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49화 (649/653)

649화 (외전) 장막

예진이 휘청였다. 상민이 재빨리 그녀를 잡아 쓰러지는 걸 받아냈다.

“내…가?”

엄청난 충격일 테다. 지금까지 상민이 한 말은 그녀의 존재를, 근본을 부정하는 말과 같았다.

예진은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상민은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남편의 말은 모든 것이 사실이다. 그녀조차도 남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은 예전부터 너무 이상했다.

그래, 자신의 존재만 거짓이다.

예진은 역겹고 소름이 끼쳤다.

그 미치광이 교단들이 자신을 ‘복제한’ 그 행동도, 현대 과학기술이라는 것들도 전부 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혐오감을 파악한 상민이 입을 열었다. 예진이 하고 있는 생각 중 일부는 명백한 넘겨짚기였다.

“아니야, 당신은 단순히 예전의 당신이 복제된 것이 아니야. 당신은 당신 자체야. 과거의 당신이기도 하면서 현재의 당신이야. 그건 확실해.”

상민이 그렇게 단언했다. 하지만 예진은 울며 외쳤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타인이 그걸 어찌 아는가? 그건 본인밖에 모르는 고민인데.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고민인데.

하지만 상민은 그 순간 분위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자조적 웃음을 흘렸다.

“나 또한 그러니까.”

“…뭐?”

“당신은 알잖아. 내가 누구인지.”

그는 미래로 추정되는 곳에서 왔다. 그리하여 지금 이렇게 서 있었다.

허나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았던 김상민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김상민은 동일인인가?

나는 삼별초에 원래 존재했던 김상민이라는 낭장이었는가? 아니면 미래에서 온 외부인인가? 육신은 전 주인의 것이나 정신은 미래인의 것인가? 아니면 그저 과거인이 미래인의 기억을 흡수한 것인가? 아니, 애초에 두 존재는 다른가? 같은가?

당사자조차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무엇이 사실을 증명할까?

고작 뇌세포에 잔존해 있는 전기적 신호가 그걸 증명할까?

이 물음들은 예진의 물음과 완벽히 궤를 같이했다.

그러니 상민만이 예진이 가진 고뇌를 온전히 이해했다.

“당신의 부모님, 장인어른들께선 본래는 당신을 얻을 운명이 아니었어.”

그녀의 부모님 중 한쪽은 원래 불임이었다. 산부인과 진료기록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존재’가 예진의 탄생을 위해 그들의 삶에 개입했다. 예진을 가진 뒤 부부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두 동생도 더 낳을 수 있었다.

그녀의 가족 자체가 기적이었다.

진실로 그런 것이 기적이라 불릴 만했다.

상민 같은 어쭙잖은 존재 따위는 장막이 발현하는 기적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장막.

상민은 그 존재를 떠올렸다.

* * *

열심히 답을 찾고 있었다.

구하진 못했다.

절에서도, 교회에서도, 성녀에게서도 답은 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다른 이들이 그를 답으로 섬겼다. 그를 보고 쿠쿨칸이랬다. 구원자라 했다.

상민은 거부했다.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가 바로 그 기적을 가장 많이 받은 당사자였으니.

― 행한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언제든지 이런 기적이 또 한 번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또한 기적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오만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오만하겠는가?

어떻게 감히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자처하는 자들,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인가를 자처하는 자들은 진실로 사이비에 불과했다.

구원자가 아니다. 모두에게 파멸을 내릴 자다.

또한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말해선 아니 되었다.

기적을 보여주면 안 되었다. 경험을 보여주어야 했다.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전파해야 했다. 종교가 아니라 합리와 과학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도 그동안 해답을 찾는 것은 단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접근 방법을 바꾸어보았다.

다른 존재들에게서, 타 주체에서 해답을 얻는 것은 불가했다지만 방식과 가르침 정도에서 단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상민은 석가의 가르침에서 무언가를 얻었다. 예수와 무함마드가 걸었던 땅에서 그 실마리를 풀 장소와 시간을 얻었다.

그렇게 그는 예언자들이 걸어간 아라비아의 광야에서 내면에 집중했다.

샴마르를 향해 가는 그 여정에서, 그는 사막과 광야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궁구했다.

주체는 자신이다. 자신을 기점으로 하여, 의식을 확장했다.

육신은 더없이 강해져 있었지만, 정신은 아직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었다. 내면이 열쇠였다.

