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42)

“크읏……!”

안에서 꿈틀댄 그의 성기에서 정액이 쏟아지며 노팅이 시작되었다. 강해건의 몸이 무너지듯이 내려앉았다. 등 전체를 덮어버린 단단한 가슴이 온몸을 억눌러왔다. 낯선 무게감에서 안정을 느끼는 기이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안에서 크기를 키우는 귀두로 인해 점점 버겁고 고통스러워졌다.

“흑, 흐읍…….”

“지금은 못 빼니까, 잠깐만, 참아요.”

거친 숨결이 섞인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입술이 내려앉았다는 착각이 들려는 찰나, 아래가 연결된 상태로 자세가 바뀌었다.

“흐, 으응!”

정신을 차려보니 누워있는 강해건의 몸 위에 제가 엎드려 있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전달되는 심장고동에 안정감이 번지며, 몸에 힘이 빠지면서 축 늘어졌다. 귀두가 부풀고 있는 안에서는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괴로웠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숨을 쉴 때마다 강해건이 느껴졌다. 온통 강해건의 냄새로 가득했다. 페로몬 향수의 향이 다 날아가고 저한테서도 강해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뇌까지 절여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젖은 눈을 감았다. 노팅으로 크기를 부풀린 성기 때문에 안은 찢어질 것처럼 극한 고통을 호소하는데 살갗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페로몬이 생각 이상으로 안락했다.

31.

* * *

이른 아침부터 뜨겁고 질펀했던 정사는 저녁이 다 돼서야 끝이 났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이지 짐승처럼 온종일 섹스만 했다. 이렇게까지 섹스에 미쳐 있던 시간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강해건이 억제제를 먹었기 때문에 하루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노팅이 시작되었던 고통의 순간은 기억이 나는데 언제 마무리 된 건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으윽…….”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한서림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욱신거리고 뼈를 새로 끼워 맞춘 것처럼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래도 정신이 맑아서인지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각을 확인하니 두어 시간 정도 잠들었던 것 같았다. 의식적으로 후각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자는 동안에도 제 페로몬은 새지 않은 듯했다. 아직까지도 자욱한 강해건의 페로몬만 남아 있었다. 어차피 자는 동안 새는 페로몬은 아주 미약해서 상관없을 테지만, 그래도 발정기의 강해건이 맡는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

고개를 돌리자 등을 돌리고 잠든 강해건이 보였다. 잠들어 있는 순간마저 근육이 날뛰고 있는 저 넓은 등이 어째서 처연해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낯설고 이상한 감정이었다.

한서림은 뉴욕에서 몇 번인가의 연애를 하는 동안 섹스는 해도 함께 아침을 맞는 것은 즐기지 않았다. 제 기준으로 판단해보건대, 강해건이 깼을 때 제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본다면 안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다리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이없고 황당한 와중에도 신음이 샐 거 같아서 저도 모르게 황급히 손으로 입부터 막았다. 안 그래도 혹사당한 엉덩이를 그대로 바닥에 찧어서 말 못 할 고통이 엄습했다. 눈물까지 찔끔 맺힐 정도였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강해건의 방에서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불을 켜지 않은 탓에 밖이 어둠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계를 보고도 확인했지만, 노팅했을 때가 어스름하게 어두워지던 타이밍이었는데 정말 몇 시간 눈을 붙이지 않았다.

한서림은 어제 강해건이 내준 방으로 돌아가 욕실로 들어갔다. 여기에도 욕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 뜨겁게 온도를 맞추고 물 안에 누워있으니 근육통이 어느 정도 가시는 듯했다.

“…….”

뜨겁게 소용돌이 쳤던 열락이 생생했다. 노팅의 순간은 버거웠으나 섹스는 몸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강해건이 그날의 오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킬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그에게 협조하고 안전 이혼을 목표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는 생경하고 낯선 감정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 같았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동정과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건가…….

