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천지개벽
1화
“이도하.”
나른한 오후였다. 초가을의 바람은 신선했고, 햇살은 따뜻했으며, 적당히 배가 불렀다. 강의실에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몰려와 꾸벅 꾸벅 고개를 떨구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이도하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턱을 괴고, 신명나게 졸고 있는 중이었다. 옆구리를 쿡 찌르는 손길에 이도하가 눈을 떴다.
“…….”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이도하는 입술을 물었다. 나 이 분위기 아는데. 강단에 선 교수가 묘한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었으며, 시선이란 시선은 모조리 그에게 못 박혀 있었다. 몇은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리고, 발밑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알지 이거. 이도하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가 앉은 의자 바로 밑, 강의실 바닥에, 새파란 소환진이 펼쳐져 있었다.
서른두 번째 소환이었다.
***
“하….”
마른 손에 얼굴을 묻으며 이도하는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손등을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윤형이 담배를 내밀고 있었다. 받아드니 친절하게 라이터도 건네준다. 이도하는 사양치 않고 불을 붙였다. 피울 줄만 알지 굳이 제 돈으로 담배를 사서 피우진 않으니 흡연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때는 담배가 좀 필요했다.
새하얀 필터를 깊게 들이마셨다 훅, 뿜어내니 화창한 가을 하늘 너머로 연기가 번져 사라진다. 오랜만의 담배에 머리가 핑 돈다. 으으으으. 이도하가 울적하게 앓는 소리를 했다. 앞에 선 윤형이 담배를 빨며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하늘도 이 정도 정성이면 감동하겠다. 어지간하면 얼굴 한번 보지?”
“싫다고.”
“그럼 계속 유명인사 해야겠네.”
“뭐?”
윤형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런 일이 벌써 하루 이틀도 아니라 대충 이스페이스나 오르카 같은 sns이겠거니 했던 도하가 입을 틀어막았다. 화면을 가리키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친… 이거 뉴스야?”
“인터넷 뉴스요. 물론 뉴스도 타긴 했지.”
“줘봐.”
“어어 던지려고.”
이도하가 핸드폰을 낚아챘다.
<대학 강의실, 수업 중 소환진 열려>
서울 소재의 XX대학 강의실에서 수업 중 소환진이 열리는 일이 발생했다. 소환진의 주인공은 이모 씨(24)로, 아시아에 유일한 인소더블로 알려져 있다. 이모 씨에 의해 공공장소에서 소환진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3일, 강남 H백화점의 엘리베이터 내에서 소환진이 열려 50대 여성이 기절했던 사건 역시 이모 씨로 인한 일이었으며, 지난달 2일에는 시장에서 소환진이 열려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국제 이능 연구 기관인 IERA의 한국 지부에서는 해당 사건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다. 소환진의 당사자인 특기자가 아닌 이상 일반인에게는 소환진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일반인이 소환진에 끌려 들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며 못을 박았으나 불안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공장소에서 열리는 소환진을 규제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으나, 소환진을 여는 것은 온전히 오즈에 존재하는 소환주의 일이며, 이것을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저작권자@빠름뉴스 무단재배포 금지
댓글 381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자 뭐하자는 거냐. 그냥 이름을 쓰던지 더블이라고 쓰질 말던지 눈 가리고 아웅하나.
ㄴ 누가 봐도 ㅇㄷ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키야 클라스 보소. 소환진 존나 영롱하구여
ㄴ 등급이랑 소환진이랑 상관없구여 띨빡아.
ㅇㄷㅎ 소환주랑 사이 안 좋은가. 맨날 안 가네
ㄴㅇㄷㅎ계약자 아님. 클라스가 있는데 계약 했으면 벌써 월드와이드로 기사 떴지.
ㄴㅇㅇ 계약거부에요
ㄴ??
ㄴ드문 경우도 아닌데 모르는 사람 많네. 계약 거부하는 특기자들 많음.
ㄴ 솔직히 나 같아도. 포장이 좋지 노예계약 아님?ㅋㅋㅋㅋㅋㅋㅋ
ㄴ 뭐랰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가만히 있으면 반이나 가지. ㅉㅉㅉㅉ
ㄴ ㅇㄷㅎ 계약하면 오즈 정세 다 뒤집힘
ㄴ ㅇㄱㄹㅇ ㅂㅂㅂㄱ
ㅇㄷㅎ 하나만 계약해도 우리나라 걍 먹고 살 듯. 발전소 다 필요 없지. 석유국 되는거임.
