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한 일 분 뒤면 죽을 것 같은데… 점점 커지는 피 웅덩이를 바라보며 남자, 그러니까 이도하의 소환주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손을 늘어트린 꼴을 보니 남자는 양 손목을 그은 듯했다. 일 분은커녕 삼십 초 후면 제가 만들어낸 피바다에 고개를 박고 죽을게 분명했다.
쾅쾅! 별안간 벼락이 치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입을 틀어막은 채 거의 정신을 놓고 망연하게 서 있던 이도하는 정말 기절할 것처럼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쿵쾅쿵쾅! 숨 쉬는 것조차 깜빡하고 있던 이도하도 그제야 제 심장이 미친개처럼 널을 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헉, 그는 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약간 고개를 돌리며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쾅쾅쾅! 굉음이 더 거세게 울렸다.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거대한 두 개의 문이 부서질 듯 세차게 흔들렸다.
“정말 죽겠는데….”
남자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눈이 반쯤 감기고 있었다. 시발- 드물게 욕설을 날리며 이도하는 황급히 남자를 받쳐 들었다. 바람 빠진 인형처럼 남자가 전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남자를 받치며 피에 쭉 미끄러진 이도하가 피 웅덩이 위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질척한 피가 바지에 젖어들자 소름이 쫙 끼쳤다.
쾅쾅쾅!! 문은 곧 부서질 것 같았다. 뭐라고 시끄럽게 외쳐댔으나 정신이 없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덜덜 떨리는데 저 요란한 문소리가 이도하의 정신을 더 빼놓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든, 해서 밖에서 누가 쳐들어오든 요단강에 반쯤 발을 담그고 있는 남자를 구하지는 못 한다. 이도하- 바로 저 말고는.
“야, 야- 이봐. 야! 이 양반아! 이름! 이름 뭐야? 이름 뭐냐고?!”
이도하는 이미 시선이 흐릿해진 남자의 뺨을 짝짝 갈겼다. 가물가물하게 눈을 감아가던 남자는 그 와중에도 픽 웃었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다급한 와중에도 이도하는 생각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이도하가 남자의 입으로 귀를 바짝 붙여야 했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너무 시끄러웠다. 이제 경첩이 너덜거리는 지경이었다.
“…ㄴ 시오한… 오르페노스.”
“그래, 시오한 오르페노스. 이도하, 내 이름 이도하야. 들려? 이도하라고!”
사람 목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지경에 이딴 통성명 따위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이도하는 개탄스러웠다. 좀 험한 말로는 아주 좆같았다. 그러나 별수가 없었다. 소환주와의 계약은 이름의 교환으로 시작된다.
“빨리 계약명- 아니 이 미친놈아, 죽지 마!”
이도하는 정말로 다급했다. 80억 명 중에서도 세 손가락으로 꼽히는 능력을 타고 난 덕에 평생 다급할 일이 없었던 그의 인생에서 최고로 다급했다. 그는 공명심이라고는 없는 인간이었으며 물욕도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고, 딱 그만큼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만큼 양심도 평범했다. 살릴 수 있음에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을 봤다가는 평생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 테였다.
남자- 시오한 오르페노스가 손을 들었다. 눈은 이미 거의 감긴 상태였다. 이도하가 남자의 팔을 잡아 올리며 황급히 그의 입가로 고개를 박았다. 어디를 짚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힘을 잃은 손이 휘청거리다 그의 눈가를 스쳤다.
“…ㅎ…ㅁ.”
“뭐? 뭐- 야, 안 들려, 이봐! 야! 와 미쳐버리겠네!”
쾅-!! 그 와중에 미치듯이 흔들려대던 문이 결국 터지듯 나가떨어졌다. 번쩍거리는 검을 들고 갑주를 차려입은 덩치들이 한 부대쯤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폐하- 폐하!”
“폐하- 누구, 누구냐!”
“시발 좀 닥쳐봐!”
이도하는 결국 욕지기를 하고 말았다. 정말 환장해 버리겠다- 이도하는 그 말을 지금만큼 실감한 적이 없었다.
오즈에 존재하는 소환주와의 계약은 이름의 교환으로 시작되며, 그가 특기자에게 오즈에서의 이름, 이른바 계약명을 건넴으로서 성립한다. 계약명을 통해 오즈에 실재하는 않는 존재를 이곳에 실체화하고, 계약주는 자신의 마력으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특기자를 이 세상에 우겨넣으며 특기자의 힘을 끌어오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 계약주가 건넨 계약명을 제대로 듣지 못해도 과연 계약이 성립하는가. 그건 상식이 아니었고, 필수 교육을 성실히 이수하지 않은 불량 학생 이도하는 알 수 없었다.
재고 따질 시간이 없었다. 남자는 지금 당장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불을 끄거나 리모콘을 가져오는 데나 힘을 쓰던 이도하는 아주 오랜만에 힘을 끌어올렸다. 까만 눈동자가 기이한 푸른빛으로 변했다.