광야에서는 걸은 걸음만큼 정신이 확장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했을 때, 비로소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져든 그는 마침내 ‘무언가’에 닿았다.

장막이었다.

분명히 장막이었다.

인지하지 못한 걸음 한 번에 그는 장막에 닿았고, 장막을 넘었다.

동시에 사방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상한 곳이었다.

하늘에는 사막에서 보일 리 없는 폭풍이 치고 있었다.

온갖 오지를 갔음에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자색의 장막 속 번개 폭풍이 밤하늘에 휘몰아쳤다.

동시에 분명히 밤하늘, 어디에도 해가 보이지 않음에도 여명의 햇살과 비슷한 것이 지평선이라 인지한 부분에 비쳤으며, 동시에 반대쪽에는 노을이 져 있었다.

구름이 휘몰아쳤다. 비는 내리다 말았다.

땅은 수많은 생물들이 오가는 듯하면서도, 집중해서 보려니 생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은 사막을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이곳은 어디이며, 나는 어디로 걷고 있는가.

아니 내가 땅을 밟고 있던가?

상민은 비로소 이해했다.

이곳은 ‘존재하지 않는 땅’이다.

그리고 상민은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다.

존재하지 않은 땅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는가?

내가 느끼는 것을, 내가 경험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그래, 네가 아는 것이란 무엇이냐.

그렇게 상민은 비로소 장막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는 장엄했다.

존재하지 않는 군중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성가대의 합창처럼 들렸고, 나이 지긋한 교수가 독대하며 친절히 질문에 답해주는 것과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목소리도 아닐 터였다.

성난 바람이 웅웅거리는 것처럼, 폭포의 물소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울부짖는 바다에서 파도가 뱃전을 때리는 소리같이 들렸다.

심지어 그것이 청각으로 전해진 감각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허나 질문의 의미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첫 번째 만남은 짧았다.

상민은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장막 속에서 튕겨져 나왔다.

그저 기진맥진한 채 한동안 시체처럼 아라비아 사막에 몸을 뉘었을 뿐이다.

온몸에 엄청난 탈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토록 무기력했을 때가 대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단지 받은 자에 불과했다.

오만해질 뻔한 한낱 인간은 그때 다시금 겸손이라는 단어를 되새겼다.

다만 그때 이후 상민은 조금 바뀌었다.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육신은 조금씩 발전했다. 인간을 넘어 말 그대로 용이 되어갔다.

미래도 조금씩 엿보았다. 정신도 성장했다.

허나 상민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험조차도 미지의 존재에게서 무언가를 받은 셈이다. 또다시.

상민은 그 존재가 자신을 이리 보낸 그 존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우주적 존재에게 나무로 된 한 줌의 선박 정도야 너무나도 쉽게 이동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신이라는 작은 존재를 비틀어 여기 서 있게 하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은 행동일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란 질문은 입 밖에 나오지조차 않았다.

상민이 궁금한 것은 오로지 두 가지였다.

대체 왜 그를 선택했느냐가 첫 번째요,

과연 예전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의 역사가 과연 실존하는지가 두 번째였을 터.

두 번째 만남은 핵이 터진 폐허에서 이루어졌다.

한 문명이 다른 문명에게 자행한 궁극의 폭력의 현장. 상민은 그곳에서 전쟁을 일으킨 저주받은 핏줄을 계승한 어린 소녀를 구했다.

그렇게 소녀를 구하고 돌아가던 와중, 장막이 물결쳤다. 상민은 다시금 그 장막에 닿았다.

상민은 장막에게 묻지 않았다.

왜 이런 결과를 자행한 미래를 보여주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장막은 이해시켜주었으니까.

그는 단지 그 의도가 궁금했을 뿐이다.

― 그 세계는 닫혔다. 모두가 실패했다.

장막의 존재는 그렇게 말해줬다.

말인즉, 원역사는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기억이라 부를 만한 그 모든 것조차도 그저 네 머릿속 안의 뇌세포가 가진 전기적 신호 흔적에 불과해졌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허탈감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의사는 계속 전달되었다.

― 여기까지 도달한 자는 네가 처음이다. 또한 마지막일 것이다.

자신이 마지막이라는 말, 그만큼 소름 끼치는 말이 있겠는가. 상민은 그것의 진의를 깨달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하지만 장막은 곧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세 번째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었다.

* * *

상민의 말을 듣던 예진은 갑자기 머리에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기억이 몰려들어 왔다.

“마… 맞아. 당신 말이 맞아. 나… 나도 봤어.”