뜨거운 물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어서 풀어진 몸만큼 이성도 풀어졌는지 모른다. 한서림은 몸을 일으키고 샤워를 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잠깐씩 앞이 까맣게 변하면서 현기증이 찾아왔다.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샤워를 마친 후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려던 때였다. 집 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집이 아니니 멋대로 문을 열어주는 것도 이상했다. 강해건이 일어나서 열어주거나, 못 일어나면 상대가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초인종 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한서림은 어쩔 수 없이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인터폰을 확인하자 화면에 온화하게 화려한 얼굴이 나타났다. 강유건이었다. 한서림이 문을 열어줘도 되는 사람이었다.

우선 공동현관 열림 버튼을 누른 후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강유건과 형질과 성별이 같더라도 가운을 입고 맞을 수는 없어서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입고 왔던 제 옷을 입어야 했다. 조급하게 셔츠단추를 잠그며 현관으로 갔다. 타이밍 좋게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어제 론칭한 신향수 중 하나의 향이었다.

“어? 서림아. 해건이랑 같이 있는 줄은 몰랐네. 얼굴 보는 건 완전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다, 인마.”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한 강유건이 몸을 떨어트리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와, 너한테서 해건이 냄새가 진동을 한다.”

“어?”

“우리 동생님이 페로몬을 아주 덕지덕지 발라놨……. 어라……, 설마 해건이 러트 벌써 끝난 거야?”

현관을 들어서 미술품이 걸린 복도를 걷던 강유건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의문을 드러냈다.

“응. 이미 끝나서 자고 있어.”

“이상하네. 해건이 러트 주기는 매번 일정했는데. 왜 빨리 시작했지?”

“글쎄…….”

혹시 저도 모르게 페로몬이 샜는지, 그래서 제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강해건의 발정기가 하루 먼저 찾아온 것인지 우려됐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 해건이도 이제 마음잡을 수 있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동생이 찾고 있는 오메가 있다면서.”

“그러게. 그 오메가는 찾아서 대체 뭘 어쩌려는 건지. 그래도 너 있으니까 이제 스캔들도 더 이상 안 나고 솔직히 안심되는 건 사실이야. 벌써 러트도 같이 보낸 거 보면, 해건이도 너한테 정착해서 더는 시간 낭비 안 하겠지.”

아무래도 강유건은 기한이 정해진 결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가족인 강해건이 먼저 밝히지 않은 사실을 합의 없이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근데 어쩐 일이야? 강해건 씨 러트인 거 알면서도 온 거야?”

“해건이가 러트 전이나 후에는 꼭 아이스크림을 찾더라고. 그래서 내가 매번 챙겨주고 있어. 너 있으니까 이제 내 보모 짓도 끝난 건가.”

강유건이 열없는 웃음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까 들어오자마자 스티로폼째로 냉동실에 넣었던 게 아이스크림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물론 형질이 달라도 가족에게 발정하는 일은 일반적이지 않지만, 어쨌든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에 다쳤던 경험이 있으면서 오메가가 겁도 없이 러트를 앞둔 알파 집에 찾아왔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이스크림을 주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사람을 시키면 될 텐데. 한서림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강유건의 동생 사랑이 지극한 게 느껴졌다. 반면에 강해건을 저렇게 키웠으니까 애가 제멋대로고 버릇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혹시……, 해건이 페로몬은 괜찮았어?”

전화통화로 나눴던 대화가 있기에, 강유건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도 극우성 페로몬은 잘 모르지만, 그 정도면 괜찮았던 것 같아.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 내가 신경 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가벼움과 진중함을 정당히 섞어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강유건이 티 한 점 없는 맑은 미소를 보였다. 더는 무거운 주제로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수록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죄책감의 무게만 더욱 육중해졌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말을 돌리는 건 한서림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신향수 향인데, 벌써 산 거야?”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페로몬 향수이니 그 향을 모를 수가 없었다. 후각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저 제가 만들었기 때문인지, 한서림은 퍼퓸SR의 모든 향수를 향만 맡고도 전부 구분할 수 있었다. 연구원들이나 고객들도 확연히 다른 향은 금세 알아맞혔으나, 비슷한 베이스를 사용하고 아주 미세하게 다른 향은 헷갈려 하곤 했는데, 한서림에게는 예외가 없었다.

