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3화 (3/250)

3화

“소환 후유증이 좀 있고… 몸은 어때요. 아픈 곳 있어요?”

눈앞에 손가락을 대고 흔들며 김윤혜가 물었다. 손가락을 따라 여길 보고 저길 보고, 입도 벌렸다가 순식간에 체온도 검사한 이도하가 간신히 대답했다.

“…없는 것 같은데.”

“혈액 팩 두 개나 수혈 받았어요. 그렇게 동서남북으로 요란을 떨더니 계약도 화려하네요. 연예인 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잘 나가긴 했을 텐데.”

내용은 신랄하기 그지없었으나 얼굴은 심드렁했다.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도, 적잖이 부조화를 일으키는 말투도 이도하는 이미 익숙했다.

김윤혜는 이도하가 18살부터 그를 담당해 온 연구원이었다. 9살에 대학에 들어가 12살에 졸업한 천재였으나, 이도하가 보기에는 괴짜만 모아놨다는 IERA에서도 김윤혜는 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저 괴상한 말솜씨와 정답게 만담 비슷한 것을 나누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이도하는 팔다리가 다 붙어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제 몸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더듬더듬 익숙한 살가죽에 제 손짓까지 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제야 그는 주변도 둘러보았다.

꽤 큰 창문 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보이는 병실이었다. 가까운 탁자에서 가습기가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소파도 있고 탁자도, 냉장고도 커다란 티브이도 있어서 병실이라기보다는 아늑한 방 같다. 팔에 꽂힌 링거 바늘까지 한 번 본 이도하가 다시 김윤혜를 바라보았다.

“부모님께는 연락드렸어요. 갈 뻔했다는 말은 안 했고.”

“갈….”

이도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역 소환되면 소환되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 알죠? 인기척도 없는 곳인데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있어 신고해 준 거예요. 5분만 늦었어도 꼴깍이었으니 나중에 감사인사라도 해요. 병원에서 연락처 받아놨다니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는지 김윤혜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뭐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몇 차례 입술만 벙긋거린 이도하는 결국 마른 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으으으 신음하건 말건 김윤혜가 말을 이었다.

“벌써 언론에서 난리가 나긴 했는데 그건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고. 지금 저 문밖에 기자들이 엄청 몰려서 연못에 풀어놓은 올챙이 떼 같거든요. 까만색 머리들이 바글바글해요. 외신은 더하고요. 전화통 완전 불나서 다 뽑아놨는데 그게 한국 지부 창설 이래 처음이래요. 축하해요.”

김윤혜가 건조하게 짝짝 손뼉을 쳤다. 올챙이 떼라니, 비유가 왜 그따윈가 하는 생각은 곧 쏙 들어갔다. 기자. 외신. 여전히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이도하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안녕- 평온한 내 인생. 그는 조용히 지난 24년간 지켜오던 제 일상에 안부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그걸 벌써 어떻게 알고…?”

“오즈에 뭐 그쪽만 있나요. 이도하씨가 계약한 사람이 누군 줄은 알아요?”

“미친놈.”

이도하가 단칼에 대답했다. 눈이 돌아가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살려주겠어? 따위의 소리나 지껄이는 게 달리 미친놈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싶었다. 김윤혜는 무시했다.

“시오한 오르페노스예요. 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라고요.”

“……”

이도하는 말이 없었고, 그건 모른다는 뜻이었다. 김윤혜도 잠깐 말이 없었다. 이도하는 고개를 들었다가 조금 상처받고 말았다. 김윤혜는 이 한심한 날라리한테 시간을 낭비하는 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남의 나라도 아니고 남의 세상일을 그렇게까지 알아야 하나. 이도하는 억울했다.

“그냥 대단한 나라예요. 대단한 황제고. 음, 로마제국에서 단종의 핏줄로 태어난 이순신 같은 사람이라고 해 두죠.”

“…뭐야 그게?”

“이것도 몰라요?”

김윤혜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거의 경멸할 기세였다. 이도하가 항변했다.

“당신 비유가 이상한 거야.”

“됐어요.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미친놈이야.”

이도하의 생각은 여전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그따위로 피를 쏟아가며 목숨을 내놓고 소환을 한단 말이냐.

“이도하씨 소환한 거 보면 모르겠어요? 인소더블(Insondable)은 존재가 너무 커서 거의 세계 자체를 짓누르기 때문에 어지간한 마력으로도 소환은 어림도 없어요. 우르슬르가 소환됐을 때 인소더블이 더 소환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쪽에 꽤 많은 학자들이 명예를 걸었는데, 덕분에 다 하찮아졌네요.”

“김윤혜씨도?”

김윤혜는 대답 없이 코웃음만 쳤다.

“아무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랑 계약을 했으니 다들 이도하씨처럼 세상 편하게 살지 않고서야 모를 수가 없다는 소리예요. 물론 이도하씨도 인소더블이니 대단한 사람이긴 한데 뭐, 지금까지 안 대단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니까. 이 계약으로 오즈는 물론이고 대한민국까지 발칵 뒤집혔으니 앞으로는 조용히 살겠다는 생각 버려요. 국제 정세도 흔들리고 있다고요. 에너젠 주가가 지금… 긴 말 말죠. 너무 나가면 얘기할 게 진짜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당분간은 그냥 여기 있어요. 이도하씨 부모님도 올라온다고 하셨어요.”

