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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6화 (6/250)

6화

소환이란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이 바뀌는 것과 같았다. 눈을 깜빡인 찰나에 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정오의 햇빛이 비춰 들어오던 회사 로비는 사라지고, 어렴풋한 저녁노을이 비추고 있었다. 붉은 노을빛에 물들어 창백한 남자의 안색은 좀 더 따뜻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 닷새 만에 보는 이도하의 계약주. 시오한 오르페노스가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내 계약자가 도둑이었나?”

“……”

“뭘 훔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도망치는 중이었다면 도움이,”

“아니야.”

아니야. 그 말이 퍽 궁색하게 들렸다. 일단 알겠다- 하는 기색이 별로 믿는 눈치도 아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벌어진 것은 진짜 도둑놈처럼 꽁꽁 싸맨 마스크와 모자 때문이었다. 하필 외투까지 해서 삼박자로 까만색이다.

염병, 이도하는 투덜거리며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시오한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착잡해하는 것 같기도, 조금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한, 정말로 묘한 그 눈빛은 이도하의 오른쪽 눈가에 닿아 있었다.

“…이런.”

그러나 그 눈 깜빡할 새에 까무룩 져버리는 노을빛처럼 그 눈빛은 금세 사라지고, 장난기가 떠올랐다. 오른쪽 눈 밑에 문신처럼 새까맣게 새겨진 글자들을 보고 누군가 이런, 했다면 이도하는 몹시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계약명을 하필 그런 곳에 새긴 장본인이 좀 낭패라는 듯 그렇게 말하니 수치와 동시에 울화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

“이런? 이러언?”

“읏….”

하필 아버지의 회사에서 소환되어 도시락을 들고 얼 타던 모습을 온 세상에 다 팔리게 생겼을 때도 될 대로 대라, 싶던 이도하는 결국 시오한의 멱살을 쥐었다. 짤짤 흔드니 목 부러진 인형처럼 그가 맥없이 흔들렸다.

“어지러워.”

눈을 감은 채 그가 중얼거렸다. 반항도 없었다. 그래서 이도하는 놓으려고 했다. 원래 하얗다고 보기에는 시오한의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짤짤 흔들리는 몸도 영 기운이 없었다. 죽빵을 한 대 날려주면 시원하겠지만, 기껏 제 피를 다 빼가며 살려놓은 목숨을 계약까지 해 놓고 날려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좀 멀쩡한 정신으로 보니 과연 그 기적의 현신이니 뭐니 하는 주접이 이해가 가는 얼굴이었다. 한끗 한끗 가장 완벽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얼굴에 손을 대려니 좀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짜증과 아쉬움이 이상하게 교차하는 마음으로 이도하가 놓으려는 그때에, 별안간 서늘한 칼날이 그의 턱에 닿았다.

“…놓아라.”

서늘한 목소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이도하는 아주 잠깐 놀랐다가, 곧 어이가 없어졌다. 이것도 뭔가 익숙한데, 하는 느낌이 드니 그냥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처음부터 놓으려고 했지만 이렇게 목에 칼을 들이대며 그의 입장에서는 가당찮은 협박을 해대니 그렇게 하기가 싫어졌다. 이도하가 흘긋 서늘한 칼날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시오한은 누워 있었고, 소환된 이도하는 그 위에 올라타 앉아 있었다. 어째서 시오한도 이도하 본인도 그 자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확실히 좀 이상한 자세였다. 보기에 따라 위협하는 자세가 될 수도, 몹시 민망하고 엄한 자세가 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칼을 든 사내가 보기에는 위협하는 자세인 모양이었다.

“안 놓으면.”

이도하가 시오한을 확 끌어당겨 뒷목을 받쳐 안았다. 정말로 어지러웠는지 시오한은 눈을 감은 채 별 말도 없었다. 힘을 쭉 뺀 채 완전히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기운 몸에 시오한의 고개가 툭 꺾여 이도하의 어깨 언저리에 떨어졌다.

편안하게 풀어 놓았던 금실 같은 머리칼들이 이도하의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마치 기절한 것 같았고, 사내의 눈에도 분명 그렇게 보인 게 틀림없었다. 빠득- 잇소리가 들렸다. 고상하게 말해서는 극히 대노했고, 속된 말로는 아주 꼭지까지 돌아버리기 직전 같았다.

“감히…! 놔!”

“안 놓으면. 목이라도 댕강 자르려고 그러시나. 그럼 이 인간은 어떻게 되게?”

이건 그냥 심술이었다. 사람들 다 보는 로비에서 있는 쪽은 다 팔고, 하필이면 눈 밑에 새겨진 계약명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던 이도하는 아주 삐뚤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어지간히 잘 참고 있는데 누군가 대뜸 이렇게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하며 마구 화를 내니 어린애처럼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그는 시오한을 안은 채로 조금 더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칼날이 턱 끝을 스쳤다. 어느새 져버린 밤 속에 서 있는 것은 새까만 약식 갑주를 입은 기사였다. 기사, 그래. 누가 봐도 기사였다. 이를 얼마나 꽉 다물었는지 턱이 아주 경직되어 있고, 옅은 갈색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칼을 푹푹 꽂을 것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도하가 픽 웃었다.

“칼 치워.”

“마지막 경고다. 놓지 않으면,”

“치우라고.”

