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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1화 (11/250)

11화

뚱하게 칼자루를 보던 이도하가 별안간 아래로 훅, 바람을 불었다. 가벼운 입 바람에 시오한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난데없는 바람에 시오한이 움찔했다. 칼자루가 눈을 부릅떴다. 칼자루를 쥔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쭈? 이도하가 시오한을 고쳐 안았다. 시오한은 키가 크고 팔 다리도 길었다. 작은 소녀가 아닌지라 제 쪽으로 더 당겨 안으니 얼굴이 지척이었다.

이도하는 칼자루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는 조아렸으나 고양이도 죽인다는 호기심을 어쩌지 못해 눈을 홉뜨고 있던 궁인들이 숨을 들이켰다. 이도하의 뺨이 시오한의 이마 언저리에 안착했다. 숫제 고양이처럼 느리게 부비적거리자 시오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웃느라고 몸이 잘게 흔들렸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와 닿는 느낌도, 시오한이 웃느라고 팔로 전해지는 작은 흔들림도 기분이 좋아 이도하도 어느새 저도 모르게 웃었다.

칼자루를 약 올리려던 것은 어느새 잠깐 잊어버렸는데, 다시 보니 칼자루는 이제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익어 있었다.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렸다. 어이구야.

시오한은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누가 보면 영락없이 아파 몸도 가누지 못하는 황제가 근본 없는 이방인 놈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비통하기 짝이 없을 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도하는 키득거리며 조금 더 뺨을 눌렀다. 기분이 좋아져 이제 칼자루는 별로 안중에도 없었다.

“비켜, 밥 좀 먹게.”

“…폐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칼자루가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눈빛으로는 이도하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듯 했다.

“됐으니까 비키라고. 원래 이렇게 두 번 말하게 하는 편인가?”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물었다. 그는 이도하의 가슴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만 놀리라는 뜻 같았다. 하기야, 복도가 넓은데 칼자루가 비키지 않는다고 지나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도하가 그들을 지나쳤다. 감히 시오한에게 닿지 않으려는 듯 칼자루도 궁인들도 분분히 물러섰다. 새삼 시원하게 걷던 이도하가 얼마 못 가 우뚝 멈춰 섰다. 가만.

“식당이 어디지?”

가엾고 충직한 이 기사는 자신의 황제를 안아들고 한없이 가볍게 걸어가는 이도하를, 그가 말하는 이른바 ‘식당’-그는 또 이 가벼운 언사에 치를 떨었다-으로 안내해야 했다. 칼자루는 내내 이를 악물고 있었으므로 저러다가 이가 다 나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지경이라 시오한은 인자하게 물러가 쉬라고 했다.

기사에게는 자비가 아닌 듯 했지만. 내키지 않아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그는 시오한의 명에 눈빛으로조차 불복하지 못하고 즉시 사라졌다. 휑한 식당에는 이도하와 시오한 둘뿐이었다.

“에다이트 경이야. 내 호위대 소속이고. 아주 충직한 기사지.”

그래도 벌써 두 번이나 만나 정다운 눈빛을 주고받은 사이이니 소개를 해야겠다 생각했는지, 시오한이 말했다.

“벽창호야.”

이도하가 짧게 답했다. 물론 이도하는 그 기사의 이름이 에다이트건 디다이트건 관심 없었다. 그는 식탁을 하나씩 채우기 시작하는 요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먹을 것에 큰 집착을 둔 적은 없지만 배가 고픈 상태에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다른 세상의 음식이라고 하니 관심이 갔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못했다.

시오한은 분명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하라고 했다. 그런데 네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탭댄스를 춰도 될 만한 커다란 식탁 위로 늘어지는 음식이 끝이 없었다. 겨우 두 사람이 앉아 있을 뿐인데 차려진 음식은 어떻게 봐도 10인분은 되어 보였다.

과연. 이 정도 산해진미라면 침대에서 먹으면 안 된다고 했던 그 말도 이해가 간다. 음, 꽉 휘황찬란하게 들어찬 식탁을 잠시 보던 이도하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배가 좀 큰 모양이지? 아니면 보기보다 많이 먹나?”

이도하는 시오한에게 시선을 주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이도하가 음식을 구경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시오한이 짧게 웃었다.

“그럴 리가. 근래에 들어 좀 욕심을 부리던걸. 과하긴 한데 통촉하여 주십사 간곡하게 읍을 하는 바람에. 함께 먹을 사람이 생겨 다행이지.”

먹는 것 가지고 뭘 또 통촉까지야. 이도하가 흘긋 시오한을 보았다.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다.

“당신 몸보신으로?”

“아마 그런 바람일 테지?”

“먹다 체하겠는데.”

먹는 걸로 보신이라니. 이건 또 무슨 한국인 심보냐. 오즈라고 다를 게 없구만. 혀를 내두르며 이도하는 곱게 장미처럼 장식된 요리로 포크를 가져갔다. 쿡 찍어 입에 넣어보니 꼬들꼬들한 게 꼭 곱창 같았다.

“뭐야 이게?”

“공작의 혀야.”

“풉-!”

몹쓸 것들이 식탁 위로 비산했다. 시오한이 슬쩍 몸을 피했다. 이도하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며 입을 닦았다.

“미친, 이런 걸 왜 먹어?!”

“별미라고 좋아하는 이들이 꽤 되는데. 맛이 없어?”

“맛이 문제가 아니라 혀라며!”

“그대의 세상에서 먹는다는 소의 내장과 별 다를 게 없을 텐데….”

