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화 과거의 잔재(4)
워싱턴의 위기감과는 달리, 정작 그를 음해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던 권남도도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는 네 부류를 설득하면 이 ‘반란’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벌써부터 두 부류의 사람들은 그와 협조하는 것을 꺼렸다.
반공이라는 만능의 방패조차 소용없었다.
종교계 인사들은 그의 접견을 거부했다. 면상에 욕을 얻어먹은 손원호조차도 만날 수는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좋지 않은 일이었다.
― 종교세 폐지가 걸려 있는데, 대체 그렇게 안일하게 행동할 것입니까?
― 우리 교회(제국교회)는 올해부터 매년 성실히 종교세를 납부하기로 했소.
권남도가 간과하고 있는 일이지만, 종교계는 신설된 종교세를 딱히 거부하고 있지 않았다.
종교에 대한 세금은 좀 복잡했다. 사실 고려는 역대로 종교인들에 대한 세금을 징수했었다. 신부나 승려들은 자신의 수입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내야 했다.
물론, 반대로 수입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런즉, 일반 국민과 똑같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경기침체 당시 경당에 의해 설립된 종교세는 법인세마냥 종교 교단에 부과하는 세금이었다. 이는 지금 교당의 워싱턴이 정권을 잡은 이후까지 계속 유지되어 있었다. 권남도는 이걸 폐지하자고 당근을 흔들고 있었지만, 어째 주요 종교 교단의 입장은 썩 미묘했다.
― 칵틀 루임도 이번 세금안은 찬성이오.
― 어… 어째서!
― 그분을 위한 금은, 성직자가 아니라 마땅히 그분의 자손들에게 돌아가야 하니. 그대도 그분의 자손인데, 어찌 이를 이용하려 하시오? 이만 끊소이다.
권남도는 죽어도 몰랐다. 신에 대한 헌금이, 사실 국가세금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가 진지하게 두 종교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원체 영토가 넓다 보니, 놀랍게도 고려의 시골 마을에도 사이비 종교가 퍼져나가곤 했다.
종교를 돈과 기회로 보는 언변 좋은 사업자들은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사람들도 항상 존재했다.
그들의 종교 교리가 주요 종교처럼 선하고 아름다우면, 어쩌면 용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이비가 아니라 용인할 수 있는 이단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사이비들은 구원자라기보다는 범죄와 폭력을 속삭이는 악마와 같았다. 탈퇴도 자유롭지 못했으니, 범죄조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진정한 구세주나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들먹이지 않는데, 한낱 사적 욕망에 가득 찬 머저리들이 설치고 다니는 꼴을 기존 주요 종교계가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물론 열성적인 쿠쿨칸교나 제국교가 앞장서서 단속활동을 몇 번 시도했지만, 정작 그들이 믿는 그분께서 자신들의 모습을 탐탁잖게 여기고 있었기에 성전을 선포하진 못했다.
니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니들도 사이비라고. 그리 하시는 말씀에 종교 교단의 수장들이 울면서 마음에 상처를 달랬던 것이다.
다만 종교에 대한 세금이 지속된다면, 나라가 그들을 억압할 권리가 생겼다.
제국국세청은 따지고 보면 국가와 세금에 대한 광신도들이었다.
그들은 교회고 나발이고 세금 안 내는 놈들을 진압해 끌고 가는 무지막지함을 자랑했다. 종교 탄압이건 뭐건, 그들은 세금 안 내는 자들을 악마(역적)로 규정했다.
사이비들은 세금 내길 싫어했다. 그들의 재원은 불법적인 범죄와 연관되어 있었으며, 애초에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다 보니 그 지도자들은 돈 한 푼 아까워하는 수전노들이었다.
그러니 세금 내길 싫어하는 사이비들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합법적으로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저항해보려는 시도가 있었기도 했지만, 애초에 저항하려는 종교조직은 곧바로 깡패나 불량조직으로 낙인찍혔기에 홍진사건 이후 내부 진압에 장갑차까지 동원하는 국세청과 중앙 경찰조직을 이길 순 없었다.
