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42)

“으……, 허리 아파.”

한 달이 넘도록 쉴 새 없이 섹스하고, 또 섹스했다. 한서림은 섹스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응했고, 섹스하지 않을 때도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늘 가운만 걸친 채 생활했다. 일종의 시위이자 밖에 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 어필하는 행위였다. 나갈 생각이 없다는 믿음을 주면 강해건이 틈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한 달 내내 성질을 죽이고 기었는데도 강해건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저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경계심이 높았다.

“연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한서림이 강해건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그를 속여서 신뢰를 얻고 경계를 허무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착각했다. 진심으로 강해건을 사랑하는데도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은 감금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인지,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과 배신감을 억누르는 게 쉽지 않았다. 강해건에게 가진 반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연기하는 일은 꽤 감정 소모가 큰일이었다. 이렇게 힘겨운 감정 노동을 업으로 삼고 있는 배우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여기가 몇 층이더라……. 떨어지면 죽겠지.

한서림은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서서 까마득하게 먼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서 뛰어내리는 일은 미친 짓이었다. 그걸 아니까 강해건도 베란다에는 나갈 수 있도록 해둔 것일지도 모른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계절에 이 집에 감금당했는데,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었다. 한국 지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놨기에 다행이지, 한국에서 론칭한 지 얼마 안 된 회사마저 엉망이 될 뻔했다. 그랬어도 강해건은 넘쳐나는 돈으로 배상했을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신향수 출시는 병원에서 입원해 있던 당시 강해건의 노트북을 빌려 상황들을 점검했으니 지금은 안정기였다. 그나마 타이밍이 맞아서 다행이었다.

“미쳤구나…….”

이 상황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어이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뭐 이런 상황에까지 적응하나 싶었다.

“비나 주륵주륵 내려라, 세상 사람 전부 다 밖에 못 나다니고 집에 갇혀 있게.”

강해건 외에 대화할 사람이 없다 보니 혼잣말도 늘었다. 제가 원래 말이 많은 스타일이었는지 떠올려 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할 말을 참았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그렇다고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페로몬 학대의 후유증으로 늘 협소하고 비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니콜라스나 에드워드, 제이든, 강유건, 모주원을 제외하고는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모주원은 그 리스트에서 삭제되었고, 강유건은…….

“씨발,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제가 강해건에게 감금당했다는 걸 강유건이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리스트에서 삭제할지 말지 결정할 것이다. 아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라면 과감히 삭제할 것이고,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거라면 정상 참작해줄 것이다.

“정상참작은 무슨…….”

갇혀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니까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한다.

내내 외출하지 못한 탓에 몹시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공허하고 무력했다. 제가 적응했다고 판단했는지 강해건이 외식이나 데이트 핑계로 몇 번이나 외출을 권했지만, 한서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경호원들을 줄줄이 달고 감시받으면서 다닐 생각은 없었다. 또한 거절해야 제가 나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게 어필될 것 같기도 했다. 한서림은 하루빨리 강해건이 경계심을 풀길 바랐다.

그러나 한 달이 넘어가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고, 오히려 한서림이 먼저 지쳐버렸다. 감정 소모가 지나치게 컸다. 정말로 여기서 떨어지면 죽으려나……, 하릴없는 생각을 진지하게 할 만큼 피로감이 컸고 정신적으로 고된 나날이었다.

“밥 먹어야죠.”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강해건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베란다로 나와 한서림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제는 이런 스킨십에도 익숙해져서 한서림은 밀어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문득 막막해졌다.

“왜 또 안 먹었어요. 그러다 몸 상하면 어쩌려고.”

강해건이 목덜미에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으며 걱정스러운 음색을 냈다. 가증스러웠다.

“생각 없어.”

한계였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유린당한 인권 앞에서 한서림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그러다 강해건의 경계심을 그나마 낮출 수 있는 인물을 떠올렸다.

“유건이 보고 싶어.”

한서림은 돌아서서 강해건을 마주 안으며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부디 강해건이 흔들리기를 바랐다.

“해건아. 유건이라도 만나게 해줘.”

“……그건 곤란해요.”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형 만나게 해달라는 거잖아. 아무도 못 만나게 하니까 그나마 네가 안심할 수 있는 친구로 말한 건데…….”

