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과거의 교훈
“안녕하십니까. 혹시 신윤복 화가님 맞으십니까?”
정약용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세 명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고려에서 살다 보면 이름 형식으로 대강이나마 누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능하긴 했다. 앙주인, 진주인, 남려인 혹은 조선인은 굉장히 많이 피가 섞였더라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 제국에서 선입견에 의거해 사람을 짐작하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누구십니까?”
“정가 약용이라는 사람입니다. 정녕당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정녕당…?”
첫 만남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약용은 이 화가들이 그를 보는 시선에서 호감보다는 약간의 경계와 불만을 먼저 느꼈다.
아까 보았던 김홍도도 그러하고, 대체로 예술인들이 정치인들을 썩 좋아하진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세 명 중 한 명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주위를 환기했다.
“이보게들, 이 사람이 딱이네.”
“뭐가?”
“딱 전형적인 정치인이잖는가. 최고의 갑갑함을 자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증명이 아닌가.”
그 말을 나머지 두 명의 사람도 곰곰이 생각하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용은 기분이 나빠질 여유도 없이 말을 꺼낸 자에 의해 반쯤 끌려 나갔다.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왔기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신체에 위협을 끼칠 것 같지도 않았다.
화가들 앞에는 하나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놓고 토론을 벌이는 대상이었나 보다.
“어떤 그림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세 명의 화가들은 제각기 자신이 추구하는 미적 감각을 그려놓고 있었다. 셋 모두 여성의 그림을 통해 그러했다.
한 사람은 굉장히 성스러운 여인을 그렸다. 푸르고 노란 천을 휘감은 중갑옷(전통적 갑옷과 달리 신체의 꽤 많은 부분이 드러난 탓에 방어력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을 입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고혹적인 여기사가 보였다. 아름다움과 용감함의 표상과 같은 그림이었다.
신윤복은 이색적인 호수에서 수영하는 나체의 여인들을 그렸다.
의무부에서는 관리되지 않는 물에서의 야외 수영을 썩 좋아하진 않겠지만, 예술이 그런 것까지 고려하진 않았다.
갑갑함에서 벗어나 물놀이를 즐기는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가 실로 걸작이었다.
임 아이소포스는 굉장히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간결하면서도 얼굴과 눈이 과장스럽게 큰 그의 화풍은 재미가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높으신 분의 색욕을 풍자한 듯한 그림에선 기분 좋은 유쾌함과 우스꽝스러움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토록 다른 그림체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림들의 수위가 대단히 높았다. 정약용은 노골적인 그림에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얼굴을 피해야만 했다.
그를 짓궂은 눈으로 보던 화가들이 채근했다.
“빨리 골라주십쇼.”
이 젊은 정치인이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왔다는 것을 화가 모두가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위에서 정책만 집행하는 소위 높으신 분들이 직접 여기까지 내왕하겠는가. 정녕당 비서라도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만큼 작고 한적한 지방이라면 시장까지 버선발로 맞이하러 나와야 할 정도였다.
약용도 자신의 권력을 허투루 이용하는 자가 아니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은 굉장히 공교로웠다.
“저는 이런 것에 익숙지 않습니다.”
“정녕당 양반, 설마 아직 혼례를 하지 않으셨소?”
“…맏아들은 이미 중학교에 가 있습니다만.”
정약용은 정치인으로서나 젊지, 객관적 나이로서 어리진 않았다.
“행여 그럼 이 그림들이 저속하여 그리 머뭇거리시오?”
“…그렇습니다.”
세 명의 화가는 모두 정약용보다 나이가 많았으니, 어쩌면 주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화가들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씁, 경당의 시대가 지나고 교당의 시대가 와 조금은 변할 줄 알았는데, 꽉 막힌 것은 변함이 없구만.”
