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거, 좋은 거, 그런 건 다 먹이고 싶은데 어쩌라고. 많이 먹어요, 서림 씨. 강 전무도.”
“……네. 강해건 씨도 많이 먹어요. 유건아, 너도.”
떨떠름하게 대답하면서도 강해건이 왜 이렇게 가식을 떨면서 소름 돋게 구는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를 위하고 아끼고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우애가 특별하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만큼 각별했다. 그래서 강유건을 속이려는 강해건의 태도가 더욱 미심쩍었다. 차라리 강해건에게 미리 어떤 언질을 받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림 씨, 이것도 좀 먹어봐요. 어제 보니까 생선구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강해건은 가시를 바른 통통한 생선살을 한서림의 밥에 올려주었다.
진짜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지.
레스토랑에서야 보는 눈이 많았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어제 둘이 먹었을 때는 각자 밥은 각자 알아서 먹었다. 강유건의 앞에서까지 연기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강유건까지 속여야 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혼하기 싫어서 차라리 저를 제거하기 위해 생선에 독을 발라놨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챙겨주고 싶은 건가…….
힐끔 강해건에게 시선을 두자, 그가 근사한 미소를 보였다. 자꾸 저러면 홀리게 될 텐데 걱정이었다. 한서림은 걱정할 일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마음의 문을 꽉 닫으며 예의상으로 표정관리를 했다.
“네, 고맙습니다. 근데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강해건 씨도 편하게 먹어요.”
“근데 언제까지 그렇게 나 불편하게 대할 거예요?”
“……네?”
“우리 강 전무가 오해하겠어요. 서림 씨가 싫은데 나랑 억지로 결혼하는 거라고. 나만 서림 씨한테 푹 빠진 건가?”
아, 정말. 이러다 진짜 체하겠다. 적당히 좀 해라, 이 자식아.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조금 전까지 설��던 게 거짓말처럼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말을 생선살과 함께 꼭꼭 씹어 삼켰다. 예쁘게 환히 웃으며 눈을 맞추고 있는 강해건의 목에 생선 가시가 콱 박혀서 말없이 식사를 마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런 거예요? 나만 서림 씨 좋아하는 거예요?”
생선 가시는 가시일 자격이 없다. 제 역할을 못 하니까. 대체 왜 이 자식의 목구멍에 박히지 않아서 계속 미친 짓을 하게 만드느냐는 말이다. 솔직히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다. 아무리 강해건이 저 때문에 시한폭탄을 안고 살게 돼서 제가 다 맞추려고 해도 밥 먹을 때 건드리니까 성질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죄지은 사람이 납작 엎드려야지.
“몇 번이나 얘기한 것 같은데요. 정혼과 관계없이 나는 강해건 씨랑 결혼하고 싶다고. 유건이도 알다시피 데뷔 때부터 팬이었고, 아마 강해건 씨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할 겁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한서림은 가시 박힌 것 같은 목구멍을 느끼면서 한껏 사랑에 빠진 얼굴로 다정하게 뱉어냈다. 솔직히 강해건보다 제가 더 좋아할 거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도 팬이었던 세월이 있는데.
그러자 강해건이 씩 웃더니 바로 시선을 돌려 강유건에게 애처럼 말했다.
“들었지?”
“야 이 새끼야, 지금 나한테 자랑하려고 그 지랄을 떤 거냐?”
눈을 접고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근사했다. 눈치 없는 심장이 또 다시 제멋대로 두근거릴 만큼.
그러나 주제파악하지 못하고 두근거리는 심장과 다르게 객관적인 머리는 상황파악을 해버렸다. 처음에는 강유건까지 속이려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강유건에게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연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때때로 강해건을 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형의 동생 사랑만 지극한 줄 알았는데, 동생의 형 사랑도 만만치 않았다. 형제애가 아주 끈끈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강해건이었더라도 저 때문에 크게 다친 적이 있는 형이라면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걱정은 당연히 끼치고 싶지 않을 테고. 그래도 역시 피곤하고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서림은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최대한 강해건에게 맞춰주기 위해 노력했다.
