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필수 교육이 괜히 필수인 줄 알아요? 날로 먹으니 이렇게 되지. 계약자들이 계약주에게 애착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새벽에 술 먹고 소환에 응했다가 계약주한테 뽀뽀한 사람도 있는데요 뭐.”
“그건 술 때문이잖아.”
“이도하씨는 술 먹으면 남자한테 뽀뽀할 수 있는 모양이네.”
“미쳤어?”
이도하가 확 얼굴을 구겼다. 거봐요, 하며 김윤혜가 태연자약하게 연구일지에 뭔가를 빠르게 적어나갔다. 충격에 빠진 이도하는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세히 말해 봐요. 어떻게 됐는데요?”
“…진짜 아니라니까.”
“알겠다고요. 오르페노스 황제 상태는 어때요? 듣기로는 별로 좋지 않다고 하던데.”
“뭐? 어떻게 알았어?”
“진짜 오즈에 계약자가 자기만 있는 줄 아나 봐. 오즈의 최강대국이 이리스티리움인데 그 중심부인 궁성에 인재가 몇이나 모여 있게요. 드나드는 계약자 중엔 한국인도 있어요.”
이도하는 미간을 종잇장처럼 구긴 채로 잠시 말이 없다가, 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색도 별로 안 좋았고… 피를 토하던데.”
“그 정도예요? 계약을 맺고 나면 그래도 계약주 특혜로 마력 소모가 많이 반감되잖아요. 맹약은 그 특혜가 더 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특기를 써서 그럴지도.”
“…이도하씨 한 15분 소환되지 않았어요? 오르페노스 황제가 인소더블의 힘이 급히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할 리도 없고.”
뭘 했냐는 듯 미심쩍게 쳐다보는 눈빛에 이도하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말끝을 흐리는 건 이도하가 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뭔가 말해야 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는 제법 뻔뻔한 편이었으나, 아무 생각 없이 장난이나 좀 치다가 그랬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설마 그러다가 계약주가 피까지 토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 말하면 날라리에서 등신으로 상향조정될 테였다.
“진짜 오즈에 카메라 왜 못 가져감.”
어휴- 김윤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되짚어 보죠. 소환은 어땠어요? 거부가 안 돼요?”
“몰라. 그냥 눈 떠보니 오즈였는데 뭘 어떡해.”
“어땠어요? 처음 보니.”
“별 생각 없었어.”
“이도하씨. 나 기숙사 사는 거 알죠?”
계란 속을 비워낸 것 같은 요상한 모양의 안락의자에 묻힌 김윤혜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한 마디로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는 협박이었다. 이도하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아 고래 인형의 뽀송한 하얀색 배에 제 얼굴을 묻고 끄응- 하고 길게 침음을 흘렸다.
삼일 후에 와라, 일주일 후에 와라. 의사가 그렇게 말해도 무시하기가 부지기순데 김윤혜가 일주일 후에 오세요, 한다고 꼬박 꼬박 출석 도장을 찍을 이도하가 아니었다.
이렇게 달려온 건 심경이 복잡해서였다. 매번 이럴 때마다 어딜 치다가는 벽이고 책상이고 간에 기어코 뭔가 하나를 제대로 부숴먹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땅히 털어놓을 곳도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한 번 붙잡아 보자, 하는 심정으로 비척비척 온 것인데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았다.
“우리 원투데이도 아니고, 잘하죠.”
김윤혜가 고개를 숙이며 스산하게 말했다.
“말해 봐요, 계약주를 제대로 처음 만난 소감 좀 들어보게.”
그러나 이건, 정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도하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한 뒤에야 김윤혜가 만족할 만큼 자세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고, 그 뒤로도 쭉 그런 질문의 연속이었다. 자아성찰을 해야 하는 수준에 준하는 질문들에 완전히 녹초가 된 이도하가 소파 위에 녹은 사탕처럼 늘어졌을 때는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이었다.
아이라의 연구소는 건물이 아주 크고 높았고, 그래서 하늘도 아주 잘 보였다. 이도하는 창밖으로 예쁘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흘끔 바라보았다.
“소환에 반드시 응해야만 할 것 같지는 않아요. 계약은 기본적으로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는 상하 관계가 아닌데 맹약이라고 그런 식으로 법칙이 적용되지는 않겠죠. 게다가 이도하씨는 특기도 특기고. 그러니 다음에는 정신 좀 단단히 차리고 있어 봐요. 백주 대낮부터 회사 로비에서 구경거리 하지 말고.”
“그래. 알겠습니다….”
지친 이도하가 맥없이 답했다. 탁- 김윤혜가 수첩인지 일지인지, 아무튼 이도하가 불살라버리고 싶어 내내 노려보던 노트를 덮었다.
“저녁 먹고 가요. 이따가 에너젠에서 관계자들 온다니까.”
“아, 싫어.”
“진짜 초딩처럼 굴지 말고요. 마력은 뒀다 똥으로 만들려고요?”
“똥으로 만들든 밥으로 만들든 내 맘이지. 내가 뭐 발전소야?”
“그냥 빨리 정리해 놓는 게 이로울 걸요. 말마따나 이도하씨 마음이긴 한데 발전소도 발전소거든요. 이도하씨 같으면 내버려 두겠어요?”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난 김윤혜가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고래 인형을 뺏었다. 위에서 슥 내려다보는 얼굴이 섬뜩해 이도하가 진저리를 쳤다.
