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날 소환했냐고. 당신은 그럴 필요 없는 사람이잖아.”
“그렇지 않아.”
시오한이 즉답했다. 벌써 두 번이나 제 질문을 무시했는데 그는 별로 개의치도 않는다.
“난 그대가 필요해, 화이람.”
“그러니까 어디에?”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여태도 웃는 낯이었지만, 아주 다정하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이렇게.”
“…간병인?”
침대에 앉은 시오한을 한 번, 그 곁에 의자를 두고 앉은 제 자신을 한 번 본 이도하가 말했다.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바람소리 같은 웃음이었다. 이 양반은 목소리도 좋네. 웃음장벽도 낮고. 물론 농담이긴 했지만 이렇게 크게 웃어줄 줄은 몰랐다.
머쓱해진 이도하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딱히 갈 데도 없었다. 이도하는 침대에 한 번 눈길을 주었다가 슬그머니 그의 발치에 앉았다. 그러니까 속에서 자꾸 무슨 욕구가 고개를 드는데…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 툭 까놓고 말해 봐. 전쟁이라도 하려고?”
그런 거라면 난 협조 못 한다. 이도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계약자들은 오즈에서의 살인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다른 세상이어서 그런가, 듣기로는 양심의 가책도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여하간 이도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오한은 또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아니 무슨 말만 하면 웃어.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화이람. 그대를 앞세워서 전쟁을 했다가는 내가 먼저 죽어.”
“아.”
듣고 보니 그렇다. 오즈에서 힘을 행사하려면 시오한의 마력이 필요한데, 일전에 칼 하나 깨먹었다고 피를 토했으니 그보다 더 한 뭔가를 했다가는 내장을 토해낼지도 몰랐다.
“하고자 해도 그대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제국은 지금도 필요 이상으로 넓고, 나도 이 이상의 일은 사양이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대체 뭔데?”
“밥 먹자.”
이도하는 말문을 잃었다. 시오한이 한 번 더 말했다. 학생 식당에서 만난 과 동기처럼 여상하고 상큼한 태도였다.
“배고프지 않아?”
“어… 그래. 고프지. 배가.”
떨떠름하게, 이도하가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배가 고프기는 했다. 아침에 사과 몇 조각 주워 먹은 이후로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입맛이 없어서. 시오한이 손을 뻗었다. 이도하는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뭘 어쩌라고? 시오한이 아주 당연하다는 낯으로 턱짓했다.
“안아줘야지.”
“……뭐?”
어이가 없어 자꾸만 반 박자 대꾸를 놓친다.
뭘 해달라고? 다시 묻지도 못하고 쳐다보니 시오한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화이람. 난 환자고 힘이 없어서 걷기가 힘들어.”
“…당신 황제잖아. 갖다 달라고 해.”
“침대에서 먹으면 안 돼.”
“……”
이게 분명히 아주 맞는 소리이기는 한데. 그렇기는 한데. 이게 왜 여기서 나오지. 금을 세공해 놓은 것 같은 금발을 늘어뜨린 기적의 남신에게서 별안간 구수한 시골 누룽지 냄새가 난다. 이도하는 또 말문이 탁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시오한이 손을 까딱였다. 환자도 맞고, 침대에서 뭘 먹으면 안 되는 것도 맞지.
이도하는 어이가 없는 채로 홀린 듯 손을 뻗어 유려한 그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맞닿은 순간, 따뜻한 심장에 닿은 것처럼 온기가 확 퍼졌다. 놀란 이도하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시오한의 손을 꽉 잡아 그를 당겼다. 좀 마른 것 같은 몸이 종이처럼 딸려왔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시오한의 다리 아래로 손을 넣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가만, 이게 아닌데?
“업자.”
이도하가 말했다. 그러나 시오한은 벌써 그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화이람. 그럼 배가 눌려서 힘들어.”
“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러고 나가면 당신도 쪽팔리잖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농담이지?”
“그대가 즐겁다면 농담도 좋겠지만, 아니야.”
“내가 쪽이 팔려.”
“어째서?”
이도하가 시오한을 노려보았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며 이도하를 보던 시오한이 결국 하하 웃음을 흘렸다. 이 양반이 진짜.
“아무도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왜? 하고 물어보려던 이도하는 알아서 수긍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황제의 얼굴을 허락 없이 함부로 바라보는 건 죄라고 하지 않나. 그것도 대역죄. 사극만 보아도 황제가 지나가면 죄 새우처럼 허리를 굽히고 눈을 내리까니 이곳이라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이도하는 콧방귀를 끼었지만, 곧 핑계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꺼지라고 해도 될 일인데 굳이 핑계를 찾고 있는 저도 이도하는 어이가 없었다. ‘계약자가 계약주에게 애착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김윤혜의 목소리가 머리를 맴돌았다.
“…진짜 달아둬라, 이건.”
“기꺼이.”
시오한은 놀이동산에 나들이라도 나온 사람마냥 즐겁게 웃었고, 이도하는 구시렁대면서도 결국 그를 안아들었다. 작은 요정 같은 꼬마애나 깃털처럼 가벼운 미인이었더라면 가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오한은 미인이긴 하지만 한 눈에 봐도 이도하 저보다 반 뼘 정도 더 큰 성인 남자였다. 핼쑥하고 병색이 완연하여 연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각오한 이도하가 흡- 힘을 줬다.