문화와 종교, 정치체제를 막론하고, 고려는 꽤 자유분방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동시대 다른 나라들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동아시아와 유럽이 꽁꽁 싸맬 때, 고려는 팔과 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물놀이 옷을 입고 다녔다.
학문도 그러했고 언론도 그러했다.
다만 이 진보성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지라, 여전히 국내의 예술가들은 제국 특유의 엄숙주의와 보수주의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 참.’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널리고 널린 화가들에게 의뢰를 했어야 했나, 약용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애초에 예당에 있을 만큼 유명한 화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란 자신의 주장 때문이다. 그는 겸허히 업보를 마주하기로 했다. 일단 주장은 들어나 봐야 했다.
“모두가 검열위원회 혁폐를 원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그 잔재가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교당의 공약이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나 약용의 추측이 맞았다. 매체가 많이 발달하고 대중문화가 약동하는 시점에 태어난 문화부 산하 제국검열위원회는 십여 년 전에 설립된 이후부터 온갖 곳에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물론, 예술인 측면에서 행패였지, 몇몇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건전하고 유해스러운 문물에 대한 방어책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다.
경당의 집권기에서 태어났지만 호경당의 손당수에 의해 강화될 예정이었고, 심지어 이번 권남도에게도 비호받는 검열위원회는 굉장히 독특했다. 마치 자유주의자들 이외에는 정치인 모두가 자기 입맛대로 문화와 예술, 언론을 좌지우지하길 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약용도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화가들 말 한마디에 정약용이 살아온 세월 동안 형성한 생각을 바꿀 순 없었다. 정약용은 사실을 다루는 황색 언론뿐만 아니라 예술을 다루는 소설문학과 그림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사회의 미풍양속을 위해 어느 정도의 검열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까웠다. 춘화나 패설과 같은 싸구려 유흥 문화가 고려를 좀먹기 전에.
그런데 현장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니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과도 부합하는 일리 있는 말이 있었다. 약용은 생각이 아직 경직되지 않았으며 제국의 예술인들이 가진 고충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제국이 다른 국가나 정권보다 훨씬 더 우수한 이유는 바로 태조부터 이어져 내려온 자유로운 기풍이오. 학문에 적용되는 것들이 문화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술의 본질은 그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이지요. 우리 예술가들은 그 본분에 충실할 뿐입니다.”
“호경당과 빨갱이의 암살미수작전도 그들의 사상에는 솔직했을 겁니다.”
“그들의 신념은 비틀려 있잖습니까? 자신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남의 자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 법이지요.”
“예술인들의 지나친 행동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럼 국법에 의해 판결받게 되겠지요. 길거리에서 선정적인 나체 여인 그림을 그려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라면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맞습니다.
허나 온전한 책임을 지는 만큼 합당한 자유를 누릴 성인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신윤복이 씩 웃었다.
정약용은 윤복의 미미한 웃음기에서 천진난만하면서도 단단한 미술 거장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주장처럼 제국의 문화가 너무나 빠르게 성장하는 탓에, 정치인들이 겁을 먹어 필요 이상으로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개진해 보겠습니다만… 솔직한 말로 저는 일개 비서관에 불과합니다. 시중께서 그저 듣지 않으시면 그만이지요.”
정치인 하나 앞에 두고 불평불만을 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웠겠는가. 약용은 정치인들의 약속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잘 알았다. 이 사람들도 자신만큼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윤복의 옆에 있던 다비드가 고개를 저었다.
“내, 사람 관상을 참 잘 봅니다. 하지만 귀하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 사람이 아닌 듯하오. 당신 마음에 조금이라도 설득이 되었다면 족하지.”
앙주인의 입에서 관상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약용은 허탈하게 웃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나쁘게 흐르진 않았다. 윤복과 이아코보스의 넉살이 주효했다.
하지만 분위기와는 달리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다.
“용무를 여쭤보시기 전에 빨리 그림을 선택하시지요.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약용은 이들의 요구가 정말 진심이라고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윤복의 말에 눈을 질끈 감고 윤복의 그림을 가리켰다. 무언가 홀가분한 느낌까지 들었다.
