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건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행이라는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품에서 떼어낸 후에는 정신없이 한서림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세심하게 살피는 눈동자에는 걱정과 놀람이 가득했다.
99.
“비켜.”
한서림이 강해건을 매몰차게 밀어냈다. 그러자 강해건은 한서림이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눌러왔던 화를 터트렸다.
“미쳤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엘리베이터조차 작동되지 않아서 거기 그대로 갇혔을 거라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격양된 목소리로 내지르긴 했지만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욕설을 짓씹었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를 삭이려는 모습이 무력해 보였다. 얼마나 놀랐으면 강해건의 손은 아까의 한서림처럼 아직도 불안정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해건아.”
“…….”
“내가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불을 질렀을 것 같아?”
감정의 고저가 없는 한서림의 목소리가 덤덤했다. 강유건이 옆에 있었지만 한서림은 개의치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애초에 거기에 나를 가둔 건 너야.”
“그건……!”
“네가 연락수단도 전부 빼앗고, 한 달 넘도록 나 감금했잖아. 내가 오죽했으면 불을 질렀겠어.”
무감하게 뱉어지는 말에 강유건은 충격받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에게는 차마 감금 사실을 말할 수 없었는데, 강유건이라도 알기를 바랐다. 누구 한 명이라도 알아야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가실 것 같았다. 그래서 굳이 강해건의 만행을 제 입에 담았다.
강해건과 한서림을 번갈아 바라보는 강유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강유건이 모르고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실소가 비집어 나왔다. 하긴, 강해건 역시 감금이 범죄라는 걸 알고 있으니 강유건에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만약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거기서 죽었을 수도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불을 질렀다고요?”
“어. 계속 그렇게 갇혀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
“…….”
“해건아. 나를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건, 너야.”
탈출하고 나면 강해건의 뺨이라도 후려갈길 줄 알았는데, 한서림은 의외로 침착하고 차분했다. 경찰서 안이라는 것과 옆에 강유건이 있다는 사실이 한서림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만약 강해건에게서 다시 강압적으로 가두려는 기세가 보인다면 경찰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강해건이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줘도 그곳은 감옥이었다.
이제 정말 끝났다는 안도감에 온 힘이 다 빠져버려서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대담하게 불을 지르긴 했으나, 얼마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컸는지 모른다. 스프링클러로 금세 불이 꺼진 덕분에 인명피해가 없고 다른 층으로 불길이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지,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볼까 봐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정신적 압박감이 컸다.
“내가……, 그렇게 싫어요?”
강해건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한서림의 손을 잡았다. 전해져오는 온기에 문득 울컥거림이 치솟았다. 분명히 좋았던 날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갇혀 있던 내내 다정했던 강해건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냐.”
“그럼 왜 그렇게 나를 떠나지 못해서 안달인데요.”
“……네 사랑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해? 너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연락수단조차 전부 빼앗은 채 가둬놓고 아무도 못 만나게 했어.”
“하지만…….”
“해건아.”
“…….”
“나는 네 인형이 아냐.”
그 언젠가 ‘말 잘 듣는 인형’을 자처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작 그때는 인형이 아니었다. 인형 흉내 축에도 못 끼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인형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최근 한 달간 갇혀서 진짜 인형이 되어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한서림은 크게 한숨을 내쉬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른 후 강해건에게 잡혀있는 손을 빼냈다.
“그만하자.”
“한서림…….”
“나, 이번에는 불 지르는 게 아니라 뛰어내릴 거야.”
“…….”
단호하고도 잔인한 예고에, 강해건의 그렁그렁한 회색빛 눈동자가 아프게 일렁였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할 것 같아요.”
“응. 할 거야. 그러니까 그만하자.”
“…….”
“이제, 놔 줘. 나 숨 쉬면서 살고 싶어.”
한서림이 목숨을 걸고 나서야 강해건은 체념 혹은 포기라는 감정을 배웠다. 한서림은 묵묵하게 손을 들어 쉴 새 없이 흐르는 강해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를……, 사랑한 적이 있긴 했어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공허한 눈동자만큼이나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한서림 역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크게 호흡한 뒤 옅은 미소로 진심을 꺼냈다.
“응. 사랑했어, 해건아. 내 목숨을 걸 정도로 정말 많이, 너를 사랑했었어.”
함께여서 위태로웠던 강해건과 한서림의 애틋한 공존이 끝났다.
