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대침체
개천 511년(1787) 2월 3일.
[실물경기 하락세, 12주간 지속]
[대내 종합금융지수, 큰 낙폭.]
[사해신용평가사, 제국 자체 신용점수 가1에서 가2로 한 단계 하락. 안규현 회장, ‘연내 물가 악재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한 번 더 하락 가능성 높아.’]
[‘우리는 전례 없는 침체의 시기에 들어섰을 가능성이 높다.’ 청해대학 경제학부 아담 스미스 교수의 발언.]
[강준표 제국연방 중앙은행장, 통화정책과 관련하여 이덕무 위원과 대립.]
[오는 10월 10일 진행되는 중앙은행, 재무부, 상무부, 노동부, 금융위원회, 연방거래위원회의 중요 요인들이 모이는 정례경제회의 주목해야.]
[국내 물가를 올리는 주요 이유, ‘국제 긴급 식량 구호’, 과연 좋은 정책인가?]
[일부 구호 수혜국들, 지원받은 곡물의 양이 적다고 항의 이후, 강화와 잉글랜드 주도로 금태환. 정오섭 시중, ‘현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며, 몹시 유감스러워’. 사석에서는 큰 분노 표출.]
담쟁이거리는 스산했다.
길거리엔 버려진 신문이 나풀거렸다.
음식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장사가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지원안에 의해 치솟은 곡물가는 물가상승을 불러왔고 외식을 억제했다. 가게들은 큰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묵은 파김치처럼 축 처진 채로, 사람들이 새로 지은 마천루에서 줄줄이 빠져나왔다. 청해 구도심도 재건축에 들어가 담쟁이거리는 이제 붉은 벽돌과 그 위를 뒤덮은 푸른 담쟁이넝쿨과는 많이 멀어졌지만, 청신사들은 차라리 그 시기가 그리웠다.
그때에는 적어도 확신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청신사들은 하루 종일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국내는 물론이고 각국의 수많은 정보가 담긴 광문사 전보 종이와 신문을 찢어대다가 겨우 하루 일과가 파하자 갓끈을 부여잡고 주점으로 향했다.
식당은 많이 문을 닫았더라도, 주점은 아직 괜찮은 모양이다. 술 없이는 버티지 못할 세상이다. 식량으로 술을 빚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은 기후와 경제, 정치의 문제였다.
“어후.”
“끄으응.”
자리에 앉은 청신사들에게선 신음이 절로 나왔다. 기진맥진하는 일들의 나날이었다.
물론 청신사들의 일과는 호황기 때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금융 전선의 최선봉에서 서 달려 나가는 이들의 하루 일과가 결코 만만할 리가 없었다. 하루 5시간도 못 자고 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땐 돈을 번다는 자각이라도 있었다. 흥분성 내분비물질이 온몸을 각성시켜주기도 했다. 보람을 느낄 땐 일의 고됨도 감내할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돌아가는 것을 보아하니, 심상치가 않아.”
“죽겠네, 정말.”
자리에 앉아 주모를 부른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탁주를 입에 대었다. 보통 값이 저렴한 탁주는 돈 많은 청신사들이 애음하는 술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들은 농담이 아니라 돈이 없었다. 자신들도 그랬고, 투자 회사의 돈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경우가 괜찮았다. 이미 몇 명의 동료들은 권고사직을 받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알짜배기뿐이었다. 그럼에도 경기는 계속 나빠지고, 회사들은 더더욱 감축을 시도했다.
“우리 회사는 건물 건축비를 다 갚지도 못했어. 큰일이야.”
“도산 위기에 놓인 기업들 중 일 할만 박살이 나도, 우리도 파산이라고.”
이런 경기는 모두의 시련이었다. 피해갈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물론 반쯤 죽은 자, 몹시 아픈 자, 그렇게 큰 고통을 느끼진 않는 자는 구분되긴 했다.
유안투자은행의 유석규 이사는 동료들이 끙끙대는 와중에도 별말 없이 안주를 집어 먹었다. 가식적으로 위로하는 것보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현명할 때가 있었다. 유석규는 자신이 할아버지와 장인어른마냥 금융 천재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바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조금씩 현금과 현물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통증은 피할 수 없지만, 견딜 만했다.
‘이걸 예지하신 겁니까? 할아버지.’
* * *
유안투자은행의 창업주 중 한 명인 유수원은 늙으며 청각이 상실된 와중에도 손자, 유석규의 도움을 받아 죽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업무를 보았다.