“내가 에너젠 관계자였으면 화장실까지 따라다니지.”
부르르 떤 이도하는 김윤혜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온종일 팔자에도 없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졌더니 머리고 몸이고 지쳐서 몸이 무거웠다. 마음이 달갑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얘기까지 하려니 정말 싫었다.
“나중에 하자고, 나중에. 밥이 퍽이나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다.”
“알아서 해요.”
김윤혜는 길게 잔소리하지 않았다.
“이도하씨 집에 갔다 그러면 집으로 찾아갈 거라는 것만 알아둬요.”
그러나 이 말에, 이도하는 결국 체념하고 말았다. 김윤혜의 말이 틀린 게 없기는 했다. 마력 계약을 하든 말든 누구도 그에게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인소더블인 그가 계약자가 된 마당에 나 몰라라 뻗대고 앉아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공적이 될 게 뻔했다. 미뤄봐야 하루 이틀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도 이참에 부자나 될까, 하고 없던 물욕을 부렸던 것이다.
“더 브릿지에서도 온댔으니 변호사 끼고 해요. 호구 먹히지 말고..”
체념한 이도하를 본 김윤혜가 말했다. 이도하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근데 왜 더 브릿지야. 특기자 소속사 다른 데도 많잖아.”
“많긴 한데, 이도하씨가 다른 자잘한 회사들까지 다 골라가며 따져서 소속사 정할 생각이 있어요? 원래 그럴 땐 큰 게 최고랬어요.”
최고기도 하고, 원래 몸집 큰 게 깡패랬다. 회사들끼리도 알력 싸움이 있는데 더 브릿지가 다른 회사들이 인소더블과 계약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라는 어른의 사정까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도하는 잠깐 반박할 말을 생각하다, 곧 김윤혜의 말에 수긍했다.
이도하와 김윤혜는 가장 가까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특기자 판정을 받은 8살적부터 드나들었으니 중간 중간 마주치는 직원들도 낯이 익은 이들이 많았다. 특기자도 계약자도 그들에게는 모두 일이라 신기하기는커녕 피곤한 얼굴로 늘 가벼운 인사만 오고 갔는데, 이번에는 신기하면서도 희한하다는 시선들이 잠깐 머물다 갔다.
그 시선들은 열이면 열 전부 그의 눈 밑에 가 있었다. 특기자와 계약자를 매일같이 보는 그들에게도 눈 밑에 보란 듯이 새겨진 계약명은 영 특이했던 것이다. 도통 익숙해질 수 없는 부끄러움에 이도하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러다 불이 붙지 않을까, 싶을 즈음에 그들은 구내식당에 도착했다.
“김윤혜씨.”
“왜요.”
“그… 계약자가 계약주에게 느끼는 애정이란 거 말이야. 어느 정돈데?”
돈이 많은 만큼, 아이라의 구내식당은 어지간한 레스토랑 못지않다. 입맛도 별로 없어 간단하게 새우 볶음밥이나 가져온 이도하에 비해 김윤혜는 적당한 미디움 레어로 구워진 스테이크와 그레이비소스가 윤기 나게 뿌려진 매쉬 포테이토, 후식으로 작은 냉면까지 챙겨왔다.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던 김윤혜가 대답했다.
“그야 사람 따라 다르죠.”
맞는 말이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는 대답은 아니었다. 이도하는 영 찝찝한 마음으로 볶음밥을 깨작거렸다.
“따지고 보면 영혼의 단짝 같은 거 아니겠어요? 동성이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거고, 이성 간에는 애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흔해요. 영화도 많이 나오잖아요.”
“계약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잖아.”
“그 계약도 애초에 잘 맞아서 가능했던 건데요. 그 뭔가가 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아니었으면 특기자들이 전부 계약자가 됐게요. 세상에 특기자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계약자가 되는 건 손에 꼽는 이유가 그 파장, 파장이라고 하죠 일단. 계약이 이루어질 만큼 파장이 맞는 사람이 적어서잖아요. 원래 인간은 거울 반대편에 선 이형의 형제가 하나쯤은 있다는 가설도 있지만, 그것도 뭐 타이밍 맞게 태어나야 만나든 말든 하는 거지.”
이도하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한 입도 먹지 않은 새우 볶음밥이 뒤적거리는 숟가락에 파스스 흩어졌다. 밥상머리에 앉아 투정을 부리는 손자를 보는 할머니처럼 김윤혜가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그런 게 뭐 중요해요?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인생에 하나쯤 생기는 것도 좋은 일이잖아요. 계약자와 계약주의 특별한 유대관계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포케몬이 퍽도 부럽겠다.”
이도하는 제 주머니에서 김윤혜가 선물한 키링을 흔들어보였다. 정확히 딱 반반 나뉘어 하얀색과 빨간색으로 이루어진 공이 반짝였다.
“어휴, 삐뚤어지긴. 세상을 좀 곱게 봐 봐요. 긍정적이게.”
“이걸 누가 줬더라.”
“포케몬이 뭐 어때서요? 피캇츄랑 지우가 얼마나 끈끈한지 알아요?”
“그 새끼 쓰레기잖아.”
“그거 다 유머거든요.”
김윤혜가 뻔뻔하게 말했다.
“어쨌든 이도하씨가 진짜 피캇츄는 아니니까 잘 해봐요. 술 취해서 뽀뽀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와락, 이도하가 얼굴을 구겼다. 김윤혜가 깔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