***
「한, 선물 뭐 샀어?」
픽업 온 니콜라스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에드워드가 창문을 내리고 씩 웃었다. 한서림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뒷좌석에 탔다.
「뭐야, 뭐 샀는데 말을 안 해줘?」
에드워드가 아예 몸을 돌리고서 한서림에게 물었다. 니콜라스 역시 궁금한지 룸미러로 한서림과 눈을 마주쳤다.
「너희는 뭐 샀는데?」
「애밀리아 옷이랑 모자, 양말, 신발 풀세트.」
「나는 애밀리아 필요한 거 사주라고 기프트 카드에 돈 충전했어.」
니콜라스와 에드워드가 차례로 대답했다.
「근데 너무 속보이나? 내 아기 태어나면 똑같이 받아내려고 일부러 많이 충전했거든. 하아, 내가 선물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냐? 결혼식처럼 제이든이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해주면 고르기만 하면 되니까 편할 텐데, 그냥 애밀리아 생일이라고 집에서 같이 밥 한 끼 먹자고 하니까 뭘 사야 할지 모르겠더라.」
낄낄거리는 에드워드의 말에 한서림은 피식 웃었다. 오늘은 제이든의 딸 애밀리아의 첫 번째 생일이었다.
1년 전, 뉴욕에 돌아왔을 때 에드워드는 이혼한 상태였다. 한서림에게만 많은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뉴욕에 남아 있던 친구들에게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반려 알파의 외도로 이혼한 에드워드는 4개월 전부터 사귀던 알파와 동거를 시작했고, 2주 전에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결혼은 생략할 거지만 이미 각인은 했다고 해서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조촐하게 축하 파티를 열었었다. 한서림은 에드워드가 이전 반려 알파와 각인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서림의 목덜미에는 강해건과의 각인 흔적이 여전히 새겨져 있었다. 각인을 한 이상 주기적으로 만나서 서로의 페로몬을 공급해줘야 하는데, 페로몬 샘을 제거한 한서림은 강해건에게 줄 수 있는 페로몬이 없었다. 그래서 각인의 표식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 의아했다.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한 이후, 한서림은 페로몬 샘을 제거한 탓에 각인을 했어도 강해건의 페로몬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각인의 표식이 사라지지 않은 원인에 대해서는 의사도 난해해하며 이런 케이스가 없어서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원한다면 학회에 보고해서 연구 자료로 쓰이며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고 했으나, 한서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쩌면 강해건과의 각인 표식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해건이 어떤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만약 강해건이 금단 증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고 해도 한서림은 페로몬이 없으니 이제 더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 경찰서에서 헤어지고 강해건과 강유건, 두 사람과는 의도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그러나 이혼 절차를 잊은 탓에 강해건과 한서림은 아직까지 법적인 반려자였다. 몇 달 전에 포털 사이트에서 강해건이 은퇴 작품을 찍고 있다는 뉴스 헤드라인을 우연히 봤지만 기사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강해건도 잘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갔구나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득문득 솟아오르는 그리움은 모른 척하며 눌러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한은 뭐 샀는데?」
「돌 반지.」
「돌 반지?」
「한국에서는 첫 번째 생일 맞은 아기에게 돌잔치를 해주는데, 그때 친한 사람들이 아기 반지를 선물해주거든.」
「와, 역시 보스. 요즘 금값 엄청나던데.」
실없는 대화를 하는 사이 제이든의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만약 유산하지 않았더라면 한서림도 지금쯤 애밀리아와 동갑인 아기를 품에 안고 있을 터였다. 강해건을 닮아서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며 행복에 겨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굴도 모른 채 떠나보낸 아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강해건의 페로몬이 안정되어 그가 정상적이고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후회는 없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한서림은 미련 없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쉽거나 후회되는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의 선택이 바뀔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온 뉴욕에서 1년을 지내는 동안 수천 번, 수만 번 곱씹은 질문이지만 한서림의 대답은 늘 같았다. 어떻게 해도 선택이나 결과가 지금이랑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목숨을 걸 정도로 간절하고 제가 다치는 게 상관없을 정도로 사랑했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려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강해건 역시 그럴 것 같았다.
100.
「한, 배고프지 않아? 뭐 좀 먹고 갈까?」
애밀리아의 생일파티에서 한 시간가량 자리를 지킨 한서림과 니콜라스는 빠르게 제이든의 집을 벗어났다.
