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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5화 (5/250)

5화

“여기 좀 보라고요. 진짜 말 안 듣네.”

심드렁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넘기던 이도하가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김윤혜가 그의 눈 밑에 차가운 필름지 같은 것을 조심스레 붙였다가 떼어냈다. 물이 묻어나는 것 같은 기분에 반사적으로 눈 밑을 만지작거린 이도하는 곧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김윤혜가 혀를 찼다.

“아침에는 그 난리를 피우더니….”

“뭘 난리까지야.”

“꽥- 소리를 질러대서 앞방 옆방 밑 방까지 다 혼비백산하게 만든 게 난리가 아니고 뭔데요?”

“좀 대충 살자.”

이도하는 습관처럼 눈 밑을 한 번 더 쓸었다. 그 자리에는 그동안 없던 새까만 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계약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읽을 수 없는 그의 계약명이었다. 숨이 다 넘어가던 그의 계약주가 반쯤 중얼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도 못했던 이름.

아침에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갔다가 제 얼굴에 웬 문신이 새겨졌다는 걸 깨달은 이도하는 병실이 다 떠나가게 끄악 비명을 질러댔고, 복도를 순찰 중이던 경비는 물론 김윤혜의 말마따나 앞방 옆방 밑 방까지 놀라 전화를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쪽팔리게 얼굴에 이따위 문신이 새겨지다니. 내 오른팔에는 흑염룡이 잠들어 있다고 아주 광고를 하고 다니는 꼴이라며 이도하는 계약주도 죽여 버리고 저도 죽어 버리겠다느니 길길이 날뛰다가, 제 어머니에게 등짝을 아주 대차게 맞고서야 깊이 반성하는 모습으로 얌전해졌다.

“뺨을 안 맞은 게 다행이지.”

슬쩍 인상을 찌푸린 이도하는 뭐라 하려다, 사실 할 말이 없어 그냥 한숨만 푹 쉬고 말았다. 헛소리긴 했지만 어머니 앞에서 죽느니 마니 했으니 그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언제 끝나?”

“끝났어요. 이제 집 가도 돼요. 까먹지 말고 다음 주에 오고요.”

“헬리콥터로 좀 데려다줘.”

김윤혜가 한심하게 그를 보았다. 이도하가 태연하게 어깨를 추켜올렸다.

“올챙이 떼라며. 기자들이 벌써 우리 사돈의 팔촌에 옆집 햄스터 이름까지 알아. 아버지 차 타고 나가면 바로 알아볼걸.”

“하나 사던가요.”

“뭐, 헬리콥터를?”

미쳤냐, 하는 시선으로 김윤혜를 보던 이도하는 그 시선을 제가 그대로 돌려받았다. 뼛속까지 소시민이던 이도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 이제 부자구나. 그냥 부자도 아니고 그는 이제 만수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재벌이 될 예정이었다. 계약을 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에너젠을 비롯해서 정부와 웬 소속사까지 전화가 아주 불이 나고 있었다.

아, 귀찮아 죽겠다 정말. 이도하는 검사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김윤혜의 취향대로 새파란 하늘처럼 꾸며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귀찮으면 더 브릿지랑 계약해요.”

“난 이제 계약의 ‘계’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

“소환주 얼굴도 제대로 한 번 못 봤으면서 엄살 부리지 말고요. 더 브릿지는 계약자들만 담당해 온 소속사라 이도하씨가 귀찮아하는 그런 거 다 알아서 처리해 줘요. 언론 상대하는 거, 에너젠이랑 마력 거래하는 거, 계약자들이 다 이도하씨처럼 그런 거 귀찮아하는 부자들이라 도가 텄거든요.”

“그러고 나가서 라면 호로록 하고 어우 시원해, 하면서 광고 찍으라고? 팬 사인회 하고? 싫거든요.”

“그럼 알아서 하다가 호구 당하시던가.”