윤복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머지 둘은 투덜거리며 약용을 대놓고 힐난했다. 처음 약용이야말로 그림들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기 적절하다는 말을 했던 이아코보스도 마찬가지였다.
윤복은 한결 더 부드러워진 얼굴로 약용에게 말했다.
“그래서 절 왜 찾아오셨습니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 *
워싱턴의 꿈은 시기적절했다.
류큐의 한 승려로부터 얻은 영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으로 귀환하면서 꾼 꿈은 워싱턴에게 큰 돌파구를 주었다.
선동과 날조는 인류의 유구한 역사였다.
권남도가 있기 전에도 정치인들은 터무니없는 누명을 정적에게 씌워 숙청했다.
그중 적어도 고려에서 제일이라 함은, 단연코 옛 후고구려의 궁예왕을 꼽을 수 있겠다.
왕씨 고려의 태조에게 찬탈당한 뒤 신민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궁예왕은 그 행동과 혀의 업보를 충실히 청산했다.
국사는 교양이다. 사람들도 궁예왕의 행적을 잘 알고 있었다. 국민교육의 장점이라면 더 이상 민중들이 멍청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어중간하게 똑똑해진 것은 또 다른 단점이 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세의 흐름은 워싱턴에게 있었다.
“실로 흥미롭군요.”
정치인에겐 다소 냉담했던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과 친우 두 명은 워싱턴의 부탁에 아주 관심 있는 태도를 보였다. 셋 모두 권남도를 정말 싫어했다.
“그런 썩어빠질 놈 밑에선 문화도 뭐도 융성하지 못하겠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낙인을 찍어버리니까.”
“맞아.”
정약용이 가져온 워싱턴의 제의는 흔쾌하게 받아들여졌다. 세 명은 의욕적으로 몇 장의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답이 오고 가면 정치적 거래가 된다. 그렇기에 약용은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쌓인 것이 많은 모양, 이들은 어떠한 보답을 받지도 않고 재능을 기부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전체적인 구도와 밑그림을 그리고, 신윤복이 생동감 넘치는 주‧조연을 그렸고, 아이소프스가 전체적인 줄거리와 익살스러움, 그리고 우스꽝스러움을 첨가했다.
다비드에게만 맡겨 놓으면 풍자화가 아니라 위엄있는 인물화가 나올 것이 뻔하더랬다. 다행히 다른 두 명의 도움으로 근엄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애꾸눈 땡중의 그림이 도화지에 담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궁예는 안대를 쓰고 금색 가사를 입으며 철퇴를 휘둘렀다는 거지. 관심법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야.”
오랜만에 펼친 낡은 국사책에 담긴 글자들을 보아가며 세 명은 빠르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지금 그들에겐 걸작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심심풀이 그림이 필요했을 뿐. 하지만 대단히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으니, 어쩌면 이것이 걸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불교계를 딱히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불교는 궁예보다는 궁예에게 맞아 죽은 석총이었다.
셋 모두 당대에서 내로라하는 화가들이었다.
한번 열정을 쏟아붓자 몇 편의 그림들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불과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그림 속에선 굉장한 예술적 감각과 번뜩이는 재치가 돋보였다.
약용은 이 그림들이 필시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리라 생각했다
완성된 작품을 넘겨주던 임 아이소포스가 문득 물었다.
“그 비서관님. 혹시 문화예술진흥안에 대해선 예정대로 시행됩니까?”
“권남도의 일이 해결되면 시중께서 본격적으로 추진하실 예정이십니다.”
정약용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워싱턴 행정부의 예정된 재정 정책 행보에는 철과 강회로만 이루어진 기간산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육성에 관한 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음악, 미술, 가극과 같은 많은 분야에서 상당한 돈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아이소포스가 그를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도 미술계였으니.