그는 화가로서의 인생을 택한 아들 대신 금융계에 투신한 석규를 직접 가르쳤다.
세계 경제를 보는 안목과 정치와 역사를 보는 안목까지. 금융인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지식을 쌓아야 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금융인이었다. 농암 유수원의 이름은 그야말로 부자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 심지어 외국의 왕귀족도 그와의 환담 시간을 구매해보기 위해 매달릴 정도였다.
당연히 조부가 석규에게 알려준 모든 것은 금과옥조와 같았다.
하지만 조부의 마지막 유언은 실로 소름이 끼쳤다.
조부께서는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석규에게 앞으로 다가올 큰 불황에 대비하라 하셨다.
― 석규야. 사람들은 내가 온전한 내 능력만으로 성공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란다. 대부분의 경우 고려의 시장이 성공했던 게야.
용솟음치는 5세기, 바보 천치라도 돈만 있다면 어떻게 자산을 불려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수원이 프랑스를 이용해 자신의 기반을 홀로 다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경제 흐름을 잘 살펴 주항자동차 등의 우량 기업에 투자해 남들보다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긴 했지만, 당시 세상을 지배한 어떠한 ‘흐름’이 없었다면 이만큼 거대한 부를 쌓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그것은 석규의 처가인 이아코보스 가문도 마찬가지일 터다.
― 시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떠한 단서들은 있단다. 나는 반세기가 넘도록 경제 흐름을 살펴보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지금의 상황이 실제 가치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할아버지. 지금은 한창 활황이잖아요?
― 너는 불황을 겪어본 적이 있니?
― …….
노인은 자신부터 손자까지 팽창하는 경제의 혜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풍선은 어느 순간 터진다.
유난히 정정하던 화요일, 유수원은 회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석규를 불러 말했다.
― 날 축구장으로 데려다 다오. 마지막으로 청백전을 꼭 보고 싶구나.
평소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던 유수원은 손자마저도 평사원부터 일을 배우도록 했었다. 그 이후로도 딱히 업무적 면에서 큰 도움을 준 경우도 없었다.
물론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휘광만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살벌한 금융계에선 실적이 없으면 대부분은 도태되기 마련이었다. 석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도를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날 수원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사적인 일을 손자에게 부탁했다.
누구의 말인데 거역할 수 있겠는가, 석규는 부리나케 조부를 모셨다.
업무 도중의 일탈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손자는 오랜만에 즐겁게 축구를 보러 갔다.
“회오리감자 하나만 사 다오.”
“네.”
석규는 토마토와 건락 양념이 뿌려진 회오리감자를 가지고 왔다. 수원은 그것을 받아들더니 갑자기 즐겁게 웃었다.
“독일의 선대왕은 이 음식을 굉장히 좋아했지. 무우궁에서 이것을 먹고 놀란 기억이 나는구나.”
“그렇습니까?”
수원은 소소한 일화들을 말해주었다. 청각 상실 이후 말이 어눌해지고 일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은 수화로 전달했지만, 석규는 충분히 잘 알아들었다.
자신의 조부야, 당연히 프리드리히 2세도 만나볼 정도의 거물이었다.
오히려 그가 먼저 만남을 청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만남 이후 유안투자은행과 도이치 왕실이 연관된 도이체방크가 협력관계를 맺었으니까.
물론 도이치의 중앙은행은 라이히스방크고 도이체방크는 민간 투자은행이었지만, 그 투자은행이 호엔촐레른―합스부르크의 내탕금을 굴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서서히 함성 소리가 들렸다.
운동장에서 몸을 풀던 선수들이 다시 경기장 안의 탈의실로 들어갔다. 곧 경기가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경기장 안에는 사람들도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고려에서 축구의 인기란 타 종목들이 감히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고, 특히나 가장 유서 깊고 강한 구단 둘이 맞붙는 청백전은 더더욱 그랬다.
현재 대부분의 축구 경기는 토요일에 한 번씩 열렸다.
4일을 쉬고 하루를 경기하는 셈이다. 이는 선수들 몸 상태를 보전하기 최고의 일정이었고, 이동 시간도 고려한 상태였다.
토요일 우천으로 인해 미루어진 이번 청백전은 일정상 다음날인 화요일에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넘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빗물이 더 많이 왔다면 축구장이 뒤집혔을 거라 아예 계절의 말로 미룰 수밖에 없었겠지만, 되도록 일정을 지키는 것도 필요했다.