“아, 대충 살고 싶다 진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이도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뒷정리를 마친 김윤혜가 들여다보니, 그는 온갖 쌔끈한 스포츠카를 구경하고 있었다. 계약을 하게 된 건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돈까지 마다하지는 않겠다는 아주 속물적인 태도였다. 억울한 김에 제대로 돈지랄이라도 해 보자는 심산인 듯했다. 김윤혜의 시선을 눈치챈 이도하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며 궁색하게 변명했다.

“…아버지 사드리려는 거야.”

“난 이게 좋아요.”

김윤혜가 화면을 콕 찍었다. 제로백이 3초인가 4초인가 된다는 새까만 스포츠카였다. 이도하는 검사대에 앉은 채로 물끄러미 김윤혜를 올려다보았다.

“뭐요.”

“너 월급 많이 받지 않냐. 엄청.”

“그래 봤자 월급쟁이지.”

“김윤혜씨 아직 운전면허도 안 나오잖아.”

“만 18세부터라 나오거든요. 면허는 따면 되죠.”

“그래서 면허도 없는 양반이 이런 걸 타고 나가서 도로를 질주하시겠다? 몇 명을 죽이시려고.”

“그럼 집 사주든가요.”

욕망이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집이건 차건 절대 마다할 눈이 아니었다. 정말 사주면 야무지게 받아먹고 배 두드릴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12세에 대학을 졸업해서 곧바로 IERA에 취직한 천재라고 하지만 미성년자에게 집을 사주는 게 옳은가. 제로백이 3초인 차를 사주면 더 안 될 것 같다.

“…김윤혜씨. 기숙사 사는 거 다 알아. 자전거로 만족하자.”

“즐. 난 25평이면 적당해요.”

“그건 또 언제적 말이야.”

“유행은 돌고 도는 거랬어요.”

말을 말자. 이도하가 검사대에서 내려섰다.

“일단 부자 되고 얘기하자.”

“헬리콥터 못 태워줘요.”

“자전거나 빌려줘.”

“집까지 자전거 타게요? 내일이면 도착하겠네.”

“무슨 소리야, 학교 가야지.”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이도하를 따라 나오던 김윤혜는 그 말에 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도하씨 진짜 웃기다니까. 헬리콥터 빌려달라고 하더니 그거 타고 학교 갈 생각이었어요?”

“재수강 대신 해 줄래?”

“취업계 내요, 취업계.”

“내가 어디 취업을 했다고 취업…,”

투덜거리던 이도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참된 학생인 이도하는 정식으로 수업을 빼먹을 수 있는 방법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라에서 취업계도 끊어줘?”

“그럼요, 취직했잖아요.”

김윤혜가 씩 웃었다.

“주머니 괴물로.”

“……”

어이가 없어 말문을 잃은 이도하에게 김윤혜가 가운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손을 내밀었다. 주먹을 펴자, 안에 든 것은 조그만 열쇠고리였다. 빨간색과 하얀색이 반반인 조그만 공. 소싯적에 만화 좀 봤다 하면 모를 수가 없는 공이었다. 땡그란 것이 불빛에 반짝였다.

“선물. 취업 축하해요. 부자 되세요.”

이도하가 이마를 짚었다.

***

어쨌든 이도하는 취업계를 믿고 정말 결석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자체 휴강을 즐기며 평일 대낮부터 소파에 늘어져 있으려니 정말 꿀맛이라, 계약도 썩 나쁘지는 않네,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윤혜의 말마따나 계약을 한 지가 벌써 닷새가 다 되가는데 소식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콧노래를 불렀으나, 이쯤 되니 슬그머니 약간의 걱정과 함께 궁금해졌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누운 채로 티브이를 응시하던 이도하는 또 버릇처럼 눈 밑을 쓸었다. 뭐라도 붙여서 가려볼까 했으나 그게 더 유난인 것 같아 내버려둔 그의 계약명이었다. 남들은 적당히 어깨나 팔이나 손등이나 뭐 그런 곳에 있던데 저는 어쩌다 이런 곳에 새겨졌을까. 수업을 날로 먹은 이도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들, 할 일 없으면 아버지 회사나 좀 갔다 와.”

부엌 식탁에 앉아 핸드폰 게임에 열중해 있던 그의 어머니가 불렀다. 이도하가 고개만 빼꼼 꺾어 물었다.

