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42)

“됐어. 나 괜찮으니까 강 전무도 그만 가. 박사님도 가시고요.”

수면제 기운이 도는지, 강해건이 조금 느려진 속도와 풀린 발음으로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누구보다 늠름하고 강건한데, 링거바늘을 꽂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강해건이 안쓰러워 보였다.

“갈 때 되면 알아서 갈 테니까 편히 자. 어차피 페로몬 폭주 시작되면 있고 싶어도 못 있으니까.”

조금 젖은 강유건의 목소리가 울렸으나, 그 짧은 사이에 잠든 강해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강유건은 정 박사에게 눈짓하며 함께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니 일단 이 집에서 나가는 게 현명할 테다.

어차피 페로몬 폭주를 막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수면제를 투약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강해건이 기억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였다. 강해건은 제 의식이 있을 때 페로몬이 폭주하는 걸 견디지 못했다. 아마도 스스로가 괴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괴로운 탓일 테다. 그러나 수면제에 의지해서 잠든 사이에 폭주하면, 기억도 없고 다치는 사람도 없으니 마음은 무거울지언정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다.

강유건은 정 박사와 함께 아파트 앞 커피숍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3개월 만에 또 온 거죠?”

“그렇지.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 작년에 4개월에 한 번 정도였고, 재작년엔 6개월에 한 번 정도였는데. 그래도 이번 역시 해건이가 전조증상을 금세 눈치채서 다행이야.”

여섯 시간 후에 강해건의 상태를 다시 살피러 와야 하는 정 박사가 개인 수첩에 기록한 강해건의 폭주 기록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부디 빨리 지나가서 수면제를 더 투약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왜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건지는 아직 모르는 거죠?”

“학술 자료에 따르면, 스트레스가 심할 경우 주기가 짧아진다고는 하는데…….”

“아니, 무슨 의사들은 원인을 모르면 전부 스트레스라고 해요? 이것도 스트레스 때문이다, 저것도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럴 거면 환자들이 왜 굳이 의사한테 진단을 받는 거냐고요.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네.”

강유건은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정 박사에게 짜증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날카로워지는 말투를 컨트롤하지 못했다.

“……사실, 이번에 미국에서 페로몬 폭주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디테일하게 기록해둔 일기장을 학회에서 입수해서 공유받게 됐는데…….”

“…….”

“우성 알파에 30대 초반인데, 원인은 모르겠지만 우성이 감당할 수 없는 페로몬을 가지고 있어서 컨트롤을 못했더라고. 어쨌든 페로몬 폭주가 시작된 원인은 해건이랑 다르지만, 기록을 살펴보니 그 사람도 폭주 주기가 점점 짧아졌어. 1년, 6개월, 4개월, 3개월, 2개월, 한 달, 2주, 1주, 나흘, 이틀, 이런 식으로…….”

설마 강해건도 폭주 주기가 그런 식으로 점점 짧아지다가 나중에는 일상생활이 불가하게 될까 봐 강유건은 문득 겁이 났다. 이런 디테일한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어서 더욱 두려웠다.

36.

“그래……서요?”

“자살하기 직전 한 달은 거의 매일 폭주가 일어나서 제정신으로 지낸 시간이 몇 시간 안 되더라고. 결국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거지. 자기가 미쳐가는 걸 느끼는 게 많이 괴롭고 힘들었을 테니까.”

“…….”

“치료법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페로몬 폭주 사후의 기록을 확보하게 돼서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해건이에게 도움 줄 수 있는 방안을 여러모로 모색하고 있단다.”

“……해건이의 원인은, 확실하게 그 약 때문인 거죠?”