“당연히 샀지. 맞다, 기사 봤어?”

“무슨 기사?”

“나 어제 너네 매장 오픈했다고 해서 본점에 갔다가 깜짝 놀랐잖아.”

혹시 론칭 첫날부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걱정이 들었다. 어제 강해건의 광고 촬영장에 갈 게 아니라, 동시에 오픈한 매장들 중 본점에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강해건의 집에 온 후로 휴대폰 확인을 제대로 안 해서 어제 론칭에 대한 보고도 아직 받지 못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치솟은 불안과 달리, 강유건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서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정말 난리더라. 이거 봐봐, 한국에서도 벌써 반응이 장난 아냐.”

강유건이 휴대폰으로 퍼퓸SR 매장 오픈에 관련한 기사들을 쭉 보여주었다. 물론 마케팅 팀에서 작정하고 언론플레이를 하기도 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강해건 효과였다. 더 정확히는 스캔들이 아닌 강해건의 진지한 열애설이 마케팅 효과를 불러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해건의 파급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동생……,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겸손은. 네 향수가 좋으니까 잘 팔리는 거지. 근데 이번 신향수 중에 이거, 나 완전 마음에 들어. 향이 너무 섬세해서 진짜 내 페로몬이라고 해도 다 속을 것 같더라.”

강유건이 벗어둔 코트 주머니에서 샘플을 꺼냈다. 본품을 사면 휴대용으로 들고 다닐 수 있게끔 함께 주는 거였다. 지속시간을 늘리고 피부 밀착도를 높였다고 해도 습관적으로 뿌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옮겨 담을 수 있는 구조이기에 사용도 편리했다. 결국 고객들이 향수를 얼마나 자주 뿌리느냐가 매출로 이어졌다.

“너한테 잘 어울리는 향이라서 그런가 봐. 그걸로 몇 개 보내줄게.”

“아냐, 이미 여러 병 샀어. 엄청 뿌리고 다니려고. 근데 너는 무슨 대표가 네 회사 난리인 것도 몰라? 아, 어제 해건이 러트 때문에 정신없었겠구나.”

“어, 아무래도. 유건아, 나 잠깐 휴대폰 좀 확인할게.”

방으로 돌아와 침대 옆 무선 충전기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확인하자 직원들의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다들 놀란 모양이었다. 이렇게 메시지가 많이 왔는데 어떻게 몰랐지, 하다가 어제 강해건의 집에 들어오면서 무음으로 설정해두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한국에서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몰랐기에, 믿기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했다. 다시 거실로 나가 강유건의 옆에 앉으니, 저만큼이나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하해. 내가 다 뿌듯하더라.”

“어……, 고맙다. 좀 얼떨떨하네.”

“광고 나가면 반응 더 좋을 거야. 안 그래도 내가 셋이서 밥 먹고 싶다고 했더니 해건이가 열애설 기사 나간 후에 같이 보자고 하더라고. 너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고. 애가 무심해 보여도 속이 깊어. 아주 귀엽고.”

무심해 보이는 것도 모르겠고, 속이 깊다는 말에도 동조할 수 없었으며, 특히 아주 귀엽다는 말에는 절대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었으나, 한서림은 그저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콩깍지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만 씌는 건 줄 알았는데, 형제 사이에서도 가능한가 보다. 어쨌든 강해건의 덕을 크게 본 것은 사실이라서 그가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강 전무 왔네.”

불현듯 가라앉아 깊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일어나서 씻은 것인지 개운해 보이는 강해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기야, 잘 잤어요? 눈 떴는데 없어서 놀랐잖아.”

강해건은 소파 뒤에서 한서림의 목을 끌어안으며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관자놀이에 부드러운 입술을 꾹 눌렀다.

