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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28화 (외전) (628/653)

628화 (외전) 그녀의 이야기

― 띵동 댕동

한양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한 불암중학교.

오늘의 수업이 모두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지자, 잠시 뒤 앳된 중학생들이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갔다.

그 무리 중엔 유난히 발걸음이 빠른 세 명의 남학생들도 있었다.

“야 왕환서, 진짜 너네 집 가도 돼?”

“부모님 안 계시는 거 확실하지?”

환서라 불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그제 출발하셨으니까 모레나 오실걸?”

“와, 개꿀.”

“진짜 완벽한 날이다. 오늘 우리 학원도 없잖아.”

환서의 친구들은 굉장히 신이 난 상태였다.

친구들 앞이라 억지로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환서도 이미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걸음이 늦을수록, 오락시간은 줄어틀 테다.

소년들은 학교 근처에 있는 중계 상영 연립주택 대단지로 향했다.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나중엔 숫제 뛰어갈 정도였다.

― 두다다다

“안녕하세요!”

기분이 좋으면 인사성도 밝아졌다.

환서와 친구들은 공동현관의 경비아저씨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비밀번호를 풀고 승강기에 올랐다.

― 삐리릭

소년들은 112동 802호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발길이 가벼웠다.

사실 지금쯤이면 학교 끝나자마자 세 명이 같이 다니는 수학학원으로 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때마침 선생님이 감기에 걸리셔서 오늘 수업을 다음 주로 미루자 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뜻밖에 자유시간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부모님까지 없다면?

‘개꿀이지…!’

이렇게 친구들을 데려와 놀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순간이 탄생한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친구 두 명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세워 보이곤 기척을 죽이고 집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솔빈에 출장 가신 부모님이 안 계신 것을 거듭 확인했다.

‘누나들도 야자지? 아싸!’

소년에겐 누나 두 명이 있었지만, 그 불쌍한 대준생(대학준비과정)과 고등학생은 오늘 죄다 유학 준비와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명목하에 유학원과 고등학교에 갇혀 있을 터.

비로소 이 작은 세상은 온전히 소년들의 것이 되었다.

“와!”

소년들은 이제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세 명은 두다다다 서재로 달렸다.

목표는 책상에 있는 고성능 가정용 연산기다.

환서 아버지 것이었다.

연산기야 원래는 업무를 보는 용도로 쓰였다. 하지만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오락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들은 오락을 누구보다도 좋아할 때였다.

시동화면이 뜨고 주르륵 고려어가 위로 올라갔다.

에이다 사의 고성능 연산기는 비싼 값을 했다.

축구오락(특히 제국전 550)에 흥미를 가지고 계신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최첨단 중앙처리장치나 영상처리장치를 사실 때, 소년도 거들었던 적이 있다.

그 선행 덕분에 지금 이렇게 행복감을 누릴 수 있구나.

환서는 실실 웃으며 온누리 7의 실행화면을 바라보았다.

―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환서는 능숙하게 자판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곧바로 연결망을 켜 오늘 출시되는 오락 회사의 누리집에 들어갔다.

“드디어!”

“빨리 좀 해봐.”

의자를 가지고 그의 뒤에 둘러앉은 친구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환서를 재촉했다.

“야, 형님의 완벽한 준비성을 봐라. 다 미리 내려받아 놨다니까.”

어제 새벽, 몰래 미리 내용물을 받아놨었다.

설치만 하면 되었다. 그건 빨리 끝날 테다.

[설치 중입니다… 99/100]

소년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그리고 얼마 뒤 환서는 바탕화면의 상징을 두 번 눌렀다. 모두의 눈길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국가의 부름, 세계대전 2]

검은 화면, 갑자기 큰 우리글(고려글)이 띄워졌다.

웅장한 글씨체였다.

동시에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장엄한 배경음악이 깔렸다.

― ♩♬

주 목록에 들어가기에 앞서, 극장판 소개 영상이 띄워졌다. 소년들은 그 영상을 굳이 넘기지 않았다.

험악한 인상의 중화군이 돌격하는 모습과 그걸 방어해내려는 조선군의 필사적인 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절박한 모습이 보이다, 어느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며 땅이 뒤흔들렸다. 고려 함대가 함포를 쏘고 어디선가 튀어나온 전차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중화군을 깨부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미쳤다, 미쳤어. 진짜 와 영상 품질 좀 봐.”

숨죽인 듯 화면을 바라보던 세 소년은 영상이 끝나고서야 난리 법석을 떨었다. 환서도 떨리는 손으로 무선쥐를 움직였다.