그분께서는 와해된 사이비 세력에 포교하는 것까진 막지 않으셨다. 사이비 대장의 목을 차도살인지계로 쳐내는 것도 주요 종교계에겐 나쁘진 않을 터였다.
재계는 한술 더 떴다.
“…뭐라고요?”
“제국을 발전시키는데, 저희가 어찌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겠습니까? 국민들에게서 이윤을 얻는데, 일정 부분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기업의 도리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치광이의 말인가.
세상 천하에 어떤 기업이 법인세 인상을 옹호하고 오히려 스스로 이윤을 나누어 국가개발사업에 앞장서서 투자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가?
보통의 기업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장기적 성과보다는 단기적 성과에 크게 좌우되었으며, 손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비록 권남도가 강력한 시장보수주의자였더라도, 기업들을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게 모르게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을 잠식해 나가리라는 것은 명백히 알고 있었다.
물론 길게 본다면 이러한 기반시설의 투자는 한참 뒤에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어떤 기업이 그런 장기적 관점, 불확실한 관점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를 지지하겠는가? 온전히 국가재정으로 하는 것이라도, 결국 그 재정을 충당하는 것은 지금 불경기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업일 것이 분명한데.
특히 권남도는 토목에 관련이 되지 않는 거대기업들을 주로 찾아다니며 현 정부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떠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모양이다.
“혹시 사… 사철이라도 건설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소?”
“우리 회사는 철도사업 안 합니다.”
“…….”
기업인들이 단체로 미쳐서 워싱턴의 공약인 전려국토개발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나서자, 권남도는 갑자기 머리가 아픈지 휘청였다. 혹시 빨갱이는 자신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는 구안회의가 진작부터 이 안건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공사비는 경제적 체급상 한 분이 부담할 것이라는 것도 몰랐고.
게다가 그가 지금 발걸음을 한 회사들의 실제적 대주주가 동일인이라는 것도 몰랐다.
웃기는 일이었다. 권남도는 자신이 관계자에 의해 농락당하는 것도 모른 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사실 기업인들에게 이런 국가개발은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이 막대한 양의 재정정책으로 인해 경기가 부흥한다면, 비로소 이 고통스러운 침체가 끝날 수 있었다.
이게 전부 다 국가의 빚이 되면 미래를 팔아 현재를 메꾸는 셈이겠지만, 국가도 아니라 황금용이 뭘 하겠다는데 거절하면 그것이 바보 멍청이였다.
심지어 그 황금용은 이 세상 어떤 누구보다도 거시 경제를 길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아마 이번 지출에도 불구하고 아주 장기적 관점에서 막대한 수혜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기업인들은 대체 언제 그들의 회주가 돈을 풀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거품이 완전히 걷혔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마침내 바닥에서 황소장(불 마켓)이 열리는 곳일 터다.
독감에 앓아누웠던 거인은 이제 몸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로지 소인만이 거인의 심계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권남도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었다.
사실 두 세력의 힘도 만만치 않아 이들만 잘 구워삶아도 될 것 같았는데, 이것도 까다로웠다.
일단 옛 귀당의 당수, 전병현은 건강이 상당히 나빠져 사실상 이번 중서성 의원 임기가 끝나면 정계 은퇴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는 저돌적인 언사로 다른 당에 적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애국심은 대단했기에 권남도도 저 깐깐한 늙은이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전병현의 시대를 이어받은 토마스 제퍼슨이라는 귀당의 이인자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제퍼슨도 권남도의 생각과는 거리가 좀 먼 인물이었다.
제퍼슨은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인권 문제에 대해선 꽤 심각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당이 홀라당 손원호의 호경당에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정치인적 부도덕성을 매번 설파하고 다녔던 제퍼슨의 공이 컸다.
또한 제퍼슨은 고립주의임에도, 중화제국의 독기 사용을 규탄하는 성명에 동참하곤 했다.
그의 고립주의는 다른 나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제국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상에서 근원했다.