「좋지.」
애밀리아의 생일이라고 집에서 그냥 밥 한 끼 먹자고 하더니, 손님이 꽤 많았다. 제이든이 부른 손님이 한서림과 니콜라스, 에드워드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었고, 제이든의 반려 오메가인 크리스티나가 부른 손님이 열 명 정도였는데, 가족과 함께 온 손님들이 꽤 있어서 꽤 정신없고 성대한 파티가 되었다. 그래서 한서림과 니콜라스는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역시 피곤하다고 해서 반려 알파가 데리러 왔다.
「니콜라스. 우리 주차해두고 나와서 맥주 한잔할래?」
어디를 가도 맨해튼에서는 주말의 트래픽 잼을 피할 수 없었다. 한서림의 제안에 니콜라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림이 한국에 있는 동안 니콜라스가 머물렀던 집은 다시 한서림이 지내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때마침 비워진 아래층 원룸을 렌트했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 보니까 출퇴근도 함께 하고 주말에도 종종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알파인 니콜라스가 같은 알파를 좋아하는 성향을 포함해서 한서림에게는 아주 편한 친구였다. 요즘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
퇴근 후에 가끔씩 들렀던 스포츠 펍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안주로는 언제나처럼 버팔로 윙과 샐러리를 시켰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각자 취향에 맞는 햄버거와 맥주도 한 병씩 주문했다.
‘「자기야. 오늘 연구실 간다고 하더니 나 몰래 바람피우려고 거짓말한 거였어요?」’
문득 강해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신혼여행 당시 강해건과 마주쳤을 때 앉아 있던 그 자리였다. 뉴욕에 돌아온 후에 몇 번이나 이 펍에 왔는데 이 자리에 앉는 건 처음이었다. 그날 이 자리에서 강해건에게 니콜라스와 에드워드를 소개시켜 줬었다.
‘「엇, 설마 한의 애인이야? 아, 잠깐. 그 사람 맞지? 아닌가? 닮은 건가? 동양인은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이 잘 안 돼.」’
‘「서양인 눈에는 동양인이 비슷하게 생긴 것처럼 보여서 구분이 잘 안 되죠?」’
‘「네. 보스처럼 특출난 외모 아니면 구분이 쉽지 않아요.」’
‘「이해해요, 동양인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서양인들이 다 비슷하게 생겨서 지금 두 사람도 잘 구분이 안 돼요. 그래도 다행인 게 머리카락 색으로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겠어요. 에드워드 씨는 적갈색, 니콜라스 씨는 금발.」’
당시 강해건과 에드워드의 대화를 복기해보면, 정말 강해건의 성격이 대단하다 싶었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데 굳이 저렇게까지 꼬집어서 사람을 민망하게 했었다. 그런데 어쩐지 웃음이 나려고 했다.
강해건의 그 꼬인 성격마저 사랑했던 저라서.
당시에 니콜라스에게 말도 안 되는 질투를 보였던 일도 떠올랐다. 물론 연기였겠지만. 그런데 문득 강해건이 질투했던 게 연기였는지 진심이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사람의 뇌는 참 이상하다. 힘들고 아팠던 상처들은 점점 희미하게 퇴색되고 좋았던 추억만 자꾸 선명해지니 말이다. 강해건과 이곳에서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갑작스러운 울컥거림으로 넘어왔다.
「내 주변에 아기 있는 친구가 제이든밖에 없어서 그런가. 애밀리아 볼 때마다 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생명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오메가나 베타한테는 죽어도 눈길이 안 가는데.」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한서림을 현실로 데려왔다. 덧없는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입양하는 것도 방법이지.」
「애밀리아가 제이든 쏙 빼닮은 거 알지? 나도 나를 닮은 아이가 갖고 싶은 거라고.」
「그럼 알파도 임신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불가능하겠네.」
「이번 생에서는 틀렸어. 만날 남의 애나 보면서 부러워해야지 뭐.」
니콜라스가 맥주를 들자 한서림이 실없이 웃으면서 맥주의 얇은 목을 부딪쳤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맥주의 탄산이 유독 따끔거렸다.
「한. 너는 이혼한 것도 아니고 각인까지 했으면서 왜 그 사람 안 만나?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 한 번도 안 만났지?」
같은 건물에서 사는 데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니콜라스와 함께 보내고 있는 탓에 속일 수는 없었다. 강해건과 만났더라면 어쩔 수 없이 니콜라스에게 말했거나 한 번 정도는 마주쳤을 테니까.