영상이 끝난 배경화면 위엔 각 임무의 소제목들이 떠올라 있었다.

― 임무 목록

{임무 0. 탐라공습}

{임무 1. 개전, 필사의 후퇴.}

{번외 임무 1―1, 어둠 속에서}

{임무 2. 무너지는 봉명관(잠김, 임무 1 완료 시 해금)}

{임무 2―1. 심양 공방전(잠김)}

{임무 3. 신의주(잠김)}

{……}

환서는 연산기 책상 서랍을 뒤적이다 가끔 아빠랑 축구오락을 같이 할 때 쓰는 오락용 조작기 한 쌍을 집어 들어 연결했다. 그다음 오른쪽 소년에게 주었다.

“임무 한 개씩 번갈아 가면서 하자.”

“이런 건 하는 거 보는 게 더 재밌어. 그냥 봐도 돼.”

“그래도.”

명작은 친구들 사이조차 좋게 만들었다. 조작기를 받지 못한 친구조차 서운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 혼자하기

― 같이하기 ◀

“누른다?”

그리고 환서가 무선쥐를 누른 순간 세 명의 소년은 6세기 후반의 조선에서 거의 오십 년 전, 즉 6세기 전반의 조선으로 단번에 이동하고야 말았다.

* * *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배가 고픈지도 몰랐다.

세 시간 넘게 주구장창 오락만 한 세 명의 소년들은 꼬르륵거리는 배가 아파질 지경이 되어서야 부엌으로 나와 작은솥에 물을 올렸다.

환서는 라면 다섯 봉지를 꺼냈다. 친구들은 거실 식탁에 앉아 떠들고 있었다.

“와… 나 아직도 소름 끼침. 이거 봐, 닭살 돋았어.”

“신의주 공방전 진짜 와… 어떻게 이런 임무랑 장면을 구현했냐?”

“몰라. 수상할 정도로 고증에 진심인 회사니까.”

환서가 솥을 가져오자, 소년들은 허겁지겁 라면과 김치를 집어삼켰다. 숫제 마신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였다. 빨리 먹고 다시 연산기 앞으로 가야 했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 삐리리릭

“뭐야, 무슨 냄새야.”

“라면 냄새인가?”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다.

누나 두 명이 나란히 집에 들어오고 있었다.

“헉!”

친구들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고, 환서는 울상을 지었다.

환서의 누나들은 정말로 길 가다가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볼 만큼 예뻤다.

동생인 환서는 저 사특한 악마들의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누나들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굉장히 인기 많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중학교 3학년은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아질 나이였으니까.

물론 고등학생들은 더할 테지. 이미 고등학생 형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누나들은 좀 유명했던 것 같았다.

특히 큰누나 예진은 정말 예뻤다.

올해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누나는 지금 유학준비생이었다. 졸업 이후엔 안 그래도 부러움을 사는 생얼에 옅은 화장까지 하고 다니는지 가끔 길거리에서 보면 동생도 몰라볼 정도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면도 완벽했다. 어깨까지 단정하게 내려오는 윤기 나는 짙은 흑발과 늘씬하지만 굉장한 비율을 자랑하는 몸매 덕에 심심치 않게 연예인 길거리 채용도 겪어 봤다 들었다.

물론 작은누나, 영진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저 인간은 그냥 못났다.

‘저 봐, 표독스러운 얼굴. 딱 한스러운 고삼이 착한 막냇동생을 물어뜯기 위해 저렇게 단단히 이를 악물고 있잖아.’

물론 얼굴은 나름대로 예쁘긴 했다. 짜증 나는 성격과는 별개로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 괜찮을 텐데.

“환서 친구들이네.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

예진이 친구들이랑 인사하는 사이, 작은누나는 또 그새를 못 참고 심술을 부렸다.

“너희들 또 아빠 몰래 아빠 연산기에서 오락하지!”

“그래서 뭐!”

한창 용감한 중학교 3학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환서는 자유를 위협하는 온갖 부조리한 폭력과 억압에 맞서 결연히 항거할 자신이 있었다.

“아빠가 오락하지 말랬잖아! 저번에 중간고사 개망쳐 놓고 지금 오락할 때야?”

작은누나의 공격에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사내가 어찌 뽑은 칼을 맞대지 않으리오.

“누나만큼 망쳤겠어? 내가 뭘 하든!”

허나 환서의 말은 작은누나의 복장을 뒤집어놓은 모양이다. 곧바로 남매간에 우격다짐이 벌어졌다.

“환서, 영진이. 둘 다 그만 좀 해. 친구들 있잖아.”