“유출되어도 상관없는 것들만 미리 알려드리겠지만, 미술 쪽에 대한 것은 일단 전국 각지의 미술관을….”
“아, 그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음?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영화 산업에 대한 것들입니다.”
아이소포스는 명백한 화가였다.
반면 그를 만화가라 불러도 무방했다. 사실 후자의 정체성이 더 컸다. 파울로스라는 출생 이름 대신 리디아의 현자, 아이소포스(이솝)라는 이름을 스스로 쓰는 것도 그러한 꿈이 있어서 그럴 것이었다.
화가가 사진기에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당대의 명백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아이소포스는 사진과 활동사진, 영화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런 분야가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리라 확신했다.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아이소포스는 만화의 궁극적 진화 형태가 여러 만화를 그려 움직이도록 하는 활동사진처럼 활동만화의 형태를 띨 것이라 생각했다. 만화영화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저는 만화영화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세상의 교훈과 재미를 알려주고 싶어요.”
“정말이십니까?”
약용은 아이소포스가 아까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아이소포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애들이 볼 동화에 저런 걸 그리겠습니까. 저도 정도는 압니다.”
“…예.”
“하지만 정도를 모르는 놈들이 있죠. 이번에도 문화부와 검열위원회는 시장과 동떨어진 것들만 만들려 합니다. 무의미한 규제를 풀고 현직의 사람들이 최대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이 나오는 걸 보니 무언가 문제가 있긴 한 모양이다. 해결책이나 타협책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으렷다. 그것이 시행될지는 미지수였지만.
“저는 언젠가 환상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할 겁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동심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그런 곳들 말이지요. 나중에 한번 방문해 보시지요. 기약은 없지만요.”
“대단히 많은 예산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아이소포스는 껄껄 웃었다.
빈말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만화영화의 후원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아직 그의 계획 ‘꿈동산’과 ‘동화나라’ ‘금수(禽獸)강산’ 등은 구상단계에 불과해 이름조차 제대로 정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저 우화의 내용과 우화 속에 나오는 의인화된 동물 인물을 좋아하며 많은 후원금을 주는 수상쩍은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그래도 아이소포스는 후원의 의도 자체는 순수할 것이라 믿었다.
그저 동심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터다. 암 그렇고말고.
* * *
중서성에서는 청문회가 열렸다.
표면적으로는 내각불신임결의안의 제출 이후, 워싱턴의 변론 및 입장 표명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워싱턴에 대한 주제는 권남도에 대한 주제로 옮겨갔다.
그만큼 워싱턴의 반격은 적절했다. 권남도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규모보다 곱절은 큰 역풍을 이곳저곳에서 맞고 있었다.
“우리 시대의 땡중이 여기 있소!”
권남도에 반대하는 워싱턴파 교당 의원이 목청을 올리며 신문을 흔들었다. 세 화가가 그린 재미있는 그림이 모든 신문에 뿌려져 있었다.
금빛 가사를 입은 머리털 없는 승려가 뒤틀린 얼굴로 자신의 신하와 황후에게 철퇴를 휘두르는 광경이었다.
일견 장엄해 보이는 배색과 사실적인 묘사였지만 신하들이 과장되게 질겁한 광경과 눈물을 흘리며 도망치는 궁인들의 표정과 행동이 생동감 넘쳤다.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배경이 철원궁이었다면 그저 역사적 인물의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의 배경은 고려의 국회의사당과, 제도의 여러 마천루였다.
그림 작가들이 명백히 누굴 겨냥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언론이 덥석 물 만큼 그림은 상당히 훌륭했으며 직관적이었고 교훈적이었다.
대다수 대중들도 그 뜻을 알아차리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손원호 사건 이후, 나름대로 반성하여 자정작용을 한 주류 언론들은 이번에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물론 단단히 화가 난 상민이 뒤로 언론계에게 만약 거짓된 말로 선동을 한다면 광고를 전부 다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을 한 것도 컸지만.