“왜요?”

“도시락 놔두고 가셨어.”

“아, 아직도 도시락 싸세요? 요즘 구내식당도 맛있는데 사드시지.”

“이 놈 자식이.”

뭔가가 날아와 이마를 탁 때렸다. 예기치 못한 습격에 얻어맞은 이도하가 이마를 붙잡았다. 단단하지는 않았으나 아주 둔중하게 날아와 퉁 때리니 웬 글러브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뭔가 하고 보니 귤이었다.

“아버지 건강한 거 드시면 좋지 뭘 사드시라고 해?”

“엄마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주운 귤을 까먹으며 이도하가 툴툴거렸다. 무슨 게임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나 하고 어슬렁거리며 가서 보니 비장한 표정의 쿠키가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유행도 다 지난 걸… 이도하는 식탁 위의 귤 바구니에 감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재미있어서 하는 거 아니었으면 너도 엄마 도시락 못 먹었어, 쨔샤.”

“오늘만 사드시라고 하면 안 돼요? 저 나가면 또 사람들 몰릴 텐데.”

“아들. 앗.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사람들은 생각보다 바빠서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단다.”

와중에 미처 하트를 먹지 못한 쿠키가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죽었다. 에잉. 아쉽게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그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는다.

“그러니 핑계대지 말고 얼른 다녀오세요, 아드님. 점심시간 삼십 분 남았다.”

그러면서 쓰고 있던 안경을 내민다. 정 신경 쓰이거든 변장이라도 하라는 뜻이다. 바지 위에 팬티를 입고 다니는 그 분처럼. 이도하가 좀 망연하게 그 안경을 받아들었다. 다초점 렌즈로 맞춘 안경이었다.

“……”

사람들이 저 사는 데 바빠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도하가 느끼기로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남의 일을 궁금해한다. 해서 이도하는 어머니의 다소 한심한 시선도 무릅쓰고 모자와 마스크를 챙겨 쓰고서 집을 나섰다. 차마 다초점 렌즈 안경을 쓸 수는 없었다.

지난 며칠간 인터뷰를 위시해 초인종을 눌러대던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수월했다. 버스를 탈 때까지, 약 7개의 정류장을 거쳐 아버지의 회사 앞에 내릴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러자 이도하도 슬슬 조금 부끄러워졌다.

흘끔대는 시선은 있었으나 그건 대낮부터 춥지도 않은 날씨에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에 가까웠다. 어머니 말을 들으면 피가 생기고 살이 생기고 떡이 생긴다고 했는데. 회사 안까지 그러고 들어갈 수는 없어 이도하는 슬그머니 모자를 벗었다.

회사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넣어놓고 이도하는 로비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뉴스 면에는 여전히 그의 기사들이 가득해서 넘겨버리고 연예뉴스를 뒤적거렸다. 오한울 팬미팅 8초 만에 전석 매진… 얘는 계약자냐 연예인이냐. 유세오 ‘인소더블 꼭 만나보고 싶어.’ 얜 또 뭐야. 신세나-루카스 핑크빛 기류. 홍유주 물 오른 몸매 과시. 기사가 다 왜 이따위냐. 눈살을 찌푸리던 이도하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아버지가 온 건가, 했더니 아버진 안 보이고 사람들이 있었다. 시선이 그에게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입을 좀 벌린 채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다. 대박. 헐. 처음 봐. 이런 말들이 오고 간다. 아, 이 느낌 아는데. 이도하가 이를 꽉 물고 미소 지으며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푸른빛 소환진이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 펜으로 그은 것처럼 쓸데없이 예쁘게 반짝인다. 누가 봐도 나는 약식 소환진이요- 하고 광고하는 것처럼 아주 작고 귀여웠다. 처음 소환될 때처럼 예의 그 거대하고 눈부시게 번쩍거리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소환진이다.

찰칵찰칵- 카메라 소리에 이도하는 묵묵히 손에 든 모자를 눌러썼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이미 흩어지고 없었다. 우당탕- 따라가지 못한 도시락통과 핸드폰이 요란하게 로비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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