총체적으로 아주 대차게 좆 됐다는 건 알겠다. 그동안 궂은 노력으로 그가 이끌어오던 인생은 이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버린 것이다. 김윤혜의 말마따나 에너젠이 어쩌고 주가가 어쩌고 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그러니까 제 인생이 얼마나 더 다사다난해질지는 굳이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그래서 그 빨간 소환진이 뭐기에 내가 이따위 상황에 처한 걸까, 김윤혜씨? 소환에 응한 적도 없는데 무슨 변기통 내려가는 것처럼 빨려 들어갔거든.”

“맹약이요.”

김윤혜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고, 이도하는 미간을 구겼다. 맹약이라는 단어 자체는 알지만 소환주와 특기자 사이에 그런 계약을 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 했다.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다 설명해야 한다니 정말 귀찮아 죽겠다- 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김윤혜가 눈을 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안 좋은 징조였다.

“맹약은 기록만 몇 줄 남아있지, 사례가 없어서 제대로 연구된 게 없어요. 이도하씨가 첫 사례죠.”

몸까지 약간 앞으로 기운다. 이도하는 으응, 하고 걸쩍지근하게 대답했다.

“소환에 응할지 말지는 특기자 마음대로잖아요. 소환에 응해 냉큼 달려갈 수도 있고, 이도하씨처럼 니 좆대로 해라 하고 쌩까는 경우도 있고. 서른 번이나 넘게 소환을 거부하는 경우는 잘 없긴 한데, 서른 번이나 소환을 하는 경우도 없으니까 뭐 둘이 인연이라고 봐야죠. 그 정도 깡따구는 있어야 맹약도 할 수 있는 건가 봐요.”

눈을 반짝이면서도 김윤혜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을 이었으나, 단어 선택이 거칠어진 걸 보면 티 없이 흥분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 맹약이 뭐냐고. 이도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분명 필수 교육 시간에 넉 놓고 자거나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하면서 농땡이를 피우긴 했지만 맹약이라는 단어는 정말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맹약이 일반적인 계약과 어떻게 다른지는 나도 아직 자세히 몰라요. 그건 뭐 이도하씨가 앞으로 차차 가르쳐 줄 테고. 아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특기자의 의사를 무시하고서라도 어떻게든 계약을 밀어붙여야만 했을 누군가가 생각해낸 방법 아닐까요? 너무 간절해서, 혹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벼랑 끝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때는 그런 때니까요.”

전적으로 특기자에게 달린 소환과 계약의 의지를 모조리 무시하고 강제로 소환진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그 선택에 제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푸른빛을 띠는 소환진과는 다르게 붉은 빛을 뗬던 것이다. 제 자신의 피를 쏟아 부어 그려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강제로 소환된 특기자가 소환주를 살리기로 마음먹는다면, 어차피 힘을 행사하기 위해 계약을 해야 하니 그대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런 강력한 의지를 통해 끌려왔음에도 여전히 특기자가 계약을 거부하면 죽는 수밖에.

“옆에 힐러 불러놓으면 되잖아.”

이도하는 제가 생각하기에 퍽 타당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윤혜가 짜게 식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노려’보았다.

“소환 전후로는 소환주의 마력과 특기자의 특기가 사방에 뒤섞여서 다른 힘은 간섭할 수 없는 거 몰라요? 어렸을 때 만화영화 안 봤어요? 변신할 때 공격하는 거 봤냐고요.”

매서운 말투에 이도하가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대신 정중하게 물었다.

“살리려다가 특기자도 골로 가면 도로 아미타불 아닙니까, 김윤혜씨.”

이 질문에는 타박이 없었다. 천재와 괴짜만 모인 IERA에서도 겨우 19살의 나이로 인소더블인 이도하의 담당을 맡을 정도로 손꼽히는 천재인 김윤혜 앞에서 점점 쓸모없는 바보가 되는 기분을 느끼고 있던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제가 필수 교육을 날로 먹었다는 성찰은 조금도 없었다. 턱을 괸 채 잠깐 생각하던 김윤혜가 말했다.

“상처도 없었는데 혈액이 부족했던 건 이도하씨가 본인 피를 줬기 때문이죠?”

“달리 피가 없잖아. 오즈인인데 혈액형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차피 숨넘어가고 있었는데 밑져야 본전이지. 그래서 살긴 산 모양이지?”

김윤혜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맹약… 어쩌면 그건지도 모르겠어요. 목숨에는 목숨. 목숨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목숨 하나를 써야 하고… 계약의 성사로 이미 동조화가 시작된 상태에서 피까지 나눠야 하는 거죠. 그래서 맹약이라고 하는 건가? 왜, 옛 중국에 의형제를 맺을 때 피를 나눠 마시는 의식을 했잖아요. 술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피였죠. 그거 말이에요.”

“뭐?”

“뭐 마음을 하나로 하고 힘을 합치고 또… 한날한시에 죽는다.”

“…뭐 시발?”

뭐가 어쩌고 저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