귀에 인이 박이도록 확인했으면서도, 강유건은 다시 한번 정 박사에게 물었다. 강해건이 어릴 때부터 영양제인 줄 알고 10년 동안 강제로 먹은 약 때문인 거냐고. 그리고 정 박사의 대답은 변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 그래도 그때 오메가 발정 페로몬 덕분에 해건이가 발현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지금만큼의 일상생활도 불가능했을 거다. 회장님이 10년이나 넘게 먹인 약의 부작용은 심각할 정도로 위험하니까. 일전에도 얘기했다시피 그때 발현하지 못했더라면 생명에 지장이 있었을지도 몰라.”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의 원인은, 사실 비정상적인 발정 페로몬과의 충돌로 생긴 게 아니었다. 8년 전 강해건과 섹스한 오메가의 비정상적인 페로몬 덕분에 발현만 한 거고, 강 회장이 더 강한 페로몬을 위해 10년 동안 먹인 독한 약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강유건과 정 박사뿐이었다. 강해건이 진실을 알게 되면, 안 그래도 살얼음판 같은 강 회장과 강해건의 사이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나빠질까 봐 강유건이 숨겨주기를 간곡히 부탁한 결과였다. 정 박사 역시 서정 그룹에 서자로 들어온 강해건을 아끼기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메가를 찾아서 각인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나요?”

솔직히 8년 전 생일파티가 있었던 날은 초반부터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강유건의 기억이 불분명했다. 워낙 파티를 자주 즐기기도 했고, 생일파티에 왔던 사람을 전부 기억하는 것도 아니라서, 짐작 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강유건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파티가 막 시작되었을 때 왔던 몇몇 사람들뿐이었고, 그들 중에는 강유건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원이 확실한 사람만 초대했던 이전 파티들과 달리, 강 회장이 판을 크게 벌여도 된다고 허락해주었기에 초대장을 마구 뿌리면서 동반 2인까지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중간에 자리를 오래 비웠던, 의심 가는 애들 몇몇에게 물어보았는데 다들 아니라고 하고 알리바이도 명확했다. 누군가 갑작스럽게 히트사이클이 터진 것 같다는 말을 알파 친구에게 들었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초대받은 사람과 동반한 사람인 듯했다. 강해건이 찾는 사람이 그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다.

“그 오메가와 쌍방각인한다고 해서 약물 부작용으로 폭주하는 페로몬이 안정된다는 보장은 없어.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 아직까지 실사례는 없지만, 그래도 학술 자료는 있으니 시도라도 해 봐야지.”

이런 경우는 실제 사례가 있다는 것이 더 현실성 없을 것이다. 더 강한 페로몬을 위해 10년 동안 강제로 독한 약을 먹었고, 그로 인해 발현하지 못했으며, 정체 모를 오메가의 비정상적인 발정 페로몬에 발현하고, 약물부작용으로 페로몬 폭주까지. 그런데 발현시킨 오메가와 쌍방각인을 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성 있는 치료법이라고 하는데, 누가 이런 희귀한 일을 줄줄이 겪겠는가. 하나씩은 겪어본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강해건처럼 한 번에 전부 겪은 이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한테는 모르는 척해주세요.”

“지금까지 그래왔잖니. 나도 회장님과 해건이 사이가 더 멀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

강유건도 객관적으로는 강 회장의 지나친 욕심이 강해건의 삶을 지옥 불에 밀어 넣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해건의 복수심이 얼마나 깊고 짙은지 알기에 강 회장의 잘못을 숨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해건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더 가볍게 굴지만, 강해건이 계속 그 오메가를 찾고 있으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 박사의 말처럼 각인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만, 강해건의 목적이 치료보다는 복수심에 더 가까운 것 같아서.

만약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강 회장 때문이라는 것을 강해건이 알게 되면…….

강유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복수심은 아버지가 아닌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향하는 것이 나았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은 강해건이 강제로 먹어왔던 약물 오남용 및 과다복용만으로도 충분했다. 정작 그 오메가를 찾더라도 강해건의 심성이면 제대로 된 복수도 못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저 저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원망의 대상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해건의 원망과 별개로 강해건을 발현시킴으로 더 위험할 뻔한 상황에서 구해줬으니 그 오메가를 찾는다면 충분한 보상을 해줄 예정이었다. 그러니 당사자가 알지 못하는 원망이나 복수심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합리화를 하고 나니 강유건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강해건의 원망과 복수심이 강 회장에게로 옮겨간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할 테니까.