한서림의 눈에 금세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우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곤란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진짜로 서러워져서 울컥거림이 올라왔다. 이건 사람의 생활이 아니었다. 끼니때에 맞춰서 배달 음식이 오고, 강해건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대부분 섹스했다.

강해건이 외출하면 베란다에 나와 멍하니 바깥을 보는 게 전부였다. 몇 번은 복도까지 나갔었는데 경호원들과 마주치는 게 수치스럽고 꺼려져서 이후로는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강해건의 귀에 들어갈까 봐 엘리베이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문 등록이 삭제되었는데 경계심을 높일 필요가 없는 탓이었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휴대폰이나 노트북 등의 전자기기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강해건은 TV까지 없애버렸다. 욕실을 제외한 모든 집안에 CCTV가 잔뜩 설치되어 있어서 언제나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게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한서림이 받고 있는 사랑은 잔악하고 참혹했다. 타인의 사랑을 재단하고 평가할 생각은 없지만, 강해건이 사랑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일방적인 사랑은 보는 시각에 따라 폭력이 될 수도 있었다.

97.

“부탁이야. 유건이라도 한 번만 만나게 해줘. 너도 같이 있으면 되잖아.”

한서림의 애원이 간절했다.

“미안해요. 내가 같이 있는 조건으로도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왜…….”

“……서림 씨가 강 전무한테 도움이라도 청하면 안 되잖아요.”

강해건이 난처한 표정으로 잔인한 말을 뱉어냈다. 이제 정말 한계다. 끝의 끝이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살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난간 아래로 몸을 날리고 있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한서림은 강해건의 몸을 거칠게 밀쳐낸 후,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 애써 감춰왔던 본성을 드러냈다.

“그래서 평생 나를 여기에 가둬놓고 살겠다고? 내가 밥을 자꾸 안 먹어서 걱정 돼? 왜 안 먹는지는 생각 안 해 봤어? 씨발, 짐승처럼 가둬놓고 섹스만 하는데, 내가 밥이 넘어가겠냐고! 이게 네가 말한 사랑이야?”

“섹스를 먼저 하자고 한 건 서림 씨였잖아요.”

“그렇게라도 해야 나한테 질릴 줄 알았지. 지금 그게 요점이 아니잖아! 너는 정말 질리지도 않아? 제대로 된 대화도 안 되고, 우리가 하는 거라고는 섹스밖에 없는데, 이게 정말 너는 괜찮다는 거야?”

한서림의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서럽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막막하고 끔찍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엉망으로 뒤섞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강해건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서림 씨가……, 조금만 마음을 바꿔줘요. 그동안 내가 잘못한 거 만회할 기회 받고 싶어요.”

“그런 놈이 지금 나 가둬둔 거잖아! 이게 만회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후우……. 해건아, 나한테 한 달만 시간을 줘.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뉴욕에서 잠깐만 쉬고 올게. 정말 돌아올 테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심호흡을 하고 급하게 태세전환을 했으나 강해건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한서림은 마지막 발악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물로 호소했다.

“너 나 사랑한다며. 해건아, 나 사랑한다면서 그 정도 믿음도 없어?”

“……이혼하자고 했던 사람인데, 내가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버릴지 어떻게 알아요.”

“절대 안 그럴게. 사랑해, 해건아.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잖아. 나한테는 이제 너밖에 없어. 한 번만 믿어주라, 응?

강해건의 온기 어린 손이 한서림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제야 강해건의 울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연기의 기본은, 눈빛 연기라니까…….”

꽉 잠긴 젖은 음성이 애달팠다. 그저 서로 사랑했을 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서림이는 어떻게 지내? 내 연락도 안 받던데…….”

강유건이 걱정을 비쳤다. 서정 그룹 본사 전무이사실에서 강유건을 마주 보고 앉아 있던 강해건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한서림의 휴대폰을 돌려주지 않았으니 연락을 안 받는 게 당연했다. 그 흔한 비밀번호조차 걸려있지 않은 휴대폰을 틈틈이 확인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한서림에게 전달해주어야 할 만한 중요한 연락은 없었다.

“쉬고 싶은가 봐.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겠대.”