이 새끼가 돌았나, 싶었다.

32.

“와. 벌써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은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당해하는 한서림과 달리 강유건은 환한 미소를 드러냈다.

“뭘 해도 다 예쁜데 어떻게 참겠어.”

그 사이 강해건은 한서림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은근하지만 다정한 페로몬이 한서림을 에워쌌다. 진심으로 애정이 드러나는 페로몬이었다. 아무리 페로몬을 컨트롤해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지만, 하루 종일 섹스만 했던 여파로 이 자식이 돌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비정상적으로 두근거리는 제 심장도 돌아버린 게 분명했고. 촌스럽게 한 번 잤다고 마음까지 가는 건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혼이라서 둘이 어색할까 봐 내가 좀 도와주려고 셋이 밥 먹자고 한 건데, 괜히 데이트 방해할 뻔했잖아. 방해꾼은 사라질 테니 둘이서 오붓하게 저녁 먹어라.”

“아냐, 같이 먹고 가. 나도 배고프다.”

저녁 이야기가 나왔을 때야 한서림은 오늘 내내 한 끼도 먹지 못해서 몹시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운이 없는 게 온종일 강해건에게 시달려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실제로 밥을 못 먹은 것도 영향을 미쳤을 테다. 아무리 강해건의 러트였어도 밥도 안 먹고 섹스만 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려고 했다. 허리에 둘러진 강해건의 팔이 신경 쓰였으나, 의도가 있을 테니 일단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고 무심하게 반응했다.

“둘이 좋아 죽는 거 같은데 내가 끼어도 되겠냐? 나는 눈치 없는 놈 되기 싫다.”

“안 될 게 뭐야. 안 그래도 한국 들어와서 너랑 밥 한번 먹으려고 했는데 론칭 준비로 이래저래 정신이 없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 같이 먹어.”

“그래? 그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여기 근처에 괜찮은 한우집 있어.”

“그냥 시켜 먹지. 안 그래도 서림 씨는 비연예인인데 나 때문에 괜히 요즘 인터넷에 너무 자주 오르내려서 걱정되는데.”

언론 노출용 사진을 찍으려고 데이트하는 척까지 하자고 했던 놈이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고 있었다. 이미 신상은 털릴 대로 다 털렸는데, 그렇게 걱정되면 신상 털리기 전에 배려해줬으면 더 좋았을 거 아니냐는 말이다. 그냥 나가기 귀찮은 거면서 저를 위하는 척하는 모습이 기막혔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애정으로 점철된 페로몬으로 어루만져지니 정말 저를 걱정하는 건가 착각할 것 같았다. 말 그대로 한서림은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강유건의 앞에서 강해건이 이유 모를 가식을 계속 떨고 있기 때문에.

“와, 나 우리 해건이가 다른 사람 챙기고 걱정하는 거 처음 봐. 우리 막내, 철들었네?”

“애 취급 말라니까. 내가 우리 강 전무보다 결혼도 먼저 하는데 언제까지 애 취급하려고. 서림 씨 앞에서는 신경 좀 써주지? 내 체면이 말이 아닌데.”

강해건과 강유건 형제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살갑고 다정하며 편해 보였다. 한서림은 외아들이기에 이런 관계의 상황이 조금은 낯설었다. 학창시절에도 모주원과만 붙어 다녔고, 모주원 역시 외아들이기에 그저 형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하고 짐작만 했었다. 그러나 유난스러운 강 씨 형제는 한서림이 생각한 것 이상의 끼어들 수 없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근데 서림 씨, 왜 이 옷 입고 있어요? 이거 우리 집에 올 때 입었던 옷 아닌가? 안 불편해요?”

우애가 부럽다는 생각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 문득 강해건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반사적으로 거리를 넓히며 제 옷을 확인했다.

“아……. 샤워했는데 바로 초인종 소리가 들렸거든요. 어제 입었던 옷은 강해건 씨가 찢어버려서 걸레 조각이 됐고, 그렇다고 유건이 왔는데 가운 입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와, 우리 해건이 남자였네. 옷을 왜 찢었을까?”

