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럼 저긴 말석이다?”
“말석이기도 하고, 가시방석이기도 하고. 황제와 마주보고 앉아 눈길은 받으면서도 말은 붙일 수 없으니 가엾게도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지. 그렇지 않고 태연할 수 있는 자라면 황제의 대척점에 앉은 자이니 그 또한 나름의 어울리는 자리가 되는 거야.”
동공처럼 넓은 식당에 두 사람의 말소리가 조곤조곤 울렸다. 여러 번 시오한에게 팔을 뻗던 이도하는 문득 이 쓸데없이 크기만 한 식탁에 짜증이 치솟고 말았다. 실용성이라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6명만 모여 앉아도 각자 떠들게 되기 마련이다. 황제를 앉혀놓고 회식을 할 것도 아닌데 30명도 너끈히 앉을 식탁이 대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앉는다고 한들 황제와 말이나 나눌 수 있나?
그야 당연히, 그렇게 앉으면 대화는 못 한다, 며 시오한은 퍽 낯설게도 다분히 상식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는 애초에 이 거대한 식탁이 꽉 차도록 앉을 일도 없으며 최대한 많이 앉더라도 상석을 필두로 6명 정도가 전부라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도 결국 국사를 나누는 일의 연장선이 되거나, 사교의 일부분이 될 따름이라고. 재미없지. 네모 반듯 단정하게 자른 고기를 받아먹던 시오한이 말했었다.
“이 자리엔 처음 앉아 봐.”
“뭐 그게 신기할 일인가.”
워낙에 큰 곳에 둘만 덜렁 앉아있으니 유난히 주변이 휑하게 느껴졌다.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던 이도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상석은 비어있었고, 시오한은 이도하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느른한 말투에 이도하가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그는 턱을 괴고 이도하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얼굴이 대번에 부드러워졌다. 아주 노골적인 다정함에 이도하가 괜히 입술을 물었다.
그는 이런 염치없는 다정함에는 전혀 면역이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통 알 수가 없어 또 말문이 막혔다. 참 인간미 없게 생겨서 하는 짓은 인간미가 지나치다 생각했더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화이람.”
“…뭐.”
“귀여운 걸 좋아해?”
“뭐?”
이렇게 뜬금없는 질문을 해대는 것만 봐도. 시오한이 느린 몸짓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 이도하가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까딱 시선을 내렸다. ‘귀여운 게’ 눈에 띄었다.
“아.”
검은색 바탕에 앙증맞은 노란 색 병아리가 쫑쫑 수놓아진 이도하의 잠옷 바지였다.
“귀여운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바지는 이도하의 어머니가 시장에서 원 플러스 원이라는 말에 혹해 만원 주고 두 벌을 사온 신세대 몸빼였다. 그러니까, 귀여운 건 어머니 당신의 취향이었고 이도하는 어머니가 종종 이렇게 취향에 맞춘 귀여운 것들을 사올 때마다 군말 없이 잘 입어주는 아들일 뿐이었다. 어차피 잘 때 입을 것이니 병아리가 그려져 있든 돼지가 그려져 있든 편하기만 하면 이도하는 별 관심도 없었다. 제가 이런 바지를 입고 있는 줄도 미처 몰랐다.
말하자면, 그는 병아리가 쫑쫑 그려진 잠옷 바지를 입은 채로 황제를 안고서 이 거대한 궁성을 활보한 것이다. 목을 졸라버릴 듯 시퍼렇게 절 노려보던 칼자루와, 그와 품 안의 황제를 발견한 즉시 과하게 바닥에 고개를 바닥에 쳐 박던 궁인들과, 식탁에 음식을 내려놓다 손을 삐끗하던 하인들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지나친 희롱이었구나. 별안간 반성의 순간이 찾아왔다.
“…어머니 취향이야.”
이도하가 간결이 대답했다. 갑작스레 피곤이 몰려든다. 그가 이마를 짚었다.
“효자로구나.”
“딱히.”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저렇게 쳐다보면서 자꾸만 손끝과 발끝이 오그라드는, 그러니까 이도하가 영 면역이 없는 말들을 해대니 그런 것인데 뱉어놓고 속으로 혀를 차게 되었다.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것, 이도하는 그런 것들과 인연이 없었다. 녹진녹진한 이 기분을 어떻게 좀 상쇄해 볼까 싶어 이도하는 차갑고 뾰족한 포크 끝을 응시했다. 높은 천장을 채운 샹들리에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빛이 난반사되었다.
“자는 중에 내가 그대를 소환한 건가?”
“자야 할 시간이었지.”
“지난번에도 그렇고. 매번 때가 좋질 않았던 모양이야.”
“알면 좀 이번처럼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와.”
계약주의 특권으로 ‘깜빡이’가 무슨 말인지를 이해한 시오한이 낮게 웃었다.
“난 매번 똑같이 그대를 불렀는걸.”
화이람. 화이람. 화이람.
“보고 싶었어.”
적당히 배가 차니 피곤한 몸에 노곤함이 밀려들었다. 오밤중에 소환되어 거하게 한 상을 먹었으니 야식이라고 봐도 좋은데, 이곳은 아침이니 야식 아닌 야식이었다. 몸은 과연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시시한 궁금증이 나른하게 흐르고 있었다. 포크를 까딱이며 가지고 놀던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 화이람….”
“…시오한?”
시오한의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조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여보라는 듯 곧바로 시오한의 몸이 휘청였다. 나른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도하가 몸을 튕겼다. 식탁 위의 요리들이 중구난방으로 밀려나며 와장창 깨졌다. 병아리 바지에 음식물이 튀었다. 날 듯이 식탁을 뛰어넘은 이도하는 시오한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기 전에 간신히 받아낼 수 있었다.