한서림의 입에서 가끔씩 나오는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인 걸 알면서도 강해건의 심장을 욱신거리고 저릿하게 만들었다. 강해건 스스로도 제가 미친 것 같았다. 그런데 헤어지려고만 하는 한서림을 억지로 잡아두는 것 말고는, 도무지 옆에 둘 방법을 모르겠다. 한서림이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둬놓고 저만 보고 제 통제하에 움직이는 걸 보니 흡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정 박사님은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더라. 쉽사리 결정을 못 하시네.”

“그렇겠지. 평생을 강 회장 개로 살아왔는데.”

강유건은 강 회장이 먹였던 약을 정 박사가 처방했다는 사실과 그간의 상황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강 회장에게 보고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강해건에게 이미 전부 털어놓은 상태였다.

정 박사에게 드는 배신감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강해건은 돈의 힘과 돈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기에 오히려 역이용해서 정 박사를 제 편으로 끌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정 박사를 매수하는 일은 강유건이 자처해서 맡았다. 그것만으로도 강유건이 얼마나 미안해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었으나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왜 불렀는데.”

강해건의 짧은 저음에 강유건이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봉투 중 두꺼운 것과 함께 USB를 하나 밀어주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자료의 전부야. 아버지 탈세 내역이랑 차명 계좌 리스트, 접대랑 뇌물 수수 비리 리스트, 두 달에 한 번씩 갖는 모임에서 벌인 마약 파티랑 난교 파티의 증거들.”

“……더러워서 진짜.”

“난교 파티는……, 나도 좀 충격적이긴 했어.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왔다가 약에 취해서 강제로 당한 애들도 있더라. 원한다면 그 애들을 증인으로 확보할 수도 있,”

“강 전무. 이런 걸로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아?”

강유건의 노력은 가상했으나, 강해건은 들끓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린 애한테 십 년이나 그런 약을 먹인 걸로도 모자라서 페로몬 폭주까지 일으키게 했어. 그뿐이야? 손주 보겠다고 강제 정혼까지 진행하더니 결국 한서림을 죽일 뻔했어. 나와 한서림의 아이를 죽인 것도 결국 그 인간이야. 그런데 뭐? 사과는 고사하고, 쓸모없는 오메가 몸뚱이에서 페로몬 샘 하나 제거한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손주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 어떻게 하겠냐고? 몸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빨리 다시 임신시키라고?”

강 회장과의 시간을 떠올리자 다시금 그때의 분노가 샘솟았다. 강해건은 애써 화를 누르는 것처럼 뼈마디가 불거져 나올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버지가 말이 심하시긴 했어.”

“심하기만 해? 그게 인간이 할 말이야? 다 깨부수고 뒤집어엎고 나왔는데도 분이 안 풀려. 대업을 위한 희생은 언제나 있어 왔다고? 씨발, 좆같아서.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그렇게 뻔뻔하게 해? 그래, 차라리 아버지가 역겹게 반성하는 척이라도 안 해서 다행이지. 그랬으면 나도 진심으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거든.”

“…….”

“그런데 나한테 고작 이런 거로 만족하라고? 이 중에 처벌받을 수 있는 거 얼마나 되는데? 강 회장 정도면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전부 빠져나갈 수 있는 것들이잖아.”

마약 파티나 난교 파티가 이슈화된다면 강 회장도 어느 정도 타격은 받을 것이다. 그뿐이었다. 강 회장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에는 마약과 난교를 덮을 수 있는 연예인 비리와 스캔들이 차고도 넘쳤다. 법조계를 쥐고 흔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할 만한 방법을 모르겠어. 죽여버리는 거 말고는. 당장 목을 졸라서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는 거야. 아니, 그날 깨부수고 뒤집어엎으면서 실수인 척 죽였어야 했어. 살인자가 되면 한서림을 못 보게 될까 봐 어떻게든 이성을 잡고 있었는데, 그래서 고작 그따위 분풀이밖에 못 한 게 후회돼서 미칠 것 같다고.”

“해건아…….”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커서 그렇지, 강 전무를 용서했다는 건 아냐. 한서림이랑 엉망이 된 거 생각하면 아직 화가 나.”

실상은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몇 번이고 사과한 후에 숙이고 들어오는 강유건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쏟아낼 수는 없었다. 잠시 강해건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강유건이 남은 서류봉투도 강해건의 앞으로 밀었다.

“뭔데.”

