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되게 선명하다. 초저녁부터 애착인형처럼 꼭 쥐고 있던 이불을 더 구겨 쥐며 이도하는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김윤혜와 반나절을 넘게 입씨름을 하고, 깨작거리느라 밥풀 두어 개만 넘긴 상태로 에너젠과 더 브릿지의 관계자까지 만났다. 내친김에 죄다 해결해 버리자는 집돌이 같은 심산이었으나 몹시 지쳤다.
그러나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이도하는 새벽이 넘어갈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 쓰레기차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주 안팎으로 난리다. 피곤한데 잠은 안 오고, 배고픈데 입맛은 없고. 이도하는 짜증스럽게 뒤척였다.
속 시끄럽다는 표현을 그 옛날의 누가 처음 썼는지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정말 엿 같은 상황이었겠거니, 하는 짐작이 갔다. 이도하 제가 딱 그런 상황이었으니.
[화이람]
이도하가 눈을 번쩍 떴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환청이 아니라, 정말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물에 빛이 비춘 것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천장에 일렁거렸다. 이도하는 침대 위에 펼쳐진 작은 소환진을 노려보았다. 한참이라고 할 만한 시간 동안 노려보았으나 언제가처럼 쑥 빨려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좋아, 옥수수를 털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만하면 타이밍도 아주 좋다고 할 만하다. 나지막이 한숨을 쉰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화이람.”
“…그만 불러.”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머리든 가슴이든 몸 어딘가를 뚫고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한 차례 짧게 몸을 떤 이도하가 부러 투덜거리듯 말하며 눈을 떴다.
사방이 환했다. 열린 창문으로 평화롭게 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공기가 차가우면서도 산뜻했다. 아침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주변은 환했으나 그 때는 그가 피를 다 쏟아내며 죽어가고 있었으므로 제대로 봤다 하기 어렵다. 이도하는 그 날의 기억이라면 남은 것도 되도록 잊어버리고 싶었다.
두 번째는 노을이 지고 있었고, 금세 밤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창백했고, 회사 로비에서 소환되는 바람에 이도하는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그러니 이걸 처음이라고 봐도 좋았다.
“…시오한.”
처음으로, 이도하는 제 계약주를 불러보았다. 침대 헤드에 쿠션을 끼고 편안하게 기대 앉아있던 그가 빙그레 웃었다. 눈매가 기쁘게 휘어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해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래, 화이람.”
시오한이 대답했다. 이도하는 아무 말도 않고 그런 그를 잠깐 바라보기만 했다. 시오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창문을 열어놨는지 선선한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눈부신 금발이 가슴께까지 차분하게 늘어져 있다. 머리카락 한둘쯤이 간혹 흔들려 그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참 인간미 없는 얼굴이다.
아직까지 좀 창백한 안색 탓도 있었으나,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 정말 이게 사람인가 아닌가 하게 된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움직임이 새삼 신기할 정도였다. 어, 움직인다- 하고. 유세오가 왜 기적의 현신이니 얼천이니 하며 주접을 떨어댔는지 알 만했다. 사람들이 또 뭐라고 떠들어댔던가. 에테르제 취직하게 해 주세요. 이게 복지다. 이리스티리움 사실 황제 얼굴로 대륙 제패함.
머리칼과 똑같은 신기한 황금색 눈동자도, 얼굴을 조형하고 있는 모든 곡선들이 너무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서 변태 같을 정도였다. 아님 변태가 될 것 같던가. 이도하는 제가 너무 집요하게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매끄러운 뺨을 한 번 찔러보고 싶다. 그래서 이도하는 정말 그렇게 했다.
“……”
난데없이 제 뺨을 쿡 찌른 손가락에도 시오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기색으로 웃더니 아예 좀 더 만져보라는 듯 머리를 기울여 주기까지 했다. 이도하는 사양하지 않고 머리칼도 한 번 만져보았다. 차가운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전까지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 짜증이 나 있던 상태였는데 거짓말처럼 기분이 풀렸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고양이나 강아지를 쓰다듬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댔는데 그런 원리인가. 애니멀 테라피?
그럴 리가 있냐. 이도하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좀 조용하네.”
가만히 이도하를 지켜보고 있던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당연하고 별것 아닌 그 움직임에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눈꺼풀이 눈을 잠깐 덮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그 과정이 유난히 느려서인가, 아니면 머리칼과 같은 빛깔의 속눈썹이 길어서 그런가. 이도하가 계약주의 미모에 한 눈이 팔린 사이 ‘조용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한 시오한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조용하지. 그대와 나 둘뿐이야. 주변을 물려두었으니 아무도 없어.”
“그래도 되나.”