* * *

강해건과 광고 미팅이라는 명목하에 재회했을 때는 코트를 입어야 하는 추운 계절이었는데 어느덧 겉옷이 필요 없는 계절이 왔다. 사람들은 꽃놀이를 다니며 들떠 있었고, 포근한 날씨는 마음마저 온화하게 만들었다.

한서림은 3월과 4월,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주기적으로 강해건을 만나 언론 노출용 데이트 사진에 찍혔다. 대부분의 스케줄은 강해건이 먼저 연락을 했고, 의도와 목적이 다분한 만남이었다. 2주 전에는 강해건의 러트가 있었고, 주말이었던지라 일에 지장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역시나 극우성 알파의 러트는 감당하기 버거웠지만, 한서림은 철두철미하게 페로몬 향수로 무장했다.

두 달 전과 지금을 비교해 봐도 그와의 관계에서 달라진 점은 없었다. 강해건은 자기 기분대로 한없이 다정하게 가식적으로 굴기도 했다가 남보다 못하게 냉소적으로 차갑게 굴기도 했다. 상관없었다. 한서림은 멋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강해건에게 맞추고자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병원에서 임신에 문제없다는 진단서도 받아다가 보여주었다. 정작 가져오라고 했던 당사자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강해건은 자기가 뱉어낸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매일 퇴근 시각에 맞춰서 데리러 왔다. 심히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매번 설레는 것과 비례하여 죄책감의 크기도 증폭되었다. 제가 강해건에게 더 잘해야 하는데, 어쩐지 강해건에게 민폐가 되는 것 같다는 감상을 지우지 못했다. 야근을 핑계로 몇 번 거절해보기도 했으나 야근이 끝나는 시각에 맞춰서 오는 탓에 두 번의 시도 만에 야근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이혼할 거라서 결혼식도 요란하고 번잡하게 하는 거 싫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양가 모여서 식사로 대체하고, 언론 보도용 웨딩 사진도 찍었으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결혼식을 비공개로 하니까 프러포즈라도 먹이를 던져줘야죠. 결혼식도 하객 없이 가족 식사로 대체하는데, 이거마저 건너뛰면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할 테니까. 내키지 않는 건 맞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기사도 크게 날 거고.’

조금은 까칠하면서도 차가운 말투였다. 원하지 않는 결혼인 데다가 귀찮을 일까지 하는 것일 테니 강해건의 냉소적인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다만, 조용히 지나갔어도 될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벌인 당사자가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으니 한서림의 기분도 가라앉았을 수밖에 없었다. 강해건의 얼굴은 무표정이었지만, 페로몬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보면 프러포즈하러 가는 게 아니라, 빚을 받아내러 가는 줄 알겠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대체 기사를 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해건이 아무리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지만, 참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강해건 씨는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요.’

‘나는 안 쓰죠. 강 전무가 쓰겠지.’

‘아…….’

그제야 한서림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강유건은 많은 사람의 축하와 축복 속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직접 준비해주고 싶다고 했다. 물론 웨딩플래너를 섭외해서 지시하는 정도겠지만, 강해건은 강 전무의 호의를 단칼에 잘라냈다. 비연예인인 한서림을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사랑꾼 흉내를 내면서. 스몰 웨딩도 아닌 식사로 대체한다는 말에는 결혼 당사자들보다 더 서운해하고 시무룩해하며 속상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어쨌든 며칠 전에 강해건이 크루즈를 빌려 언론 노출용 프러포즈를 했으며, 어제는 양가 가족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식사를 하며 웨딩 반지와 커플 시계를 나눈 것으로 결혼식까지 마쳤다. 더 시끄럽게 떠들썩할 것 같았던 여론은 결혼식 사진을 두세 장만 공개하며 조용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싶다는 내용으로 보도 자료를 돌려서인지 의외로 잠잠해졌다.

“타죠.”