강유건이 돌아간 후 강해건은 거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벌써 밤 열한 시에 가까운 시각이었고, 한서림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 강유건이 갈 때 함께 나가려고 했는데, 강해건이 미쳐서 갑자기 백허그를 하며 더 있다 가라고 닭살 돋는 짓을 한 탓이었다. 강유건 역시 강해건의 손을 들어준 건 당연했다.
강해건의 옆에 앉아서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채널을 보다가 한서림은 주방으로 갔다. 냉동실에서 강유건이 넣어둔 스티로폼 박스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러트 전에 먹는 걸 못 봤으니 지금쯤 강해건이 먹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타인을 살뜰히 챙기는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죄책감은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만들었다.
“러트 전이나 후에 꼭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면서요.”
소파 앞 테이블에 아이스크림 통과 스푼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을 던지자, 회색빛의 눈동자가 따라왔다. 여전히 볼 게 없는지 기계적으로 바뀌던 화면도 멈추었다. 강해건의 열애 소식을 다루고 있는 연예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한서림은 TV 브라운관에 힐끔 시선을 던지다가 제 사진과 함께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강해건이 내려놓은 리모컨을 집어 두어 번 더 눌러 채널이 바뀌게 했다. 이미 열 번도 넘게 보았던, 작년에 강해건이 출연했던 드라마였다. 그 사이 강해건은 스푼을 들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강 전무가 그래요?”
“네. 매번 챙겨준다고.”
“별 얘길 다 했네요.”
“뭐 어쩌다 보니.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글쎄요. 발현통 앓은 후에 이틀 만에 눈 떴는데, 다른 음식은 냄새 때문에 역해서 아이스크림만 먹고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그냥 습관이 된 것 같은데.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한서림은 자신이 발현했을 때 어땠었는지를 떠올렸다. 열일곱 살인지, 열여덟 살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즈음이었다. 방학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늦잠을 자는 거로 생각했는지 몇 시간 내내 끙끙 앓아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해가 뜰 무렵부터 시작된 발현통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열이 비정상적으로 오른 탓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어서 누구를 부르지도 못했다.
한서림이 발견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방학이어도 늦잠 자는 일이 없던 애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이미 한 회장의 페로몬 학대가 최고치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직 발현 전이었기에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없는데도, 오메가 형질로 판정받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받아온 탓에 모든 감각이 예민했다. 단지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없었을 뿐 특수하게 피부로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공포였다. 한 회장이 폭력적인 페로몬 학대를 하면 피부가 불타며 찢어지는 고통과 호흡 곤란 증세가 온 것이 그 증거였다.
한서림은 방 청소를 하러 들어왔던 고용인에게 발견되었고, 곧 한휘 건설의 주치의가 호출되었다. 팔에 주삿바늘이 꽂힌 이후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고용인의 말로는 사흘 동안 앓았다고 했다. 최고치에 이른 줄 알았던 한 회장의 페로몬 학대는 한서림이 오메가로 완벽하게 발현한 이후부터 더욱 심해졌다. 곁에 모주원이 없었더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할 정도로 끔찍한 나날이었다.
34.
“강 전무 앞에서도 연기 잘하더라고요.”
상념에 빠져 있던 한서림을 다시 현실로 소환한 것은 귓가에 착 감기는 낮은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이미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은 반이나 비어 있었다. 강해건은 만족할 만큼 먹었는지 무성의하게 스푼을 툭 내려놓았다. 그걸 보면서도 다시 냉동실에 넣어놔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건이 앞에서는 대체 왜 그런 거예요?”
“으음…….”
“유건이까지 속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아니면 걱정할까 봐?”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협조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가볍게 운을 띄운 것과 달리, 강해건은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며 턱을 매만졌다. 한서림은 티 나지 않게 리모컨을 쥐고 TV 볼륨을 낮췄다.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던 강해건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 전무한테서 졸업하려고요.”
“졸, 업이요?”
“친구라니까 알겠지만 우리 강 전무가 나한테는 좀 유난스러워요. 자기 자식한테도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챙겨주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뭐 나 때문에 이제 애도 못 낳는 몸이 되었지만. 그래서인지 가끔은 내가 강 전무 동생이 아니라 아들인 것 같다니까.”
혼잣말처럼 덧붙여진 중얼거림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내막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련한 미안함도 엿보였다. 다만, 강해건 때문에 애를 못 낳는 몸이 되었다는 말이 귀에 걸렸는데, 물어봐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페로몬 폭주 때 그렇게 되었을지도 몰라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한테서 강 전무를 졸업시키는 거겠죠.”