흐릿한 기억 너머, 그녀는 한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도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배회하던 시절이 있었다.

상민을 다시 만나러 오기 전의 시절이다.

즉, 죽은 이후의 세계라 부를 수 있을 터. 그곳 또한 자색 장막의 땅이었다.

너무나 혼란스럽고 이상한 땅이라 상민의 묘사가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불가해함만큼은 완벽히 일치했다.

엄청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짧기도 했다. 사실 어느 정도인지 체감이 되지 않았다.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기억났다.

예진은 기어코 그를 만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완전히 자신을 놓지 않았다. 장막과 하나가 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의지와,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겠다는 세계의 의지가 만났다.

적절한 육이 생긴 이후,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

흔들리던 예진의 초점이 다시 명확하게 상민을 잡았다.

극도의 회의감 대신 편안함이 눈 안에 자리 잡았다.

상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곤 야영용 간이의자를 편 뒤 예진을 그곳에 앉혔다.

소금물에 치마가 다 젖었기에 상민은 휴대용 난로도 꺼내 불을 붙였다.

무엇을 좀 먹으라고 예진에게 쇼콜라 조각 하나를 건네주기도 했다. 예진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쇼콜라를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뭐야? 그리고… 그건 뭐야? 우리가 느낀 건, 본건, 경험한 건 사실일까?”

상민도 지금까지 명쾌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세상에 자신이 혼자는 아니다. 인류의 위대한 지성들은 이런 문제를 두고 항상 씨름해오고 있었다. 상민은 그 지성 중 몇 명이 말한 한 구절을 되뇌었다.

특히 데카르트의 제2 성찰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전능한 존재가 나를 속일지언정,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물론 르네 데카르트의 주장조차도 수많은 철학자들의 반론을 받았긴 했다.

허나 지금 당장 상민이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정표로 쓸 수 있는 것은 주체로서의 자아가 가진 나침반뿐이었다.

예진은 생각에 잠겼다.

당장은 상민이 몇백 년 동안 고민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내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실로 똑똑한 그녀였으니 금방 이해할 것이었고. 그렇게 두 명은 서로 생각을 나눌 수 있을 터.

상민은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이 고독한 세상에, 자신을 위해 자신과 비슷하게 굴레를 벗어난 사람과 있으니 이제는 외롭지 않았다.

‘그것을 원하는 거였던가? 장막, 그대는.’

예진의 입이 열렸다.

“결국… 그 존재가 12사도라는 사람을 조종해서 날 이곳에 불러낸 거네?”

“…그런 셈이지.”

상민은 자신과 함께 장막에 닿은 습시청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친구는 가까이, 경계해야 할 사람은 조금 더 가까이 두라는 격언에 따라 그는 존재하지 않는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두었다. 그녀를 아끼는 마음도 있었지만, 본래의 의도는 그랬다.

장막은 예상대로 그녀를 조종했다. 그러니 12사도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상민 자신의 업보였다. 상민은 분노할 자격이 없었다. 그건 기만이다.

‘나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일부러 시청이를 이용했을까?’

감시하려고 옆에 둔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은밀하게 일을 꾀했어도, 주의를 더 기울였다면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는 방심했다.

장막은 지금껏 결국 그에게 도움되는 일들만 해주었다.

보라, 예진이 돌아온 것도 결론적으로 볼 때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 아닌가. 그가 시청을 옆에 두지 않았다면 예진은 아예 없거나, 혹은 훨씬 더 먼 길을 돌아와야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의 선함을? 그것의 개입은 사실 나에게도, 인류에게도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어쩌면… 어쩌면 내가 너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나?

하지만, 이번에는 예진이 상민의 생각을 읽어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지만 단호했다.

“아니, 당신 생각이 옳아. 그건 마냥 선하지만은 않았어.”

그녀가 너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랐다. 자세한 기억은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저 존재가 우릴 위했던 건 맞아.

당신이 하늘에서 떨어져 옛날의 나를, 고려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야. 지금 이렇게 우리가 마주 볼 수 있는 것도.”

하지만 예진은 느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면, 앞으로 몇 걸음만 더 내디딜 때는 그것을 장담할 수 없다고.

그래.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의 생각이 완벽히 일치했다.

* * *

한동안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무언가 느낌이 왔다.

세 번째라고 좀 익숙해졌는지, 상민은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훌쩍 물러나 즉시 예진과 거리를 두었다.