「글쎄. 뉴욕으로 다시 올 때 이혼한 거나 다름없긴 해.」
다시 강해건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만난다면 이번에는 오해나 죄책감을 비롯한 불필요한 감정을 전부 배제시키고 마음껏 사랑만 할 수 있을까.
강해건이 보고 싶고 그립다 하더라도……,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
한국은 연일 충격의 연속이었다. 1년이 넘도록 재판이 이어지고 있는 모주원은 자백의 과정에서 오메가의 성상납이나 성매매에 한 회장이 연루되어 있는 것들까지 폭로했다. 경호업체 동행의 사장인 모주원의 부친 말도 일치했다. 마치 꼬리 자르기를 당할 걸 알고 준비한 듯이 명확한 증거들을 내놓자, 한 회장뿐만 아니라 재벌과 정치계 인사들과 연예인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묶여 나오고 있었다.
극구 부인하던 한 회장은 증거가 나오자 혼자 죽지는 않겠다고 물귀신 작전으로 강 회장 역시 함께 골프를 치러 갈 때마다 오메가 성매매를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강 회장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누군가 익명으로 강 회장의 마약 파티와 난교 파티의 증거 영상들을 모자이크 처리해서 인터넷에 올렸고, 그 자리에 있었던 피해자라는 증인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면서 강 회장 또한 법망을 피해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강 회장 측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터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의 다양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강 회장의 마약, 난교 스캔들을 덮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정 그룹의 주가는 연일 폭락했고, 몇 달째 말 그대로 파국이었다.
“난리네, 아주…….”
한서림은 보고 있던 뉴스 기사를 끄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뉴욕으로 오면서 한 회장하고의 연락도 일방적으로 끊었다. 어떻게 해도 페로몬 학대를 당했던 억울함이나 복수심, 마지막까지도 오메가 형질을 들먹이며 이용하려고 했던 불쾌감과 거북함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몰락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모주원이 한 회장을 배신하고 엮어 들어갈 줄은 몰랐지만. 결국 악은 악의 발목을 잡았고, 다 똑같은 악마들이었다.
어쨌든 한서림은 한 회장의 몰락이 적어도 제 손을 더럽히는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기도 했다. 한 회장에게 향한 검은 덩어리는 소화시키지도 토해내지도 못한 채 한서림의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한 회장이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 말고는 이 억울함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한서림은 차라리 외면을 택하고 연락을 끊은 것이었다. 평생 안 보고 살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괜찮아지고 언젠가는 잊게 될 수도 있으니까.
오늘 같은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무뎌질 것이다.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했던 마음조차도…….
「에드워드, 언제까지 출근하려고? 왜 휴가를 안 내?」
한서림이 니콜라스와 함께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장 먼저 출근한 에드워드가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남성형 오메가는 전 세계를 막론하고 임신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출산하는 6개월까지는 법적으로 휴가를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남성형 오메가의 임신과 출산이 위험하고 고된 만큼 임신 휴가와 출산 휴가까지 합하면 법적으로 최소 1년 이상은 유급 휴가를 얻을 수 있는데도 벌써 6주 차에 들어선 에드워드는 어김없이 출근하고 있었다.
「주말에야 스티브가 함께 있으니까 집에 있어도 좋은데, 평일에는 스티브도 출근하니까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고 외로워.」
「아무리 그래도 몸을 생각해야지. 유급 휴가가 괜히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줄 알아?」
「병원에서 그러는데 나는 너무 건강해서 임신 12주까지는 출근해도 괜찮대. 입덧도 없으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그런 의미로 퇴근하고 한이 치즈랑 올리브 듬뿍 올라간 피자 쏘는 거 어때? 오늘 스티브 야근이거든. 외로운 나를 위해 지갑을 열어줘.」
한서림의 타박에도 에드워드는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 뿐 휴가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문득 저 역시 임신 사실을 알고도 자체적으로 괜찮다는 판단하에 출근했던 일이 떠올랐다. 강해건이 명령하듯이 집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에드워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다.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이 당황스러워서 한서림은 얼른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저녁 사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힘들면 바로 휴가 내. 출근한 김에 휴가 서류는 미리 작성해 놔. 날짜는 그때 돼서 내가 적을게. 쉬어야겠다고 생각되면 나한테 메시지만 남겨줘.」
「내 보스는 참 다정하다니까. 내가 알파였더라면 분명히 한을 사랑했을 거야.」
에드워드의 시답지 않은 소리에 니콜라스가 고개를 내젓고 한서림은 피식 웃었다.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101.