대기하는 중 상념에 빠져 있던 한서림이 강해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서정 그룹에서 내준 전용기에 올라서자 이중호 실장이 먼저 타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일찍 도착해가지고…….”

이중호는 한서림에게 넉살 좋게 인사하면서도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37.

이중호를 보고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저 남자라고 해서 남의 신혼여행에 결코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한서림은 괜찮다는 듯이 웃어주었다. 왜 동행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강해건은 관심 없다는 투로 이중호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중호는 챙겨온 시나리오 몇 부를 강해건에게 넘겼다.

전용기에서 한서림의 몫으로 지정된 좌석은 강해건의 옆자리였다. 옆자리이긴 옆자리인데 사이에는 복도처럼 통로가 있었다. 이중호 실장은 강해건의 앞자리였다. 괜히 멋쩍게 헛기침만 하고 있는 이중호와 달리 강해건은 바로 시나리오 한 부를 펼쳐서 평온하게 읽기 시작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강해건이 신혼여행은 각자의 휴가 정도로 생각하자고 했기 때문에 한서림도 개의치 않았다.

잠깐 시간이 흐르자 기장과 승무원이 와서 인사를 했고, 강해건은 만면 가득 가식적인 웃음을 띠고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연기력과 껍데기 하나는 정말 훌륭한 놈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한서림은 프러포즈 받았던 날을 잠시 상기했다. 보도 자료로 배포할 사진을 찍기 위해 형식적으로 행한 일인데, 강해건의 프러포즈가 몹시 로맨틱해서 괜히 울컥했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가 아니었다. 강해건이 찾고 있다는 오메가가 저인 줄도 모른 채, 자기를 시한폭탄으로 만든 사람에게 프러포즈하는 것에 대한 싸구려 동정심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한서림은 이 반지를 한강에 던져버리고 프러포즈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잠깐 못된 생각을 했었다. 실행에 옮길 정도로 멍청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근데 왜 하고 많은 휴양지 놔두고 신혼여행을 뉴욕으로 가? 보통 뉴욕에 갔다가 휴양지로 넘어가지 않냐? 더구나 너는 뉴욕에 많이 갔었잖아.”

비행기가 이륙하고 30분쯤 지났을 때 이중호 실장의 말이 들려왔다. 몸까지 돌려서 강해건을 대놓고 쳐다보며 질문했는데도 강해건은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시나리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한서림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저한테 고르라고 해서 제가 뉴욕으로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대표님이요? 왜요? 뉴욕으로 유학 가신 후에 꽤 오래 사셨다고 들었는데, 이럴 때 몰디브나 칸쿤 같은 곳으로 가면 좋잖아요.”

“뉴욕에 제 연구실이 있어서요. 어차피 이번 달 중에 한 번 갔어야 했는데 겸사겸사 그렇게 됐어요.”

“와, 그럼 연구실에 들르실 거예요? 저도 구경 가도 돼요? 사실 한 대표님네 페로몬 향수 저도 사서 쓰고 있거든요. 물론 이 자식이랑 만날 때는 못 뿌리지만.”

한서림이 처음 페로몬 향수를 연구하며 개발했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역시 베타들도 관심이 많았다. 알파나 오메가가 우상시 되었던 옛날과 다른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그 의식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 못한 까닭이었다.

“죄송합니다. 연구실은 외부인 출입 금지라서 구경은 힘들 것 같아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맛집이나 많이 소개해주세요. 저도 공짜로 휴가 보내주는 거라고, 이번에 안 따라가면 계약기간 끝날 때까지 쉼 없이 굴리겠다고 협박당해서 억지로 온 거거든요.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절대 남의 신혼여행에 따라오고 싶지 않았으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고요.”

이중호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나 보다. 한서림은 차가운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만들어냈다.

“오해 안 합니다. 현지인들만 아는 진짜 맛집 여러 군데 소개해드릴 테니 실장님도 좋은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하아…….”

