전한 약자였다.
숨 막히는 정적에 입 안이 바싹 말랐지만 이명은 뺨 위로 흐르던 땀이 턱 끝으로 흘러내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한선호는 그동안 무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을 뿐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상황이 절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명은 자신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앞뒤 상황과 한선호의 속 모를 태도, 자존심,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
화점마다 흑돌이 깔려 있었다. 이것은 미지의 상대와 두는 아홉 점짜리 접바둑 같았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짝사랑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 버린다. 머리 쓰는 걸 업으로 삼은 사람조차도.
이명은 바보가 된 기분으로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한선호에게서 멀어졌던 만큼 다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치는 입술을 받아 내며 눈을 감았다. 혀를 깊숙이 섞으며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으음…….”
한선호의 키스는 자신들이 연인 사이라 오인할 만큼 부드러웠다. 살갗에 닿는 뜨거운 체온과 속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목소리, 입술을 삼키는 부드러운 키스와 성급하게 몸을 더듬는 손길 – 그중 어느 것이 자신이 알았던 한선호인가.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키스를 받아 내며 이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곤 그의 입술에 모든 것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 간절히 매달렸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지…….”
싫다고 말할 줄 모르던 음성이 처음으로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인지 주저하듯이 내뱉어서인지 한선호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허리께에서 맴돌던 손이 터틀넥을 어깨까지 밀어 올렸다. 창밖에서 흘러들어 온 희미한 달빛이 훤히 드러난 가슴 위로 쏟아졌다.
이명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밑바닥까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한선호의 팔을 붙들었다.
“반지, 빼.”
“왜, 신경 쓰여?”
“빼.”
가슴을 더듬던 손이 아쉬운 듯 떨어졌다. 한선호는 두 손을 겹치더니 말없이 반지를 뺐다.
이명은 그거면 되었다고 자위하며 팔을 뻗었다. 근육질로 단단한 엉덩이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리다, 당장 시작하고 싶다는 듯이 검은 브리프를 벗겨 내렸다. 비참함을 숨기기 위해 차라리 섹스에 미친 남자를 자처했다.
눈앞의 남자는 그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두려운 존재였다. 잡생각이 머릿속으로 침투할수록 괴로웠다. 이명은 한선호의 옷을 모두 벗겨 내고 그를 서둘러 침대로 이끌었다.
“이쪽으로.”
한선호가 손에 소중하게 들고 있던 무언가를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는 걸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스탠드 전등을 켜자 금빛 반지가 반짝거리며 불빛을 반사했다.
‘불, 껐으면 좋겠는데.’
한선호에게 붙잡힌 몸은 잔뜩 굳어서 말을 듣지 않았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아무리 막아도 목구멍에서 거칠게 튀어나오는 숨을 힘없이 내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선호는 이명의 위로 몸을 겹치는가 하더니 그의 몸을 휙 돌렸다. 허리를 잡아당겨 그를 무릎 꿇리고선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체온 높은 가슴이 등에 가까이 밀착하더니 한선호가 손을 뻗어 페니스를 자연스럽게 쥐었다.
커다란 손은 아무렇지 않게 이명의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갖고 놀았다. 손바닥으로 기둥을 완전히 감싸고 쓸어 올리기를 반복하다가 돌연 꽉 쥐었다. 그러다 엄지로 귀두를 살살 만지며 안달 나게 했다.
“하으, 읏…….”
너무 쉬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몸이 들리며 또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허리가 비틀릴 때마다 제 등을 감싼 탄탄한 가슴이 느껴졌다. 이명은 한선호의 양팔 안에 갇힌 채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팔딱거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신음을 흘리던 그때 무언가가 허리를 툭 때렸다. 이명이 몸을 비틀 때마다 닿았다 떨어졌다 하던 그것은 곧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며 위아래로 마찰했다. 낮은 음성이 들렸다.
“내 것도 만져 줘.”
이명은 제 엉덩이 위를 비비던 페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맞닿은 몸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성기는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데다 쿠퍼액으로 미끌미끌했다. 게다가 자꾸 흔들거려서 손안에서 몇 번이나 빠져나갔다.
이명이 제대로 만져 주지 못했는데도 한선호의 숨결은 금세 거칠어졌다. 그는 몸을 조금 떨며 상체를 바싹 붙이더니, 축축한 혀로 뺨을 핥아 올렸다. 짐승처럼 구는 그의 모습에 두려운 기분이 드는 한편 흥분으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
“하아, 하아…….”
한선호는 감질난다는 듯 이명의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묻고 앞뒤로 비볐다. 동시에 이명의 페니스를 쥐고서 빠르게 흔들었다.