「하아……. 이번에도 아냐.」
한서림이 시향지에 이제 막 완성한 향수를 뿌려서 코앞으로 들이대고 향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니었다.
「대체 어떤 향을 만들려는 건데 그래? 나도 시향해 봐도 돼?」
니콜라스가 다가오려고 했으나 한서림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직 안 돼. 완성하면 시향하게 해줄게.」
단호하게 말한 후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올라갈수록 한서림의 미간이 좁혀졌다. 니콜라스와 제이든, 에드워드가 시선을 교환했으나 서로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한서림이 실패작 시향도 못 하게 하고 정확히 어떤 향을 만들려고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 탓에 도와줄 수도 없었다.
한서림은 뉴욕으로 돌아온 후 1년 내내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서 신향수 개발에 몰두했다. 몇 개의 신향수를 출시하긴 했으나, 제가 진심으로 만들고 싶은 향의 페로몬 향수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천 번이나 시도했는데도 한서림이 원하는 향에서 매번 아주 근접하게 비슷한 향으로만 완성될 뿐, 정확하게 원하는 향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비슷한 정도를 찾았기에 최근에는 베이스를 그대로 두고 배합과 비율만 아주 미세하게 조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하게 그 향이 되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한서림은 어떻게든 그 향을 만들어내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점심 먹고 일합시다!」
제이든이 손뼉을 두어 번 치면서 외쳤다.
「다들 먹고 와. 난 생각 없어.」
「한,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조금만 더 해보면 성공할 것 같거든. 들어올 때 햄치즈 샌드위치 세 개만 사다 줘. 치즈랑 핫치킨 추가해서.」
한서림이 무심한 표정으로 집중한 채 웅얼거렸다. 원하는 향의 페로몬 향수를 완성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 어떤 때보다도 집중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씬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현장의 분위기는 좋았다. 스태프들과 배우 모두 시나리오 비밀 유지 각서를 써야 했을 만큼 내용이 파격적이고 씁쓸하다는 것이 문제일 뿐. 개봉 후에 해일처럼 밀려들 후폭풍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폭풍이 바로 강해건이 의도하는 바였다.
“고생했다.”
애처로운 눈물 연기를 끝낸 강해건에게 이중호가 다가와 티슈를 건넸다. 아직까지도 감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것인지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는 강해건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허망한 것 같기도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움에 잠식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압박과 압력이 들어와도 개봉시키겠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눈물을 닦아내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며 진정한 강해건은 다가온 박 감독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박 감독이 선뜻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기획에서부터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강해건의 영화 데뷔작을 함께 했던 인연으로 박 감독은 어려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강유건이 뒤를 봐주기로 했으니 걱정할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만, 박 감독이나 스태프들, 출연 배우들에게는 절대 피해가 가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후반 작업은 얼마나 걸릴까요?”
“네가 실시간으로 작업할 수 있게 돈 대준 덕분에 배급사하고 일정 조율 끝났고, 어제 오늘 찍은 씬만 붙이고 이틀 밤새워서 DI 작업만 하면 되니까 예정대로 2주 후에 개봉할 수 있을 것 같아. 믹싱도 동시에 들어갈 거야. 불안하면 편집실 와서 봐도 되고. 내용도 극비리인데 우리 강해건이 주연이라 그런지 상영관도 벌써 전부 잡혔어. 포스터 엄청 잘 나왔더라.”
“다행이네요. 마무리는 감독님께 부탁드릴게요.”
“그래. 제대로 만들어줄게. 그런데 해건아, 정말 괜찮겠어?”
박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강해건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며 염려를 아끼지 않았다. 크랭크업을 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모주원 사건으로 인해 한 회장이 검찰에 불려 다니고, 강 회장 역시 휠체어 연기를 시전하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이제 드디어 용서라도 빌 수 있는 자격이 생겼는데 안 괜찮을 리가 없죠.”
“그래.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야. 영화 개봉하게 되면서 네가 바랐던 일들도 다 잘 풀렸으면 좋겠다. 멀리서나마 응원하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
허리를 굽혀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강해건의 등을 박 감독이 두어 번 도닥여주었다. 쉽지 않았을 선택과 용기를 지지받고 있었다.
박 감독과의 짧은 인사를 끝내자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강유건이 다가왔다. 강유건은 크랭크인 날부터 크랭크업을 하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밥차와 커피차를 보내 강해건과 한 뜻임을 어필하며 힘을 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