하지만 큰누나의 말에 작은누나와 환서의 싸움이 결국 멈췄다. 두 남매는 씩씩대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큰누나의 말은 뭔가 무게감이 있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작은누나는 정말 못됐고 유치했다. 중3인 환서가 봐도 그랬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큰누나는 사실 나이 차이로 따지면 작은누나보다 한 살 더 많았을 뿐인데 거부하기 힘든 무게감이 있었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년이 된 것도 있지만, 그동안의 학창 시절 동안 공부를 열심히, 굉장히 잘했던 것도 한 요소일 테다.

부모님의 기대도, 선생들의 기대도 한 몸에 받을 만큼 학업 능력이 우수한, 게다가 예쁘기까지 한 우등생은 뭔가 그런 휘광이 등 뒤에 보이니까.

큰누나는 금방 상황을 정리했다.

“영진이는 그만해.”

“언니도 쟤 좀 혼내야 돼. 맨날 정신 못 차리고 오락만 한다니까.”

영진의 말에 환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는 고삼 주제에 틈만 나면 방송극 보면서. 그러니까 재수하려고 하지.’

“좀 냅둬라. 너도 중삼 때 맨날 퍼질러 놀았어.”

“우씨….”

할 말을 잃은 영진이 투덜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라면 냄새를 맡은 그녀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너희들 너무 늦었는데 부모님한테 전화는 안 드리니?”

“…아 맞다.”

큰누나의 말에 친구들도 머쓱해했다. 사실 굳이 전화를 드릴 게 아니라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때다. 특히 누나들이 왔으니 더 머물기엔 눈치 보였다.

“저희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

환서는 친구들을 배웅하러 나갔다.

* * *

예진도 배가 고팠다. 그녀도 영진이 끓인 라면을 나눠 먹기로 했다.

다가오는 한입충에 영진이 질색했지만, 그래도 예진이 즉석밥을 데워오자 대충 타협을 보았다.

“언니는 진짜 환서 저렇게 둥둥하면 안된다니까. 버릇 나빠져.”

“모두가 공부만 할 순 없잖아. 쟨 저기에 재능있을지도 몰라.”

“오락에 뭔 재능은….”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말을 해. 정의의 전장 같은 오락 경기 선수들은 연봉도 막 백만 원 그렇게 받는다더라.”

정의의 전장은 워낙 유명해서 여학생들도 알았다.

“난 쟤가 그 정도까진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봐, 지금은 총 쏘는 오락하잖아.”

“뭐 그래도 도전자 등급이라니까. 오락하는 내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진짜 잘하는 계급이라더라고.”

정의의 전장에서 ‘조력자’ 역할만 해서 백금 계급을 찍은 예진의 친구는 환서가 그 나이에 벌써 ‘중앙 공격자’로 도전자 계급을 찍었다는 것에 놀라워했을 정도였다.

철 구리 은 금 백금 위에 금강석 계급이 있었고, 금강석 계급 위에는 선수들이나 찍는다는 도전자와 정복자 계급만이 있다고 하니까.

예진은 안방 목욕실에서 간단히 세신을 하고 자기로 했다.

오늘 하루종일 여러 가지 입학 준비를 하다 보니 머리가 다 지끈지끈했다.

영진이가 맞았다. 유난히 그녀는 막냇동생에게 유했다.

사실 미안함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기까지 했다.

왜일까.

자신이 동생의 아주 소중한, 거창하게 말하자면 존재론적 무언가를 빼앗아버린 느낌.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신을 마친 예진은 자신의 방에 걸려있는 세계지도를 바라보았다.

한창 꽃다울 나이의 여자애 방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세계전도였다.

영진이만 해도 잘생긴 남자 가수나 혹은 배우 사진을 걸어놓았으니.

반면 예진은 예전부터 지도를 걸어놨다. 음악은 좋아하지만 가수나 배우를 잘 알지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남자나 연애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겐 다른 곳에 눈 돌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예진은 익숙한 듯 세계전도에서 꿈의 도시, 청해를 찾았다.

광역 인구수 삼천만의 세계 최대, 최고의 도시. 금융과 경제의 수도이지만 낭만과 문화, 소비활동이 공존하는 도시.

모두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낭만적 삶을 살아가는 청해시민이 되길 꿈꾼다지만, 사실 그런 것과는 무언가 다른 문제였다.

아주 소중한 것이 사라진 느낌. 그 소중한 것이 저 도시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왜인지는 모르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저곳에 가지 않는 이상, 이 허전한 마음은 절대로 채워지지 못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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