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50화 (650/653)

650화 (외전) 태양 방패

둘은 여행을 계속했다.

장막이라는 불청객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라졌고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면 영원히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반면 시간은 귀했다. 이렇게 인생을 즐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불멸자인 상민에게는 실로 어색한 말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예진의 생물학적 시간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상민과 비슷한 불멸자로 거듭난 상태였다.

속재파가 만들어낸 기적인지, 이 또한 장막이 설계한 안배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젊음과 건강을 얻었다. 다른 알들도 마찬가지. 상민의 인도가 있다면 어쩌면 다른 것들도 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귀한 시간이란, 5년 뒤 벌어질 ‘한 사건’을 의미하는 바리라.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거야.”

간략한 설명을 들은 예진도 이견은 없었다. 둘은 유한한 기간 동안 더 많은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기로 다짐했다.

다만 그녀는 상민에게 한 명을 더 부르자고 권유했다.

사실 ‘부부 여행’이라면 이 손님 또한 와야 하는 것이 맞을 테다.

그렇게 바이런 현비, 즉 에이다가 여행에 합류했다.

“폐하!”

에이다는 상민을 보고 반갑게 달려오려다 문득 납작 엎드렸다. 평상시 태도와는 좀 달랐다. 칭호도, 분위기도.

교단, 황실, 광명회, 성혈을 이은 일부 외국 왕실. 이 모두가 지금 큰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속재파가 저지른 일에 대한 소문은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에겐 모두 퍼져나간 상태였다.

구안회의의 구성원들은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 아니 해결이 되긴 할지 궁금해했다.

광명회 부회주로서 사건의 전말에 접근할 수 있었던 에이다 또한 이번 일이 광명회, 더 나아가 자신과 딸에게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두려워하며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 걱정하진 마렴.”

상민은 가벼운 웃음을 지어 에이다를 안심시켰다.

빈말은 아니었다.

그는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실망은 조금 했지만, 그 이상으로 책망하거나 분노하여 뒤집고 싶은 충동을 느끼진 않았다.

이해도 갔다. 부모와 사이가 좋았던 자식들은 장례식장이나 화장장에서 부모와 대화할 수 있는 1분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라면 실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할지도 모른다. 그런 심정으로 이해하자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또 이번 사건에 장막이 개입되어 있었던 만큼, 일반인들이 이 간섭에 제대로 저항했을 리가 만무했다.

상민 정도의 격을 지니지 않은 이상, 저항은 불가능한 일일 터. 항거할 수 없는 존재에 의해 영향받은 것 또한 책망할 순 없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사과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예진이었다.

그렇게 에이다는 안심할 수 있었다. 일단 상민이 진노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곳에 초대한 예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전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서 그림자를 찾아볼 순 없었다. 존재론적 혼란은 이미 대부분 수습된 상태인 모양이다.

그녀의 눈치를 살핀 에이다가 스스럼없이 예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팔짱을 끼는 것처럼 가까이 붙어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었다.

둘은 예전보다 사이가 더 좋아진 모양이다. 직첩을 내릴 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상민은 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에이다는 기적과 과학이 혼재한 황후의 존재에 대해 공경하고 있을 것이다. 직첩을 스스로 정리함으로써 울타리 안으로 초대한 행동도 더없이 감사하게 느낄 테고.

예진 또한 사교성 좋고 똑똑한 에이다가 마음에 든댔으니.

“…….”

상민은 에이다를 데리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풀어놓았다. 앞으로의 계획도.

“떠나신다구요? 영원히?”

“그래.”

분노나 실망의 감정과는 별개로, 상민은 이곳 곤여를, 인류의 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죽음을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훨씬 더 아득한 일들이.

이건 나름대로 전통과 같았다. 뭔가를 떠올린 상민이 살짝 웃었다.

그는 예전 서고려의 기틀을 세울 때 태종에게 제위를 물려준 뒤 청해로 나아갔다. 고려가 창강대평원 유역에서 머무르지 않게 하고자 그는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청해를 세우고, 용경도를 세웠고, 정북행성을 세웠다.

덕분에 고려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두 대륙을 점유하는 패권국이 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비옥한 땅에 만족하여 눌러앉았더라면 고려는 남려 일부를 장악한 지역강국, 강대국의 최소 정도로 끝났을지 모른다.

지금의 상황도 실로 그와 같았다.

“더군다나 이제 나는 지켜야 할 사람이 늘었으니.”