강유건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강해건은 누가 봐도 압박적일 정도로 알파의 분위기가 대놓고 드러나는데, 오늘만 벌써 강유건의 감탄사를 몇 번째 듣는지 몰랐다.

“드레스룸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지. 한 끼도 못 먹어서 배고프죠? 허리가 더 가늘어진 것 같은데. 밥 시켜놓을 테니까 옷 갈아입고 와요. 뭐 먹고 싶어요?”

보란 듯이 허리를 더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의 손길에서 시작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뿌듯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강유건 때문에 치우라고 하기도 뭐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빠져나오는 쪽을 택했다.

“어제 저녁 먹었던 곳 좋았어요. 밥만 있으면 메뉴는 아무거나 상관없고요. 그런데 나는 밥 두 공기 더 추가해줘요. 내가 좀 많이 먹거든요. 내 몫으로만 밥 세 공기 필요한 겁니다.”

한서림은 혹시나 강해건이 잘못 알아들어서 한 공기만 더 추가하는 불상사가 일어나 도합 두 공기가 될까 봐, 총 세 공기라고 다시 한번 짚어준 후 드레스룸으로 갔다. 어제와 오늘 제대로 못 먹었다고 어울리지 않게 현기증까지 느꼈으니 과식은 안 하더라도 평소에 먹는 만큼은 먹어야 했다.

강해건의 드레스룸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워낙 옷을 잘 입어서 옷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배우의 드레스룸이라고 하기에도, 재벌가 아들의 드레스룸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게 평범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외출복이 걸려 있는 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트레이닝복 쪽으로 돌렸다. 외출복만큼이나 트레이닝복이 많았다. 어쩌면 배우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옷을 많이 입어봤기 때문에, 평소에는 편한 스타일을 추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패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한서림이 생각하기에 강해건은 얼굴이 몹시 화려해서 심플한 옷이 더 잘 어울렸다.

일단 아무 티셔츠나 하나 집어서 상의를 갈아입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색 티셔츠였다. 이제 트레이닝 바지를 고를 차례였다. 난감했다. 벌써 몇 개째 몸에 대보고 있는데도 발목을 잡아주는 부분이 없는 탓에 전부 길었다. 그래서 어제 반바지를 준 거구나 싶었다. 남의 옷을 뒤적거리며 반바지를 찾을 수도 없는 탓에 선택지가 없었다. 한서림은 한 뼘 이상 긴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아랫단을 두 번 접었다. 하지만 재질의 특성상 걸음을 떼기 무섭게 흘러내렸다.

거울 앞에 서자 한숨이 나왔다. 저도 작은 키에 왜소한 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강해건 특유의 피지컬 때문에 티셔츠도 큰데 바지까지 이러니 팔푼이 같았다. 체격 차이가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옷을 입으니 더 현실감 있게 와닿았다. 집에 돌아가면 당장 편하게 입을 옷들부터 택배로 보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상태로 나가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지…….

때마침 서랍장 위에 놓인 가위가 보였다. 제 옷도 아닌데 마음대로 자를 수도 없고, 아니, 일단 밑단을 잘라서 입고 같은 거로 사다두면 되지 않을까, 고민하는데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구세주가 나타났다. 한서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강해건의 표정이 미묘했다. 거울로 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알기에 강해건이 비웃어도 할 말이 없었다.

“바지가 너무 길어서요. 어제처럼 반바지를 입으면 좋겠는데요.”

“으음……. 그건 곤란한데. 그거 벗어 봐요.”

속옷을 입지 않은 탓에 벗기가 민망했다. 어차피 볼 거 다 본 사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새 속옷이 있다면 속옷도 빌려,”

“없어요. 내가 입던 거 빌려주고 싶지는 않고.”