하지만 정말로 ‘악의 제국’이 실존한다면, 어쩌면 그 또한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있어 보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악의 제국은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제퍼슨의 방해공작 때문인지 넘어갈 듯 말 듯, 귀당은 제출된 불신임결의안을 보며 이리저리 간을 보고 있었다. 특히나 황제가 직접 당사자의 변론권을 옹호한 이상, 워싱턴이 제도로 돌아와 입장표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결정될 것으로 보였다.
권남도는 정신이 아찔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걸고 모든 정치적 술수를 전부 써버린 그는 지금 표범 위에 탄 사람과 같았다.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계속 감돌았다.
게다가 지금 이제 워싱턴이 돌아왔으니, 그가 반격할 일만이 남았다.
권남도는 마지막으로 언론사를 찾았다.
황색 언론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평소 사장이 권남도와 친분이 있기도 했다. 이번 일을 꾀하면서,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그는 절망스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이미 패배했소. 나도 이것을 이길 방도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걸.”
각 주요 신문사들의 전면엔 하나의 큼지막한 그림이 있었다. 그것을 본 권남도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예술은 시대를 반영했다.
그림과 음악, 가극과 문학, 그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현실을 가감 없이 그대로 투영하기도 했고,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고발하기도 했으며 풍자하기도 했다.
예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삶과 괴리될 수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가장 사실적이지 않다고 평가받은 공상과학소설조차, 어쩌면 먼 미래에는 사실로 다가올 수 있었다.
고려의 화풍도 많이 바뀌었다.
삼별초 시대엔 불교적 색채를 띤 종교화가 꽤 있었다. 건국 초창기 영웅들을 그린 영웅화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태조가 천명을 받은 순간에, 강에 잔뜩 몰려드는 카누의 모습을 그린 황계효의 ‘개천의 순간’이 대표적이었다.
다만 태조 이후에는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 종교와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화풍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나중에 쿠쿨칸교나 제국교가 탄생하며 제국―고전주의나 경건주의 또는 상징주의가 도래했지만, 세속화풍이 먼저 인문주의니 낭만주의니 사실주의 같은 것을 만들었기에 그 기반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결국 미술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니만큼 염료의 다채로움을 근본으로 두었다.
유럽과 동아시아와의 통교가 시작되며 물감의 개수가 확연히 늘어나자 고려에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많았다.
따뜻한 색채를 띤 인간의 모습을 담은 화풍과, 이도의 계몽주의 이후엔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이성과 이상에 대한 동경을 담은 화풍이 공존했다. 범람하는 철학에 뿌리를 둔 그림들도 많았다.
동로마 유민의 진주 이주 이후에는 붓과 세필, 연필과 유먹의 발전은 거시적 예술이 주였던 고려 예술계가 훨씬 더 미시적으로 섬세한 그림이 가능하게 했다.
북려 예술계에서는 그야말로 동서양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테르샤로마와 동래미는 예술의 성지가 되었다. 원체 풍족한 국가였으니 밥과 빵이 남아돌았고, 덕분에 가난과 밀접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들도 적선에 배를 곯지 않아도 되는 것이 컸다.
아주 거시적인 그림과, 아주 미시적인 그림. 그리고 그 둘을 버무려 시점을 자유자재로 추구하는 작가들이 득세했다. 현실을 최대한 변형하지 않고 그려낸 사람과, 이에 반발해 주관적 감각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작은 들마루에서 피립을 얼굴에 올려놓고 낮잠을 취하는 사람과, 그 뒤에 거대하게 떨어지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그린 백유송의 ‘오수’는 원근법을 완벽히 파괴하였음에도 희대의 걸작으로 남았다.
시대가 흐르며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고려의 화풍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간 본연의 찬가, 아름다움을 재조명하는 화풍이 생겼으며, 빛과 색깔을 도드라지게 사용하는 인상적 화풍이 생겨나기도 했다. 찰나의 순간을 화폭에 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후의 산업혁명시대에는 비관적이고 어두운 그림이 생겨나기도 했고, 반대로 사진기의 등장에 경쟁의식이라도 불타올랐는지 훨씬 더 극도로 사실적인 화풍을 추구하는 화가들도 생겨났다. 이때의 매난국죽의 그림을 보면, 정말 이 난이 사진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정교한 묘사가 실로 일품이었다.