습시청이 장막에 닿아 이상해졌으니 이와 같은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예진이 닿지는 않게 해야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을 미루어 볼 때, 이 장막은 그렇게 넓은 곳에 드리워지진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 물러나면 자신을 계속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준비가 되자, 상민은 감각을 받아들였다.

비유하자면, 이건 세신(샤워)이었다. 세찬 물줄기 같은 것이 끼얹어졌다. 물 대신 검은 하늘이 쏟아졌고, 숨이 막힐 때쯤 보랏빛 장막이 드리워졌다.

장막의 존재는 축복일지 모른다.

은혜일지도 모른다.

방금 느낀 검은 하늘의 물줄기는 사실 세례며, 기독교적으로 생각해볼 때 기름부음일지 몰랐다.

상민은 장막에게 선택받은 자(Chosen One)였다.

그는 용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육신과, 정신을 얻은 상태였다.

모든 것이 선하고 축복이었다.

예진의 존재도 그러했다. 사실 이번에도 장막은 보여준 셈이다. 은혜를 준 셈이다. 그 존재는 예진을 회귀시켜 줌으로써 이번에도 불가능의 가능을 보여주었다.

이미 그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받았음에도 믿지 않는 자, 여전히 불신하는 자에게 증거를 보여주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다.

상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원래 멸망할 운명이었다.

상민은 장막 속에서 예전의 조국―대한민국―이 존속했던 세계선 속의 운명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세계는 불탔다. 문명은 사라졌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일부 존속해 살아갔지만, 그들은 과거의 끔찍함 속에서 미래를 꿈꾸지조차 못했다.

절망과 시련이 가득했다.

다만 그 세계선은 닫혔다.

장막의 축복을 받은 자신에 의해 비통과 절망의 가능성이 닫히고, 지금 진행되는 또 다른 가능성이 시작된 것이다.

여전히 궁금했다.

왜 하필 고아였던 자신을? 아무런 근본도, 특출난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을 선택했을까?

허나 그런 질문은 장막에겐 실로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저 ‘가능성을 실행할 존재’만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장막은 사람들을 분류해 확률결정된 가중인자를 선별했고 그 최종으로 낙점된 대상이 때마침 상민이었을 뿐이다.

본인은 스스로를 대단하지 않다 여겼겠지만, 세상이, 확률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유일한 선택받은 자로 만들었다.

그렇게 상민은 지금의 단계까지 도달했다.

그가 유일했다.

인간종은 비로소 유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작은 지구란 알에서 벗어나, 태초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고 있었다.

장막이 보낸 사람, 바로 상민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 장막은 상민을 거듭하여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이 실낱같은 가능성을 존속하고, 유지하기 위해.

“왜?”

상민이 반대로 물었다.

“어째서? 우리의 존재가 그대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유년기조차 벗어나지 못한 문명이 과연 전지전능한 장막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장막은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 알 수 없었다.

허나 추측건대 장막에겐 인간의 생존이야말로 기적일지 몰랐다. 그들은 가능성이 증가하는 것, 반대로 무질서도(엔트로피)의 감소를 목도했다. 이것이야말로 우주적 기적이 아닌가.

상민이 넘겨짚기로는, 이 가능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완전히 고여버린 그들의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건대, 그들은 변수를 창출하기 위해 인간의 존속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회유하는 것이다.

인류를, 그리고 그들의 군주인 상민을.

장막은 여전히 아무 말 없었다. 다만 제시했을 뿐이다.

거대한 저울이었다. 실체가 없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느낄 수만 있었다.

그럼에도, 상민은 장막이 제시한 저울이 실로 불균형하다고 보았다.

한쪽엔 막대한 것들이 있었다.

상민이 가진 불로와 불사는 제시된 보상에 감히 터럭만큼도 미치지 못했다.

일개 개인에 한정된 것들보다 더 많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부와 명예, 지식, 그리고 수많은 것들.

그뿐이랴. 인간들이 모든 한계를 집어던지고 얻을 수 있는 초월까지도.

아프고 유한한 모든 이들이 실로 간절하게 꿈꾸는 것들이 놓여 있다.

선택을 받으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빈부는 동화 속의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동화조차 읽을 필요가 없다. 모든 기억과 경험은 공유될 터이니.

허나, 고개를 들어 반대쪽을 바라보면 오직 공허만이 남아 있었다.

제시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이 워낙 많은 것들이 올려져 있었기에, 반대편의 이 공허는 체감상 더 크게 느껴졌다.