여기저기서 종류별로 타박과 잔소리를 들은 이도하는 반성하여 그동안 공부를 좀 했다. 이제는 김윤혜가 말했던 ‘로마 제국에서 단종의 핏줄로 태어난 이순신’ 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순신보다는 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이 더 맞는 게 아닌가 했지만.
어쨌든 하도 주변에서 치켜세워대니 막연히 대단하구나, 했던 것을 이제는 좀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혼자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지난번에 멱살을 좀 잡았다고 목에 칼이 들어왔던 것처럼.
“되지. 그대가 있으니까.”
“다음에는 힘을 쓰지 말아보라고 한 게 당신이야.”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또, 또. 느릿하게 웃는 걸 보면, 그냥 대체로 행동이 그렇게 느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태어날 때부터 다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뭘 하든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러나 뼛속까지 한국인인 이도하는 그 느린 여유가 참… 감질 맛이 났다. 자꾸 손끝이 움찔거리는 이 느낌을 어떻게든 단어로 정의해 보려던 이도하는 또 미간을 구겼다. 감질 맛이라니. 변태 같잖아.
“내가 걱정되나?”
시오한이 물었다. 이도하는 퍽 가볍게 들리는 그 말에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가, 대답 없이 일어섰다. 그제야 그는 제가 여태 시오한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으로 다섯 바퀴 쯤 굴러도 여전히 침대 위일 것 같은 아주 거대한 침대였다. 뭐 이런 무식한 침대가 다 있어. 투덜거리며 내려선 이도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단한 제국의 황제이니만큼 으리으리하게 크겠거니 했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어디의 황제가 쓰던 방이다, 하며 티브이에서 간혹 보던 것처럼 화려한 샹들리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지도, 여기저기 금이 발라져 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림이 두어 개 걸려 있었으며, 천장은 깔끔했고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였다. 이도하는 책상에 흐트러져 있는 서류 몇 장에 시선을 주며 그 앞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요즘도 일을 해?”
“미룰 수 없는 일들도 있으니까. 거기 앉지 말고 이리 가까이 와.”
“왜?”
이도하가 물었고, 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시오한이 대꾸했다.
“가까이서 보고 싶으니까.”
“…싫어.”
넓은 침대였다. 방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에 앉는 것도, 가까이 가서 앉는 것도 별일 아니었으나 이도하는 그냥 괜히 반항해 보았다. 시오한은 더 재촉하는 대신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었다. 난 이렇게 지치고 힘든데 너무하다, 하는 몸짓 같았다.
이도하가 손가락을 움찔했다가, 결국 근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침대 가에 놓고 털썩 앉았다. 시오한이 눈을 휘며 웃었다. 창백한 낯이라 위태로워 보였다.
“나까지 골로 갈 뻔할 정도로 피를 줬는데 왜 아직도 이 모양이야.”
이도하가 뚱하게 말했다. 시오한이 풋- 웃음소리를 냈다.
“많이 자고, 많이 쉬었지. 생전 누린 적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곧 나을 거야.”
“황제는 병가도 없나.”
이도하가 시오한의 손목에 눈길을 주었다. 분명히 그때 동맥들은 제대로 붙였을 텐데, 가는 손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거의 한번 싹 갈아 끼운 수준으로 피를 다 쏟아냈으니 자리를 보전하고 눕는 게 당연하다. 그걸 두고 호사라고 하고 있으니 그의 업무 강도가 대충 짐작이 가는 수준이었다. 황제가 원래 돈 지랄 해대며 즐겁게 놀고먹는 위치는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는데.
“이순신이라더니….”
중얼거리는 소리도 시오한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이도하는 별것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팔짱을 낀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난 저런 거 할 줄 몰라.”
“저런 거?”
“뭐 어디 도로를 깔고, 무슨 부처를 개편하고. 할 줄 모른다고.”
이도하가 시오한의 책상위의 서류를 눈짓했다. 아. 시오한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즐거운 기색으로 그저 이도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도하가 삐딱하니 눈썹을 들어올렸다. 설마하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마치 앞에서 으르렁 캉캉 대는 강아지를 보는 눈빛 같았다. 성질이 난 건 알겠는데 일단 귀여우니 끝까지 보자 하는.
“또 뭘 할 줄 모르지?”
이 양반이? 이도하가 또 가슴을 문질렀다. 이게 지금 좀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인데….
“왜 날 불렀어?”
이도하가 물었다. 인터넷이고 기자들이고 간에 그 질문이 두 번째로 많았다. 오즈를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이리스티리움의 황제가 대체 왜 인소더블을 소환했나요! 오즈에 전쟁이 나나요? 황제가 오즈를 통일하려고 하는 겁니까?!
그러나 쥐뿔도 아는 게 없기는 이도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궁금해도 그가 제일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