지역 연고지 개념의 축구 구단들은 제국전이 열리지 않는 이상엔 가까운 지역끼리 싸웠지만 그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 전용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리는 일이 빈번했다.
때문에 창강대평원을 예로 들자면, 경기권보다 더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구단들은 휴식기에는 연고지에서 훈련을 하다 계절이 시작하면 아예 경기권에 있는 자신들의 부경기장에서 일정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말이 연고지지, 연고지 사람들이 못 보는 구단들도 많았다.
물론 연고지 사람들은 위치상 매 경기 장거리 원정 경기를 치르며 허구한 날 얻어터질 바에야 그냥 거기서 싸워서 이기고 돌아오라는 입장이 많았지만, 경기장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구단의 재정 악화로 이어져 협회로부터 지역구단 발전보조금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다만 무전기의 발명 이후에는 중계권료라는 부수익이 생기니 시골 구단들에게는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곧 시작하겠구나.”
“물이라도 가져올까요?”
“맥주로 부탁한다.”
평소엔 주치의의 엄격한 식단 관리를 철저히 따르는 할아버지였다. 이렇게 스스로 술을 드시고자 하시는 경우는 없었기에 석규는 의외의 눈빛을 보냈지만 군말하지 않고 맥주를 사 왔다.
할아버지는 감자와 맥주를 들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 구단 모두 이번 제국전에 출전하는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지만, 백호와 청룡 어느 구단에서도 서로에게 지기 싫어했으니 경기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하게 흘러갔다. 어제 비가 와서 잔디가 미끄러운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점수는 벌써 3점이나 나왔고 심판은 시도 때도 없이 호루라기를 불어야 했다.
“벌차기를 하는 모양입니다.”
“좋아, 따라잡을 수 있겠구만. 멍청한 흰둥이들… 과격하기만 하지, 공 찰 줄을 몰라.”
“하하. 할아버지. 그 단어는 좀…….”
“아 그렇구나. 이아코보스가 들었으면 화를 냈겠구만. 하지만 내 인종차별하는 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두거라.”
석규는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좋아하시니 기쁠 뿐이었다.
그물문 가까이 넘어졌던 청해구단 소속 선수가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다른 선수가 공을 잡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황태풍이냐?”
“아무렴요. 황태풍 말고 누가 찰까요.”
몇 대째 같은 구단을 응원하는 조손은 축구 지식에 해박했다.
황태풍이라는 선수는 대단히 뛰어난 벌차기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넣을 겁니다. 몹시 뛰어난 선수인 것도 맞지만, 벌차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넣으니까요.”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모든 것을 장담하진 못해.”
그때, 누군가 조손의 대화를 끼어들었다.
뒤에 앉아 있던 어린 중학생들이었다. 황태풍의 축구복을 입고 있었다. 한눈에 딱 봐도 열성 지지자인 소년은 유수원의 어눌한 말을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황태풍은 분명히 넣을 거예요. 항상 넣어 왔으니까요.”
예절 바르지만, 무언가 발끈해 보였다. 어차피 같은 팀 지지자들이라 석규는 그들을 다독인 후 다시 관람을 시작하려 했으나, 수원이 손자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래? 그럼 내기하겠느냐?”
“정말요? 할아버지가 후회하실 텐데요?”
하지만 노인은 완고했다.
중학생들도 끄덕였다. 그들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코 묻은 돈을 꺼냈다.
수원도 지갑을 꺼내 큰 액수가 적힌 지폐를 꺼냈다.
큰 액수의 금액에, 중학생 무리들이 동요했다.
내기의 본질은 같은 금액을 내는 것이 맞았다. 그들은 십시일반하여 돈을 모았다. 배당은 낸 돈에 비례할 것이다. 중학생이니 그 정도 산수는 알아서 할 터였다.
“아니, 넣는다니까!”
“그래도…….”
“답답하네, 진짜. 계속 넣어 왔으니까 넣겠지. 너 황태풍이 못 넣는 거 봤어?”
“그건… 못 봤어.”
“그럼 이 형 말 들어, 임마. 우리 여기서 거하게 벌고, 오징어튀김이나 사 먹으러 가자.”
“…알았어.”