ㄴㅇㅈ
ㄴ오바
ㄴㅇㅈ ㅇㄷㅎ면 가능하지
ㄴㅇㄷㅎ 클라스면 가능함. 우르슬라가 독일 먹여살리는데 뭐. 우리나라 쥐똥만하니 ㅇㄷㅎ클라스면 차고 넘친다. 수출도 가능함
ㄴ근데 왜 안해
ㄴ지 맘이지
ㄴ우르슬라가 누구임?
ㄴ아 존나 무식이 철철 넘치네.
근데 이거 진짜 방법을 찾는가 해야한다. 맨날 뭐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다 하는데 맨날 그딴 소리만 쳐할거면 그 돈 들여서 뭘 연구하는 건데? 저 엘리베이터 때 나도 거기 있었는데 ㅅㅂ 진짜 기절할 뻔. 개놀람 진짜. 말로는 안 빨려간다 일반인은 영향 없다 해도 사람이 직접 당해보면 그게 안 되거든. 그 아줌마가 괜히 기절한게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 남.
ㄴ오바싸고 있네. 나 친구가 계약자라 소환진 위에 올라가본 적 몇 번 있는게 그렇게 무섭지 않았음. 친구말로는 빨려들어가는 느낌 난다는데 그런 것도 없었고 그냥 바닥에 예쁜 그림 그려진 것 같더만
ㄴ친구는 무슨 친궄ㅋㅋㅋㅋㅋ
ㄴ근데 이거 맞는 말 같은데. 생각지도 못하게 엮인거랑 친구랑 같이 있는거랑 다르잖아요.
ㅇㄷㅎ존나 잘 생겼다던데
ㄴㅇㅇ잘생김. 우리학교라서 가끔 보는데 샤프하게 잘 생겼더라. 키 작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크고 머리 작고 팔다리 길고 연예인 비율이었음.
ㄴ잘생겼든 안잘생겼든 그게 중요한가
ㄴㅇㄷㅎ 계약자였음 벌써 팬클럽 생기고 난리 났짘ㅋㅋㅋㅋ오한울 씹바름ㅋㅋㅋㅋ
ㄴㅇㄷㅎ 팬클럽 있는데
이도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 팬클럽 있어?”
윤형이 부욱 한숨을 쉬며 혼이 반쯤 나간 듯한 이도하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 갔다.
“친구야. 겸손은 그런 게 아니야. 그건 무지라고 하는 거고.”
“언제부터?”
“좀 됐을 텐데. 너 저번에 마트 소환진 동영상 뜬 후로 폭발했다고 하던데?”
“…….”
근데 난 왜 몰랐어? 이도하가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윤형이 좀 한심한 눈으로 그를 보며 뻐끔뻐끔 담배를 피웠다. 그야 동영상도 뜨고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긴 하지만 어쨌든 이도하는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었고, 일반인 팬클럽을 만들었다고 자기들끼리 놀지 이도하에게 선물을 준다거나 따라다니는 일은 없는 게 일반적이지 않냐. 윤형의 말은 그러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소식이 빨라요. 그러니까 그냥 가서 얼굴 보고 딱 정리를 하라고. 난 계약할 생각 없다. 부르지 마라.”
이도하는 대답 없이 담배만 빨았다. 잠깐 사이에 10년은 늙은 듯 몹시 피곤했다. 쓸데없이 날이 화창하니 속이 더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서른두 번, 벌써 서른두 번째였다. 시간으로 따지면 반년이 다 되어간다. 이렇게까지 매번 무시하는데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매번 소환을 시도하는 집념인데 얼굴 보고 얘기한다고 뭐 달라질 게 있을까 싶었다. 발목이나 안 잡히면 다행이지.
이능, 계약자. 이 모든 것들이 세상에 제대로 나온 지 이제 고작 100여년이었다. 이제는 특기자라 불리게 된 이능은 조금씩, 조금씩,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듯 조심스럽게 사람들 속에 스며들었다. 한 사건을 계기로 이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인식은 단번에 바뀌었고, 계약자는 폭죽을 터트리듯 화려하게 사람들 뇌리에 땅땅 존재감을 때려 박았다.
두려움을 선망으로 바꾸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세상은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물건을 들어 올리고, 날아다니며, 불꽃을 피워 올리고, 맨손으로 총알을 튕겨내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물고 오는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환호했다. 판타지 영화를 보고, 히어로 영화를 보는 듯 했으리라.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고 빠른 변화였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세상은 변했다. 그 이전에 능력을 가진 이들이 염려했던 두려움과 핍박이 허무하리만치 쉬웠다.
이도하는 그렇게 쉬운 세상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능이라고 해 봐야 그에게는 뭐 대단찮을 것도 없었다. 8살에 처음 특기자 판정을 받은 후로 수시로 이리 부르고 저리 부르고 놀 시간도 없이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니 귀찮을 뿐이었다. 결국에는 짜증이 나 청개구리처럼 최대한 능력을 숨기기만 했다.