“아……! 아아, 아!”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생각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존심이 강했다면,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았겠지.’
이미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자괴감이 파고들 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명은 한선호에게 몸을 완전히 맡기고서 내키는 대로 신음을 내질렀다. 그러고 있으니 정말로 섹스에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잠깐……. 으읏, 나…….”
곧 사정할 것 같다고, 그만하라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문장을 끝까지 완성할 수 없었다. 한선호가 이명을 뒤에서 더 강하게 덮치며 팔을 더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토하듯이 내뱉는 달뜬 숨결과 목울대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의 팔에 더 애타게 매달렸다.
“아, 아윽, 흣……!”
이명은 절정을 맞는 동시에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팔을 휘청거리며 엎드린 자세로 정신없이 숨을 골랐다. 성기 끝에서부터 쿠퍼액과 정액이 음란하게 엉겨서 아래로 쭉 흘러내렸다. 침대를 받친 팔이 눈에 띄게 떨렸다.
한선호는 그에게 수치심이든 복잡한 감정이든 천천히 곱씹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운동으로 단련된 가슴이 등에 착 소리를 내며 닿았다. 한선호는 이명이 도망칠 수 없도록 무게로 짓누르고서, 그의 어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넣을게.”
강한 손길이 허벅지를 쥐었다. 엉덩이가 억지로 벌어지고 부풀 대로 부푼 성기가 틈새로 파고들었다.
“아, 아웃…….”
고통스러운 신음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지만 한선호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좁은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민 페니스는 느릿하게, 그러나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뻑뻑한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젠틀했던 건 넣겠다는 예고뿐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이명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한선호는 페니스를 끝까지 쑤셔 박았다. 좁은 안이 성기를 감싸 조이자 그가 이명의 목뒤에 얼굴을 묻으며 몸을 눌렀다.
“아, 하아! 윽…….”
꿰뚫린 입장인 이명은 당혹스러웠다. 한선호는 페니스를 밀어 넣기만 했을 뿐인데 민감한 부분이 단단한 살덩이에 짓눌리며 눈앞이 새하얘졌다. 사정으로 나른했던 몸이 다시 경직되며 하강 곡선을 그리던 흥분이 도로 치솟았다.
한선호가 몸을 살짝 비틀자 이명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질렀다. 그것은 그의 몸이 받아 내기엔 너무 두꺼워서 가만히 있어도 내벽을 억지로 밀어냈다. 몸이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과 감당하기 버거운 자극이 함께 밀려들었다. 상체가 저절로 들리고 목이 뒤로 꺾였다. 시트를 쥐고서 어떻게든 견뎌 보려고 했지만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한선호가 성기를 입구까지 천천히 빼내는 동안 이명은 그의 귀두가 제 몸속에 남긴 궤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입을 막은 것처럼 숨을 참고 있던 그는 성기가 빠져나간 틈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한선호는 곧바로 강하게 삽입했다. 돌처럼 단단한 페니스가 내벽을 짓뭉개며 이전보다 깊은 곳까지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아윽, 흑!”
그는 잠깐 빠져나갔다가 또다시 끝까지 밀려들었다. 그렇게 서너 번 반복하고 나니 이명은 이미 진이 빠진 기분이었다. 지쳐 쓰러진 사람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신음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왔고 몸은 수영장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한선호는 이번에는 움직이겠노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지 않았다. 그저 이명의 허리를 끌어안고 하체를 일정한 속도로 치댔을 뿐이다. 거칠다곤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정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기계적이라고 할 법한 운동인데도 이명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 윽, 윽!”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지면서 삽입도 깊어졌다. 처음에 절제하는 것처럼 보이던 왕복 운동은 금세 고환이 엉덩이를 철썩철썩 쳐 대는 피스톤질로 바뀌었다. 입이 벌어져 타액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시트 위로 땀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아, 윽!”
그때 한선호가 이명의 등을 손바닥으로 눌러 아래로 밀어 내렸다. 마치 그의 상체가 섹스하는 데 거치적거린다는 듯 냉정한 태도였다.
연인처럼 다정한 행위를 바라지는 않았어도, 얼굴을 시트에 처박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르는 힘을 못 이긴 팔이 휘청거리다 접히며 그대로 침대 위로 엎어졌다.
한선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명의 한쪽 허벅지를 붙잡아 넓게 벌리며 더욱 가까이서 하체를 쳐올렸다.
“허억, 헉…….”
비참한 기분과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이는 쾌감이 공존하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명은 어떻게든 손바닥으로 몸을 지탱하려 했으나 페니스가 안으로 파고들 때마다 몸이 흔들리며 자세가 무너졌다. 한선호는 몸을 오래 맞춰 본 사람처럼 이명이 어디에 약한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았다.