정말 성격 하고는. 입던 속옷에는 금테를 둘러놨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단박에 잘라버리는 말투가 까칠했다. 강유건 앞에서 보였던 다정함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가식으로 똘똘 뭉친 자식이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입던 거라도 상관없으니 빌려주면 새 걸로 하나 사다 줄게요.”

“싫다고 했는데. 빨리 벗어요. 강 전무 기다리니까.”

네 형을 생각하는 만큼 나도 좀 배려해 주면 안 되겠냐.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망할 놈의 죄책감 때문에 참았다. 한서림은 강해건이 왜 강유건에게 형이라는 호칭 대신 자꾸 강 전무라고 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뻔뻔한 얼굴로 바지를 훌렁 벗어서 강해건에게 건넸다. 그나마 티셔츠가 큰 덕분에 허벅지까지 내려와서 걱정한 것보다는 안 민망했다. 아래가 좀 휑하게 느껴지는 게 멋쩍긴 했지만.

“…….”

“왜……, 그렇게 봅니까? 막상 자르려니까 아까워요?”

한서림이 바지를 벗는 사이, 가위를 챙겨 든 강해건은 정작 벗어준 바지를 받아들고는 움직임 없이 한서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묘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라졌던 민망함이 다시금 살아나려고 했다.

이 새끼 진짜 변태인가…….

펠라티오를 할 때 뒤로 자위를 하라면서 이상한 짓을 시키고, 섹스할 때도 저속하고 상스러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때부터 알아봤다. 솔직히 강해건은 설렘을 선사할 때도 많았지만, 빡치게 할 때가 더 많았다.

“내가 자를게요. 새거로 하나 사다 둘 테니 그만 아까워하고 가위 줘요.”

질릴 만큼 섹스했으면서 새삼스레 너 변태냐고 물어보기에는 멋쩍어서 적당한 핑계를 대며 손을 내밀었다. 강해건은 지금까지 노골적으로 바라봤던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는 듯이 시선을 거둔 후 무표정으로 주저 없이 밑단을 잘라냈다. 뻔뻔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아까워한 거 아니고, 얼마만큼 잘라야 되는지 길이 본 겁니다. 입고 나와요.”

33.

자의식 과잉이었나…….

바지를 건네준 강해건이 먼저 드레스룸에서 나갔다. 너무 적나라한 눈길로 쳐다보는 탓에 강해건이 변태라는 의심에 확신이 들려고 했는데, 길이를 가늠한 거였단다. 그럼 처음부터 말할 것이지 왜 그런 묘한 얼굴로 쳐다봐서는 오해를 하게 하느냐는 말이다.

입어본 결과 길이를 봤다는 말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깔끔하게 발목까지 떨어지는 길이였고, 막 자르는 것 같더니 양쪽의 길이도 다르지 않고 일정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제법 좋은 모양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두고 잠깐이나마 변태라고 오해했던 게 아주 조금 미안했다. 한서림은 흘러내리려는 바지의 허리끈을 사이즈에 맞게 당겨 묶은 후 드레스룸에서 나갔다.

강해건, 강유건과 잠깐 대화를 하다 보니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강해건이 식탁 위에 꺼내놓은 음식의 포장을 다함께 뜯으면서 한서림은 놀란 눈을 했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소갈비찜과 차돌된장찌개, 잡채, 삼치구이, 도미찜, 낙지볶음, 작은 사이즈의 여러 전과 제육두루치기에 김치찜까지. 기본 반찬도 많은데 뭘 이렇게 많이 시켰나 싶었다.

“서림 씨가 배고프다고 많이 먹을 거라는데, 아직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메인을 좀 많이 시켰어요. 같이 먹기에 별로 안 어울릴 수도 있지만,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어요.”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눈을 확 접으며 사근하게 하는 말에 기가 막히면서도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음식 낭비에 미련한 짓이었다. 강해건은 다정한 미소를 보이며 한서림의 앞에 밥도 세 공기 놔주었다.

“아까 주문할 때 해건이가 얼마나 고민하던지. 왜 아직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모르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면서 자책을 하더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