상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 거래가 너무 불공평해서 웃었다. 저래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한 가지뿐이 아니겠나? 어떤 바보가, 어떤 멍청이가 공허를 선택하겠는가?

상민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표한다.

그대는 우리를 구원했다. 우리에게 문명을 건설할 가능성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여인을 부활시켜 주었다.

언어로 내 감사함을 수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감사를 표하노라.”

이런 미사여구가, 감사함의 표시가 과연 그대로 전달이 될까.

저 존재에게 과연 필요하기나 할까. 이해할까.

상민조차도 자신의 행동에 회의감을 품었다.

그럼에도 이러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허나 그렇기에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거절 또한 진심이다.

주변의 분위기는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세상은 그에게 실망했다.

상민은 숨 쉬는 공기, 걷는 대지, 보이는 하늘이 전부 자신에게 적대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때 처음 경험했다.

불멸 또한 저것이 준 선물이다. 그 알량한 힘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진실로 죽음이 가까웠다.

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과 무력감에도 상민은 꼿꼿이 서 있었다. 그동안 잊어버렸다 생각한 그 고통의 감각이 도리어 그가 가진 생명력을 활기차게 주장했다.

“첫째로, 나는 인간종의 왕이 아니노라.”

황제라고 불렸기에 존심이 생겨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주인과 종의 개념을 부정했을 뿐이다. 그는 영혼으로 누군가를 소유해 본 적 없었으며, 그런 시도를 전부 거부했다.

“둘째로, 그대의 개입이 없어야만 그대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자유만이 기적을 담보한다.”

변수와 가능성을 갈구한다는 저 존재 또한 모순이 있었다. 장막의 존재가 자신과 인간종에게 이렇게 계속 관여한다면, 그 가능성이 계속 증가할 수 있을까? 그랬다면 진작 저것은 인류에게 개입하지 않고서라도 알아서 해법을 찾았을 것이다. 간섭하며 일어난 기적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변인통제한 실험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상민은 피를 삼켰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대가 없는 선물은 존재치 않는다.”

알잖나. 그것이야말로 엔트로피의 역전이라는 걸.

* * *

장막이 걷혔다.

― 커헉

상민은 그제서야 자유를, 쓰러질 자유를 포함한 자유를 얻었다.

그가 선혈을 토하자, 저 멀리 기다리고 있던 예진이 황급히 놀라 뛰어왔다.

상민은 그녀의 안부에 대답 대신 다시금 피를 뱉었다. 복부가, 머리가, 온몸이 끓어오르는 끔찍한 고통과 현기증이 있었다. 한동안 그는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어야만 했다.

예진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물병을 주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줄 알았어.”

내려앉은 어둠이 크게 요동쳤다. 땅에 있는 물기도 일순간 증발했다. 주변의 땅은 우기의 우유니가 아니라 건기의 우유니같이 바뀌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난 것 같았다.

감정이라는 게 있다고 가정한다면 장막은 잔뜩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망하고 개탄했다. 애석해했다. 슬퍼했다.

그랬기에 장막의 어둠은 금방이라도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존재하게 만든 것처럼 언제든지 소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론 그러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드리워진 것처럼, 장막은 갑작스럽게 물러났다.

상민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이다. 빠른 속도로 신체가 안정되고 있었다.

장막은 준 선물을 빼앗지 않았다. 지금까지 준 선물을 전부 앗아갔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싫다는데도 몇 개는 억지로 주고 갔군.’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방금 만남 이전의 자신보다도 무언가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한 단계 다시 허물을 벗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저 혼원(混元)에서조차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민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잠시 자리에 누운 채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좆같은 별겜까지 기어코 하라고….”

“뭐?”

“아니야.”

상민은 그녀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신기하게 고통이 사라졌다.

예진이 그의 품속에서 웅얼거렸다.

“바이런 현비한테 부탁을 받았었어. 당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아. 그 태양 방패 계획이라는 거 말이야.”

상민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짐작하곤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당신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 다만… 예전에 말했듯 나를, 우리를 버리진 말아줘.”

예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상민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같이 가자.”

예진은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다. 상민은 그녀의 미소를 참지 못하고 긴 입맞춤을 나누어야만 했다.

“너무 짜.”

입맞춤이 끝나서야 예진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투정에 상민도 그제야 제대로 웃었다.

둘은 그렇게 우유니와, 장막과 작별을 고했다. 이제는 아이들과도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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