한서림이 맑은 미소와 함께 상냥한 음성으로 말을 마쳤을 때였다. 시나리오를 툭 내려둔 강해건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약한 소리였는데도 한서림과 이중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강해건에게 향했다.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되네.”

강해건은 창밖의 구름을 무의미한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으나,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다정할 때는 가식의 끝을 보여줄 것처럼 닭살 돋게 다정한 사람이, 아닐 때는 온도 차가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제멋대로였다.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한서림과 이중호의 눈이 마주쳤고, 두 남자 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기꺼이 삼켜냈다.

이후로는 대화가 단절되었고, 기내식이 코스 요리로 나오는 걸 받아먹으면서도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를 보고, 누워서 잠을 자는 등 건조하고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비행이 이어졌다.

* * *

“배고프다. 아까 현지인들만 아는 진짜 맛집 소개해준다고 했죠? 안내해줘요. 호텔 체크인 시간까지 조금 남았으니까 점심부터 먹고 가죠.”

한서림에게 순발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눈웃음을 치고 있는 강해건의 머리를 쥐어박을 뻔했다. 비행기에서는 내내 저기압이더니 왜 저렇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서림과 이중호는 서로 눈을 마주쳤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중호와는 몇 번 본 적도 없는데 눈만 마주쳐도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이 같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배부른데. 저 성격파탄자 새끼.

그도 그럴 것이, 한서림과 이중호는 전용기에서 내주는 기내식을 전부 받아먹은 거로도 모자라, 라면에 비빔밥까지 추가로 먹었기 때문이었다. 라면이 정말 환상이라서 한서림은 세 개, 이중호는 두 개를 해치웠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하는 건 어찌 알고 센스 있게 다 먹을 만하면 새로 내와서 무척 감동했다.

반면에 강해건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열네 시간의 비행을 하면서 제대로 먹은 거라고는 라면 하나가 전부였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한서림은 좋아진 강해건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냈다.

“어떤 메뉴 먹고 싶어요? 메뉴 말해주면 적당한 곳으로 안내할게요.”

“내가 밥 먹자는 게 싫은가 보네.”

“왜요? 절대 아닌데요?”

“적당한 곳으로 안내한다면서요. 아까 중호 형한테는 현지인들만 아는 진짜 맛집 소개해준다고 하더니.”

하아, 정말 피곤한 자식.

한서림은 말꼬리를 잡고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강해건이 제 인생을 바꿔준 구원자이기 때문에 팬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저 때문에 강해건에게 페로몬 폭주가 생긴 것만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아마도 불편한 진실을 몰라서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았더라면 평생 팬으로만 멀리서 응원했을 것이다. 적나라한 머릿속과 다르게 억지로 웃는 낯을 유지하느라 안면근육이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죠. 내가 말한 적당한 곳은, 이 실장님께 말했던 현지인들만 아는 진짜 맛집보다 더 맛있지만 사람은 많지 않아서 적당히 여유로운 곳이라는 뜻이거든요.”

“……억지웃음 달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이나 어떻게 하고 말해요. 엄청 못생겼으니까.”

나름 뻔뻔하게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티가 났나 보다.

솔직히 한서림은 지금 너무 배가 불러서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중호가 어이없어하는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야, 너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얼굴 공격을 하냐? 한 대표님이 못생긴 얼굴이면 나는 나가 죽으라는 거야? 듣자 듣자 하니까 화딱지 나네. 그래, 너 잘생겨서 좋겠다!”

“형, 왜 짜증을 내고 그래. 기분 좋게 휴가까지 왔는데.”

“지금 짜증 안 나게 생겼냐? 우리는 배불러 죽겠거든? 네가 안 먹어놓고 왜 우리까지 괴롭히려고 해. 호텔가서 짐이라도 풀고 소화 좀 시키고 나오자고 하든가.”

“……우, 리?”

강해건이 온화한 미소로 꼬투리를 잡았으나,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은 데뷔 때부터 강해건을 담당해 온 이중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형. 누구를 말하는 거야, 그 ‘우리’라는 건? 나랑 형? 아니면 형이랑 나? 설마 형이랑 몇 번 보지도 않은데다가 어제 나랑 결혼한 한서림 씨랑 묶어서 형이 우리라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형 그렇게 막나가는 사람 아니잖아.”