“뭐야….”
시오한의 몸이 불덩어리였다. 열이 절절 끓고 있었고, 손끝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나왔다. 숟가락이 무겁다고 했던 게 정말 눈곱만큼도 엄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씨. 이 양반아, 정신 좀 차려봐, 시오한!”
무슨 만날 때마다 기절 엔딩이냐! 이도하가 제 품에 늘어진 시오한의 뺨을 두드렸다. 그의 신하들이 보았다면 기함을 했겠으나 불행하게도 지금 이 넓은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봐!! 아무도 없어!? 당신네들 황제 쓰러졌다고!”
쩌렁쩌렁 목소리가 우렁차게 식당에 울렸다. 시발, 무슨 기절을 종류별로! 이도하는 우왕좌왕했다. 열이 너무 절절 끓어 당장 회복 능력이라도 써야 할까 싶었으나, 회복은 여태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건 이 지옥의 악순환을 더 가열차게 돌리는 꼴이었다.
‘이도하씨는 인소더블이잖아요. 매개하는 마력이 크다는 건 그만큼 계약주의 마력이 많이 든다는 건데, 오르페노스 황제가 아무리 기적의 현신이니 뭐니 하는 난 사람이래도 한계가 있지’
그냥 제가 빨리 사라져주는 게 답이다. 난 놈은 무슨 난 놈. 이럴 거면 대체 그 피를 다 쏟은 계약이고 맹약이고 간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늘어진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도하는 조심스럽게 시오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폐하-! 마침 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백하게 쓰러진 시오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에는, 내내 뒤척이던 제 침대 위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이 쏙 빠지도록 요란했는데 깜빡임 한 번으로 적막한 밤 속에 누워있다. 이도하는 잠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밤에 물든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 꿈인 것 같았다. 죄 뒤섞여 시큼하게 바지에서 피어오르는 음식 냄새가 아니었더라면, 쿵쿵쿵 박을 치는 심장박동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그렇게 믿었을지도 몰랐다.
벌떡! 이도하가 침대에서 튕겨 올랐다.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낚아챘다. 됐다고 한사코 거부하던 번호가 이렇게 쓸모를 발휘했다. 신호음도 없이 다짜고짜 상대방의 목소리부터 툭 튀어나왔다.
-우와, 형!
“유세오.”
-형, 저 촬영 중이에요! 근데 이거 라이브라, 이따 다시 전화해도 돼요?
촬영? 오밤중에 무슨 촬영? 그러나 지금은 그 이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무슨 촬영인지 모르겠지만 접어, 너 지금 소환될 테니까.”
-예?
왜 그래? 급한 일이야? 아니, 잠시만요, 부산하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시오한 보면 전해.”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침대에 처박혀서 요양이나 하라고.”
-어, 어, 형 이거 라이브, 오, 우와, 뭐야, 진짜네!
당황하던 유세오의 목소리는 곧 흥분으로 바뀌었다. 여러분 죄송해요, 저 잠시 다녀올게요! 하며 발랄한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남아 있었으나 이도하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선 채로 숨을 몰아쉬던 그는 곧 신경질적으로 침대에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통통 튄 핸드폰이 쭉 미끄러지더니 벽과 침대 사이로 쑥 들어가 버렸다.
“……”
진짜 되는 게… 입술을 꾹 문 이도하가 머리를 헤집었다. 시오한의 상태는 위중했다. 딱 죽기 직전이었던 처음보다, 피를 토했던 두 번째보다는 나았지만 더 위중한 것과 덜 위중한 것의 차이일 뿐이었다. 발전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계약주가 개복치라니. 종이 인간이라니. 그리고 그게 다 저 때문이라니.
눈앞이 깜깜한 게 밤이라서만은 아닌 것 같다. 끙, 이도하는 신음하며 지끈하게 당겨오는 머리를 손바닥에 눌렀다. 계약은 했고, 물릴 수 없다. 잔잔한 호수처럼 살고 싶었던 인생계획은 다 파탄 나고 이제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데, 계약주가 종이인간….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기는 했다. 계약을 물릴 수는 없지만, 묵힐 수는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럴 수는 있지만, 안하겠지.
‘정말로 보고 싶었어, 화이람.’
“…언제 봤다고.”
생전 본 적도 없는 다른 세계의 인간을 보고 싶다면서 그렇게, 그렇게… 그 말을 하던 시오한을 떠올리던 이도하가 갑자기 책상을 걷어찼다. 그러나 조그만 망치로 무릎을 얹어 맞은 것처럼 난데없이 튀어나간 다리는 조준 없이 가는 책상 다리를 차버렸다. 발가락이 콱 접히는 고통에 이도하가 주저앉았다. 씹… 이도하는 발가락을 감싸 안고 욕만 삼켰다. 저 혼자 갖다 박은 것이니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골골하는 와중에도 좀 살만 하다 싶으면 절 불러낸다. 시오한이 이도하를 묵힐 리가 없었다. 손목을 따면서까지 계약해 놓고 그래서도 안 되고. 왜 안 되느냐하면, 그냥… 그냥. 그랬다.
기분이 나쁘다.
계약 따윈 개나 주라며 서른 번이 넘는 소환을 거절하다 아예 코가 꿰인 이도하는 발가락을 감싸 안은 채 영문도 모르고 생각했다. 시오한이 저를 묵히면 다시 잔잔한 호수 같은 인생 계획을 꾸려볼 수 있겠지만, 저가 묵은지도 아닌데 어쨌든 그건 아니지, 하고. 기분이 나쁜 건 발가락 탓이다. 발가락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