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거인의 기상
짧은 시간 동안 전려를 떠들썩하게 했던 권남도의 행패가 막을 내렸다.
여러 사람은 여러 교훈을 얻었다. 대부분은 권남도가 바란 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였다.
시중의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갔다.
국민 대다수는 고사를 이용한 워싱턴의 반격이 아주 재치 있고 합리적인 반격이라 보았다.
과거의 일화나 고사, 역사를 인용하는 방법은 우아한 대응이었다. 자신들의 역사와 과거를 몹시 소중히 여기는 제국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흠결 없는 역사에서 흠결 있을 뻔한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교훈을 주었다.
워싱턴은 다시 교당 내 지도력을 확보했다.
“축하드립니다.”
“반격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중 어르신.”
권남도가 실각하고 2주 뒤의 정녕당, 시중은 오랜만에 성탄절을 앞두고 소소한 만찬을 열었다. 각계각층의 관료들과 의원들이 음식의 향기와 음악이 흘러나오는 정녕당 뜰을 거닐었다. 그들의 배우자들도 한곳에 모여 사교활동을 벌였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의 해밀턴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퍼슨이 다가와 축사를 건넸다.
다른 당 당수들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받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인데, 권남도가 그것을 해냈다.
“별말씀을… 오, 지금 여기까지 오셔서 말인데, 우리 한번 다시 신경제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요. 두 분께 긴히 논의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시중이 구렁이 담 넘어가려는 듯 은근슬쩍 현안에 대한 협조 요청을 하자, 두 당수는 곧바로 손을 저었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 이외의 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예산안이나 증세안에 뭘 하시려면 일단 김소일 그 친구부터 설득하시지요. 자꾸 이러시면 돌아갑니다?”
“하하… 알았소.”
제퍼슨과 해밀턴은 시선을 교환했다. 워싱턴은 아니면 말고 하는 표정으로 능청을 떨고 있었다. 대체 거대한 국가사업에 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그들의 뜻대로 금방 주제를 바꿨다.
“결국 중화제국이 대리를 병합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 그게 이상했죠.”
해밀턴이 나직이 말하는 가운데에서도, 제퍼슨은 한숨을 쉬며 침묵을 지켰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하겠지요.”
워싱턴은 다른 당수들을 설득했다.
“저들이 어디까지 나아가리라 보십니까?”
제퍼슨의 물음에 워싱턴은 정녕당 집무실 한쪽에 걸려 있는 대형 세계지도에 눈길을 돌렸다.
“토번(티베트), 투르판, 더 나아간다면 야르칸드. 습 총통은 그들의 한족생활권을 천명하며 대리와 동토번, 투르판 남쪽을 그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땅이라 규정했소. 수, 당의 역사를 따지고 보면 중화의 품으로 들어와야 마땅한 땅이라는 것이지.”
“그들의 헛소리는 충분히 들었으니 그렇다 치고, 만약 그렇게 나아가면 당장 코앞에 중화제국을 맞닥뜨리게 될 소련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중화가 대리를 치며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고, 뒤이어 토번과 투르판 등에 시선을 돌리기 전에 소비에트 연방은 이미 카자흐를 병합했다.
명목상은 훨씬 더 우아한 ‘인민 의지에 따른 합병’의 형태를 띠었다. 고려는 그 투표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더 나아가진 않았다. 대리 침공처럼 총포도 쓰지 않았으니.
소련과 카자흐는 옛 러시아 제국 시절의 기풍이 남아있고, 오로지 1차대전 전후의 조약이 간신히 갈라놓았을 뿐이니, 중앙아시아에 발걸음을 내딛는 소련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루스인들에게 새겨진 큰 땅에 대한 욕망은, 그들의 프랑스인 총통에게도 전이된 모양이다.
고려가 나탈리아 차리차 시절에 체결된 조약을 들며 계속 저지했으나, 러시아 제국 시절에 맺어진 전후 조약을 봉건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소비에트 연방이 지킬 이유는 없다는 말에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다른 대응책을 생각해야 했다.
“그게 관건이오.”