상민은 한번 선을 넘은 인류가 자신과 예진, 그리고 기타 여러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지 경계했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였다. 경배와 존숭을 받는 자와, 대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자의 경계선이 언제까지 뚜렷할까.

인간이 가진 특유의 집단적 이기주의와 광신, 대의라 포장된 욕망이 어떻게 발휘될지 상민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역사를 봐 왔기에.

그 혼자였다면 상관없었을 테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장막과의 대화가 끝난 지금의 상민은 지구를 수십 번 무너뜨리고 문명을 처음부터 다시 세울 수 있는 존재였다. 다른 이들이 그를 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예진 같은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서 문명을 다시 재조립하기에는 늦었다. 장막의 말마따나 겨우 상민 덕에 인류는 겨우 알을 깨고 나오고 있었다. 이 연약한 문명을 다시 처음부터 개입해 세운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숫자로 얻은 희미한 성취였는데. 값진 시간만 버릴 뿐이었다.

부모는 언젠가 자식을 떠난다. 자식도 언젠가 부모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오는 법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상민은 잠시 고민하다 에이다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주사기였다.

이 정체를 단번에 파악한 에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주사기를 받아들었다.

“잘 생각하거라. 단순히 축복이라 생각하지는 마렴. 어쩌면 기나긴 굴레가 될 수도 있단다.”

상민은 경고했다.

경험자로서 불멸은 축복만이 아니었다. 저주일 수 있었다. 앞으로 영겁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이게 있으면, 당신이랑 영원히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날 버리지 않겠다는 거죠?”

“그래. 다만 다른 모든 것들은 포기해야 해. 이전과 같은 삶도, 지금까지 이루어 왔던 모든 것들도.”

지금의 제의는 대가가 있었다. 모든 이들의 욕망이 불멸에 있다지만 이런 은혜를 상민이 주는 이상, 그에 걸맞은 책임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에이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생? 설령 그 앞에 불구덩이가 있다 하더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왼쪽 상완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그녀는 곧바로 비명을 삼켰다.

극심한 어지러움과 두통, 그리고 가려움과 작열감 섞인 통증이 온몸으로 퍼지고 있을 터.

몸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뜯겨져 나가는 끔찍한 감각.

그의 아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었다.

다만 저 주사기는 상혁에게 준 일시적인 신체회복제 용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았으니 더 강한 증상을 나타낼 테다.

어쩌면 에이다의 연약한 육체론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민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자, 고통이 대부분 사라지고 청량감이 감돌았다.

곧바로 열이 내렸다. 정신도 온전히 돌아왔다.

기적의 구현에 에이다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달라진 분위기가 새삼 눈에 띄었다. 이제는 정말로 용이 되어버리신 걸까.

‘하지만 이젠 달라.’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던 처지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온전히 그의 권속으로서의 힘이 느껴졌다. 은은하게 잔존하는 고통이 도리어 힘과 생명력을 자극시키는 느낌이었다.

에이다는 갑자기 또 눈물을 흘렸다. 고통이나 불행의 눈물은 아닐 테다. 원래 눈물 많은 사람이라 딱히 놀랍진 않았다.

예진이 그녀를 달랬다. 그렇게 에이다가 안정되자, 상민은 비로소 그의 계획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든든한 정신적 조력자와 기술적 조력자의 옆에서.

“584년, 큰 사건이 일어날거야.”

개천 584년(서기 1859년) 8월 말에서 9월 초,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강력한 사건이다. 어쩌면 전 인류의 명운이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존재만 알았을 뿐 정확한 시간대까진 몰랐지만 장막과의 접촉 이후에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예지할 수 있었다.

“태양풍이 불어닥칠 거야.”

“…….”

에이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손꼽히는 천재답게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그녀는 곧바로 상민이 언급한 사건의 위험성을 짐작해냈다.

“위력은요?”

“인류사에서 어쩌면 가장 강한 지자기 폭풍이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민이 특별히 언급했을까. 태양풍 자체는 그리 대단히 놀랄 만한 건 아니었으니.

에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양대폭풍.

상민의 옛 삶에선 인류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들어보지도 못한 사건이었을 테다. 접촉 이전 시절의 상민 또한 몰랐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 인류는 겨우 전신줄을 일부 지역에 깔던 시기였을 테다. 에디슨이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허먼 홀러리스, 니콜라 테슬라 같은 발명가들도 어리거나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지자기폭풍이 입힐 피해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문명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기에 피해가 적은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민의 예전 삶과 달리, 인류는 동일한 시기에 이미 엄청난 기술적 도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원래라면 겨우 전신줄을 깔 시간에 이미 세계는 무선 손전화, 연결망, 연산기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온갖 종류의 위성이 하늘에 떠다녔고 고속열차와 비행기, 연산기의 보조를 받는 차량들이 돌아다녔다.