“내 차명 계좌 리스트랑 접대, 로비 받은 내역 증거들.”

“어쩌라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게 해서 네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나는 법망을 피해갈 생각 없어.”

사실 강유건도 얼떨결에 휘말린 것뿐이었다.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강 회장과 강해건의 사이가 박살날 것이 우려돼서, 걱정되는 마음으로 숨겼던 것이다. 찾아 헤매던 오메가가 한서림이라는 사실은 강해건에게 듣고 알았다. 물론 한서림의 정체를 알았다면 강유건이 어떻게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유건이 악의로 숨긴 게 아니라는 건 강해건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해건은 강유건에게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마음의 빚이 있었다. 페로몬 폭주를 일으키게 만든 오메가에 대한 증오가 싹트게 된 원인이었다.

잠시 서류봉투를 노려보던 강해건은 곧은 손가락을 뻗어 다시 강유건의 앞으로 밀었다.

“나 때문에 강 전무도 6개월이나 병원 신세 지고 애 못 낳는 몸이 됐는데, 내가 또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아. 강 전무 고소하고 내 마음은 편할 것 같아?”

“…….”

“근데, 나 이제 그 죄책감 버리려고.”

몸을 망가트린 것과 진실을 숨긴 것은 비할 수 없는 크기의 죄였다. 비겁하다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강해건은 기회가 왔을 때 완전하게 벗어나고 싶었다.

“강 전무가 그동안 강 회장 감싸주고 나 속인 거랑 한서림과의 관계를 전부 망쳐버린 거, 그걸로 끝내. 나 더는 형한테 죄의식 안 가질 거야.”

비로소 강 전무에게서 졸업하고, 강 전무를 졸업시키는 과정이었다.

98.

“실패하면 어떡하지…….”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게스트룸에 틀어박힌 한서림은 손에 라이터를 쥐고 쪼그려 앉은 채 불안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오랜만에 가운이 아닌 제대로 된 옷도 갖춰 입었다.

강해건하고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빌어도 보고, 울어도 보고, 매달려도 보고, 설득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지랄도 떨어보고, 깨부수기도 해보고, 갇혀서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해봤지만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강해건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한 건 아닌데, 이런 방식으로는 도무지 그의 곁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다치고 지친 마음과 정신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탈출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것이 염려되었다. 한서림은 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인데, 저 살자고 타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를 저질러야 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서 포기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나갈 것이다. 그러니 부디, 화재경보와 스프링클러가 늦지 않은 타이밍에 정상적으로 작동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한서림은 굳은 결심을 하고 라이터를 켰다. 라이터는 강해건이 밤마다 향초를 켜줄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감금당한 이후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한서림을 위해서 강해건이 이중호의 조언을 받아 향초를 사 왔을 때는 비웃었는데, 향초에 불을 켜기 위한 라이터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한서림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 실전이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침대 이불에 불을 붙이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불은 금세 번졌고, 한서림은 타이밍을 재며 잠시 기다렸다. 너무 빨리 나가면 복도에 비치된 소화기로 불길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스프링클러가 작동되고 화재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침대가 활활 타오르며 불길이 번지는 것을 확인한 후 한서림은 다급하게 현관으로 달렸다. 등 뒤로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며 후끈한 열기가 덮쳐오고 있었다.

“119, 빨리 119 불러요!”

“119요?”

“불났다고요! 빨리 나가야 돼요! 늦으면 엘리베이터도 작동 안 해요! 여기 갇혀서 다 타죽고 싶어요?”

한서림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절박하게 연기했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최악의 경우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검은 연기의 양이 많아지고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스프링클러가 불길을 잡아서 연기가 탁해진 것 같았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경호원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 팀장이 지체 없이 엘리베이터를 호출했고, 다른 경호원은 119에 신고했으며, 한서림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이대로 멈추지 않고 1층까지 도착해야 한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거렸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멈춰 입을 벌린 후에야 작동을 멈췄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연기를 마셔서 그런지 좀 어지럽긴 한데, 괜찮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다친 사람이 없는지 서로를 살폈다. 요란한 화재경보에 너도나도 아파트 건물 밖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한서림은 부디, 제발 피해자가 없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불이 꺼진 것인지 최상층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다.