자라나면서 능력도 함께 자라 결국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18살이었다. 이도하는 공명심이라고는 없는 인간이었다. 매달 출석을 요구하는 IERA의 연구소도 여기저기서 기웃거리는 관심도 번거롭기만 했다.
그저 좀 편리하고, 공부를 아예 놔서 대학을 못 가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안전망 같은 것. 딱 그 정도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평범하게 공부했고, 평범하게 대학을 와서 그렇게 살고 있으니 이도하는 앞으로도 딱 그렇게 살 생각이었다.
남의 나라도 아니고 생판 영문도 모르는 남의 세계에서 SF영화나 찍을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계약자가 되면 돈은 자루로 쓸어 담을 수 있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고 돈을 주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도하는 물욕도 딱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 얼굴도 모르는 다른 세계의 소환주가 밥을 먹을 때도, 쇼핑을 할 때도, 강의를 들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지어 똥을 눌 때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를 소환하려 한들, 서른두 번이 아니라 이백 번을 소환한들 이도하는 응할 생각이 정말로, 정말로 단 한 톨도 없었던 것이다.
“?”
파란 빛이 아니라, 새빨간 빛으로 번쩍거리는 소환진을 맞닥트리기 전까지만 해도.
“뭐야 이거?”
쓰레기를 버리러 가던 참이었다. 대충 트레이닝 바지에 집업 하나 걸쳐 입은 이도하는 쓰레기봉투를 든 채 빌라 현관 앞에서 얼이 빠지고 말았다. 빌라 앞을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그와 비슷하게 얼이 빠진 모습으로 우와아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찍지 말죠. 험악하게 노려봐주니 찔끔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그러면서도 걸음을 떼지 못하고 어어 거리는 행인에게서 관심을 끄고, 이도하는 소환진에도 관심을 끄려 했다. 붉은 소환진이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언제든 계약자가 될 수 있는 특기자들은 필수적으로 계약 관련 교육을 받지만 이도하는 고개를 처박고 자기에 바빴다. 차원이 어쩌고저쩌고 파장이 어쩌고저쩌고 매일 듣는 대학 강의보다도 더 지루했다.
여태 그랬듯 무시하며 쓰레기나 버리고 돌아가면 되겠지. 태연하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바닥이 쑥 꺼지고, 심장이 위로 솟구쳤다. 붉은 문양의 소환진이 분수처럼 화려하게 줄기줄기 솟구쳐 올라 온 시야를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추락감에 이도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숨이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겨우 뜬 시야로 담벼락에 붙어 입을 쩍 벌린 행인이 스쳐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붉은 재처럼 부서지고 깨져 별 하나 없는 밤하늘로 흩어지는 소환진의 잔영뿐이었다. 시야가 까맣게 죽더니,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곧 새하얗게 떠올랐다. 그리고 엄청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비 맞아 녹슨 쇠꼬챙이를 양쪽 콧구멍에 찔러 넣은 것처럼 정말 지독한 비린내였다.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이도하는 욱- 하고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눌러 삼켰다. 생선을 오백 마리쯤 저몄나, 짜증을 내려던 이도하는 새하얗게 떠올랐던 시야가 차분하게 내려앉고 드러나는 광경에 혀를 깨물 뻔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썰물처럼 피가 쫙 쓸려 내려가며 절로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느꼈다.
운동장처럼 드넓은 화려한 방이 온통 피바다였다. 지독한 비린내는 피 비린내였던 것이다. 새빨간 선혈 위로 불꽃이 넘실거리듯 거대한 소환진이 선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이도하요, 그 앞에 선 것이 그의 소환주였다. 벌써 서른세 번째로 그를 소환한 장본인.
매끄러운 백금발을 바닥까지 길게 늘어트린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머리칼과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단정하게 휘었다.
“안녕.”
그렇지 않아도 입을 틀어막은 채였으나, 어쨌든 이도하는 말문을 잃었다. 구역질 나는 피비린내와 정신이 아찔한 피의 향연이 아니었더라도 놀라 어차피 입을 틀어막았을 만큼 남자는 기가 막히게 잘생겼지만, 그 잘생김조차 좀 빛이 바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찬란한 백금발과 얼굴이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온몸의 피란 피는 죄다 바닥에 쏟아내고 있었으니. 과다 출혈로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는 태연하게 그렇게 인사하니 머리끝이 주뼛 섰다.
“…미친.”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잘생겼는걸.”
“…미친놈인가?”
“그 미친놈이 이제 곧 죽을 것 같은데 살려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