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대침체(2)
조부는 그 경기를 보신 뒤 거짓말처럼 다음 주 목요일에 돌아가셨다.
석규는 때때로 조부를 그리워했다.
또한 조부를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때 그 청백전의 일과 조부의 유언을 토대로 많은 대비를 했기에 지금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그 또한 앓는 소리를 내었을 것이다.
그분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겠지만, 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이 경험한 것의 한계 내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지의 무언가를 대비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석규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절망스러웠다.
“예견된 거지. 두메산골 노인네들까지 장롱 속 돈을 들고 올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어.”
누군가는 왜 과거의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자괴감 섞인 말을 하며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어떤 외국 귀부인은 사명에 고려가 붙는 회사들은 전부 다 매수했다더라. 그 회사가 뭘 하는지는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야. 그런데 놀라운 건 뭔지 알아?”
“…성공했지?”
“그래. 그녀는 재산을 5배 불렸어.”
그 말에 동료들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석규는 그것이 온전히 투자자들만의 잘못은 아니라 생각했다. 미개하고 멍청한 서민들이 돈을 들고 금융판에 온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 개개인의 경제적 판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그런 투자야말로 결국 기업과 경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동료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들의 수요가 주식시장의 호황을 의미하는 것은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사태를 악화시킨 주요한 요소는 기업들에게도 있잖나.”
석규는 말을 이어나갔다.
“효주건설과 중우실업의 분식회계는 말해 뭐 하겠어. 하지만 그 둘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도 구린 짓을 했지. 또 분식회계까진 아니더라도 애초에 너무 많이 일을 벌여 놓은 기업들도 있고.”
대학 동기 하나가 맞장구를 쳤다.
“빌어먹을 놈들… 항상 그런 놈들이 있다니까.”
금융위원회는 대단한 놈들이다. 연방거래위원회도 그랬다. 재무부와 검찰, 연방중앙수사국, 보안국도 그랬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토록 위세 높고 당당한 청신사들도 범 같은 인간들 앞에서는 괜스레 눈을 피했다. 잘못 걸리면 상당히 피곤해졌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인간이다.
그 말인즉, 사람인 만큼 업무처리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 땅에 정부 부처의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기업인이 많을까 하면 당연히 후자의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범죄자는 경찰보다 창의적이었다.
일신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결국 잡히더라도 자신의 범죄를 구상하는 입장과, 남의 범죄를 파악해야 하는 입장은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러니 사회가 발전하는 와중에도 저런 기업들이 나오지 않을 순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욕망에 차 범죄를 저질렀다. 나라가 아무리 열심히 그것을 단속한다 하더라도, 범죄자들은 자신이 들키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또 거대한 상승장이라는 상황은 대부분의 기업들에게 크고 검은 천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그 천으로 자신들의 상황과 음흉한 속내를 숨겼다. 효주와 중우는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불룩 솟은 암 덩어리를 숨겨 놓았기에 들킨 것이지, 적절히 눈을 가린 다른 기업들은 아직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시장은 하락장으로 돌아섰고 그들에게 주었던 크고 검은 천을 회수해가기 시작했다. 그 천이 없어진다면, 모두는 자신들이 숨겨 놓은 크고 작은 치부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다.
예상대로 그 처참한 민낯은 파국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래도 어째. 뭐 그럼 내버려 둬? 그들은 장약에 불과할 텐데?”
분식회계를 저지른 두 회사가 도산하면, 그 충격이 사회 전반에 확산될 것이다.
또한 고위험 고수익을 추구한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장기튀김처럼, 한 장기짝이 쓰러지며 다른 장기짝을 덮치는 상황이 일어난다는 소리였다.
친우의 반문을 들으니, 금융인으로서 석규는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나라가 그들을 구제해야 하는가?
대침체의 전조 이후, 정오섭 시중은 의외로 일 처리가 굉장히 빨랐다. 그는 최대한 수습하려 애썼다. 곧바로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상황이 완만히 하향곡선을 띠고 있었다.
또한 고려는 국가의 기반이 굉장히 탄탄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쓰러져 골골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침체는 모두가 공포에 질린 공황으로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고려는 진작부터 은산분리로 상업은행의 건전성을 챙겨놓았고, 금융시장의 이 충격이 민간에 최대한 전달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또한 의료보험과 공공부조는 사람들의 재산이 박살 나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허무하게 죽는 것은 방지했다. 투자 이후 절망에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들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어어 하다가 흐름에 떠밀려 쓰러진 사람들에겐 한 차례 그물을 펼쳐 받아주는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그것이 사회 안전망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저런 회사들, 그야말로 고려의 경제를 이끄는 회사들의 도산을 막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히 큰 문제가 될 것이었다. 어쩌면 침체의 두 번째 시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석규는 다시 의문이 들었다. 이번 침체 속, 저들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막대한 국가지원을 해준다면, 저들은 무슨 교훈을 얻겠는가? 고위험 고수익을 추구한 자들은 국가가 펼쳐준 그물 위에서 사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저위험 고수익이 아니었을까, 그리 오만하게 판단하지 않을까.