강해건에게서 강유건을 졸업시킨다는 표현이 낯설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말이 한서림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유건이는 강해건 씨 챙겨줄 때 행복해 보이던데 그럴 필요가 있나요? 내가 외동이라 그런지 아까 두 사람 보기 좋던데.”
“내가 강 전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애틋함이든 죄책감이든,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면 무거워져서 내 마음과는 별개로 결국에는 도망치고 싶어지더라고요.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강 전무 등에 칼 꽂지 않는 것뿐이라.”
“…….”
순간 한서림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했다. 강해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강해건이 강유건에게 가진 죄책감이 쌓여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저 역시 강해건에게 향한 죄책감에 짓눌려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한서림은 어떻게든 계약서상의 기한을 다 채울 때까지는,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줄 때까지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저 또한 절대로 강해건의 등에 칼을 꽂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백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부디 용서받고 별 탈 없이 이혼하기를 바랐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비겁하고 이기적인 희망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정혼이었는데 타이밍이 좋긴 했네요. 한서림 씨 핑계로 강 전무를 졸업시킬 수 있을 테니까. 강 전무가 한서림 씨라면 안심된다는 말도 여러 번 했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강해건은 자신이 강유건을 생각하는 마음과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을 예정이지만, 강유건을 졸업시키고 싶다는 말 그대로 강유건의 애정 밖으로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 또한 페로몬 폭주로 강유건을 다치게 한 데에서 기인한 죄책감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무거워진 대화가 버거웠다.
“아이스크림에 취했나. 별 얘길 다 하네. 어쨌든 한서림 씨는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저 장단 잘 맞춰달라는 의미였으니까.”
다행이 강해건은 적당한 타이밍에 대화를 차단했다. 한서림이 제대로 반응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약간 굳은 표정으로 멍하게 녹아내린 아이스크림만 바라보고 있는데, 큼지막한 손에 잡힌 작은 스푼이 녹은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휘젓기 시작했다.
내막을 모르면 유난스러운 형제라고 생각하고 이들에게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든 내막을 아는 탓에 차마 유난스럽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만약 제가 페로몬 폭주를 일으켜 친형제처럼 여기는 모주원이 6개월 내내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고만 해도 눈앞이 캄캄한데, 반쪽짜리라고는 하지만 남다를 우애를 지닌 혈육은 오죽할까.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강해건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아물길 바라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굳이 안 해도 될 얘기였네요. 말 잘 듣는 인형한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그러니까 말이다.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을 뻔했다. 죄책감만으로도 버거운데, 그 위에 불필요한 안쓰러움과 측은지심도 얹어졌다. 저는 이제 겨우 마음먹고, 결혼 유지 동안만 속죄하고 안전 이혼으로 도망치려는 비겁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짐작도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지옥 속에서 죄책감마저 떠안고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저 혼자 그 모든 것을 안고 가려는 것처럼 불가항력의 우애마저 끊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한서림은 그 마음의 깊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어서 아연해졌다.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에 짓눌려가는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스크림 통을 챙겼다. 주방으로 가서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쏟아버리고 흐르는 물에 통을 헹궜다. 분리수거는 어떻게 하는지 아직 몰라서 싱크대 위에 통을 올려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강해건은 또다시 재미없는 TV채널만 기계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유도 알 수 없이 건장한 체격의 강해건이 몹시 작고 외로워 보였다.
“그럼 내가…….”
브라운관에 고정하고 있던 심원한 눈동자가 한서림에게로 향했다. 한서림은 무거운 이야기를 마치 듣지 못한 사람처럼 청량하면서도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오늘 하루 더 있을까요?”
“…….”
“아니면 그냥 가는 게 편하겠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강해건 씨가 시키는 대로 하려고요. 나 말 잘 듣는 인형이잖아요. 러트가 지나갔어도 있으라고 하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론칭은 했으니 하루 정도는 더 쉬어도 될 것 같고요.”
솔직히 무리였다. 당장 출근해서 론칭 상황부터 추가 마케팅 전략에 광고 송출 시점까지, 보고 받아야 할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데 약해진 마음 때문인지, 비서가 제 행방을 알고 있으니 급한 일이 있다면 따로 연락하거나 찾아오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이 큰 집에 강해건을 혼자 두고 가기가 꺼려졌다.