병원에는 최첨단 의료기기가 설치되어 이전에는 치료하지도 못했던 온갖 질병들을 앞장서서 정복해 나가고 있었고 연구소와 회사에도 첨단기기들이 놓여져 있었다.

이런 순간, 지구에 들이닥칠 태양대폭풍은 그야말로 엄청난 인명 및 재산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

물론 이 한 번으로 인류가 멸망하진 않을 터다.

그건 터무니없을 만큼 태양풍의 위력을 과장한 것이며 또한 인류의 저력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실로 영화상에서나 가능했다.

게다가 정확한 시점을 알게 된 만큼 미리 대피를 시키거나 준비를 단단히 한다면, 생각보다 인명피해는 적을지 몰랐다. 예고된 재해는 그렇지 않은 재해보다 훨씬 더 대처하기 쉬웠다.

태양풍은 지구의 자전으로 발생되는 지구 자기장에 의해 한 번 방어되었다. 그 뒤에는 지구 대기에 의해 또 한 번 더 방어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태양대폭풍이라고 해도 지표면의 생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칠 순 없었다.

태양대폭풍이 몇 날 며칠씩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폭풍도 그렇게 몰아치지 않았다. 태양대폭풍도 마찬가지라 기껏 사흘 정도만 영향을 발휘할 것이었다. 그러니 특별한 환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쩡할 것이다.

문제는 시설이나 물건들일 터.

허나 그런 것들에도 인위적으로 방어차폐막을 두를 수도 있었다.

지하에 있는 시설은 완전히 안전할 것이다.

또 지상의 중요시설들도 꼼꼼히 설계된 차폐막을 두른다면 안전할 것이었다.

토량소 원자력 발전소 같은 우려될 만한 설비들은 미리미리 준비하여 가동을 안전하게 중지시켜 놓으면 되고, 비싼 기기들은 지하에 두면 되었다.

다만 그렇게 해도 모든 것을 방어할 순 없었다. 그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불가능했다.

헤아릴 수 없는 피해가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상민의 말이 계속 이어지자 에이다는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여명항천사는 우주국과 함께 적어도 수십 년 전부터 이 사건을 방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그녀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일개 회사가 인류를 구할 작전을 짜고 있다니, 누가 그 사실을 믿겠는가?

하지만 광명회 부회주로서, 세계 최고의 기업인으로서 에이다는 누구보다 저 말이 사실이라는 걸 보장할 수 있었다. 오로지 그만이 이 장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게 태양방패 계획이었군요.”

“코아케에서 본 거지? 당신이 불시에 방문했던 그날.”

“알고 있었어요?”

에이다는 그를 속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오직 소수의 미치광이 속재파 광신도들만이 가능할지 몰랐다.

“막을 가능성은요?”

에이다는 그렇게 물었다.

“완벽히 막진 못하겠지.”

상민은 그렇게 말했다.

“다만 그 위력을 확연히 감소시킬 순 있을 거야. 간헐적으로 관측되는 조금 위력적인 수준의 태양풍 정도로.”

그것만으로 과학자는 기적이라 말할 것이다. 인류 문명의 승리라 말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 계획이 상징하는 바는 훨씬 더 컸다. 상민은 태양폭풍 방어 말고도 훨씬 더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준비는 어느 정도 되었나요?”

“8할 이상.”

근래 여명항천사는 48번째 발사를 끝마쳤다.

물론 계획의 규모를 미루어 볼 때, 훨씬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기술과 요령(노하우)의 진보가 이를 가속시킬 것이었다.

여명항천사는 몇 가지 실험적 기술을 도입했다.

원심력을 이용해 연료의 비용을 최소한으로 소모하며 지표면에서 원자재 신기전을 우주로 날려 보내는 기술도 존재했다. 민감한 전자기기는 막대한 원심력을 이겨낼 수 없었지만, 태양방패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원자재는 충분히 가능했다.

앞으로 5년의 세월이 남은 만큼 계획은 충분히 실현 가능했다.

에이다는 안심했다. 그녀는 의자에 힘없이 기대앉았다. 방금 주사를 맞은 육신에 너무 충격적인 사항들을 연달아 들었는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야.”

상민의 두 여자를 바라보고 말했다. 태양방패는 자식들을 위한 선물이다. 우리의 여정을 위한 계획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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