다른 저위험, 저수익을 택한 기업들을 깔보면서.
내실을 다진 기업들도 불만스러울 것이다.
시장경제란, 시장 구성원들이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도 그에 걸맞게 돌아가야 했다. 석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마불사라고 했지.’
지금으로부터 조금 지난 일이지만, 명성은행의 옛 회장 견충비라는 자는 그런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고려 정부가 큰 말을 잡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사실이다.
홍진 사건이라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에도 명성과 제일 자체는 존속했다.
물론 회장 견충비는 교도소에서 자살했고 그와 유착관계가 심한 자들도 무기형을 선고받았지만, 정부로서는 명성은행과 제일계열을 모두 단번에 박살 내진 못했다. 그곳에 근무하거나 고용된 애꿎은 사람들을 전부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순 없었다.
먼 옛날 돌솜사태 땐 산업 자체가 박살이 났지만, 그때엔 다른 회사들이 박살 난 산업의 근로자들과 직원들을 채용해주었다.
무슨 자발적인 신비로운 손이 작용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특히나 회사들의 덩치가 커진 지금은 거대회사가 도산한다면 고통받을 직원들의 규모는 훨씬 더 커진 상태였다.
홍진 사건과 연관된 회사들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물론 명성과 제일의 임원들은 대부분 갈렸고 과거의 위상을 되찾기까진 요원해 보였지만.
죽은 견충비 회장도 자신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면 의기양양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맞는가? 석규는 의문을 품었다.
이제 회사들은 대마불사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사원들과 고용인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위험에 빠진 이유는 그들의 사업 확장이 너무 문어발식으로 과다했고, 또한 위험회피전략이 허술했기 때문인데 도리어 정부에 떼를 쓰는 꼴이라니.
* * *
석규는 동료들과의 2차 모임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는 한발 빠르게 나가서 먼저 동료들 것까지 계산을 끝마치고는 작별하고 귀가했다.
오늘 밤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딸들을 보기로 했다.
요즘 유행하는 탁상오락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건물주 놀이였다. 금융적 사고를 길러주기엔 꽤 괜찮아 보였다. 아들과 딸도, 심지어 아내도 그걸 좋아했다.
석규도 가정을 이룬 장년인데 아직 그런 것에 재미가 있는 것을 보면 동심이란 영원할지 모른다.
‘오늘은 괜히 열심히 해서 울리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때, 집 앞 골목에서 누군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석규는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해 보였다. 아무리 술을 좀 들이켰다 해도 일반 보행자와 자신에게 목적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구분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저치는 분명히 자신에게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지? 석규가 사는 곳은 청해 부촌이라 치안이 상당히 좋았다.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도 잘 없었다. 애초에 청해시경은 시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능한 편에 속하니, 청해시 자체가 범죄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 옛날 이곳에서 어떤 강도가 이 부촌에서 성채마냥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옛 통령 관저(실제로 과거엔 자그마한 요새로 쓰였다 한다)를 습격했다가 말 그대로 땅에 박혀버린 경우가 있었다. 그 이후에 이곳은 강도들에겐 일부러 자신의 삶을 마감하러 가는 곳 취급을 당하고 있다 하던데.
‘네놈이 아무리 흉악한 놈이라 해도, 소리를 크게 지르고 버티다 보면 경관이 달려올 것이다…!’
매일매일 일에 파묻혔던 터라 몸이 썩 건장하지는 않았지만, 석규도 사내의 대범함이 있었다.
그는 몸의 긴장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쇼?”
“유석규 님 맞으십니까?”
이름까지 안다고? 이건 좀 불길한데. 석규의 이름도 금융계에선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럴 거면 걷는 대신 짧은 거리라도 기사를 불러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이 현명했던 것일까.
석규는 한층 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소만?”
하지만 그자는 악의가 없는 것을 보이고자 함인지 일단 꽤 정중하게 허리부터 숙여 보였다.
보통의 강도들은 저러지 않을 것이다. 석규는 경계심이 아주 살짝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의문의 사내는 이윽고 천천히 상의 두루마기의 가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꺼냈다.
안주머니였으면 흉기로 오해할 만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 현명해 보였다. 사내는 석규에게 초대장 하나를 건넸다. 그는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재질 자체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석규와 같은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초대장입니다.”
“어디로 초대하는 겁니까?”