“지금은 딱히 섹스 생각이 없는데. 발정기 끝나고 나면 당분간은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들거든요. 내 집에 용건도 없이 타인이 머무는 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들고.”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요.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옷 갈아입고 나와요. 데려다줄게요.”
“아뇨. 별로 멀지도 않아서 택시 타면 금방 가니까 쉬어요. 러트 끝나고 다음날까지는 자발적 감금이잖아요.”
“음……, 그러네. 그럼 비서 불러요. 내 집에서 나간 거 뻔히 아는데 이 시간에 택시 타는 사진 찍히지 말고.”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섹스하지 않더라도, 차라리 하루 더 자고 가라고 해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늘 혼자 있었을 강해건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러나 강해건은 제 집에 더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한서림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 주었다. 임건우 실장에게 전화를 거는 한서림의 손길이 몹시 느렸다. 강해건은 끝까지 빤히 바라볼 뿐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굳이 아파트 정문까지 나와서 한서림을 임 실장 차에 태우는 것까지가 강해건이 내보인 친절이었다.
* * *
그날 강해건의 집에서 헤어진 후, 수요일, 목요일, 남은 평일을 전부 강해건은 회사로 데리러 와서 퇴근을 시켜주었다. 자기가 했던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데려다준 후에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도 않는데 한서림의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두 시간가량을 머물다 가고는 했다. 이 또한 보여주기 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서림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강해건에게 두근거리는 횟수가 잦아진다는 것뿐.
어제는 러트로 인해 중단했던 광고 추가 촬영이 있었기에 광고 촬영장으로 불려갔었고, 주말은 강해건이 조용히 쉬겠다고 해서 내심 안도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을 상대하며 긴장하고 있는 것은 솔직히 피곤한 일이었다. 거기에 의도치 않게 자꾸 설레다보니 이러다 강해건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것도 무서웠다. 그래서인지 일주일 만에 만난 모주원과 함께 점심을 먹는 내내 풀어져 있었다.
“서림아.”
“어.”
“……행복해?”
점심을 배달시켜 먹는 동안에도 시답지 않은 대화가 오갔는데, 지금의 모주원은 어쩐지 진지해 보였다. 솔직히 행복한 건 아니지만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행복이라는 단어보다는 속죄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거짓말로 속이고 싶지가 않았다. 모주원 성격상 걱정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글쎄.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어서 그런지 강해건 씨가 내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긴 해.”
“끝이……, 정해져 있다니?”
무방비하게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다.
35.
한서림은 그저 적당히 행복에 대한 답변만 하려고 했기에 긴장을 완전히 풀었던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주원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도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숨길 필요 없지. 네가 어디 가서 말할 사람도 아니고.”
비밀유지 조항이 있었으나, 가족에게는 공유해도 된다고 했으니 합리화는 쉬웠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어도 정말 가족 같은 존재니까. 한서림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사이 모주원은 여전히 노골적으로 눈을 마주친 채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애 하나만 낳으면 이혼하기로 했어.”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럼 이게 놀랄 일이 아니야? 이혼을, 한다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이혼부터 얘기했다는 거야?”
모주원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무언가 안도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서 한서림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서림은 이내 제가 착각한 것이라고 여겼다. 저는 눈치도 빠르지 않을뿐더러, 극진한 우정으로 집착하다시피 우정을 키워온 모주원이 제 이혼을 반길 리는 없으니까. 오히려 걱정하면 걱정했지 절대 제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다. 한서림 역시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할 수 있었다.
“어차피 비즈니스잖아. 강해건 씨도 최대한 빨리 애 낳고 이혼하고 싶어 하고, 나도 안전 이혼하는 게 목표고. 뭐, 이래저래 서로의 니즈가 맞아서 하는 결혼이니까.”
그저 사실을 읊었을 뿐인데 심장 부근이 저릿했다.
“그런 결혼인데도 하겠다는 거야? 애 하나만 낳으면 이혼한다고? 서림아, 넌 네가 그렇게 하찮아?”
“……뭐?”