“저자가 고발한 수많은 사람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직장에서, 가정에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소.
하지만 저자는 그 사건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그저 핏대를 올리며 다른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단 말이외다! 저자의 주장들을 달리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님 말고’. 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 아님 말고가 말이 되는가!
“저런 자가 의원직에 있다면 고려는 다시금 태봉 시절로 퇴보할 것입니다! 반도에 갇혀 있던 전조, 이성과 합리가 깨어나지 못했던 시절로 말입니다!”
논리정연한 반격과 권남도는 제대로 된 반격도 못 했다.
상황이 권남도에게 불리하게 흘러가자, 그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자들도 곧바로 그를 손절했다.
남은 것이라곤, 그동안 그가 공격한 수많은 정적들의 분노뿐이었다. 타협의 의지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무고죄를 엄중히 적용해야 합니다!”
마땅한 말이었다. 고려는 무고죄에 강경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중서성 의원은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중서성 의원에게 이러한 권한이 없다면 입법부는 심히 나약해졌다.
권남도는 얼굴을 씰룩거렸다. 패배에 심통이 난 것인지, 혹은 기어코 자신을 집어넣으려는 정적들의 헛수고를 비웃는지. 그와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들조차 그 감정을 명백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제국 국회의사당 회의장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근위대와 함께 성큼성큼 의회의 안으로 들어온 추밀원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황명이오!”
의원들이 모두 기립했다.
대부분은 크게 놀란 상태였다. 제국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황명이 내려진 적은 거의 손에 꼽았다. 대체 무슨 황명을 내리실 것인가.
설마 의회 해산과 같은 결단을 하진 않으실 테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함과 약간의 불쾌함, 기타 여러 가지의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의원들이 추밀원장을 바라보았다.
[짐이 의회에 석명함은, 본래 경들의 능력과 권한, 민의를 우선시하여 대대로 거치는 일이었소. 허나, 짐 또한 의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몇 가지 상황에 대해선 제국의 군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경들에게 내린 권한은, 비단 짐과 이 나라의 신하로서 또한 국민을 받드는 위정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라 부여한 권한과 특혜요.
허나, 그 권한들이 다른 제국 구성원의 헌법적, 헌장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짐이 생각건대, 이번 일 또한 전조에 일어난 먼 과거의 일뿐만 아니라 최근에 일어난 여러 사건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소.
그러니, 과거의 참담한 일들을 다시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짐은 권 의원에 대한 신임을 거두겠소.]
추밀원장이 두루마리를 접었다. 그리고는 중서령을 바라보고 말했다.
“황상 폐하께서 권 의원에 대한 의원 자격을 회수하셨소. 이상이오.”
권남도 의원 개인에 대한 불신임이 황명에 의해 집행되었다.
고개 숙인 자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는 충분한 군주권의 집행이다.
유죄가 확실한 권남도는, 단지 알량한 면책특권에 기대고 있었다. 허나 그는 고려의 의원이 가진 필연적 숙명을 완벽히 깨닫고 있지 못했다. 본인은 국가뿐만 아니라 황제의 신하라는 것을.
집행되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한번 집행되면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권위를 가진 황명이다. 그 엄중한 결단에 사람들은 젊은 황제가 가진 노여움을 체감할 수 있었다.
황제는 정말로 이번 일이 손원호 일파의 일과 버금가는 여파를 불러오리라 생각하신 모양이다. 해안도 이제는 계승 직전의 불안불안한 황태자가 아니었다.
민의를 들먹이며 제국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꼴을 감당할 이유는 없었다.
권남도는 땅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등 뒤에서 그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검찰의 손길은 굉장히 억셌다.
“자, 가자 이 새끼야.”
[작가의 말]
수술은 잘 끝났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부위가 완벽히 아문 것은 아니라 아직 거동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재는 오늘부터 재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