“소소한 모임입니다.”
“난 굉장히 바쁜 사람이오. 다니는 모임도 많고. 또 오늘도 모임에 갔다 왔지. 필요 없…….”
“이사님의 장인께서도 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내의 말에 석규는 초대장을 다시 살펴봐야 했다. 어떠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다만 단순한 그림이 있었다. 삼각형의 도형 안에 크게 뜬 눈(섭리의 눈)이 있었다.
* * *
깊고 깊은 동굴.
상민은 홀로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창백한 전등이 가끔 깜박였다.
이곳의 위치는 남려 중부 동해안 고원지대.
예전 삶에 빗댄다면,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의 중간 어딘가일 것이다.
해안가와도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다. 올라오는 길은 좀 힘들었지만.
상민은 지하철을 뚫을 당시 등장한 기구들을 이용해 환태평양 조산대와 기타 지진대를 피해 안전한 곳을 골라 거대한 지하 동굴을 파냈다. 브라질고원은 지리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적절한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방공호라는 개념이 아직 제대로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아도 무방했다.
본래 방공호는 겁쟁이들의 쉼터였다. 그와 같은 상남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방공호는 독재자들이나 뭔가 구린 사람들의 유일한 보루이기도 했다. 사실 그건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민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가 딱히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자금을 투자해 이런 곳을 만들었다.
‘내 목숨은 몰라도, 자산은 노릴 수 있지. 모은 것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곳이 필요하다.’
이곳의 입구와 지상은 삼엄한 경계지역이었다. 군사기밀시설로 분류되었으며, 주변에 접근할 수 없게 철책을 두르고 있었다.
방공호 안쪽도 대단했다.
그야말로 첨단 시설의 집약체였다. 전기 공급과 환풍 등은 항상 최적의 상태를 유지했다.
또 이곳의 관리를 위해 척척거인인지 지성거인인지 하는 덩치 큰 연산기도 몇 개나 있었다. 그 기물들은 주기적으로 최신형으로 바뀌었다. 대신 근무하는 사람은 최소한이라 기밀을 유지하기 쉽게 만들었다.
입구에서부터 안내를 받아 동굴로 들어가고, 또 그 동굴에서 몇 군데의 보안을 통과해 내려가면, 마침내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곳이 나온다.
그는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마지막 관문, 거대한 철문에 도착해 마침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안쪽, 거대 보관소에는 그가 모은 물건들이 항시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거쳐온 관문들과 달리 이곳에는 문을 열어줄 만한 관리자도, 혹은 기계도 없었다.
이 단순하고 중후하며 투박한 철문은 그저 손 모양의 작은 흠 두 개만 있을 뿐이었다.
상민은 그곳에 손을 집어넣고 좌우로 벌렸다.
피가 쏠려 한껏 도드라진 그의 근육에 입고 있던 옷이 찢어졌다. 상민은 거대한 철문을 순수한 근력으로 밀어냈다.
그가 넣은 마지막 보안은 실로 단순했다. 그의 힘, 그 자체였다. 기계를 이용하면 다른 이들도 열 수 있겠지만, 그 전에 그 기계가 지금까지의 통로를 잘 통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 덜컹
그는 마침내 그의 창고에 도달했다.
창고라 하면 단어 자체론 아주 볼품없어 보였지만,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황금의 산.
거대한 철제 틀로 구역만 겨우 나눈 곳, 이 길고 거대한 보관소에는 금괴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재물들은 금괴뿐만이 아니었다. 보잘것없는 조약돌마냥 상자 안에 대충 모아놓은 보석들도 빛에 찬연히 번쩍였다.
환기가 얼마나 잘되는지 먼지조차 내려앉지 않았다.
사람이 고개를 들어 한참을 바라봐야 할 거대한 재물들.
이 모습은 뭐라 서술하기 힘들었다.
사람은 본래 이해할 범위를 넘어서면 표현하기 어려워했다. 황금빛 찬란함이 가득 들어찬 이곳은, 오히려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곳은 제국연방중앙은행의 금고도, 황실의 금고도 아니다.
그 둘의 규모도 범인은 상상하지 못할 규모일 테지만, 지금 이곳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곳은 그 둘의 규모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어떠한 인류, 어떠한 존재도 이 정도의 재물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끝까지 말을 타고 달린 테무진도, 중원을 일통한 영정도, 처음으로 유럽에 우뚝 선 샤를마뉴도, 정복 자체만으로도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한 알렉산드로스 마저도 불가능했다.
누가 이 광경을 구현하겠는가. 이것은 필멸자로서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수준이 아니었다.
오직 상민만이 가능했다.
그러니 사도들은 이곳을 황금산, 용의 재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