퍽퍽퍽, 퍽퍽. 절제된 숨소리 외엔 살갗끼리 부딪치는 마찰음만이 귓가에서 부서졌다. 어느새 이명은 볼을 침대에 댄 채 엉덩이만 들고 엎드려 있었다. 머리가 아래로 처박힌 채, 입에선 원치 않는 신음이 흘러나오고 몸은 힘없이 흔들거렸다. 그런 중에도 성기가 안을 짓누를 때마다 배 속에서부터 번져 나가는 쾌감이 버겁기만 했다.
“아읏. 앗.”
그와 몸을 섞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섹스를 원했던가.
다행스럽게도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가를 가려 주었다. 차라리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리고 제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이 그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이명은 생각했다. 마치 지금 이 섹스가 서로의 희망 사항이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공정한 거래였던 것처럼 보인다면 덜 비참할 테니까.
그러니 한선호는 몰라야 했다. 18세의 이명이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그를 동경했는지, 27세의 이명이 선뜻 그를 따라온 배경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그것이 보이는 것보다 얼마나 무겁고 끈질기며 오래된 성질을 띠고 있는지.
동물이 교미하는 것 같은 자세로 뒤를 쑤셔 박히고 있는 지금도 눈앞에는 환하게 웃는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햇살처럼 환하게 반짝거리는.
“아! 흑, 흐윽…….”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도 자꾸 사이드 테이블 위로 시선이 갔다. 누군가와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의미로 탁자 위에 난 동그란 모양의 그림자.
“헉, 허억, 윽!”
무너지고 안달하는 것은 이명뿐, 한선호는 행위 중에도 침착하기만 했다.
이렇게 비참해질 줄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침대로 올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그보다 전에 그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는데. 동창회 자리에 들어서서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이러한 결말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아니다. 애초에 동창회 같은 델 가지 말았어야 했다.
“윽. 흐윽, 흣. 아윽……!”
뺨 위로 눈물과 땀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이 더욱 비참했다. 거친 행위의 반동으로 몸이 떨릴 때마다 속눈썹에 맺혀 있던 눈물이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명은 자신이 이깟 쾌락 따위를 얻으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그리고 시체처럼 축 처진 채로도 쾌감을 느끼는 몸뚱이가 못내 증오스러웠다.
사실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그와 하나가 되고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그와 맞닿고 싶은 욕망이 한심해도, 그게 이명이었다.
숨넘어갈 것처럼 신음을 흘리다 보니 급기야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쾌감과 고통이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듯이.
‘와, 저러다 뒈지겠다. 하하하.’
‘병신.’
이명은 기침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침대보에 입을 묻었다. 한선호 앞에서 또 약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땅에 파묻히고 싶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이명을 곤혹스럽게 해 온 기침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멋대로 열린 입이 고통과 절망을 짖듯이 내뱉었다. 물기 어린 신음과 건조하기 짝이 없는 기침이 뒤섞였다.
그때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안아 올렸다. 다 이해한다는 듯이 뜨겁고 따뜻하게.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까? 9년 전처럼 손바닥으로 입을 감싸는 행동에 울음이 왈칵 났다. 그러나 손길만 다정할 뿐 조금도 쉬지 않고 박아 대는 허리 짓은 그대로였다. 몸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성기가 좁은 공간에 길을 내며 들락거렸다. 이미 맞닿아 있는데도 더 깊이 들어가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밀어 넣었다.
‘싫어.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이명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고통을 견디며 한선호를 바라본 순간,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튀고 달아오른 몸이 맞부딪쳤다. 뜨거운 손바닥이 어깨를 쓰다듬었고 두 개의 몸이 같은 속도로 오르내렸다. 이명은 가장 내밀한 몸의 대화 도중에도 한선호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으로 시트를 쥐고 견뎌도 봐주지 않는 한선호와 다정하게 등을 끌어안는 한선호. 강압적인 행위와 부드러운 손길 중 어느 것이 그의 진정한 모습일까.
“명이야.”
낮고 간절한 음성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귓가에 부딪히는 거친 숨소리 사이로 빗물이 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이 치고 있었다. 이명은 천둥소리를 좋아했다.
“허억, 흑, 윽…….”
“하아, 하아……. 명이야.”
“으윽! 흐윽.”
한선호가 어깨를 부드럽게 당기자 이명은 그대로 끌려갔다. 곧 뺨에 축축한 입술이 닿았고, 뜨거운 혀가 볼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명이야……. 울지 마, 응?”
한 점의 그늘도 없이 반짝반짝 빛나던 소년의 음성이었다. 이명은 가슴이 아리도록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