웅- 넓은 방 전체가 진동했다. 공기 그 자체가 무거워진 것처럼 묵직하게 온몸을 내리누른다. 주변에서 뭐라 버럭버럭 외쳐댔다. 목 언저리에 번쩍거리는 날붙이 들어온 것 같기도 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Insondable-
측정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그렇게 이름 지어진 능력을 타고 태어난 이도하가 열여덟까지 적당히 귀찮지 않을 정도로 능력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비범한 힘 그 자체보다 더 비범한 제어 능력 덕분이었다.
시오한이 베어낸 것은 동맥이었다. 진짜 미친놈… 이를 갈며 이도하는 예리하게 베어진 두 손목의 동맥부터 이어 붙였다. 절단면을 이어붙이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평소에 이런 세밀한 힘 조절을 하지 않는 탓에 좀 거칠었으나, 어쨌든 이제 피를 철철 쏟지는 않았다.
눈 한 번 깜빡할 찰나에 시오한의 손목 역시 핏자국 아래의 거친 자국만 남기고 말끔하게 붙었다. 이건 정말 별일 아니었다. 문제는 이미 쏟아낸 피였다. 피를 다 쏟아낸 시오한은 이미 시체처럼 보였다. 가슴에 귀를 처박지 않고도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쯤은 어째선지 알 수 있었으나, 끊어지기 직전의 실타래였다.
이도하는 정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심장이 쿵쿵쿵 달음박질쳤고, 손끝이 차가워지도록 초조했다. 이만큼 노력했으니 저는 할 만큼 했다, 하고 자기 위안이나 합리화를 할 때도 되었는데 제 목숨이 경각에 달린 듯 아찔하기만 했다. 얼마나 불안한가 하면…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수혈… 수혈을 해야 하는데. …피 없어?!”
이도하에게 피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그는 바닥에 흥건한 피 웅덩이를 흘긋 보았다. 저 피를 다 모아다가 다시 넣으면 안 되나, 하는 정신 나간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는 한 가지를 떠올려냈다. 꾸벅꾸벅 졸면서 들었던 필수 교육 과정 강사의 목소리였다.
일단 계약이 성립하면, 계약자는 계약주와의 동조화가 시작된다. 오즈와 지구는 거울을 사이에 둔 하나의 세계 같은 모양으로 계약자와 계약주는 서로를 마주보고 선… 어쩌고저쩌고. 어쨌든 한 몸처럼 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이도하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이랬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그의 계약주는 죽는다. 그가 힘없이 늘어진 시오한의 양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얼마나 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체꼴은 면해야 한다.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웅- 방이 더 크게 진동했다. 바락바락 악을 쓰듯이 주변에서 질러대던 소리들이 다 사라졌다. 쿵쿵 미약하게 진동하는 심장이 느껴진다.
마치 제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발끝이 차가워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도하는 질끈 입술을 물었다. 찬물이 머리부터 아주 천천히 쏟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도하는 퉁 튕겨나갔다. 고무줄에 매달린 돌멩이가 튕겨나가듯 정말 그렇게 퉁, 튕겨나갔다. 내쫓기듯, 세계 자체가 그를 뱉어내듯. 아주 더러운 기분이었다. 멀리서 어렴풋이 울리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고함소리를 들으며 이도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이도하는 끙끙거리고 있었다. 눈앞이 온통 새빨간 피바다였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이도하 역시 피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어려서 험하게 놀지 않아 무릎을 깨본 적도 없으니 그가 겪은 피라고는 기껏해야 종이에 베여 찔끔 베어 나온 그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피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누구라도 그만큼의 피를 본 적은 없을 테였다.
또 왈칵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건 분명 트라우마감이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도하는 확신했다. 혈액 공포증에 걸릴 것 같다. 넘실거리는 피 속에서 헤엄치던 이도하는 혐오와 공포에 질린 와중에 이게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헉!”
“앗 깜짝아!”
숨을 들이키며 이도하는 깨어났고, 그 결에 옆에 서 있던 누군가도 깜짝 놀랐다. 그 누군가가 툴툴거렸다.
“요란하게도 일어나네요.”
이도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 대신 대고 줄을 그어도 될 것 같은 칼 단발에 귀를 다 감싼 아주 화려한 귀걸이를 하고 있는 여자였다. 형광등에 반사되어 번쩍거리는 거대한 뱀 모양의 귀걸이에 홀린 듯 눈만 깜빡거리던 이도하는 두어 번 더 눈을 깜빡인 끝에 간신히 정신의 끝자락을 잡았다.
“…김윤혜씨?”
“네, 네. 이도하씨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가 연구소로 이송됐고요. 거의 갈 뻔했는데 다행히 살았네요. 여기 보세요.”
김윤혜가 조그만 의료용 손전등을 들이댔다. 눈앞이 번쩍했다. 소환진에 빨려 들어갔을 때가 떠올라 이도하는 흠칫했고, 그 순간에 방 전체가 웅- 하고 흔들리며 손전등이 가루로 파삭, 부서져 내렸다. 진동은 금방 가라앉았으나 좀 놀랐다고 손전등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이도하는 깜짝 놀라 충격을 받았다. 정작 손전등과 함께 손이 갈릴 뻔한 김윤혜는 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