그에 더불어 강해건의 목소리는 몹시 다정하고 상냥했다.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여기에서 그에게 새삼 홀릴 사람은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한서림은 강해건의 목소리가 정말 좋다고 감탄했다. 이내 감탄한 스스로가 멍청해서 어이없어졌지만.

“아 진짜 또라이 새끼.”

이중호 실장이 거친 욕을 내뱉는 것처럼 썩은 표정으로 말해도 강해건은 전혀 타격받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확 접고 더 진하게 녹을 것 같은 미소를 보이며 한서림과 시선을 마주했다.

“배불러요?”

“……아뇨. 나 원래 많이 먹어서 벌써 소화 다 됐습니다. 안 그래도 호텔 가자마자 룸서비스라도 시켜 먹으려고 했어요.”

“잘됐네요.”

티 하나 없이 맑게 웃는 얼굴을 보니 한서림도 피식 웃음이 샜다. 마치 강해건이 자기감정대로만 전부 하고 싶어 하는 어린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강유건이 말했던 것처럼 엄청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사전에 협의한 대로 신혼여행 기간인 열흘 내내 각자의 휴가를 보내게 될 테니, 지금만 잘 넘기면 될 듯했다.

공항에는 강유건이 보내준 뉴욕 지사 직원이 나와 있었고, 직원에게 캐리어만 챙겨서 먼저 호텔로 보냈다. 한서림은 배가 고프다고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면서, 뉴욕에서 지낼 때 가장 좋아했던 식당으로 강해건과 이중호를 데리고 갔다. 그곳 음식이라면 어느 정도 먹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8.

* * *

2월 초에 한국에 갔었는데 지금은 5월 초이니 뉴욕에 돌아온 것은 3개월 만이었다. 3개월 만에 방문한 식당이어서인지 어제 배가 그렇게 불렀는데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대체 제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은 건 아닌지 한서림은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뉴욕에 돌아온 것이 3개월 만이니 결혼까지도 딱 3개월이 걸렸다는 의미다. 외출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던 한서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비즈니스의 일환인 정혼이라지만 어이없을 만했다. 그러나 가장 어이없는 것은 강해건의 태도였다.

‘내가 이 실장님과 방을 바꾸면 되는 거죠?’

‘신혼여행은 우리가 왔는데 왜 중호 형이랑 방을 바꿔요?’

태연히 되묻는 강해건의 말에 한서림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혹시나 극성스러운 누군가가 호텔에 확인할까 봐 강해건과 한서림이 룸 하나를 체크인하고 이중호가 다른 룸을 잡은 것인데, 각자 휴가를 즐기기로 했으니 당연히 바꾸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아무래도 강해건은 저와 있는 것보다 오래 알고 지낸 이중호와 있는 게 더 편할 테니 말이다.

‘그럼 그냥 이렇게 지내요?’

‘당연하죠. 중호 형 코 골아서 나는 같은 룸에서 못 자요.’

어차피 룸 안에 베드룸이 두 개가 있는데 그게 이유가 되나 싶었다. 그럴 거면 이중호 실장을 대체 왜 데리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고. 강해건이 절대 이중호에게 정말 휴가를 주기 위해 데려올 만한 성정은 아니기에 의아했다. 하지만 한서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페로몬 향수를 챙겨온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챙겨오지 않았더라도 뉴욕에서는 더 쉽게 구할 수 있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결혼을 했으니 계약 조항에 따라 빠른 임신을 위해 일주일에 2회 이상 섹스하기로 한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는 했다. 그럴 거면 각자 휴가를 즐기자는 말이나 말든가, 이중호를 데리고 오지나 말든가, 하는 반발심이 피어올랐으나 입에 담지는 않았다. 어쨌든 같은 방을 쓰게 된 게 황당하게도 조금은 기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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