민선시중 이후, 국민국가의 시대가 도래해 정치가 피부로 점점 와닿는 순간부터는 훨씬 더 노골적인 풍자화와 상업화가 발달했다.
제국은 춘화에 대한 검열도 딱히 크지 않았으니, 예술의 자유로움은 그야말로 한도가 없었다.
이때엔 기술도 급격히 발전하는 순간이었고, 기술을 묘사한 소설도 크게 성장했으니, 어떤 자들은 이에 영감을 받아 동화 속 꿈나라를 그렸고 어떤 자들은 지구를 벗어난 인간을 그려보기도 했다.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여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미술을 추구하는 사람도 생겼다.
바야흐로 예술의 경계는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지인에게서 받은 서신을 다시 한번 펼쳐보았다.
공무원인 이산은 그의 친한 형이었다. 굉장한 마당발이기도 했다. 그는 예술계에 몸담은 자신의 친우를 기꺼이 소개시켜 주었다.
“여기인가?”
긴 비행에서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못해 피곤했지만, 그래도 시중의 비서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이 예술인이 정치인을 대체 어떻게 바라볼지는 모를 노릇, 그 설득의 유무는 오롯이 자신에게 달렸을 터다.
예술의 전당.
대중들에겐 가극장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옆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미술관과 예당에 속한 화가들이 머무는 거처와 화실들도 그만큼 유명했다.
정약용은 힐끗 미술관을 바라보았다. 한창 정선의 미술전을 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꽤 많이 들락날락했다.
예당 주인이 대체 얼마나 돈이 많은진 모르겠지만, 숙식이 해결되는 자리란 예술인들에겐 꿈과 같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굉장히 단정하고 깔끔할뿐더러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음악가나 가극인, 소설가 같은 다른 분야의 거장들과 토론이 가능한 자리였으니, 학자들이 연서궁을 갈망하는 이상으로 예술인들은 예당에 발을 들이밀길 원했다.
그는 안내인에게 길을 물어 마침내 한 화실의 앞에서 목을 가다듬고는 현관종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현관종을 몇 차례나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정약용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려는 찰나, 꾀죄죄한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뉘쇼?”
“이런 사람입니다.”
중년인은 명함을 보다 정약용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다시 문 뒤로 사라졌다.
“일없소.”
“저, 이산 형님의 소개로….”
“내가 아는 그 이산인가? 그렇다면 그 친구가 내가 웬만하면 정치인들이랑 안 어울린다는 걸 말해줬을 텐데.”
그것까진 말해주진 않았다. 정약용을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아니,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십쇼.”
중년인이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누군가는 권남도의 저 행동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계에 몸담으셨으니 그것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술인들은 전형적인 빨갱이몰이에 당할 인물들이 틀림없었다. 보통 불만 많은 이들일 수밖에 없었고, 제국이나 시대에 비판적인 그림이나 소설 같은 것들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제국이 그들의 목소리를 존중한 것은,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자정작용이라는 것이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모두 어그러지게 생겼다. 아마 예술인들이라면 모두가 동의할 것이었다.
잠자코 설명을 들은 중년인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뭐 어찌 되었든 나와는 무관한 분야요.”
“예?”
“그쪽에선 나보다 더 잘난 놈이 있으니, 그놈을 소개시켜 주겠소.”
노인은 저 복도 끄트머리의 방을 손가락질했다.
“그 친구는 저기 있을 거요. 그럼….”
김홍도라는 쌀쌀맞은 화가의 소개로 찾아간 화실은, 의외로 많이 북적였다. 약용은 화실의 팻말에 적힌 주인의 이름을 다시금 확인해야 했다. 신윤복, 여기가 맞는데.
“아니라니까.”
“맞다니까.”
안에는 화가 세 사람이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화실까지 공유할 만큼 친한 모양이다. 신윤복과 자크루이 다비드, 임 아이소포스는 그림 하나를 두고 열띤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