잘 지적했다는 듯 워싱턴이 제퍼슨을 보고 말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책략이란,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것이겠지. 중화와 소비에트가 카자흐 동쪽의 영토를 두고 다툼을 벌이면 근심은 많이 사라집니다.”
중화제국은 애초에 중국공산당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국민당의 잔해 속에서 탄생한 국가였다.
또한 소비에트는 반대로 중화제국의 이러한 행보를 아주 불쾌하게 여겼으며, 턱 밑의 대월공산봉기가 완수되기 위해서라도 중화제국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싶어 했다.
이념적으로 봐도, 공산주의와 중화주의는 절대로 합치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서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자본주의보다도 더욱 역겨워하는 것이 ‘중화반동’과 ‘유목―멘셰비키 놈들’이었다.
이이제이라 해야 할지, 이호경식이라 논해야 할지, 어쨌든 고려로서는 고려에 적대한 두 나라를 서로 다투게 하는 것이 이로웠다. 이렇게만 된다면, 그들은 고려를 마냥 적대할 순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머나먼 거리 사이에 대양과 여러 나라를 두고 있는 고려보다는,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숙적의 존재가 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상식’이니까.
* * *
“환후가 좋지 않다고?”
“그렇습니다. 고려에 도착한 뒤부터 계속 폐렴으로 앓아누워 있습니다.”
내각 회의에 앞서, 워싱턴은 약용으로부터 몇 가지 소식을 더 알아 오라 시켰다. 심양에서 같이 왔던 동승자 보르지긴 노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치료는 잘 받고 있나?”
“제도 내에서 유명한 의료진에게 맡겼습니다. 허나 나이가 늙었고, 꽤 좋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된 거동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안타깝구만.”
“대신 나란투야라는 손녀가 대외 행보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황상을 배알하려 열심히 노력하더군요.”
워싱턴은 혀를 찼다.
“그 이름이 예전에 뭐가 되었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야. 물론 과거의 잔재가 실로 거대하다지만….”
말하고 보니 자신이 써먹은 과거 궁예왕의 잔재가 걸렸던 터라,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본인도 아니고 손녀가 배알하는 것은 힘들겠군. 아, 그나저나 그 관은 대체 뭔가?”
행여 시중의 비행기를 노린 폭탄이라도 있을까 경호들이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특별한 것을 발견하진 못했다.
옥구슬과 밧줄, 오동나무 관이 끝이다. 하지만 이것을 직접 몽골과 조선에서부터 가지고 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손녀에게 물어볼까요?”
“냅두게. 내가 4호기에서 몇 번 물어봤었지. 대답해 주었을 거라면 진작 했을 걸세.”
워싱턴 개인으로선,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고려라는 국가로서도 지금 두 마리 이리를 싸움 붙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 가지.”
내적 위험으로부터 해방된 시중이 위풍당당하게 정녕당을 거닐었다.
대신들은 전부 정녕당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시중이 회의실에 들어가자 내각회의 구성원 전부가 기립했다.
들어가자마자 사소한 근황에 대한 잡담 없이, 시중은 곧바로 운을 띄웠다.
권남도에 의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워싱턴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굉장히 우리 사회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소. 사회의 분위기는 건전하지만,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소. 불만족스러워하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다. 무항산무항심이라는 옛 성현의 말처럼.
국민들의 일부 지지가 없었다면, 호경당도, 권남도 사태도 없었다. 소수의 과격분자를 세뇌할 공산주의가 없었다면, 암살미수 사태도 없었다.
그러니 그런 불만들이 생겨난 일차 근원부터 다시 되돌아봐야 했다.
“그러니 나라의 빈 곳간을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워싱턴의 말과는 달리, 실제론 나라의 곡물 곳간은 항상 가득 차 있었다.
농업조정법 덕에 잉여농산물은 충분했다. 국민복지의 일환으로 집집마다 쌀 포대나 밀가루 포대를 주는 것도 요즘 관의 일 중 하나였다.
경제불황이라지만 정말로 굶어 죽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인구의 상승세 또한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워싱턴의 말은 문맥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전려국토개발국’의 행보가 본격적이 될 것이라고.