소의 내장. 그것이… 곱창은 곱창인데 소의 내장이라고 하니까 또 혀나 내장이나 도긴개긴이었다. 마침 곱창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할 말이 없다. 이도하는 이 기적같이 잘생긴 황제를 좀 알 것 같았다. 분명 눈치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말문을 잃게 한다. 아니,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눈치가 없는 척한다. 의뭉스럽게 웃는 황금색 눈동자가 개구지다.

이도하는 그만 식욕을 잃어 포크를 내려놓았다. 얕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은 시오한이 식탁 위로 손을 댔다. 몇몇 접시, 아마 이도하에게서 튀어나온 몹쓸 것이 내려앉았을 접시는 한쪽으로 치우고, 또 어떤 그릇은 제 앞으로 갖다놓았다. 이도하의 앞으로 밀어준 접시들은 한 눈에 봐도 좀 순해 보이는 요리들이었다. 항문이니 눈알이니 하는 도전전인 음식들은 없어보였다.

“……”

고맙긴 했으나 좀 낯부끄럽다. 이도하는 약간 오므라든 손끝을 펴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노란색 푸딩 같은 것이 잠깐 저항하다 탄력 있게 잘려나가며 숟가락 위로 안착했다. 확인하듯 시오한을 한 번 바라본 이도하가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적당히 달달하며 고소하다. 푸딩처럼 만든 계란찜 같다. 맛 좋네.

이도하는 금세 식욕을 되찾았다. 두어 가지를 먹어본 후 안심한 포크가 좀 더 과감해졌다. 칠리 새우 비슷한 것을 눈여겨보는데, 쨍그랑! 갑자기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른바 이 ‘식당’은 쓸데없이 큰 식탁을 치우면 야구를 하고 놀아도 될 정도로 컸으므로 소리가 댕댕 울리기까지 했다.

이도하는 흠칙 놀라 앞을 보았다. 손잡이까지 섬세하게 세공된 은수저가 식탁 중앙에 떨어져서 흔들리고 있었다. 수저에서 떨어졌을 예의 그 칠리 새우 비슷한 것이 어느 접시 밑으로 쭉 미끄러져 들어가며 붉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시오한의 손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좀 당황한 얼굴이었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시오한은 미심쩍게 절 바라보는 시선에 쑥스럽게 웃더니 부서질 듯 연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좀 무겁네.”

“지랄 마, 진짜….”

결국 험한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이도하는 기가 막혀 인상을 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오한은 난처해하고 있었는데, 왜 그러는지 통 모를 일이었다. 숟가락에 새우 하나 얹어놓고 그게 무거워서 떨어트렸다는 걸 누가 믿는다고? 그러나 더 기가 막힌 것은, 처연하게 눈썹을 늘어트린 얼굴이 정말로 그럴 듯하다는 사실이었다.

이 동네 인간이라면 폐하, 숟가락이-어쩌면 새우가- 무거우셨나이까, 따위의 소리를 하며 믿어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도하는 더 어이가 없었다. 정말 소름끼치는 주접이었다.

“정말이야. 손끝이 떨리는걸.”

시오한이 손을 내밀었다.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유심히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허-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의 상식과는 조금 벗어난 오즈인이라도 말초신경까지 연기를 하지는 않을 테였다.

“간병인 맞네. 완전 환자잖아.”

이도하는 예의 그 새우를 푹 떠서 내밀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시오한이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곧 꽃처럼 웃었다. 평생 남자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 이도하는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지만, 정말 그랬다. 아기 천사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종을 치는 것 같았다. 이 미친… 이도하가 혀를 씹는 사이 시오한은 이도하가 내민 숟가락 끝에서 새우를 받아먹었다.

“맛있네.”

“암만요. 꼭두새벽에 사람을 불러다가 안아줘, 먹여줘. 맛이 있어야지, 그럼. 카드 돌려막기도 아니고 대체 무슨 꼬라지야 이게. 양심이 있냐?”

확신하건대, 시오한이 처음부터 이렇게 약 먹은 닭처럼 골골거리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좀 창백할 뿐, 비유가 아니라 그는 그야말로 찬란했다. 빛도 미끄러질 것처럼 반짝 빛나는 머리칼이 그러했으며, 윤기 나는 피부가 그랬고, 건강하게 잘 다듬어진 신체가 그랬다. 마른 듯해도 올올이 들어찬 게 전부 근육이었다. 연약한 병 기운이라고는 그의 곁에만 가도 불씨 앞의 머리카락처럼 쪼그라들 것 같았다.

그러니 시오한이 이렇듯 병색이 완연한 환자의 낯을 하게 된 것은 전부 인소더블, 즉 이도하를 소환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이도하를 불러내 숟가락이 무겁다느니 소리를 해대며 간병을 하게 하고, 그러느라 또 마력을 써서 몸이 안 좋아지고, 안 좋아진 만큼 다시 이도하를 불러내고.

대환장의 악순환이다. 카드 돌려막기도 이보다는 인과가 있고 양심이 있다. 이도하가 혀를 찼다.

“저기, 저거… 생선 살.”

“…없네. 양심이.”

이 이상 기가 막힐 것도 없다. 눈썹을 찌그러트리면서도 이도하는 좀 해탈한 심정이 되어 생선살을 집어주었다. 조그맣게 잘라 양념을 해 놓고 손톱만한 꽃으로 장식까지 해 놓은 것이라 바르고 말고 할 것 도 없었다. 시오한도 주고, 저도 한 입 먹었다. 몇 번으로 그렇게 반복하고 보니 어느새 한 입씩 나눠먹게 되었다. 때 아니게 정다운 밥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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