이도하의 눈동자에 빛이 어렸다. 기이한 새파란 빛이 번지듯 까만 홍채를 덮어나갔다. 사내의 칼이 이명 같은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든 칼을 움직이려고 하는 듯 했으나, 고정된 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잉- 머리를 울리게 하는 공명음과 함께 칼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더니 어느 순간 멈췄다가- 쨍그랑! 산산조각으로 터져버렸다.

수백 개로 깨어져 나간 칼 조각들이 허공에 그대로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별처럼 뜬 칼 조각들이 저마다 희미한 빛을 반사하며 서늘하게 빛났다. 조그만 조각들이, 모두 사내를 겨냥하고 있었다. 경악한 사내가 입을 벌렸다.

“어차피 내 건데 뭘 놓으라 마라야.”

사내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분노는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그저 경악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퍽 바보 같고 웃겨 이도하는 조금 심술이 가라앉았다. 슬금슬금 웃으려는데, 누군가가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콜록- 작은 기침소리가 났다. 시오한이었다.

“…그만.”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기이한 푸른빛을 띠고 있던 눈동자가 불을 끈 것처럼 까만색으로 돌아왔다. 공간을 옥죄고 있는 듯 하던 울림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떠 있던 칼 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지며 챙강챙강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이도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시오한의 머리칼을 그의 등 뒤로 걷어 넘겼다. 시오한은 입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소매에 선명한 피가 묻어났다. 이도하는 탁-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

“화이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계약의 당사자인 그는 당연히 거울을 보고 이름을 읽을 수 있었으나, 계약주인 시오한의 입에서 제대로 불리는 건 처음이었다. 이도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당최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으나, 머리가 멍해졌다.

“다음에는, 좀 더 빨리 소환해 보지.”

“……”

“그때는… 힘을 쓰지 말아 봐. 나는 아직 그대가 벅차고….”

어둠속에서 따뜻한 꿀빛으로 가라앉은 금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시오한이 옅게 웃었다.

“그대를 좀 더 오래 보고 싶으니.”

그리고 주변이 환해졌다. 열이 좀 있는 것 같던 온기는 사라지고, 손끝에 휑한 바람만 스쳤다. 푹신한 침대도 사라졌다. 이도하는 익숙한 로비에 서 있었다. 둥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사이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스쳤다. 온갖 핸드폰 화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도시락을 든 채로 망연히 그를 보고 선, 아버지도 있었다.

“도하야?”

어안이 벙벙하여, 이도하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멍하니 손바닥을 한 번, 제 아버지를 한 번, 그리고 다시 손바닥을 바라본 이도하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야 이게…?”

***

“무슨 일이에요, 이게.”

김윤혜가 핸드폰 화면을 들이댔다.

<회사 로비에서 인소더블 소환 돼… 시민들 충격. 위험은 없나>

<서울 중심지의 회사에서 인소더블 소환 - 아이라는 여전히 안전하다는 말만>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인소더블 소환 - 연예인 뺨치는 외모로 화제. 데뷔는 언제?>

<인소더블 - 남신 같은 미모로 화제>

<인소더블이 15분 소환되는 동안 매개하는 마력, 계약자 10명이 매개하는 마력보다 커>

온갖 자극적인 제목은 다 갖다 붙인 뉴스 화면들이 주르륵 떠 있었다. 역소환과 소환에 일반인이 끼일 위험성, 역소환의 원리 어쩌고저쩌고 하는 좀 쓸 만한 기삿거리는 말라죽은 콩나물처럼 두어 개 끼어있을 뿐이었다.

“이도하씨, 사실은 관종이죠? 귀찮다 싫다 하지만 속으로는 즐기고 있죠?”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이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드러누워 두툼한 고래모양의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맞은편의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은 김윤혜가 커피를 쪽쪽 빨아먹었다.

“김윤혜씨. 맹약이 일반 계약과 어떤 게 다른지 모른다고 했지. 받아 적어 봐. 아무래도 제2의 자아가 생기는 모양이야.”

“왜요. 계약주를 만나니 막 사랑과 애정이 샘솟아요?”

이도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김윤혜가 깔깔 웃었다.

“아, 진짜요? 말해 봐요, 뭘 했는데요? 끌어안기라도 했어요?”

“…너, 너 나가서 돗자리 깔아야 되는 거 아니야? 여기서 뭐해?”

“진짜 끌어안았어요? 뭐 양호하네.”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말해놓고 참으로 궁색해 이도하는 입을 딱 다물었다. 지난 이틀간 그 순간의 기억은 불쑥불쑥 떠올랐다. 기습처럼 기억이 떠오르면 이도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불을 걷어차거나, 벽을 내리치거나, 하여간 뭔가를 내리쳐야만 했다. 오늘 아침에는 밥 먹다 별안간 무릎으로 식탁을 쾅, 치는 바람에 물그릇이고 반찬그릇이고 죄다 안에 든 것을 왈칵 토해냈고, 그 때문에 거세게 얻어맞은 등짝이 아직도 아팠다.

그렇게 불현듯 팝콘처럼 떠오르는 기억을 되새겨 변명해 보자면, 그건 정말 끌어안은 건 아니었다. 저는 멱살을 쥐고 당겼을 뿐이고. 그의 계약주가, 그러니까 시오한이 너무 몸뚱이에 힘이 없는 바람에 얹힌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렇게 구구절절 말하면 이미 궁색한 마당에 더 궁색해지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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