곧이어 소방차가 도착했고, 앰뷸런스와 경찰차도 도착했다. 인명피해가 없고, 스프링클러 덕분에 이미 화재가 진압됐다는 소식에 한서림은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도 않았는데 헛웃음부터 나왔다. 그제야 제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미친 짓이었는지 실감이 됐다.

드디어 감옥에서 벗어났다.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병원 말고…….”

전화로 강해건에게 보고를 끝낸 최 팀장이 한서림을 부축했다.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최 팀장과 경호원들이 있는 이상 감금은 계속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가장 걱정하고 우려했던 일이 일단락됐으니,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실행해야 했다. 한서림은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에게 다가가 당당한 음성을 뱉어냈다.

“제가 일부러 불을 질렀습니다. 제가 범인이에요. 제발 경찰서로 데려가 주세요.”

한서림이 양쪽 손목을 내밀고 수갑을 채워 달라면서 웃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한서림은 자신이 방화범이라고 체포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으면서, 정작 경찰서에 도착한 순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서를 꾸려야 한다고 설득하던 경찰들도 전화 한 통을 받은 이후부터는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한서림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저뿐만 아니라 무고한 불특정 다수가 다칠 뻔했다. 이불에 붙은 불이 번져나가는 속도는 상상했던 것보다 빨랐고, 화재경보가 울리고 스프링클러가 작동되는 타이밍은 한서림이 예상했던 것보다 늦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른 건지 모르겠다. 단순하게 더는 못 견디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해야 한다고, 오로지 그 생각만이 가득했었는데 기어코 미친 짓을 했다. 라이터로 이불에 불을 붙였던 오른손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고장 난 것처럼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왼손으로 거세게 붙잡고 있는데도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조사실에 들어가 계셔도 됩니다. 강 전무님이 연락 주셔서 장소만 빌릴 수 있었습니다. 여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니까 들어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최 팀장이 다가와 한서림을 부축하려고 했다. 어떻게 강유건의 귀에도 들어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해건과 함께 있다가 얘기를 들었거나 따로 연락을 받았겠지 싶었다.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한서림은 최 팀장의 부축을 거절하고 긴장이 풀려 후들거리는 다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신은 물론 마음과 몸까지 만신창이였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드세요. 진정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최 팀장이 종이컵에 티백을 넣은 따뜻한 차를 한서림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저 의뢰받은 대로 일하고 있던 죄 없는 경호팀도 위험할 뻔했다.

“죄송합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저도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경호팀에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잘하셨어요. 저야말로 중호한테 말도 못 하고 계속 마음 쓰였습니다.”

최 팀장이 한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중호 실장의 친구라고 했던 최 팀장은 언제부터인가 한서림에게 안타깝고 딱한 시선을 보내곤 했는데, 둔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감시받는다는 생각에 예민해진 탓인지 한서림은 최 팀장의 연민을 금세 알아차렸다.

“강해건 씨의 개인 의뢰는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실 대피하기 전에 이미 불이 꺼졌다는 걸 알았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나왔습니다.”

“……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최 팀장과 대화를 몇 번 해보지 않아서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중호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최진철과 이중호는 무게감 있고 배려 깊으며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었다.

“저희가 의뢰받은 일을 우선으로 하는 건 맞지만, 양심이 없는 건 아닙니다. 도의적인 책임도 무시하지 못할 일이고요.”

“……먹고 사는 게 다 그렇죠. 최 팀장님 경호팀이 잘못한 건 없으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애써 웃으려고 해도 안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친하지도 않고 대화 몇 번 안 해본 최 팀장의 몇 마디가 한서림을 안심하게 했다. 불안정하게 떨리던 오른손도 정상적으로 돌아와 어느 순간부터 멀쩡하게 컵을 감싸 쥐고 있었다. 고작해야 두세 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최 팀장의 어른스러운 배려가 한서림을 위로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울컥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뭉클한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안심되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최 팀장님……, 뒤늦게라도 진심을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럼 쉬고 계세요.”

최 팀장은 할 말을 끝냈다는 듯이 가볍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밀실에서 나갔다. 정적으로 가득한 고요함이 기괴한 평안을 가져왔다.

“서림 씨!”

강유건과 함께 경찰서로 달려온 강해건은 이미 최 팀장에게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놀란 얼굴로 한서림부터 끌어안고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뒤통수를 쓰다듬는 강해건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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