워싱턴의 손짓을 받은 국토부 상서가 벌떡 일어났다. 미리 준비된 서류를 들고 앞으로 나간 그가 전려국토개발국의 주요 일곱 골자를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국토개발국의 7개년 계획은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남파주열대습지의 개간에서 시작합니다.”
워싱턴은 흘깃 환경부 상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민간단체의 우려를 몇 번 제기하긴 했지만, 교당과 고려의 핵심 과업을 지체할 순 없었다. 그나마 개간지역과 지형을 적절히 선정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며 철도나 도로 등을 까는 것이 최선이었다.
“대부분 습지라곤 해도, 고지대와 언덕들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주요 건설 계획은 차질 없습니다.”
워싱턴은 항공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고, 지질학자들을 포함한 탐사팀도 많이 보냈다. 탐사팀은 오지 중의 오지를 가느라 상당히 많은 고생을 하고 왔겠지만, 덕분에 얼개는 완전히 잡혀 있었다.
다른 상서들도 충분할 정도의 지질보고서와 환경보고서 등을 읽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토목공사는 할 만했다.
먼 과거에 제국은 이미 니카라오 운하를 뚫었으며, 그 뒤엔 그보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테우얀테펙 운하도 무리 없이 뚫었을 정도였다. 이제는 노동력과 기술력, 건축학과 지질학, 의학 등의 다학제적 접근과 연구가 가능하니, 토목공사의 역량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국토부 상서의 개요 설명을 듣던 워싱턴이 다른 부서의 상서들에게도 질문을 했다.
“의무부는 충분한 예방접종이 준비되었소?”
“노동자들에게 황열과 기타 여러 가지 유행성 전염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추가 투입될 인원에 대한 물량을 확보할 예정입니다. 또한 경구수액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른 질병에 대한 대비 역시 하고 있으며, 식수와 음식 관리를 위해 보급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의무상서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남의 나라에서도 대규모 군사작전을 위해 여러 가지를 신경 쓰는 고려였다. 자국 내에서의 이런 개발계획을 위해선,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압적 분야로 해결되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이번 사업에는 피치 못하게 고려 내의 많은 기업들을 참여시켜야 했는데, 이윤추구가 지상 최고의 목적이라는 자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법이었다.
“저, 당하?”
내각회의를 잠시 쉬는 시간, 아까는 그토록 자랑스러워 보이던 의무상서가 주춤거리며 워싱턴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요.”
“한유약품과 남서제약, 양생당 등의 회사와 연락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업무협조는 예전에 논의했소.”
“하지만 예산 문제로 구입가가 그렇게 높지 않지 않습니까? 그들이 저렇게 순순히 예방접종 주사의 물량과 경구수액 등을 많이 확보해 달라는 청에 응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혹여 보조금이라도 주실 예정이십니까?”
“재정이 그 정도로 넉넉하진 않아요. 그들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요?”
워싱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국에 납품하는 물품들에 대한 생산비와 인건비를 포함한 기초적인 값은 받겠지만, 기업적 이윤을 그렇게 많이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란 소리였다. 딱 본전이라는 소린데, 기업이라는 족속들이 이윤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걸 생각해본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대주주가 황실이라 그러지 않겠소?”
애초에 그쪽에서도 이번 일을 교당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지원이고 뭐고 없다고 했었다. 워싱턴은 황가 재산의 규모를 아직도 잘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기업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잘 알았다.
“대놓고 황명이 떨어지진 않았을 거요. 다만 그 제국의 금고지기가 움직였을지도 모르지.”
겉으로 드러난 황실 재산과는 다르게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경제주체를 언급하는 워싱턴의 말에 의무상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같은 일은 의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대형 건설사와 물류회사를 비롯해 건설장비를 만드는 종동사와 같은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어떤 나라에서 기업들에게 이토록 대단한 협조를 받을 수 있겠는가.
워싱턴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는 몰랐다. 제국을 주물럭거리는 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시중 정도 되는 자가 모르면 그것도 이상했다. 다만 그 손이 황실과 상당히 가까워 황실의 손이라 봐도 무방했기에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독자적인 손이 따로 판단하거나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혹은 갑자기 사라진다면 대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엔, 제국의 시중조차도 명쾌한 답을 내리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