“아무리 아저씨 명령이고 기업 간의 비즈니스라고 해도, 왜 몸을 막 쓰려고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그 자식 페로몬에만 반응한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지금이라도 네가 원하면 도망,”
“주원아.”
이야기의 본질이 흐트러지기 전에 한서림은 단호한 목소리로 모주원의 말을 끊었다. 자신에게 하등 도움 될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시켜주며 위험을 무릅쓰려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데 이건 모주원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자세히 말하긴 어렵지만, 사실 내가 강해건 씨한테 빚이 좀 있거든. 그걸 갚아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이혼 전까지는 후회 없도록 결혼생활에 충실할 거고. 딱히 몸을 막 쓰는 거라는 생각도 안 들고.”
“……어쨌든 확실하게 이혼한다는 거지?”
모주원의 질문이 이상했다. 왜 이혼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체 모를 의구심에 한서림은 장난 어린 목소리를 냈다.
“너 내가 이혼한다니까 좀 좋아하는 것 같다? 남들은 이혼한다고 하면 그래도 참고 살아보라며 보통 말리지 않나? 친구의 불행이 네 행복이냐?”
“아랫도리 함부로 굴리고 그렇게 문란했던 놈이랑 평생 사는 게 더 불행인 거 모르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괜히 있겠어? 어쨌든 그래도 다행이다, 이혼이 전제라고 해서. 그래, 별 의미 두지 말고 비즈니스라고 생각해. 이혼할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갑작스럽게 태세전환을 하며 이혼을 응원하는 것 같은 모주원의 말에 한서림은 그저 열없이 웃었다. 강해건이 문란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기에 마냥 욕할 수도 없었다. 그저 제멋대로인 강해건이 조금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이, 평화로운 주말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읏……!”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미약한 두통이 느껴지고 머리가 무거운 것 같더니, 기어코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지려고 했다. 강해건은 이마를 짚고는 이를 악물었다. 두통인 것 같으면서도 고통의 정도가 다른,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었다. 3개월 만에 느끼는 페로몬 폭주 전조증상이었다. 신음을 삼키며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정 박사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떨려왔다.
“후우…….”
페로몬을 컨트롤하려고 애쓰며 호흡을 관리했다. 이제 막 극심한 두통이 시작되었으니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리지도 않아서 정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님, 접니다. 전조증상이 왔어요. 집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강해건은 고통 어린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간단하게 용건만 밝힌 후 전화를 끊었다. 강유건이 정 박사의 집을 근처로 해주었으니 도착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일요일이라고 외부로 나간 게 아니라면.
1초, 1초가 한 시간처럼 끔찍하고 악몽 같은 시간을 견뎌내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며 입고 있는 티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정 박사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부디 오늘은 강유건이 함께 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이를 악물고 머리가 박살날 것 같은 고통을 참아내려고 애썼다. 참는 것 말고는 강해건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흔한 진통제 하나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탓에.
연락한 지 15분도 안 돼서 급하게 도착한 정 박사는 이번에도 강유건과 함께였다. 페로몬 폭주의 피해자로 그런 큰일을 당했으면서도 겁이 없는 건지, 강유건은 매번 강해건이 전조증상을 느껴서 정 박사에게 연락할 때마다 함께 오곤 했다. 강해건이 잠들면 돌아가더라도 항상 달려와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유난한 형제애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해건은 그럴 때마다 더욱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된 오메가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정 박사는 빠르고 능숙하게 링거를 달고 강해건에게 수면제를 투약했다. 이제 한시름 놨다고 안심하는 강해건과 다르게 강유건의 얼굴에는 역시나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강해건의 얼굴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다. 얼마나 땀을 흘린 것인지 옷도 다 젖어있고,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만 봐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가 생생히 전달되는 듯했다. 결국 보다 못한 강유건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박사님, 차라리 해건이한테 진통제라도 놔주세요. 너무 괴로워 보여요.”
강유건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하지만 정 박사라고 해서 수면제만 투약한 채 손 놓고 있는 게 마냥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책이 없으니 하는 수 없었다.
“유건아, 너도 알잖니. 이미 십 년이나 약물 오남용을 해서 해건이한테는 약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수면제도 웬만하면 안 쓰는 게 좋은데, 방법이 없으니 위험한 거 알면서도 감수하는 거잖니. 위험은 최소화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