“?”
이도하가 휘청거렸다. 묵직하리라 예상했던 시오한은 예상외로 가볍게 훌쩍 들렸다. 품 안에 와 닿는 몸이 분명 마르긴 했으나 생각보다 단단한데도 그랬다. 뭐야, 진짜 종이였나. 오즈인들은 무게가 좀 다르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물리법칙이 어긋난 위화감에 이도하는 혼란스럽게 시오한을 보았다.
한 손은 이도하의 어깨에 걸치고 다른 손은 제 배에 얹은 그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다 커서 같은 남자에게 공주님 안기를 당했다는 부끄러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랬다면 처음부터 안아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도 제법 뻔뻔하다 하며 살았는데 그보다 더 하다. 이 정도는 돼야 황제도 해 먹는 모양이다.
손이 없어 이도하는 문을 걷어찼다. 붉은 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나무문은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였고, 그래서 아주 힘껏 찼더니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런웨이처럼 시원하게 쭉 뻗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에는 궁인으로 보이는 몇 명과 기사 둘이 서 있었는데, 난데없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요란한 행동으로 한 순간에 대역 죄인을 여럿 만든 이도하는 그 얼굴들 중 낯이 익은 얼굴이 있어 유심히 보았다. 놀라 멍하니 보던 기사는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자 불이 켜지듯 반짝 적대감을 띄웠다. 이건 더 익숙했다.
“칼자루?”
지난 소환에 이도하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그 기사였다. 칼날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바람에 덜렁 남은 칼자루만 들고 망연하게 서 있던 모습이 인상 깊었더랬다. 남자가 팍 인상을 쓰더니 이도하를 무시하고 즉시 부복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시종들과 또 다른 기사들도 납작 엎드렸다.
“폐하!”
외치는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한지 언뜻 듣기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설마하니 황제가 안겨 나왔다고 저러나 싶어 보니, 그 설마가 역시인 듯 했다.
“폐하. 지금 당장 황궁의를 부르겠습니다.”
진짜 유난이다. 이도하는 생각했다. 그 날처럼 피를 토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멀쩡히, 물론 지극히 멀쩡히는 아니고 안겨서 나오기는 했지만 멀쩡히 눈 잘 뜨고 있는데 저렇게 절절하기까지 할 일인가. 시오한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크게 안 좋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노인을 여러 걸음 하게 할 필요는 없지. 일어나라.”
“예, 폐하.”
아니 되옵니다, 폐하 어찌- 쯤으로 실랑이를 좀 하지 않을까 했더니 의외로 두말없이 바로 일어난다. 그때까지도 이도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신경이 팔려 있었다.
원래 이도하는 제게 닿는 감각에 무신경했다. 말 한 마디 나눠보지 않은 후배가 개강 총회 술자리에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쪽 사정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이건 정말 신경이 쓰였다. 목 뒤의 솜털에 자꾸만 손끝이 스쳐 간지러웠다. 그러다 어느 한 곳을 슥 문지르자 등골에 소름이 쭉 돋았다. 참아보려 하던 이도하가 결국 머리를 털었다.
“아, 좀!”
“음? 미안.”
나도 모르게. 시오한이 손을 떼며 사과했다. 그를 안고 있으니 솜털이 오소소 선 뒷목을 문지를 수도 없는 이도하는 부르르 어깨만 한 번 털고 말았다. 정말 별일도 아니었다. 그걸로 끝날 일이었는데, 고개를 든 이도하는 잠깐 당황하고 말았다. 부모 죽인 원수를 보는 듯 흉흉한 눈빛들이 그를 향해 있었다.
“뭐, 왜?”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그가 안고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이도하에게는 어이없는 생떼를 부리는 계약자이지만 그들에게는 하늘보다도 귀한 황제.
“송구하오나… 언사가 조금 불손한 듯하여….”
칼자루가 새로 마련한 듯한 칼자루를 꾹 쥐고 힘겹게 말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끝이 아주 새하얬다. 말투는 공손했으나 눈빛이 아주 불손한 게 거의 이도하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지난번에야 이도하가 누구인지 몰라 칼부터 들이밀 수 있었지, 지금은 계약명을 보란 듯이 얼굴에 새긴데다가 그들의 황제를 덜렁 안고 있으니 모른 척을 할 수도 없어 마지못해 말을 올리는 게 빤했다.
이도하는 이해했다. 이순신이라지 않는가 말이다. 이순신이건 세종대왕이건 견해 차이 정도는 차치하고, 그들 중 누구에게라도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근본 없는 외국인이 불손하게 손을 탁 내치며 사과하게 만들었더라면 이도하도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어딜 감히!
그러니까 이들도 아마 그런 마음일 것이다. 하늘같으신 폐하께서 뒷머리를 좀 만지셨기로서니 감사한 줄 모르고 어딜 감히!
그러나 행동의 연유를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고, ‘좀’ 그거 한 소리 했다고 이렇게 죽을 놈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상했다. 이도하는 저런 사나운 눈초리를 좀 받았다고 기가 죽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약한 심보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