수원은 흥미롭게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학생들의 내깃돈이 그가 건 금액에 못 미쳐도 대충 진행하려 했으나, 한 똘망똘망해 보이는 중학생이 다른 뒷자리에 있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학생들도 선동하여 돈을 모으기 시작하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학생들이 의기투합을 완료했는지 수원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중학생들은 불안한 눈으로 노인의 손에 달린 용돈 뭉치를 바라보았다.
계약은 체결되었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었다.
― 들어갔습니다! 2대 2로 팽팽해지는 경기!
쩌렁쩌렁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중학생들은 신난 군중 속에서도 유난히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대었다.
“용돈을 주시려면 그냥 주시지, 하핫!”
수원은 그저 껄껄 웃으며 약속대로 돈을 주었다. 아니, 계약보다도 돈을 더 얹어 주었다. 떡 벌어지는 액수에 학생들은 절로 허리를 굽혔다. 행여 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지 않을까 조부의 말을 전달하며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석규도 웃음을 흘렸다.
“오늘 참 좋은 관람을 했구나.”
경기가 끝나고 마침내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자, 유수원은 돌아가는 길에도 그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한참을 중얼거리며 경기를 복기했다. 석규는 조부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석규는 할아버지가 홀연히 떠날 것 같다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정정하셔서 괜찮을 것 같지만, 당신께서는 무언가 정리를 하시는 느낌이었다. 오늘 경기 관람도 무언가 그 연장선상에 있어 보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처럼 할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생겨난 것일 터. 그는 앞으로도 이런저런 추억을 만드는 데 소홀히 하지 않기로 했다. 업무도 업무지만, 효와 가족은 더욱 중요했다.
“아까 그 벌차기 말이다.”
“네, 황태풍은 참 잘 찬단 말이에요.”
“아니, 그 말이 아니야. 내 그 선수가 잘 차는 건 오래전부터 봐 왔다. 그놈이 꼬꼬마로 유소년 구단에 있었던 때부터.”
“……네.”
조부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물론 벌차기는 실력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실패할 가능성이 있지.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잘못 생각하곤 한다. 성공 가능성을 터무니없이 크게 평가하곤 하는 것이지.”
수원은 마치 오늘의 경기를 강의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석규는 잠자코 들었다.
“통계적으로 본다면, 벌차기 성공률은 6할이 살짝 넘었다. 물론 공이 빠르고 가벼워지면서 그 확률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만, 그럼에도 무려 3할 이상의 실패율을 자랑한다는 소리야.”
황태풍처럼 잘하는 선수는 그 실패율이 2할 밑으로 갈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실패율이 0이 되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태조께서 강림하셔서 직접 차지 않는 이상엔 불가능하다. 허나 사람들은 마치 그 실패율이 0에 달한다고 생각하지. 그래, 이를 뜨거운 발 오류라 불러야 하겠구나.”
“도박사의 오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네요.”
“그래. 항상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조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하지만 잃으셨잖아요.”
“그래, 그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돈을 잃었는데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잖느냐. 애들의 마음을 지켰으니.
…허나 내가 이겼다면?”
그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겠지.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께 회초리로 엉덩이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경제 상황이라면?
그의 승리는 승리가 아니었다. 파국의 전조였다.
수원은 그렇게 말했다. 석규는 무거워진 조부의 분위기에 어쩔 줄 몰랐다.
“지금 내 말을 기억해 두거라.
황태풍의 경우에는 아주 좋은 선수라 비유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기업으로 따지면 주항자동차나 혹은 일전일지도 몰라. 항상 승승장구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세상엔 건전한 기업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도 많다. 수준 미달인 기업들에게도 너무 과도한 투자가 들어갔어.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생각한 것만큼 대단했기에 자신들이 성공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천재는 상승을 욕망하고 있는 시장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장의 욕망이 꺼질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황태풍이 골을 넣지 못하는 경우도 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 중학생들은 비록 푼돈이라 해도 자신들에게는 너무 소중한 한 달 용돈을 전부 걸었어.
위험 회피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다.
이 할애비가 그 돈을 받지 않을 거라는 건, 그 애들 입장에서 알 수 없겠지.
청백전 입장권도 굉장히 비싼 마당에 그 용돈까지 전부 다 까먹었다면, 부모의 입장에선 속이 타들어 갔을 게다. 잘사는 부잣집 애들로 보였지만, 그래도 부모 입장에선 분명히 화가 났을 게야."
“…….”
“그리고, 이번 내기와는 달리 거품이 꺼진 시장에서 패배하는 경우엔 마땅한 승자란 존재들도 없을 게다.”